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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약 --------------------/요한일서

요일 4장 17-21절(하나님의 사랑은) - 이건기

by Preacher 2023. 7.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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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일4장 17-21

하나님의 사랑은

이건기 목사 2018-01-14

다운교회 http://www.downchurch.org/

 

지난 말씀에, 성령님으로 알게 되는 것을 말씀드렸다. 성령님은, 하나님이 우리 안에 거해서, 우리가 하나님 안에 있음을 알게 한다. 성령님은, 예수님을 보낸 이유를 알고, 믿고 시인하게 한다. 성령님은, 하나님의 사랑을 경험하고, 사랑하며 살도록 만든다고 했다. 오늘 말씀은, 하나님의 사랑과 관련해서, 3가지를 말씀한다. ① 최후 심판의 날에도, 담대함을 갖게 한다. ② 하나님의 사랑은, 심판의 두려움을 내어 쫓는다. 두려워하는 자는 하나님의 사랑을, 온전히 이루지 못한 자다. ③ 하나님의 사랑은, 사랑하게 만든다.

 

1. 하나님의 사랑은, 최후 심판 날에 담대함을 갖게 한다(17).

 

“이로써 사랑이, 우리에게 온전히 이루어진 것은, 우리로 심판 날에, 담대함을 가지게 하려 함이니, 주께서 그러하심과 같이, 우리도 이 세상에서 그러하니라.”

 

‘이로써’는 앞서 말한,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한, 십자가의 사랑을 말한다.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해서 우리 죄를 해결하려고, 인간으로 와서, 우리 죄를 위해, 죽고 부활했다. 생명을 바쳐 사랑한 그 사랑이 우리 안에서, 온전히 이루어졌다(테텔레이오타이). ‘텔레이오오’(성취하다, 완성하다, 완전하게 하다)의 현재 완료형으로, 어떤 동작이 현재에 이미 완료되고, 그 결과가 현재에도, 남아 있다는 말이다.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요19:30中) “…다 이루었다.”고 하였다. 이처럼 하나님의 구원은 온전하다. 거기에 우리가 무엇인가를 섞을 필요가 없다.

 

그렇기에 하나님의 온전한 사랑을 경험한 우리는, 예수님의 재림에 있을 심판 날에, 담대함을 가질 수 있다. ‘담대함’(파르흐레시아)은 ‘파스’(모든, 어떤) + ‘흐레오’(붓다, 말하다) = 모두 말하다. 특별히 이 단어를 그리스도의 재림과, 연관시켜 사용한다. 마지막 심판에서, 당당하게 모두 말할 수 있다. ‘심판의 날’(크리시스)은, 그리스도가 심판주로, 세상의 모든 사람들을 심판할 때에, 하나님의 사랑을 이룬 성도는 주님 앞에서, 담대히 설 수 있다. 이러한 담대함은, 하나님의 사랑을 온전히 이룬 자에게, 나타나는 모습이다. 죄가 있다면, 당당할 수 없지만, 예수님으로 죄를 용서받았기에, 당당할 수 있다. 마지막 심판대 앞에서, 주님은 우리에게 무엇을 물을까? ‘우리가 지은 죄에 대해, 말할 것이다.’ 또 ‘예수 그리스도를 사랑하는가? 네 이웃을 네 몸같이 사랑했는가?’라는 질문할 것이다. 따라서 주님의 사랑을 믿고, 주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한 자, 곧 사랑을 온전히 이룬 자들은, 담대할 것이다.

 

‘주께서 그러하심과 같이, 우리도 이 세상에서 그러하니라.’ 사람들은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 목숨을 버릴 수 있다고 말한다. 그것은 죽음에 대한 두려움이 없어서가 아니라, 사랑의 힘이 두려움을, 잊게 만들기 때문이다. 진심으로 사랑한다면, 목숨을 버리는 것조차, 두려워하지 않는다. 성도들이, 세상 사람이 무서워 떠는 심판 날에도, 담대히 설 수 있는 이유는, 성도가 주님을 닮았기 때문이다. 자신을 준 사랑을 믿기에, 심판에 대한 두려움이 없다. 인간은 나약한 존재이지만, 담대해질 수 있다. 권력과 돈과 같은, 기득권에 의해 담대해지는 것이 아니라, 사랑으로 담대해진다.

 

우리 안에서, 하나님과 이웃에 대한 사랑이, 온전히 이루어질 때 담대해진다. 성도의 담대함은, 세상 사람들의 담대함과는 다르다. 성도는 세상 법칙에 좌우되지 않는다. 사랑으로 담대해 진다는 확신은 예수님의 삶을 통해, 확신할 수 있다. 예수님은 세상에서 담대하게 살았다.

 

예수님은 말씀으로, 무리를 가르칠 때에, 권위 있는 자와 같고, 서기관들과 같지 않았다(마7:28-29). 예수님은 권위자들의 눈치를 살피거나, 그들이 듣기 좋은 말들을 하지 않았다. 미움을 받았고, 배척을 당하고, 고난을 받으면서도, 하나님의 뜻을 세상에 선포했다. 이 담대한 선포는, 죄인에 대한 사랑 때문이었다. 죄인들과, 가난하고 소외된 이들을 위해, 일상의 편안함을 버리고, 고난의 길을 걸었다. 예수님 안에서, 사랑이 완전해졌기에, 이 사랑이 담대함으로, 나타났다. (요16:33中) “…세상에서는 너희가 환난을 당하나,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했다.

 

예수님은 세상을 이긴 주님이고, 우리는 주님에게 붙은 한 몸이다. 따라서 우리도, 세상을 이길 수 있다. 문제는 세상을 두려워한 나머지, 거룩한 자존감마저 상실하는 것이다. 담대함은 예수님을 따르던 제자들에게도 나타났다. 그들이 가는 곳에, 충만한 생명력이 나타났고, 하나님의 살아계심이 드러났다. 예수님은 부활하고 승천하기 전에, 성령님이 임할 것을 약속한 후에, 마침내 오순절에 성령 강림과 함께, 이 약속이 성취되었으며, 그 결과 성도들의 몸은, 살아계신 주님이 함께하는 표적으로, 채워지기 시작했다. 주님을 위해, 목숨을 버리는, 순교도 할 수 있었다.

 

2. 사랑에는 두려움이 없고, 두려움을 쫓아낸다(18).

 

“사랑 안에 두려움이 없고, 온전한 사랑이 두려움을 내쫓나니, 두려움에는 형벌이 있음이라, 두려워하는 자는, 사랑 안에서 온전히 이루지 못하였느니라.”

 

‘두려움’(포보스)은 심판에 대한 공포와, 두려움을 뜻한다. 하나님의 임재를 통한, 하나님의 사랑을 가진 자는, 심판 날에 담대함을 가질 수 있다. 이 담대함을 가진 자는 심판 때, 죄인들이 갖게 되는, 하나님에 대한 두려움을 갖지 않게 된다. 오히려 영적 담대함을 소유하게 된다. 두려움은, 형벌이 이미 시작되고 있다는 증거다. 아담이 죄를 범했을 때, 아무도 그에게, 무엇이라고 하지 않았지만, 바람소리에도 떨면서, 하나님의 낮을 피하여, 동산 나무 사이에 숨었다(창3:8). 가인이 아벨을 죽인 후에, 무릇 자신을 만나는 자마다, 나를 죽이겠다고 했다(창4:14).

 

아이들은 부모가 싫어하는 일을 하거나, 거짓말을 하면, 괜히 행동이 우물쭈물하면서, 눈치를 본다. 그러므로 두려움은, 떳떳하지 못한 것과 연결되었다. 제대로 해야 할 것을, 올바르게 하지 못했을 때 느끼는 마음의 상태를, 두려움이라고 표현했다. 이런 감정이, 우리 신앙생활에서 자주 등장한다.

 

주님 앞에 올바르게 살고, 주님 말씀에, 순종하는 사람들은, 두려워하지 않는다. 장래 일에 대하여, 과도하게 염려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두려움은, 불순종의 결과로 생기는 불안과 염려이며, 신앙생활이 즐겁지 않게 만든다. 늘 불안하기에 두렵고, 그러면서도 뭔가 내려놓지 못해서, 불편하다. 옳지 않은 일이기에, 포기해야 하는데, 포기하지 못하면, 심판에 대한 두려움이, 점점 커져만 간다. 순종하지 못해서, 두려움만 커져가는, 안타까운 신앙생활을, 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그래서 불안함에 떠는 아이들처럼, 하나님을 두려운 분으로, 늘 노심초사하면서, 주님을 따르지 않기를 원한다.

 

따라서 두려움을 쫓아내고, 담대히 신앙생활 하는 방법을, 배워야 한다. 사랑 안에 두려움이 없고, 사랑은 두려움을 내쫓는다. 두려움에는 형벌이 있기에, 두려움을 내쫓는 방법이 있다. 사랑이 두려움을 내쫓기에, 이 방법을 확실하게 배우기 바란다. 두려움의 반대는, 당당함이다. 평안과 기쁨의 감정이다. 무엇을 제대로 했을 때에 느끼는, 뿌듯함을 말한다. 아이들은 부모님이 하라고 한 일을, 제대로 했으면, 부모가 집에 오자마자, 달려 나와서, 엄마 아빠, 나 이것 다했다고 자랑하는데, 이 마음이 바로, 담대함이다.

 

담대함은, 말씀에 순종한 사람이 누리는, 심령의 평안이다. 이런 사람들은 신앙생활의 기쁨이 있다. 거리낌이 없고, 두려움이 없으니, 대인관계에서 아름답다. 우리가 하나님의 사랑을 알고, 믿었을 때, 심판 날에 하나님 앞에서, 담대함을 갖게 된다. 우리는 두려워 떠는, 신앙생활을 할 수도 있고, 반대로 담대하고, 기쁨 넘치는 신앙생활을 할 수도 있다. 어떤 차이가, 두려움과 담대함 사이에 있다. 그 차이를 배워야 한다. 정확하게 담대한 신앙생활, 평안한 신앙생활, 기쁨 넘치는 신앙생활을, 어떻게 할 수 있는지를 배워야 한다.

 

어떻게 두려워하지 않고, 담대할 수 있나? 형제가 서로 사랑하는 것이다.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한 것처럼, 우리가 서로 사랑할 때, 두려움을 내쫓아버릴 수 있다. 담대할 수 있다. 이 주제가 요한복음과 요한일서에서, 너무 중요하게 다뤄지고 있다. 사람들은 사랑하는 법을, 잘 알지 못한다. 그래서 하나님이, 사랑이 무엇인지를 가르쳐 주셨다. 그 사랑이 우리에게 나타났다. 여러 차례 말씀드린 것처럼, 하나님이 인간의 몸을 입고, 우리 가운데 와서, 우리 죄를 위해, 생명을 바쳐 죽음으로, 우리를 사랑했다. 사랑의 힘은 두려움을 내어 쫓는다.

 

우리를 사랑한 하나님은, 우리 인간을 구원하기 위해, 스스로 사람의 형체를 입고, 종의 신분이 되는 것을 꺼리거나, 두려워하지 않았다. 천하 만물을 지은 하나님이, 무덤에 갇혔다. 뿐만 아니라, 자신을 치욕적인 십자가에 달리게 함으로, 우리에게 목숨까지 내어주었다. 이것이 사랑의 힘이다.

 

3. 하나님의 사랑은, 권면한다(19).

 

“우리가 (그를) 사랑함은, 그가 먼저 우리를 사랑하셨음이라.”

 

우리가 (그를) 사랑하는 이유가 무엇인지 보여준다. 그것은 바로 하나님이 먼저, 십자가를 통해, 우리를 사랑했기 때문이다.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 즉 불의하고 경건하지 아니할 때, 우리를 사랑하사, 자신의 독생자를 아낌없어 주었다. 하나님의 놀라운 사랑이, 성도들로 하여금, 사랑의 삶을 살도록 만드는, 원인이다. 성도의 사랑은, 인간의 감정에 기초하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이 몸소 실천해준, 신적인 사랑에 기초한다.

 

(요13:34-35) “새 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이로써 모든 사람이, 너희가 내 제자인 줄 알리라.”

 

(20) “누구든지 하나님을 사랑하노라 하고, 그 형제를 미워하면, 이는 거짓말하는 자니, 보는 바 그 형제를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보지 못하는바, 하나님을 사랑할 수 없느니라.” ‘누구든지 하나님을 사랑하노라’는, 거짓 이단자들에 대해 언급할 때, 사용된 표현 방법이다(1:6,8,10, 2:4,9).

 

공동체 내에 있던, 영지주의자들을 염두에 둔 진술이다. 영지주의자들은 신비한 지식을 통해 구원을 받고, 다른 사람보다 우월하다는 환상에 빠져서, 타인을 돌보지 않았다. 그러한 영지주의자들을 염두에 두고, 하나님의 사랑을 경험하고, 사랑하는 자들은, 다른 형제들을 사랑하게 됨을 강조했다.

 

여기서 ‘형제’는, 공동체 일원은 물론, 교회 밖의 일반적인 사람들, 전체를 가리킨다. 그리스도인들의 사랑은, 그리스도 안에 있는, 공동체를 향한 것이며, 그 사랑을 통해, 하나님의 사랑을 드러내게 된다. 또한 사랑하지 못할 자도, 사랑하는 것이, 기독교에서 말하는 사랑이다. ‘사랑하노라.’(아가포)는, 하나님 앞에 올려드리는, 신앙 고백적인 말이 아니다. 사람들 앞에서, 인정받기 위한 말이다. 거짓말이다. ‘거짓말하는 자’(ㅍ슈스테스)는,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으면서,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하는 자를 말한다.

 

왜냐하면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는, 당연히 형제를 사랑해야 함에도, 형제를 사랑하지 않기 때문이다. 형제를 미워하는 자가,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말하는 것은 어불성설이다. ‘미워하면’(미세-, 미세오)는 강한 의지로, 몹시 싫어하고, 증오하는 의미도 있지만, 조금만 사랑하는 상태를 가리키기도 한다. 현재형으로, 형제에 대해 지속적인, 미운 감정을 지니고 있음을 말한다. ‘거짓말하는 자니’는, 2가지로 이해된다. ①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말하면서, 형제를 미워하는 자는, 진리의 범주에 속하지 않는 자다. ② 거짓말하는 자들의 행동을 통해, 스스로가 하나님에게 속하지 않은 자들임을 드러낸다.

 

그들은 하나님을 잘 알고 있다고 하지만, 실상은 하나님에게서 분리된 자이다. ‘보는 바, 그 형제를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보지 못하는바 하나님을 사랑할 수 없느니라.’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하면서, 형제를 미워하면, 보이는 형제를 사랑하지 못하면서,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사랑하기는, 불가능하다.

 

(21) “우리가 이 계명을, 주께 받았나니,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는, 또한 그 형제를 사랑할지니라.”

 

요한은 이제까지 진술해 온 ‘사랑’을, 하나님의 계명에 대한 순종과 연결시킨다. 사랑은 선택 사항이 아니라, 필수사항이다.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고백하면서, 형제를 미워하기는, 사실상 불가능한 것이다. 왜냐하면 하나님 사랑과, 형제 사랑은 분리될 수 없는, 하나의 계명이다. ‘주께’(아프 아우투) 사랑의 근원이 하나님임을 말한다. 사랑의 사도라는, 이름까지 붙게 될 정도로, 이웃 사랑을 강조했던 요한은, 자신의 메시지의 주제였던 사랑이, 주님으로부터 직접 받은 것임을 강하게 선언할 수 있었다. 우리가 주님을 예배하려고 할 때, 점검해야 할 것은, 적극적으로는 ‘내가 형제를 사랑했는가?’이다. 소극적으로 ‘내가 형제를 미워하지 않았는가?’ 하는 것이다. 형제 사랑은 구원받은 자에게 있어 선택 (option)이 아닌, 필수(compulsory)다. 명령으로 알고, 순종하는 성도가 되어, 담대함을 얻기 바란다.

 

결론이다. 따라서 하나님의 사랑으로 인해, 사랑하는 자가 되어서, 담대한 신앙인이 되기를 바란다.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서, 두려움에 떨지 말기 바란다. 또한 사랑하며 살아감으로, 진짜 성도임을 보여주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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