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회의 특징(사도행전 2:42~47)
저희가 사도의 가르침을 받아 서로 교제하며 떡을 떼며 기도하기를 전혀 힘쓰니라 사람마다 두려워하는데 사도들로 인하여 기사와 표적이 많이 나타나니 믿는 사람이 다 함께 있어 모든 물건을 서로 통용하고 또 재산과 소유를 팔아 각 사람의 필요에 따라 나눠주고 날마다 마음을 같이하여 성전에 모이기를 힘쓰고 집에서 떡을 떼며 기쁨과 순전한 마음으로 음식을 먹고 하나님을 찬미하며 또 온 백성에게 칭송을 받으니 주께서 구원받는 사람을 날마다 더하게 하시니라
오늘의 본문말씀인 사도행전 2장 42절로 47절의 말씀은 너무나도 유명한 말씀입니다. 초대교회의 모습을 보여주는 단편적인 말씀입니다. 참교회의 모델은 어떤 것인가 할 때에 우리는 언제나 오순절 교회를 떠올립니다. 성령이 충만했던 초대교회를 생각합니다.
오늘의 본문말씀은 바로 그 오순절교회를 자세히 보여주고 있습니다. 근본적으로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의 사건으로부터 시작이 됩니다. 예수님의 교훈으로부터 시작되는 것이 아닙니다. 사건으로부터 시작됩니다.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계실 때에 몸소 복음을 전하셨습니다. 많은 교훈을 남기셨습니다. 그러나 그 교훈의 연속으로 교회가 이루어진 것이 아닙니다. 다시 말하면 예수님의 생활철학에 기초를 해서 교회가 이루어진 것은 아닙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사건 위에서 교회는 이루어집니다. 이것은 굉장히 중요합니다. 이 문제를 두고 신학적으로 설명하고자 책으로 몇 권을 써도 모자랄 만큼 많은 학자들이 토론하고 분석하고 비판했습니다. 도대체 교회란 무엇입니까? 교회가 예수님의 생활철학에서 온 것입니까, 예수님의 교훈에서 온 것입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사건에서 온 것입니다.
우리가 이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와 그에 따르는 부활을 총칭해서 예수 그리스도의 사건이라고 합니다. 그 역사적 사건을 중심해서 그 사건의 근거가 되는, 그 사건을 경험한 사람들의 산 증거를 통해서 교회는 이루어집니다. 그러므로 진정한 교회는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돌아가시고, 부활 승천하시고, 성령께서 임하신 바로 그 시각부터 이루어진 것입니다. 초대교회 사람들은 예수님의 교훈을 생각하면서 모였던 것이 아닙니다. 살아 계신 예수 그리스도의 현존을 의식하면서 모였던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옛날에 이런 말씀을 하셨는데 참 좋은 말씀이었지'하고 그 말씀을 다시 새기러 온 사람들이 아닙니다. 예수님께서는 부활 승천하시고 승천하신 뒤, 오늘날에 성령으로 강림하시어 저들의 생활 속에, 저들의 심령 속에 살아 계십니다. Living Christ - 살아 계신 그리스도를 순간, 순간 강렬하게 생명적으로 의식하고 모였던 것입니다. 그것이 교회입니다.
오늘날에 보면 교회가 교회됨의 의미를 잘못 생각함으로 문제가 많습니다. 교회는 무슨 좋은 말씀을 들으려고, 어떤 생활의 규범이나 윤리를 배우려고 나오는 것이 아닙니다. 오로지 교회는 생명을 얻고자 나오는 것입니다. 영생을 얻고자 나오는 것입니다. 여기에 문제가 있습니다. 우리는 그 깊은 종교성을 바로 이해해야 합니다. 그 종교성을 이해하면서부터 비로소 교회가 교회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저들은 앞으로 재림하실 그리스도를 강렬하게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그러한 대망사상에 앞서 저들은 더욱 철저하게, 살아 계신 그리스도, 자신들과 동행하시는 그리스도를 의식했습니다. 그럼으로 성령께서 저들의 마음 문을 열어주셨습니다. 그 때에 비로소 저들은 말씀과 성령 안에서 능력을 체험할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교회라고 하는 공동체를 자연스럽게 이루게 되었습니다. 여기에 무슨 특별한 운동이 있었던 것이 아닙니다. 오로지 예수님의 생명력이 이와 같은 역사를 이루어놓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존 스튜어트는 오늘의 본문말씀을 들어서 초대교회의 특징을 네 가지로 말합니다. 배우는 교회, 사랑하는 교회, 예배하는 교회, 선교 교회 - 이렇게 네 가지로 특징지어 설명합니다. 그런가하면 윌리엄 버클레이는 초대교회의 특징을 열 가지로 말합니다. 그 열 가지 특징을 한번 생각해 보겠습니다.
첫 번째는 '배우는 교회'입니다. 오늘의 본문에 "저희가 사도의 가르침을 받아"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이것은 아주 평범하게 들리지만, 그실 굉장히 중요한 문제입니다. 생각해보십시오. 초대교회는 성령이 충만합니다. 흔히 사람들은 성령이 충만한데 무엇을 새삼스레 또 배우나 하고 말합니다. 여기에 문제가 있습니다. 성령 충만한 사람은 안배우려고 합니다. 가르치려고만 하지 배우려 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정작 가르칠 계제가 오면 가르치지도 않으면서요. 이제는 하나님과 직통하기 때문에 전과는 사뭇 이야기가 달라집니다. 이러한 주관적 체험에 만족하는 대부분의 사람들은 성경을 읽지 않습니다. 더 이상 배우려고 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여러분, 어떤 놀라운 종교적 체험을 했더라도 내가 받은 그 체험을 공부를 통해서 다시 정화하지 않으면 그 체험은 바로 설 수가 없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이 놀랍고 신비한 종교적 체험을 했습니다. 언젠가 그분이 자신의 체험을 간증합디다. 그것을 제가 직접 들었습니다. 희한한 능력을, 희한한 경험을, 신비한 환상을 간증하는 것을 들었습니다. 그러다가 몇 년 뒤에 그분의 그 간증을 다시 들을 수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사이에 얼마나 보태져서 커졌는지 원 모습을 알 수가 없는 간증이 되어버리고 말았더군요. 원점을 알 수가 없을 만큼 부풀려 있었습니다. 이래서는 안됩니다. 우리는 어떤 체험을 했든 간에 그것을 성경에 비추어 비판해보기 전에는 바로 말해서는 안됩니다. 본인에게도 득이 되지 않습니다. 은혜가 되지 않습니다. 우리는 신령한 체험이 있을 수 있도록 성경을 깊이 공부해야 합니다.
초대교회는 성령 충만한 교회였습니다. 그런데도 저들은 사도의 가르침을 좇아 열심히 공부했습니다. 하나님께로서 직통으로 성령을 받았으니 이제 사도들에게 배울 것이 없지 않겠습니까? 보통사람들 이라면 '사도들에게 이제는 배울 것이 없다' 할 것 같은데, 저들은 그렇지 않았습니다. 성령을 받았으면서도 저들은 여전히 모여서 더욱 열심히 성경을, 말씀을 공부합니다. 여러분, 건강한 사람은 입맛이 좋습니다. 소화도 잘 시킵니다. 건강한 사람은 먹어도, 먹어도 자꾸 먹고 싶어집니다. 식사할 때에도 보면 족족 '맛있다'고 하며 먹는 사람이 있습니다. 얼마나 보기 좋습니까? 그런가하면 어떤 사람은 자꾸 맛없다고 해서 남까지 기분 나쁘게, 입맛 없게 만듭니다. 그러나 건강한 사람은 어떤 음식을 대하든지 그야말로 맛있습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영적으로 건강한 사람은 성경공부 하나를 해도 깊이 파고들고 끝없이 하려고 합니다. 설교말씀을 듣고 뒤로 돌아서는 순간 또 듣고 싶어집니다. 들으면 들을수록 그 말씀이 가슴에 와닿아 그렇게 좋을 수가 없습니다. 입맛이 좋고 소화가 잘된다는 것이 바로 이런 것입니다. 그러니 성경공부 하는 것, 성경 읽는 것이 짜증스럽고 싫증이 난다면 병든 줄로 아십시오. 병든 심령인 줄로 알 것입니다.
'배우는 교회''공부하는 교회'가 바로 초대교회의 첫 번째 특징입니다. 여기서 배운다는 것은 신학적으로 말씀드리면 주관적 체험에 말씀에 대한 객관적 교육이 합쳐진 것입니다. 나아가 배운다는 것은 겸손을 의미합니다. 교만한 사람은 아는 것도 없으면서 다 안다고 생각하고, 더는 배우려고 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겸손한 사람은 언제나 누구에게나 고개를 숙이고 배웁니다. 이 같은 자세가 중요합니다.
서로 이야기를 할 때에도 그렇습니다. 듣는 자세가 앞서야 합니다. 말이 먼저가 되어서는 안됩니다. 가만히 앉아서 재미있게 들을 줄 알아야 합니다. 제 직업이 목사이다 보니 어디 가서든지 사람들 앞에 나서서 주로 말을 하는 편에 서게 됩니다. 사람들이 제 말씀을 열심히 재미있게 들어주면 말을 하는 저 역시 신이 나서 피곤한 줄도 모릅니다만, 그렇지 못한 경우에는 말을 해나가기가 무척 힘이 듭니다. 언젠가 새벽기도 때, 맨 앞쪽에 팔짱을 끼고 비스듬히 앉은 한 청년 때문에 설교하는 데에 무척 애를 먹었습니다. 그 청년이 자꾸 신경 쓰여 안되겠기에 팔 좀 풀라고 말했습니다. 그 이후로는 그 청년, 새벽기도 시간에 안보입디다. 사실 팔짱끼고 이야기 듣는 자세처럼 실례되는 것은 없습니다. 팔짱끼는 것은 무관심을 의미합니다. '너 이야기할 테면 해보라'라는 태도입니다. 여러분, 생각해보세요. 무릇 배우는 자세가 중요합니다. 열심히 들을 줄 알아야 합니다. 그런가하면 저를 뚫어져라 열심히 쳐다보면서 설교를 듣는 사람도 있습니다. 제 얼굴이 화끈거릴 정도로 쳐다보면서 설교를 듣습니다. 어찌 보면 듣는다기보다는 받아먹는 것만 같습니다. 말씀을 듣는 것에서 그치지 않고 받아먹는 것입니다. 이 자세가 얼마나 귀합니까? 배우는 자세는 그런 자세이어야 합니다.
공부하는 것도 그렇습니다. 공부시간에 선생님 말씀만 열심히 듣는다면 과외수업 안 해도 됩니다. 별나게 공부 안 해도 됩니다. 그것으로 충분합니다. 수업시간에는 졸고, 다른 시간에 공부하려니까 안 되는 것입니다. 듣는 그 시간에 잘 들었다면 그것으로 충분합니다. 요새는 공부를 하는 데에 있어서도 경쟁이 매우 심합니다마는, 옛날에는 조금만 공부해도 우등생이 되기가 쉬웠습니다. 저도 공부는 잘하는 편이었습니다. 일등을 놓쳐본 적이 별로 없거든요. 그렇다고 해서 특별히 시간을 정해놓고 공부를 하지는 않았습니다. 수업시간에 듣는 것이 고작이었지만 정신차리고 열심히 들었기 때문에 늘 공부 잘한다는 소리를 들을 수 있었습니다.
보십시오. 초대교회 사람들은 무척이나 겸손했습니다. 겸손했기 에 사도들의 가르침을 받아들인 것입니다. 사도들, 즉 가르치는 사람들이 누구입니까? 갈릴리의 어부들입니다. 바리새인들의 말을 빌자면 불학무식한 사람들입니다. 바리새인들은 예수님의 제자들을 향하여 불학무식하다고, '아그라마타'라고 거침없이 비난했습니다. 글도 모르는 무지렁이라고 조롱했습니다. 그러니 생각해보십시오. 그 불학 무식한 갈릴리 어부들이 무엇을 제대로 가르치겠습니까? 그러나 저들은 성령이 충만하여 베드로 앞에 무릎을 꿇었습니다. 요한 앞에 나아가 겸손하게 말씀을 받았습니다. 좀더 깊이 생각해보십시오. 지금 저들은 세상 이야기나 듣자고 모인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의 교훈이, 예수님의 생애가 재미있고 흥미 있어서, 예수님의 말씀을 배우고자 모인 것입니다. 성경을 배우기 위하여 모인 것입니다. 베드로와 및 사도들이 성경을 풀어 가르쳤기에 저들은 그 어부들 앞에 나아와 배우는 것입니다. 이것은 영적인 겸손입니다. 진정한 겸손입니다.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이 보기에는 참을 수 없는 굴욕이지만, 성령 충만한 저들에게는 그렇지 않습니다. 저들은 베드로, 요한, 야고보들에게 나아가 성경을 배우고 예수님을 배우는 일에 힘썼습니다.
두 번째는 '기도하는 교회'입니다. 성령 충만한 위하여 기도하는 것이 아닙니다. 성령이 충만하기 때문에 기도하는 것입니다. 성령 안에서 기도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다릅니다. 특별한 소원이 있어서 기도하는 것이 아니라, 성령 안에서 기도하고 있습니다. 저들은 교회 부흥을 위하여, 화평을 위하여, 선교를 위하여,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하여, 특별히 핍박을 이기기 위하여, 핍박 가운데서 믿음을 잘 지키기 위하여 기도했습니다. 영적 체험이 충만할수록 오히려 더 열심히 기도했습니다. 잊지 말 것입니다.
기도 없는 신앙생활은 참다운 신앙생활이 아닙니다. 그래서 저는 '신앙생활은 기도생활이다'라고 정의합니다. 윤리생활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기도생활을 말합니다. 하나님과 교통하는 생활이 신앙생활입니다. 말을 들으나 말을 하나 언제든지 기도하는 마음으로 합니다. 하나님 앞에서 듣고 하나님 앞에서 행합니다. 그런고로 쉬지 않고 기도합니다. 이것이 교회입니다. 교회는 만인이 기도하는 집입니다. 교회의 부흥을 기도하는 사람의 수로 가늠할 수 있다고 합니다. 그래서 한국 교회에서는 이런 통계를 내놓기도 합니다. '새벽기도에 나오는 교인이 십일조 교인이다. 새벽기도에 나오는 교인의 10배수가 그 교회의 교인 수이다'라는 통계가 있습니다. 그러므로 새벽기도에 100명이 나오면 그 교회의 교인 수는 1,000명이요, 새벽기도에 1,000명이 나오면 그 교회의 교인 수는 10,000명이라는 도식이 성립합니다. 그렇게 계산하면 틀림이 없다고 합니다.
세 번째는 '두려움이 없는 교회'입니다. 이것은 퍽 역설적인 표현입니다. 경건을 말함입니다. 이것은 죄를 두려워한다던가, 형벌을 두려워한다던가, 저주를 두려워한다던가 하는 두려움이 아닙니다. 이것은 믿음 안에 있는 신령한 두려움을 말합니다. 특별히 사도들의 영적 권세에 대한 두려움입니다. 모름지기 교회에 들어올 때는 두려움이 있어야 합니다. 함부로 드나들어서는 안됩니다. 교회는 하나님의 집입니다. 하나님의 성전입니다. 하나님께 예배하는 장소입니다. 성경에도 이런 말씀이 있지 않습니까? "너는 하나님의 전에 들어갈 때에 네 발을 삼갈지어다(전 5:1)." 그렇습니다. 발 한번 딛는 것도 삼가는 두려움을 가지고 교회에 나와야 합니다. 하나님 앞에 나오는 것이니까요. 항상 우리의 마음속에는 이러한 경건히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임재의식(臨在意識)이 있어야 합니다. 초대교회 사람들 모두에게는 저마다 두려움이 있었습니다. 사실 두려워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하나님의 놀라운 역사 앞에서 어떻게 두려운 마음을 가지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이처럼 저들에게는 God- fearing, 신을 두려워하는 마음이 있었습니다. 경건입니다. 요즘 보면 예배시간이나 찬송시간이나 너무 시끄러운 것 같아서 다소 유감스럽습니다. 어떤 때에는 교회인지 유흥장인지 알 수가 없을 정도로 소란하기까지 합니다. 그래도 되는 건가 싶어요. 좀더 경건한 교회, 좀더 경건한 신앙, 좀더 두려움이 있는 신앙생활이 되어야 하겠다고 생각해봅니다.
네 번째는 '표적이 나타나는 교회'입니다. 본문말씀을 보십시오. "사도들로 인하여 기사와 표적이 많이 나타나니(43절)" - 기사와 표적이 있는 교회였음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권능이 있었기에 표적이 나타난 것입니다. 모든 병을 치유해서 더는 병자가 보이지 않습니다. 모든 귀신을 쫓아내서 더는 귀신들린 사람이 없습니다. 이렇듯 초대교회는 기사와 표적이 무성한 교회였습니다. 생각해보십시오. 귀신들린 사람이 함부로 나다니는 교회라면 권세 있는 교회와는 거리가 멉니다. 귀신들린 사람이 있다면 반드시 고쳐야, 그 귀신을 쫓아내야 교회의 권세가 서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고는 교회될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제가 처음 교회를 시작해서 신도수가 삼백 명쯤 될 때입니다. 어느 날인가 어떤 분이 딸을 데리고 와서는 제게 고쳐달라고 부탁을 해요. 자신의 딸은 정신이상자로 병원에도 다녀보고 기도원에도 있어 보았는데 영 정신이 온전해지지를 않는다고 합니다. 사람들이 말하기를 그것은 정신병이 아니고 귀신이 들린 것이라고 하니 목사님이 좀 고쳐주었으면 좋겠다고 합니다. 그 딸은 대학생으로 매우 똑똑해 보이더군요. 그런데 그 중얼거리는 말은 얼마나 어이없고 재미있던 지요. 그것을 보고 제가 조건을 하나 내걸었습니다. 우리 교인도 아니고 특별히 시간을 내기는 힘들지만 그래도 한번 해보겠다. 그 대신 조건이 있다, 나 시키는 대로 하겠느냐고 말입니다. 그랬더니 그리하겠노라 합니다. 그래서 제가 매일 새벽기도에 부모가 함께 딸을 데려오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매일 새벽기도가 끝난 뒤에 한 5분 정도 그녀를 위하여 개인적으로 기도를 해주었습니다. 그런데 그 부모는 기도 좀 오래 해주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안수도 좀 해주고, 기도원에서 하듯이 두드리기도 하고 때리기도 해주었으면 하고 바라는 것 같아요. 그래도 저는 제 방법을 고집했습니다. 그랬더니 한 다섯 번 정도 나왔을 때인가, 깨끗하게 나아졌습니다. 그 다음부터는 비신자였던 딸은 물론 그 부모까지 교회에 충실하게 나옵니다. 지금 그 처녀는 목사 사모가 되어 있습니다.
여러분, 생각해보십시오. 세월없이 함부로 떠들면 되겠습니까? 모든 환자와 귀신들린 자가 깨끗해져야 합니다. 이적과 기사가 중요합니다. 치유하는 역사가 중요합니다. 이런 것이 있고야 교회가 교회 될 수 있습니다. 영적으로 치유하는 역사가, 표적이 있어야 합니다.
그런데 우리는 '표적'하면 치유라는 능력만을 표적으로 아는데, 그실 망하는 표적도 표적입니다. 그것을 알아야 합니다. 망하는 표적의 대표적 인물로 아나니아와 삽비라를 꼽을 수 있습니다. 여러분이 아시다시피 그들은 성령을 속임으로 결국은 죽임을 당하고 맙니다. 이것이 이적입니다. 살리는 것만 이적이 아닙니다. 죽이는 것도 이적입니다. 잘되는 것만 이적이라고 생각해서는 안됩니다. 실패도 이적입니다. 거기에 하나님의 은혜가 있습니다. 때로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영혼을 바로잡기 위하여 실패도 주시고 질병도 주시고 죽음도 주시는 것입니다. 이 모두가 이적입니다. 우리는 이적의 한 측면만을 생각하는데 그렇지 않습니다. 교회는 영적 생명을 살리기 위하여 여러 이적이 나타나는 곳입니다.
다섯 번째로 '서로 나누어주는 교회'입니다. "모든 물건을 서로 통용하고 또 재산과 소유를 팔아. 각 사람의 필요를 따라 나눠주고(44, 45절)"-----내 것을 내 것이라고 하는 자는 없었다고, 서로서로 필요에 따라 나누어주었다고, 모든 사람이 물건을 통용했다고 말씀합니다. 있는 사람은 없는 사람에게, 이 사람에게 필요한 것은 저 사람이, 저 사람에게 필요한 것은 이 사람이 나누어주었다고 합니다. 요샛말로 공동분배가 이루어졌다는 것이지요. 이것을 가리켜 흔히 '이상적 공산주의 사회'라고도 표현합니다. 공산주의라는 말이 기분 나쁘기는 하지만 확실히 일리 있는 이야기입니다. 다만 공산주의에서는 강제성을 띠고 분배하지만, 초대교회 안에서는 자원해서 분배가 이루어집니다. 사랑 안에서 분배가 이루어집니다.
초대교회 사람들은 성령을 받음으로 이기심이 사라졌습니다. 내 것을 내 것이라고 하는 마음이 없어졌습니다. 욕심이 없어졌습니다. '재물을 많이 가지고 있어서 무엇하나, 곧 주님께서 재림하실 텐데'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사실 예수 믿고 살면서, 게다가 죽을 날도 멀지 않았는데 아직도 가진 것이 너무 많다면 문제가 되지 않겠습니까? 유서를 얼마나 잘 써놓았는지는 모르겠지만요. 그러나 여러분, 분명히 알아야 합니다. 성령 받은 사람은 영원한 생명을 지향하고 있기에 이 세상 물질에 대한 욕심이 없습니다. 먹을 것과 입을 것만으로 자족합니다. 어차피 언젠가는 떠날 것이니까요. 그리고 성령을 받음으로 전에는 보이지 않던 가난한 사람들이 이제는 보입니다. 내 것을 필요로 하는, 내 도움을 필요로 하는 사람들이 많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여러분은 여러분을 향하여 도움을 청하는 사람들이 보입니까? 안 보인다면 아직 성령을 못 받은 줄로 아십시오. 가만히 기도할 때에는 보입니다. 지금 누가 내 도움을 필요로 하는구나, 하는 것이 다 보입니다. 어떤 분이 이런 이야기를 합디다. 언젠가 기도를 하는데 자기 친구가 울고 있는 것이 보이더랍니다. 그래서 전화로 "너 왜 우느냐?"하고 물었더니 "어떻게 알았느냐?"하고 깜짝 놀라더랍니다. 그렇습니다. 성령 받은 사람에게는 나를 필요로 하고, 내가 도와줘야 할 사람들이 보입니다. 그래서 본문말씀에서 보듯이 성령 충만한 초대교회 사람들은 필요에 따라 서로 나누어주었습니다. 내 도움을 필요로 하는 많은 사람들이 보였기에 자원해서 나누어준 것입니다. 이 얼마나 아름다운 일입니까? 그것이 교회입니다. 있는 사람, 없는 사람 다 함께 모이지만, 교회 안에서는 서로 통용할 수 있는 것입니다.
오래전 우리 교회에서 바자회를 한번 한 적이 있습니다. 그 수익금으로 성남에 탁아소를 하나 지었습니다. 그 때에 그 기금을 모으기 위하여 이렇게 광고했던 것이 생각납니다. '여러분의 집에 몇 년 동안 입지 않고 넣어둔 옷이 있을 것입니다. 그것 그대로 두면 안됩니다. 쓰지 않는 물건 그대로 두면 안됩니다. 그대로 둔 채 세상 떠난다면 하나님 앞에 가서 얼마나 죄송스럽겠습니까? 그런 물건 있으면 가지고 오십시오. 그것을 필요로 하는 사람이 많습니다.' 고맙게도 여러분 모두가 동참하셔서 예배당 마당이 물건으로 가득 찼습니다. 제가 또 광고를 했습니다. '사람은 중고인데 새것만 찾을 것 있습니까? 돈주고 사 가십시오'하고 중고 쓰기 운동을 펼친 것입니다. 두 시간만에 다 팔렸습니다. 공짜로 가져다놓고 두 시간만에 다 팔아서 오천만 원을 벌어들였습니다. 그 돈으로 아주 깨끗한 탁아소를 건립했습니다. 얼마 전에 개원해서 잘 운영되고 있습니다. 성남시로부터 아주 모범적인 탁아소라고 크게 칭찬을 받고 있습니다.
여러분, 성령 받은 초대교회 사람들은 다른 사람의 필요를 생각하고 관심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다른 사람이 무엇을 필요로 하는지에 생각이 미치게 되었습니다. 내 것을 내 것이라고 하기보다는 우리 것이라고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공동소유 하게 되고 같이 나누어 쓰게 되었습니다. 그럼으로 모자람이 없이 늘 풍족했습니다. 사실, 오늘날도 그렇습니다. 절대 모자라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넉넉하게 주셨습니다. 잉여농산물 때문에 고심하는 나라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그런데 보십시오. 한쪽에서는 먹을 것이 없어서 굶어죽고 있습니다. 한쪽에서는 썩어나가는 잉여농산물로 고심하고, 다른 한쪽에서는 농산물이 없어서 고심합니다. 이런 모순이 어디에 있습니까? 하나님께서는 넉넉하게 주셨습니다. 먹고도 쓰고도 남을 만큼 풍족하게 주셨습니다. 이제는 우리 모두가 서로 서로 나누어주고 통용하는 문제만이 남아 있습니다. 잊지 말 것입니다.
여섯 번째는 '예배하는 교회'입니다. "날마다 마음을 같이하여 성전에 모이기를 힘쓰고(46절)" - 자주자주 모여 열심히 기도하는 교회를 말씀합니다. 여러분, 모인다는 것이 참으로 중요합니다. 초대교회 사람들은 가정에 모이고 구역에 모이고 성전에 모이고…… 자꾸 모여서 사도들을 중심으로 예배드렸습니다.
일곱 번째는 '친교 하는 교회'입니다. '코이노니아 델로슘'- '교제하는 교회'입니다. 여기에 형제애가 있습니다. 우리는 모두 그리스도 안에서 한 형제입니다. 성도에 대한 별명이 '형제'인 것은 그 때문입니다. 모두가 형제자매입니다. 위아래가 없습니다. 북녘사람들은 어디를 가나 누구에게나 동무라고 합니다마는, 우리는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을 아버지로 하는 우리는 다 형제자매입니다. 우리 모두가 다같은 하나님의 자녀이니까요. 그렇습니다. 너도 하나님의 자녀요, 나도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그래서 교제가 이루어집니다. 완전한 교제가, 형제애가 이루어집니다. 여기에는 계급도 차별도 있을 수 없습니다. 온전히 그리스도 안에서 교제를 이루는 교회였습니다.
여덟 번째는 '기뻐하는 교회'입니다. 본문은 "떡을 떼며 기쁨과 순전한 마음으로 음식을 먹고(46절)"라고 말씀합니다. 초대교회 사람 모두가 기쁨에 넘쳐 있습니다. 그 기쁨은 물질의 소유로 말미암은 것도 아니요 부귀영화로 말미암은 것도 아닙니다. 오로지 구원받은 기쁨이 있을 뿐입니다. 영원한 나라에 대한 약속이 있었기에 저들은 기뻐했습니다. 이렇듯 초대교회는 종말론적 기쁨을 함께 누리는 교회였습니다. 여러분, 부흥하는 교회는 행복해야 합니다. 교회에 나오는 한사람, 한사람 모두가 즐거워야 합니다. 다른 것은 필요 없습니다. 신령한 즐거움으로 충만하면 그 교회는 부흥하게 되어 있습니다. 이래야 한다, 저래야 한다는 윤리는 통하지 않습니다. 다만 구원받은 감격이 넘쳐야 합니다. 이것이 중요합니다. 기쁨이 있으면 됩니다. 기쁨이 있는 곳에 모든 능력과 창의력과 창조력이 작동하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생각해보십시오. 집에 있는 사람과 교회에 나온 사람과 다른 점이 무엇입니까? 기쁨입니다. 교회에 나갔다가 들어오는 사람이 문간에서부터 짜증을 낸다면 어떻겠습니까? 틀림없이 '교회는 왜 갔다왔노?'하고 책망을 들을 것입니다. 교회에 갔다가 돌아와서는 아이들이 좀 잘못을 했다 해서 책망한다면 필경 아이들은 '교회에 갔다오더니 욕만 하더라. 교회는 그런 곳인가 보다'라고 생각할 것입니다. 그 아이들이 교회에 갈 리 있겠습니까? 여러분, 모름지기 늘 기쁨으로 충만할 것입니다. 기쁨으로 모든 슬픔과 고난을 다 소화해 낼 것입니다.
아홉 번째는 '감사하는 교회'입니다. 저들은 서로 모일 때마다 하나님께 감사하고 하나님을 찬양했습니다.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습니다. 그것이 교회입니다. 교회에서 음악은 참으로 중요합니다. 예배시간을 놓고 가만히 생각해보십시오. 기도하고 성경봉독 하는 시간을 빼고 나면 전부가 찬양 아닙니까? 오르간의 반주에 맞추어 하나님께 찬양을 드립니다. 언젠가 안 믿는 사람이 예수 믿는 사람의 장례식에 참석했다가 저를 보고는 이런 이야기를 하는데 듣고 보니 저 사람 입장에서는 저럴 수도 있겠다 싶은 생각이 들더군요. 그 사람 말인즉, 예수 믿는 사람들은 장례식에 와서도 노래를 부르는데, 그것이 이해 안 간다는 것입니다. 맞는 말이거든요. 우리 입장에서는 찬송이지만, 그 사람 입장에서는 노래입니다. 그러니 예수 믿는 사람들은 장례식에 와서도 노래를 부른다고 의아해할 밖에요. 게다가 그 노래를 가만히 들어보십시오. '기쁨'을 노래하는 가사가 많습니다. 장례식에 와서도 기쁘다고 찬송하는 것이 교인입니다. 항상 기쁩니다. 그뿐입니까? 썩 잘하는 것은 아니지만 어떤 때에 보니 한 장로님은 장례식에 가서 '좋은 날씨를 주셔서 감사합니다'라고 기도합니다. 죽은 사람을 앞에 놓고도 감사하다고 기도합니다. 좌우간 '감사합니다'하는 말이 입에 올라서 언제건 어디서건 감사하다고 합니다. 늘 감사하는 것입니다. 이렇듯 하나님께 감사하는, 하나님께 찬양하는 곳이 교회입니다.
마지막으로 '칭송 받는 교회'가 있습니다. "온 백성에게 칭송을 받으니 주께서 구원받는 사람을 날마다 더하게 하시니라(47절)." 무릇 예수 믿는 사람은 칭찬을 받아야 합니다. 모든 사람으로부터 칭찬을 받아야 합니다. "믿는 사람은 뭐가 달라도 달라"하는 칭찬을 들어야 합니다. 어디에서건 어느 때에건 모든 사람들로부터 신임 받고 존경받고 칭찬 받아야 합니다. 칭찬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칭찬 받는 존재가 된다는 것이 더욱 중요합니다. 그렇습니다. 우리 믿는 사람들은 모든 사람들로부터 존경과 신임과 칭찬을 받아야 합니다. 그렇게 될 때에 자연히 그 교회는 교회의 사명을 잘 감당하게 될 것입니다.
다시 한번 오늘의 본문말씀을 보십시오. "하나님을 찬미하며 또 온 백성에게 칭송을 받으니 주께서 구원받는 사람을 날마다 더하게 하시니라." 교회의 부흥은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은사입니다. 교회 부흥은 사람이 억지로 이루는 것이 아닙니다. 위의 열 가지의 특징을 가진 교회는 하나님께서 구원받는 사람을 날마다 더하게 하시는 은혜를 주신다고 오늘의 본문은 말씀합니다. 특별히 전도운동 안 해도 날마다 부흥합니다. 한경직 목사님이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교회는 은혜가 있고 싸움만 안 하면 절로 부흥하게 되어 있습니다.' 은혜가 있고 싸움만 안 한다면 그 교회가 부흥 안 될 리 있겠습니까? 사실 그리고도 부흥 안 된다면 무언가 크게 잘못된 것입니다. 교회가 교회 되면 날마다 부흥합니다. 부흥할 수밖에 없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러한 교회에 구원의 은혜를 더하겠다고 하십니다. 이렇듯 교회는 하나님의 은혜로 부흥하는 것입니다. 잊지 말 것입니다.
오늘 우리는 초대교회의 열 가지 특징을 상고해보았습니다. 이 특징 가운데 50퍼센트만이라도 좇을 수 있다면 우리의 교회는 날마다 부흥할 것입니다. 모두에게 은혜가 있을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초대교회와 같은 온전한 참 교회를 이루기 위하여 우리 모두 초대교회의 교인과 같은 참 교인이 먼저 되어야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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