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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약 --------------------/로마서

롬 16장 5-10절(바울이 문안하기 원하는 동역자들) - 이건기

by Preacher 2023. 6.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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롬16장 5-10

바울이 문안하기 원하는 동역자들

이건기 목사 2017-07-16

다운교회 http://www.downchurch.org/

 

사도 바울은 브리스가와 아굴라 부부를, 로마교회에 소개했다. 이들은 바울의 동역자였다. 그래서 문안하라, 존경하는 태도로 환영하라고 했다. 이들 부부는, 바울을 위해서, 목도 내놓을 수 있었다. 오늘 말씀은, 바울이 문안하기 원하는, 많은 동역자들을 소개하고 있다.

 

많은 성도들을 열거하며, 문안하라는 이유는 무엇인가? 주님 안에 있는 성도들이, 주변에 적어서 믿음이 약해질 것을 우려하며, 그리스도와 복음의 증인이, 얼마나 많은지 일깨워주고, 또한 성도의 교제가, 얼마나 중요한지를 말씀하고 있다. 동역자를 통해서, 교회가 어떻게 해야 하는지 말씀한다.

 

1. 교회와 에베네도(5).

 

“또 저의 집에 있는 교회에도 문안하라, 내가 사랑하는 에배네도에게 문안하라, 그는 아시아에서, 그리스도께 처음 맺은 열매니라.

 

(1) ‘저의 집에 있는, 교회에도 문안하라.’(5上).

 

‘저의 집에 있는 교회’는 브리스가와 아굴라 부부, 가정에서 모이는 교회를 말한다. 유대인들 추방령이 풀리자, 브리스기와 아굴라 부부는, 로마로 다시 돌아가서, 그의 가정에서 교회를 개척하였다.

 

‘집’(오이코스)에 있는 교회라고 했다. 당시의 교회는 가정교회였다. 한 가족으로 구성된, 교회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그 가정에서 모인 신자들의 공동체를 말했다. 신약성경은 ‘교회’(엑클레시아)를 ‘불러낸 성도들의 모임’이라고 말한다. 우리가 보통 말하는 건물교회는, 교회가 아니라, 예배당이다.

 

초대교회는 가정을 열어, 교회가 되도록 했다. 가정은 가족만을, 위한 곳이 아니다. 성도들이 교제하고, 기도하며, 예배할 수 있는 공간이 되어야 한다. 그 가정에서 모이는, 신자들의 공동체가 교회였다. 세계 선교를 위해 꿈꾸고, 힘을 합쳐 사명을, 감당하는 곳이었다.

 

구원받은 사람들이, 자기 집을 개방하여, 다른 그리스도인들을 맞아들이고, 거기서 예배를 드리기 시작했다. 모이는 사람들은, 점점 수가 많아져, 개인 집이 더 이상, 모든 사람들을 수용할 수 없게 되었을 때, 더 넓은 장소를 물색하게 되고, 거기서 모임을 갖는다. 이것이 지역 교회의 출발이다.

 

초대교회는 건물을 갖지 못했기에, 성도들의 집을, 정규적인 모임장소로 이용했다. 따라서 이런 교제와 헌신이 따를 때에, 진정한 교회가 된다. 가정은 모든 가족이 한 자리에 모여, 하나님을 예배하는 곳이 되어야 한다. 한 가정이 교회가 되면, 그 교회에 다른 가정들이 합류하여, 성도들 간의 교제를 갖게 된다. 이런 모임이 있는 가정교회였다. 이것은 시간이 흐른다고, 달라지는 것은 아니다. 그러면 모임 장소로서, 성경의 표준적 모델이 집인데도, 요즈음 가정에 모이는 것이 왜 어려운가?

 

① 성경이 교회모임을, 집으로 정한 하나님의 계획과 의도를, 충분하게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② 마지막 때일수록, 자기중심의 삶을 살기에, 자기 집을 모이는 장소로 내놓으려고 하지 않는다. 교회를 사랑하는 마음이, 자꾸 상실되기 때문이다.

 

(2) 에베네도(5中).

 

‘내 사랑하는 에베네도’라고, 바울은 불렀다. 에베네도(에파이네토스)는, ‘에파이네도’는 에피(위에) + 아이네오(찬양하다) = 위에 있는 하나님을, 찬양하다는 뜻이다.

 

아굴라 부부가 개척한 가정교회 이야기와, 에배네도의 이야기를, 같은 구절에 두었다. 본래는 다른 2가지 이야기니까, 구절을 달리해야 옳다. 그런데 분리하지 않고, 같은 절로 묶었다. 이는 2가지가 깊은 관련이 있기 때문이다. 에배네도가 그 가정교회에, 출석했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바울은 여기 나오는 사람들을, 모두 사랑하지만, 몇몇 인물을 소개하면서 “내가 사랑하는 ?”라고 했다. 왜 사랑하는 자라고, 로마교회 성도들에게 소개했나? 하나님을 찬양하는 자, 주님 안에 사는 자였기 때문이다. 그들에게 문안하라고, 요청하는 이유가 무엇일까?

 

성도들이 서로 연합하여, 선교사명을 완수하기를 원하기 때문이다. 그는 아시아에서 그리스도께 처음 맺은 열매니라(5下). 바울이 1차 선교여행 때, 소아시아를 방문했다. 그때 비시디아 안디옥에서, 처음으로 유대교에서 기독교로, 개종하는 성도들이 있었는데, 그 중의 한 사람이, 에배네도다.

 

그 때가, 주후 46-47년경이다. 그런데 지금 사도 바울이, 이 서신을 작성하고 있는 때는, 주후 56-57년경이었다. 그 10년 후에 에배네도가, 로마에 살고, 아굴라의 가정교회에 참석하는 것으로 보아, 전도와 선교의 일꾼으로, 일한 것으로 보인다. 그래서 사도 바울이, 에배네도의 소식을 듣고서, 기쁜 마음으로 로마시 성도들에게, 에배네도에 대하여 “그는 아시아에서, 그리스도께 처음 맺은 열매니라”(5下). 전도만하면, 다 되는 것이 아니다. 전도한 사람이 익어지도록, 열매에 관심을 가져야 한다.

 

그런데 한번 전도해 놓고, 내버려 두는 경우가, 너무 많다. 바울은 에배네도가 ‘아시아에서 처음 익은 열매’라고 했다. 바울이 소아시아 지역에서, 1차 선교 여행을 시작하였을 때, 처음으로 믿음 열매가 되어준 성도로, 잊을 수 없는 대상이었다.

 

2. 마리아(6).

 

“너희를 위하여, 많이 수고한 마리아에게 문안하라.” 마리아에게도, 문안하라. 그녀가 너희를 위해, 많이 수고했다고 했다. 마리아는 구약의 (미리암, 마리암)을, 헬라식으로 표현한 말이다.

 

그 뜻은 2가지인데, 정반대로 나타난다. ① 애굽어 ‘마르예’에서 왔다. “가장 사랑 받는 이”라는 뜻이다. ② 히브리어 미리암은 ‘메리’(반역, 완고) + 암(그들의) = ‘그들의 반역, 완고’라는 뜻이다. 마리아는 그 당시에, 굉장히 흔한 이름이었다. 성경에 여러 명의 마리아가 있다.

 

① 예수님의 어머니 마리아(마1:18) ② 글로바의 아내 마리아(요19:25), ③ 막달라 마리아(마27:56), ④ 베다니 마리아(요11:1-2), ⑤ 마가의 어머니 마리아(행12:12). ⑥ 본문의 어떤 사람(롬16:6) 어떤 사람인지, 특정하지 않았다. 이렇게 흔한 이름을 가지고, 평범하게 살아도, 수고하는 사람이 있었다.

 

궂은일을 마다하지 않고 선교 팀의 식사나, 세탁과 청소 등으로, 항상 뛰어다니며 봉사한 것 같다. 많이 수고했다는, 열심히 일하되, 거의 기진맥진할 때까지, 일을 하는 것을, 함축하고 있다. 이러한 여인이 교회 안에 없었다면, 선교 팀의 사역과 교회사역에, 어떻게 열매를 맺을 수 있나?

 

우리도 성도들을 위해, 수고하는 사람하면, 떠오르는 이름들이 있다. 바울은 많이 수고했다면서 그들을 인정해주고, 그들에게 문안하기 원했다. 그렇다면 우리도,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파하며 하나님의 역사에, 모두 동참하여, 힘을 다하여 수고해야 한다.

 

만일 한 달란트 받은 자처럼, 땅에 감추어 두면, 주님은 우리를 ‘악하게 게으른 종아’라고 책망할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다섯 달란트나, 두 달란트 받은 자들처럼, 수고를 많이 하여 다섯 달란트나 두 달란트를 남기면, 주님께 ‘착하고 충성된 종아’라는 칭찬을 받을 것이다.

 

따라서 수고를 많이 해서, 주님께 열매를 맺어야 한다. 그때 교회 안에, 성도들에게 존경을 받을 뿐 아니라, “착하고 충성된 종아”라고, 칭찬을 받을 것이다. 문안하라(아스파조마이)고 말했다. ‘팔을 접다. 경례하다, 환영하다, 포옹하다, 인사하다.’는 말이다.

 

우리 교회는 인사를 잘하는 편이다. 인사하면 생각나는 것이 있다. 교회에서 서로 만나면, 약간 안면이 있거나, 혹은 없어도, 우리교회 교인이라면, 가볍게 머리 숙이고, 지나가기도 한다. 잘 아는 사이가 아닌 한, 서로 외면하는 경우를 종종 볼 수 있다. 또는 슬금슬금 눈치만 보면서, 제 자리로 돌아가는 경우도 있다. 안타까운 경우다. 이런 모습이 없도록, 마음과 가슴으로 꼭 안아주는 따뜻한 모습이 있을 때, 세상에서 힘들고, 외롭고, 지친 자가 힘을 얻게 될 것이다.

 

이들은 아무 직분도 맡지 않았지만, 성실하게 교회와 성도들을 섬겼다(고전12:28). 바울은 이런 그녀의, 숨은 봉사를 기억했다. 그래서 로마교회 성도들이, 그녀의 숨은 봉사를 인정해 주도록 부탁했다. 주님도 이와 같이, 성도들이 숨어서 하는, 진실한 봉사를 잊지 않고 인정해 준다.

 

3. 바울과 함께 수고한 자들(7).

 

“내 친척이요, 나와 함께 갇혔던 안드로니고와, 유니아에게 문안하라, 그들은 사도들에게 존중히 여겨지고, 또한 나보다 먼저,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라.”

 

(1) 안드로니고와 유니아(7).

 

바울은 이들을, 다음과 같은 4가지로 언급했다. 그들은 ① 바울의 친척이고 ② 바울과 함께 감옥에 갇혔으며 ③ 사도들에게도 존중히 여겨지고, ④ 바울보다 먼저, 예수님을 믿은 사람이었다.

 

바울이 그를 ‘친척’(슁게네스, 혈연, 동족)으로 불렀다고 해서, 그를 꼭 바울의 친척으로, 생각할 필요는 없다. 왜냐하면 바울은, 11절에서 친척이 아닌, 헤로디온을 ‘내 친척 헤로디온’이라 불렀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들은 정말 친척일 수도 있고, 친척처럼 가깝게 지내는 사이로 볼 수 있다.

 

안드로니고(안드로니코스) 아네르(남편, 남자) + 니코스(정복, 승리) = 남자의 승리라는 뜻이다. 안드로니고는 남성이 분명하다. 헬라이름인데 로마황제 가문에서도 나오고, 석방된 노예 이름으로도 나온다. 유니아는 유니아누스나, 약칭 유니아스라는 남성일 수도 있다(NIV, RSV, NASB,…).

 

유니아(KJV, NRSV, REB)는, 로마여성의 헬라적 형태일 수도 있다. 13세기 이전의 주석가들은 여성으로 보았고, 13-20C 중엽까지 주석가들은, 남성으로 보았고, 최근 주석가들은 다시, 여성으로 보는 경향이 지배적이다. 그렇다면 유니아는, 여자 사도가 될 수 있다.

 

헬라어(엔)은 영어(in, among)과 같다. (NIV)는 “they are outstanding among the apostles” (그들은 사도들 가운데, 뛰어난 사람들이었다)로 기록했다. 즉, by가 아닌 among이다. 한 마디로, 유니아는 사도들에게, 귀중히 여김을 받은 사람이 아니라, 사도 중에 한 사람으로도 볼 수 있다.

 

그러면 신약성경에서, 볼 수 없는 여사도가 된다. 따라서 하나님을 위한 사역에, 남녀차별이 있을 수 없음을 보여준다. 여성목사가 안 된다고 하는 사람들은, 참조해야 할 말씀이다. 그러나 유니아는 여성인지 아닌지, 확인할 수 없기에, 이 말씀 위에, 확고한 교리는 세울 수 없다.

 

유니아가 여성이었다면, 함께 언급하였기에, 부부였을 것이다. 이들은 바울보다 먼저, 그리스도 안에 있는 신앙의 선배지만, 파트너가 되어서 잘 섬겼다. 이들은 스데반 순교 때, 믿은 것으로 추정한다. 믿음의 선배였지만, 사도 바울을 위해, 기도해 주는 사람이었다.

 

사도들에게(중에) 존중히 여겨졌지만, 함께 갇혀서, 고난을 받았고, 좋은 파트너가 될 수 있었다. 힘든 과정을 잘 견디면, 사람들에게 존중히 여김을 받는다. 교회가 작아도, 함께 하면, 힘이 있다. 너만 수고하게 된다면, 어찌 하나가 되겠는가? 목회자 가족이라도, 같이 갇히기는 참 어렵다.

 

그런데 안드로니고와 유니아는, 복음을 위하여, 바울과 함께 갇혔다. 모든 것을 같이 짊어지고, 함께 갇히는 사랑이 있었다. 이와 같이, 함께 갇히는 사역을 한 사람들의, 이름이 올라갔다. 그들은 사도들에게(중에), 존중히 여겨진다고 했다. 이들을 매우 존귀하게 생각했다.

 

(3) 암블리아, 우르바노, 스다구, 아벨레, 아리스도불로(8-10).

 

“또 주 안에서, 내 사랑하는 암블리아에게 문안하라,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의 동역자인 우르바노와 나의 사랑하는, 스다구에게 문안하라, 그리스도 안에서 인정함을 받은, 아벨레에게 문안하라,

 

아리스도불로의 권속에게 문안하라.” 바울은 또 다른 5명에게, 인사를 전하고 있다.

 

(1) 내 사랑하는 암불리아(8)와 스다구(9下)

 

바울은 그들을 ‘주 안에서, 내 사랑하는 암블리아(스다구)’라고 불렀다. ‘암블리아’(암플리아스, 로마 성도)와 ‘스다구’(스타퀴스, 이삭)은, 주 안에서 사랑하는(아가페토스) 자라고 했다. 암블리아는 로마식 이름으로, 당시에 노예들에게 흔히 붙여졌던 이름이었다. 바울은 암블리아와 스다구를 매우 사랑했다. 암블리아는 연약한 자기에, 더욱 사랑하여 주었을 것이다.

 

(2) 우리의 동역자인 우르바노(9中).

 

9-10절에, 다른 4명의 이름을 언급했다. 그런데 이들의 이름은, 다른 성경에는 발견되지 않는다. 바울은 우르바노를 가리켜 ‘나의 동역자’라고 불렀다. 바울과 함께, 선교 사역에 참여했던 사람이다.

 

(3) 그리스도 안에서 인정함을 받은 아벨레(10上).

 

아벨레는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의 ‘인정함을 받은’(도키모스, 연단된), 신실한 신앙인이었다. 진정한 신앙인은, 사람의 인정보다, 주님의 인정을 받을 수 있어야 한다. 시험을 통과한 사람이다.

 

(4) 아리스도불루 권속(가족)에게, 문안하라.

 

아리스도불루는, 헤롯 대왕의 손자요, 클라디우스 황제(행18:2)의 친구이기도 했다(요셉푸스 고대사 20장-1:1). 로마교회는 이와 같이 다양한 신분과, 배경을 가진 사람들이, 모여 있었다.

 

이러한 다양한 사람들을, 바울은 동역자와 친구로 사귀고 있었다. 바울의 효과적인 선교의 열매는 이런 수많은 사람들의, 숨은 봉사와 동역이 함께해서, 이루어진 열매였다. 바울은 다양한 성도들과 함께 일했으며, 그들의 협조를 받아서, 짧은 시간 안에, 온 세상에 복음을 전할 수 있었다.

 

그러므로 우리도, 혼자 일 하려고, 하지 말고, 다른 사람들과 함께, 복음을 전할 수 있어야 한다. 서로 환영하고, 다른 사람들의 수고를 인정해 주라. 고통당하는 자와, 함께 할 수 있기를 바란다. 다른 사람들에게 힘을 주는, 성도와 가정이 되기를 축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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