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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약 --------------------/베드로후서

벧후 3장 8-14절(주님의 오심을 기다리는 교회) - 서명성

by Preacher 2023. 12.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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벧후3장 8-14

주님의 오심을 기다리는 교회

서명성 목사 2014.11.30.

팔로마한인교회 http://palomarkc.org/

 

Food Bank Drive 실시하는 날이면 어떤 사람들은 새벽기도 하는 시간인 아침 6시부터 문 앞에 서서 음식을 나누어주기 시작하는 정오까지 기다립니다. 특히 지난번에는 감사절을 앞두고 터어키가 나왔다는 소문을 듣고 더 많은 사람들이 몰려들었습니다. 일찍 와서 기다린 사람들은 다른 때보다 풍성하게 나온 음식을 받아들고 기뻐했지만 여러 가지 사정으로 늦게 온 사람들은 빈손으로 돌아가야만 했습니다. 아브라함 선교회에서는 핫도그와 음료수를 준비하여 집사님들과 정성껏 섬김으로 음식을 받으러 온 사람들을 즐겁게 해주었습니다. 우리의 인생에는 크고 작은 기다림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특히 꿈을 이루기 위한 인생 설계에는 기다림이 있어야 합니다. 씨를 뿌리는 농부들은 풍성한 수확을 기다립니다. 열심히 공부하는 학생들은 좋은 학교에 진학하든지 좋은 직장에 취직하는 것을 기다립니다. 장사하는 분들은 작년보다 더 높은 수익을 기대하며 기다립니다. 그런데 기다린다고 원하는 대로 이루어지는 것은 아닙니다. 이 자리에 계신 분들은 무엇을 어떻게 기다리고 있습니까?

 

달력을 보면 30일 밑에 대강절이라 적혀 있습니다. 영어로는 advent라 하는데 출현, 도래한다는 의미를 가집니다. 대강절은 성탄절 4주전 주일부터 시작되는데 오늘이 바로 그날입니다. 예수님은 2000년 전에 유대 땅에 오셨습니다. 우리의 구원을 위하여 오셨습니다. 우리 죄를 대신 지시고 십자가에 죽으셨으나 사흘 만에 다시 사셨습니다. 하늘에 오르신 주님은 이 땅에 다시 오실 것입니다. 대강절은 성탄절을 앞두고 다시 오실 주님을 맞이하기 위하여 준비하는 절기입니다. 예수님의 재림을 맞이할 준비가 제대로 되어있다면 성탄절을 맞이할 준비가 제대로 되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어떤 자세로 다시 오실 주님을 기다려야 하는지 함께 살펴보고자 합니다.

 

1세기의 경건한 이스라엘 백성들은 선지자들의 예언을 믿고 로마의 압제에서 해방을 가져주고 경제적 사회적으로 불안한 상황에서 하나님의 공의를 실천하고 샬롬을 가져다 줄 메시아의 오심을 간절히 기다렸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정하신 때에 예수님이 오셨을 때 유대인들의 반응이 어떠하였습니까? 예언이 이루어진 것을 감사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국가적인 환영의 행사를 벌였습니까?

 

그들의 대표적인 반응이 마태복음 2장에 나옵니다. 예수님의 탄생에 먼저 반응을 보인 것은 하나님의 언약과 전혀 상관없는 것처럼 보이는 이방인인 동방 박사들이었습니다. 그들은 어느 날 밤하늘에 빛나는 신비한 별을 발견합니다. 그들은 그 별을 왕의 탄생의 징조로 알고 별의 임자를 찾아 길을 떠납니다. “유대인의 왕으로 나신 이가 어디 계시뇨? 우리가 동방에서 그의 별을 보고 그에게 경배하러 왔노라” 박사들이 던지는 질문 때문에 헤롯왕과 온 예루살렘이 듣고 소동을 벌입니다. 유대인의 왕이 태어났다는 소식에 가장 민감한 반응을 보인 사람은 물론 헤롯왕입니다.

 

헤롯은 그 아기의 탄생을 왕권에 대한 위협으로 생각하고 그 장소가 어디인지 종교 지도자들에게 묻습니다. 그들은 미가 선지의 예언을 기억하며 메시아의 탄생 장소가 유대 베들레헴이라고 주저하지 않고 대답합니다. 종교지도자들은 메시아가 장차 오실 것도 알고 베들레헴에서 태어나게 될 것도 알고 있었지만 유대인의 왕이 태어난 사실을 인하여 흥분하거나 그 분을 만나러 베들레헴에 가지는 않았습니다. 그들의 지식은 공허한 지식이요, 그들의 기다림은 막연한 기다림입니다. 박사들은 유대인의 왕을 찾아 수만리를 왔지만 종교지도자들은 아기 예수를 향하여 한발자국도 떼지 않습니다.

 

헤롯은 박사들에게 별이 나타난 때를 자세히 묻고 그 아이가 있는 장소를 알려주면 자기도 그 아이에게 찾아가서 경배를 하겠다고 마음에도 없는 말을 합니다. 유대인들의 무덤덤한 반응은 예수님이 태어날 때만 나타난 것이 아닙니다.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웠느니라 하시면서 예수님께서 공생애 사역을 시작하셨습니다. 천국 복음을 전하시고 수많은 기사와 이적을 행하셨으나 대부분의 유대인들은 예수님을 영접하지 않았습니다. 도리어 종교지도자들을 중심으로 예수님을 대적하다가 마지막에는 하나님의 아들을 하나님을 모독하였다는 죄목으로 십자가에 달아 죽입니다.

 

하나님은 당신의 백성들이 예수님을 영접하기 원하셨으나 그들은 끝내 거부합니다. 예수님은 “예루살렘아 예루살렘아 선지자들을 죽이고 네게 파송된 자들을 돌로 치는 자여 암탉이 그 새끼를 날개 아래에 모음 같이 내가 네 자녀를 모으려 한 일이 몇 번이더냐 그러나 너희가 원하지 아니하였도다 보라 너희 집이 황폐하여 버려진바 되리라”(마 23:37-38) 하시면서 장차 망할 예루살렘 성을 안타깝게 바라보셨습니다. 예수님이 오늘 우리를 바라보시면 무슨 말씀을 하시겠습니까? 이 자리에 계신 분들은 정말로 주님을 영접하셨습니까? 그분을 나의 주님으로 왕으로 모시고 있습니까? 정말로 주님의 다시 오심을 사모합니까? 이 땅에서 주님에 대한 반응이 우리의 영원한 운명을 결정합니다. 유대인들을 지켜보는 예수님의 마음을 헤아린다면 우리가 성탄절을 어떻게 맞이해야 할지 알 수 있습니다.

 

사도 베드로가 베드로 후서를 쓰게 된 동기는 교회 내부에서 일어나는 거짓 선생들에게 경고를 하기 위함입니다. 예나 지금이나 이단들은 하나님을 공개적으로 욕하고 비방하기보다 은밀하게 복음과 성경의 가르침을 왜곡하여 믿음이 연약한 자들을 믿음에서 멀어지게 합니다. 대적들은 “주께서 강림하신다는 약속이 어디 있느냐 조상들이 잔 후로부터 만물이 처음 창조될 때와 같이 그냥 있다”(3:4)고 합니다. 예수님이 승천하신 후에 다시 온다고 하였는데 한 세대가 지나도 오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주님의 재림은 없으니 그런 것을 믿지 말라고 합니다. 그들은 재림을 부인하기 때문에 심판에 대한 두려움이 없고 행위에 대한 심판도 믿지 않습니다. 그들의 삶의 특징은 호색과 탐심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거짓 선지자들을 판단할 때 그 열매로 그 나무를 알라고 하셨습니다(마 7:15~16). 이런 사람들은 주님이 다시 오실 때에 전혀 준비되지 않은 모습으로 있다가 멸망을 당할 것입니다.

 

주님의 재림이 지연되는 이유(8~9)

 

1) 하나님의 시간 개념이 사람의 것과 다르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자들아 주께는 하루가 천 년 같고 천 년이 하루 같다는 이 한 가지를 잊지 말라.”(3:8)

 

재림이 지연되는 것 같은 현상에 대해 베드로는 먼저 하나님의 영원성과 인간의 유한성을 들어 해명합니다. 하나님은 시간 속에서 역사하시지만 그와 더불어 시간을 초월하여 계시면서 세상의 과거와 현재와 미래를 모두 아시고 당신의 뜻을 이루어가십니다. 따라서 우리가 원할 때 우리 바라는 대로 일이 이루어져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은 교만입니다. 시간의 주인은 지혜와 권능을 가지신 하나님이심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내 생각이 너희의 생각과 다르며 내 길은 너희의 길과 다름이니라 ... 내 길은 너희의 길보다 높으며 내 생각은 너희의 생각보다 높음이니라.”(사 55:8-9)

 

모든 일은 하나님의 때에 하나님의 방법으로 이루어집니다. 따라서 우리가 인정해야 할 것은 하나님의 때가 가장 좋은 때라는 것입니다. 우리의 생각과 달리 일이 진행된다할지라도 여전히 하나님을 신뢰하고 하나님의 뜻대로 살아야 합니다.

 

2) 하나님의 선한 목적을 이루기 때문입니다

 

“주의 약속은 어떤 이들이 더디다고 생각하는 것 같이 더딘 것이 아니라 오직 주께서는 너희를 대하여 오래 참으사 아무도 멸망하지 아니하고 다 회개하기에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3:9)

 

재림의 지연에는 더 근본적인 이유가 있습니다. 하나님은 약속을 잊으셨거나 능력이 부족해서가 아닙니다. 한 사람도 멸망치 않고 회개의 자리에 이르기를 바라시는 하나님의 인내와 사랑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모든 사람이 다 구원을 얻고 진리를 알게 되기를 원하십니다. 물론 모든 사람이 다 구원을 얻기를 원하신다는 표현은 모든 인간이 궁극적으로 다 구원을 받는다는 의미가 아닙니다. 하나님의 마음이 그렇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은 사랑의 하나님이시지만 동시에 공의의 하나님이십니다. 재림의 시기를 늦추어 더 많은 사람들을 구원하시려는데 하나님의 크신 사랑을 이해하지 못하고 도리어 재림이 없다고 하며 예수님을 믿지 않아 구원을 받지 못한다면 안타깝습니다. 하나님이 오래 참으시기는 하지만 영원히 참지는 않으신다는 사실입니다. 하나님의 때가 되면 이 악한 세상을 심판하십니다. 예수님의 재림 시에 무서운 심판이 함께 임하는 것을 계시록을 통하여 살펴보았습니다. 그 때는 더 이상 회개의 기회가 없습니다. 은혜의 시대가 끝이 납니다.아직도 이 약속을 믿지 않는 이들이 우리 주위에 남아 있는 동안 우리는 불평할 수 없습니다. 한 사람이라도 더 회개하기 원하시는 하나님의 마음으로 믿지 않는 영혼을 바라보며 영혼의 추수에 힘을 써야 합니다.

 

갑자기 임하는 재림

 

우리가 보기에는 주님의 재림이 지연되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것은 우리의 느낌일 뿐 하나님의 시간에는 그렇지 않으며 도리어 더 많은 사람이 회개할 때까지 오래 참고 계신 것입니다. 그날은 도둑 같이 임한다고 합니다. 도둑이 언제 들어올 지 미리 안다면 철저히 준비하여 피해를 막을 수 있지만 알지 못하기에 방심하다가 당합니다. 예수님께서“그 날과 그 때는 아무도 모르나니 하늘에 있는 천사들도, 아들도 모르고 아버지만 아시느니라”(막 13:32)고 하셨습니다.

 

마태복음 24장에 보면 제자들이 예수님께 묻습니다. “어느 때에 이런 일이 있겠사오며 또 주의 임하심과 세상 끝에는 무슨 징조가 있사오리이까” 그때 예수님은 자칭 그리스도라 하는 자들이 많이 나타나 사람을 미혹할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민족이 민족을, 나라가 나라를 대적하는 전쟁이 일어나겠고 곳곳에 기근과 지진이 있을 것입니다. 성도들이 박해를 많이 받을 것입니다. 거짓 선지자가 많이 일어나 많은 사람을 미혹할 것이며 불법이 성하므로 많은 사람의 사랑이 식어진다고 하셨습니다.

 

또한 천국 복음이 모든 민족에게 증언되기 위하여 온 세상에 전파된다고 합니다. 왜 하나님은 재림의 날을 미리 알지 못하게 하십니까? 사람들의 유익을 위함입니다. 사람들이 나쁜 데는 얼마나 머리를 잘 굴리는지 모릅니다. 재림의 날을 미리 알면 사람들은 그 날이 가까워올 때까지 신앙생활을 제대로 하지 않을 것입니다. 우리가 영적 긴장 속에 항상 깨어 있어 정신을 차려야 합니다. 등불의 기름을 충분히 준비하고 신랑을 기다리는 슬기로운 처녀들처럼 그리스도의 재림의 날을 기다려야 합니다.

 

재림은 인간들의 예상이나 기대와 상관없이 하나님의 시간에 하나님의 방법대로 순식간에 이루어집니다. 재림의 날은 천지의 대재앙을 수반합니다. 악이 관영하던 노아시대에 하나님께서 물로 땅을 심판하셨는데 노아 때보다 더 패역한 마지막 때에는 불로 하늘과 땅을 심판하실 것입니다. 마지막 날에는 온 하늘이 불에 휩싸여 큰 소리로 순식간에 떠나 버리고 하늘에 있는 해나 달이나 별들이 뜨거운 불에 녹아지고 땅에 있는 모든 것들이 타버릴 것입니다. 이때는 죽은 자들도 다 살아나서 하나님의 심판을 받게 됩니다.

 

예수 믿는 사람들의 복이 무엇입니까? 과거의 모든 죄가 예수님의 피로 깨끗이 씻긴다는 점입니다. 그래서 다윗은 하나님 앞에서 죄를 용서받은 자가 복이 있다고 했습니다. 따라서 이 땅에 있는 모든 것은 불타기 위하여 남겨져 있는 것이지 영원히 존재하지는 않습니다. 이 세상의 모든 것들이 이렇게 다 없어지고 만다면 우리는 어떻게 되어야 합니까? 결국 불에 넣어도 타지 않는 사람들이 되어야 합니다.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가 어떻게 평소보다 일곱 배나 뜨거운 용광로 불에 던져져도 머리털 하나 상하지 않고 살아났습니까? 믿음으로 하나님을 붙들었기 때문입니다. 세상의 재물이나 명예나 권려도 우리를 지켜주지 못합니다. 오직 정금 같은 믿음으로 주님과 동행하며 그분의 말씀에 순종하며 산 삶만이 우리를 지켜줍니다.

 

유대인들은 ‘새 하늘과 새 땅’을 모든 피조물이 완전한 조화와 평화를 이루는 세상으로 이해했습니다. 새 하늘과 새 땅이 어떤 곳일까요? 현재 사는 지구 말고 하나님이 예비하신 또 다른 별을 가리킬까요? 현재 우리가 가진 제한된 지식이나 경험으로는 새 하늘과 새 땅이 어떻다고 말할 수 없습니다. 새 하늘과 새 땅이 임하게 될 때 가장 두드러진 변화는 이미 죽은 하나님의 백성이 다시 살아나고 다시는 죽음을 경험하지 않게 되는 것과 사람이 죄의 허물을 벗고 천사의 상태와 같아지는 것입니다.

 

그때 우리가 현재와는 차원이 다른 몸을 가지고 될 것이고 현재와는 차원이 다른 곳에서 영원토록 살게 됩니다. 구약에 의하면 주의 날은 이스라엘에게는 승리의 날이요(욜 3:14~18), 대적들에게는 어두움과 패배의 날로 묘사됩니다(사 13:9~11). 마지막 때에 그리스도를 믿는 자들은 영원한 구원 속으로 들어가지만 그리스도를 믿지 않는 자들은 영원한 멸망 속에 빠집니다. 재림 때에 사람들이 행한 모든 것이 낱낱이 드러납니다. 예수님의 재림 때 천지와 회개치 않은 인류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이 공개적으로 진행됩니다. 심판 후에는 새 하늘과 새 땅이 나타납니다. 그곳에 들어가려면 하나님의 뜻대로 살아야 합니다. 의로운 삶을 살아야만 합니다.

 

* 재림을 준비하는 자세:

 

1) 거룩한 행실과 경건함으로 그날을 바라봅니다

 

베드로는 주님의 재림을 언급한 후에 ‘너희가 어떠한 사람이 되어야 마땅하뇨’라는 수사적 질문을 던지면서 재림을 준비하는 그리스도인의 자세에 대해 말합니다. 종말론 세미나도 좋고 종말론에 관한 책을 읽는 것도 좋지만 삶 속에서 어떻게 하나님의 뜻대로 행하면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야 할지 생각하며 실천하는 것이 더욱 중요합니다. 그래서 베드로는 믿는 자들에게 하나님의 날이 임하기를 소망 중에 바라보면서 “거룩한 행실과 경건함으로” 살 것을 강조합니다. 이 세상과 세상에 속한 모든 것들이 불 가운데 녹아져 버릴 것이기에 세상에만 관심을 두지 말고 예수 그리스도에게 소망을 두어야 합니다.

 

거룩하다는 말에는 구별한다는 의미가 있습니다. 성도들은 성경적인 가치관을 가지고 부르심에 합당한 삶을 살아야 합니다. 경건으로 번역된 ‘유세베이아’는 ‘유’라는 접두어와 ‘세베이아’라는 말이 결합한 단어입니다. ‘유’라는 말은 영어의 ‘well'이라는 뜻이고, ‘세베이아’는 ‘섬긴다, 봉사한다’라는 뜻입니다. 그러고 보면 경건이란 “잘 섬긴다” 즉, 하나님과 이웃을 잘 섬기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아는 경건의 사전적 의미는 ‘공경하고 마음으로 깊이 삼가고 조심함’입니다. 상당히 유교적인 사고입니다.

 

이러한 경건은 우리에게 엄청난 금욕을 요구합니다. 무엇을 하면 안 되는 율법적 규범이 경건으로 이해되면서 우리는 하지 말아야 할 것에 대한 금기를 만들기 시작했습니다. “교회에서 드럼이나 기타 같은 것을 예배시간에 사용해서는 안 된다!” “교회에서는 뛰어다니거나 장난쳐서는 안 된다!” “주일을 거룩하게 지키기 위해서는 물건을 사면 안 된다!” “교회에서는 청년들이 연애를 하면 안 된다!” 틀린 말은 아닙니다. 왜냐하면, 이런 일이 깊이 삼가고 조심하는 데는 방해가 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런 사전적인 의미에서 경건을 지킨다고 하나님께서 바라시는 사람이 되는 것을 보장합니까? 야고보서 1장 26~27절을 보시면 “누구든지 스스로 경건하다 생각하며 자기 혀를 재갈 물리지 아니하고 자기 마음을 속이면 이 사람의 경건은 헛것이라 하나님 아버지 앞에서 정결하고 더러움이 없는 경건은 곧 고아와 과부를 그 환난 중에 돌보고 또 자기를 지켜 세속에 물들지 아니하는 그것이니라” 항상 마음으로 깊이 삼가고 조심하면서 사는 것만을 경건으로 생각한다면 신앙생활이 쉽지 않을 것입니다. 마땅한 경건은 하나님 앞과 사람들 앞에서 정직하게 서는 것입니다. 그리고 잘 섬기는 것입니다. 복음에 합당한 삶을 사는 것은 우리가 조심해서만 되는 것이 아니라 우리에게 주신 기쁨을 누리면서 자연스럽게 나오는 행동이어야 합니다. 나를 지키는 거룩한 행실과 더불어서 하나님과 이웃을 잘 섬기는 봉사의 기쁨이 있어야 합니다.

 

우리는 재림의 날이 속히 오도록 최선을 다해야 합니다. 여기서 ‘간절히 사모하다’로 번역된 헬라어 스퓨돈타스는 ‘재촉하다’는 뜻도 있습니다. 재림이 속히 오기를 재촉하는 것은 죄인들이 회개할 수 있도록 복음을 전하는 일입니다. 하나님의 원대한 계획과 섭리에는 변함이 없지만 그것을 적용하는 과정에서 사람들의 하나님께 대한 반응이 영향을 미칩니다. 예수께서 주기도문에서 “나라이 임하옵시여”(마 6:10)라고 기도하라고 가르치셨으며 종말에 관한 예언 중에는 “이 천국 복음이 모든 민족에게 증언되기 위하여 온 세상에 전파되리니 그제야 끝이 오리라”(마 24:14) 하시면서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는데 성도들의 순종이 중요함을 보여줍니다. 재림과 심판의 날에 하늘이 불타고 세계가 녹아버리는 대재앙이 일어나지만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의 약속대로 새 하늘과 새 땅에 있게 됩니다. 그것은 새로운 질서가 지배하는 곳이며, 의로운 자들이 거하는 곳입니다. 따라서 그곳에 살게 될 성도들은 지금부터 그곳에 살기에 합당한 삶을 살도록 힘쓰면서 그날을 맞이할 준비를 해야 합니다. 모든 성도들은 경건하게 살다가 그날에 주 앞에 점도 없고 흠도 없이 평강 가운데 나타나기를 힘쓰라고 합니다. 구약 시대에 제물을 바칠 때 온전하여 흠이 없는 짐승만을 선별하여 희생제사로 드렸습니다. 베드로 후서 2:13에서 베드로는 불의를 행하며 방탕한 생활을 즐기는 거짓 선생들을 점과 흠으로 표현하였습니다. 죄가 이 세상에 들어옴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과의 평화가 깨어졌으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상에서 보여주신 대속의 죽음을 통하여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 막힌 담이 허물어졌습니다. 이제 기도와 말씀을 통하여 영적으로 깨어있으며 하나님과 동행하면서 점도 없이 흠도 없이 거룩하고 경건한 모습으로 나타나기를 힘써야 합니다.

 

2) 생명 운동을 활발하게 전개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재림이나 심판에 대해 필요한 계시를 충분히 허락하셨습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은 재림과 심판에 대해 주어진 계시에 만족하고 재림을 준비해야 합니다. 올바른 재림의 준비는 때와 시기를 정확히 아는 데 있지 않습니다. 정신을 차리고 깨어서 거룩하고 경건한 삶을 살아가는 데서 시작됩니다. 새 하늘과 새 땅을 간절히 소망하는 성도는 이 세상에서 그리스도인의 사명을 제대로 감당하면서 장차 올 세상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주님이 기뻐하시는 열매를 거두어야 합니다. 한때 시한부 종말론자들이 재림의 시기를 안다고 하면서 사회적인 물의를 일으킨 적이 있었습니다. 이에 대한 반작용으로 재림에 대하여 무관심하고 재림에 대한 말씀에 거부반응을 보인다면 잘못된 것입니다.

 

시한부 종말론자들이 사단의 계략에 속아 사단의 도구가 되었지만 그것 때문에 재림을 무시 하는 것도 사단의 계략에 빠지는 것입니다. 그리스도가 언제 다시 오실지 알 수 없는 것은 항상 깨어 있어 준비하며 기다리는 삶을 살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 소망을 소홀히 하기 시작하면 주님에 대한 사랑이 식어지고 세속적이며 불신앙적인 생활로 빠지게 됩니다. 재림을 기다리는 삶은 세상에서의 삶을 부정하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하나님의 심판대에서 있을 삶의 회계를 생각하면서 사명을 다합니다. 또한 재림을 기다리는 성도는 지금이 구원의 때이므로 잃어버린 자들을 구원에 이르게 하기 위하여 최선을 다합니다.

 

계시록 21장과 22장에 나오는 새 예루살렘 성의 모습은 마지막에 완성될 교회의 모습입니다. 하나님이 마지막 날에 이 세상의 죄악에 속하는 것들을 다 불로 소멸하실 것입니다. 악은 어떤 모양이라도 제거될 것입니다. 그러나 악에 속하지 않은 부분은 보존하시고 회복시킬 것입니다. 마지막 날에 인간이 거하는 땅과 하나님이 거하시는 하늘이 신비롭게 서로 연결되어 하나가 될 것입니다. 우리는 장차 어린 양의 혼인 잔치에 신부로 참여할 것이지만 이 땅에서 신부수업을 해야 합니다. 이 땅에서도 하나님의 영광을 누리고 맛보고 살아야 합니다.

 

계시록에 나타난 하나님의 나라는 에덴을 완전히 회복하여 하나님의 신적인 생명으로 가득찬 곳입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생명으로 성숙하게 되는 장서, 생명으로 생명을 낳는 장소, 생명으로 교제하는 장소, 생명으로 서로 거룩한 영향력을 끼치는 장소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도 이 땅에 사는 동안 생명 운동을 힘있게 펼쳐야 합니다. 잃어버린 영혼들에게 다가가 전도하고 예수 생명을 이식하고 성숙한 길로 인도해야 합니다. 그러려면 우리가 먼저 믿음에 든든히 서고 다른 사람들을 섬길 수 있을 만큼 영적으로 성숙해져야 합니다. 그리고 나서 부지런히 영적 추수꾼의 사명을 감당해야 합니다.

 

우리가 이렇게 거룩하고 경건하게 신앙생활을 할 때 우리는 자연스럽게 주님의 재림을 준비하는 것이 됩니다. 이번 대강절을 계기로 영적으로 깨어 있어 마음을 새롭게 하며 주님을 맞이할 준비를 잘 감당하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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