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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약 --------------------/베드로후서

벧후 3장 18절(다른 목표를 위해 사는 그리스도인 2) - 이삼규

by Preacher 2024. 3. 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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벧후3장 18

다른 목표를 위해 사는 그리스도인(2)

이삼규 목사 20190407

낙양교회 http://nakyang.onmam.com

 

벧후 3:18 오직 우리 주 곧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그를 아는 지식에서 자라 가라 영광이 이제와 영원한 날까지 그에게 있을지어다

 

우리는 십자가를 중심으로 나뉜 네 개의 관계에 서 있다고 말씀드렸습니다. 하나님과의 관계, 자신과의 관계, 이웃과의 관계 그리고 세상과의 관계입니다. 이 네 가지를 중심으로 다섯 가지 목표가 있다고 했습니다.

 

①예배(Worship)-온 맘을 다해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

②양육(Instruction)-날마다 예수님을 닮아 가는 것.

③교제(Fellowship)-하늘 가족사랑 안에서 살아가는 것.

④전도(Evangelism)-복음으로 세상을 축복하는 것.

⑤봉사(Service)-이웃과 세상을 주님의 이름으로 섬기는 것.

 

지난 주일에 다른 목표를 위해 사는 그리스도인의 첫 번째 목표인 예배 즉 온 맘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하라는 말씀드렸습니다. 오늘은 두 번째 목표인 “양육” 즉 날마다 예수님을 닮아 가는 것을 말씀드리겠습니다. 박목월 시인이 중학생 때 쓴 시에 1948년 손대업 선생이 곡을 붙여 국민 동요가 된 노래가 있습니다. “송아지 송아지 얼룩송아지 엄마소도 얼룩소 엄마 닮았네” 평범한 동요인 것 같은데 여기에 심오한 진리가 숨겨져 있습니다. 그것은 식물이든 동물이든 모든 생명체는 같은 유를 재생산한다는 것입니다. 말은 말을, 개는 개를, 양은 양을, 사람은 사람을 낳습니다. 이것은 영적 영역에도 적용됩니다. 하나님이 우리 아버지시고, 우리가 그분의 자녀임이 틀림없다면 우리의 성품과 말과 행동은 누구를 닮아야 할까요? 만약 여러분의 자녀가 옆집 아저씨를 닮았다면 어떻게 될까요? 자식은 아버지를 닮는 것이 마땅한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이 이루어야할 두 번째 삶의 목표는 날마다 예수님을 닮아 자라가는 것입니다. 자라지 못하는 것은 큰 슬픔입니다. 자라지 못한 아이들 중에는 소두증이나 대두증에 걸린 아이들이 있습니다. 나이는 먹었는데 머리가 태어날 때 그대로인 소두증이 있고, 머리는 엄청 큰데 몸이 자라지 못하는 대두증도 있습니다. 그런가 하면 아이가 정상적으로 자라지 못하고 빨리 늙어버리는 조로증도 있습니다. 원기라는 목사님의 아들이 있는데 작년 다니엘 기도회 때 그 아버지가 간증하지 않았습니까?

 

하나님의 소원

 

하나님의 소원이 가장 잘 드러나는 성경 구절이 바로 오늘 본문 말씀입니다.

 

벧후 3:18 오직 우리 주 곧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그를 아는 지식에서 자라 가라 영광이 이제와 영원한 날까지 그에게 있을지어다

 

이 말씀은 베드로가 쓴 마지막 편지의 마지막 장, 마지막 구절에 기록된 베드로의 유언이자 하나님의 소원입니다. 신약 성경이 기록된 헬라어에서 이 단어는 현재형으로 사용되고 있습니다. 헬라어의 현재형은 사건이나 동작의 시점을 말하지 않고, 상태를 말합니다. 즉, 그 일이 계속 진행되는 상태를 말합니다. C. S. 루이스는 “계란은 부화되거나 썩어가거나 둘 중 하나다”라고 말합니다. 중간 상태는 없다는 말입니다. 우리의 영적 상태도 마찬가지입니다. 자라거나 퇴보하거나 둘 중의 하나입니다.

 

여러분! 여러분의 영적 상태는 어떻습니까? 성장하십니까? 아니면 퇴보합니까? “자라 가라”는 말씀은 충고나 조언이나 부탁이 아닙니다. 그것은 왕의 명령입니다. 자라지 않는 것은 하늘의 왕께 불순종하는 것입니다. 이 동사는 ‘현재형, 명령형’일뿐 아니라 능동태 동사입니다. 식물처럼 가만히 있으면 자라지 못합니다. 거기에는 끊임없는 노력과 실천이 필요합니다. 자전거를 잘 타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페달을 열심히 밟아야 넘어지지 않고 앞으로 달려 갈 수 있습니다.

 

영적 성장의 오해

 

우리가 하나님의 소원을 이루어드리기 위해서는 예수님을 닮아가야 하는데 영적 성장에 대한 잘못된 생각부터 교정해야 합니다.

 

1)영적 성장의 개념에 관한 것입니다.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하는 착각은 종교적 사회화를 자신의 영적 성장과 동일시하는 것입니다. 교회 생활에 익숙해지고, 종교적 분위기에 푹 젖어들며, 교회 문화가 몸에 배고, 더 나아가 교회나 성경에서 요구하는 신앙생활의 여러 규칙들을 지키는 것을 영적성장으로 오해하는 것입니다. 영적 성장이란 그런 외적인 것이 아닙니다. 우리의 인격 중심에서 일어나는 내적인 변화입니다. 예수님을 믿어 하나님의 자녀가 된 우리의 전인격이 아버지이신 하나님을 닮아 자라가는 것입니다. 우리가 아버지를 닮아가려면 아버지를 알아야 닮아갈 것이 아닙니까?

 

요 14:8 빌립이 이르되 주여 아버지를 우리에게 보여 주옵소서 그리하면 족하겠나이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대답하셨습니다.

요 14:9 예수께서 이르시되 빌립아 내가 이렇게 오래 너희와 함께 있으되 네가 나를 알지 못하느냐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보았거늘 어찌하여 아버지를 보이라 하느냐

요 14:10 내가 아버지 안에 거하고 아버지는 내 안에 계신 것을 네가 믿지 아니하느냐 내가 너희에게 이르는 말은 스스로 하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셔서 그의 일을 하시는 것이라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 어떻게 알지를 걱정할 것이 없습니다. 하나님을 보여 주기 위해 예수님이 오셨습니다.

고후 4:4 그 중에 이 세상의 신이 믿지 아니하는 자들의 마음을 혼미하게 하여 그리스도의 영광의 복음의 광채가 비치지 못하게 함이니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형상이니라

골 1:15 그는 보이지 아니하는 하나님의 형상이시요 모든 피조물보다 먼저 나신 이시니

 

우리가 흔히 사용하는 영적 성장이란 말이나, 신학적인 용어로 성화(聖化)란 말이나, 하나님의 자녀로 자라간다는 말이나, 예수님을 닮아간다는 말은 모두 같은 과정을 다르게 표현한 것일 뿐입니다.

 

2)영적 성장의 목표에 관한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그 목표를 자기에게 둡니다. 이만하면 괜찮은 믿음이 아닌가 하는 만족감을 느낍니다. 라오디게아 교회가 그러했습니다.

 

계 3:17 네가 말하기를 나는 부자라 부요하여 부족한 것이 없다 하나 네 곤고한 것과 가련한 것과 가난한 것과 눈 먼 것과 벌거벗은 것을 알지 못하는도다

 

3)성장 목표를 남들과의 비교 우위에 둡니다.

 

남들이 생각도 못하는 ‘성경일독, 큐티, 남 못지않은 기도 생활, 남들보다 열심인 봉사&’ 그러나 우리의 바른 목표는 나 자신도, 남도 아닌 예수님이십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로서 예수님만큼 자라야 합니다. 앞에서 말씀드린 대로 하나님은 우리가 구체적인 목표로 삼고 따를 수 있는, 눈에 보이는 몸을 입고 오셨습니다. 그분이 바로 예수님이십니다. 우리는 예수님만큼 자라야 합니다. 우리의 인격도, 생각도, 사랑도, 시각도, 가치도 예수님처럼 되어야 합니다.

 

엡 4:15 오직 사랑 안에서 참된 것을 하여 범사에 그에게까지 자랄지라 그는 머리니 곧 그리스도라

 

하나님의 형상이란?

 

우리는 십자가를 중심으로 네 가지 관계를 맺고 살아가야 합니다. 하나님과의 관계, 자신과의 관계, 이웃과의 관계, 세상과의 관계 속에서 살도록 지음을 받았습니다. 기독교 교육학자인 로널드 하버마스는 이것을 4C로 설명합니다.

 

①하나님과의 관계=교통(Communion)

②자신과의 관계=성품(Character)

③이웃과의 관계=공동체에 대한 책임(Community)

④세상과의 관계=사명)(Commission)

 

이것을 전자장의 법칙을 설명할 때 쓰는 손 모양으로 설명해 보겠습니다.

 

첫째, 하늘을 향한 엄지입니다.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나타나야 할 교통의 기능을 보여줍니다. 하나님이 인간을 지으실 때, 인간에게 주신 첫째 기능은 온 맘을 다해, 온 혼을 다해, 온 힘을 다해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크고 첫째 되는 것입니다.

 

둘째, 앞으로 뻗은 검지입니다.

 

이웃과의 관계에서 나타 날 공동체적 기능을 떠올리게 합니다. 이것은 가까이는 내 가족에서부터, 내 교회, 내 지역사회, 내 나라, 지구촌 이웃에 이르기까지 인간으로서 담당해야 할 책임과 역할을 말해줍니다. 그것은 “네 이웃을 네 자신같이 사랑하라”(마22;39)는 것이라고 예수님이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안쪽으로 접혀 자신을 가리키고 있는 나머지 세 손가락은 나 자신과의 관계 속에서 무르익어야 할 성품의 변화를 가리킵니다.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자녀로서 정체성과 그에 합당한 성품을 인식하고 계발해야 할 책임이 있습니다.

 

마지막, 손의 아래쪽은 하나님이 지으신 세상과의 관계에서 나타나야 할 사명을 나타냅니다. 이것은 두 가지로 나타납니다.

 

첫째, 하나님이 지으신 자연 세계에 대한 청지기로서의 사명입니다.

 

창 1:28 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시며 하나님이 그들에게 이르시되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땅을 정복하라, 바다의 물고기와 하늘의 새와 땅에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 하시니라

 

둘째, 하나님을 등진 어두움에 있는 세상 사람들에 대한 책임입니다.

 

그것은 복음의 증인으로서 그들과 예수님 사이 만남의 다리가 되는 제사장적 기능을 말합니다. 물론 이 기능은 인류가 타락한 후에 그분의 백성들에게 위임된 새로운 책임입니다. 인간이 타락하면서 이러한 기능은 심각하게 손상되었습니다. 사랑해야 할 하나님은 부인하고, 사랑해야 할 이웃은 수단으로 이용하며, 개발해야 할 나 자신은 훼손하고, 관리해야 할 자연은 우상으로 숭배하거나, 오용과 남용으로 파괴하고 있습니다. 죄는 우리 안에 있는 하나님 형상의 기능을 이렇게 처참하게 손상하고 말았습니다.

 

하나님 형상의 구조

 

첫째 엄지: 인간에게 특별한 육체적 구조를 주셨습니다.

인간의 육체는 동물의 육체와는 다릅니다. 말씀으로 지어진 동물들과 달리 인간의 몸은 하나님이 직접 손으로 흙을 빚어 만드셨습니다. 소위 ‘hand made’입니다. 또한 하나님의 영은 사람의 몸 안에만 거하십니다. 그리스도인의 몸은 하나님이 거하시는 거룩한 집 즉 성전입니다.

 

둘째 검지: 인간에게는 어떤 동물에게도 주시지 않은 특별한 지성적 구조를 주셨습니다.

아담은 그 많은 동물과 식물의 이름을 지어줄 수 있는 놀라운 지적 창조적 능력을 갖고 있었습니다. 인간은 태어나면서부터 세상을 탐구하고, 이해하며, 분석하고, 종합하며, 새로운 것을 창조하는 지적 능력으로 끝없이 발전할 가능성을 지닌 존재로 지음을 받았습니다.

 

셋째 장지: 인간에게는 어떤 동물에도 없는 감정이란 특별한 구조가 있습니다.

인간만이 기뻐하고, 슬퍼하며, 분노하고, 용서하며, 사랑하는 감정을 가지고 있습니다.

 

넷째 약지: 하나님은 인간을 특별한 사회적 존재로 지으셨습니다.

송아지는 어미 몸에서 나온 뒤 네다섯 시간이면 걷기 시작하고, 머지 않아서 어미에게서 독립합니다. 그러나 인간은 일 년이 되어야 걷고, 20년이 넘도록 부모의 보호와 양육을 받은 뒤에야 비로소 독립하는 의존적 존재로 지음을 받았습니다.

 

다섯째 애지: 인간에게는 짐승에게 없는 도덕적 구조가 있습니다.

사람에게만 양심이란 특별한 장치가 장착되어 있습니다. 무엇이 선한 일이지, 무엇이 악한 일인지를 규정하고 분별하는 힘을 받았습니다.

 

마지막으로 손바닥: 하나님이 인간에게 주신 가장 특별한 구조는 영적 구조입니다.

창 2:7 여호와 하나님이 땅의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 생기를 그 코에 불어넣으시니 사람이 생령이 되니라

 

인간은 하나님의 영이 그 몸 안에 거하시는 특별한 영광을 누리는 존재가 되었습니다. 영적 구조는 손바닥과 같아서 다섯 손가락에 해당하는 육체적, 지성적, 감성적, 사회적, 도덕적 구조와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습니다. 바닥이 손가락에 영양과 힘을 공급하고 신경으로 연결되어 있듯이, 영적 구조는 다른 구조에 결정적 영향을 미칩니다. 영적으로 충만하고 건강할 때 육체적, 지성적, 정서적, 사회적, 도덕적으로 건강한 사람이 됩니다. 그런데 문제는 인간이 타락하면서 그 구조가 심각한 손상을 입은 것입니다. 수십 미터 낭떠러지로 굴러 떨어져 형체가 다 뭉그러진 자동차처럼 인간은 누구도 회복시킬 수 없는 치명적 손상을 입게 된 것입니다. 영적으로 하나님을 부인하고, 거역하며, 멸시했습니다. 생각과 삶에서 하나님을 철저하게 삭제한 채 살게 되었습니다. 육체적으로 태어나는 순간부터 온갖 질병과 장애와 사고와 죽음의 위협에 시달리며 살 수밖에 없게 되었습니다.

 

롬 3:23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

롬 6:23 죄의 삯은 사망이요

히 9:27 한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해진 것이요 그 후에는 심판이 있으리니

 

이렇게 깨어진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시키려고 예수님을 우리를 고칠 수선공으로, 우리를 치유할 의사로 보내주셨습니다. 죄의 노예로 팔려 기능과 구조가 비참하게 망가진 우리를 원해 창조된 형상으로 회복시키기 위해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으셨습니다. 그 예수님을 구주와 주님으로 모심으로 하나님의 생명을 얻는 중생의 순간부터 회복은 시작됩니다. 그러나 그 회복은 우리가 이 땅을 떠나 천국에 들어가는 순간 완성됩니다. 이것을 신학적으로는 영화라고 부릅니다. 예수님을 구주와 주님으로 모심으로 회복이 시작되는 시점부터 세상을 떠나는 날 완성되기까지 우리는 매일 매일 회복하는 과정에 있게 됩니다. 이것을 신학적으로는 성화라고 부릅니다. 성화는 다른 말로 하면 “영적 성장”이라고 부릅니다.

 

영적성장

 

1)영적 성장의 목표

 

우리가 본받아 성장해야 할 목표는 예수님이십니다. 양복점이나 양장점에 가면 옷을 만들기 위해서 본이 있습니다. 본을 천위에 올려놓고 선을 그어 잘라내고 박으면 옷이 됩니다. 예수님은 바로 우리의 본이십니다.

 

눅 2:40 아기가 자라며 강하여지고 지혜가 충만하며 하나님의 은혜가 그의 위에 있더라

눅 2:52 예수는 지혜와 키가 자라가며 하나님과 사람에게 더욱 사랑스러워 가시더라

 

예수님은 육체적으로, 지성적으로, 감성적으로, 사회적으로, 도덕적으로 그리고 영적으로 건강한 구조를 유지하셨습니다. 우리도 그래야 합니다. 그것이 왜 필요합니까?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함입니다.

 

2)영적 성장의 동력

 

①은혜의 힘이 필요합니다.

벧후 3:18 오직 우리 주 곧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그를 아는 지식에서 자라 가라 영광이 이제와 영원한 날까지 그에게 있을지어다

 

②성령의 힘이 필요합니다.

고전 3:6 나는 심었고 아볼로는 물을 주었으되 오직 하나님께서 자라나게 하셨나니

고전 3:7 그런즉 심는 이나 물 주는 이는 아무 것도 아니로되 오직 자라게 하시는 이는 하나님뿐이니라

 

③순종의 힘이 필요합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참으로 경험했다면, 또 성령님이 그 안에 계심을 확신한다면 순종하고 싶어지고, 순종할 능력도 얻게 됩니다.

 

3)영적 성장의 방편

 

①말씀-말씀은 우리가 먹고 자랄 양식입니다.

②기도-말씀이 영적 양식이라면 기도는 영적 호흡입니다. 기도는 우리의 생명을 유지하는 산소를 공급하는 통로입니다.

③예배-성숙하고 성장하는 하나님의 자녀는 예배를 생명처럼 여겨야 합니다. 예배를 드리며 하나님이 살아 계심을 확인하고 몸으로 나아가 예배하며 우리가 하나님의 백성임을 선언합니다.

④교제-교회라는 영적 가족이 없이 영적 성장을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⑤전도와 봉사-먹기만 하고 배출하지 않으면 영양이 쌓여 비만에 이르고 몸은 오히려 심각한 문제에 부딪히게 됩니다. 전도와 봉사 없이 우리는 건강한 하나님의 사람으로 자랄 수 없습니다. 흔히 우리가 영적 식욕을 잃는 이유는 영적 에너지를 충전만 했지 사용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전도와 봉사는 성장의 방편이면서 존재의 목표와 기능입니다.

 

2008년 북경 올림픽에서 19번째로 자기 기록을 갱신한 러시아 장대높이뛰기 선수 이신바예바가 있습니다. 그녀는 올림픽에서 5.5m를 넘어 자기 기록을 19번째로 갱신하였습니다. 그는 인터뷰에서 “기록 갱신이 없는 삶은 따분하다.”라고 했습니다. 기록 갱신을 위한 수첩을 지니고 다니면서 끊임없이 기록갱신을 힘쓴 것입니다. 연세대학교 명예교수인 김형석교수님은 올해 100세를 맞이하였습니다. 그런데도 아직도 건강하셔서 강연도 다니고 집필도 꾸준히 하고 계십니다. 그분이 98세에 책을 두 권이나 집필하였는데 얼마나 대단합니까? 그분처럼만 산다면 100세를 살아도 괜찮지 않을까요?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어제보다 오늘이, 지난주보다 이번 주가, 지난 달 보다 이번 달이, 지난해보다 올해가 더욱 주님을 닮아가는 진보가 이루어져야 하지 않겠습니까?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소원이며 우리의 소원이 되어야 합니다. 이 세상 끝날 까지 성장과 진보의 개인 기록이 갱신되는 우리 성도들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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