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신약 --------------------/빌립보서

빌 3장 17-21절(십자가의 원수) - 최태선

by Preacher 2024. 8. 18.
728x90
반응형

빌3장 17-21

십자가의 원수

최태선 목사

어지니교회 http://cafe.daum.net/eojini/

 

얼마 전 티브이에서 추 성훈 또는 아키야마 이야기라는 KBS 스페셜 프로가 방영되었습니다. 추 성훈이라는 재 키야마는. 성훈의 일본 이름입니다. 추 성훈의 아버지는 재일동포 삼세입니다. 그의 할아버지는 1920. 초 일본에 징용을 가게 되었고 해방이 된 후에도 그들은 일본에 남아 살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일본인으로 귀화하지 않고 한국 국적을 가지고 살았습니다. 그런 추 성훈의 아버지에게는 꿈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한국 국기를 달고 금메달을 따는 것이었습니다. 추 성훈의 아버지 또한 유도 선수였습니다. 1970년대 초 그는 한국에서 열리는 전국체전에 재일동포 선수로 참여하여 금메달을 목에 걸었습니다. 그리고 그 대회에 수영 선수로 참가했던 한국인 여자. 지금의 추 성훈의 어머니를 만나 결혼을 하였습니다.

 

아버지의 꿈은 추 성훈에게 이어졌습니다. 그래서 추 성훈도 국적을 바꾸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한국의 국적을 가지고 일본에 사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었습니다. 추 성훈은 뛰어난 유도 선수였습니다. 초등학교 시절부터 각종 대회를 석권하였습니다. 그러나 그는 국제대회에는 참가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의 국적이 한국이기 때문에 일본 대표선수가 될 수 없었던 것입니다. 대회에서 일등을 한 후에 그가 대표가 되지 못하기 때문에 2등을 한 선수가 대표로 뛰어야 하는 상황을 견디기 어려웠다고 그의 어머니는 말했습니다.

 

그러던 그가 성인이 된 후, 그는 그의 아버지 대부터의 꿈, 한국의 국가대표가 되어 금메달을 따는 그 꿈을 이루기 위해 한국으로 오게 되었습니다. 부산 시청의 유도 선수가 되어 조국의 국가대표 선발을 실현하려 한 것입니다. 그러나 국가대표가 되려는 그의 꿈은 쉽사리 이루어지지 않았습니다. 번번이 마지막 대표 선발전에서 심판의 명확하지 않은 판정으로 국가대표가 되지 못했던 것입니다. 모든 것을 버리고 한국행을 택한 그에게 조국은 너무도 텃세가 심했던 것입니다. 우여곡절 끝에 한국대표가 되어 아시안 게임에서 금메달을 목에 걸기도 하였습니다. 그러나 거기가 끝이었습니다. 그에게는 더 이상 기회가 주어지지 않았던 것입니다. 편파판정이라는 불공정한 장벽은 그를 가로막았습니다.

 

결국 그는 귀화를 결심합니다. 일본의 국적을 취득해서 일본의 국가대표 유도 선수가 된 것입니다. 2002년 부산 아시안 게임에서는 일본 국기를 달고 경기에 출전하여 결승전에서 한국 선수를 물리치고 금메달을 목에 겁니다. 그런 그에게 관중들은 야유를 보냈습니다. 조국을 버린 배신자라고 그를 비난했습니다. 안타까운 일이었지만 아키야마가 된 추 성훈은 어쩔 수가 없었습니다. 사람들은 양다리를 걸친 듯한 그의 모습을 좋지 않게 보았습니다.

 

그런 그를 안타깝게 여긴 방송국에서 그를 위한 특별 방송을 방영한 것입니다. 그 프로를 보고 많은 사람들의 그의 처지를 이해하고 그에게 격려의 글을 보냈습니다. 그리고 어쩔 수 없이 일본으로 귀화하게 된 그의 사정을 이해하고, 조국을 잊지 않는 그의 충정을 이해하게 된 것입니다. 많은 한국 사람들과 일본인들이 두 개의 국적 사이에서 고민하는 그를 이해하고 한 인간으로서 그를 받아주었습니다.

 

저는 그 프로를 보면서 추 성훈이라는 한 인간이 어쩔 수 없이 겪어야 하는 갈등을 가슴 아프게 바라보았고, 그의 선택을 이해할 수 있었습니다. 2005년 한국에서 열린 격투기 경기에 그는 한국 측 대표로 참석하였습니다. 그는 일본 국기와 태극기를 양쪽에 붙이고 나왔습니다. 경기가 끝난 후, 그는 말했습니다. “저는 일본 사람입니다.(일본 국기를 가리키며) 그러나 제 몸에는 한국인의 피가 흐르고 있습니다.(태극기를 가리키며)” 그의 말을 듣고 야유를 하는 사람도 많았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어쩔 수 없는 그의 정체성이었습니다. 그것이 그의 갈등의 근본적인 원인입니다. 그가 갈등하는 것은 당연한 결과입니다.

 

그 프로를 시청하고 저는 그리스도인들을 생각했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추 성훈과 같이 두 개의 국적 사이에서 고민하는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의 진정한 국적은 천국입니다. ‘오직 우리의 시민권은 하늘에 있는지라’ 사도 바울은 빌립보 교인들에게 분명히 말합니다. ‘여러분 우리의 국적은 하늘나라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지금 살고 있는 곳은 하늘이 아니라, 천국이 아니라 이 땅, 이 세상인 것입니다. 우리가 이 세상을 살아가기가 그토록 어려운 것은 이렇게 하늘나라의 국적을 가지고 이 세상에서 살아가기 때문입니다. 이 세상은 우리의 하늘나라를 인정하지 않습니다. 우리에게 세상의 법을 강요합니다. 오히려 텃세가 더 심합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인들은 갈등을 겪습니다. 하늘나라의 시민권을 가진 자답게 살아가고 싶습니다. 그러나 이 땅에서의 현실은 그것을 허락하지 않습니다. 그렇게 살다가는 손해보고, 망하고, 심하면 그대로 죽는 수도 있습니다. 그렇다면 여러분, 이 세상에서의 그리스도인의 갈등은 당연한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래서 주님은 이 땅에서 십자가의 길을 걸으셔야 했습니다. 십자가의 길은 죽음의 길입니다. 참혹한 수욕의 길입니다. 그리고 그분은 우리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너희가 이 세상에서는 환난을 당할 것이다. 그러나 보아라! 내가 세상을 이겼다. 그러므로 너희도 나를 따라 십자가의 길을 걸어야 할 것이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그 길을 걸었습니다. 그의 길은 십자가의 길이었습니다. 그의 복음은 십자가의 복음이었습니다. 그의 메시지의 핵심은 십자가였습니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다. 내게 귀한 것은 오직 그리스도의 십자가뿐이다. 십자가 이외에는 내가 어떤 것도 알기를 원하지 않는다. 십자가의 복음은 미련한 것이다. 그러나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지혜이다.’ 그의 관심은 오로지 십자가였습니다. 그의 복음은 오로지 십자가였습니다. 그의 삶 역시 온통 십자가 투생이었습니다.

 

그는 십자가의 도를 행한 것입니다. 그래서 그는 빌립보의 교인들에게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형제들아 너희는 함께 나를 본받으라. 또 우리로 본을 삼은 것같이 그대로 행하는 자들을 보이라.” 그의 관심은 오로지 십자가였습니다. 그래서 빌립보의 교인들에게도 그것을 권하고 있는 것입니다. ‘십자가의 도를 행하는 나를 본받으십시오. 그리고 나의 권함을 받아 십자가의 도를 행하는 사람들을 보십시오. 할 수 있습니다. 해야만 합니다.’ 그는 그야말로 눈물을 흘리며 간절하게 빌립보 교인들에게 호소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십자가의 길은 결코 십지 않은 길입니다. 누구도 자기 자신은 물론 자기의 자식에게 십자가의 길을 걸으라고 말하는 것은 쉽지 않습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십자가의 길에서 돌아섰습니다. “내가 여러 번 너희에게 말하였거니와 이제도 눈물을 흘리며 말하노니 여러 사람들이 그리스도 십자가의 원수로 행하느니라.” 사도 바울은 전에도 여러 번 말했습니다. 그리고 이번에도 눈물을 흘리며 간절히 말합니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이 그의 권함을 듣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돌아서서 십자가의 길을 걷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십자가의 원수로 행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도대체 어떤 짓을 했기에 그들이 십자가의 원수로 행했다고 말하는 것일까요? 십자가의 원수, 그것은 어떤 길일까요? 그것은 간단합니다. 그것은 세상의 부귀영화를 좇는 것입니다. 세상의 법칙을 따르는 것입니다. 그리스도를 위해 살지 않고, 자기 자신을 위해 사는 것입니다. 육신의 정욕, 안목의 정욕, 이생의 자랑을 위해 사는 것입니다. 모든 그리스도인들에게 바로 이 지점이 터닝 포인트입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십자가의 복음을 믿고 받아들입니다. 그러나 바로 이 지점에 도착해서 등을 돌리는 그런 지점이라는 말입니다. 좀더 자세히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사실 제가 십자가의 원수로 행한다는 것이 어떤 것인가를 말씀으로 전한다는 것이 쉽지 않은 일입니다. 그래서 저는 어제 저녁 비가 오는 아파트 주위를 한 바퀴 돌았습니다. ‘주님, 과연 이 시대에 십자가의 원수를 어떻게, 어디까지 표현해야 할까요?’ 저는 주님께 여쭙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시대의 복음이 너무 많이 왜곡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만일 사도 바울이 이 시대의 서울, 분당, 광주에 살고 있는 교인들에게 편지를 쓴다면 어떻게 썼을까를 생각해 보았습니다. 말씀을 전하는 저도 받아들이기 힘들 정도의 말을 듣게 될 것이라는 생각을 하였습니다.

 

우선 우리가 어느 정도 이해하고 받아들일 수 있는 선에서 시작해 보겠습니다. 어떤 분의 책에서 본 것인데 제가 직접 보지는 못한 이야기입니다. 어느 지역엘 가보니 그 지역에서 희한한 간판을 보았다는 것입니다. 소주방의 이름이 ‘부흥’ 소주방이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까페의 이름이 아가페라는 것입니다. 그 분은 그 이야기를 하시면서 기가 막힐 노릇이라고 말했습니다. 여러분 어떻습니까? 부흥 소주방, 잘 지었다는 생각이 드십니까? 아가페 까페는 어떻습니까? 좀더 세련돼 보입니까?

 

믿는다고 해서 모든 것이 용납되는 것은 아닙니다. 소주방을 하시는 분이나, 까페를 하시는 분은 딴에는 꽤 고민하고 그런 이름을 지었는지 모르겠습니다. 물론 직업에는 귀천이 없습니다. 그러나 소주방을 부흥시켜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수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까페를 잘 운영해서 그리스도의 사랑이 세상에 잘 알려지도록 하겠다는 까페 주인의 생각이 가하다고 생각하십니까? 소주방 주인도 까페의 사장도 예수를 믿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진정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기로 결심했다면 그들은 소주방의 이름을 부흥이라고 짓고, 까페의 이름을 아가페라고 지을 것이 아니라 좀더 가난해지더라도, 힘이 들더라도 직업을 바꾸어야 할 것입니다. 그들이 직업을 바꾸지 못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들은 간단히 먹고 살기 위해서라고 말할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의 대답은 세상에서 잘 살기 위해서 예수를 부인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십자가의 원수로 행하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서 하늘나라의 국적을 가지고 살아가는 것은 추 성훈이 한국 국적을 가지고 일본에서 살아가는 것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힘들고 어려운 일입니다. 그것은 곧 생명을 거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생명을 건다는 말이 그냥 말로 하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실제로 기독교의 역사는 우리가 몇 주 전에 살펴본 바와 같이 순교의 역사였습니다.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곧 생명을 거는 일입니다. 그런데 그 일이 쉽습니까? 어렵습니까? 물론 어렵습니다. 그래서 영리한 사람들은 새로운 복음과 하나님을 만들어냈습니다.

 

새로운 하나님은 영혼을 지옥으로 보내는 심판주가 아닙니다. 눈부신 광채로 죄인이 접근하기 힘든 의로운 하나님이 아닙니다. 독생자는 희생의 피로 얼룩지지 않고 신자들도 고난과 희생의 길을 걸어갈 필요가 없습니다. 모든 면에서 친절하고 온유한 하나님으로서 사람들이 현실적으로 원하는 “세상에서의 성공”이나 “돈”에 지대한 관심을 보입니다. 사람들은 진노하는 하나님 앞에서 떠는 죄인이 아니라 운동 경기장의 치어리더와 같이 언제나 즐거운, 하나님과 함께 하는 승리자입니다.

 

이 소식은 특히나 사역자들에게 복음과 같은 소식입니다. 사역자들은 마침내 세상의 질타를 떨쳐 버리고 진정한 복음을 전하기 시작했습니다. 세상이 찾고 원하는 복음을 전하기 시작한 것입니다. ‘하나님은 정말 당신을 좋아하십니다.’ ‘하나님은 당신을 있는 모습 그대로 받아주십니다.(죄책감에 빠지거나 귀찮은 회개 같은 걸 할 필요가 없다는 말입니다.)’ 오랫동안 사람을 무섭게 했던 원죄와 죄책감과 심판과 십자가는 개인의 자긍심을 높이기 원하는 하나님의 마음을 표현하는 옛날 방식일 뿐이라고 설명합니다. 이제 사람들은 더 이상 죄에 대한 심판이나 십자가의 죽음에 연연할 필요가 없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이 알아서 처리하십니다. 신학은 하나님이 맡아서 처리하시고 사람들이 골치 아프지 않게 배려하십니다. 결국 현대 그리스도인들은 십자가라는 가시방석에 앉을 필요가 없게 되었습니다. 오직 하나님이 인간을 좋아하시고 놀라운 계획을 가지고 계시다는 말만 들으면 됩니다. 모든 사람은 하나님의 작품이고 알다시피 “하나님은 모든 것을 완벽하게 만드셨습니다.”

 

이제 모든 것이 바뀌었습니다. 그리스도인이 되고 싶은 사람은 그저 마음의 문을 열기만 하면 되고 문이 열리면 그리스도께서 들어오십니다. 이렇게 친절하고 멋진 하나님이 문 밖에 계신데 누가 문을 꼭꼭 닫고 있겠습니까? 오랫동안 문 뒤에서 무서워하던 사람들이 더 이상 하나님은 무서워 할 필요가 없다는 놀라운 사실에 얼마나 안심이 되는지요? 그렇습니다. 예수님이 우리를 위해 죽으셨다는 것보다 좋은 소식은 없습니다. 나에게 복 주시려고 죽으셨고 나를 위해 사시고 내가 오기를 기다리는 분이십니다. 이런 좋은 하나님을 바깥 추운 곳에 세워 둘 사람이 있겠습니까? 하나님을 섬기고 세상에 복음을 전하는데 이보다 좋은 때가 없었습니다. 모든 것이 잘 맞아 떨어집니다. 이제 아무도 신자를 환자라고 부르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이렇게 사람의 구미에 맞은 적이 없었습니다.

 

지난 1980 년대의 ‘자기중심 시대’를 지나 90 년대의 ‘자기 시대’를 지나면서 예수 그리스도의 피 묻은 복음은 이렇게 변질되고 말았습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교회는 문제를 해결하는 곳이 되었고, 하나님은 사람들의 문제를 해결해주는 권위와 능력을 가진 전능한 하인이 되었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소비자가 되어 교회를 선택할 권리를 가지고 자기 마음에 드는 만큼 값을 지불하는 고객이 되었고, 목회자들은 소비자들의 기호에 맞추어 구색을 맞추고, 많은 고객을 확보하여 엄청난 돈을 긁어모아 세상에 영향력을 발휘하는 인기인이 되었습니다.

 

예수님은 자신을 좇으려면 날마다 십자가를 져야 한다고 가르치셨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삶에서 역사하는 십자가의 역할을 쉽게 잊어버립니다. 사도 바울은 사람이 구원을 받은 후에 쉽게 십자가를 잊어버리는 존재임을 잘 알았습니다. 그래서 그는 그의 편지 곳곳에서 십자가를 강조하였습니다. 오늘의 본문도 마찬가지입니다. 십자가를 지라는 것입니다. 십자가를 지고 살아가는 자신을 본받으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왜 십자가를 져야 할까요? 구원에 있어서 십자가의 역할은 명확합니다. 우리의 죄 값을 치루기 위해서입니다. 그래서 대속의 십자가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구원받은 후 십자가의 역할은 무엇이겠습니까? 우리를 온전케 하는 과정에서 십자가가 하는 일이 무엇이겠습니까?

 

십자가가 우리에게 하는 일을 간단히 말하자면 십자가가 예수님에게 했던 일과 똑같습니다. 십자가는 우리를 죽입니다. 우리는 이 사실을 받아들이지 않고 적당한 거리를 유지해 왔습니다. 십자가를 부드럽게 설명하는 책은 산더미처럼 쌓여있고, 하나같이 십자가를 죽음과 거리가 먼 것처럼 해석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피할 수 없는 십자가의 의미를 바꾸는 것은 부질없는 일입니다. 십자가가 있는 곳에는 반드시 죽음이 있습니다. 십자가 위에서 반만 죽었다는 사형수 이야기는 들어본 적이 없습니다. 만약 사형수의 목숨이 쉽게 끊어지지 않는 것처럼 보이면 군병들이 다가와서 빨리 죽어버리도록 다리를 꺾어 버렸습니다.

 

C. S. 루이스는 순전한 기독교에서 타협할 수 없는 십자가 죽음을 다음과 같이 그리스도의 입을 빌어 표현했습니다. “나는 너를 고문하려고 온 것이 아니라 죽이러 왔다. 적당히 해서는 좋은 결과를 기대할 수 없다. 나는 여기저기 가지치기를 하려는 것이 아니라 나무 전체를 잘라 버리려고 한다.” 자기를 부인하고 “자신의 십자가”를 지라는 개념은 기독교의 믿음 가운데 가장 이해하기 어려운 부분입니다. 말이 복잡해서 어려운 것이 아닙니다. 실천하기가 어려운 것입니다. 우리가 직감적으로 그 의미를 알지만 이것을 의도적으로 복잡하게 만드는 이유는 그것을 좋아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아무도 죽는 것을 좋아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여러 번 말하는 것입니다. 눈물을 흘리며 간절히 부탁하는 것입니다. “저희의 마침은 멸망이요. 저희의 신은 배요. 그 영광은 저희의 부끄러움에 있고 땅의 일을 생각하는 자라.” 단순하게 십자가의 길을 걷지 않는 것이 십자가의 원수로 행하는 것입니다. 자신을 죽이지 않고 자신을 위해 성공하고 돈을 벌고 출세하는 일을 위해 사는 것이 십자가의 원수로 행하는 것입니다. 그런 사람을 기다리고 있는 것은 ‘멸망’이라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이 말하는 ‘멸망’의 의미가 무엇이겠습니까? 그것은 구원받지 못한다는 말입니다. 믿는 자에게 그보다 더 허무한 일은 없을 것입니다. ‘저희의 신은 배’라는 말은 무엇입니까? 그들이 섬기는 것이 탐심이라는 말입니다. 탐심은 곧 우상숭배입니다. ‘그들의 영광은 부끄러움’을 당할 것입니다. 저는 세상의 많은 권력과 힘을 가진 자들을 보면서 사도 바울의 말이 사실이라는 것을 동감합니다. 우리가 존경하고 부러워해야 할, 세상에서 성공한 권력자들과 재력가들과 명망 있는 사람들이 너무도 부끄러운 모습으로 전락하거나 생을 마치는 것을 평생 보아왔기 때문입니다. 그들의 공통점이 무엇입니까? 그것은 그들이 땅의 일을 생각하는 자들이라는 사실입니다.

 

저는 때때로 우리가 ‘거룩한 것을 개에게 주지 말며, 진주를 돼지에게 던지지 말라’ 하신 예수님의 경고를 어겼다는 생각이 듭니다. 우리는 애당초 복음에는 관심도 없는 사람들을 끌어들이기 위해, 거룩한 복음을 그들의 밥그릇에 넣어준 것은 아닐까요? 복음이 무엇인지 알지도 못하는 사람들의 시선을 끌기 위해 복음의 질을 떨어뜨린 것이 아닐까요? 우리가 복음의 알갱이를 상업주의로 포장한 것은 아닐까요? 하나님을 알려고도 하지 않고 이해하려고도 하지 않는 사람들에 의해 복음이 짓밟히고 풍비박산되는 것을 우리 눈으로 보면서 예수님이 예언하신 대가를 치루고 있는 것은 아닐까요?

 

사랑하는 어지니교회 성도 여러분, 여러분의 국적은 어디입니까?

 

“오직 우리의 시민권은 하늘에 있는지라” 우리의 국적은 하늘나라입니다. 이 땅에서 우리가 환란을 당하고, 어려움을 겪고, 멸시와 수치를 당하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우리가 가야할 길은 바로 십자가의 길이기 때문입니다. 주님께서 먼저 그 길을 가셨습니다. 사도 바울도 그 길을 따랐습니다. 그리고 진정으로 복음을 받아들이고 그 본을 따라 그들의 뒤를 따랐던 사람들이 걸었던 길입니다.

 

우리의 소망은 그때에야 비로소 진정한 것입니다. 십자가의 길을 걷는 우리를 우리의 구원자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기다리고 계신 것입니다. 천국의 문 앞에서 우리를 맞아주시는 것입니다. “그가 만물을 자기에게 복종케 하실 수 있는 자의 역사로 우리의 낮은 몸을 자기 영광의 몸의 형체와 같이 변케 하시리라.” 그리고 만물을 자기에게 복종시킬 수 있는 전능하신 그분께서 자신의 그 놀라운 능력으로 시간과 공간에 제한을 받아 늙고 병들고 죽을 수밖에 없는 우리의 육체를 시공에 제한을 받지 않는 완벽한 영원의 존재로 변화시켜주실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의 소망은 바로 이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해 궁극적으로 계획하신 것은 에덴동산으로 되돌아가고 싶어 하는 우리의 소원보다 더 크고 훌륭합니다. 에덴동산으로 돌아가면 순진함과 무지함만 되찾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계획은 우리를 무죄한 상태로, 선악을 모르는 상태로 되돌려 놓는 차원을 넘어, 그분의 생명에 영원히 참여하며, 그분의 영광을 나누며, 그분을 모실 수 있는 예배의 자리로 우리를 부르십니다. 별들 가운데 흩어져 있는 별무리처럼 우리들은 영원히 하나님의 영광으로 빛나면서, 하나님께서 그 백성을 위해 어떤 사랑을 베푸셨는지 증거 할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무덤에서 다시 사신 예수님과 그의 사랑을 영원히 찬송하고 찬송할 것입니다.

 

사랑하는 어지니교회 성도 여러분!

 

사도 바울은 십자가의 도가 지 않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짓으로 보인다고 말했습니다. 오늘날도 행복과 편안함과 성공을 추구하는 이 세상에서 하늘나라를 생각하며 십자가의 길을 걷는 것이 세상 사람들에게는 미련하고 어리석은 일로 보일 것입니다. 편리함과 즐기는 일에 익숙해진 현대인들에게 십자가의 길은 불가능해 보일 것입니다. 할 수만 있다면 그 길을 피할 것입니다. 그러나 십자가의 도가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지혜입니다. 이 땅위에 사는 동안 우리는 그 영광과 신비와 그것이 과연 얼마나 좋은 것인가를 도저히 다 깨달을 수는 없을 것입니다.

 

하지만 이 땅을 사는 동안에도 우리는 십자가의 길을 걸음으로써 누릴 수 있는,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에게 주시는 은혜와 평강이 얼마나 크고 귀한 것인가를 경험할 수는 있을 것입니다. ‘오직 우리의 시민권은 하늘에 있습니다.’ 여러분의 국적을 잊지 마십시오. 추 성훈 선수가 태극기를 가리키며 ‘내 안에는 한국인의 피가 흐르고 있다.’고 말했듯이 내 안에는 그리스도께서 사신다는 사실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우리가 십자가의 길을 걷지 않는다면 우리는 십자가의 원수로 행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여러분은 어떤 길을 걸으시겠습니까? 아무도 죽음의 길을 강요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사도 바울은 빌립보 교인들에게 눈물로써 그것을 권유하고 있습니다. 왜 입니까? 그 길이야말로 유일한 삶의 길, 소망의 길, 영광의 길이기 때문입니다. ‘나를 본 받으라!’ 십자가의 길을 걷는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그리스도 예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728x90
반응형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