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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약 --------------------/빌립보서

빌 4장 4-7절(기뻐하라) - 최태선

by Preacher 2024. 2. 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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빌4장 4-7

기뻐하라

최태선 목사 2004.12.21.

어지니교회 http://cafe.daum.net/eojini/

 

덴마크의 한 이동 서커스 장에서 불이 났습니다. 단장은 때마침 출연 채비를 갖추고 있던 광대를 인근 마을에 보내 도움을 청했습니다. 불길이 추수 뒤의 건조한 전답을 태우고 그 마을까지 덮칠 위험이 있었던 것입니다. 광대는 급히 마을로 달려가 동네 사람들에게 빨리 와서 화염에 쌓인 곡마장의 불을 꺼달라고 간청했습니다. 그러나 마을 사람들을 광대가 소리지르는 것을 단순히 구경꾼을 많이 끌려는 술책치고는 아주 걸작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손뼉을 치면서 포복절도했습니다. 광대는 참으로 울 지경이었습니다. 그는 사람들에게 정말 곡마장이 불타고 있다고 말하면서 납득시키려고 안간힘을 다 썼지만 허사였습니다. 그의 애원은 폭소만 터뜨릴 뿐이었습니다. 사람들은 그가 광대 역을 아주 멋지게 한다고만 생각했습니다. 결국 불은 마을에까지 번져 모든 것이 불타버리고 말았습니다.

 

이 이야기는 하비 콕스라는 사람이 '신 없는 도시'라는 자신의 책에 인용한 키엘케고르의 우화입니다. 아무리 진지하게 외쳐도 폭소만을 자아내는 광대의 모습 속에 진리가 선포되지 못하는 우리 시대의 모습이 투영됩니다. 오늘날 기독교 방송에서 방영되는 많은 프로들과 또 수많은 교회에서 많은 사람들을 모아놓고 선포하는 복음이 이 이야기에 나오는 광대의 외침과 같지는 않을까요? 사람들은 웃으면서 한 편의 설교를 잘 들었다고 생각하지만 정작 복음에는 한 걸음의 진전도 없는 그런 상태, 그것이 이 시대의 기독교의 모습은 아닐까요? 밤거리를 휘황찬란하게 밝히는 크리스마스 전등 사이로 외쳐지는 복음이란 고작 광대의 외침만큼이나 우스꽝스런 노력이 되고 있지는 않을까요?

 

그렇다면 그런 상황 속에서 우리는 과연 어떤 존재이어야 하겠습니까? 이제 올해의 크리스마스를 맞으면서 과연 우리가 무엇을 생각하고 무엇을 실천해야 할지를 생각해보도록 하겠습니다.

 

폴 틸리히라는 신학자가 지은 '흔들리는 토대'라는 책에는 이런 대목이 있습니다. "은혜를 받았다는 것은 단순히 도덕적 자제력이 성장하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자신이 특별한 잘못에 대항하는 능력이나 타인과의 관계가 성장함을 뜻하는 것도 아니다. 도덕적 성장은 은혜의 한 열매일 뿐이다. 큰 고통과 불안에 빠졌을 때 은혜는 우리를 덮친다. 무의미하고 공허한 삶의 어두운 골짜기를 걸을 때 은혜가 우리를 덮친다....... 자신의 존재, 자신의 무관심, 자신의 나약함, 자신의 적대감이 스스로 역겨워질 때, 자신의 방황과 흔들림이 스스로 역겨워질 때도 은혜는 우리를 덮친다. 때로 그 순간 한 줄기 빛이 어둠을 뚫고 들어온다. 그것은 마치 이렇게 말하는 목소리와도 같다. '너는 받아들여졌다. 너보다 크신 존재가 너를 받아들이셨다.... 아무 것도 추구하지 말라. 아무 일도 하지 말라. 아무 것도 의도하지 말라. 그저 네가 받아들여졌다는 사실을 받아들여라.' 이런 일이 일어날 때 우리는 은혜를 체험한다. 이런 체험을 한 뒤에도 여전히 전보다 나아지지 않을 수 있다. 설령 나아진다 하더라도 믿음이 성장하지 않을 수도 있다. 하지만 모든 것은 변화되었다."

 

폴 틸리히는 은혜의 체험을 이렇게 설명하였습니다. 은혜의 체험은 합리적 추론이나 영적 노력의 열매가 아닙니다. 은혜의 체험은 성령의 열매입니다. 이 열매는 기도를 통해 자연스럽게 무르익습니다. 기도 속에서 하나님께서 우리를 받아들여 주심을 깨닫게 되고 그 깨달음이 깊어지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사랑하심을 아는 것과 그것을 깨닫는 것은 다릅니다. 우리는 기도 속에서 속도를 줄이고 귀기울일 시간을 갖게 됩니다. 기도 속에서 이미 우리가 가지고 있는 것을 발견하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있던 그 자리에서 출발해 이미 여러분이 그곳에 있었음을 깨닫게 됩니다. 우리는 이미 모든 것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 중 많은 이들이 그 사실을 모르며, 따라서 체험하지도 못하는 것입니다.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이미 소유한 것을 체험하는 것이 전부입니다. 기도에서 가장 귀중한 순간은 주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시도록 자신을 그대로 놓아두는 시간입니다.

 

크리스마스 시즌에 기도 속에서 하나님을 찾아 헤맬 필요가 없습니다. 아직도 그분을 발견하지 못했다면 그분을 찾기란 불가능합니다. 아바, 예수님, 성령님께서는 언제나 그 자리에 계셨습니다. 그러므로 기도 속에서 기회를 만들기만 하면,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당신 자신을 알려주실 것입니다. 토마스 머튼은 그것을 이렇게 말했습니다. "우리는 기도하면서 기도를 배운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기도하면서 그분을 만나게 됩니다. 그리고 그분을 만나면서 우리는 더 많은 기도 속으로 들어가게 되고, 진정한 기도가 무엇인지를 점점 더 배우게 된다는 말입니다.

 

과학과 기술 사회인 현대 사회에서 신비주의자라는 단어는 배척을 받고 있습니다. 대개는 비꼬는 뜻으로 쓰이는 신비주의자는 몽롱한 형이상학적 안개 속을 헤매는, 현실과 동떨어진 사람을 뜻하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진정한 신비주의자는 환시와 무아지경, 공중부양 같은 것을 수반하는 기이한 기도를 수행하는 사람이 아닙니다. 독일의 신학자 칼 라너의 정의에 따르면, 신비주의자는 무언가를 체험한 사람입니다. 신비주의자는 예수 그리스도를 향한 뜨거운 갈망으로 불타오르는 사람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만을 위해 그분을 추구하고 사랑하고 경배하는 사람입니다. 신비주의자는 갈증에 지배받는 삶을 사는 사람입니다. 이 갈증은 기도 안에서, 한 분에 대해 아는 것과 사랑과 환희 속에서 해소됩니다. 그것을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영생은 곧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의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니이다."(요17:3)

 

예수님은 어두움에 비취는 빛입니다. 크리스마스를 진정으로 묵상하는 사람은 그분 앞에서 더욱 침묵합니다. 그는 자기 영혼을 고요히 멈추게 하며 어머니의 팔에 안긴 아기처럼 평온해집니다. 그는 베들레헴에 태어나신 아기 안에 구현된 은혜와 긍휼과 용서와 화해와 사랑을 내면화하고 자기 것으로 만들어나갑니다. 육신으로 오신 말씀의 은혜 앞에 무릎을 꿇습니다. 그는 자기가 수용되었음을 받아들입니다.

 

그리스도인의 믿음은 말구유를 묵상하면서 사랑하는 마음으로 예수님을 바라보는 것입니다. 역사 안에 오신 그리스도께서 마지막 날에도 영광 중에 오시리라는 기쁨에 찬 기대로 불타올라야 합니다. 바울은 골로새 교인들에게 그것을 이렇게 고백했습니다. "우리 생명이신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실 그때에 너희도 그와 함께 영광 중에 나타니리라"(골3:4) 사도 바울, 그의 장래에 대한 믿음은 곧 현실이었습니다. 크리스마스는 하나님의 나타나심과 재림에 대한 갈망을 불러일으킵니다. 크리스마스는 예고된 대격변, 임박한 지각변동에 대한 희망을 일깨웁니다. 이것은 제자로서 철저한 제자도를 걷게 하며, 크리스마스를 인류역사의 궁극적 성취로 맞아들일 수 있게 하는 것입니다.

 

기독교의 희망은 근거 없는 낙관주의가 아닙니다. 무언가를 바라는 나약한 생각도 아닙니다. 그런 생각은 실망과 패배를 낳을 뿐입니다. 그와는 달리, 예수님께서 보여주신 희망은 말기 암 앞에서도 확고함과 침착함을 잃지 않는 희망입니다. 한 목사님이 서울의 한 병원에서 죽어 가는 열 여섯 살 된 소녀를 방문했습니다. 소녀는 근심과 슬픔에 찬 목사님의 눈을 들여다보더니 이렇게 말했습니다. "목사님 두려워하지 마세요."......바로 이것이 기독교가 지닌 희망의 정확한 의미입니다. "두려워하지 말라." 이 말은 죽어 가는 이가 살아있는 이에게 할 때 그 의미가 가장 심오해집니다. "두려워하지 말라."

 

기독교의 희망은 이 세상의 불의와 전쟁과 병과 고통의 모든 비극 앞에서도 확신을 잃지 않습니다. 그 희망은 어떤 사람들 속에서도 흔들리지 않습니다. 바로 그 희망을 가진 사람들은 숨죽여 기다리는 세상을 향해 아기 예수께서 기쁨의 울음을 터뜨린 그 역사적인 밤 이후로 세상에 모습을 드러낸 그리스도인들입니다.

 

"자! 안심해라. 아무 문제도 없다. 내가 여기 있다. 두려워하지 말아라. 세상은 더 이상 악한 자의 손아귀에 있지 않고 사랑하는 목자의 팔 안에 있다. 결국 모든 것이 다 잘 될 것이다. 너희를 끝까지 해칠 수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다. 되돌릴 수 없는 고통은 없으며, 계속되는 손실 또한 없다. 어떤 패배도 일시적일 뿐, 결정적으로 실망할 필요가 없다. 역경도 두려움도 박해도 배고픔이나 헐벗음도, 공격이나 침략도 결코 우리를 갈라놓을 수 없다. 삶 안에서든 죽음 안에서든 너희와 하나님의 사랑 사이에 끼여들 수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다. 그 사랑이 그날 밤 구유 안에 너희 눈앞에 나타나셨다."

 

진정으로 크리스마스를 묵상하는 사람은 메시아의 이 외침을 듣는 자입니다. 분명한 구원의 음성을 듣는 자입니다. 희망의 분명한 이유와 근거를 듣는 자입니다. 하지만 오늘날 교회 안에서는 멸망을 말하는 예언자보다도 더 미움을 받는 사람은 기쁨을 말하는 예언자일 것입니다. 어둡고 힘든 세상 속에서 초점을 잃었기 때문입니다. 세상의 염려와 재리의 가시덤불이 희망을 질식시켜버렸기 때문입니다. 지쳐버렸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진정으로 크리스마스를 묵상하는 사람은 하루하루, 한 순간 한 순간을 하나님 나라의 온전한 성취를 준비하며 살아갑니다. 그는 오늘의 본문이 말하는 것을 마음을 다하여 귀기울여 듣습니다.

 

"주안에서 항상 기뻐하라. 내가 다시 말하노니 기뻐하라. 너희 관용을 모든 사람에게 알게 하라. 주께서 가까우시니라. 아무 것도 염려하지 말고 오직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 그리하면 모든 지각에 뛰어난 하나님의 평강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 마음과 생각을 지키시리라"

 

사랑하는 어지니교회 성도 여러분,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여러분은 기쁨에 쌓여 기쁨을 전하는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가시겠습니까? 2주전에 나누었던 아버지의 그 자비하심으로 관용을 모든 사람들에게 알게 하시겠습니까? 아무 것도 염려하지 않고 모든 구할 것을 감사로 주께 아뢰는 신실한 그리스도인이 되시겠습니까? 그리고 주님이 주시는 하나님의 평강이 마음속에 넘침을 세상 사람들에게 증거하시겠습니까?

 

아브라함은 약속의 아들을 낳은 후 그 아들의 이름을 이삭이라고 지었습니다. 이삭이라는 이름의 뜻은 웃음이라는 뜻입니다. 아브라함과 그의 아내 사라는 나이가 많았으므로 아기를 주시겠다는 하나님의 약속에 대한 기대를 버렸습니다. 곧 임신하게 되리라는 말을 듣고 사라는 믿지 않고 웃었습니다. 하지만 마지막에 웃으신 것은 하나님이셨습니다. 그들은 늙은 나이에도 아들을 낳았고, 절망한 인간의 실소는 사랑하시는 하나님 아버지의 웃음으로 바뀌었습니다. 존 희글이라는 사람은 이 사실을 이렇게 말했습니다. "그들은 아들의 이름을 '웃음'이라고 지었다. 그 아들은 하나님의 가벼움이 인간의 무거움을 이겼다는 증거였기 때문이다."

 

약속의 아들 이삭은 예수님을 미리 보여주는 예언적 예표였습니다. 예수님 안에서 하나님의 약속이 성취되었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마지막 웃음이십니다. 웃음은 어긋남과 불협화음, 부조화에 대한 경축입니다. 히브리 전통에서 처녀가 아이를 잉태하는 것보다 더 어긋난 일은 없을 것입니다. 십자가의 죽음은 그보다 더한 부조화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웃음은 더욱 값있어 보입니다.

 

크리스마스는 삶의 비극 너머를 볼 수 있게 해주는 신앙체험입니다. 크리스마스는 우리에게 하나님의 웃음의 필요성을 기억하게 해줍니다. 그 웃음은 세상을 너무 심각하게 여기지 않도록 해줍니다. 그 웃음은 이 세상을, 철저하게 머리에 의해 움직이는 세상, 남보다 한발 앞선 사람이 되려는 경쟁으로 치닫는 세상으로 받아들이지 않도록 해줍니다. 기독교가 지닌 가벼움의 법칙은, 땅에 넘어진 것은 무엇이든 다시 일어난다고 말합니다. 하나님의 웃음은 베들레헴에서 시작된 구원역사이며, 그리스도인의 웃음은 우리 안에 계신 하나님의 기쁨이 메아리치는 것입니다.

 

크리스마스는 기저귀를 찬 하나님의 메시아 아들에 관한 경외스러운 신비입니다. 진정으로 크리스마스를 묵상하는 사람에게 이것은 큰 기쁨으로 밀려오는 반가운 소식입니다. 그것은 묵상하는 사람의 마음을 아버지의 웃음으로 채우는 기쁜 소식입니다. "지금은 너희가 근심하나 내가 다시 너희를 보리니 너희 마음이 기쁠 것이요 너희 기쁨을 빼앗을 자가 없느니라"(요16:22) 부조화를 넘어선 기독교는 정녕 기쁨의 종교인 것입니다.

 

대강절과 크리스마스를 지배하는 정신, 곧 기독교의 희망은 단순히 실현되지 않은 찬란한 미래를 위한 준비가 아닙니다. 그것은 저 세상에 관한 문제, 혹은 죽은 후 하늘나라에서 받을 상에 대한 약속을 훨씬 넘어섭니다. 예수님께서는 도움과 치유를 받기 위해 나중을 기다리라고, 종말까지 기다리라고 하지 않으십니다. 희망은 바로 지금 변화시키는 은혜의 기쁜 소식입니다. 우리는 죽음의 두려움뿐만 아니라 삶의 두려움에서도 풀려났습니다. 신뢰와 희망이 넘치는, 자비로운 새 삶을 살도록 자유롭게 된 것입니다.

 

하지만 불행하게도 인간중심의 현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온전한 은혜라는 개념은 생소합니다. 그런 사람들은 말합니다. '내게 충분한 시간과 돈과 인력을 달라. 그러면 우리는 무슨 일이든 해낼 수 있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예배에서 던져지는 말씀에서도, 인간의 의지력과 개인의 노력을 강조하는 인간 우월적 접근 방법 속에서 하나님은 장외에서 구경하는 자상한 노인으로 전락하고 마는 것을 우리는 어렵지 않게 발견합니다.

 

그러나 성경은 구원의 역사를 하나님께서 주관하셨고, 우리는 은혜로 구원받았으며, 한없이 사랑하시는 그분이 먼저 우리를 찾아오셨음을 거듭 주장합니다. 우리는 자신의 영적인 키를 단 한 치도 더 늘일 수 없다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혼자서 해낼 수 있는 어떤 방법의 영성도 좌절과 실망의 씨앗일 뿐입니다. 그리고 그 씨앗은, 불만의 겨울에 우울과 냉소와 교묘한 절망의 꽃을 피우게 될 것입니다.

 

자기 의존의 영성은 성경과 기독교 전통에 정반대에 위치합니다. 성경과 기독교 전통은 우리를 위한 구원역사에 관한 하나님의 주도권을 강조합니다. 요한은 그래서 이렇게 말합니다. "사랑은 여기 있으니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 오직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 죄를 위하여 화목제로 그 아들을 보내셨음이니라"(요일4:10) 진정으로 크리스마스를 묵상하는 사람은 자율적인 자아의 사람이 아닙니다. 제자로서 열매를 맺고자 하는 그의 모든 열망은 예수 그리스도와의 인격적인 관계에 뿌리를 두고 있습니다. 크리스마스에 예수 그리스도께서 사람이 되셨으므로, 그의 희망은 사람 안에 있는 예수 그리스도인 것입니다.

 

초대 그리스도인들은 자신들을 초월적인 인간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것은 자신들의 초인적인 의지력 때문이 아니라, 자신들이 성령의 초자연적인 능력을 의지하기 때문에 그렇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들과 마찬가지로 크리스마스를 진정으로 묵상하는 사람은 멈칫거리거나 겁내지 않으며, 영적 진보가 없다고 낙심하지도 않습니다. 그는 자기 생명의 주님과 하나가 됨으로써, 자신의 것보다 더 큰 생명의 힘을 받아 활기차게 살아갑니다.

 

진정으로 크리스마스를 묵상하는 사람은 희망은 선물이며, 아낌없이 주시는 평화의 선물임을 압니다. 또한 그것은 믿음의 결단을 내리라는 부르심이라는 것도 압니다. 어느 신학자는 그래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희망이란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 자신을 그분께 맡김을 뜻한다. 그럼으로써 담대하게 악과 맞서고, 더욱더 회개해야 할 필요가 있음을 받아들인다. 뿐만 아니라 타인들의 사랑 없음과 우리 주위와 우리 자신의 과거에 존재하는 죄의 유산 모두를 인정한다. 이럴 때 우리는 오늘 우리 앞에 산적한 임무를 회피하지 않고 감당하듯이, 장차의 죽음도 정면으로 받아들일 수 있다." 바울이 말한 것처럼 이것은 '우리의 이기적인 욕망을 죽이는 것'입니다.

 

희망은 역경 위에서 자라납니다. 또한 희망은 '나 같은 것이 무엇을 할 수 있겠는가?' 하는 부정적인 생각을 벗어버리게 합니다. 희망은, 우리가 안전감과 현실에 매달린다면 성장과 위대함의 가능성은 완전히 파탄 나고 말 것이라고 우리를 설득합니다. 희망은 더 이상 내 자신의 부정직함과 자기 중심적이고 허약한 믿음의 삶 때문에 의기소침할 필요가 없다고 말합니다. 이제 더 이상 패배의식에 젖거나, 자신이 무감각하고 천박하다고 느끼지 않아도 되게 해줄 것입니다.

 

그렇게 된다면, '내가 할 수 있을까?' '나의 변덕과 게으름과 욕망과 원한과 회한을 극복할 수 있을까?' 하는 의구심들이 문제가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께 능력이 있는가? 생명의 주님이신 나의 구세주께서 베들레헴에 탄생하심으로 세상을 변화시키셨듯이 크리스마스에 나의 꺼져가는 정신을 되살리고 나를 변화시킬 수 있는가? 하는 것이 문제의 초점이 될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그런 태도에 있어 우리의 가장 귀중한 본보기가 되었습니다. 그는 고통에 시달리고 있었습니다. 그것이 무엇인지 성경은 분명히 기록하고 있지 않지만, 그가 복음을 전함에 있어 상당한 지장을 초래하는 심각한 문제였습니다. 그는 그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기도하였습니다. 그때까지 그가 하는 모든 기도는 이루어졌습니다. 그러나 이번에는 그의 기도가 이루어지지 않았습니다. 사도로서 복음을 전함에 있어 막대한 지장이 됨에도 불구하고 그는 실망하지 않았습니다. 그에게서 패배의 흔적은 찾아볼 수 없었습니다. 그는 그 사실을 이렇게 기록하였습니다.

 

"이것이 내게서 떠나기 위하여 내가 세 번 주께 간구하였더니 내게 이르시기를 '내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 이는 내 능력이 약한데서 온전하여 짐이라' 하신지라. 이러므로 도리어 크게 기뻐함으로 나의 여러 약한 것들에 대하여 자랑하리니 이는 그리스도의 능력으로 내게 머물게 하려함이라. 그러므로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약한 것들과 능욕과 궁핍과 핍박과 고난을 기뻐하노니 이는 내가 약할 그때에 곧 강함이라.(고후12:8-10) 그에게 닥친 것은 능욕과 궁핍과 핍박과 고난이었지만 그는 오히려 기뻐하였습니다. 그의 초점이 자신에게 머물지 않고 생명의 주님이신 그리스도께 향했기 때문입니다.

 

자살하는 방법에는 세 가지 방법이 있습니다. 자신의 목숨을 끊는 방법, 자신을 죽도록 놓아두는 방법, 그리고 희망 없이 살도록 자신을 놓아두는 방법 이 세 가지입니다. 우리가 주목해야 할 것은 바로 이 세 번째 자살입니다. 소로우가 "사람들의 무리가 고요한 절망의 삶을 살아간다."고 썼을 때 이 세 번째 자살을 염두에 둔 것 같습니다. 그들은 여전히 걸어다닙니다. 그들은 여전히 사람의 것으로 보이는 몸짓과 행동을 합니다. 그러나 그들 내면의 불은 꺼져 버렸습니다. 그들은 비전을 잃었습니다. 살아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상은 죽은 것입니다. 최대한으로 좋게 말한다면 죽어가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 사람들에게 다가가 비전을 주고 생명을 전할 자가 누구입니까? 바로 진정으로 크리스마스를 묵상하는 사람입니다. 체스터튼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이교도들에게는 크리스마스가 시시한 소문에 불과하지만, 그리스도인들에게는 엄청난 비밀이다." 크리스마스의 엄청난 비밀이란,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신다는 임마누엘이 바로 "강보에 싸여 구유에 뉘인" 아기라는 사실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내 안에 탄생하실 때, 희망은 밝게 타오르고 다른 모든 것들은 황혼 속으로 사라집니다. 지붕은 무너져 내리고 겨울은 피할 길이 없습니다. 좋은 시절에 어울리던 친구들은 떠나 버리고 인기는 사라집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의 나라는 여전히 내 안에서 밝게 타오릅니다.

 

사랑하는 어지니교회 성도 여러분

 

여러분이 크리스마스의 은혜를 강렬한 충격으로 받아 보았다면, 여러분이 이미 수용되었다는 사실을 받아들일 용기를 긍휼하신 주님께 받았다면, 크리스마스가 예수님 안에 계시는 하나님의 열정적인 사랑 속으로 비약하는 결정적 때임을 확신한다면, 하나님께서 당신의 약속에 신실하심을 신뢰한다면, 하나님께서 시작하신 것을 마지막에 이루시리라 믿는다면, 여러분 자신이 새예루살렘을 향해 가는 이 세상의 나그네임을 믿는다면, 그렇다면 여러분의 기쁜 얼굴을 세상 사람들에게 내어 보이십시오! 기뻐하라는 주님의 말씀에 순종하십시오. 희망을 전하는 것입니다. 복음을 전하는 것입니다.

 

골프 선수 가운데 아놀드 파머라는 유명한 사람이 있습니다. 지금은 타이거 우즈나 비제이 싱이 더 유명하지만 한 때 그는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탁월한 선수였습니다. 그의 전성기 때에 파머는 사우디 아라비아에서 시범경기를 펼치게 되었습니다. 사우디 아라비아의 왕은 감동한 나머지 파머에게 선물을 주겠다고 말했습니다. 그러자 파머는 대답했습니다 "폐하 선물은 필요 없습니다. 이곳에 초대해 주신 것만으로도 제게는 영광입니다." 왕이 대답했습니다. "그대가 내 선물을 받지 않겠다면, 나는 몹시 불쾌할 것이요." 파머는 잠시 생각한 뒤 이렇게 말했습니다. "좋습니다. 그렇다면 골프 클럽이 어떨까요? 폐하의 나라를 방문한 아름다운 기념품이 될 것 같습니다." 파머는 한 세트의 골프채를 생각하며 이렇게 대답했던 것입니다. 다음날 파머의 호텔로 배달된 것은 그가 경기를 펼치던 골프 클럽의 소유권이었습니다. 수십만 평 넓이에, 나무와 호수와 클럽하우스등이 갖추어진 골프클럽이었습니다.

 

그렇습니다. 여러분!

 

왕이신 그분께 시시한 선물을 청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그것은 동시에 우리가 이 세상을 기쁨으로 살아갈 수 있는 이유이기도 합니다. "주안에서 항상 기뻐하라. 내가 다시 말하노니 기뻐하라. 너희 관용을 모든 사람에게 알게 하라. 주께서 가까우시니라. 아무 것도 염려하지 말고 오직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 그리하면 모든 지각에 뛰어난 하나님의 평강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 마음과 생각을 지키시리라"

 

그렇습니다. 우리는 기뻐할 수 있습니다. 관용할 수 있습니다. 감사함으로 기도할 수 있습니다. 평안할 수 있습니다. 그분이 우리를 위해 이 땅에 오셨기 때문입니다. 그분께서 부활의 첫열매가 되어 우리의 진정한 소망이 되셨기 때문입니다. 그분은 왕중의 왕이시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어지니교회 성도 여러분!

 

기뻐하라! 이 말씀에 순종하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살아 있으나 죽은 수많은 사람들에게 기쁨의 모습으로 희망을 전하는 생명의 통로가 되시기를 이 시간 그리스도 예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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