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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약 --------------------/데살로니가후서

살후 3장 16-18절(하늘의 평강을 구하라) - 이준원

by Preacher 2023. 11. 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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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후3장 16-18

하늘의 평강을 구하라

이준원 목사 2012.7월 22

콜럼버스한인장로교회 https://www.kpccoh.org

 

[들어가는 말]

 

오래 전 결혼을 하고 얼마 되지 않아서 오디오 시스템을 구입하러 전자제품 상점에 갔었습니다. 처음 구입하는 것이기 때문에 신중을 기해서 이것저것 알아보는데, 지금처럼 인터넷이 발달한 것도 아니라 직접 여기저기 물건을 보러 다녔습니다. 그러다 마침내 품질과 가격을 고려하여 가장 적당하다고 생각되는 것을 정해서 사게 되었습니다.

 

그때 세일즈맨이 저에게 물었습니다. “제품을 생산한 회사에서 1.동안 품질을 보증해주지만 그 후에는 어떻게 될지 모르는 게 전자제품입니다. 그러니 Extended Warranty를 구입하시는 것이 어떻습니까?” 그런데 그 워런티 가격을 보니까 제품 가격에 비해서 워런티 가격이 너무 높다고 느껴져서 한참을 고민하고 있었습니다. 그 세일즈맨이 저를 보니까 물건은 확실히 살 것 같은데 워런티 때문에 고민을 하니까 답답했는지, 매니저가 어디 있는지 두리번거리며 눈치를 보더니 자기 재량으로 워런티 가격을 조금 낮추어줄 수 있다고 살짝 속삭였습니다. 그러면서 조금 더 싼 가격을 제시하는 바람에 결국 5년짜리를 사게 되었습니다.

 

그렇게 제품과 워런티를 구입하고 사인을 하니까, 그 세일즈맨이 저를 보더니 이렇게 말한 것이 아직도 기억납니다. “Now you have the peace of mind!” 제품 보증서까지 구입하니까, 어떻게 할까 고민하던 것이 얼굴에서 없어지고 마음에 평안을 얻게 된 것이 얼굴에 보였다는 겁니다. 그런데 결과적으로 그 워런티를 괜히 샀습니다. 20년이 다 되도록 아무 탈 없이 잘 사용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평안/평화/평강이란 무엇입니까? 겨우 그런 몇 년짜리 품질 보증서를 사야 얻을 수 있는 것이 평강입니까? 성경은 여러 군데에서 진정한 평강이 무엇인지를 우리에게 가르쳐줍니다. 오늘 본문도 그 중 하나입니다.

 

1. 하나님의 평강을 구하는 기도

 

일반적으로 평강이란, 모든 일들이 원하는 대로 잘되어갈 때 느끼는 잔잔함, 고요함, 기쁨, 만족 등을 의미합니다. 하지만 그런 느낌들은 진정제를 먹거나 술을 마시거나 낮잠을 자거나 주변 사람으로부터 확신을 주는 말을 들을 때도 느낄 수 있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사도 바울이 언급하는 평강은 겨우 그런 정도의 평강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평강은 사람의 수준에서 만들어낼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사람이 만들 수 있는 평강은 어떤 것이든 깨어지기 쉽습니다. 오래 가지 못합니다. 워런티도 3년, 5년이면 다 끝납니다.

 

사람이 주는 평화는 상황이 잘못되거나 불안해질 때 즉시 없어집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주시는 평화는 삶의 여러 상황에 의한 영향을 전혀 받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평화는 우리와 하나님 사이의 관계에서 나옵니다. 하나님의 평강을 누린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사랑으로 모든 것을 다스리고 계심을 확신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으로서 우리는 죄 사함을 받았다는 사실, 하나님께서 우리의 삶에 지대한 관심을 갖고 계시다는 사실, 그리고 천국이 우리의 목적지라는 사실을 확실히 믿습니다. 이것을 믿는 것이 그리스도인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하나님의 평강을 늘 누리며 살 수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주시는 평안은 우리가 소유하고 누릴 수 있는 특권입니다.

 

2. 하늘의 평강

 

오늘 본문 16절은 몇 가지 방식으로 하나님의 평강을 정의하고 있습니다.

 

“평강의 주께서 친히 때마다 일마다 너희에게 평강을 주시기를 원하노라 주는 너희 모든 사람과 함께 하실찌어다.” (16절)

 

어릴 때부터 이 구절을 적은 액자가 우리 집에 걸려 있었습니다. 부모님이 다니시던 교회에서 교인들에게 그것을 나누어준 것입니다. 그래서 저는 어릴 때부터 이 구절을 늘 보며 자랐습니다. 그런데 그때는 어려서 이 짧은 구절에 평강에 대해 엄청난 의미가 담겨 있다는 것을 몰랐습니다. 이 짧은 구절에서 평강에 대해 크게 네 가지를 배우게 됩니다.

 

1) 평강은 하나님으로부터 온다.

 

먼저 “평강의 주께서 친히”라고 말씀합니다. “친히”라는 말은 하나님께서 직접 행하신다는 뜻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이 누리는 평강은 하나님으로부터 개인적으로 온다는 것입니다. 평강은 하나님의 본성 중에서도 아주 핵심적인 부분입니다.

 

우리가 아는 하나님의 속성이 많이 있습니다. 사랑, 은혜, 자비, 공의, 거룩, 지혜, 진리, 전능, 전지함, 불변, 영원 등등 많습니다. 그런데 평강 역시 하나님의 성품입니다. 실제로 하나님은 평강이십니다. 그리고 그분 안에 있는 온전한 평강에는 부족함이 없습니다. 하나님은 스트레스를 절대 받지 않으십니다. 그분은 불안해하지 않으십니다. 걱정하지도 않으시고, 의심하지도 않으시며, 두려워하지도 않으십니다.

 

하나님은 언제나 완벽한 만족함과 고요함 속에 사십니다. 어떻게 그러십니까? 하나님은 모든 일에 책임을 지시고 모든 일을 완벽하게 행할 능력이 있으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전지하시기 때문에, 즉 모든 것을 다 알고 계시기 때문에 놀라는 일이 없으십니다.

 

우리가 기도할 때, 특히 회개 기도를 할 때는 대충 하지 말고 정말 적나라하게 할 필요가 있습니다. 누군가를 미워하면서 “하나님, 제가 저 사람을 약간 부담스러워한 것 같습니다.”라고 뭉뚱그려 하지 말고 “하나님, 제가 저 사람을 살인했습니다.”라고 하는 겁니다. ‘살인’이라고 직접 말을 해보면 아주 끔찍한 느낌이 듭니다. ‘내가 살인자인가?’라는 생각이 들어서 오싹합니다. 예수님께서는 형제를 미워하면 살인과 같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 그런 식으로 하면 하나님께서 “뭐? 네가 살인을 했다고? 야, 정말이냐?”라고 깜짝 놀라시는 것이 절대 아닙니다. 하나님은 이미 다 알고 계십니다. 그러니까 적나라하게 기도하는 것이 하나님께 도움이 되는 것이 아니라 나 자신에게 도움이 됩니다.

 

그분의 거룩함을 더럽힐 수 있는 죄도 있을 수 없습니다. 하나님은 당신 자신 안에서 완벽한 조화를 이루고 계십니다. 오늘 성경은 이 하나님을 가리켜 “평강의 주”라고 부릅니다. 그런데 헬라어 원문을 보면, ‘평강’으로 번역된 단어 앞에 정관사가 붙어 있습니다. 그러니까 단순히 ‘the Lord of peace’가 아니라 ‘the Lord of the peace’, ‘그 평화의 주님’이라는 뜻입니다. ‘그 평강’이야말로 진짜 평화, 세상이 주는 그런 종류가 아니라 하늘의 평화입니다.

 

바울은 데살로니가 성도들이 그런 평강을 경험하게 될 것이라고 기도합니다. 그 평강의 근원이신 하나님께서 직접 그 평강을 주신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 하나님과의 관계가 우리에게 가장 중요합니다.

 

2) 평강은 하나님이 주시는 선물이다

 

평강은 하늘에서 내려주시는 것인 동시에 또한 선물입니다. “평강의 주께서 친히 때마다 일마다 너희에게 평강을 주시기를 원하노라”고 할 때, 평강은 하나님이 주시는 것, 즉 선물이라는 말입니다. 하나님의 평강은 예수 그리스도를 주님으로 믿는 사람들에게 주어지는 선물입니다. 자기가 무엇을 잘해서, 또는 일한 대가로 받는 것이 아니라, 그냥 선물로 받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당신께 속한 사람들에게 평강을 선물로 주십니다.

 

요한복음 14장에 보면, 예수님이 자꾸 떠난다고 하시니까 그것에 불안해하는 제자들에게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나는 평화를 너희에게 남겨 준다. 나는 내 평화를 너희에게 준다. 내가 너희에게 주는 평화는 세상이 주는 것과 같지 않다.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고, 두려워하지도 말아라.” (요 14:27)

 

염려하는 사람에게 하나님의 평화보다 더 큰 선물은 없습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들은 거짓된 평화를 통해 자신들의 염려를 없애보려고 시도합니다. 이사야서 57장에 보면, 하나님은 멀리서든 가까이서든 당신께 나아오는 자들에게 평강을 주겠다고 약속하십니다. 하지만 악인에게는 평강이 없다고 선포하십니다(57:19-21).

 

악인이 어떤 사람입니까? 흔히 생각하는 대로 살인이나 강도질을 하는 사람도 악인이지만, 그런 악을 행하는 사람만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보시는 ‘악인’은 하나님께 나아오지 않는 자,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는 자를 말합니다. 그런 사람은 평강을 선물로 받지 못합니다.

 

참된 평강은 믿는 자들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의 선물입니다. 다른 데서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에게서만 받을 수 있는 선물입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하겠습니까? 하나님과 좋은 관계를 맺으며 살아가야 합니다.

 

3) 평강은 계속 주어진다

 

하나님의 평강은 선물인데, 그것도 한두 번 주어지고 마는 것이 아니라 계속해서 주어지는 선물입니다. “때마다 일마다”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때마다”라는 것은 평강이란 우리에게 언제나 계속해서 주어지는 것임을 강조합니다. 그런데 거꾸로 보면, 이것은 중단될 수도 있는 것이라는 점을 암시해줍니다. 하지만 평강을 누리지 못하게 되는 것은 결코 하나님께서 중단시키시는 것이 아닙니다. 그렇게 하나님의 평강을 누리지 못하도록 방해하는 당사자는 바로 우리 자신입니다.

 

우리는 살아가면서 육신에 굴복하여 평강의 흐름을 끊어놓을 수가 있습니다. 성령을 따라 행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온갖 염려에 문을 열어놓고 있는 것입니다. 성령을 따라 행하지 않을 때 나타나는 증상이 앞날에 대한 불안감, 질병이나 죽음에 대한 두려움 같은 것입니다.

 

우리가 염려하는 일들은 그 밖에도 너무 많습니다. 그런 과정이 어떻게 시작됩니까? 행복의 조건을 세상의 덧없는 것에 두기 시작할 때 염려하게 됩니다. 지금 자신에게 한 번 질문해보십시오. ‘행복한 인생을 위해 지금 나는 무엇을 하고 있는가? 무엇을 추구하며 사는가?’ ‘이것을 하면 행복하겠지, 이것을 가지면 행복하겠지’ 하고 생각하는 것이 어떤 것입니까?

 

사실 ‘내겐 이게 있어야 행복해. 이걸 해야 내 인생이 행복해져.’라고 의식적으로 그렇게 생각하거나 노골적으로 드러내는 것은 별로 없을지 모릅니다. 그러나 자신의 상태를 알려면 아주 간단한 방법이 있습니다. 내가 내 시간과 돈을 주로 어디에 쓰고 있는지를 보십시오. 그러면 알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성경을 읽을 시간이 요즘 별로 없습니다. 이유는 모두 바빠서 그렇습니다. 하지만 성경을 읽을 시간은 별로 없는데, 왜 골프나 다른 운동을 하는 것 또는 한국 드라마를 볼 시간은 그렇게 많습니까? 성경보다 골프나 운동이나 한국 드라마를 보는 것이 내게 행복을 준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사실 오늘 예배 오시면서 오기 전부터 ‘야, 오늘 예배를 드려야 하는데 너무 기다려지고 흥분된다. 빨리 가서 예배드려야지.’ 하고 오신 분이 계십니까? 아마 거의 없으실 겁니다. 그런데 한국 드라마나 자기가 좋아하는 것을 하기 전에는 입 꼬리가 위로 슬슬 올라가면서 너무 즐겁고 기대가 되고 빨리 하고 싶습니다. 솔직히 그렇지 않습니까? 기도 역시 별로 안 하는데, 왜 자녀 교육시키는 데는 그토록 열을 올립니까? 기도보다 자녀가 잘되는 것이 내게 행복을 준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또 가난한 이웃을 돕거나 구제 헌금은 별로 안 하는데, 왜 비싼 돈을 내며 외식을 합니까? 남을 돕는 것보다 맛있고 비싼 음식을 사먹는 것이 행복을 준다고 여기기 때문입니다. 단기선교나 비전 트립도 많이 해야 하지만 안 가는데, 왜 여기저기 좋은 데로 여행은 갑니까? 선교지 방문보다 관광지 여행가는 것이 행복을 준다고 믿기 때문입니다. 주(主)님을 예배하고 섬기는 것은 일주일에 한 번 하는데, 왜 주(酒)를 섬기는(술 마시는) 것은 하루가 멀다 하고 합니까? 주님을 섬기는 것보다 술 마시는 것이 나를 행복하게 해준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지금 제가 그런 것들이 무조건 다 나쁘다고 말씀드리는 것이 아닙니다. 그런데 우리 삶의 중심이 어디 있는지를 한 번 잘 살펴보시라는 말입니다. 표현을 그렇게 안 해서 그렇지, A를 하지 않고 B를 한다는 것은 A가 주는 것보다 B가 주는 행복이 더 크다고 믿기 때문에 그런 것입니다.

 

반대로, 편안하게 집에서 TV 보며 쉴 수 있는데, 왜 굳이 모여서 삶을 나누고 서로를 위해 격려하며 기도합니까? 편안하게 쉬는 것보다 모여서 삶을 나누고 기도하는 것에 가치를 두는 것입니다.

 

또 모른 척하고 그냥 있어도 되는데, 왜 굳이 이웃의 어려움을 위해 발 벗고 뜁니까? 밤 10시, 11시에 갑자기 전화가 와서 아이가 아픈데 어떻게 해야 하느냐고 합니다. 그러면 평소에 20분, 30분 걸리는 거리를 10분 만에 쏜살같이 달려가서 함께 병원을 가줍니다. 왜 그렇게 합니까? 그렇게 함께 해주고 섬기는 것이 정말로 중요하다고 믿기 때문입니다.

 

이런 예들은 너무 많습니다. 그런데 잘 보십시오. 그 중심이 어디에 있습니까? 처음 말씀드린 것들의 중심은 모두 ‘나’ 자신에게 있습니다. ‘어떻게 하면 나에게 좋은가?’ 이것이 핵심입니다. 그런데 남을 섬기고 서로 기도하고 이웃을 위해 이리저리 뛰어다니는 것은, 먼저는 주님이 원하시는 것이고 또한 이웃의 유익을 위한 것입니다. ‘나 중심’이 아니라 ‘주님 중심’이고 ‘이웃 중심’입니다.

 

성경에서는 어떻게 할 때 행복해진다고 할 것 같습니까? 성경에서는 어떻게 할 때 진정한 평강을 누린다고 할 것 같습니까? 그것은 너무나 분명합니다. 나 자신에게 초점을 맞추고 눈을 세상으로 돌릴 때, 평강을 누리는 것이 아니라 염려를 누립니다. 불안과 초조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삶을 살게 됩니다. 하지만 초점을 주님이 원하시는 삶에 맞추고 이웃을 섬길 때, 진정한 평강을 누립니다. 그러면서 예수 믿는다는 것이 이렇게 기쁘고 좋은 것인가를 깊이 체험하게 됩니다.

 

하나님은 처음부터 당신의 말씀을 순종하는 데서 평강이 온다는 것을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충분히 밝히셨습니다. 진정한 평강은 순종을 통해 회복됩니다. 그 첫걸음은 죄의 길에서 돌아서는 것입니다. 자기만 아는 자기중심적인 삶에서 돌아서는 것입니다. 그래야 평강을 누립니다. 자기만 알고 자기만 위하는 삶은 반드시 두려움과 염려와 불안으로 이끕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자신의 마음을 잘 들여다보고 그런 불안과 염려의 원인이 되는 것을 끊어 버려야 합니다. 그러니까 자기만 위하는 그런 삶을 청산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원하시는 대로, 이웃을 사랑하며 섬기는 삶의 모드로 전환해야 합니다.

 

예수님이 “가장 큰 계명(대 계명)”을 말씀하시면서, 하나님을 전심으로 사랑하고 이웃을 자신의 몸 같이 사랑하라고 괜히 말씀하신 것이 아닙니다. 그렇게 살면, 사실은 자신에게 좋습니다. 한 번 해보십시오. 정말 하나님을 뜨겁게 사랑하고 이웃을 섬기는 삶을 살면 행복해집니다. 그리고 평강을 누립니다. 불안하지 않고 두렵지 않게 됩니다.

 

“선한 일을 하는 모든 사람에게는, 먼저 유대 사람을 비롯하여 그리스 사람에게 이르기까지, 영광과 존귀와 평강을 내리실 것입니다.” (롬 2:10)

 

‘내 코가 석 자인데 어떻게 남을 섬기는가?’라고 생각하는 분도 있을지 모릅니다. 그러나 인생의 어려운 문제 속에서도 섬기는 삶을 살게 되면 정말 평화를 누립니다. 그것은 심각한 문제에 대해 무관심하거나 현실을 도피하는 것이 아니라, 정말 하나님을 신뢰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정말로 믿으니까 그분의 말씀대로 순종하는 것이고, 그러다 보면 평강을 누립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온전하게 하시려고 우리에게 닥친 모든 어려움들을 사용하고 계시다는 사실을 이해한다면 우리는 평강 가운데 거하게 됩니다. 그 모든 것들은 결코 헛된 일들이 아닙니다. 왜 이런저런 일들이 우리 삶에 일어나는지. 평소에 신앙생활도 잘하고 있는데도 왜 큰 어려움이 찾아오는지, 그 이유를 항상 알 수 있는 것은 아니지만, 거기에도 하나님의 선한 뜻이 있다는 것을 우리는 압니다. 선한 일, 즉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일을 하는 사람마다 평강을 누리게 될 것입니다. 성경은, 하나님의 기준대로 살면 평강이 찾아온다고 분명히 약속해줍니다.

 

혹시 지금 불안과 염려 가운데 있고 평강을 잃어버렸더라도, 다시 그것을 찾을 수 있습니다. 모든 일에 하나님을 신뢰할 때, 죄에서 돌아설 때, 순종의 길을 걸을 때, 우리 삶에서 주님이 행하시는 연단을 견디어낼 때, 선한 일을 할 때,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살아갈 때, 우리는 평강을 회복할 수 있습니다. 그렇게 할 때 정말로 하나님의 평강은 때마다 일마다 우리에게 주어질 것입니다.

 

4) 평강은 상황을 뛰어넘는다

 

하나님의 평강은 또한 환경의 영향을 받지 않는다는 특징이 있습니다. 바울은 성도들이 “때마다 일마다” 즉 ‘언제나, 어느 방식으로든지’ 평강을 누리기를 기도했습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평강은 세상에서 일어나는 어떤 일에나 어떤 방식에나 영향을 받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평강은 어떤 인간관계나 환경 가운데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우리가 틀림없이 믿을 수 있는 하나님의 약속 위에서 이루어집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안전하게 지켜주시고 우리의 유익을 위해 모든 일을 하시는 분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요 14:27)처럼, 주님은 세상의 평화와 비교할 수 없이 뛰어난, 그 어떤 인간적인 환경에도 영향을 받지 않고 세상의 평화와는 다른 평화를 주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두려워하거나 염려할 것이 아무것도 없다는 것입니다. 우리 인생을 곤경에 빠뜨리는 어떠한 문제 가운데서도 평안을 누릴 수 있다는 것입니다. 상황이 좋을 때는 평안하고 상황이 나쁠 때는 평안을 잃는다면, 그 평안은 가짜 평안입니다.

 

빌리 그래햄(Billy Graham) 목사님의 설교 중에 이런 예화가 있습니다. 남미의 안데스 산맥 위로 비행을 하던 비행기가 있었습니다. 안데스 산맥은 세계에서 가장 변화가 심한 기류가 있는 지역 중 하나입니다. 얼마 전 그곳에 헬기가 추락해서 한국에서 온 사람들도 세상을 떠난 일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런지 비행기가 갑자기 난기류(air pocket)를 만나 500 feet 이상 뚝 떨어지며 급강하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모든 사람은 내장이 뒤틀리는 고통을 느끼며 사색이 되어 어쩔 줄 모르고 있을 때, 놀랍게도 맨 앞에 앉아 있던 어린아이는 비행기가 쿵 떨어질 때마다 오히려 깔깔 웃으며 좋아하는 것이었습니다. 20분쯤 후에 비행기가 안정을 찾고 날아가게 되자 사람들이 그 아이에게 질문했습니다. “얘, 넌 무섭지 않았니?” “아니오, 하나도 안 무서웠어요.” “다들 무서워하는데 어떻게 너만 무섭지 않았니?” “그건요, 이 비행기의 조종사가 내 아빠거든요.” 이 아이는 조종사인 자기 아빠를 신뢰했기 때문에 그 무서운 상황 속에서도 평안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어떤 상황 속에서도 아버지이신 하나님을 신뢰하는 것, 이것이 진정한 평강의 비결입니다. 그리고 그렇게 상황과 관계없이 누리는 평강이 진짜 평강입니다. 우리는 충분히 그럴 수 있다고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우리에게는 아버지가 계시기 때문입니다.

 

3. 하나님의 은혜

 

사도 바울은 데살로니가 성도들이 그러한 평강을 누리기를 원했습니다. 그래서 이 편지 마지막에 하나님의 은혜를 구합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가 너희 무리에게 있을찌어다” (18절)

 

바울의 편지는 어느 편지이든지 대개 이런 내용으로 끝납니다. 주님의 은혜를 구합니다. 바울은 성도들이 하나님의 은혜 안에 머물기를 원했기 때문입니다. 은혜란, 그것을 받을 자격이 없는 사람들에게 주어지는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이 하나님의 은혜는 그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분명히 나타났습니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구원의 은혜를 경험했다면, 우리를 염려하게 만들기 쉬운 그 어떤 어려움도 견디어낼 수 있는 은혜의 복을 받은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통해 우리는 구원을 받고, 염려를 극복하고, 사역을 감당할 수 있도록 준비되고, 영적으로 성장하고, 하나님 안에서 평강과 풍성함을 누릴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은혜에는 제한이 없습니다. 무한대로 주십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누구나 사랑하시지만 누구나 하나님의 평강을 누리는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의 평강과 같은 은혜는 하나님께 순종하는 자만이 누릴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 나아오지 않고 불순종하는 자는 평강을 누리지 못합니다. 하나님이 안 주셔서가 아니라, 은혜를 내려주시는 채널을 자기가 막아버렸기 때문입니다.

 

제2차 세계대전이 막바지에 이를 무렵, 연합군은 전쟁고아들을 위해 막사를 제공하여 그들을 적당히 정착시킬만한 장소를 물색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막사의 장교들은 아이들이 밤에 거의 잠을 못 잔다는 사실을 알고 매우 당황했습니다. 장교들은 왜 고아들이 밤에 잠을 못 자는지, 심리학자들에게 그 문제를 의뢰했습니다.

 

심리학자들은 여러 가지를 일이보다가 결국 한 가지 방법을 생각해냈습니다. 매일 밤 아이들이 잠자리에 들었을 때, 침대 사이로 한 사람이 다니면서 아이들의 손에 작은 빵조각을 하나씩 쥐어주게 한 것입니다. 그러니까 아이들이 매일 밤 빵조각을 받는 것으로 하루를 마감하게 했던 것입니다. 그랬더니 놀랍게도 며칠 안 되어서 그들은 밤새도록 깊은 잠을 잘 수 있었습니다.

 

그 이유가 무엇이었을까요? 낮 동안에 충분히 음식을 먹을 수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아이들은 모두 내일은 또 어떤 일이 벌어질까에 대한 염려 때문에 오늘 가진 것을 즐길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자기 손에 빵조각을 쥐었을 때 아이들은 적어도 그 다음날 아침 식사 걱정은 하지 않아도 된다는 사실을 알고 안심했던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빵 한 조각뿐 아니라 진수성찬을 우리 손에 매일 쥐어 주십니다. 그 작은 빵 조각은 바로 이것입니다.

 

“평강의 주께서 친히 때마다 일마다 너희에게 평강을 주시기를 원하노라 주는 너희 모든 사람과 함께 하실찌어다.” (16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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