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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약 --------------------/사무엘하

삼하 19장 31-39절(바르실래의 공궤) - 허창수

by Preacher 2023. 12. 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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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하19장 31-39

바르실래의 공궤

허창수 목사 17.07.09

동성교회 [창원시] https://https://cafe.daum.net/huhcs48/

 

다윗은 어려서부터 여호와의 영에게 감동된 사람입니다(삼상16:13). 형들이나 사울 왕도 두려워 떨었던 골리앗을 어린 다윗이 물맷돌을 던져 죽였습니다. 하나님께서 내 마음에 마음에 합한 자라고 하셨습니다. 이러한 다윗이라면 하나님의 보호를 받아 어떤 어려움이나 악한 일이 없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러나 다윗의 일생을 돌이켜 보면 누구보다도 많은 어려움을 당하였습니다. 하물며 사울 왕이 죽이려고 했습니다. 무엇보다도 자신의 아들 압살롬이 아버지를 죽이고 왕이 되려고 하는 치욕적인 일도 있었습니다.

 

아들 압살롬이 헤브론에서 스스로 왕이 되어 아버지를 죽이고 왕좌에 앉기 위해서 예루살렘을 향하여 온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다윗은 급히 예루살렘을 빠져 나와 이른 새벽에 요단을 건너(삼하17:22) 마하나임으로 피하였습니다. 다윗은 자신을 따르는 사람 육백 명과 함께 마하나임에 피하였고, 압살롬은 길르앗에 진을 치고 있었습니다(삼하17:26).

 

이것은 다윗에게 있어서는 안 되는 가장 치욕적인 일이었습니다. 그런가 하면 갑자기 도망쳐 나오므로 아무것도 준비된 것이 없었습니다. 마실 물이나 먹어야 하는 떡도 없었습니다. 아들과 싸워 죽는 것 보다 목마르고 굶주려 죽게 되었습니다. 이때의 다윗에게는 심리적인 고통 뿐 아니라, 육체적인 굶주림과 고통은 매우 컷을 것입니다.

 

그때 32에 ‘바르실래는 매우 늙어 나이가 팔십 세라 그는 큰 부자이므로 왕이 마하나임에 머물 때에 그가 왕을 공궤하였더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개역판 성경에 ‘공궤’라는 단어가 개정판 성경에는 ‘음식을 대접하고’라는 말로 바꾼 것이 있습니다. 그런데 개정판에서 ‘공궤’라는 말을 유일하게 여기서 보게 됩니다. 그래서 마하나임에 바르실래의 공궤는 특별한 의미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온 이스라엘이 가뭄으로 어려움을 당할 때 그릿 시냇가에 숨은 엘리야에게 하나님께서 ‘너는 일어나 시돈에 속한 사르밧으로 가서 거기 머물라 내가 그 곳 과부에게 명령하여 네게 공궤하게 하였느니라’(왕상17:9)는 말씀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사르밧 과부에게 엘리야에게 공궤하도록 명령하셨다는 말씀처럼, 마하나임에 바르실래에게 하나님께서 다윗을 공궤하라고 명령하셨다는 말씀은 없지만, 그러나 하나님께서 다윗에게 공궤하도록 바르실래에게 섭리하셨다고 봅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엘리야에게 사르밧으로 가라고 하셨듯이, 다윗에게도 마하나임으로 가라는 말씀은 없지만, 하나님께서 마하나임으로 인도하셨다고 믿습니다.

 

다윗이 마하나임에서 몇 사람으로부터 도움을 받았습니다. ‘소비와 마길과 바르실래가 침상과 대야와 질그릇과 밀과 보리와 밀가루와 볶은 곡식과 콩과 팥과 볶은 녹두와 꿀과 버터와 양과 치즈를 가져다가 다윗과 그와 함께 한 백성에게 먹게 하였습니다(17:27-29)’. 다윗과 일행에게 가장 필요한 모든 것을 가져왔습니다. 이것을 ‘공궤하였더라’(32)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다윗이 피한 마하나임은 ‘하나님의 군대’라는 뜻을 가진 종교적인 의미가 있는 곳입니다. 야곱이 외삼촌 라반의 집을 떠난 후 얍복을 건너기 전에 하나님의 사자를 만난 곳입니다(창32:2). 다윗이 마하나임으로 피하였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엘리야에게 사르밧으로 가라고 말씀하셨던 것처럼, 하나님께서 다윗을 마하나임으로 인도하셨으며, 바르실래의 공궤를 받도록 하신 것입니다. 바르실래의 공궤는 다윗의 일행에게 사기충천 할 수 있어 압살롬과의 싸움을 대적할 수 있었습니다.

 

하나님은 압살롬을 치셨습니다. 압살롬은 다윗의 부하들과 마주치자 노새를 타고 달리다 그의 머리가 상수리나무 가지에 걸려 대롱대롱 달린 것을 보고 요압이 쳐서 죽였습니다(18:11). 이제 다윗은 예루살렘으로 돌아가기 위해 요단까지 왔습니다. 그때 바르실래가 찾아 왔습니다. 찾아온 바르실래에게 다윗은 바르실래에게 ‘너는 나와 함께 건너가자 예루살렘에서 내가 너를 공궤하리라’(33)라고 말합니다.

 

다윗은 며칠 전에 바르실래의 도움을 잊지 않았습니다. 이제 다윗은 그것에 대한 보답으로 바르실래의 여생을 책임지겠다는 의미로 예루살렘으로 함께 가자고 했습니다. 그런데 바르실래는 정중히 사양합니다. ‘바르실래가 왕께 아뢰되 내 생명의 날이 얼마나 있사옵겠기에 어찌 왕과 함께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리이까’(34)라고 겸손히 거절하였습니다.

 

사르밧 과부가 엘리야에게 공궤했다는 말씀은 ‘음식을 대접하고’라고 고치면서, 바르실래가 다윗 왕에게 공궤했다는 말은 그대로 둔 것은 상당한 의미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당시 바르실래의 나이가 팔십 세였습니다. 당시 팔십 세는 그동안의 이스라엘의 역사 속에서 보고 체험하며 살아온 사람입니다. 사무엘 선지자가 다스렸던 신정 정치와 사울이 다스렸던 왕정 정치로 바꾸어진 것을 실제로 체험한 사람입니다. 그리고 초대 왕 사울의 통치와 다윗 왕의 통치 현장에서 체험을 했습니다.

 

이러한 역사적인 현장에서 보고 듣고 체험하며 팔십 년을 살아오면서 큰 부자가 되었습니다. 사울 왕 때는 블레셋을 비롯하여 모압과 암몬의 침략을 받아 이스라엘 백성들은 빼앗기고 두려워 떨고 숨어 살았습니다. 그러나 다윗 왕 때는 전쟁이 없는 평화로운 나라가 되어 백성들이 안정된 삶을 살 수가 있었던 것을 바르실래는 체험하였습니다. 자신이 지혜롭게 잘 해서 부자가 된 것이 아니라 다윗이 나라를 잘 다스리므로 큰 부자가 될 수 있었다는 것도 알았습니다.

 

그래서 다윗이 아들 압살롬의 대적으로 어려움을 당하는 것을 보았을 때 다윗과 그의 일행에게 가장 필요한 모든 것을 아낌없이 베풀어 주었습니다. 바르실래는 백성을 평안하게 살 수 있도록 해 주었을 뿐 아니라, 자신이 거부가 된 것도 다윗 왕의 은혜인 줄 알고 감사하여 베풀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바르실래가 다윗 왕을 ‘공궤하였더라’고 말씀하였습니다.

 

지금 우리나라에 팔십 세 역시 일제시대 때에 태어나서 육이오 전쟁과 가난으로 헐벗고 굶주렸던 것들을 체험하며 살아 온 사람들입니다. 팔십 년이 지난 오늘 우리는 잘 살고 있습니다. 팔십 년 전에는 일제의 압박 속에서 말과 성씨까지 빼앗기고 자유없는 나라였습니다. 일제와 공산주의는 한국교회를 짓밟았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신앙의 자유가 있습니다. 어디가면 맛있는 것을 먹을 수 있느냐고 하며 배 불리 먹습니다.

 

최상의 멋을 부리며 부자로 살고 있습니다. 손톱 관리하는 직업이 돈을 많이 번다고 합니다. 어느 장로님의 딸이 서울 명동에서 손톱 관리하는 일로 매월 칠팔십 만원 십일조를 한답니다. 이해가 됩니까? 우리가 이렇게 잘 살 수 있게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와 축복이라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내가 잘해서 잘 살 수 있다는 교만을 버리고 절대적인 하나님의 은혜라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여기서 우리는 다시 ‘공궤’라는 말의 신학적인 의미를 생각해야 합니다. 마태복음 25장에 예수님께서 인자가 올 때에 마치 목자가 양과 염소를 구분하듯이 의인과 악인으로 구분하실 것을 말씀하셨습니다. 의인과 악인으로 구분하시는 잣대가 ‘공궤’와 ‘공양’입니다. ‘공궤’는 ‘예수님에게 한 것’이라고 하셨고, ‘공양’은 ‘예수님에게 하지 아니한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마하나임의 바르실래가 다윗의 일행에게 베풀었던 것을 ‘공양’이라고 하지 않고 ‘공궤’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만약 ‘공양을 하였다’고 기록하였다면 예루살렘으로 돌아가는 다윗에게 바르실래는 자신이 지난날에 도왔던 것에 대한 댓가를 기대하였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다윗 왕이 예루살렘으로 함께 가자고 했을 때 바르실래는 ‘그러면 그렇지 내가 도와주었던 것을 잊지 않고 있구나’ 라고 하며 다윗을 따라 예루살렘으로 올라갔을 것입니다. 그러나 바르실래는 다윗의 요청을 정중하게 거절하였습니다. 그래서 바르실래가 다윗을 도왔던 것을 ‘공양’이 아니라 ‘공궤’라고 성경은 말씀하고 있습니다.

 

마태복음 25장에 예수님께서 의인들에게 ‘너희가 그렇게 하였느니라’고 했을 때 의인들은 ‘우리가 언제 그렇게 하였나이까’라고 말했습니다. 그러나 악인들에게 ‘너희는 내게 하지 아니하였느니라’고 했을 때 악인들은 ‘우리가 공양하지 아니하더이까’라고 말했습니다. 만약 바르실래가 다윗의 일행을 도왔던 것에 대한 어떠한 보답을 바랬다면 ‘공양’ 이라고 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바르실래는 다윗으로부터 어떤 것도 바라지 않고 거절했기 때문에 바르실래가 베푼 것을 ‘공궤’라고 한 것입니다.

 

바르실래는 ‘당신의 종은 왕을 모시고 요단을 건너려는 것뿐이거늘 어찌하여 이같은 상으로 내게 갚으시려 하시나이까’(36)라고 말했습니다. 바르실래가 다윗을 찾아 온 것은 예루살렘으로 돌아가는 다윗 왕에게 요단을 건너려고 하는 것을 돕기 위해서 나왔을 뿐이라고 했습니다. 바르실래가 다윗에게 어떤 보상을 받으려고 온 것이 아니라 요단을 건너는 다윗을 도와주고 그 일행을 배웅하려고 온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아들 압살롬에게 쫓겨 도망하는 왕이었지만 바르실래는 다윗의 의로움과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이스라엘의 왕이심을 알았습니다. 그래서 예루살렘 왕궁으로 돌아가는 왕을 돕기 위해 자신의 노후의 몸을 이끌고 달려온 것입니다. 바르실래는 이스라엘의 백성중의 한 사람으로 왕을 도울 수 있다는 사실 하나만으로 기뻐하였습니다.

 

우리가 베풀고 섬길 때 어떤 보상을 바라는 것은 ‘공양’이지 ‘공궤’가 될 수 없습니다. 어려움에 있는 사람에게 베풀고 섬기는 것은 하나님의 백성된 자로서의 하나님을 섬기는 마땅한 도리이자 은혜로운 특권입니다. 그런즉 우리는 하나님을 섬길 수 있는 특권이 우리에게 주어진 점을 도리어 감사해야 합니다. 바르실래는 자신은 이스라엘의 백성의 한 사람으로 이스라엘의 왕을 섬기는 것입니다. 백성의 한 사람으로서 마땅히 왕을 섬겼을 뿐이라고 말했습니다.

 

예수님께서 ‘구제할 때에 외식하는 자가 사람에게 영광을 받으려고 회당과 거리에서 하는 것 같이 너희 앞에 나팔을 불지 말라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들은 자기 상을 이미 받았으니라’(마6:2)고 말씀하셨습니다. 구제할 때에 오른 손이 하는 것을 왼손이 모르게 하라고도 하셨습니다(마6:3). 오늘 우리의 실수가 자신이 한 것을 알아달라는 것입니다. ‘내가 한 것은 왜 모르느냐’고 합니다. 작은 일 하나라도 잘했다고 칭찬하면 좋아합니다. 그러나 알아주지 않을 때 섭섭하게 여기는 것입니다. 우리는 바르실래에게 올바른 공궤를 배워야 합니다.

 

바르실래는 왕의 제안을 정중히 거절하는 대신 자신이 원하는 바를 말했습니다. ‘내가 내 고향 부모의 묘 곁에서 죽으려 하나이다’(37)라고 말했습니다. 다시 말하면 조용히 하나님의 부르심을 기다리며 죽음을 맞이하겠다는 말입니다. 많은 부자들은 죽음이 눈앞에 닥쳐왔음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죽음을 준비하기 보다는 물질적인 욕심과 명예에 대한 욕구가 대단합니다. 그러나 바르실래는 그러지 않았습니다. 바르실래는 자신의 아름다운 죽음을 준비하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바르실래는 다윗에게 작은 부탁을 합니다. ‘그러나 왕의 종 김함이 여기 있사오니 청하건대 그가 내 주 왕과 함께 건너가게 하시옵고 왕의 처분대로 그에게 베푸소서’(37)라고 말했습니다. 김함은 바르실래가 자기 대신 왕께 천거한 인물입니다. 그런데 열왕기상 2:7에 보면 김함이 바르실래의 종이 아니라 아들임을 알 수가 있습니다. 바르실래는 자신의 사랑하는 아들 김함을 다윗 왕에게 부탁을 했습니다. 아들을 왕에게 청탁하는 것이 아닙니다. 아들을 종이라고 하며 자신을 대신하여 아들이 왕을 섬길 수 있도록 해 달라고 말했습니다. 자신 역시 왕을 계속하여 돕고자 하지만 이미 나이가 많아 할 수가 없으니 젊은 아들이 나를 대신하여 왕을 도울 수 있도록 부탁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다윗 왕은 바르실래에게 입 맞추고 복을 빌고 김함을 데리고 감으로 바르실래와 헤어졌습니다(39). 다윗 왕은 바르실래의 공궤를 죽을 때까지 잊지 않고 그의 아들 김함을 보살폈습니다. 그리고 자신의 임종시에 아들 솔로몬에게 바르실래의 아들에게 은총을 베풀어 줄 것을 유언까지 하였습니다. 다윗은 바르실래의 ‘공궤’를 잊지 않고 그에 대한 보답을 하려고 했습니다.

 

열왕기상 2:7절에 다윗이 그의 아들 솔로몬에게 ‘마땅히 길르앗 바르실래의 아들들에게 은총을 베풀어 그들이 네 상에서 먹는 자 중에 참여하게 하라 내가 네 형 압살롬의 낯을 피하여 도망할 때에 그들이 내게 나왔느니라’고 유언 한 것을 볼 수가 있습니다. 바르실래의 ‘아들들이 왕의 상에서 먹도록 하라’는 말씀입니다. 다윗은 바르실래의 종이라고 하지 않고 ‘그의 아들들’이라고 했습니다. 아들들이란 복수는 그의 후손들을 의미합니다. 바르실래의 공궤가 그의 아들과 후손에게까지 왕의 상에서 음식을 먹을 수 있는 축복을 받았다는 것을 눈여겨 보아야 합니다.

 

우리의 공궤는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서 왕중의 왕이신 예수님과 함께 영원히 살게 되는 복을 받게 된다는 것을 가르쳐 줍니다. ‘공궤’는 보상을 바라지 않고 베푸는 것이지만 보상은 반드시 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최후의 날에 심판주로 오시는 예수님으로부터 ‘내 아버지께 복받을 자들이여 나아와 창세로부터 너희를 위하여 예비된 나라를 상속받으라’(마25:34)고 말씀과 함께 천국에 들어가서 영원히 왕되신 예수님과 함께 사는 우리 모두가 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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