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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약 --------------------/에스라

스 7장 1-10절(에스라의 결심(決心)) - 이삼규

by Preacher 2023. 6. 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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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7장 1-10

에스라의 결심(決心)

이삼규 목사 20190224

낙양교회 http://nakyang.onmam.com

 

스 7:1 이 일 후에 바사 왕 아닥사스다가 왕위에 있을 때에 에스라라 하는 자가 있으니라 그는 스라야의 아들이요 아사랴의 손자요 힐기야의 증손이요

스 7:2 살룸의 현손이요 사독의 오대 손이요 아히둡의 육대 손이요

스 7:3 아마랴의 칠대 손이요 아사랴의 팔대 손이요 므라욧의 구대 손이요

스 7:4 스라히야의 십대 손이요 웃시엘의 십일대 손이요 북기의 십이대 손이요

스 7:5 아비수아의 십삼대 손이요 비느하스의 십사대 손이요 엘르아살의 십오대 손이요 대제사장 아론의 십육대 손이라

스 7:6 이 에스라가 바벨론에서 올라왔으니 그는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주신 모세의 율법에 익숙한 학자로서 그의 하나님 여호와의 도우심을 입음으로 왕에게 구하는 것은 다 받는 자이더니

스 7:7 아닥사스다 왕 제칠년에 이스라엘 자손과 제사장들과 레위 사람들과 노래하는 자들과 문지기들과 느디님 사람들 중에 몇 사람이 예루살렘으로 올라올 때에

스 7:8 이 에스라가 올라왔으니 왕의 제칠년 다섯째 달이라

스 7:9 첫째 달 초하루에 바벨론에서 길을 떠났고 하나님의 선한 손의 도우심을 입어 다섯째 달 초하루에 예루살렘에 이르니라

스 7:10 에스라가 여호와의 율법을 연구하여 준행하며 율례와 규례를 이스라엘에게 가르치기로 결심하였었더라

 

유대인들에게 있어서 가장 소중한 물건을 꼽으라 하면 ‘토라’일 것입니다. 토라는 엄격하게 말하면 모세 오경을 말합니다. 토라는 사람 손이 직접 닿지 않도록 취급하는 것이 그들의 원칙입니다. 우선 토라를 꺼내서 읽을 때는 토라손(토라 포인터)을 이용합니다. 사람의 팔처럼 만들어진 토라손은 회당에서 토라를 읽을 때 여러 사람에게 현재 읽고 있는 부분을 알려 줄 수 있을 뿐 아니라 토라에 때를 묻히지 않게 합니다. 만일 토라를 땅에 떨어뜨리거나 무심코 땅바닥에 놓은 사람은 금식을 해야 합니다. 이처럼 유대인들은 토라를 인격적으로 대우합니다. 만일 회당에 불이 났을 경우에는 사람을 다 구한 뒤에 제일 먼저 토라를 구해야 하고, 토라 두루마리가 낡거나 못쓰게 되어 폐기해야 할 때는 사람처럼 무덤에 묻어줍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경외하는 것이 지혜의 근본입니다. 유대인들은 그 가르침을 따르기 위해서 노력을 아끼지 않습니다. 어떻게 하는 것이 하나님 말씀을 경외하는 것일까요? 유대인들처럼 성경책 자체를 소중하게 다루는 것도 좋습니다. 그러나 사실 더 중요한 것은 성경책이 닳도록 읽고 또 읽어서 그 말씀이 우리 마음에 새겨지게 하는 것이 더 좋은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말씀에 대한 진정한 경외심이 아니겠습니까? 오늘 봉독해 드린 본문 10절을 보겠습니다.

 

스 7:10 에스라가 여호와의 율법을 연구하여 준행하며 율례와 규례를 이스라엘에게 가르치기로 결심하였었더라

 

포로에서 돌아온 에스라의 중대한 결심이 본문에 나타나고 있습니다. 어떤 결심입니까? 여호와의 율법을 연구하여 준행하며 율례와 규례를 이스라엘에게 가르치기로 결심한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말씀의 제목을 ‘에스라의 결심’이라고 정하였습니다.

 

에스라는 누구인가?

 

먼저 에스라서의 구조를 말씀드리면 1-6장까지는 스룹바벨을 중심으로 한 성전 재건을 다루고 있습니다. 눈에 보이는 성전이 새롭게 재건된 것입니다. 솔로몬의 성전과는 비교되지 않지만 그토록 이스라엘이 소망한 성전이 재건된 것입니다. 그런데 눈에 보이는 성전이 재건되었다고 해서 모든 것이 일단락되는 것은 아닙니다. 그 성전에서 섬길 이스라엘 공동체가 문제입니다. 에스라 7-10장은 에스라를 중심으로 한 공동체 재건을 다루고 있습니다. 무너진 공동체를 다시 세우는 일을 누구를 주축으로 이루어 나갑니까? 에스라를 중심으로 이루어집니다. 그러면 에스라는 어떤 사람입니까? 바로 학자 겸 제사장이었습니다(11,12절).

 

스 7:1 이 일 후에 바사 왕 아닥사스다가 왕위에 있을 때에 에스라라 하는 자가 있으니라 그는 스라야의 아들이요 아사랴의 손자요 힐기야의 증손이요

 

여기에 나오는 ‘이 일 후에’라는 말은 바로 앞에 있었던 어떤 사건을 가리킵니다. 그것이 무엇입니까? 즉 성전이 완공되고 이스라엘이 유월절을 지킨 사건을 말합니다. 스룹바벨 성전은 다리오 왕 6년(BC516년)에 완공되었습니다. 그런데 에스라가 등장한 때는 아닥사스다가 페르시아 왕으로 있을 때입니다(1,12,21절). 그렇다면 6장과 7장 사이에는 상당한 시간의 간격이 있었다고 보아야 합니다. 약 60년의 간격이 있었습니다. ‘에스라’는 ‘아사랴’의 준말로, ‘여호와는 도우심’이라는 의미가 있습니다. 에스라는 스라야의 아들이요, 아사랴의 손자이며 힐기야의 증손이었습니다. 에스라의 아버지 스라야는 예루살렘이 멸망 당시의 대제사장이었던 사람입니다.

 

왕하 25:18 시위대장이 대제사장 스라야와 부제사장 스바냐와 성전 문지기 세 사람을 사로잡고

 

그렇다면 스라야와 에스라 사이에 적어도 약 120년의 차이가 존재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에스라에 나타난 계보는 모든 사람을 다 소개한 것이 아닙니다. 개괄적으로 나열한 것입니다. 에스라의 족보를 거슬러 올라가면 누가 나옵니까? 첫 번째 대제사장인 아론이 나옵니다. 에스라는 아론의 16대 손이라는 것입니다. 왜 오늘 본문이 이런 것을 소상하게 기록하고 있을까요? 에스라가 개혁을 주도하기에 충분한 자격을 갖춘 인물임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한 사람의 족보를 이렇게 자세히 보도하는 것은 매우 이례적인 일입니다. 이것은 저자가 에스라라는 인물에 특별한 관심을 보이고 있다는 것입니다.

 

무너졌던 성전은 재건되었고, 성전 봉헌식도 성대히 치러졌습니다. 그러나 성전을 재건하시는 하나님의 역사는 그것으로 끝나지 않았습니다. 예루살렘 성전의 진정한 회복을 위해 하나님은 한 사람을 등장시킵니다. 그가 바로 아론의 16대 손인 학자 겸 제사장 에스라입니다. 성전이 무너진 상황에서도 하나님께서 제사장 가문이 끊이지 않도록 보존하셨다는 사실은 정말로 놀라운 은혜가 아닐 수 없습니다.

 

하나님은 교회의 회복을 위해 합당한 자격을 갖춘 사람을 친히 준비하시고 세우신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성전에서 섬기는 일은 오직 아론 계열의 제사장 가문에만 허락된 특권이었습니다. 하나님에 의해 합당한 자격을 갖춘 자만 성전에서 하나님을 섬길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교회를 위하여 자격을 갖춘 사역자를 예비하십니다. 대제사장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중보로 그 자격을 갖출 수 있습니다.

 

무너진 성전은 다시 지을 수 있지만, 끊어진 계보는 다시 이을 수 없습니다. 이런 점에서 아론부터 에스라까지 면면히 이어진 제사장 가문의 계보는 성전 회복을 향한 하나님의 프로젝트가 계속해서 가동되었다는 것을 보여 주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교회를 향한 그분의 뜻인 구원을 결코 포기하신 적이 없습니다. 일할 사람이 없다고 아무나 직분자로 세우면 되겠습니까? 오늘날 교회들이 그런 일들을 할 때가 많이 있습니다. 그래서 교회가 시험에 들고 문제가 생기게 됩니다. 한 사람의 직분자를 세울 때 철저한 검증과 아울러 훈련이 필요한 것입니다. 사람이 부족하다고 아무에게나 교회 일을 맡기는 것은 잘못된 것입니다. 교회 일이 아무리 급하더라도 쓰실 사람을 친히 택하시고 세우시는 하나님을 신뢰하고, 철저히 검증된 사람을 직분자로 세워야 할 것입니다.

 

하나님이 도우시는 에스라

 

혈통적으로 정통성을 가진 에스라는 어떤 사람입니까?

 

스 7:6 이 에스라가 바벨론에서 올라왔으니 그는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주신 모세의 율법에 익숙한 학자로서 그의 하나님 여호와의 도우심을 입음으로 왕에게 구하는 것은 다 받는 자이더니

 

당시 제사장이라고 해서 모두 율법에 정통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율법을 잘 모르는 제사장도 많았고, 율법을 알더라도 지키지 않는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제사장 에스라는 하나님의 언약 백성이 지켜야 할 모세 율법에 익숙한 성경학자요, 율법 교사였습니다. 여기에서 ‘익숙한’이라는 말은 ‘능통한, 통달한, 준비된’이라는 여러 가지 의미를 지닌 단어입니다. 그는 율법에 정통한 학자였습니다. 그는 율법을 공부했고 그에 순종함으로써 그 의미를 체험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바벨론 학문도 공부하였지만, 무엇보다도 하나님의 율법을 중요시하고 마침내 그 율법에 정통한 학자가 된 것입니다. 아마 여기에는 그가 아론의 후손이라는 정체성이 한몫을 했을 것입니다. 그는 하나님의 말씀이 지식의 근본임을 확신했습니다. 말씀에 대한 이런 확신이 있었기 때문에 그는 바사의 선진 문화에 휩쓸리지 않고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말씀을 연구하는 일에 매진했던 것입니다.

 

에스라가 귀환할 때, 율법 책을 가지고 오면서 예루살렘 공동체는 토라 중심의 공동체로 새롭게 시작할 수 있었습니다. 성전이 중요하지만 그 안에서 행해지는 것들이 하나님의 율법을 따라야 하지 않겠습니다. 이제 외형이 갖추어졌고 내실을 다지게 된 것입니다. ‘모세의 율법에 익숙한 학자’로 에스라를 소개하고 있는데 ‘학자’(쏘페르)는 ‘기록자, 서기관, 비서’를 뜻하는 단어입니다. 학자는 바벨론 포로 기간에 생긴 새로운 직업으로, ‘율법을 기록하고 연구하는 사람’을 말합니다. 이런 면에서 에스라는 포로기 이후 성전과 율법을 중심으로 새로운 공동체를 건설하는 데 적합한 인물입니다.

 

‘그의 하나님 여호와의 도우심을 입음으로 왕에게 구하는 것은 다 받는 자이더니’

 

그의 위에 하나님의 손길이 있었기에 왕은 그가 요청하는 것이라면 다 들어주었습니다. 세우신 자를 도우시는 하나님의 주권은 세상 권력도 마음대로 다스리십니다. 그래서 그가 구하는 것을 왕이 다 들어 주었습니다. 하나님의 도우심은 몇 사람에게만 겨우 미치는 힘이 아닙니다. 한 시대를 평정했던 바사 제국의 이방인 왕조차도 하나님의 주권적인 다스림 아래 있었습니다. 하나님은 만왕의 왕이십니다. 그 왕 아래 바사 왕도 있었습니다. 그가 바벨론으로부터 4개월 만에 예루살렘에 도착한 것도 하나님의 도우심 때문이었습니다.

 

스 7:9 첫째 달 초하루에 바벨론에서 길을 떠났고 하나님의 선한 손의 도우심을 입어 다섯째 달 초하루에 예루살렘에 이르니라 그

 

에게 사명을 맡기신 하나님은 그의 길을 친히 인도하시며 실제적인 도움을 베푸셨습니다. 오늘날에도 교회의 회복을 위해 하나님은 성령의 능력으로 날마다 도우시고 인도하십니다. 성령님은 교회를 위해 성도 개개인의 인생에 들어와 거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성령님은 날마다 성도에게 필요한 모든 것을 공급해 주십니다. 율법에 익숙한 학자인 에스라에게 하나님의 도우심이 머물러 있었던 것처럼, 성령님은 교회에 필요한 모든 능력이 나오는 원천이십니다. 성령님은 교회를 바른 길로 안전하게 인도하시고, 성도 개개인과 함께 하시며 해야 할 일과 가야 할 길을 밝히 보이십니다. 또한 모든 위험으로부터 성도를 지키십니다. 성령 안에서 성도와 교회는 안전하고 정확하게 궁극적인 목적지에 다다를 것을 확신할 수 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문제가 닥치면 성령님의 도우심을 의지하기보다 염려부터 하십니까? 문제의 크기에 압도당해 마음이 무너져 내리지는 않습니까? 그것은 사태를 바라보는 올바른 관점이 아닙니다. 하나님을 빼고 생각하면 그렇게 됩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하심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우리를 둘러싼 모든 상황과 사건을 완전히 장악하고 계심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이 선한 도우심을 베풀 줄 믿는 사람은 필연적으로 기도하게 되어 있습니다. 기도할 때 중요한 것은 만물을 주관하시는 하나님의 크심과 가장 작은 신음에도 응답하시는 자애로우심을 동시에 붙드는 것입니다.

 

에스라의 결심(決心)

 

에스라는 왕에게 신임을 받고 있었지만 그는 자신의 성공을 위한 정치적 입지를 마련하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왕의 곁을 떠나 예루살렘으로 가고자 했습니다. 그는 예루살렘으로 돌아가기를 원하는 사람들을 이끌고 예루살렘으로 출발합니다. 그런데 예루살렘으로 돌아가는 여정은 그렇게 쉬운 길은 아니었습니다. 그들을 노략하려는 대적들이 곳곳에 매복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에스라는 하나님께 평탄한 길을 주시라고 금식기도하면서 이 일을 감당하였습니다. 하나님의 선한 손의 도우심을 입어 4개월의 여정을 마치고 무사히 예루살렘에 도착하게 되었습니다. 그가 예루살렘에 돌아와 결심한 것이 무엇입니까?

 

1)율법을 연구하기로 결심하였습니다.

 

에스라는 율법을 연구하기로 결심했습니다. 당시에는 율법을 아는 사람이 드물었습니다. 가르쳐주는 사람도 희귀했습니다. 사람들의 관심을 율법으로부터 아주 멀어졌습니다. 그들은 살아남기 위해 바벨론이나 페르시아의 학문과 문화를 배우는 것에 열심이었습니다. 그것은 출세를 위해 필수적인 요소였습니다. 반면 율법은 잘 안다고 해서 누가 알아주지도 않았습니다. 오랜 세월 이국 생활을 하며 살아남기에 바빠서 사람들은 더더욱 율법을 중요하게 여기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모두 율법에 무관심했습니다. 그렇게 율법은 사람들에게서 멀어지고 잊혀지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살아 계심을 믿는 소수의 사람이 있었습니다. 하나님이 온 세상의 주인이심을 믿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자신들이 나라가 망하고 머나먼 타국에 포로로 끌려 온 것은 하나님을 배반하고 우상 숭배를 한 죄 때문이라고 믿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때가 되면 반드시 말씀하신 대로 이스라엘을 회복시키신다고 믿었습니다. 하나님께로 돌아가려면 하나님의 말씀인 율법을 잘 알아야 한다고 믿었습니다. 그런 사람들 중에 에스라도 있었습니다. 그래서 에스라는 하나님의 말씀인 율법을 배웠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날마다 가까이 하며 그 뜻을 바르게 알려고 힘썼습니다. 항상 하나님의 말씀인 율법을 깨달으려고 온 힘을 쏟았습니다. 율법을 잘 아는 훌륭한 스승이 있다면 어떻게든지 찾아가 배우려고 힘썼습니다. 그래서 에스라는 율법에 능통한 학사가 되었습니다. 율법에 가장 능통한 학사가 되었으나 에스라는 만족하지 않고 율법을 더 깊이 연구하기로 결심합니다.

 

2)율법을 준행하기로 결심하였습니다.

 

에스라는 율법을 연구하기로 결심하는 데 멈추지 않고 율법을 연구하여 깨달은 것을 준행하기로 결심했습니다. 에스라는 율법을 연구하는 중에 하나님은 자기를 찾는 모든 자에게 선을 베푸시고 자기를 배반하는 모든 자에게 권능과 진노를 내리시는 분임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왕이 예루살렘에 가서 하나님께 예물로 드리라고 하사한 은과 금을 많은 데 그리고 그와 함께 돌아오는 많은 유대인들의 일행이 강도떼들에게 표적이 되기 십상입니다. 유대인들이 고국에 돌아와 하나님을 잘 섬기며 거룩한 공동체를 만들어 강해지는 것을 싫어하는 주변 나라의 대적들도 많은 데 귀환하는 중에 무슨 해코지를 당할지 모릅니다. 아닥사스다 왕이 일행을 보호해 줄 보병과 마병을 충분히 파견해 주려고 했으나 에스라는 거절하고 귀환할 동료들과 함께 금식하며 하나님께 간절히 기도했습니다.

 

'하나님! 우리가 돌아가는 길이 몹시 위험합니다. 하나님은 자기를 찾는 자에게 선을 베푸시는 분으로 배워 알고 있습니다. 우리와 동행하시며 우리를 강도와 질병과 온갖 위험으로부터 지켜 주세요.'

 

간절히 기도하는 에스라의 기도를 하나님이 들으시고 응답하시고 승락 하셨습니다. 그래서 보병과 마병을 거절하고 하나님을 의지하고 귀환하였습니다. 예루살렘으로 가는 중간에 대적과 길에 매복하고 공격하는 무리가 있었지만 하나님의 도우시는 손을 경험하고 하나님의 건져주심을 경험하며 모두 아무 희생 없이 안전하게 귀환하였습니다.

 

아는 것보다 어려운 것은 사는 것입니다. 말씀을 잘 아는 것도 어렵지만 말씀대로 사는 것은 그보다 훨씬 더 어렵습니다. 왜냐하면 삶은 매번 믿음을 요구하기 때문입니다. 알아도 믿지 못하면 지킬 수 없습니다. 그러면 신앙은 절대 자라지 않습니다. 삶은 절대로 변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능력도 경험할 수 없습니다. 많은 사람이 아는 만큼 살아내지 못하니까 말씀을 배우는 것을 꺼립니다. '어차피 그렇게 살지도 못할 텐데 배워서 뭘 해. 차라리 조금만 알고 있으면 부담스럽지 않고 나을 거 같아.' 부담은 줄어들지 몰라도 믿음이 성장하지 않습니다. 믿음은 한 번의 고백으로 끝나지 않고 끊임없이 행동을 통해 표현되어야 합니다.

 

3)율법을 가르치기로 결심하였습니다.

 

에스라는 당시 예루살렘 공동체의 위기를 말씀의 부재가 원인인 것을 깨달았습니다. 성전은 큼지막하게 지었지만 그리고 제사도 끊임없이 이어졌지만 하나님의 말씀이 채워지지 않는 공동체는 흔들릴 수밖에 없음을 알았습니다. 그래서 에스라는 백성들에게 율법을 가르침으로 유대 공동체를 하나님의 백성으로 올바로 세우고자 마음을 확고하게 정했습니다. 당시 예루살렘 공동체가 여러 가지 문제로 위기를 맞고 있었는데 근본 핵심은 신학의 부재였습니다. 그것을 해결하기 위해 공동체와 개인의 삶을 하나님의 말씀 위에 확고히 세워야 한다고 믿었습니다. 그래서 에스라는 모든 백성을 모아 놓고 율법을 가르칩니다.

 

에스라가 돌아와 보니 제사장과 레위인들 그리고 지도자들이 이방여인들을 아내로 또는 며느리로 맞이하여 살고 있었습니다. 유대 나라가 멸망하게 된 배경에는 솔로몬 왕으로부터 시작됩니다. 많은 전쟁에 승리하고 넓은 땅을 정복합니다. 피정복지의 반란을 억제할 목적으로 이방의 공주들을 후궁으로 맞이하여 예루살렘으로 데려옵니다. 그녀들은 본국에서 섬기던 자기 종교의 우상과 제사장들을 데려옵니다. 그리고 늙은 솔로몬 왕을 자기들의 우상에게 드리는 제사에 끌어 드립니다. 왕의 잘못된 행위는 백성들에게 그대로 확산되었고 온 나라는 우상숭배하며 하나님을 배신하고 멸망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성전을 재건하고 나라를 재건하겠다고 바벨론의 집도 사업도 좋은 자리도 포기하고 돌아 온 유대인들이 다시 옛 조상들의 죄를 반복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결과는 불을 보듯 뻔합니다. 다시 하나님의 진노를 가져와 멸망하게 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아무도 그것을 죄로 인식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지도자들은 백성들을 책망하지도 않을 뿐 아니라 자신들도 따라 하고 있었습니다.

 

에스라는 자신의 겉옷과 속옷을 찢고 수염과 머리카락을 쥐어뜯으며 회개하였습니다. 모든 백성들을 불러 모아 사태의 심각성을 율법을 가지고 가르쳤습니다. 진정한 회개를 백성들에게 촉구하였습니다. 에스라의 가르침으로 인해 변화가 일어나기 시작했습니다. 백성들이 사태의 심각성을 인식하고 회개하기 시작했습니다. 진정한 삶의 변화가 시작되었습니다. 나라가 큰 전환점을 맞이하게 됩니다. 이를 계기로 예루살렘 공동체는 토라 중심의 공동체로 새롭게 시작하게 됩니다. 이제는 제사 중심에서 말씀 중심으로 신앙의 중심축이 옮겨가게 됩니다. 그런 면에서 에스라는 이스라엘 민족에게 아주 중요한 역할을 한 인물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에스라는 대제사장 가문 출신이지만 바벨론에서 태어나고 자랐기에 그곳에서 출세하는 것을 인생의 목표로 삶을 수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는 신앙의 정체성을 잃지 않고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탁월한 식견을 갖춘 학자가 되었습니다. 아마 어려서부터 늘 말씀을 가까이 하도록 부모로부터 교육을 받았을 것입니다. 그는 당대 최고 권력자인 바사 왕에게 총애를 받는 엘리트였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백성과 함께 고난 받기로 결정하고는 예루살렘으로 돌아와 말씀을 연구하고 준행하며 가르치는 일에 헌신하기로 결심하였습니다. 말씀을 따르는 삶은 세상에서 바라볼 때 고리타분해 보일 수 있지만, 결국 생명으로 향하는 삶입니다. 세상의 명예와 성공을 좇는 삶이 아니라, 에스라처럼 어느 곳에서든 하나님 자녀의 정체성을 가지고 말씀을 따르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세상 풍조를 거슬러 거룩한 영향력을 끼치는 믿음의 사람으로 성장하도록, 자녀와 다음 세대에게 힘써 말씀을 가르치는 우리 성도들이 다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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