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일5장 1-6
세상을 이기는 우리의 믿음
권율 목사 2018. 1. 28.
부곡중앙교회 청년부 청년회 [부산시] https://blog.naver.com/ryulkwon0616
1 예수께서 그리스도이심을 믿는 자마다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니 또한 낳으신 이를 사랑하는 자마다 그에게서 난 자를 사랑하느니라
2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하고 그의 계명들을 지킬 때에 이로써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를 사랑하는 줄을 아느니라
3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은 이것이니 우리가 그의 계명들을 지키는 것이라 그의 계명들은 무거운 것이 아니로다
4 무릇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마다 세상을 이기느니라 세상을 이기는 승리는 이것이니 우리의 믿음이니라
5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믿는 자가 아니면 세상을 이기는 자가 누구냐
6 이는 물과 피로 임하신 이시니 곧 예수 그리스도시라 물로만 아니요 물과 피로 임하셨고 증언하는 이는 성령이시니 성령은 진리니라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 그리스도인의 정체성(identity)이 무엇일까요? 매 주일 교회에 출석하는 것이 우리의 정체성일까요? 아니면 기독교 정통 교리에 적극 동의하고 하나님에 대한 인식이 있으면, 이것을 우리의 정체성으로 간주할 수 있을까요? 제가 볼 때는 이런 것들은 우리의 정체성을 입증하는 본질적 요소가 아닙니다. 다만 우리의 정체성을 겉으로 나타내는 현상일 뿐입니다.
오늘 본문에 따르면, 그리스도인의 정체성은 ‘그가 하나님께로부터 났는가?’에 달려 있습니다. 1절 전반부는 이렇게 말합니다. “예수께서 그리스도이심을 믿는 자마다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니.” 저의 판단으로는 이 구절이야말로 우리의 정체성을 가장 잘 나타내는 말씀입니다. “예수께서 그리스도이심을 믿는 자”가 바로 우리 그리스도인입니다. 동정녀 마리아의 몸을 빌려 이 땅에 오신 예수님을 그리스도(Christ), 즉 구약에서 그토록 예언한 메시야(Messiah)로 ‘믿는’ 사람이 곧 그리스도인이라는 뜻입니다.
‘그리스도인’(Christians)은 우리가 우리 스스로에게 붙인 호칭이 아닙니다. 사도행전 11장 26절에 따르면, 예수님을 모르는 안디옥 사람들이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들을 가리켜 처음으로 불렀던 호칭입니다. 바나바와 바울이 안디옥 교회에서 1년간 큰 무리를 가르쳐 그들을 그리스도의 제자로 길러낼 때, 아마 안디옥의 비신자들이 자기들과는 완전히 다른 사람이라고 제자들을 비아냥거린 듯합니다. 이때부터 그리스도를 따르는 제자들이 ‘그리스도인’으로 불리기 시작했고, 이것이 특별히 유대인들과도 다른 우리의 정체성을 결정짓는 호칭이 되었습니다(ESV Study Bible).
이와 같은 사실에서 우리는 한 가지 귀중한 진리를 발견할 수 있습니다. 처음부터 우리 그리스도인은 세상 사람들과는 완전히 다른 존재로 인식되었다는 것입니다. 비신자들이 보기에 우리는 그야말로 제정신이 아니었습니다. 당시 노예제도를 당연시하던 분위기 속에서 예수님을 믿는 상전들은 자기 노예를 ‘형제’로 부르는 혁명(?)을 시도하고, 부자들은 자기 소유를 팔아 아낌없이 가난한 자들에게 나눠 주며, 심지어 로마 제국의 비신앙적인 압력에도 전혀 굴하지 않고 신앙의 절개를 꿋꿋이 지키는 모습을 보여 줬습니다.
이 모든 일들이 가능했던 까닭은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예수께서 그리스도이심을 믿는” 믿음을 가졌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을 메시야로 믿는 믿음은 그런 놀라운 일을 가능하게 하는 엄청난 능력을 발휘합니다. 오늘 본문은 이 믿음을 가진 사람을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1절)라고 증언합니다. 다르게 말하면, 우리는 “하나님께 속한 자”라는 뜻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의 정체성은 ‘우리가 하나님께로부터 거듭났는가? 또는 우리가 하나님께 속해 있는가?’의 여부로 결정됩니다. 서두에 언급했듯이, 기독교 교리에 동의하고 하나님에 대한 인식을 가지는 것은, 우리가 하나님께 속해 있다는 사실을 증거하는 부차적인 현상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성령으로 거듭났음을, 즉 하나님께 속해 있음을 증거하는 또 다른 현상이 있습니다.
사도 요한은 1절 후반부에서 이렇게 증언합니다. “또한 낳으신 이를 사랑하는 자마다 그에게서 난 자를 사랑하느니라.” 여기에서 “낳으신 이”(τὸν γεννήσαντα)는 하나님을 가리킵니다. 그러므로 이 말씀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마다 하나님으로부터 거듭난 자를 사랑한다”는 뜻입니다. 이것은 사도 요한이 요한일서 전체에 걸쳐 계속 강조하는 진리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그리스도인이 하나님께 속한 이웃 그리스도인을 사랑하는 것이 지극히 당연하다고 그가 역설합니다. 놀랍게도 이것은 십계명을 두 마디로 요약하신 예수님의 가르침(마22:37-40)과 일치합니다.
37예수께서 이르시되,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셨으니,
38이것이 크고 첫째 되는 계명이요.
39둘째도 그와 같으니, 네 이웃을 네 자신 같이 사랑하라 하셨으니,
40이 두 계명이 온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이니라.
이제 본문 2절을 다 같이 읽어 보겠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하고 그의 계명들을 지킬 때에, 이로써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를 사랑하는 줄을 아느니라.” 2절은 1절을 약간 다른 방식으로 또 한 번 반복한 것입니다. 이처럼 사도 요한은 “하나님 사랑 & 형제 사랑”의 원리를 끊임없이 강조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여기에서 한 가지를 추가해서 말합니다. 즉 “그의 계명들을 지킬 때에”라는 말씀을 덧붙입니다. 친절하게도 그는 청중의 궁금점을 즉시 해결해 주기 위해 바로 다음 구절에서 그것에 대해 자세히 언급합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은 이것이니, 우리가 그의 계명들을 지키는 것이라. 그의 계명들은 무거운 것이 아니로다”(3절).
사도 요한에 따르면,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은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는 것으로 증명됩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은 이것이니, 우리가 그의 계명들을 지키는 것이라!” 뒤집어 말하면,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지 않는 사람은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이렇게 말하면, 다음과 같은 이상한(?) 궁금증을 가지는 분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계명을 제대로 지키는 사람이 아무도 없는데, 그렇다면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이 아무도 없다는 말인가?’
하지만 요한은 그렇게 말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의 계명을 지켜야 하는데, 완벽하게 제대로 지켜야 한다고 결코 말하지 않았습니다. 이렇게 오해하는 사람은 이런 말씀을 단지 논리적으로만 대하는 사람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계명을 주실 때는 하나님이 우리를 아시고 우리가 그분을 안다는 사실을 전제합니다. 다시 말해, 하나님과 우리 사이는 관계적 앎이 형성되어 있다는 뜻입니다.
조금 더 쉽게 말하자면, 하나님이 우리에게 계명을 주시는 것은 마치 내 부모나 사랑하는 연인이 나에게 어떤 부탁을 하는 것과 비슷합니다. 이런 상황에서 부탁을 받게 되면, 그 즉시 나는 내게 부탁하는 그 사람의 의도를 파악하려고 합니다. 왜냐하면 내가 내 부모를 잘 알기 때문입니다. 내 연인을 잘 알기 때문입니다. 만일 그 부탁을 완벽히 지켜야지 내가 자식이나 연인으로 인정받을 수 있다고 생각한다면, 이것은 참으로 우스꽝스러운 현상입니다. 이미 내가 부모의 자식 된 관계, 또는 그 사람의 연인이 된 깊은 관계를 형성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내가 잘 알고 사랑하는 사람의 부탁이나 명령은 결코 나에게 버거운 일이 아닙니다. 오히려 그것을 기꺼이 들어주려는 기쁜 마음이 생겨나는 것이 정상입니다.
바로 이런 원리를 염두에 두고서 사도 요한이 3절 후반부를 덧붙이는 것입니다. “그의 계명들은 무거운 것이 아니로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 없이 그분의 계명을 완벽한 상태의 수준으로 지키려고 하는 사람에게는 그것이 아주 무거운 것이 되고 맙니다. 당시 예수님을 거부하는 유대인들이 그런 오류를 범했습니다. 그들은 모든 계명을 완벽히 지키려고 노력함으로써, 하나님 앞에서 이런 노력을 자신의 의로 인정받고자 하였습니다.
그런데 그들의 내면을 분석해 보면, 하나님과 자신 사이에 관계적 앎이 형성되어 있지 않기 때문에 그들이 그런 헛된 노력을 한 것입니다. 다시 말해,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 그들이 몰랐고 그분을 사랑하는 마음이 없기 때문에, 그분의 계명을 지키는 것이 아주 무거웠던 것입니다.
이런 원리는 우리가 하나님을 제대로 사랑하는지를 알아보는 시금석(試金石)이기도 합니다.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는 것이 무겁게 느껴지는 때는 내가 하나님을 온전히 사랑하지 않고 있다는 증거입니다. 사랑하는 연인과 부부들은 이게 무슨 말인지 직감적으로 알고 있습니다. 서로를 열렬히 사랑할 때는 서로에게 부탁하는 것(본문의 언어로는 ‘계명’)을 전혀 무겁다고 느끼지 않습니다. 그런데 서로 사랑하지 않을 때는 서로에게 부탁하기가 무섭게 다투고, 그 부탁을 매우 무거운 것으로 느낍니다.
사도 요한은 하나님의 계명들이 무거운 것이 아니라는 이유를, 또 다른 방식으로 4절에 제시하고 있습니다. 헬라어 원문에는 우리말 성경에 종종 누락되는 ‘왜냐하면’(Ὅτι)이라는 전치사가 4절 처음에 들어 있습니다. 다시 말해, 하나님의 계명들이 무거운 것이 아닌 이유가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마다 세상을 이기기 때문”입니다. 또 세상을 이기는 승리가 우리의 믿음이기 때문입니다. 정리하자면, 그분의 계명들이 무겁지 않은 이유는 하나님께로부터 난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세상을 이기는 믿음을 소유했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이 사실을 참으로 믿으십니까?
‘믿음’(πίστις)에는 두 가지 차원이 있습니다. 먼저 “구원하는 믿음”(saving faith)이 있습니다. 이것은 우리의 의지와는 전혀 무관하며, 우리가 중생(거듭남)을 경험할 때 성령께서 우리 안에 일으키시는 ‘믿음’입니다. 흔히 “예수 믿고 구원 받는다”고 말할 때의 그 믿음입니다. 그러므로 이 “구원하는 믿음”은 모든 성도들 가운데 질적으로나 양적으로나 아무런 차이가 없습니다. 우리의 의지와는 전혀 무관하게 전적으로 하나님의 선한 의지가 작용한 결과입니다.
그런데 또 다른 차원의 믿음이 있습니다. 그것은 “신뢰하는 믿음”(faith to believe)이라고 표현할 수 있습니다. 이 믿음은 이미 “구원하는 믿음”을 소유한 성도가 하나님의 은혜에 반응하는 정도를 나타냅니다. 소위 “그 사람 정말 믿음 좋다!”고 할 때의 그 믿음입니다. 이 믿음의 또 다른 표현은 “하나님을 향한 의존성”입니다.
흥미롭게도 본문 4절은 두 가지 차원의 이 믿음을 모두 증거합니다. 우리의 믿음은 세상을 이기는 믿음인데, 사도 요한이 4절 전반부에서는 ‘이긴다’(νικᾷ)라는 현재형으로 표현하고, 후반부에서는 ‘이겼다’(νικήσασα)라는 아오리스트(aorist)로 표현합니다. 세상을 이미 이긴 믿음을 소유한 우리는 믿음으로 세상을 계속 이겨나간다는 뜻입니다. 다시 말해, 세상을 이미 이긴 “구원하는 믿음”을 소유한 성도는 끊임없이 하나님을 “신뢰하면서” 세상을 기필코 이긴다는 의미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을 향한 우리의 믿음은 어떠합니까? 우리는 과연 하나님을 내 삶의 유일한 위로와 소망을 안겨주시는 분으로 믿고 있습니까? 혹시 하나님이 더 이상 나에게 아무것도 해줄 수 없다고 생각한다면, (절대 그럴 일은 없겠지만,) 이것이 나에게 엄청난 상실감으로 다가온다고 느껴지나요? 만일 하나님께서 내 손을 놓아버리신다면, 과연 나는 죽을 것 같은 두려움에 사로잡히기는 하나요? 내가 세상을 살 수 있는 이유가 바로 하나님이라고 진정으로 고백하나요? 내가 가장 힘들고 아프고 어려운 그 순간에 하나님만이 나의 위로자가 되신다고 확신하나요?
어제 저는 도움돌·청년회 임원과 리더들을 데리고 송도에 엠티를 다녀왔습니다. 저녁을 맛나게 먹고, 서로 돌아가며 진지하게 나눔을 하는데, 갑자기 아내한테서 전화가 왔습니다. 전화를 받으니 아내 목소리가 아니고 셋째 아들 녀석의 우는 목소리였습니다. 요즘 기온이 떨어져서 그런지 이 녀석이 감기에 걸려 조금 고생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몸이 힘들고 아프니까 아빠를 찾는 기특함을 보입니다. 첫째와 둘째는 ‘엄마 껌딱지’인데, 그나마 셋째는 아빠를 자주 찾는 아주 특이한 녀석입니다.
막내의 우는 음성을 들으며 저는 “신뢰하는 믿음”의 비밀을 깨달았습니다. 내가 가장 힘들고 아플 때 찾는 그 대상이야말로 나에게는 실제로 살아 있고 가장 신뢰하는 대상이라는 것입니다! 힘들 때 하나님을 찾지 않는 것은 결코 신앙생활이 힘들어서가 아닙니다! 주님을 믿는 것이 버거워서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오히려 반대입니다. 하나님을 제대로 신뢰하지 않기 때문에 힘든 가운데 그분을 찾지 않는 것입니다! 우리 주님이 나의 유일한 위로자라고 확신한다면, 내가 가장 힘들고 아플 때 가장 먼저 떠올리고 신뢰해야 합니다! 마치 아이가 힘들 때 아빠를 찾으며 우는 것처럼 말입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을 신뢰하는 그 믿음이 바로 “세상을 이기는 우리의 믿음”입니다. 세상을 이미 이긴 믿음(구원하는 믿음)을 소유한 성도는, 하나님을 향하여 극도의 신실함과 의존성을 나타냅니다. 즉 하나님을 계속해서 신뢰하는 믿음을 가진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이 없이는 한순간도 살아야 할 이유를 찾지 못하는 사람에게 그러한 믿음이 있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의 믿음은 놀라운 능력을 나타냅니다. 인생의 혹독한 무게가 아무리 나를 짓눌러도, 넉넉히 그것을 이겨내는 믿음이 바로 우리의 믿음인 것입니다!
따라서 이 정도 수준의 믿음을 소유한 성도에게는 하나님의 계명이 결코 무거운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그분의 계명을 어떻게 하면 온전히 지킬 수 있을까?’하는 고민으로 즐거워하며 살아갑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나를 자녀로 삼아주셨다는 사실을 기뻐하며, 그분의 은혜에 적극적으로 반응하려고 하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우리의 믿음에 어떤 진리가 담겨 있기에 그토록 놀라운 능력을 발휘하는 걸까요? 5절 말씀대로, 세상을 이기는 우리의 믿음은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믿는” 믿음입니다. 요한은 이 믿음의 내용에 관해 명확히 증언하고 있습니다. 다 같이 6절을 읽어 보겠습니다. “이는 물과 피로 임하신 이시니, 곧 예수 그리스도시라. 물로만 아니요 물과 피로 임하셨고, 증언하는 이는 성령이시니, 성령은 진리니라.”
본문 6절은 우리가 가진 믿음의 내용을 “물과 피로 임하신 이시니, 곧 예수 그리스도”(Οὗτός ἐστιν ὁ ἐλθὼν διʼ ὕδατος καὶ αἵματος, Ἰησοῦς χριστός)라고 증거합니다. 여기에서 “물과 피로 임하셨다”는 말씀이 무슨 뜻일까요? 우선, “물”(ὕδωρ)은 예수께서 받으신 세례를 뜻합니다(Daniel L. Akin, NAC; Simon J. Kistemaker, BNTC). 세례(洗禮)는 그 단어가 의미하는 대로, 무엇보다 우리의 죄 씻음이 이루어졌음을 나타내는 표징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받으신 세례는 우리와 정반대의 의미를 지니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죄가 없으신 분이기 때문에, 세례자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실 때 오히려 우리의 죄를 뒤집어쓰셨습니다(M. G. Easton, Easton’s Bible Dictionary). 아니면 이미 우리 죄를 뒤집어쓰셨음을 상징적으로 세례를 통해 나타내신 것입니다. 여하튼 이것은 구약의 제사장들이 짐승의 머리에 손을 얹고 죄를 전가시키는 행위와 동일한 이치입니다. 그분은 세례를 받으신 후 죄인과 동일시되셨고(Peter Ainslie, Among the Gospels and the Acts), 우리의 죄를 짊어지시고 십자가의 때를 학수고대하셨습니다. 그러므로 “물로 임하셨다”는 말씀은, 세례를 통해 우리의 죄를 뒤집어쓰시기 위해 이 땅에 오셨다는 의미입니다.
그리고 “피”(αἷμα)는 이미 짐작하신 대로,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죽으신 것을 뜻합니다(Daniel L. Akin, NAC; Simon J. Kistemaker, BNTC). 예수께서 세례를 통해 우리의 죄를 뒤집어쓰신 채로 가만히 계실 수 없었습니다. 피 흘림이 없으면 죄 사함이 없다(히9:22)는 말씀대로, 피를 흘리셔야 당신이 이 땅에 오신 목적을 성취하시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바로 6절에서 요한이 “물로만 아니요 물과 피로 임하셨고”라는 말씀의 의미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죽으심을 ‘휴머니즘’의 차원에서 생각하지 말아야 합니다. 안 죽으셔도 되는데 괜히 나 때문에 불쌍하게 죽으셨다고 생각하는 것은 십자가를 오해하는 것입니다. 오히려 하나님이 주도하셔서 예수님을 이 땅에 보내셨는데, 그분은 세례를 통해 우리의 죄를 뒤집어쓰시고 십자가의 죽으심을 기꺼이 자초하셨습니다. 안 죽으셔도 되는 게 아니라 우리 죄를 처리하시기 위해 반드시 죽으셔야만 했던 것입니다.
이런 사실들이 바로 우리의 믿음에 들어 있는 내용입니다. 이런 진리들을 굳게 붙잡아 절대적으로 확신하는 것이 바로 “세상을 이기는 우리의 믿음”입니다. 하지만 이것은 우리의 힘으로는 불가능합니다. 더욱이 이런 믿음의 내용을 증언하는 자는 우리 자신이 아닙니다. 우리의 나약한 모습을 볼 때는, 이러한 진리를 알고 있다고 해서 이것이 세상을 이기는 힘이라고 결코 인식할 수 없습니다. 우리 믿음의 내용, 즉 “물과 피로” 이 땅에 오신 예수 그리스도를 증언하시는 분은 바로 진리의 성령(6절)이라는 사실을 꼭 기억해야 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의 믿음은 세상을 이기는 놀라운 믿음입니다! 예수님이 이 땅에 오셔서 우리의 죄를 뒤집어쓰시고 십자가에 죽으셨다는 사실을 믿는 우리의 믿음이 바로 그러한 능력입니다! 이 사실을 믿으십니까? 다른 어떤 것보다도 바로 이 사실을 믿는 것이 우리의 정체성, 즉 우리가 그리스도인임을 결정짓는 요소임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구원하는 믿음”을 소유한 성도 여러분! 1절 말씀대로, 예수께서 그리스도이심을 믿으십니까? 또 5절 말씀대로,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믿습니까? 이 고백들은 이미 베드로가 빌립보 가이사랴에서 예수님께 고백한 내용입니다(마16:16). 그리고 사도 바울이 로마서 1장 2-4절에서 요약한 복음의 내용이기도 합니다. 따라서 그러한 우리의 믿음은 세상을 넉넉히 이기는 위대한 신앙고백이자 복음의 능력입니다.
이제 우리가 해야 할 일은, 하나님을 계속해서 “신뢰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없이는 단 한순간도 살 수 없다는 마음을 품어야 합니다. 하나님만이 나에게 유일한 위로와 소망을 주시는 분임을 굳게 확신해야 합니다. 또 하나님이 내 손을 놓아버리시면 죽을 것 같다는 두려움을 느낄 수 있어야 합니다. 우리의 믿음을 붙드시는 진리의 성령을 굳게 붙드시기 바랍니다. 우리의 믿음이 세상을 이기는 놀라운 능력인데, 이것을 내 것으로 만드시는 성령의 능력을 힘써 경험하시기 바랍니다. 우리 교회의 모든 성도들은 이미 세상을 이겼고, 앞으로도 계속 세상을 이길 것입니다! 이것을 믿음으로 받아들이는 복된 성도가 되시기 바랍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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