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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약 --------------------/요한일서

요일 5장 14-17절(하나님의 아들을 믿는다면) - 이건기

by Preacher 2023. 5. 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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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일5장 14-17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다면

이건기 목사 2018-04-15

다운교회 http://www.downchurch.org/

 

지난주는 ① 사람들의 증언과, 하나님의 증거를 말하며, 사람들의 증언도 받는데, 하나님의 증거는 더욱 크다. ② 하나님의 증거는, 아들에 대한 증거며, 하나님의 아들을 믿지 않는 자는, 하나님을 거짓말하는 자로 만든다. ③ 하나님의 아들이 있는 자에게는 생명이 있지만, 없는 자는, 생명이 없다고 했다. 내가 하나님의 아들의 이름을 믿는 너희에게, 이것을 쓴 것은, 너희에게 영생이 있음을, 알게 하려고 썼다. 하나님의 아들을 믿으면, 하나님의 아들이 되고, 구원받은 증거와 영생이, 그 안에 있다고 성경이 말한다. 하나님의 아들을 성도는, 하나님의 자녀임을 믿기 바란다.

 

오늘 말씀은,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다면, 성도들은 담대히 구할 수 있고, 응답받을 수 있다. 응답받는 기도는, 하나님의 뜻대로 구하는 기도라고 말씀한다. 또 기도에 관해서, 한 가지 당부를 하는데, 사망에 이르지 않는 죄를 범하는 형제들을 위해, 기도하라는 말씀이다.

 

1. 하나님을 향해 담대해진다(14).

 

“그를 향하여, 우리가 가진 바, 담대함이 이것이니, 그의 뜻대로 무엇을 구하면, 들으심이라.”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성도들은, 하나님을 향하여, 담대하게 기도할 수 있다고, 용기와 확신을 주는 말씀이다. 기도는 하나님이 자녀들에게 준 특권이다. 기도는 자녀가, 아버지에게 말해서, 얻을 수 있는 통로다. 그래서 내가 예수님을 믿어,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고, 영생에 대한 확신과, 구원의 확신이 갖고 있다면, 담대하게 기도하게 된다.

 

‘담대함’(파르흐레시아)은, ‘파스’(모든) + ‘흐레오’(말하다, 이야기 하다.) = 모든 것을 두려움이 없이, 숨김없이, 솔직히 말한다는 뜻이다. 성도들이 하나님 앞에 나아가, 담대하게 말할 수 있는 자유가 있다. 그래서 자신의 어려움을, 소원을, 기도로 솔직하게 말하게 된다. 이처럼 담대한 태도를 가지고, 성도는 구할 수 있다. 어떤 사람이 하나님 앞에서, 모두 다 솔직하게 말할 수 있는가? 하나님의 자녀로, 구원에 대한 확신, 영생의 확신, 부르심에 대한 확신이 있는 사람이, 주님을 향해 자유롭고, 솔직하고, 확신을 가지고 말하게 되는데, 이것이 바로 담대함이다.

 

교회에 나온 분들 가운데, 예수님을 믿어 하나님의 자녀가 된 사람과, 그냥 교회에 다니면, 착하니까, 가정의 평화를 위해, 교회에 나와 주는 사람과는, 전혀 다르다. 예수님을 믿는 사람은 하나님의 자녀고, 믿지 않는 사람은, 하나님의 자녀가 아니기에, 하나님이 아버지가 아니라, 맘 좋은 옆집 아저씨와 같다. 맘 좋은 아저씨에게, 내가 정말 돈이 필요하니, 1만원, 10만원… 어느 정도를 줄 수 있다. 그렇지만 내가 당신의 모든 것을, 다 상속받을 수 있는, 상속자가 되도록 만들어 달라고 하면, 그럴 수는 없다고 할 것이다. 양자가 되던지, 아니면, 상속권을 포기하라고 할 것이다.

 

영생을 얻은 그리스도인은,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기에, 하나님과 대화하는 기도는, 그야말로 거리낌이 없고, 편안한 대화다. 숨김없이 자유롭게, 편안하게 말하는 태도가 담대함이다. 하나님에게 솔직하고, 자유롭고, 확신에 찬 말이, 바로 기도다.

 

그러므로 기도는, 내가 하나님 앞에, 말할 수 있는 자유를 얻었다는, 기쁨이요 확신이다. 이런 확신은 하나님 앞에서 평안하게 만든다. 그렇지 않고, 사람들을 의식하면, 기도가 화려해지고, 가식적이 되어, 기도가 어려워진다! 하나님 앞에 말하는 자유를, 사람 앞에 하는 말로, 바꾼 것이다. 원래 인간은 죄를 범하여, 에덴동산에서 쫓겨난 뒤에, 하나님 앞에 담대하게 나아갈 수 없는, 존재가 되었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대속의 은혜로, 그리스도를 마음속에 모신 자는, 예수님의 중보로,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는 길이 열렸다.

 

(엡3:12) “우리가 그(예수님) 안에서, 그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담대함과 확신을 가지고, 하나님께 나아감을 얻느니라.”

 

하나님의 아들을 믿음으로, 영생을 얻은 성도들은, 하나님께 담대히 나아가 간구할 수 있게 된다. 죄와 진노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해결했음을 믿을 때, 담대하게 출발하게 된다.

 

2. 하나님의 뜻대로 구하게 된다(14中-15).

 

“…그의 뜻대로 무엇을 구하면 들으심이라, 우리가 무엇이든지 구하는 바를 들으시는 줄을 안즉, 우리가 그에게 구한 그것을 얻은 줄을 또한 아느니라.”

 

하나님이 응답하는 기도에는 조건이 있다. 하나님께 담대하게 나아가, 기도할 때, 성도가 가져야 할 중요한 기도의 자세가 있다. 무조건 구하면, 하나님이 모두 다 들어주지 않는다. 그것은 바로, 하나님의 뜻대로 기도하는 것이다. ‘뜻대로’(델레마)는 ‘하나님의 기대와 뜻’을 가리킨다. 하나님의 세상 통치의 원리와, 하나님의 속성과 계시에, 맞는 뜻이다. 따라서 하나님이 기뻐하고, 즐겨듣는 기도를, 예수님에게 배워야 한다. 예수님은 겟세마네 동산에서, (막14:36中)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시옵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라고 기도 드렸다. 예수님이 구한 것은 ‘아버지의 원함’을 구했다. 따라서 기도는 하나님의 뜻을 발견하고, 알아가는 것이다. 자신의 뜻을 관철시키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뜻을, 하나님의 뜻에 일치시키는 것이다. 자기 고집과 주장이, 관철되어야만 좋은 기도가 아니다. 내 이성의 한계를 뛰어넘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는 하나님을 믿고, 그분으로부터 오는 응답을, 인정해야 한다.

 

왜냐하면 주님은 우리보다, 우리를 더 잘 알기에, 가장 좋은 응답을 주기 때문이다. 따라서 하나님의 뜻을 찾아, 하나님의 뜻에 맞게 기도하는 자세가, 성숙한 믿음의 자세다. 따라서 성도는, 자신의 원함과 소원에 집착하지 말고,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는 기도를, 드려야 할 것이다. 우리가 담대히 기도할 때, 가장 중요한 것은 ‘그의 뜻대로, 무엇을 구하느냐’이다. 이 부분에서 많은 그리스도인이, 기도를 혼란스러워한다. 담대함과 그의 뜻대로는, 서로 상충되지 않는다. 무엇이든지 다 구하면, 하나님이 무조건 들어주는가?

 

그래서 기도하면서, 전혀 다른 신앙을 가진 사람이, 되는 경우가 얼마나 많은가? 기도를 옛날, 치성을 드리던 것과 혼동해서, 정성으로 양으로 승부하려는 시도가, 얼마나 많은가? 천 번제, 우리의 담대함이, 어디서 나오는가? 예수님인데, 아버지가 기뻐하지 않는 것을 구하면서, 담대할 수 있는가? 이 기도를 하면, 하나님 아버지가 싫어할 것을 알면서도, 악착같이 떼를 쓰면, 올바른 성도가 아니다. 기도가 하늘 보좌를 흔들어 움직이고, 하나님의 뜻을 바꾸어, 내 마음대로 하는 능력이라면, 하나님을 믿는 것이 아니다. 그러니까 성도가 기도할 때, 그의 뜻대로 구할 때, 담대한 마음이 생길 수 있다.

 

그리스도인들에게 기도는, 하나님의 뜻을 구하는 시간이다. 하나님의 뜻을 배우고 발견하며, 그 뜻에 순종해가는 과정이 기도다. 내 생각, 내 소원이 아니라, 하나님 아버지의 소원을 생각하고, 그 하나님의 소원이, 나의 소원이 되어가도록, 변화되어 가는 과정이 기도다. 그래서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기도는 바뀌어가기 마련이다. 인간의 뜻을, 하늘에서 이루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을, 이 세상에서 이루게 하는 도구다. 기도는 내 의지를, 그분의 의지에 복종시키는 것이고, 자기 소원을 하나님께 맡기는 것이다. 만일 내 소원이 다 이뤄지면, 세상은 난장판이 된다.

 

하나님의 뜻이 아니라, 인간의 뜻이 응답될 때, 그 부작용은 정말 크다. 지구가 돌다가 갑자기 멈추어 선다면, 세상은 해일에 무너지게 될 것이다. 전부 세상에서 대통령, 판검사가 되고, 의사가 되어, 다른 직업이 없어져 버리면, 기가 막히는 세상이 되고 만다. 성경이 말씀하는 기도는, 그런 것이 아니다. 기도는 하면 할수록, 내가 하나님의 뜻에, 더욱 순종해 가는 삶으로, 변해 가는 것이다. 악한 것을 주지 않는, 아버지에 대한 믿음의 성숙으로, 담대해져 간다. 항상 그의 자녀에게, 가장 옳고 좋은 것을 주는 아버지임을, 확인해 가는 것이다.

 

그래서 내 인생에, 원하지 않는 것이 들어와도, 거기에 하나님의 선하신 뜻이 있고, 내가 미처 모르는 하나님의 선이, 작용하고 있음을 믿는 것이다. 그래야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지나면서도, 감사할 수 있는 것이 아닌가? 그의 뜻대로는, 하나님이 가장 좋은 것을, 준다는 것에 대한, 기대가 있다는 말이다. 이런 기대가 있는 것이 기도요, 신앙생활임을 말씀하고 있다. 우리가 기도를, 의식주 문제와, 더 나은 삶을 위해, 골치 아픈 문제들의 해결을 위해, 사업과 가정을 위해, 복을 비는 수단으로만 이해한다면, 기도의 특권을 좁게 이해하는 것이다. 하나님은 자녀의 기도를 듣고, 그 기도에 응답함을 잊지 말자.

 

3. 그렇다면 무엇을 기도해야 하나?(16-17).

 

“누구든지 형제가, 사망에 이르지 아니하는 죄, 범하는 것을 보거든 구하라, 그리하면 사망에 이르지 아니하는, 범죄자들을 위하여, 그에게 생명을 주시리라, 사망에 이르는 죄가 있으니, 이에 관하여, 나는 구하라 하지 않노라, 모든 불의가 죄로되, 사망에 이르지 아니하는 죄도 있도다.”

 

형제가 사망에 이르지 않는 죄를 범하면, 구하라고 했다. 여기서 사망에 이르지 않는, 죄를 말했다. (롬6:23上) ‘죄의 삯은 사망이요…’라 했는데, 사망에 이르지 아니하는 죄가 있다면, 말씀에서 벗어나는 것처럼 보인다. 모든 죄가 인간을, 사망하게 만들지만, 사망에 이르지 않는 죄가 있다. 예수님은 이 땅에 죄인들을 용서하고, 구원하기 위해 왔다. 하나님은 죄인들에게, 긍휼과 사랑을 베풀어 주는 분이지만, 용서받을 수 없는 죄도, 무조건 용서해 주지 않는다. 사랑의 하나님이지만, 동시에 공의의 하나님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예수님의 대속의 보혈을 믿고 받아들이면, 씻음 받고, 용서받을 수 있다. 바로 이러한 것이, 사망에 이르지 않는 죄이다. 예수님은 죄와 사망의 법에서, 우리를 구원하려고 왔다. 따라서 예수님의 십자가의 보혈로, 사하지 못할 죄는 없다. 주님 앞에 나오는 자는, 다 죄를 용서받았다 예수님도 십자가에 달린 강도에게, 낙원을 약속했다. (눅23:42-43) “이르되 예수여, 당신의 나라에 임하실 때에, 나를 기억하소서 하니,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 하시니라.”고 했다.

 

(사1:18)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되, 오라 우리가 서로 변론하자, 너희의 죄가 주홍 같을지라도, 눈과 같이 희어질 것이요, 진홍 같이 붉을지라도, 양털 같이 희게 되리라.”

(요일1:9) “만일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 그는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 죄를 사하시며, 우리를 모든 불의에서, 깨끗하게 하실 것이요.”

 

그렇다면 사망에 이르는 죄는 무엇인가?

 

(마12:31-32) “…사람에 대한 모든 죄와 모독은, 사하심을 얻되, 성령을 모독하는 것은, 사하심을 얻지 못하겠고, 또 누구든지 말로, 인자를 거역하면, 사하심을 얻되, 누구든지 말로, 성령을 거역하면, 이 세상과 오는 세상에서도, 사하심을 얻지 못하리라.”

 

여기서 사함을 얻지 못하는 죄를 ‘성령을 모독하는 죄, 성령을 거역하는 죄’라고 했다. 성령의 가장 중요한 사역은, 사람을 불러, 예수님을 알고 믿게 하여, 중생하게 하는 사역이다. 구원 받을 수 있도록, 변화시키는 일이다. 그런데 성령의 구원사역을 거부하고, 예수님을 영접할 기회를 스스로 막고, 영생을 거부한다면 거역 죄다. 사망에 이르는 죄는, 주님을 부인하고, 영접하지 않는 것이다. 어거스틴은 ‘끝까지 뉘우치지 않는 죄’라고 했다. 하나님이 구원 계획을, 받지 않고, 무시하는 죄다.

 

‘성령을 거역하는 죄는, 목사를 거부하거나, 선한 양심을 거스르는 행동이나, 교회를 핍박하는 것이 아니다. 성령님을 통해, 그리스도에 대한, 구원의 지식을 이미 소유하고 있는데도, 받아들이지 않거나, 그리스도와 그분의 나라에 대해, 변절함을 말한다. 그 죄는 결국, 하나님의 은혜를, 의식적으로 거부함을 말한다. 따라서 성령을 거역하는 죄, 즉 끝까지 예수님을 거부하는데도, 구원해 달라는 것만 빼놓고는, 어떤 죄라도 기도하라는 것이다. 우리가 형제를 위해 기도하면, 결코 거절당하지 않을 것이며, 그런 기도는 우리에게, 담대함을 준다는 말이다.

 

영생의 문제가 해결되면, 우리는 기도가 필요하다. 그런데 그 기도는, 구원 받기 이전에 구하던 것을, 대상만 하나님으로 바꾸고, 이전에 하던 그 정성과 열심대로, 구하는 것이 아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 자유롭고, 담대한 기도를 할 수 있는 것은, 하나님의 자녀가 되어, 그의 뜻대로 기도하는 것이다. 그런데 그 기도내용을, 고의로 복음을 거부하고, 끝까지 성령을 거부하는 사람이 아니라면, 누구든지 형제를 위해 기도하라는 것이다. 이것만 아니라면, 그 어떤 죄이든지 형제를 위해, 기도할 때 하나님이 듣는다. 따라서 이 말씀은, 기도의 제한이 아니라, 자유다.

 

그러므로 만일 형제들 중에, 누가 죄를 짓는 것을 보거든, 그를 위하여 구하라. 그리하면 하나님은, 그 범죄자의 마음에, 신령한 역사를 일으켜서, 그로 하여금, 진심으로 회개하게 하고, 그를 생명으로 인도할 것이다. 따라서 기도의 중심에는, 형제 사랑이, 꿈틀거리고 있다. 그의 뜻대로 구하는 기도는, 범죄 한 형제들을 위해서, 기도하라는 말이다. 그를 판단하고, 정죄하고, 공동체에서 분리시키는 것이 아니라, 그를 위하여 기도하는 것이, 하나님 앞에서, 그의 뜻대로 구하는 기도다. 물론 이것은 ‘기도의 예’다. 이것이 기도의 전부는 아니다.

 

하나님 뜻대로 구하는 기도는, 이처럼 하나님을 기쁘게 하는 기도를 하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웃 사랑이라는 요한일서의 주제, 서로 사랑하라는 주님의 말씀이, 기도에서 이루어질 때, 그 기도가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기도요, 담대한 기도라는 것을 깨닫게 된다. 하나님 앞에서, 우리가 가진 담대함은 무엇인가? 하나님의 뜻대로 무엇을 구하는 것이다. 이웃사랑을 실천하는 길이, 형제를 위한 기도다. 형제의 죄를 위한 기도가, 하나님의 심판 때에, 담대함의 근거가 된다. 하나님 앞에서 담대한가? 그런 신앙생활을 하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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