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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약 --------------------/요엘

욜 2장 28-32절(만민에게 부어진 영) - 최태선

by Preacher 2024. 1. 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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욜2장 28-32

만민에게 부어진 영

최태선 목사 2015.3.29.

어지니교회 http://cafe.daum.net/eojini/

 

며칠전 만난 배용하 대표님이 책을 두 권 주셨습니다. 그 중 한 권이 새로 개정된 박철수 목사님의 <하나님 나라>입니다. 이동원 목사님이 쓰신 그 책의 추천의 글에 이런 내용이 있습니다. 하나님 나라는 성경의 일관된 주제입니다. 그 나라는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셨을 때 이미 시작된 나라입니다. 그러나 그 나라는 예수님 다시 오실 때 비로소 완성될 나라입니다. 그러나 그 나라는 영원한 나라 곧 흔히 말하는 천국의 소망을 배제하지 않지만 '지금 여기' 우리의 역사와 현실에서 먼저 이루어져 가야 하는 나라입니다. 그러나 저를 포함해서 한국의 많은 설교자에게 '지금 여기'에서 이루어져야 할 그 나라를 말하기는 쉽지 않았습니다. 그것은 기득권층에 대한 치열한 반성과 회개를 주문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박철수 목사님은 이 어려운 과제를 성경적으로 그리고 실천적으로 정리하여 전달하셨습니다.

 

하나님 나라를 정리된 신학적 안목으로 이해하고자 하는 모든 설교자 그리고 피상적이 아닌 진지한 성찰로 삶을 살고자 하는 모든 성도가 이 책을 읽고 토론하고 진지한 적용을 고민하기 시작한다면 우리의 신앙의 마당에는 적지 않은 변화가 있을 것입니다. 그래서 이 책은 변화를 원치 않는 사람들에게는 위험한 책입니다. 맞는 말씀이지만 아직도 하나님 나라에 대한 이해가 부족하기 때문에 이 정도밖에 표현하지 못하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하나님 나라는 이분이 말씀하시는 것보다 훨씬 더 혁명적이기 때문입니다. 그냥 한 마디 위험하다는 말로 그것을 다 표현해낼 수 없을 뿐만 아니라 그 결과로 우리가 가지게 되는 복음의 기쁨과 풍성한 하나님의 샬롬 역시 언급하고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저자인 박철수 목사님은 책 프롤로그에서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그런데도 한국교회는 하나님나라를 잘 모른다. 하나님나라는 창조의 목적이다. 하나님나라는 교회 존재의 최고 목표이다. 한국교회는 성경의 최고 주제인 하나님나라에 대하여 무관심하다 보니 성경과 점점 더 멀어져 가고 있다. 하나님 나라에 대한 언급이 없고 단지 이 세상에서 복을 받고 살다가 죽으면 천당 가는 것이다. 한국교회는 엉뚱하게도 기복주의와 성장주의, 성공주의에 몰입하고 있다. 교회는 하나님나라의 모델이요, 전시장이요, 전진기지이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평신도는 말할 것도 없고 목사들도 하나님나라에 무지하다. 성경공부나 설교에도 하나님나라를 잠깐 말하기는 하지만 하나님나라에 대한 종합적 이해가 부족하기 짝이 없다. 어찌 하나님나라에 대해서 모르고 설교를 할 수 있으며 정상적인 신앙을 할 수 있단 말인가. 하나님나라는 몰라도 되는 문제가 아니다. 하나님 나라는 유행의 주제가 아니다!

 

한국교회는 하나님나라를 찾아야 한다. 우선, '하나님나라'의 낱말부터 찾아야 한다. 하나님나라를 가르치고 하나님나라를 살아야 한다. 기독교란 무엇인가 한 마디로 하나님나라다. 하나님나라를 알지 못하고 기독교를 알 수 없다. 기독교의 실체는 하나님나라다. 그러나 한국교회의 최대의 문제는 하나님나라를 살지 않는 것이다. 만일 여러분들이 이 책을 읽는다면 그리 낯설지 않을 것입니다. 제가 늘 하고 있는 말들과 그리 다르지 않기 때문입니다. 만일 제가 하나님나라에 대한 책을 쓴다면 어쩌면 박철수목사님보다 더 급진적일 수도 있다는 생각을 해봅니다. 어쨌든 성경의 핵심과 주제는 하나나님나라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신약에서 뿐 아니라 구약에서도 일관된 주제입니다. 오늘 우리가 살펴볼 요엘서에도 그것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요엘

 

요엘서에는 저자의 활동시기를 알려주는 구체적인 연대 표시가 없습니다. 따라서 요엘의 활동시기를 정확히 알 수는 없습니다. 다만 요엘서의 내용에서 언급하고 있는 것들을 통해 요엘서가 587년 유다의 멸망을 전제로 하고 있다는 점(욜 3:1-3), 주전 515년에 재건된 예루살렘 성전(1:14. 2:17, 3:18)과 주전 445년에 느혜미야에 의해 건축된 성벽(2:7, 9)을 언급하고 있는 것으로 보아 요엘은 그 이후 시대인 주전 400년 경 혹은 주전 4세기 경에 활동한 것으로 추정할 수 있습니다.

 

배경

 

요엘서는 크게 탄원(1:1-2:17)과 구원 약속(2:18-3:21) 두 부분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요엘은 먼저 당시 발생한 참혹한 메뚜기 재앙과 가뭄을 출발점으로 삼았습니다. 요엘은 그러한 현재의 곤경을 단순한 자연재해로 보지 않고 하나님의 심판의 전조로 파악합니다.(1:15) 오엘은 이스라엘 백성에게 하나님께서 새롭게 은혜를 베푸실 수 있도록 하나님께 탄원하고 진정으로 회개할 것을 권면합니다.(2:12-13) 요엘서의 첫 번째 단락인 탄원 부분은 제사장들이 백성을 대신하여 하나님 앞에서 탄원기도를 드리는 것으로 끝납니다. (2:17) 하나님은 그 탄원기도에 자애로움으로 응답하겠다고 약속하시고 (2;18-19) 그 약속은 2:27에서 그 절정에 다다릅니다.

 

"그런즉 내가 이스라엘 가운데 있어 너희 하나님 여호와가 되고 다른이가 없는줄을 너희가 알 것이라 내 백성이 영영히 수치를 당치 아니하리로다." (2:27)

 

27절에 기록된 "내 백성이 영영히 수치를 당치 아니하리로다"라는 내용이 보다 구체적으로 묘사된 부분이 오늘의 본문입니다.

 

만민에게 부어질 하나님의 영

 

만민에게 하나님의 영을 부어주시겠다는 하나님의 약속은 "그 후에"라는 말로 시작합니다. 이 표현은 시간적으로 후속하여 일어날 다음의 시각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앞으로 일어날 것으로 기대되는 막연한 사건을 가리킬 때 주로 사용됩니다. 따라서 미래의 어느 날, 하나님의 영이 만민에게 부어질 것이라는 의미를 내포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만민이라는 말은 문자적으로 모든 육체를 뜻합니다. 미래의 어느 날 연약하고 무기력한 인간에게 하나님의 강력한 영이 임합니다. 그러나 여기서 만민이라는 말은 모든 인류를 가리키는 말은 아직 아닙니다. 곧 이어 나오는 문장에서 '너희 자녀들', '너희 늙은이', 그리고 '너희 젊은이',를 지시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이 본문에서 모든 만민은 '이스라엘 사람들'을 가리키는 것이 분명합니다. 미래의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하나님의 영이 임하면 그 결과로 '장래 일', '꿈', 그리고 '이상'이 주어질 것입니다.

 

하나님의 영을 받아 그들은 예언하고, 꿈을 꾸고, 환상을 볼 것이라는 말입니다. 이 세 가지는 서로 다른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같은 뜻을 달리 표현한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들은 모두 하나님의 계시를 받는 수단들입니다. 하나님의 영을 받은 이스라엘 공동체가 전체적으로 하나님의 뜻을 잘 이해하고, 하나님과 깊이 사귀게 됨을 말하는 것입니다. 이전에는 특별한 사람들만이 하나님의 영을 받았습니다. 모세가 그랬고, 사사들이 그랬고, 사울이 그랬고, 선지자들이 그랬습니다. 그런데 이제 더 이상 특별한 사람들에게만 특권적으로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이스라엘 모든 백성들에게 하나님의 영이 주어진다는 것입니다. 오늘날 그리스도인들은 이와 같은 요엘의 예언을 그다지 실감나게 느낄 수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예수님을 주로 고백하고 세례를 받으면 주의 성령이 주어진다는 것을 상식적으로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당시 이스라엘에게 이 일은 크고 남다른 의미를 가지고 있는 예언이었습니다. 하나님의 영이 평범한 모든 사람들에게도 임한다는 혁명적인 선언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것이 함의하고 있는 내용은 그보다 더 광범위하고 엄청난 내용을 담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영이 인간이 만든 모든 차별을 철폐하게 될 것이라는 것입니다. 성과 나이와 신분과 모든 사회적 장벽들을 철폐할 것이라는 말과 같은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성령 공동체 안에서는 모든 사람이 하나님과 새로운 관계를 맺게 되고 모든 차별이 제거됩니다. 공평하고 정의로운 평화의 나라가 임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영이 만민에게 임할 것이라는 내용이 품고 있는 혁명적인 메시지입니다.

 

여호와의 날

 

요엘서의 핵심주제는 여호와의 날입니다. 여호와의 날이라는 구약성경 전체에 16번이 언급됩니다. 16번 모두 예언서 안에서만 발견됩니다. 그런데 그 말이 요엘서에서는 무려 번이나 사용되고 있습니다. 요엘서에 나오는 5번의 여호와의 날 가운데 3번은 이스라엘에 대한 심판의 날(1:15, 2:1, 11)을 가리킵니다. 그리고 두 번은 이방에 대한 심판(2:31, 3:14)을 가리킵니다. 따라서 여호와의 날은 그 대상이 세상을 가리킨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여호와의 날은 두 가지 의미를 함께 가지고 있습니다. 요엘은 전반부에서는 여호와의 날을 이스라엘의 삼판의 날로, 후반부에서는 이방인의 심판, 곧 이스라엘의 구원의 날로 선포하고 있습니다. 여호와의 날은 어떤 이들에게는 심판의 날이 될 것이며 또 어떤 이들에게는 구원의 날이 될 것입니다. 심판은 근본적으로 이처럼 양면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어느 사람에게는 심판의 날이 될 것이며 어느 사람에게는 구원과 신원의 날이 될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것을 그렇게 둘 가르는 것은 무엇일까요? 요엘에 의하면 그것은 철저한 회개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진심에서 우러나오는 철저한 회개를 드린 것(2:12-14)에 대해 하나님께서 자비와 은혜로 응답해주시기 때문입니다.(18) 이스라엘의 참된 회개로 인해 여호와의 날의 성격이 완전히 바뀌는 하나님의 크신 은혜가 주어지는 것입니다.

 

요엘에 의하면 철저한 회개만이 여호와의 날의 운명을 바꿀 수 있습니다. 여호와의 날은 근본적으로 철저한 심판의 날입니다. 그런데 그 심판의 날이 참된 회개, 철저한 회개를 통해 은혜의 날이 되는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간단히 회개의 근본적인 의미를 생각해볼 필요가 있습니다. 우리는 언제나 우리가 죄인이며 그것을 회개해야 한다는 사고가 머릿속에 각인되어 있습니다. 그것이 틀린 말만은 아닙니다. 하지만 회개의 보다 더 근본적인 의미는 죄 가운데 태어난 세상의 방식을 따라 죄의 길을 걸을 수밖에 없는 우리들이 하나님의 영을 받아 죄에서 벗어나 하나님 나라의 방식에 따라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따라서 회개란 삶의 방식이 달라지는 것입니다. 단순히 죄짓지 않고, 다른 이들에게 친절한 태도를 보이는 정도가 아니라 삶의 근본 방식이 달라지는 것입니다. 우리가 세상의 방식을 따라 산다면 우리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돈입니다. 하지만 우리가 하나님의 방식을 따라 산다면 우리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사랑입니다. 회개에서 가장 두드러진 변화와 특징은 그것이 변하는 것입니다. 우리를 움직이는 것이 돈이었는데 우리를 움직이게 하는 것이 더 이상 돈이 아니라 사랑인 그런 삶으로 변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러한 삶의 변화가 바로 진정한 회개, 철저한 회개이며 심판의 날인 여호와의 날을 은혜의 날로 바꾸는 것입니다.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는 자

 

요엘은 여호와의 날이 이르기 전에 발생할 일을 보여줍니다. 하늘에서는 해와 달이 핏빛으로 변하고 땅에는 피와 불기둥과 연기 기둥이 임합니다. 참혹한 전쟁이나 화산 폭발과 같은 자연재난을 가리키는 것으로 보입니다. 요엘은 하늘과 땅에서 일어나는 이러한 사건들을 '이적(모페트)'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우리말 성경에는 '이적'으로 번역되었지만 이 낱말은 일상적인 것을 완전히 벗어난 상황을 가리키는 것으로 징조 혹은 표징을 뜻합니다. 따라서 이 사건들은 단순한 이적이나 자연재해가 아닌 특정 사실을 상징하는 징조입니다.

 

여호와의 날, 곧 하나님의 심판의 날을 가리키는 징조입니다. 우리가 살펴본 바와 같이 그런 징조가 나타날 때 이스라엘은 두 가지 사람으로 나뉠 것입니다. 참된 회개를 통해 여호와의 은혜의 날을 기다리는 사람에게 그것은 기쁨의 호칭일 것이며, 반대인 사람은 따라서 절대로 여호와를 부를 수 없게 될 것입니다. 여호와를 부른다는 표현은 일반적으로 예배를 의미합니다. 단지 기도만 하는 것이 아니라 지속적으로 그리고 오로지 여호와만을 예배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특히 어려운 상황 속에서도, 때로는 신앙이 다른 이방 가운데서도 여호와 하나님에 대한 신앙을 공개적으로 고백하는 것을 가리킵니다. 그것을 오늘날의 상황으로 생각해본다면 어떤 상황이 될까요? 먼저 우리는 이슬람이나 그보다 덜 적대적인 불교나 힌두교 등을 생각할 수 있을 것입니다. 또 아예 종교에 대해 강한 거부감을 가지고 있는 공산주의도 생각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런 곳에서 여호와 하나님에 대한 신앙을 공개적으로 표현하는 일은 자칫 생명을 잃는 일이 될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가 한 가지 더 생각해야 할 은밀한 적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우리가 가장 안전하다고 믿고 있는 자유로운 자본주의 세상입니다. 자본은 인간에게 힘과 자유와 쾌락을 부여하면서 자신을 섬기도록 강요합니다. 이 자본이 무서운 것은 사람들이 결코 그것이 하나님을 대신하거나 종교의 역할을 하고 있다는 사실을 감지하지 못한다는 사실입니다. 그리고 그것이 바로 성경이 말하는 우상입니다. 자본은 이미 거의 모든 그리스도인들에게서도 첫 번째 자리를 차지하였습니다. 그것이 만일 이슬람처럼 적대적으로 분명하게 드러난다면 그것과 싸울 것입니다. 하지만 실체를 드러내지 않는 은밀함으로 싸워야 한다는 생각조차 하지 못하게 하는 것입니다.

 

어찌되었건 이방 국가와 이방인 그리고 그보다 더 은밀하고 무서운 돈이라는 적대적인 세력 앞에서도 여호와를 참 하나님으로 담대히 고백하는 자의 인생은 무시무시한 파멸로 끝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백성은 종국에는 수치를 당하지 않습니다. 그들은 마지막 고난을 거친 후에 반드시 구원을 받습니다. 하남은 당신의 이름을 부르는 자를 결코 외면하지 않으시고 반드시 그를 구원하십니다. 여기서 우리는 참된 구원과 축복은 역설적으로 고난의 길에서만 얻을 수 있다는 심오한 진리를 다시 한 번 확인하게 됩니다. 고난 가운데서도 하나님에 대한 믿음을 신실하게 고수한 사람들에게는 고난이 멸망이 아니라 구원의 징조이자 구원에 이르는 관문이 되는 것입니다. 고난의 밤이 깊을수록 구원의 새벽은 더 가까운 법입니다. 하나님의 이러한 섭리를 믿는 하나님의 백성들에게는 그 어떤 고난도 재앙이 아닙니다.

 

성령공동체

 

"내 영을 만민에게 부어주리니"라는 요엘의 예언은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을 통해 오순절 성령강림으로 성취되었습니다. 그래서 신약의 하나님 백성, 곧 새 이스라엘은 모두 다 그리스도의 영을 받은 하나님의 아들들입니다. 그리스도의 영이 없으면 그 사람은 그리스도인도 아니고 하나님의 백성도 아닙니다. 오늘날의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성령을 받은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인들의 모임인 교회는 성령공동체입니다.

 

하지만 오늘날 교회는 그런 성령공동체의 모습을 보이지 못하고 있습니다. 오히려 성령을 근심하게 하고 탄식하게 하는 일들만 벌어지고 있는 곳처럼 보입니다. 그것은 요엘이 말하는 철저한 회개가 사라졌기 때문이며 어떤 고난과 어려움 속에서도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는 자들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사도행전 2장에서 성령공동체의 모습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오순절 성령강림을 통해 교회가 탄생했습니다. 그렇게 탄생한 교회에 두 가지 커다란 변화가 일어났습니다.

 

첫째는 영적 측면으로 기사와 표적의 출현입니다.

 

"사람마다 두려워하는데 사도들로 말미암이 기사와 표적이 많이 나타나니"(행2:43)

 

초대교회는 기사와 표적이 많이 나타났습니다. 그것은 교회를 건설하시는 성령의 역사이기도 하지만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성령공동체를 보호하시는 하나님의 돌보심이라는 것을 우리는 깨달아야 할 것입니다. 기사와 표적 그 자체가 무슨 목적이 있는 것이 아닙니다. 주의 영을 받아 변화된 사람들이 자발적으로 모여 이룬 그 성령공동체를 주님께서 직접 다스리시며 통치하시기 때문이며 그런 성령공동체에서 기적은 마치 일상처럼 일어나는 것입니다.

 

둘째는 사회적 측면으로 물질을 유무상통하고 공동 소유하는 신앙공동체의 탄생입니다.

 

"믿는 사람이 다 함께 있어 모든 물건을 서로 통용하고 또 재산과 소유를 팔아 각 사람의 필요를 따라 나눠주며" (44-45)

 

성령은 물질에 대한 신자들의 태도를 근본적으로 바꾸어버렸습니다. 성령은 '물질의 노예'였던 사람들을 자신의 소유 전체를 하나님 나라를 위해 기꺼이 내어놓을 수 있는 청지기로 바꾸어놓았습니다. 성령을 받아 하나님의 영을 소유하게 된 하나님의 백성들은 이전과 전혀 다른 종류의 삶을 살기 시작했습니다. 그들은 자기 소유의 집과 밭을 팔아 공동체에 있는 가난한 사람들을 위해 내어놓았습니다.

 

하나님의 영을 소유하게 된 초대교회 성도들은 기사와 이적이라는 영적 체험과 더불어 소유를 가난한 사람들과 나누는 사회적 행동을 자발적으로 실천했습니다. 그들이 한 이러한 행동은 그들이 세상의 방식에서 돌이켜 하나님 나라의 방식으로 살기 시작했다는 구체적이고도 분명한 예화입니다. 결과는 그들의 생각 이상이었습니다. 먼저 그들 가운데 핍절한 사람이 없어졌습니다. 소외가 사라졌습니다. 알지 못했던 하늘의 기쁨과 평화를 누리게 되었습니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그들 가운데 하나님 나라가 이루어졌고 그것이 세상을 밝혔다는 사실입니다. 그 결과를 이어지는 말씀은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을 찬미하며 또 온 백성에게 칭송을 받으니 주께서 구원 받는 사람을 날마다 더하게 하시니라."(47)

 

성령을 받으면 모든 것이 달라집니다. 자기 자신밖에 모르던 사람들이 자발적으로 성령공체를 이루고 하나님 나라의 방식으로 살아가기 시작하면서 그들이 보지 못했던 새로운 나라인 하나님 나라를 자신들의 존재로 보이고 증명하는 하나님 나라 백성들로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그들이 소유를 내려놓는 순간 하나님 나라의 창고가 그들에게 열리고 그들은 풍성한 하나님의 은혜와 더불어 하나님의 정의와 평화 속에서 샬롬을 누리게 되었습니다.

 

오늘도 여러분에게 시를 하나 소개하겠습니다.

 

꽃자리 / 구상

 

반갑고 고맙고 기쁘다.

앉은 자리가 꽃자리니라!

네가 시방 가시방석처럼 여기는

너의 앉은 그 자리가

바로 꽃자리니라.

반갑고 고맙고 기쁘다.

앉은 자리가 꽃자리니라

앉은 자리가 꽃자리니라!

네가 시방 가시방석처럼 여기는

너의 앉은 그 자리가

바로 꽃자리니라.

나는 내가 지은 감옥 속에 갇혀 있다.

너는 네가 만든 쇠사슬에 매여 있다.

그는 그가 엮은 동아줄에 묶여 있다.

우리는 저마다 스스로의

굴레에서 벗어났을 때

그제사 세상이 바로 보이고

삶의 보람과 기쁨도 맛본다.

우리는 저마다 스스로의

굴레에서 벗어났을 때

그제사 세상이 바로 보이고

삶의 보람과 기쁨도 맛본다.

앉은 자리가 꽃자리니라!

네가 시방 가시방석처럼 여기는

너의 앉은 그 자리가

바로 꽃자리니라

 

여러분들이 앉아 있는 자리는 어떤 자리입니까? 신실한 가톨릭 신자인 구상 시인이 하나님 나라를 염두에 두고 쓴 시인지는 알 수 없습니다. 그분의 사유의 깊이를 아는 저로서는 어느 정도는 그와 무관하지 않다는 생각을 합니다. 이 시를 읽을 때마다 저는 하나님 나라 백성들은 가시방석을 꽃자리로 승화시키는 사람들이라는 생각을 늘 하게 됩니다. 하나님 나라 백성들은 현실과 시공을 넘어 영원을 바라보며 주님과 함께 사는 존재들이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어지니교회 성도 여러분!

 

우리는 그리스도의 영을 받은 하나님의 백성들입니다. 그 영의 이끄시는 대로 우리가 지금 여기서 하나님 나라의 삶을 살아간다면 우리는 요엘이 말하는 철저한 회개를 한 사람들이며 어떠한 상황에서도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는 사람들이며 여호와의 날을 고대하며 살아가는 그분의 사랑하는 자녀들이 될 것입니다. 그리고 그런 우리 가운데 하나님 나라의 샬롬이 깃들고 그런 우리로부터 발산되는 복음의 빛이 세상을 비추게 될 것입니다. 우리가 그것을 마음에 새기고 날마다를 살아간다면 우리의 현실이 아무리 어렵고 힘들지라도 시인이 말하는 것처럼 "네가 시방 가시방석처럼 여기는 너의 앉은 그 자리가 꽃자리니라"라는 시인의 말에 동의하게 될 것입니다. 이 자리에 있는 우리 모두가 우리에게 부어진 영의 인도하심을 따르는 하나님 나라 백성이 되기를 소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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