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구약 --------------------/요엘

욜 2장 28-32절(젊은이들이 봐야 할 이상) - 안효관

by Preacher 2023. 8. 27.
728x90
반응형

욜2장 28-32

젊은이들이 봐야 할 이상 [청년주일]

안효관 목사 2019-05-19

전주남성교회 https://https://www.nsc.or.kr/

 

우리가 잘 아는 이야기를 먼저 하겠습니다. 영국의 위대한 수상인 윈스턴 처칠(Winston Leonard Spencer Churchill, 1874-1965)은 탁월한 웅변가로도 유명합니다. 제2차 세계대전 때 독일 공군의 비행기가 하루에 천 대씩 런던을 폭격하고 있을 때 모든 영국 국민들이 공포와 절망에 빠져 떨고 있었습니다. 그러자 처칠은 BBC방송을 통해서 “국민 여러분! 이제 조국을 위해 우리에게 남은 건 피와 땀과 눈물밖에 없습니다.”라고 호소하였습니다. 그런 처칠의 연설에 감동을 받은 영국 국민들은 3일 분량의 적은 식량을 가지고 보름을 버티면서 조국을 위해 싸웠고, 영국을 비롯한 연합군은 불리했던 상황을 뒤엎고 승리를 거두었습니다. 세월이 흘러서 두 번의 수상을 지낸 처칠도 정계를 은퇴하게 되었습니다. 은퇴 후 처칠은 모교인 고등학교의 졸업식에 초대를 받았습니다. 위대한 수상이었지만 이제는 지팡이를 짚고 굵은 안경을 낀 노신사가 된 처칠이 식장에 도착을 했을 때 교장선생님이 학생들에게 처칠을 소개를 합니다. “이제 그 유명한 대연설가이며 위대한 수상, 여러분의 자랑스러운 선배이신 처칠 경께서 연설을 하시는데 여러분은 모두 노트를 꺼내서 이 귀한 말씀을 한 마디도 빼놓지 말고 기록하기 바랍니다.” 학생들이 모두 노트를 꺼내들고는 위대한 수상의 연설을 기다립니다. 노신사가 천천히 연설 단상으로 걸어 나옵니다. 모든 학생들이 한마디도 놓치지 않으려고 노신사를 응시하고 있습니다. 연설 단상에 선 노신사 처칠은 학생들을 물끄러미 바라보았습니다. 잠깐 동안의 정적이 흐른 후 처칠은 입을 열어 이렇게 말했습니다. “NEVER GIVE UP. NEVER GIVE UP. NEVER, NEVER, NEVER.”

 

“결코 포기하지 마십시오. 결코 포기하지 마십시오, 절대로, 절대로, 절대로!” 이렇게 말하고는 노신사 처칠은 자리로 돌아가 앉았습니다. 이 ‘7초짜리의 짧은 연설’은 역사에 남는 유명한 연설이 되었습니다. “결코 포기하지 마십시오!” 우리가 참 많이 듣는 말입니다. 오늘 우리 시대의 젊은이들에게 해 주고 싶은 가장 중요한 말이 있다면 어쩌면 이 말일 것입니다. 오늘 우리 시대에 젊은이로 살아간다는 것은 너무나도 힘이 듭니다. 이미 오래 전 ‘삼포세대(연애, 결혼, 출산을 포기한 세대)’라는 말이 등장하면서 ‘오포세대(삼포에다가 취업과 내 집 마련까지 포기한 세대)’ ‘칠포세대(오포에다가 인간관계와 미래에 대한 희망까지 포기한 세대)’라는 말이 나왔고, 심지어는 ‘올포세대(모든 것을 포기한 세대)’라는 말까지 회자되었습니다. 그런 우리 시대의 우리나라를 가리켜 ‘헬조선’이라는 말도 나왔습니다. 그런 이야기를 들으면 기성세대에서는 ‘요즘 같이 살기 좋은 시대에 무슨 그런 말을 하느냐?’고 이해하지 못하는 분들도 있습니다.

 

그렇듯 희망을 잃어가고 있는 오늘 우리 시대의 젊은이들은 모습은 비단 우리나라만의 이야기는 아닙니다. 세계적인 경제침체와 극심한 청년 취업난으로 인해 가까운 이웃 나라 일본을 비롯해 유럽 등 많은 선진국에서도 비슷한 청년문제가 발생하고 있습니다. 유럽에서는 높은 교육 수준에도 불구하고 불안정한 고용상황과 낮은 임금으로 인해 미래를 기약하기 어려운 청년층을 ‘1,000유로 세대’(Generazione 1000 euro) 또는 ‘이케아 세대’(Generazione IKEA)라고 부릅니다. ‘1,000유로 세대’라는 말은 안정된 직장이 없어 한 달에 천 유로(약 130만원) 밖에 수입이 되지 않아 궁핍하게 살아야 함에도 독립심이 강해 부모로부터 도움을 받지 않으려 하기 때문에 그 궁핍함을 그대로 감내해야 하는 20-30대의 젊은이들을 가리킵니다. 우리나라의 ‘88만원 세대’라는 말과 비슷하다 할 것입니다. 그들을 ‘이케아 세대’라고 하는 이유는 높은 교육 수준과 뛰어난 스펙을 갖고 있지만 급여가 낮고 고용기간이 짧은 직업을 가진 젊은이들을, 품질은 좋지만 가격이 저렴한 가구 브랜드인 이케아를 빗대어 그렇게 부른 것입니다. 오랜 불경기와 고령화가 진행중인 일본에서는 청년들을 ‘사토리 세대’(さとり世代)라고 부릅니다. ‘사토리’라는 말은 ‘깨닮음, 달관, 득도’라는 뜻으로, 돈벌이나 출세, 또는 연애나 여행 따위에는 관심두지 않고 체념한 듯 그저 주어진 현실에 만족하며 살아가는 1980년대 후반에서 1990년대 초반의 젊은이들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문제는 이런 청년들의 문제가 결코 그들만의 문제로 끝나지 않는다는 데 있습니다. 청년들의 고통과 절망감은 결국 반사회적인 인식을 갖게 만들고, 기성세대 때문에 자기들이 설 자리가 없다는 인식 때문에 청년과 노년층 사이에 갈등의 원인이 되기도 합니다.

 

그런데 여러분, 이런 시대에 우리 신앙인들, 특별히 신앙을 가진 젊은이들은 어떤 마음가짐으로 살아야 하겠습니까? 우리도 신앙을 갖지 않는 젊은이들과 똑같은 생각, 똑같은 절망감을 가지고 살아야 하느냐 하는 것입니다. 세상 사람들이 3포니 5포니, 올포니 하는 것을 이야기할 때 우리 신앙의 젊은이들도 그들처럼 똑같이 모든 것을 포기한 채 살아야 하느냐 하는 것입니다. 우리 신앙인들이 신앙을 갖지 않는 사람들과 똑같이 생각하고, 똑같이 살아간다면 신앙을 가졌다고 하는 우리가 세상 사람과 다를 바가 뭐가 있겠습니까? 아무리 세상이 힘들고 어려운 시대라 하더라도, 또 세상의 절망적인 상황이 우리를 아무리 거세게 압박한다 하더라도 우리는 결코 세상에 함몰되어서는 안 되는 사람들입니다. 그게 신앙인입니다. 잠언24:10절에서 이렇게 말씀합니다. “네가 만일 환난 날에 낙담하면 네 힘이 미약함을 보임이니라.” 이 말씀은 오늘 우리 시대의 상황으로 재해석하면 이런 말씀입니다. ‘상황이 힘들고 어려울 때 세상 사람들처럼 낙담하고 포기하고 절망하면 너는 결코 신앙의 힘으로 사는 것이 아니다.’ ‘신앙으로 사는 사람들은 아무리 삶이 힘들고 어렵더라도 포기하지 않는다.’ 그런 말입니다. 비슷한 이야기를 사도 바울은 믿음의 사람 입장에서 이렇게 말씀합니다. “우리가 사방으로 욱여쌈을 당하여도 싸이지 아니하며 답답한 일을 당하여도 낙심하지 아니하며 박해를 받아도 버린 바 되지 아니하며 거꾸러뜨림을 당하여도 망하지 아니하고 우리가 항상 예수의 죽음을 몸이 짊어짐은 예수의 생명이 또한 우리 몸에 나타나게 하려 함이라.”(고린도후서 4:8-10) 우리 안에 예수의 생명이 있기 때문에, 그 예수의 생명을 안고 살아가는 우리는 사방으로 욱여쌈을 당하여도 싸이지 않고, 답답한 일을 당하여도 낙심하지 않습니다. 왜요? 우리 안에 예수의 생명이 있기 때문입니다. 세상 사람들이 갖지 못한 그 예수의 생명을 가진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 예수의 생명을 가진 사람들은 그렇게 낙심하지 않고 망하지 않음으로서 우리 안에 있는 예수의 생명을 세상 속에 보여줄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것을 오늘 본문에서는 이렇게 말씀합니다. “너희 자녀들이 장래 일을 말할 것이며 너희 늙은이는 꿈을 꾸며 너희 젊은이는 이상을 볼 것이며.” 오늘은 청년주일을 맞아 오늘 본문에서 다른 것은 생략하고 ‘너희 젊은이는 이상을 볼 것이며’라는 말씀을 중심으로 생각해 보겠습니다.

 

요엘 선지자가 이 말씀을 선포할 때의 상황을 우리가 먼저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요엘 선지자는 남유다 제8대 왕인 요아스 시대에 활동했던 선지자로 알려져 있습니다. 당시 남 유다는 극심한 혼란의 시기였습니다. 요아스 왕가 왕이 되기 전에 유다를 통치했던 왕은 북 이스라엘 역사상 가장 악한 왕이었던 아합의 딸 아달랴입니다. 북 이스라엘 아합 왕의 딸인 아달랴는 남 유다의 다섯 번째 왕인 여호람의 아내로 남 유다에 오게 됩니다. 그리고 자기 아들 아하시야가 왕이 되자 자기 아들을 꾀어 자기 아버지 아합의 가르침을 따르도록 했습니다. 아합의 가르침이란 결국 하나님을 버리고 바알과 아세라 등의 우상을 섬기게 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우상을 섬기게 된 아하시야는 왕이 된 지 불과 1년 만에 북 이스라엘에서 쿠데타를 일으켜 아합 왕가를 몰락시킨 예후와 싸우다가 죽고 맙니다. 아하시야가 죽자 아달랴는 자기 아들이 죽었다는 사실에 충격을 받고는 ‘유다 왕국의 모든 왕족의 씨를 없애버리겠다’고 생각하고 왕의 자손을 다 죽여버립니다. 남 유다 왕국의 모든 왕족들이 죽임을 당할 때 제사장 여호야다의 아내인 여호세바(여호사브앗)가 갓난 아기였던 요아스를 몰래 빼돌립니다. 그리고는 자기 유모의 방에 숨겨놓고 몰래 키웠습니다. 그러는 사이에 유다 왕국 왕족의 씨를 모두 살해했던 아달랴가 스스로 왕이 되어 6년 동안이나 유다를 통치하게 됩니다. 아합 왕의 딸이요 유다 왕족의 씨를 모두 살해했던 아달랴가 통치하고 있을 때 남 유다의 상황이 어떠했을지는 우리가 충분히 짐작할 수 있습니다. 유다 전역에 바알의 산당과 제단을 만들고 온갖 우상들이 가득한 나라로 만들어버렸습니다. 그러자 제사장 여호야다가 백성들을 몰래 불러모아놓고 ‘더 이상 이대로 놔두고 볼 수 없으니 비록 몰래 빼돌린 왕자 요아스가 일곱 살 밖에 되지 않는 어린 나이지만 아달랴를 몰아내고 요아스를 왕으로 세우자’고 모의를 합니다. 그렇게 해서 끝까지 저항했던 아합 왕의 딸 아달랴를 죽이고 겨우 일곱 살인 요아스를 왕으로 세우게 됩니다.

 

바로 그런 혼란에 혼란을 거듭한 끝에 요아스가 왕에 오르게 되었을 때 요엘 선지자가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고 하나님의 말씀을 외치고 있습니다. 이미 여호람 왕과 아하시야 왕과 아달랴 왕 등 세 왕이 통치하는 기간 동안 남 유다에는 온갖 우상들이 가득하게 되었고, 왕족의 씨를 모두 살해한 아달랴의 통치를 인해서 남 유다는 피폐해질 대로 피폐해져 있었습니다. 이제 유다 왕족의 혈통인 요아스가 왕이 되긴 했지만 그 왕은 겨우 일곱 살밖에 되지 않습니다. 나라를 안정화시키기에는 너무나도 어린 나이입니다. 요아스를 왕으로 옹립했던 제사장 여호야다가 살아 있을 때에는 어린 요아스가 선왕들이 뿌리 깊게 심어놓았던 바알숭배를 뿌리 뽑기 위해서 노력했지만, 여호야다가 죽고 나자 요아스는 나라를 개혁하려는 동력을 잃고 무기력해지고 말았습니다. 심지어 요아스 왕까지 하나님을 버리고 아세라 목상과 우상을 섬기게 되고, 그런 요아스의 변질을 강하게 비판하며 하나님께로 돌아와야 한다고 외친 여호야다 제사장의 아들을 성전 뜰에서 돌로 쳐 죽이고 맙니다. 여호와 하나님을 향한 신앙이 회복되는 듯 하더니 다시금 우상을 섬기던 옛날로 돌아가버린 것입니다. 그러니 당시 남 유다의 상황은 극심한 혼란에 빠지고 말았습니다.

 

나라 안의 상황만 그런 것이 아닙니다. 국제적으로는 남유다와 북이스라엘 뿐만 아니라 그 주변 국가들이 서로 팽팽하게 견제하고 있었고, 전통적인 강대국인 애굽은 약소국가들에게 정치적으로 경제적으로 문화적으로 강한 압박을 가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다가 앗수르가 점점 세력을 확장해가려 하고 있는 긴박한 상황입니다.

 

그렇게 국제적으로 혼란의 시기인데, 설상가상으로 유다에는 엄청난 재앙이 닥치고 말았습니다. 전무후무한 메뚜기 떼가 전국을 휩쓸고 지나가 전국토가 황폐화되었고, 극심한 가뭄까지 겹쳐 백성들은 이루 말할 수 없는 고통을 겪고 있었습니다. 그렇게 되자 백성들 가운데는 이제 하나님의 심판으로 남 유다는 완전히 멸망당하는 것 아니냐는 위기감과 불안감이 휩싸이게 됩니다. 정치를 봐도 희망이 없고, 국제적인 상황을 봐도 불안하기 그지없습니다. 거기에다가 메뚜기 재앙과 극심한 가뭄으로 인해서 경제적으로는 피폐해져 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나라가 망할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에 휩싸여 있습니다. 어디를 둘러보아도 희망이라곤 보이지 않습니다. 그게 바로 요엘 선지자 시대의 남 유다의 상황입니다.

 

그런 상황에서 하나님께서 오늘 말씀을 주셨습니다. 젊은이들이 이상을 보게 될 것이라고 말입니다. 여러분, 성경이 말하는 이상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젊은이들이 이상을 볼 것이라고 하셨는데, 그들이 보게될 이상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젊은이들이 이상을 볼 것이며’라고 하신 말씀을 영어 성경에서는 ‘비전’(vision)을 볼 것이라고 번역하고 있습니다. 비전은 우리가 일상에서 말하는 단순한 꿈이 아닙니다. 그렇다고 젊은이들이 빠지기 쉬운 야망도 아닙니다. 비전이라는 것은 길이 보지이지 않는 상황에서 하나님께서 열어주시는 길을 보는 것이고, 내 힘을 할 수 없다고 생각되는 일도 주님이 주신 힘으로 능히 할 수 있다고 긍정하는 것입니다. 너무나도 혼란스럽고 힘들어 내 힘으로 갈 수 없다고 생각되는 길이라 하더라도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기에 능히 갈 수 있다고 생각하고 힘찬 발걸음으로 출발하는 것이 비전입니다. 내 야망을 이루기 위해서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주신 꿈을 이루기 위해서 전적으로 하나님을 의지하여 긍정하며 가는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는 영원한 청년이라고 말하는 갈렙을 비전의 사람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애굽에서 탈출한 이스라엘 백성이 가데스바네아에 이르렀을 때 모세는 12지파에서 한 명씩 모두 12명의 정탐꾼을 가나안 땅에 보냅니다. 그들은 40일 동안 가나안 땅을 정탐하고 돌아와서 서로 다른 보고를 합니다. ‘그 땅은 정말 젖과 꿀이 흐르는 땅입니다.’라는 데에는 모두 같았습니다. 그런데 10명의 정탐꾼은 ‘그 땅 거주민은 강하고 성읍은 견고하고 심히 클 뿐 아니라 네피림의 후손 아낙 자손이 살고 있어서 우리는 그 땅에 절대로 들어갈 수 없다.’고 보고했습니다. 그런데 여호수아와 갈렙 단 두 사람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기뻐하시면 우리를 그 땅으로 인도하여 들이실 것이고, 그 땅 백성들은 우리의 먹이가 될 것’이라고 보고했습니다. 객관적인 판단으로 한다면 10명의 정탐꾼들이 하는 말이 맞습니다. 그런데 이스라엘 백성들에게는 객관적으로 판단할 수 없는 힘이 있습니다. 바로 하나님의 도우심입니다. 여호수아와 갈렙은 그것을 알기에 하나님께서 도우신다면 아무리 강하고 두려운 아낙자손이 그 땅에 살고 있을지라도 결코 두렵지 않다고, 넉넉히 이기고 하나님께서 주시겠다고 약속하신 땅을 차지할 것이라고 말합니다.

 

여러분, 이것이 비전입니다. 상황은 온통 우리들에게 불리합니다. 어떠면 희망도 보이지 않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함께 하신다면 넉넉히 이길 수 있습니다. 그런 믿음의 눈으로 보는 것이 비전입니다.

 

거기에 그치지 않았습니다. 40년의 광야생활을 마치고 요단강을 건너 가나안 땅에 들어갔습니다. 가나안 땅에 들어갔다고 해서 바로 가나안 땅이 이스라엘의 것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 그들은 아낙자손을 비롯한 가나안 원주민들과의 전쟁을 해야 합니다. 가나안 정복전쟁을 한 지 5년의 시간이 흘렀습니다. 대부분의 가나안 땅을 점령했지만, 아직도 점령하지 못한 땅이 있었습니다. 그 때 갈렙이 나섰습니다. 헤브론을 자신에게 달라는 것입니다. 살기 좋고 점령하기 쉽기 때문에 그 땅을 달라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아직도 헤브론은 점령하지 못했고, 성읍이 크고 견고하여 쉽게 점령할 엄두를 내지 못하고 있던 상황이었습니다. 그런데 갈렙은 이렇게 말합니다. “오늘 내가 팔십오 세로되 모세가 나를 보내던 날과 같이 오늘도 내가 여전히 강건하니 내 힘이 그 때나 지금이나 같아서 싸움에나 출입에 감당할 수 있으니 그 날에 여호와께서 말씀하신 이 산지를 지금 내게 주소서. 당신도 그 날에 들으셨거니와 그 곳에는 아낙 사람이 있고 그 성읍들은 크고 견고할지라도 여호와께서 함께 하시면 내가 여호와께서 말씀하신 대로 그들을 쫓아내리이다.”(여호수아 14:10-12) 갈렙은 85세입니다. 당시 가나안 땅에 들어간 이스라엘 백성 가운데 나이가 가장 많습니다. 또 45년 전에 가데스바네아에서 정탐꾼으로서 믿음의 보고를 했던 공로로 그는 어느 곳을 원하든지 얻을 수 있는 자격을 갖추었습니다. 그런데도 그는 다른 사람들이 쉽게 점령하려 하지 않은, 아니 두려워서 점령하기를 꺼려하던 땅을 자신에게 달라고 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함께하시고 도우시면 아낙 사람들이 살고 있는 크고 견고한 성읍일지라도 능히 점령할 수 있다는 믿음을 가졌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갈렙을 ‘영원한 청년’이라고 부르기도 합니다. 나이 85세에 모두가 두려워하는 헤브론을 점령하겠다고 나선 것입니다. 그에게 있는 것은 오직 하나, 하나님을 신뢰하는 믿음입니다. 믿음이 그로 하여금 아무도 하려 하지 않는 일을 하게 만든 것입니다.

 

오늘 본문의 말씀은 이렇게 시작됩니다. “그 후에 내가 내 영을 만민에게 부어 주리니.” ‘내가 내 영을 만민에게 부어 주리니’라는 말씀이 ‘너희 젊은이는 이상을 볼 것이며’라는 말씀의 전제입니다. 무슨 말씀입니까? 누가 갈렙처럼 하나님께서 주신 비전을 가지고 불가능할 것 같은 상황에서도 믿음으로 담대히 나갈 수 있다는 것입니까? 하나님의 영이 그 안에 있는 사람입니다. 성령으로 사는 사람, 성령에 이끌려 사는 사람, 성령의 능력을 의지하는 사람입니다. 성령으로 사는 사람은 나이에 상관없이 청년으로 살 수 있습니다. 청년이 누구입니까? 나이가 젊다고 청년입니까? 나이가 젊어도 늙은이처럼 사람 사람도 있고, 갈렙처럼 나이가 많아도 영원한 청년으로 사는 사람도 있습니다.

 

중국인들이 가장 존경하는 지식인이자 네 번이나 노벨문학상 후보로 거론된 왕멍(王蒙, 1934-)이 출판사로부터 ‘젊은이들을 위한 글을 써 달라.’는 부탁을 받고 쓴 책이 『나는 학생이다』라는 제목의 책입니다. 그 책에서 왕멍은 이렇게 말합니다. “애국자와 선행자와 혁명가와 대가들은 정의로운 주장이 열세에 처해 있음을 분명히 알고 있었지만, 그 사상이 열세에 처해 있음을 분명히 알고 있었지만, 실력이 부족한 것을 알고 있었지만, 여전히 필승을 외쳤다. 실패할 것을 알고 있었으며, 성공할 희망이 없다는 것을 알지만, 용감히 선두에 서서 포기하지 않고 끝까지 추진했다. 자신이 추진하는 일을 많은 사람들이 이해하지 못하는 상황에서도 그들은 포기하지 않고 전심전력으로 추진했다.” 이길 수 있는 전쟁에는 누구나 용감히 나갑니다. 성공할 수 있는 상황에서는 누구나 주저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모두가 안 된다고 말할 때, 성공할 확률이 거의 없다고 말할 때, 아무도 나를 이해하지 못할 때, 그럴지라도 용감하게 추진하는 사람이 선각자요 혁명가요 대가라는 말입니다.

 

비전의 사람도 마찬가지입니다. 모두가 안 된다고 말할 때 하나님을 신뢰하고 담대히 나가는 사람, 모두가 절망하여 그 자리에 머물러 있을 때 하나님의 도우심을 의지하여 담대히 앞으로 돌진하는 사람, 아무 것도 보이지 않아 어디로 가야할지 알지 못해 방황할 때 하나님의 지시하시는 손가락을 바라보며 용감히 나가는 사람, 그 사람이 비전의 사람입니다. 우리는 그런 사람을 청년(젊은이)라고 말합니다.

 

오늘 본문에서 하나님께서는 ‘젊은이들이 비전을 볼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성령의 이끄심에 따라 사는 사람은 비전을 보는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환경을 탓하지 않습니다. 자신의 능력 없음을 한탄하지 않습니다. 우리에게는 우리에게 힘주시는 하나님이 계시기 때문입니다. 젊은이 여러분, 하나님은 오늘 우리가 비전을 보는 사람이 되길 원하십니다. 자신의 환경을 탓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손을 꼭 붙잡고 담대히 사는 비전의 사람 말입니다. 사회적으로 환경이 내 편이 아니라고 불평하는 것이 아니라 어떤 상황에서도 힘주신 하나님을 의지하여 용감히 세상을 향해 돌진하는 사람 말입니다. 사람들이 아무리 오늘의 상황이 어렵다고 하더라도 거기에 우리의 마음을 빼앗기지 마십시다. 우리에게는 하나님이 계십니다. 그 하나님을 굳게 신뢰하고 나가면 반드시 우리에게 승리를 주십니다.

 

믿음으로 세상을 사는 믿음의 사람인 여러분, 내 환경을 탓하지 마십시다. 나이에 상관없이 하나님의 비전을 품고 그 비전을 이루기 위해서 용기를 내는 사람이 젊은이입니다. 우리는 신앙 안에서 영원한 젊은이로 살아야 합니다. 갈렙을 젊은이로 쓰신 하나님께서 오늘은 우리를 이 시대의 영원한 젊은이로 쓰시길 원하십니다. 

 

728x90
반응형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