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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약 --------------------/유다서

유 1장 11절(가인의 제사) - 조성노

by Preacher 2025. 3. 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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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1장 11

가인의 제사

조성노 목사 20180701

푸른교회 [분당 불정로] http://thegreen.or.kr/

 

(유 1:11, 개정) 화 있을진저 이 사람들이여, 가인의 길에 행하였으며 삯을 위하여 발람의 어그러진 길로 몰려 갔으며 고라의 패역을 따라 멸망을 받았도다

 

상반절을 보면 “화 있을진저 이 사람들이여, 가인의 길에 행하였으며” 라고 합니다. 소나기로 유명한 황순원 씨 작품 가운데 <카인의 후예>라는 작품이 있습니다. 이북 사람인 황순원 씨가 자기 고향에서 겪은 최악의 비극적 상황을 성경의 가인 이야기에 빗대어 소설로 형상화한 작품입니다.

 

아담과 하와가 금단의 열매인 선악과를 따먹고 하나님의 진노를 사서 낙원에서 추방당합니다. 그러고 나서 두 아들을 낳았는데 첫 아들이 가인이고, 둘째가 아담입니다. 가인은 농사를 짓고, 아벨은 목자가 됩니다. 어느 날 가인과 아벨이 각각 하나님께 제사를 드립니다. 여기서 문제가 발생합니다. 하나님이 형의 제사를 받지 않고, 아벨의 제사만 접수하셨습니다. 왜 그러셨을까요? 아벨은 양을 잡아 피의 제사를 드렸기에 하나님이 받고, 가인은 곡식으로 제사를 드려 피의 제사가 아니어서 하나님이 안 받으신 것입니까? 하나님은 피에 굶주린 신이 아닙니다. 당시는 아직 모세 이전, 율법 이전입니다. 피 제사 원칙을 소급 적용하는 것은 이치에 맞지 않습니다. 가인이 곡식을 드린 것은 그가 농부였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그것은 당연하고 자연스런 것입니다.

 

그럼에도 왜 하나님이 가인의 제사를 받지 않으셨느냐는 것입니다. 이에 대한 중요한 힌트가 있습니다. 히브리서 11장 4절입니다. “믿음으로 아벨은 가인보다 더 나은 제사를 하나님께 드림으로 의로운 자라 하시는 증거를 얻었으니” 믿음의 제사냐 아니냐 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아벨의 믿음의 제사는 어떤 것입니까?

 

창세기 4장 3절 이하입니다. “[3] 세월이 지난 후에 가인은 땅의 소산으로 제물을 삼아 여호와께 드렸고 [4] 아벨은 자기도 양의 첫 새끼와 그 기름으로 드렸더니 여호와께서 아벨과 그의 제물은 받으셨으나” 여기서 중요한 것은 가인이 드린 땅의 소산에 대해서는 첫 열매라는 언급이 없는데, 아벨이 드린 제물에 대해서는 양의 첫 새끼라고 합니다. 여기서 우리는 가인과 아벨의 제사에 임하는 자세와 믿음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예배는 단순한 종교의식이 아닙니다. 예배는 우리 믿음의 결산입니다. 예배는 한 치의 오차 없이 예배자의 모든 것을 다 드러냅니다. 예배가 부실하면 그 사람의 현재 하나님과의 관계도 부실한 것입니다. 가인이 첫 열매를 드리지 않았다는 것은 그에게는 하나님의 존재가 절대적이지 않다는 반증입니다. 하나님이 그의 인생 1순위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반면에 아벨이 양의 첫 새끼를 드렸다는 것은 자신의 모든 양을 드렸다는 의미이고, 나아가서는 자기의 모든 소유와 존재 전부를 제물로 바쳤다는 뜻입니다. 이것이 예배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이 기뻐 받으시는 산 제사입니다. 그러므로 예배는 우리의 모든 것을 말하고, 우리 믿음의 전부를 알려줍니다.

 

주일예배는 한 주간 첫 날을 주님의 날로 지키며 나의 한 주간 전체를 바치는 것입니다. 예배는 아벨이 양의 첫 새끼를 바친 것처럼 십일조를 바침으로 내 모든 수입을 주님께 바치는 헌상입니다. 십일조는 내 모든 재산을 대표합니다. 예배는 모든 노동에서 손을 떼고 주님께 헌신함으로써 주님께 내 모든 생활을 바치는 것입니다. 이것이 예배이고, 주일 성수입니다.

 

그런데 불행하게도 당시 가인의 예배는 그렇지 못했습니다. 가인에게는 제사가 그저 통과의례였습니다. 형식적인 종교의식이었습니다. 그러므로 가인의 제사를 받지 않으신 것은 피의 제사가 아니었기 때문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믿음, 존재 자체를 받기를 원하십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시간과 제물과 형식과 의식을 통해 우리의 믿음과 삶과 존재를 받기를 원하십니다. 그래서 예배와 우리의 믿음, 삶, 존재는 절대 떼려야 뗄 수 없습니다. 창세기 4장은 이 사실을 분명히 합니다. 창세기 4장 4절 하반절 이하입니다. “여호와께서 아벨과 그의 제물은 받으셨으나 [5] 가인과 그의 제물은 받지 아니하신지라” 성경은 하나님이 아벨의 제물을 받으셨다고 하지 않습니다. 아벨과 아벨의 제물을 하나님이 받으셨다고 합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은 가인과 가인의 제물을 받지 않으셨다고 합니다. 가인의 제물은 결국 가인 자신을 뜻하고, 아벨의 제물은 아벨 자신을 의미합니다. 예배와 제물은 우리 자신을 드리는 행위이기에 하나님이 우리 예배를 받으신다는 것은 우리를 받으신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예배는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더 진지하고 엄숙한 것입니다. 이 사실을 기억합시다. 하나님은 우리가 무슨 제물을 드리면 무조건 열납하시지 않습니다. 제물에 내 삶과 존재가 담기지 않으면 받지 않으십니다. 아무리 찬송과 기도가 있고, 예배자가 차고 넘쳐도 삶과 존재가 담기지 않은 예배는 종교적 쇼에 불과합니다. 본문은 가인의 길이 아닌 아벨의 길을 가라는 말씀입니다.

 

창세기 4장 7절입니다. “네가 선을 행하면 어찌 낯을 들지 못하겠느냐” 하나님이 아벨의 제사만 받으시자 가인이 화가 났습니다. 가인은 평소에도 악했습니다. 이 말씀은 네가 평소에 선을 행했다면 이런 제사를 드렸겠느냐 라는 뜻입니다. 마태복음 23장 35절입니다. “그러므로 의인 아벨의 피로부터 성전과 제단 사이에서 너희가 죽인 바라갸의 아들 사가랴의 피까지 땅 위에서 흘린 의로운 피가 다 너희에게 돌아가리라” 아벨은 어째서 주님까지 인정한 의인이었을까요? 아벨이 양의 첫 새끼를 드려서 의인이 된 게 아닙니다. 형에게 살해 당해 의인 칭호를 얻은 게 아닙니다. 그는 하나님께 제사 드리기 전부터 그리고 형에게 돌로 맞아 죽기 전부터 의인이었습니다. 아벨은 의인이어서 그런 제사를 드린 겁니다. 요한1서 3장 12절입니다. “가인 같이 하지 말라 그는 악한 자에게 속하여 그 아우를 죽였으니 어떤 이유로 죽였느냐 자기의 행위는 악하고 그의 아우의 행위는 의로움이라” 가인은 아우를 죽여서 악한 자가 된 게 아니라 이미 악한 삶을 살았기에 하나님께 죽은 제사를 드리고 마침내 동생을 돌로 쳐 죽이는 살인자가 된 것입니다. 잠언 15장 8절입니다. “악인의 제사는 여호와께서 미워하셔도 정직한 자의 기도는 그가 기뻐하시느니라” 아벨의 제사는 믿음의 제사요 정직한 의인의 제사였기에 하나님이 기뻐 받으신 것입니다. 가인의 제사는 믿음의 제사도 아니고 그 이전에 악한 자에 속한 제사였기에 하나님이 받지 않으신 것입니다. 악한 자의 제사는 하나님이 그의 예배를 받지 않으십니다. 다윗이 정당한 전쟁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이 너는 성전을 지을 수 없다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이 그 사람의 예배를 받지 않으시면 그는 끝장납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은 가인에게 화 있을진저라고 합니다. 가인이 걸은 악한 길에 대해 경고합니다. 악한 자는 절대 예배다운 예배를 드릴 수 없습니다. 하나님이 그런 자의 예배를 받지 않으십니다. 맥추감사절에 하나님이 받지 않으신 가인의 제사에 대해 깊이 생각합시다. 예배가 무엇인지, 제물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진지하게 생각합니다. 가인의 길이 아닌 산 제사를 드린 아벨의 길을 걸읍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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