갈6장 11-18
예수님의 흔적을 가져야 합니다
서명성 목사 2016.1.3.
팔로마한인교회 http://palomarkc.org/
오늘은 새해 첫 주일입니다. 하나님 앞에 나와 예배를 드리며 희망찬 출발을 하고 있습니다. New Year resolution이라 하여 새해가 되면 나름대로 무엇인가 해보겠다고 결단을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더 열심히 읽어보겠다, 운동을 열심히 하여 건강을 유지하겠다, 화목한 가정을 이루겠다, 원하는 대학에 가겠다, 결혼을 하겠다, 사업을 잘해보겠다 등등. 그러나 결단에 그치지 않고 구체적인 열매를 거두려면 실현 가능한 계획을 세우고, 그 계획이 이루어지도록 우선순위를 세우며 주변 정리를 하고, 열과 성을 다하여 달려가야 합니다.
금년에 교회 창립 21주년을 맞이합니다. 성년이 된 저희 교회의 새해 표어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함께 지어져 가는 교회(엡 2:22)”입니다. 그 표어대로 걸맞는 열매를 거두려면 우리 교회가 주님의 뜻을 알고, 주님의 마음을 품고, 주님의 성령에 이끌리어 함께 나아가야겠습니다. 앞으로 몇 주 동안 우리가 어떤 자세로 주님의 몸 된 교회를 섬겨야 할지 시리즈 설교로 다루겠습니다. 그저 타성에 젖어 전에 하든대로가 아니라, 하고 싶으면 하고 말고 싶으면 그만두는 미적지근한 태도가 아니라, 책임을 맡은 분들부터 아름다운 섬김의 본을 보이며 주님의 마음에 합한 교회를 함께 이루어가기를 원합니다. 본문은 제가 2003년에 처음 설교한 후 여러 교회에서 집회할 때 많이 사용하였습니다. 새해를 맞이하여 온 교우들이 어떻게 예수님과 믿음의 선진들의 모습을 본받아야 할지 본문을 중심으로 다시 한 번 나누어 보고자 합니다.
바울이 갈라디아 지방에 왜 왔습니까? 자신의 학문이나 지식을 자랑하고 선교의 업적을 과시하려고 온 것이 아닙니다. 갈라디아 지역에 있는 잃어버린 영혼들에게 복음을 전하기 위함입니다. 바울이 어떤 복음을 전했을까요?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죄를 위하여 죽으시고 다시 사셨다는 십자가와 부활의 복음입니다. 믿음은 무엇입니까? 선포된 복음을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누구든지 회개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믿을 때 죄 사함 받고 구원을 받습니다. 바울이 복음을 전한 결과 갈라디아에 있는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믿게 되고 그들을 중심으로 교회가 세워지게 되었습니다. 바울이 그곳에 처음 왔을 때 육신적으로 연약한 상태였습니다. 그 연약함이 무엇인지 성경은 밝히고 있지 않지만 자칫하면 하나님의 일을 한다는 사람이 왜 저렇게 비실비실하느냐는 오해를 받을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갈라디아 교인들은 바울의 약함을 인하여 그를 업신여기거나 무시하지 않았습니다. 바울보다 바울이 전한 복음에 더 집중하였기에 그가 가진 육체적인 연약함에도 불구하고, 도리어 바울을‘하나님의 천사’와 같이 또는 ‘그리스도 예수’와 같이 영접했습니다. 그 결과 갈라디아 교회에 성령의 역사가 있었고 구원의 기쁨을 풍성하게 소유할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문제가 생겼습니다. 바울은 한 곳에만 머물러 목회하는 분이 아니라 여러 곳을 다니며 복음을 전하는 순회전도자입니다. 그가 없는 동안 교회에 가만히 들어온 유대주의자들이 갈라디아 교인들을 미혹하였습니다. 그들은 복음에다 율법을 더하였습니다. 믿는 것만으로는 부족하고 할례를 행하고 율법을 지켜야 온전한 구원에 이를 수 있다고 하였습니다. 얼핏 들으면 그럴 듯합니다. 믿음은 눈에 보이지 않기에 무엇인가 드러나는 행동을 하면 좀 더 확실하게 하나님의 인정을 받을 것이라는 생각을 할 수 있습니다. 더구나 거짓선생들은 바울을 비난하였습니다. 바울은 어디 출신인지 몰라. 그는 자칭 사도야. 예루살렘 사도들이 전하는 복음을 주워듣고 거기에다가 적당히 다른 것을 더하면서 본음을 변질시켰어. 이런 가르침에 적지 않은 갈라디아 교인들이 넘어갔습니다. 전에는 눈이라도 빼어 주고 싶을 정도로 바울을 따르고 존경하였는데 이제는 복음에 대한 기쁨과 열정도 잃어버리고 바울을 원수같이 대합니다. 자기가 개척한 교회의 교인들로부터 배척을 당하는 바울의 마음이 어떻겠습니까? 바울이 가는 곳마다 많은 교회가 세워졌습니다. 그렇다면 여기 아니면 사역지가 없나 하며 그냥 떠날 수도 있었으나 바울은 그러지 않았습니다. 갈라디아 사람들을 하나님께서 자기에게 붙여주신 양으로 알았습니다. 갈라디아 4장을 보면 그들의 태도를 인하여 섭섭해 하거나 원망하기보다 그들 속에 그리스도의 형상을 이루기까지 다시 해산하는 수고를 하겠다고 다짐했습니다.
육체를 자랑하는 자들이 있습니다
갈라디아서에 많이 언급되는 단어 중의 하나가 율법입니다. 율법이 무엇입니까? 법하면 딱딱하게 여기지만 율법의 의미는 instruction, 즉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하나님의 백성답게 살도록 주신 지침입니다. 지침대로 살면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백성이 됩니다. 하나님이 복을 주십니다. 그런데 구약성경을 보면 이스라엘 백성들은 율법대로 살지 않고 도리어 우상을 섬기며 하나님의 진노를 일으켰습니다. 350년 동안 자기 소견대로 악한 행동을 반복하던 사사시대를 거쳐, 120년 통일 왕국 이후 나라가 북쪽의 이스라엘과 남쪽의 유다로 나뉘었습니다. 그 후에 두 나라는 앗수르와 바벨론에 의하여 각각 멸망을 당하였습니다. 하나님을 찾고 의지하면 하나님이 함께 하시고 그들을 인도하실 텐데 그들은 굴러 들어온 복을 차버렸습니다. 그럼에도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포기하지 않으셨습니다. 때가 되어 당신의 아들을 이 땅에 보내셔서 구원을 얻고 하나님의 복을 받는 길을 새롭게 열어 놓으셨습니다. 물론 예수님이 오셨다고 다 구원받는 것이 아닙니다. 감기에 걸리면 열이 나고 콧물이 나고 골치가 아파집니다. 그럴 때 어떻게 합니까? 감기약을 먹어야죠. 그런데 먹으면 반드시 낫는 감기약이 있다 하더라도 그것을 그냥 손에 쥐고 있다면 아무런 소용이 없습니다. 감기약을 마셔야 약기운이 돕니다. 마찬가지예요. 2000년 전 팔레스타인 지방에 하나님의 아들이 오셨습니다. 그가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다시 사셨습니다. 그것은 역사적 사건입니다. 그런데 그분이 나를 위하여 돌아가신 것을 믿을 때 객관적인 사건이 주관적으로 내게 역사합니다. 구원의 약효가 돌기 시작합니다. 믿을 때 비로소 구원 받은 하나님의 자녀가 됩니다.
문제는 갈라디아 교인들이 다시 율법을 붙들려 한다는 점입니다. 율법은 거울과 같습니다. 거울을 보면 어디에 무엇이 묻었는지 더러운지 알 수 있습니다. 그러나 거울을 아무리 들여다본다고 얼굴이 저절로 깨끗하게 되지는 않습니다. 율법은 우리에게 죄를 깨닫게 할 뿐 우리를 구원으로 인도하지 못합니다. 그런데 갈라디아 교인들이 생명의 법을 버리고 할례를 행하고 율법을 지킴으로 구원을 보장받으려 했습니다. 유대주의자들은 몇 명에게 할례를 받게 하였는지 숫자를 자랑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시선보다 사람들의 시선을 더 의식하였습니다. 천지를 창조하신 하나님 앞에 저와 여러분들이 언젠가는 하나님 앞에 서서 결산을 하게 됩니다. 그때 무엇을 자랑하겠습니까? 학벌, 재물, 명예, 외모를 자랑하겠습니까? 그런 것들은 구원과 아무 상관이 없습니다. 그런 육체의 자랑을 늘어놓는다고 하나님으로부터 의롭다고 인정을 받는 것이 아닙니다. 할례의 참된 의미가 무엇입니까? 자기 안에 있는 죄스러운 본성을 잘라내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너희는 마음에 할례를 행하고 다시는 목을 곧게 하지 말라”(신 10:16). 보이기 위한 할례는 아무 의미가 없음을 하나님은 이미 3500년 전에 모세를 통하여 경고하셨습니다. 아무리 결심을 해도 우리 안에 있는 악하고 더러운 본성은 사라지지 않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아들이 우리를 대신하여 십자가 위에서 죽으셨습니다. 믿으면 우리의 죄를 용서하십니다.
성도들은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자랑합니다
예수님께서 할례를 통한 육체의 자랑을 그치게 하기 위하여 이 세상에 오시고 십자가에 죽으셨습니다. 사실 십자가는 세상 사람들이 보기에는 저주와 실패의 상징입니다. 그런데 세상 사람들이 꺼려하는 그 십자가 때문에 우리들의 옛 사람이 죽고 그리스도 안에서 새사람이 되었습니다.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것이 되었도다”(고후 5:17). 거듭난 것으로만 만족할 것이 아니라 이제부터는 성령을 좇아 행하며 예수 그리스도를 닮는데 최선을 다해야 합니다. 바울 자신도 태어난 지 팔일 만에 할례를 받았기에 할례에 관하여 갈라디아 사람들보다 선배지만 그렇다고 바울은 자신이 할례 받은 것을 자랑하지 않았습니다. 가말리엘 문하에서 최고의 교육을 받은 것을 자랑하지 않았습니다. 고린도 후서 12장에 보면 바울은 천국에 다녀온 희한한 경험을 하였으나 “내가 세 번째 하늘에 이끌려 갔는데 야 대단하더라 열두 진주 문이 있고 길은 황금으로 되어 있고 동산에는 생명나무가 있는데 너무 멋있다”하며 호들갑을 떨지 않았습니다. 도리어 다른 사람들은 드러내고 싶어 하는 것을 감추고, 감추고 싶어 하는 것을 드러냅니다. 바울이 자기 몸에 있는 가시를 언급합니다. 왜 가시가 생겼는지 이유를 알지 못했을 때에 그 가시를 없애달라고 하나님께 세 번이나 간절히 기도하였습니다. 바울이 기도하면 앉은뱅이가 일어나고 귀신이 쫓겨 가고 죽은 자가 살아났습니다. 그런데 그가 기도하며 응답으로 받은 것이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은혜는 약한데서 온전해진다는 말씀입니다. 하나님이 바울의 육체에 가시를 주신 것은 그가 교만하지 않고 계속 하나님의 은혜에 머물도록 하기 위한 하나님의 관심과 사랑의 표시라는 것을 깨달았을 때, 비록 자기 기도대로 응답받지 못하였으나 크게 기뻐하였습니다. 그리스도인의 자랑은 약함의 자랑입니다. 자기를 자랑하지 않고, 자기 속에 역사하시는 그리스도와 그의 십자가를 자랑합니다.
그렇다면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자랑할 때 어떤 열매가 생깁니까?
1) 예수님의 흔적을 가집니다
십자가의 원수로 행하면서 육체의 모양을 내는 자들, 나름대로 하나님을 가장 잘 믿는다고 하면서 육체를 자랑하는 자들이 바울의 사역을 방해하였습니다. 이에 바울은 “누구든지 나를 괴롭게 말라 내가 내 몸에 예수의 흔적을 가졌노라”선언합니다. 흔적은 다른 말로 하면 ‘낙인’입니다. 옛날에는 주인이 종이나 짐승의 몸에 인두로 낙인을 찍어 자기의 소유임을 표시했습니다. 그런데 바울에게 예수님의 흔적이 있다고 합니다. 바울이 가진 흔적은 할례 받은 흔적이 아닙니다. 육신의 정욕을 좇다가 생긴 흔적이 아닙니다. 그 흔적은 십자가의 복음을 증거하면서 당한 고난의 흔적이나 상처를 말합니다. 그 흔적은 바울이 하나님의 택하신 종임을 분명하게 보여줍니다. 바울은 복음을 전하면서 많은 대적자들로부터 위험을 당하고 수고와 고역에 시달리고 여러 번 밤을 지새우고, 주리고, 목마르고, 여러 번 굶고, 추위에 떨고, 헐벗으며 죽을 고생을 하였는데 그 모든 표시가 예수님의 흔적입니다. 바울은 예수님을 믿고 섬기다가 생긴 고난의 흔적을 자랑합니다. 갈라디아 교인들의 자랑과는 차원이 다릅니다. 십자가의 능력만이 우리를 세상의 헛된 자랑에서 자유하게 합니다.
이 자리에 계신 분들은 예수님의 흔적이 있으십니까? 다른 말로 하면 예수님 때문에 무엇인가 절제하거나 포기한 적이 있습니까? 예수님 때문에 좀 손해를 보고, 억울한 일을 당하고, 피곤한 적이 있습니까? 아니면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사랑이 너무 크다보니 제대로 실감하지 못하고 베푸신 은혜를 값싸게 만들고 있습니까? 예수님을 믿어도 달라진 것이 없고 예수님을 따른다 하면서도 자기 것만 챙기고 전혀 희생하려 하지 않는다면 예수님의 흔적이 없는 사람입니다. 왜 그럴까요? 예수님의 흔적은 적당히 신앙생활 하는 사람에게 생기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 흔적은 세상과 타협할 때 생기지 않습니다. 주님을 인하여 고민하고 씨름해야만 생깁니다. 그 길은 좁은 길입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가기를 주저하는 길입니다. 그러나 가치가 있고 하나님의 상급이 있는 길입니다. 바울은 그리스도와 성령 안에서 주어진 새 창조의 삶을 계속 살아가는 사람들을 가리켜 ‘하나님의 이스라엘’이라고 부릅니다. 이들에게 하나님의 은혜와 평강이 충만할 것을 약속합니다.
어떻게 하면 예수님의 흔적을 가집니까?
부르심에 순종해야 합니다. 그러려면 하나님이 부르시는 소리를 들어야 합니다. 우리가 살아가면서 얼마나 많은 소리가 듣습니까? 있는 말, 없는 말, 지어낸 말, 다른 사람을 비방하는 말, 혈기 부리는 말. 그런데 대부분의 경우 그런 소리들은 별로 중요하지 않습니다.
아합 왕이 부인 이세벨의 영향을 받아 이스라엘을 우상을 섬기는 나라로 전락시켰습니다. 이때 엘리야는 아합에게 바알의 선지자 450인과 아세라의 선지자 400인을 갈멜산에 모아달라고 제안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누가 참 신인지 보여주기 원합니다. 불로 응답하는 신이 참신이라며 바알의 선지자들과 내기를 합니다. 먼저 바알 선지자들이 송아지를 가져다가 잡고 아침부터 낮까지 바알의 이름을 불러 보지만 아무 응답이 없습니다. 정오가 되자 엘리야가 그들을 조롱합니다. 큰 소리로 불러봐. 그가 묵상 중인가, 외출 중인가, 길을 가고 있는가 혹은 잠이 들어서 깨워야 할 것인가 하며 약을 올립니다. 그들이 더욱 큰 소리로 부르며 칼과 창으로 그들의 몸을 상해보지만 아무 일도 생기지 않습니다.
이어서 엘리야가 기도하니 하늘에서 불이 내려 제단과 그 주위에 있는 것들을 살라버립니다. 그 장면을 보면서 백성들은 일제히 엎드려 ‘여호와는 하나님이시라’고 외칩니다. 이에 엘리야가 바알의 선지자들을 기손 시내에 끌고 가 다 죽입니다. 엘리야는 내친 김에 빗속을 뚫고 왕궁으로 달려갑니다.
그런데 바알의 선교사인 이세벨이 이를 갈며 기다리고 있습니다. 내일 이맘 때 네가 죽인 바알 선지자들처럼 너를 죽이겠다는 말을 듣고 엘리야는 겁에 질려 광야로 도망가서 로뎀 나무 밑에서 죽기를 구합니다. 그러다가 천사가 공급하는 음식을 먹고 힘을 차린 엘리야는 40일을 걸어 하나님의 산 호렙으로 갑니다. 그곳에서 바람, 지진, 불을 경험합니다. 그것들은 출애굽 시 하나님의 임재의 상징이었습니다. 그러나 그 가운데 하나님이 계시지 않았습니다. 그때 세미한 소리가 들립니다. 사람의 소리를 들었을 때 낙심하고 사명을 잊어버렸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소리를 다시 듣기 시작할 때 사명을 회복하였습니다. 우리 모두는 세상의 소리가 아닌 주님의 소리를 들어야 합니다.
주님의 소리에 담겨진 우리 각자를 향한 사명을 깨달아야 합니다. 낙심한 제자들이 티베리아 바다에서 밤새 그물을 던졌어도 아무런 소득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그물을 배 오른 편에 던지라”(요 21:6)는 주님의 말씀을 듣고 순종하였을 때 큰 물고기를 무려 153마리나 잡았습니다. 복잡하고 바쁜 세상에 살면서 우리의 마음이 메말라지는 것은 주님의 음성을 제대로 듣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주님의 음성을 들으며 주님이 원하시는 사명을 붙들고 나아가야 합니다. 말씀을 가까이 해야 합니다. 주님 앞에 엎드려야 합니다.
믿는 사람들이 그리스도의 십자가만을 자랑할 때 예수님의 흔적을 가질 뿐 아니라 다른 사람에게
2) 예수님의 흔적을 남깁니다
그리스도는 우리의 죄악을 위하여 가시관에 이마를 찔리시고, 못으로 양손과 양발을 찔리셨으며, 창으로 허리를 찔리셨습니다. 그분은 우리를 위하여 고통과 수치, 모욕을 당하셨습니다. 그러나 불평하거나 대적하지 않으셨습니다. 하나님의 뜻에 전적으로 순종하여 십자가에 달리심으로 예수님을 믿는 수많은 성도들에게 흔적을 남겨주었습니다. 예수님을 본받아 빚진 자의 심정으로 그의 삶 전체를 하나님께 드린 바울도 예수님의 흔적을 가졌을 뿐 아니라 복음 전파를 통하여 다른 사람들에게도 흔적을 남겼습니다. 바울이 가는 곳마다 복음을 전하였고 교회가 세워졌습니다. 그가 쓴 글은 성경이 되었습니다.
이 시간 예수님의 흔적을 사람들의 마음에 깊이 남겨준 한 사람을 소개합니다. 20세기의 순교자로 알려진 짐 엘리엇은 Wheaton College를 졸업한 후, 에콰도르에 있는 아우카(Auca) 족에게 복음을 전하기 위하여 함께 선교할 동료들을 모았습니다. 비행기를 이용하여 선교방송을 하고 선물꾸러미를 투하하며 그들과의 접촉을 시도한 엘리엇과 동료 4명은 1956년 1월 8일, 지금부터 정확히 60년 전, 그들이 살고 있던 지역에 착륙했다가 바로 그날 칼과 창으로 무참하게 죽임을 당했습니다. 그들은 허리에 권총을 차고 있었지만 어느 누구도 그것을 사용하지 않았습니다. 복음 전파에 방해가 될 것을 염려하였기 때문입니다. 그들이 졸지에 죽었다는 충격적인 소식이 온 세계에 알려졌습니다. 슬픔으로 가득 찬 부인 엘리자벳에게 한 기자가 묻습니다. 28살의 전도가 유망한 젊은이가 인디언들이 사는 오지에 갔다가 복음의 열매를 채 거두기도 전에 죽었으니 인생을 낭비한 것 아닙니까? 이에 그녀가 항변합니다. 낭비라니요. 저의 남편은 바로 이때를 위하여 기도해왔다고 하면서 그가 쓴 기도문을 보여줍니다. ‘하나님! 쓸모없는 장작과 같은 나는 하나님을 위하여 소멸되기 원합니다. 나는 하나님의 것입니다. 나는 오래 살기보다 의미 있는 삶을 살고 싶습니다. 아무것도 가지고 갈 수 없는 인생인데 세상의 것을 붙잡으려다가 영원한 것을 놓치지 않기 원합니다. 주의 뜻을 이루는 일에 제 삶이 쓰임받기 원합니다. 주여, 나를 불태워 주옵소서.’ 인디언 한 사람에게도 복음을 전하지 못하고 죽었기에 아무런 열매가 없는 것 같고 실패한 선교 같았지만 그의 행적은 많은 사람들의 마음에 선교에 대한 뜨거운 불을 지펴놓았습니다.
엘리자벳은 남편이 순교한 지 2년이 지난 1958년 가을에 외동딸 밸러리(Valerie)와 함께 아우카 부족을 찾아갔습니다. 그런데 아우카 족은 남자는 죽이지만, 여자는 죽이지 않는다는 전통이 있었습니다. 엘리자벳이 그곳에서 열심히 사역한 후 안식년이 되어 돌아간다고 하자, 추장이 잔치를 베풀면서 그녀가 누구인지 물었습니다. 그러자 엘리자벳은 “5년 전에 당신들이 죽인 남자가 제 남편입니다. 하나님의 사랑 때문에 저도 여기까지 오게 되었습니다.” 그 이야기를 들은 아우카족은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영접했습니다. 이어서 엘리엇과 함께 죽은 선교사들의 가족들이 와서 그 부족에게 그리스도의 사랑을 전했습니다. 그로부터 약 10여 년 후, 선교사들의 가슴에 창과 화살을 꽂았던 '키모'라는 사람이 아우카족 최초의 목사가 되었고, 순교한 선교사들의 자녀 중 2명은 그들의 아버지가 순교의 피를 흘린 팜 비치 강가에서 '키모' 목사에게 세례를 받았습니다. 세상에서 가장 큰 고통 중 하나는 사랑하는 사람을 잃는 고통입니다. 하지만 사랑하는 남편을 잃어야했던 엘리자벳은 남편의 죽음을 헛되이 하지 않으실 하나님의 비전을 보았습니다. 그 비전 때문에 그들을 용서하고 사랑할 수 있었습니다. 그 고통과 분노를 주님의 용서와 사랑으로 바꾼 엘리자벳과 동역자들은 세상을 바꾸었습니다.
믿는 것은 하나님의 부르심에 대한 순종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여 하나님의 일을 해야만 합니다. 물론 언제나 성공을 기대할 수만은 없습니다. 하나님의 일을 하다가 실패할 수도 있습니다. 실패하면 기다렸다는 듯이 그럴 줄 알았다고 비난하거나 빈정대는 사람들이 있게 마련입니다. 그래도 하나님만 알아주시면 된다는 자세를 가져야 합니다. 그 일이 크든 작든 상관이 없이 주님께 충성해야 합니다. 목소리만 크고 생색만 내는 것이 아니라 남이 알아주든 알아주지 않든 이름 없이 빛도 없이 충성해야 합니다. 이런 분들이 우리 교회에 많아져야 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작년에 우리가 사랑하는 형제자매 몇 분이 우리 곁을 예고 없이 떠났습니다. 하나님이 부르시면 나이에 상관없이 가야 합니다. 그렇다면 누구는 이랬느니 왜 저렇게 했느니 시시콜콜한 것을 따지며 시간을 낭비할 것이 아니라 우리 각자가 주님 앞에 설 준비를 항상 해야 합니다. 이제는 우리가 원하는 인생이 아닌 주님이 원하는 인생을 살아야 합니다. 그 삶이 주님이 함께 하는 삶이요, 성령의 능력이 나타나는 삶이요, 열매가 풍성하게 맺히는 삶입니다. 2000년 전 제자들과 함께 하셨던 그 예수님이 오늘도 우리들과 함께 하시고 우리를 통하여 일하시고 영광받기 원하십니다. “여호와의 눈은 온 땅을 두루 감찰하사 전심으로 자기에게 향하는 자를 위하여 능력을 베푸시나니”(대하 16:9) 오늘날도 온 땅을 두루 살피시며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자들을 찾으십니다. 예수님을 따르는 신앙의 경주는 일시적이거나 즉흥적이 아니라 지속적이어야 합니다. 사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은혜를 생각해보면, 우리가 아무리 많은 것을 드린다고 해도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것 이상을 드릴 수는 없습니다. 우리가 가진 모든 것이 하나님의 것이요 우리는 하나님의 것을 맡아 잘 관리해야 하는 청지기입니다. 재물 뿐 아니라 시간과 달란트도 잘 관리하고 주님을 위하여 사용해야 합니다. 믿음의 형제자매들과 팀웍을 이루며 함께 나아가야 합니다. 주님이 주신 사명감에 불타는 자들은 이 세상의 것들에 의하여 평가되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주님의 뜻대로 순종하며 주의 일에 힘쓰는 자들이 될 때 예수님의 흔적이 우리에게 나타납니다. 우리의 삶과 사역을 통하여 예수님의 흔적을 남기게 됩니다.
2016년 새해가 밝았습니다. 지금은 결단의 새아침입니다. 금년에 어떠한 삶을 살려고 결단을 하십니까? 이제부터 우리를 위하여 새 일을 행하시는 하나님만을 의지하며, 하나님의 말씀대로 순종하면서 “내 몸에 예수의 흔적을 가졌노라” 담대하게 말할 뿐 아니라 예수님의 흔적을 남기고, 세상에 거룩한 영향력을 끼치며 주님을 감격시키는 성도들, 주님의 교회를 함께 지어가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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