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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약 --------------------/갈라디아서

갈 6장 17-18절(예수의 흔적) - 조성노

by Preacher 2023. 5. 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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갈6장 17-18

예수의 흔적

조성노 목사 20140309

푸른교회 [분당 불정로] http://thegreen.or.kr/

 

[17] 이 후로는 누구든지 나를 괴롭게 하지 말라 내가 내 몸에 예수의 흔적을 지니고 있노라

[18] 형제들아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가 너희 심령에 있을지어다 아멘

 

17절 하반절을 다시 봅니다. “내가 내 몸에 예수의 흔적을 지니고 있노라.” 바울이 자기 몸에 지니고 있다는 예수의 흔적이란 말은 헬라어로 <스티그마>입니다. 스티그마는 쇠인장을 불에 달궈 말이나 소 엉덩이에 찍던 화인입니다. 스티커가 스티그마에서 온 말입니다. 고대 희랍이나 로마 문화권에서는 짐승이나 노예, 전쟁포로, 신전의 물건을 훔치는 파렴치범에게 이마나 어깨에 화인을 찍었습니다.

 

17세기 미국에서 청교도적 규범이 강하게 지배할 때 간통을 하면 주홍글씨를 가슴에 달고 평생 살게 했습니다. 이게 소설 <주홍글씨>의 내용입니다. 여주인공이 젊고 유능한 목사를 사랑해 아기를 낳습니다. 결국 평생 주홍글씨를 달고 삽니다. 이를테면 이것이 바로 스티그마입니다.

 

그러면 바울이 고백한 예수의 흔적은 구체적으로 무엇을 말하는 것일까요? 어떤 주석가는 바울이 예수라고 새긴 쇠인장으로 자기 몸 어디엔가 실제 낙인을 찍었을 것이라고 합니다. 아닌 게 아니라 중세 수도사들은 이 본문을 그렇게 해석해 정말로 쇠인장을 불에 달궈 자기 몸을 지졌습니다.

 

요즘도 신문에 가끔 보면 스티그마 현상(효과)이란 말이 나옵니다. 한번 낙인이 찍히면 끝까지 거기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현상을 가리킵니다. 한번 전과가 기록되면 아무리 개과천선해도 사람이 안 믿어줍니다. 평생 전과자란 주홍글씨를 달고 삽니다. 이것이 바울이 말한 예수의 흔적, 스티그마입니다.

 

바울이 왜 이런 용어를 썼을까요? 우리에게 전달하고자 하는 메시지가 무엇일까요? 우선 스티그마는 소유를 뜻하는 낙인입니다. 소나 말 같은 짐승의 소유주가 누구인가를 알리는 표지였습니다. 그러므로 바울의 예수의 흔적은 나야말로 예수의 소유라는 뜻입니다. 화가나 서예가가 작품을 마치면 거기에 낙관을 합니다. 그 낙관을 보고 작가를 압니다.

 

요한계시록에 보면 짐승의 숫자 666이 나옵니다. 마귀가 자기 백성의 이마에 666 스티그마를 찍는 겁니다. 왜 666입니까? 마귀도 하나님처럼 삼위일체여서 그렇습니다. 사탄, 마귀, 적그리스도입니다. 하나님 백성의 이마에는 777이 찍힙니다. 왜 777입니까? 하나님은 삼위일체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성부, 성자, 성령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이마에 666 아니면 777이 찍혀 있습니다. 우리 눈에만 안 보일 뿐입니다. 이마에 777이 찍힌 사람은 하나님의 백성이요, 666은 마귀의 소유들입니다. 조직원이 그 몸에 어떤 문신을 하고 있느냐에 따라 그 소속을 알 수 있습니다. 스티그마는 누구의 소유냐, 어디에 속하느냐를 결정합니다.

 

그러므로 바울이 내가 내 몸에 예수의 흔적을 가졌다는 것은 내 이마에 777이라는 싸인을 가졌고, 나야말로 하나님 백성임을 고백한 것입니다. 바울뿐 아니라 우리 이마에도 777이란 스티그마가 찍혀있습니다. 우리 눈에는 안 보이나 하나님은 보고 계십니다. 주님은 불꽃같은 눈으로 보시기에 우리 이마에 무엇이 찍혀 있는지를 다 아십니다. 바울처럼 담대하게 내 이마에 하나님의 스티그마를 가졌음을 깊이 감사하시기를 바랍니다.

 

다음으로 바울의 스티그마는 주님을 향한 고난의 흔적을 가졌다는 의미입니다. 남은 고난을 자기 육체에 채웠다는 뜻입니다. 바울의 스티그마는 십자가의 흔적과 같습니다. 프랜시스의 전기를 보면, 그가 여러 날 고행하고 금식하며 기도하는데, 어느 날 전율이 오면서 이루 말할 수 없는 고통과 함께 양손과 양발에 성흔이 나타났다고 합니다. 그 고난의 체험을 했다는 겁니다. 이게 성흔입니다. 프랜시스는 이 체험 이후 더 깊이 주님의 십자가를 이해할 수 있었다고 합니다.

 

마태복음 7장 22절을 보면, 최후심판에 관한 말씀이 나옵니다. “그 날에 많은 사람이 나더러 이르되 주여 주여 우리가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 하며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 내며 주의 이름으로 많은 권능을 행하지 아니하였나이까 하리니.” 직업 종교인이 나옵니다. 한 일이 놀랍습니다. 이 말은 절대 과장이나 거짓이 아닐 것입니다. 어느 면전이라고 거짓말을 할 수 있겠습니까? 그럼에도 주님의 반응은 뜻밖입니다.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

 

이게 무슨 말씀입니까? 큰 교회 목회하면서 주님의 이름으로 놀라운 기적을 행했다고 하는데, 주님은 내가 너희를 모른다고 하십니다. 왜 주님이 주님의 이름으로 기적을 행했다고 하는데, 불법이라고 하십니까? 그들은 다 그 일을 통해 호강하고 영광만 누렸지, 누구도 자기를 부인하며 제 십자가를 지고 가다가 온 사람은 없다는 겁니다. 그들의 몸 어디에도 주님의 흔적이 없었다는 겁니다. 그래서 틀렸고 불법이라는 겁니다.

 

여러분, 자기 몸에 십자가의 흔적이 없으면 불법입니다. 주님의 이름으로 무슨 일을 했든 예수의 흔적이 없으면 다 불법입니다. 예수의 흔적은 고난과 십자가의 흔적인데, 그들은 예수의 이름으로 호의호식만 했지 십자가의 흔적이 없었습니다. 반면에 바울은 고난을 많이 당했습니다. 수도 없이 매 맞고, 감옥에 갇히고, 돌에 맞아 기절하고, 항해하다 여러 차례 파선 당하고, 이방인에게 온갖 박해를 당했습니다.

 

그러므로 바울의 몸엔 성한 데가 없었을 겁니다. 이게 바로 진정한 예수의 흔적입니다. 아무리 많은 일을 했다고 해도 고난의 흔적이 없으면 다 불법입니다. 마지막 심판 때 왜 나를 모른다고 하냐며 주님께 대들지 마시고, 내 몸에 십자가의 흔적을 지니고 살아야 합니다.

 

스필버그의 출세작 <죠스>를 저는 감명 깊게 봤습니다. 죠스를 잡기 위해 해양 경비대장, 해양학자, 선장이 배를 타고 바다로 나갑니다. 상어를 찾아 항해하다 무료하니까 술을 마시며 상어잡이 무용담을 과시하며 자랑합니다. 그러다가 상어에게 입은 상처를 드러내며 자랑합니다. 해양 경비대장은 뭍에서 근무했기에 상어와 맞닥뜨린 적이 없습니다. 그가 보여줄 상처가 없어 당황스러워하던 모습이 기억납니다. 이것은 훗날 우리가 주님 앞에 섰을 때 벌어질 상황일 것입니다.

 

고난의 흔적은 주님 앞에서는 훈장인데, 그것 밖에 자랑할 게 없는데, 그게 없으면 얼마나 당황스러울까요? 아무 어려움 없이 예수 믿는 것은 능사가 아닙니다. 십자가를 사양하며 사는 게 대수가 아닙니다. 어떻게든 내 몸에 예수의 흔적을 가져야 합니다.

 

존 번연의 <천로역정> 마지막 부분에는 천신만고를 겪은 기독교도가 ‘만신창이인 내 몸의 상처를 주님 앞까지 가져가리라’고 합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도 반드시 그래야 합니다. 그때는 우리 몸에 남은 스티그마가 주님 앞에 내보일 수 있는 유일한 자랑거리입니다. 제 십자가를 지고 주님 뒤를 좇느라 상처투성이가 되었습니다.

 

기억하십시오. 내 몸에 청룡이나 호랑이 문신은 없어도 주님의 스티그마는 꼭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 불법을 행하는 자들은 다 내게서 떠나라는 불호령을 듣지 않습니다. 주님의 남은 고난을 육체에 채우시고, 확실히 그리스도의 흔적을 체험하시길 기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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