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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약 --------------------/고린도전서

고전 15장 1~10절, 54~58절(고린도에 전해진 복음 - 부활의 소망이신 예수) - 이준원

by Preacher 2023. 11.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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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전15장 1~10, 54~58

고린도에 전해진 복음-부활의 소망이신 예수

이준원 목사 2018.12.26.

콜럼버스한인장로교회 https://www.kpccoh.org

 

1. 고린도는 어떤 도시인가

 

3년 전 안식월 때 고린도를 방문할 기회가 있었습니다. 가서 보니까 유적이 많이 남아 있었고, 2천 년 전 그곳이 얼마나 크고 활발한 도시였는가를 짐작하게 해주었습니다. 고린도에서 제가 찍어온 사진들 몇 장을 보십시오. 이렇게 집들도 있고 터도 넓은 것을 보면, 당시 고린도가 아주 큰 도시였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또 도시 중심에 이렇게 큰 대로가 있습니다. 그 주변으로 상점들도 있고, 유대인 회당도 있고, 공관들도 있었습니다. 또 거기에는 이렇게 큰 산도 있습니다. 그리고 시장도 컸던 것을 보면, 당시 상업이 아주 활발했던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 큰 산을 보면서, 사도 바울이 고린도에 머물면서 저 똑같은 산을 보았을 텐데, 그 산을 보며 무엇을 느꼈을까 생각해보았습니다. 이렇게 큰 도시였던 고린도에 사는 사람들은 죄로 가득했습니다. 그런 모습을 안타까워하며 사역했던 바울의 모습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조금 전 산에서 뒤를 돌면 바다가 보입니다. 거기에 이렇게 큰 신전이 있는데 바로 제우스 신전입니다. 당시 그리스 신화, 로마 신화에 나오는 신들의 신전이 많았습니다. 그리고 사도행전 18장에 보면 바울이 2차 전도여행 때 겐그레아에서 서원하며 머리를 깎고 거기서 배를 타고 에베소로 떠납니다. 지금은 이렇게 돌 밖에 안 남아 있습니다. 바로 여기서 사도 바울이 머리를 깎고 서원한 다음 배를 타고 간 것을 생각하며 큰 감동을 받았습니다. 지금은 이렇게 유적 터만 남아 있지만, 1세기 당시 고린도는 글로벌 비즈니스의 센터였고, 상업이 번창했으며, 무역이 활발했습니다. 그곳은 좁은 해협에 위치했으면서도 동과 서를 연결하는 다리 역할을 감당했습니다. 바다가 바로 옆에 있었기 때문에 세상의 모든 사치품들이 고린도를 거쳐 갔고, 따라서 세상 모든 허영심에 들뜬 상인들을 모으는 요충 도시였습니다.

 

아라비아의 향유, 페니키아의 대추야자 열매, 리비아의 상아, 바벨론의 주단, 길리기아의 산양털, 루가오니아의 모직물 등이 활발히 거래되는 곳이 고린도였습니다. 또한 고린도에서는 올림픽에 버금가는 스포츠 축제가 정기적으로 개최되었습니다. 사진에서 넓은 터도 있었는데 그런 곳에서 축제가 벌어졌으며, 당시 세상의 거대한 부가 이 도시에 집중되었고 인구는 급증했습니다.

 

그러나 그만큼 죄와 부도덕 또한 넘쳐났습니다. 술, 도박, 성적방종, 동성애, 마약이 넘쳐났고, 터키 쪽의 부르기아를 통한 인신매매가 성행했으며, 언덕에 사원을 빙자하여 세워진 공창에서 공개적인 성매매가 버젓이 행해지던 곳이 고린도였습니다. 그런데도 고린도의 시민들은 그곳을 지상 천국으로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시민들은 이 천국 같은 도시에서 장수를 누리기 위해 건강에 좋다는 모든 약품들을 세계 곳곳에서 수입하여 높은 가격에 거래했습니다.

 

그러나 그렇게 스스로 고린도 시민으로서의 삶에 만족한다고 하는 그들에게도 불편한 진실이 있었는데, 그들 사이에 죄책감이 날로 증가한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육체의 죽음을 피할 수 없다는 사실이었습니다. 고린도는 마치 지금의 뉴욕, 파리, 상하이, 도쿄, 서울 등과 비교될 만큼 화려한 도시였습니다. 그런데 화려한 동시에 뒤로는 온갖 더러운 것들이 가득한 도시였던 것입니다. 뉴욕이나 서울 같은 곳도 보면, 겉으로는 거리가 화려하고 엄청난 빌딩들이 많지만, 뒤로 돌아가 보면 아주 악하고 더러운 것들이 많습니다. 고린도도 그런 곳들과 비슷했습니다.

 

그러한 고린도의 라이프 스타일을 주목한 이웃 도시 사람들은 ‘고린도 사람처럼 행동한다’라는 뜻의 ‘코린티아제스타이(corinthiazestai)’라는 말을 만들어 퍼트렸습니다. 그것은 그 말의 뜻은 ‘방탕을 일상으로 삼는다’는 의미입니다. 그러니까 고린도 사람들이 얼마나 방탕하게 살았으면 그런 단어가 만들어졌겠습니까?

 

그러던 어느 날 이 도시에 바울이라는 사람이 와서 복음을 전했고, 그가 전한 복음은 이 도시 전체를 흔드는 거대한 충격파로 다가왔습니다. 바울이 2차 선교여행 때 아시아에서만 다니려고 했을 때 예수의 영이 막으셔서 유럽으로 들어오게 됩니다. 그래서 빌립보로 들어와, 데살로니가와 베뢰아를 거쳐 아테네까지 갔다가 서쪽인 고린도에 온 것입니다. 바울은 그의 복음 전파 사역에서 에베소 다음으로 긴 1년 반을 이곳에 머물며 복음을 전했고 제자들을 키웠습니다. 바울을 통해 이 향락의 도시 고린도에 전해진 복음의 핵심이 무엇이었습니까?

 

2. 고린도에 전해진 복음

 

1) 예수님이 죄에서 우리를 구원하신다

 

바울이 살았던 1세기나 지금 우리가 사는 21세기나, 사람들이 죄에 빠지는 주요 원인은 똑같습니다. 그것은 죄가 가져다주는 쾌락 때문입니다. 여러분, 만약 내가 죄를 지을 때마다 고통이 온다면 죄를 안 짓게 될 것입니다. 내가 남을 욕할 때마다 입이 찢어지도록 아프다면 욕을 하겠습니까? 반면에 다른 사람을 칭찬하고 하나님을 찬양할 때마다 입이 상쾌해지고 정신이 맑아지면 그렇게 할 텐데 그렇지가 않습니다. 사실 기도하고 찬양하는 것은 참 쉽지 않은데, 남을 욕하고 거짓말하는 것은 아주 즐겁습니다. 그러니까 죄가 가져다주는 쾌락이 있는 것입니다. 성경도 죄가 동반하는 쾌락을 인정합니다. 모세에 대해서 이렇게 말씀합니다.

 

“오히려 그는 잠시 죄의 향락을 누리는 것보다 하나님의 백성과 함께 학대받는 길을 택하였습니다.” (히 11:25, 새)

 

여기 “죄의 향락”(개역개정에는 “죄악의 낙”)이란 말이 있는데, 그 앞에 붙어 있는 단어를 주목해야 합니다. 그것은 ‘잠시'라는 단어입니다. 그러니까 죄에는 분명히 쾌락이 있는데 잠시 있다는 겁니다. 그 잠시의 쾌락이 지나가면, 그 후에 오는 죄책감과 괴로움은 너무 길다는 것입니다. 이런 죄와 죄책감의 형벌에서 우리를 구원하고자 예수께서 오셨다는 것, 그것이 바로 복음의 본질이기 때문에 이 복음을 알게 하기 위해 고린도에 와서 복음을 전한 것이라고 바울은 말합니다.

 

“형제들아 내가 너희에게 전한 복음을 너희에게 알게 하노니 이는 너희가 받은 것이요 또 그 가운데 선 것이라. 너희가 만일 내가 전한 그 말을 굳게 지키고 헛되이 믿지 아니하였으면 그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으리라” (1-2절)

 

그렇습니다. 복음은 예수를 믿음으로 구원을 받는 것입니다. 이 구원은 철저하게 죄로부터의 구원입니다. 괜찮게 사는데 구원받는 게 아니라, 죄 때문에 지옥으로 가고 있는데 구원받는 것입니다. 인간 실존의 근본 문제는 죄의 문제입니다. 죄 문제가 해결되지 않으면 구원은 없습니다. 이 죄 문제의 해결을 위한 하나님의 처방,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의 십자가 사건입니다.

 

“내가 받은 것을 먼저 너희에게 전하였노니 이는 성경대로 그리스도께서 우리 죄를 위하여 죽으시고” (3절)

 

고린도에서 얼마 멀지 않은 아테네(지금은 차로 약 한 시간 반 정도 걸리는 거리)는 일찍부터 철학과 사상의 도시로 명성을 떨치고 고린도에도 영향을 끼치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문제는, 어떠한 철학이나 사상도 죄 문제의 해답을 내놓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아무리 멋진 철학을 내놓아도 죄 문제는 해결이 안 됩니다.

 

당시 철학의 양대 학파로 에피큐리안과 스토아 학파가 있었습니다. 쾌락주의를 주장한 에피큐리안 철학자들은 죄를 생각하지 말고 인생을 즐기라고 말했습니다. 그러나 죄 이후에 동반하는 죄책감 때문에 죄의 쾌락이 아주 쓴 고통의 열매를 가져다줄 뿐이라는 것이 문제입니다. 반면 스토아 철학자들은 금욕주의자들이었습니다. 그들은 되도록 죄를 짓지 말고 근신하며 금욕하라고 말하지만, 그런 것이 쉽지 않고 또 아무리 근신해도 어떻게 죄를 안 짓습니까? 그런데 성경은 뭐라고 알려줍니까?

 

“율법을 따라 거의 모든 물건이 피로써 정결하게 되나니 피흘림이 없은즉 사함이 없느니라” (히 9:22)

 

죄 문제를 해결하려면 피 흘림이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성경은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가 구약에 예언된 그대로 속죄의 어린양으로 이 땅에 오셔서 우리 죄를 짊어지고 십자가에서 보혈을 흘리며 죽으셨다고 합니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의 피 홀려 죽으심이 우리의 복음이 된 것입니다. 바울은 고린도 교회에게 보내는 이 편지를 3차 선교여행 때 에베소에 있으면서 썼습니다. 그런데 그는 에베소에서 전한 복음을 이렇게 요약합니다.

 

“우리는 이 아들 안에서 하나님의 풍성한 은혜를 따라 그의 피로 구속 곧 죄 용서를 받게 되었습니다.” (엡 1:7, 새)

 

우리가 구원받은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인데, ‘그(예수님)의 피’로 구원을 받고 죄 용서를 받았다고 합니다. 이것이 에베소에 전해진 복음의 핵심인데, 이 메시지는 고린도에도 전해진 복음이었고, 지금도 우리가 다시 들어야 할 복음입니다.

 

2) 우리는 죽음 뒤에도 부활의 소망이 있다

 

쾌락에 빠져 있던 고린도 사람들도 명백하게 부정할 수 없는 인생의 진리가 있었습니다. 그것은 ‘언젠가는 나도 죽는다’는 것이었습니다. 아니 이 부정할 수 없는 진리 때문에 그들은 살아 있는 동안 더더욱 쾌락을 추구할 수밖에 없었는지도 모릅니다.

 

어떤 유명한 코미디언이 이런 말을 했다고 합니다. “인생에서 확실한 것은 두 가지다. 첫째, 세금을 내야 한다. 둘째, 죽어야 한다.” 정말 맞는 말입니다. 세금과 죽음을 피할 수가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교묘한 방법으로 세금을 제대로 안 내고 빠져나가는 사람들이 적지 않습니다. 그러나 혹시 세금의 폭풍은 살짝 피해 갈 수 있을지 몰라도, 그 어느 누구도 피할 수 없는 것이 바로 죽음입니다. 우리 인간의 사망률은 누누이 말씀드리지만 100%입니다. 모두가 죽습니다.

 

어떤 교회에서 어린이 주일학교 선생님이 아이들에게 질문했습니다. “어린이 여러분, 천국에 가기 위해서 필요한 것은 무엇일까요?” 선생님이 기대하는 대답은 ‘예수님을 믿는 거요’라는 대답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때 한 아이가 빨리 손을 들더니 대답했습니다. “먼저 죽어야 해요.” 정말 사실입니다. 물론 우리가 살아 있을 때 예수님이 오시면 그대로 가지만, 그렇지 않으면 죽은 다음에 갑니다. 죽음을 통과하지 않고는 아무도 천국에 갈 수 없습니다. 고린도 사람들은 대부분 죽음 이후의 내세는 그들의 영혼만 간다고 믿었습니다. 헬라 철학의 이원론의 영향 때문에 그렇게 믿었습니다.

 

그런데 바울은 그렇지 않다고 하며 이렇게 선포합니다. ‘죽음 이후에 몸의 부활이 있고, 이 부활의 몸으로 우리는 영원히 산다. 영으로만 사는 게 아니라 새로운 몸을 입고 산다. 이 부활의 확실한 증거가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이다. 그분은 몸으로 다시 살아나셨고 몸으로 올라가셨다. 그가 그렇게 살아나셨기 때문에 우리도 그렇게 부활할 것이다.’ 특히 예수님의 죽으심으로 우리의 죄 문제가 해결되었고, 그분의 부활로 우리의 영생의 문제가 해결되었다고 말합니다. 그러므로 복음은 예수님의 죽으심만이 아니고 그분의 죽으심과 부활입니다. 죽으시고 부활하신 주님이십니다.

 

“장사 지낸 바 되셨다가 성경대로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나사” (4절)

 

바울은 그렇게 예수님의 부활을 선포한 다음, 5절 이후에서 이 부활의 부정할 수 없는 증거인 증인들을 열거합니다.

 

“게바에게 보이시고 후에 열두 제자에게와, 그 후에 오백여 형제에게 일시에 보이셨나니 그 중에 지금까지 대다수는 살아 있고 어떤 사람은 잠들었으며, 그 후에 야고보에게 보이셨으며 그 후에 모든 사도에게와, 맨 나중에 만삭되지 못하여 난 자 같은 내게도 보이셨느니라” (5-8절)

 

예수님의 수제자인 게바(베드로)와 열두 제자가 부활하신 주님을 만났습니다(5). 그 후 500명이 넘는 “형제” 즉 ‘믿는 사람들’에게 나타나셨습니다. 일시에 500명이 넘는 사람들이 주님을 뵈었는데, 그들 중 더러는 세상을 떠났지만 대다수는 이 고린도전서가 쓰이던 당시까지 살아 있었다는 것입니다(6). 그 다음 예수님은 육신의 동생이자 예루살렘 교회의 최고지도자가 된 야고보에게 나타나셨고 사도에게도 나타나셨습니다(7).

 

심지어 맨 나중에는 달이 차지 못하여 난 자와 같은 바울 자신에게도 예수님이 나타나셨다고 선포합니다(8). 예수 믿는 자들을 잡아오겠다고 예루살렘에서 다메섹으로 가던 길에서 부활하신 주님이 바울에게 찾아오셨고, 놀랍게도 그토록 교회를 잔멸하던 박해자 바울을 당신의 제자로 삼아주셨습니다.

 

바울을 만나주신 부활의 주님께서는 여러분과 저도 만나주셨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지금 여기에서 그분을 믿고 그분을 예배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렇게 예배한다는 것이 바로 부활의 증거이기도 합니다. 그런 사람은 바울처럼 고백할 수밖에 없습니다.

 

“나는 사도 중에 가장 작은 자라 나는 하나님의 교회를 박해하였으므로 사도라 칭함 받기를 감당하지 못할 자니라. 그러나 내가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이니 내게 주신 그의 은혜가 헛되지 아니하여 내가 모든 사도보다 더 많이 수고하였으나 내가 한 것이 아니요 오직 나와 함께 하신 하나님의 은혜로라” (9-10절)

 

종교개혁자 마르틴 루터(Martin Luther)는, 주님은 해마다 봄이 오면 인류에게 부활의 진리를 펼쳐 보이신다고 했습니다. 겨울의 죽음을 이겨내고 다시 돋아나는 잎사귀마다 부활의 약속을 새겨놓으셨다고 루터는 말했습니다. 이처럼 복음은 죽음 건너편에 약속된 부활의 소망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죽음을 전혀 두려워할 필요가 없습니다.

 

3) 우리에게는 오늘 이곳의 삶에서 승리의 약속이 주어져 있다

 

부활 신앙, 내세 신앙은 결코 미래에 대한 것만이 아닙니다. 내가 어떤 미래를 기대하느냐에 따라 오늘 나의 삶의 모습이 달라지기 때문입니다. 부활과 영원한 생명을 믿기 때문에 오늘 이곳에서의 삶이 달라질 수가 있는 것입니다.

 

1970~80년대 중동 건설 붐이 불었을 때 많은 한국 회사들이 중동에 진출해서 수많은 일꾼들이 고된 노동을 하며 돈을 벌어서 한국에 있는 집으로 송금을 했습니다. 쿠웨이트에서 일하던 한 근로자에게 어느 신문 기자가 인터뷰를 했을 때 “나는 1년간 근무하면서 시내엔 딱 세 번 나가봤다. 쉬는 날 시내에 나가서 돈을 쓰느니 부족한 잠을 보충한다.”라고 말했다고 합니다.

 

중동의 근로환경이 아주 가혹했습니다. 7, 8월에는 기온이 섭씨 40~60도까지 올라가서 온몸을 가리고 작업해야 했습니다. 수돗물엔 석회분이 많아서 마시면 배탈이 나고 담석증도 걸리게 되었습니다. 오전 6시부터 오후 5시까지 식사시간을 빼고 하루 10시간, 월 2회 휴무에 무려 280시간이나 일을 했습니다. 그런 환경에도 불구하고 한국에서 나간 근로자들은 한 푼이라도 더 벌기 위해서 시간 외 근무를 밥 먹듯 했다는 것입니다. 금녀, 금주에다 오락거리도 하나 없는 중동의 건설 현장은 유배지와 같았습니다. 모래 바람이 불어서 밥에 모래가 들어가 모래 밥을 씹으면서, 일명 ‘싸대기’라고 부르는 과일을 발효시켜 만든 밀주 한 잔으로 타국살이의 외로움을 달랬다고 합니다.

 

당시 오일 달러는 이처럼 근로자들의 피땀이 담긴 ‘눈물 달러’였습니다. 먹을 것 안 먹고, 쓸 것 안 쓰고, 기숙사 생활을 하면서 최소한으로 살아 그렇게 번 돈을 모아서 집으로 다 보냈습니다. 그러면 그 돈을 아내가 받아서 저축하고 그렇게 모인 돈을 가지고 집을 사서 재산을 불려 나갔던 것이 한국의 1970년대~80년대 이야기입니다.

 

그런데 그와 동시에 그 당시 한국에서 유행처럼 번졌던 것이 바로 캬바레였습니다. 캬바레와 함께 했던 유행어는 “싸모니~임!”이었습니다. 남편은 중동에서 뼈 빠지게 일하며 돈을 버는 사이에 아내는 제비족과 춤바람이 나서 캬바레를 다니다가 그 유혹에 넘어가 가산을 탕진하는 경우가 꽤 많았습니다. 그 남편은 그것을 전혀 모르고 있는데 동료가 와서 말합니다. “야, 네 아내가 이상해. 한 번 연락해봐.” 그럴 리가 없다고 강하게 부인은 했지만 마음이 이상해서 갑자기 비행기를 타고 몰래 와 보니까 다 사실입니다. 자기가 그토록 애를 써서 보낸 돈은 다 없어지고, 아내는 바람이 나서 정신을 못 차리고 있는 겁니다.

 

그런 사실을 확인하고 나서 다시 일 때문에 중동으로 돌아온 사람들은 그 삶이 급속도로 무너졌다고 합니다. 어떻게든 안 쓰고 돈을 열심히 벌어서 집으로 보내던 사람이, 이제는 다 필요 없다며 술 마시고 도박하는 데에 빠졌습니다. 사우디아라비아에서는 술을 못 마시니까 요르단까지 밤새 운전하고 가서 술을 마셨다고 합니다.

 

왜 그렇게 무너졌습니까? 돌아갈 집이 없어졌기 때문입니다. 그 동안은 돌아갈 집이 있기 때문에 열심히 일했는데 이제는 돌아갈 집이 없어졌습니다. 그러니까 ‘에이, 될 대로 되라’ 하게 되는 겁니다. 이처럼 사람에게 돌아갈 곳이 있다는 것은 엄청난 일입니다. 안 믿는 사람들을 보십시오. 가족들 때문에 어느 정도 열심히 살고 도덕적으로 사는 사람도 많지만, 위기가 오면 누구나 예외 없이 다 무너지고 아무렇게나 살게 됩니다.

 

왜 그렇게 됩니까? 죽으면 다 끝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런 식으로 죽으면 끝이라고 생각하는 사람과, ‘죽으면 내가 갈 곳이 있고, 나를 기다려주시는 하나님 아버지가 계시다. 내가 그 앞으로 가 그분의 나라에서 그분과 함께 영원히 산다.’ 하는 소망을 가진 사람 사이에는 엄청난 차이가 있습니다. 내가 갈 곳이 있다고 믿는 사람은 지금 이곳에서 아무렇게나 살지 못합니다. 갈 곳이 없는 사람은 아무렇게나 삽니다. 그러나 갈 곳이 있는 사람은 아무렇게나 살지 못합니다. 앞으로 그곳에 갈 준비를 하며 살아야 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미국에 올 때도 한국에서 미국에 갈 준비를 하고 오지 않습니까? 준비도 안 하고 매일 놀면서 아무렇게나 살다가 오면, 그 경우는 오더라도 굉장히 고생합니다. 미리 다 알아보고 옵니다. 우리가 앞으로 갈 곳에 대해 여기서 아무렇게나 살다가 가면 안 되지 않습니까? 앞으로 갈 곳을 미리 여기서 준비하는 겁니다.

 

우리가 정말 죽음 이후의 부활과 천국을 믿는다면 ,우리는 오늘의 인생에서 초연한 자세로 당황하지 않으며, 비겁하지 않고 당당하게 살 수 있지 않겠습니까? 우리는 천국에 갈 사람들이며 바로 그 소망 때문에 지금 이 땅에서의 인생을 소중히 여기면서 하나님이 주신 사명을 다하기 위해 최선을 다해 살 수 있는 것입니다.

 

바로 그런 마음을 바울이 여기서 이렇게 표현했습니다. 고린도에서 예수 믿고 크리스천이 되었다고 하지만 아직 옛날 생각을 버리지 못하고 살던 고린도 교회 성도들에게 이렇게 선포하는 것입니다.

 

“이 썩을 것이 썩지 아니함을 입고 이 죽을 것이 죽지 아니함을 입을 때에는 사망을 삼키고 이기리라고 기록된 말씀이 이루어지리라. 사망아 너의 승리가 어디 있느냐 사망아 네가 쏘는 것이 어디 있느냐. 사망이 쏘는 것은 죄요 죄의 권능은 율법이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승리를 주시는 하나님께 감사하노니” (54-57절)

 

이렇게 죽음을 이기신 주님의 부활 사건은 바로 오늘 우리 삶의 현장에서 승리로 나타나야 합니다. 그래서 바울은 고린도전서에서 예수님으로 말미암은 승리를 주시는 하나님께 감사를 드리면서, 고린도 성도들이 고린도의 여러 가지 세속적인 유혹과 염려와 시련의 한복판에서 흔들리지 말라고 권면하며 부활 장인 15장을 끝내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나의 사랑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굳게 서서 흔들리지 말고, 주님의 일을 더욱 많이 하십시오. 여러분이 아는 대로, 여러분의 수고가 주님 안에서 헛되지 않습니다.” (58절, 새)

 

[나가는 말]

 

바로 옆에 있는 인디애나 주의 알렉산드리아(Alexandria, Indiana)에 있는 한 고등학교에서 근무하던 빌(Bill)과 글로리아(Gloria)라는 두 교사가 사랑에 빠졌습니다. 영어 교사였던 빌은 음악을 좋아했고 불어 교사였던 글로리아는 글 쓰는 것을 좋아했습니다. 그들은 마침내 결혼했고 빌은 음악을 만들고 글로리아는 가사를 쓰는 환상적인 커플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이 환상적인 커플의 인생에 혹독한 시련이 찾아왔습니다. 남편인 빌이 단핵구증(mononucleosis)이라는 전염병에 걸려서 몸이 무기력해지고 거기에 시달리면서 모든 일을 포기하게 되었습니다. 아내 글로리아는 셋째 아이를 임신한 몸으로 병든 남편을 돌보아야 했는데, 그때 자기 가족을 둘러싼 억울한 루머까지 퍼져서 마음도 힘들고 의지할 데도 없는 상황이 되었습니다.

 

그러던 중 한 해가 저물어 가고 새해를 맞이하던 시간에 거실에서 말씀을 묵상하던 글로리아에게 살아 계신 하나님의 터치가 임했습니다. 정말 성령님이 임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그녀의 마음속에 있던 두려움이 사라지고 살아 계신 주님의 임재가 평화와 함께 가슴속으로 물 밀 듯 밀려왔습니다. 그때 글로리아는 너무 벅차서 펜을 들어 노래 가사를 만들고 남편에게 가서 소리쳤습니다. “여보, 주님이 말씀을 주셨어요! 이것으로 곡을 만들어 봐요!” 바로 그 순간이 지금까지 세계적으로 불리고 있는 불멸의 찬양곡이 탄생하는 순간이었습니다.

 

살아 계신 주 나의 참된 소망, 걱정 근심 전혀 없네(두려움이 사라지네) 사랑의 주 내 갈 길 인도하니, 내 모든 삶의 기쁨 늘 충만하네 (찬 171장)

 

원문 영어 가사에는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Because He lives, I can face tomorrow;

Because He lives, all fear is gone;

Because I know He holds the future

And life is worth the living, just because He lives

 

주님이 살아 계시기에 나는 내일을 마주할 수 있습니다.

주님이 살아 계시기에 모든 두려움이 사라졌습니다.

주님이 미래를 붙들고 계심을 내가 알기에,

그리고 주님이 살아 계시다는 것만으로도, 인생은 살아갈 가치가 있습니다.

맞습니다. 주님이 살아 계시기에 모든 두려움이 사라지고, 주님이 우리의 미래를 붙들고 계심을 알기 때문에 우리의 인생은 살 만한 가치가 있다는 바로 이 메시지야말로, 바울을 통해 고린도에 전해진 부활의 복음입니다. 부활의 소망이신 예수님의 이 복음을 우리도 날마다 붙들고 최선을 다해 매일의 인생을 살아가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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