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전15장 17
부활과 하나님의 사면
최태선 목사 2003.4.13.
어지니교회 http://cafe.daum.net/eojini/
부활과 하나님의 사면
고전 15:12-17
만약 여러분이 과거에 존재했던 한 사람을 만나서 한 가지 질문을 던질 수 있다면 누구를 만나서 어떤 질문을 던지시겠습니까? 런던 대학의 철학교수 조드는 그리스도인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이 질문에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나는 예수를 만나서 세상에서 가장 중요한 질문 하나를 던지고 싶 다. '당신은 정말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났는가? 그렇지 않았는가?' 라고 말이다."
그렇습니다. 그의 말은 옳았습니다. 이 세상에서 가장 중요한 질문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께서 죽 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여 지금도 살아 계시는가?'라는 질문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의 신앙에 있어 부활은 가장 중심 부분입니다. 그러나 놀랍게도 그리스도인들이 부활에 대해 잘 모를 뿐 아니라, 그저 세상의 다른 철학이나 다른 종교에서의 환생 정도로 생각하는 이들이 많다는 사실입니다.
1991년 모리라는 사람이 부활에 관한 보고서를 작성한 적이 있습니다. 인터뷰한 사람의 85%는 자신들이 그리스도인이라고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 중 34%의 사람들이 왜 부활절을 지 키는지 모르고 있다는 충격적인 보고가 있었습니다. 우리 나라에서 그러한 보고서를 작성해 본다 면 과연 어떤 결과가 나오겠습니까? 아마도 비슷한 결과가 나오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기독교가 도대체 어떤 종교입니까?'라는 질문에 대한 그 어떤 심각한 대답도 바로 여기, 부활에 서 시작되어야 합니다. 그러나 놀랍게도 우리 시대에는 예수님에 대한 소식을 말할 때 종종 이 부활을 망각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잘 아는 락 오페라 'Jesus Christ Superstar' 역시 예수님이 무덤에 묻히는 것으로 끝이 납니다. 안타깝게도 이 오페라는 예수님의 생애 가운데 가장 중요한 부분을 빠뜨리고 있는 것입니다. 그분의 죽음은 끝이 아닙니다. 그분은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 셨습니다.
사도행전에는 13편의 설교가 기록되어 있습니다. 바울의 것이 7편이고, 베드로가 전한 것이 5편, 그리고 스데반 집사가 전한 것이 한 편입니다. 그 설교에는 한 가지 공통점이 있는데 그것은 예 수님께서 살아 계셔서 당신의 생을 변화시킬 수 있다는 사실입니다. 베드로는 오순절에 행한 자신의 설교를 사도행전 2장 32절에서 이렇게 요약하고 있습니다. "하나 님께서 이 예수를 다시 살리셨고 우리는 이 한 설교였습니다. 신약에서 부활은 100번 이상 언급되었고 거의 모든 책이 부활에 대해서 말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기독교입니다. 즉 기독교는 예수님께서 과거에 살았고 죽으셨을 뿐 아니라 사흘만에 즉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셨다는 것에 관한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 나오는 말씀처럼 '그 리스도가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사신 것이 없다면, 너희의 믿음은 헛된 것이다.'라는 바울의 말 은 그야말로 복음의 핵심입니다.
켄터베리의 주교였던 마이클 람제이는 "첫 사도들에게 부활이 없는 복음은 다만 마지막 장이 없 는 복음서와 같으며, 따라서 그것은 복음서가 아니다."라고 말했습니다. 부활로 인해 기독교는 진리의 종교이며 유일한 종교가 됩니다. 우리가 살고 있는 지구상에서 기 독교와 다른 종교의 다른 점이 무엇이냐는 질문을 던지는 사람들이 늘고 있습니다. 대답은 간단 합니다. 세상에서 기독교만이 창시자가 죽음에서 부활한 것을 근거로 하고 있는 종교라는 점입니 다.
어떤 불교도라도 부처님이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다고 주장하지 않습니다. 그가 죽었을 때 그는 아무 것도 남기지 않고 사라졌습니다. 마호메트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는 서기 632년 6월 8일 61 세의 나이로 메디나에서 죽었습니다. 그의 무덤이 있는 그곳에 매년 수많은 모슬렘 순례자들이 다녀갑니다.
그러나 기독교는 예수 그리스도는 죽었지만 다시 살아나셔서 지금도 사람들의 생을 변화시키고 있다고 주장합니다. 부활이 사실이라면 기독교는 스스로 자신의 정당성을 갖고 있는 종교가 됩니 다. 그리고 기독교와 비교할만한 다른 어떤 종교도 없게 됩니다. 왜냐하면 다른 종교의 창시자들 은 모두 죽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기독교가 생겨난 이래 수도 없이 많은 사람들이 부활이 사실이 아니라는 것을 밝혀내기 위해 온갖 방법을 다 동원하였습니다. 그러나 지금까지 부활이 사실이 아니라는 것을 증명해 낸 사람은 아무도 없었습니다. 다만 자신이 믿지 않는 것을 그들의 논리로 설명한 이야기들만이 그 야말로 전설처럼 떠돌 뿐입니다.
약 5십여 년전에 당시 유명한 작가, 프랭크 모리슨이 그리스도의 역사적 부활이 사실이 아님을 증명하기 위해 책을 쓰기 시작했습니다. 그는 부활의 증거가 불완전한 토대에 의존하고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책을 쓰기 위해 연구하는 가운데 그에게는 놀라운 일이 일어났습니다. 그가 예수의 생애를 공부하고, 우선 증거를 면밀히 조사하여 판단을 내렸을 때, 그의 생각에 혁명적인 변화가 온 것입니다. 그는 부활이 사실이 아니라는 것을 증명하는 책을 쓰는 대신에 그것을 지지 하는 놀랄만한 증거로 인해 부활이 사실임을 증명하는 책을 쓸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의 책 "누가 돌을 옮겼는가?"는 지금까지 50년 동안 베스트셀러가 되고 있습니다.
저는 오늘 부활이 사실이라는 것을 증명하려고 말씀을 준비하지 않았습니다. 부활이 사실이라는 것을 증명하는 말씀을 전하는 대신 몇 사람 제자들의 변화만을 간단히 여러분들에게 소개하겠습 니다. 부활이 사실이 아니라면 제자들의 변화는 없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히자 제자들은 두려움에 떨었습니다. 그들은 어찌할 바를 몰랐습니다. 지 도자를 잃고 완전히 절망 가운데 남겨져 버린 것입니다. 그들의 소망이 끝난 것입니다. 그런데 그 것이 다가 아니었습니다. 곧 무언가가 시작된 것입니다. 갑자기 그런 제자들의 태도가 바뀐 것입 니다. 그것도 완전히 바뀌어서 전혀 다른 사람들이 되었던 것입니다.
베드로가 예수님을 세 번 부인한 이야기는 명백한 사실입니다. 실제로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았 다면 초기 기독교의 최고 지도자인 베드로의 그와 같은 변절을 기록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런 데 놀랍게도 약 50일 후에는 그런 베드로가 자신의 목숨을 걸고 죽음에서 부활한 예수를 보았다 고 담대하게 전 예루살렘을 향하여 말씀을 증거 하였습니다. 결국 그는 얼마 후에 예수 그리스도를 담대하게 증거 했다는 이유로 감옥에 갇혔습니다. 그리고 우리가 전승을 통해 알고 있는 바와 같이 예수님과 같은 모습으로 똑바로 십자가에 매달려 죽는 것이 황송하여 십자가에 거꾸로 매달려 죽는 죽임을 당하였습니다. 도대체 어떻게 해서 이 겁쟁 이 베드로가 변하여 가장 위대한 제자가 되었겠습니까? 그것은 바로 부활 때문입니다. 그가 부활 하신 예수님을 만났기 때문입니다.
도마도 똑같은 경험을 했습니다. 그는 제자들 가운데 가장 이성적인 마음을 가진 자였습니다. 그 래서 항상 증거를 찾고 합리적인 결정을 내렸습니다. 다른 제자들이 예수님이 살아나셨다고 말하 자 그는 자신이 보지 않으면 믿을 수 없다고 반응하였습니다. 그러나 일주일 후 그는 예수님을 보고 "나의 주 나의 하나님!"이라고 외쳤습니다. 의심 많은 도마가 사도가 된 것입니다. 그의 변 화는 결코 도마 자신의 의도가 아니었습니다. 도마는 결코 부활한 그리스도를 볼 것이라고 기대 하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그는 부활하신 그분을 보게 된 것입니다.
예수의 형제 야고보 역시 인생이 완전히 바뀐 또 한 명의 사도입니다. 부활이 있기 전에 그와 그 의 형제들은 예수를 믿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초대 교회의 역사를 보면 베드로가 감옥에 갇힌 후 그는 예루살렘 교회의 가장 높은 사람이 되었습니다. 그의 태도는 완전히 바뀌어서 자신을 스스 로 '예수 그리스도의 종'이라고 불렀습니다.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만났기 때문입니다.
지금 말씀 드린 베드로, 야고보, 그리고 도마는 부활을 경험한 많은 사람들 가운데 세 사람일뿐입 니다. 그 당시뿐만 아니라 오늘날까지 수도 없이 많은 사람들이 이들의 변화와 똑같은 경험을 하 였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이 정녕 사실이 아니라면 이 놀라운 변화들에 대한 그 어떤 설명 도 가능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은 진정 이 세상에서 유일할 뿐만 아니라 역사적인 사실입니다. 그러면 먼저 부활이 의미하는 것이 무엇인가를 살펴 본 후에 그 부활이 우리에게 어떤 의미를 가 지는가 하는 부활의 의의를 생각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성경이 의미하는 예수님의 부활의 의미는 무엇이겠습니까? 십자가 사건이 일어난 성금요일로부터 3일이 지난주일, 당시 유월절 아침에 실제로 무슨 일이 일어났습니까? 부활은 단순히 영혼의 불멸이 아닙니다. 또한 부활은 다시 몸을 입는 것도 아닙니다. 뿐만 아니라 성경에 기록된 예처럼 단순히 살아있는 육체로 되돌리는 것을 의미하는 것도 아닙니다. 신약 성 경에는 죽은 자가 다시 살아나는 기사가 여섯 건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나인성 과부의 아들, 회당 장 야이로의 딸, 나사로, 예수가 죽을 때 들려 올라가는 성도들, 그리고 도르가와 유듀고가 그것 입니다. 그러나 이 모든 경우 다시 살아난 것은 잠시 뿐이었습니다. 이들은 모두 다시 죽어야 했 습니다. 이들은 모두 두 번 죽은 것입니다.
그러나 이런 일은 예수님에게는 적용되지 않습니다. 로마서 6장 9절에 기록된 대로 "이는 그리스 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사셨으매 다시 죽지 아니하시고 사망이 다시 그를 주장하지 못할 줄을 앎이로다." 그분은 다시 죽지 않으십니다. 죽음이 더 이상 그분을 주장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부활은 이제까지 있던 모든 부활에 관한 생각과 일치하지 않습니다. 제자들과 그 당시 유대인에게 부활은 몸의 부활을 의미했습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은 단지 몸의 부활이 아니었습니다. 단지 몸이 소생하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바울은 그분이 영적 몸을 입었다고 말합니 다.(고전 15:44)
그것은 더 이상 자연의 법에 따라야 하는 몸이 아니었습니다. 예수님은 갑자기 제자들 앞에 나타 날 수도 있었고 또 갑자기 사라지기도 하셨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육체를 벗은 영이 아니었습 니다. 그분 자신이 이것을 분명히 부인했을 뿐 아니라 그분이 십자가에 못 박히면서 생긴 상처를 보여주시기도 하셨습니다. 제자들과 함께 음식을 드시기도 했습니다.
이것들을 통해서 그분은 제자들에게 자신이 누구인지에 대해서 확신을 주었고, 자신의 몸을 다루 시면서 제자들에게 자신이 실제임을 확신시켰습니다. 예수님은 똑같은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다 른 한편으로는 똑같지 않으셨습니다. 이 얼마나 놀라운 일입니까?
제임스 던은 그것을 다음과 같이 지적합니다. "부활을 경험한 후 그들은 분명히 예수 그 자신에게 무슨 일이 생겼다고 생각했다. 하나님이 예수 를 일으킨 것이지 단지 제자들을 안심시키기만 한 것은 아니었다. 그는 다시 살아났다. 그는 다시 생명을 가진 자로 살아났다. 이것은 인류를 향한 하나님의 목적의 절정에 해당하는 사건으로서 단지 죽음의 문턱에서 다시 살아난 것만을 의미하지 않으며, 하나님께서 죽음을 정복하신 사건이 며, 하나님의 오른 손에 올리워진 사건이다. 기독교를 시작하게 한 연쇄적인 반응의 한 중심에 자 리잡고 있었던 것이 바로 이런 강렬한 확신이었던 것이다."
그렇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은 하나님께서 죽음을 정복한 사건입니다. 하나님의 오른 손이 란 하나님의 전능하신 능력을 나타냅니다. 즉 부활이 하나님만이 하실 수 있는 전능하신 사역임 을 드러내는 사건이라는 말입니다.
본훼퍼는 참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많이 묵상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이 창 조라고 말했습니다. "성금요일에 죽으신 예수와 부활 주일에 다시 살아나신 주, 그것은 무로부터 의 창조이며, 태초로부터의 창조이다. 예수 그리스도가 정말로 죽으셨다는 것은 그의 부활의 가능 성이 아니라 그것의 불가능이었다. 그것은 무 자체, 절대적인 무였다. 태초에 무로부터 하나님의 사역을 창조해 내신 하나님 자신의 자유 이외에는, 죽으신 그리스도와 부활하신 그리스도 사이에 어떤 전환도 연속성도 없다." 본 훼퍼는 예수님의 부활을 통해 하나님의 창조를 보았습니다. "태초의 하나님은 살아 계시고, 무 를 파괴하시며, 그리스도의 부활에서 새로운 창조물을 창조하신다".고 말하며 우리가 창조에 대해 아는 것은 그리스도의 부활을 통해서라고 말했습니다.
그렇습니다. 예수님의 부활은 단지 죽은 몸이 살아나는 것이 아니라, 영적인 몸으로 사는 것이며 이는 하나님 자신만의 사역인 창조의 사역인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러한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이 우리에게 주는 의미는 무엇이겠습니까? 다시 말해 부활의 의의는 무엇이겠습니까?
먼저 부활은 예수님께서 하나님이심을 보여줍니다.
예수님께서는 자신에 관해 많은 놀랄만한 주장들을 하셨습니다. 그분은 자신이 영원한 존재라고 주장하셨습니다. '아브라함이 나기 전에 나는 존재했다'(요8:28) 다른 사람들은 살기 위해서 태어 나지만 예수님은 자신이 태어나기 전부터 살고 있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분은 자신이 죄가 없 다고 말씀하셨습니다.(요8:28) 그리고 자신은 죄를 사할 권세가 있다고도 말씀하셨습니다.(막 2:10) 그러나 그분의 가장 위대한 주장은 자신이 하나님이시라는 주장입니다. 그분은 '누구든지 자신을 본 자는 하나님을 보았다'(요14:9)고 하셨으며, '나와 하나님은 하나'(요10:30)라고 말씀하 셨습니다.
이 주장이 사실이라는 것을 보여줄 만한 표적을 달라고 도전 받았을 때 그분은 거절하셨습니다. 그 대신 그는 이 주장들이 옳다는 것을 그분 자신의 부활을 의지해 주장하셨습니다. '사악하고 음 란한 시대가 표적을 구하나 선지자 요나의 표적밖에는 보일 표적이 없다. 요나가 밤낮 사흘을 물 고기 뱃속에 있었던 것 같이 인자도 밤낮 사흘을 땅 속에 있을 것이다'(마12:39-40)
그렇습니다. 부활이 이 주장들이 사실이라는 것에 대한 가장 큰 증거입니다. 예수님은 영원하시 며, 죄가 없으시고 하나님 이외에 다른 분이 아니십니다. 바울은 로마서 1장 4절에서 '죽은 자 가 운데서 부활하여 능력으로 하나님의 아들로 인정되셨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결론적으로 말해, 하나님께서는 예수님의 모습으로 이 땅에 오셨으며, 이 모든 것에 대한 가장 위 대한 증거는 그분이 사흘만에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셨다는 데 있습니다.
두 번째로, 부활은 예수님이 재판장이심을 의미합니다.
예수님은 자신이 하나님이시라고 주장하셨을 뿐 아니라 언젠가 온 세상을 심판하실 것이라고 하 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지상에 계실 때, 그분은 아버지께서 자신에게 심판을 위임하셨다고 선포하 셨습니다. 그분은 주장하시기를 '죽은 자들이 하나님의 아들의 음성을 들을 때가 오나니 곧 이때 라 듣는 자는 살아나리라, 아버지께서 자기 속에 생명이 있음같이 아들에게도 생명을 주어 그 속 에 있게 하셨고 또 인자 됨을 인하여 심판하는 권세를 주셨느니라'(요5:25-27)고 하셨습니다.
사람들은 이 말을 거부했고 그를 미워하여 죽일 계획을 세웠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은 당신 자신이 재판 받을 때에도 이 주장을 반복하셨습니다. 대제사장 가야바가 심문할 때 예수님 은 자신이 하나님의 아들인가에 대한 질문을 받고는 '그렇다, 네가 말한 그대로다, 그러나 내가 너희 모두에게 말하노니 장차 인자가 전능자의 보좌 우편에 앉는 것과 하늘의 구름을 타고 오는 것을 볼 것이다'라고 대답했습니다. 그러나 대제사장은 자기 옷을 찢으면서 '참람하도다! 우리가 어찌 더 증인이 필요하리요? 보라 이제 너희가 참람한 말을 들었다. 어떻게 생각하느냐?' 고 물었 습니다. 그러자 그 말을 들은 자들은 '그는 죽음을 당해야 마땅하다'고 대답하였던 것입니다.
부활은 분명한 심판의 날을 가리킵니다. 예수님은 심판대에 앉으실 것이고 우리 모두는 피고석에 앉아 우리가 한 일을 아뢰어야 할 것입니다.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거부합니다. 그것은 사람들이 심판을 받는 자리에 앉기를 좋아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오히려 사람들은 하나님 을 심판대에 세우기를 원합니다. 자신이 원하는 하나님으로 만들고 싶은 것입니다. 그러나 성경은 분명히 우리에게 경고합니다. 심판을 받을 것이다. 그리고 그것의 근거는 바로 부활입니다.
세 번째로 부활은 용서가 유효함을 의미합니다.
사도 바울은 로마서 3:23절에서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니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한다'라 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영국 국교회에 잘 알려진 일반 고백문 가운데 '우리는 우리가 해야 할 일은 하지 않았으며, 우리가 해서는 안 될 일을 하였습니다'라는 구절이 있습니다. 우리 모두 가 죄인이라는 말일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어떻게 죄를 용서받을 수 있을까요? 그 대답은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에서 발 견됩니다. 라이튼 포드는 십자가가 세 가지 커다란 질문들에 대한 대답이 된다고 지적한 바 있습 니다. "용서는 필수적입니까? 우리의 대답은 '예'입니다. 십자가 위의 예수님을 보십시오! 거기에서 우리 는 가장 분명하게 죄에 대한 저주를 보게 됩니다. 그러면 용서는 가능합니까? 우리의 대답은 '예' 입니다. 십자가 위의 예수를 보십시오. 우리 위해 흘린 그 피가 죄인을 위한 하나님의 사랑의 간구입니다. 그러나 용서뿐입니까? 우리의 대답은 역시 '예'입니다. 십자가 위의 예수를 보십시오. 하나님은 죄 를 하찮은 것으로 만들지 않으셨습니다. 오히려 심판관이 우리를 대신하여 자기 자신이 심판을 받아 우리를 변화시켜 주셨습니다.
십자가가 이렇게 세 가지 커다란 질문에 대해 대답하듯이 부활은 이제 네 번째 질문에 대하여 대 답합니다. '죄 용서는 유효합니까?'' 예수님의 죽음이 우리의 죄를 없이 하는데 충분합니까?' 부활 의 대답은 '예'입니다. 로마서 4장 25절이 말하고 있는 대로 '그는 우리의 죄를 위해 죽음에 내어 줌이 되었고 우리를 의롭다하기 위하여 다시 살아나셨습니다.'
부활은 우리가 빚을 갚고나서 받는 영수증과 같습니다. 영수증이 있으면 빚을 갚지 않아도 됩니 다. 그것은 빚을 갚았다는 증거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셨을 때 그분은 죄의 빚을 처리하셨습니다. 우리가 받아야 할 벌이 예수님께 임한 것입니다. 사흘만에 부활하신 사건은 우리의 죄의 빚이 다 치뤄졌다고 하는 하나님의 위대한 영수증이요. 증거입니다. 용서는 유효합니 다.
네 번째로 부활은 삶의 의미를 부여합니다.
사도 바울은 갈라디아서 2장 20절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혔 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 이제 내가 육 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몸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 '내게 사는 것은 그리스도입니다.' 바울은 이렇게 고백합니다. 그리고 자신이 사는 목적이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 사는 것입니다.'라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우리들 개개인은 단지 우리 자신을 위해 살려고 이 세상에 오지 않았습니다. 우리는 예수님께서 우리의 삶에 가지신 그 목적을 성취하기 위해 온 것입니다. 그분은 우리들에게 삶의 이유를 주셨 고 우리의 모든 삶을 가치 있게 하셨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것과 같습니다. '내가 온 것은 양으로 생명을 얻게 하고 더 풍성히 얻게 하려는 것이라'(요10:10b)
사랑하는 어지니교회 성도 여러분
여러분의 삶의 목적은 무엇입니까? 생명을 얻으셨습니까? 풍성히 얻으셨습니까? 우리는, 그리스도인들은 부활을 바라보며 우리 자신 의 삶을 전체로 그리스도에게 드릴 때, 우리의 삶의 이유를 찾을 수 있습니다. 그리고 부활의 주 님께서 우리의 모든 삶을 가치 있게 만들어 주시는 것입니다. 그 길이 바로 우리의 삶의 의미를 찾아가는 유일한 길입니다.
다섯 번째, 부활은 죽음 앞에서 소망을 부여합니다.
씨 에스 루이스는 자신의 인생을 살아오면서 여러 차례 심각한 죽음과 맞닥뜨렸습니다. 그는 죽 음에 대해 심사숙고하였습니다. 그리고 죽음에 대한 사람들의 태도를 이렇게 요약하였습니다. "죽 음에 대해서 우리가 취할 수 있는 태도는 세 가지 뿐이다. 그것을 원하거나 두려워하거나 무시하 는 것이다. 분명히 마지막 태도가 가장 일반적인 태도가 되고 있다."
그렇습니다. 죽음을 원하는 사람은 많지 않습니다. 사람들은 죽음을 두려워합니다. 하지만 그 두 려움을 잊어버리기 위해 사람들은 죽음을 생각하려 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애써 죽음을 무시하려고 합니다. 그래서 자신의 죽음이 코앞에 다가오는 그 순간에도 죽음을 받아드리 않습니 다. 그러나 죽음에 대해서 누구나가 동의해야만 하는 분명한 사실이 있습니다. 죽음이 명백하다는 사실입니다. 죠지 버나드 쇼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죽음에 관한 통계는 참 인상적이다. 한 사람 가운데 한 명은 죽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죽음을 낯선 것으로 여긴다. 다른 누군가가 죽으면 우리는 그것을 일상적인 것으로 간주한다. 우 리 자신에게는 그러한 일이 일어나지 않을 것처럼 생각하지만 우리에게도 죽음은 올 것이다."
그렇다면 왜 사람들은 누구에게나 다가오는 이 죽음을 외면하고 죽음이 일어나지 않을 것이라고 끝까지 피하는 것일까요? 그것은 죽음은 마지막을 의미하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이 애정을 갖고 소유한 모든 것들, 그것이 사랑이든, 지혜든, 재물이든, 권력이든 죽음 앞에서는 완전히 끝장나고 말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그 끝장나는 죽음에서부터 다시 돌아오셨습니다. 씨에스 루이스는 그의 책 '기적'에서 다음과 같이 쓰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첫 사람이 죽은 이후 잠겨졌던 문을 여셨다. 그는 죽음의 왕을 만나서 싸워서 물리치셨 다. 그가 그렇게 하셨기에 모든 것이 달라진다. 이것이 새 창조의 시작이다. 우주 역사의 새 장이 열렸다."
그렇습니다. 사랑하는 어지니교회 성도 여러분,
진정한 성도에게 죽음은 끝이 아닙니다. 예수 그 리스도는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셨습니다. 거기에, 바로 거기에 우리의 소망이 있습니다.
자 이제 저는 여러분들이 한 걸음 더 앞으로 나가시기를 원합니다.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은 정확히 무엇을 의미합니까?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죽음에서 부활하신 것을 확신하며 그분을 살아 계신 구세주로 모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분의 가르침을 삶 속에서 인격적으로 인정하는 단계를 밟아야 하는 것입니다. 그 길을 가려고 할 때, 우리가 알아야 할 두 가지 사실이 있고 꼭 해야 하는 일이 한 가지 있습니 다.
먼저 우리는 하나님의 관점에서 우리에게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를 알아야 합니다. 그것은 바로 우리 모두가 죄인이라는 사실입니다. 만약 우리가 우리 스스로에게 정직할 수 있다 면 우리 각자가 하나님께 죄를 범했음을 알게 됩니다. 우리는 우리 자신의 기준에도 못 미칠 뿐 만 아니라 하나님의 기준에는 더더욱 못 미칩니다. 우리는 우리 삶에서 하나님을 떠났었습니다. 그것이 바로 죄입니다. 하나님을 떠난 인간, 그리고 그것이 바로 죄임을 깨닫는 것이 우리가 알아 야 할 첫 번째 사실입니다.
둘째로, 우리는 첫 번째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우리 자신에 대한 나쁜 소식을 알아야 하지만 예수 님에 관한 좋은 소식, 즉 복음도 알아야 합니다. 복음의 핵심은 '그리스도께서 성경대로 우리 죄 를 위하여 죽으시고 장사되었다가 성경대로 사흘만에 살아나셨다.'(고전 15:3,4)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제 끝으로 해야 할 일이 한 가지 있습니다.
우리가 죄인이고 예수님께서 우리를 위해 죽으시고 지금도 살아 계시다는 것을 아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용서, 하나님의 사면을 우리들 각자가 받아들여야만 합니다. 몇 년 전에 미국에서 이 문제를 설명해 줄 만한 특이한 법률 사건이 있었습니다. 조지 윌슨이라는 한 남자가 우편 수송차를 강탈하고 운전사를 죽인 혐의로 기소되었습니다. 그는 사형 언도를 받았지만 집행 직전에 대통령에 의해 사면되었습니다.
놀랍게도 그가 이 소식을 들었을 때 그는 사면을 받아들이지 않고 죽고 싶다고 말했습니다. 이로 인해 사면이 유효하기 위해서는 그것이 받아들여져야 하느냐에 대한 의문을 낳았습니다. 그의 거부에도 불구하고, 조지 윌슨의 변호사는 형의 집행 유예 판결을 얻어냈습니다. 그는 그의 의뢰인이 사면을 받았기 때문에 형이 집행될 수 없다고 주장했습니다. 그 사건은 미국의 대법원 까지 갔으며 대법원의 결정은 다음과 같았습니다.
사면이 그 효력을 발휘하기 위해서 구명은 필수적이다. 그러나 그것을 받아들이지 않을 경우 구 명은 완전하지 않다. 그것은 거부될 수도 있다. 그리고 만약 사면이 거부된다면 법정에서는 그 사 람을 강제로 사면시킬 어떤 힘도 없다. 사형 언도를 받은 그 어떤 사람도 사면을 거부하지는 않 을 것이라고 생각할 것이다. 그러나 이 법규도 마찬가지여야 한다고 생각할 것이다.
안타깝게도 조오지 윌슨은 자신이 이 사면을 거부했기 때문에 사형이 집행되었고 자신의 선택에 따라 죽음을 당했습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허락하신 사면도 우리에게 효력이 있 기 위해서는 받아들여져야 합니다. 우리는 살아 계신 예수님께 우리의 죄를 사하시고 우리의 삶 을 변화시켜 달라고 간구하면서 기도드릴 필요가 있습니다. 우리가 마지막으로 해야 할 일은 기 도를 통해서 그분께 우리의 삶에도 이 위대한 변화가 있게 해달라고 간구하는 일입니다.
사랑하는 어지니교회 성도 여러분!
우리가 부활의 기쁨을 축하하고 즐기기에 앞서, 과연 나 자신이 알아야 할 두 가지 사실을 알고 있으며 해야 할 마지막 일을 진정으로 행했는가? 우리 자신을 돌아보아야 할 것입니다. 이 시간 자신에게 조용히 질문해 보시기 바랍니다. 나는, 나 자신이 하나님을 떠난 죄인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는가? '그리스도께서 성경대로 나의 죄를 위하여 죽으시고 장사되었다가 성경대로 사흘만에 살아나셨 다.'는 사실을 알고 믿고 있는가? 나는 하나님의 용서, 하나님의 사면을 받아드렸는가?
사실 우리는 이러한 사실들을 이미 알고 있으며, 하나님의 사면을 받아드렸다고 간단하게 결론 내리기 쉽습니다. 하지만 여러분 이 일은 그렇게 간단한 문제가 결코 아닙니다. 만일 우리가 이 사실들을 진정으로 깨달아 알고, 정말 사형집행을 앞 둔 사형수가 사면의 소식을 듣고 기뻐하는 그 심정으로 하나님의 사면을 받아들였다면, 우리는 겁쟁이에서 십자가의 죽음도 두려워하지 않 게 된 담대한 베드로, 의심 많은 사람에서' 나의 주 나의 하나님'이라 외친 확신에 찬 도마, 처음 부터 믿지 않으려고 버티다 저는 '그리스도의 종'입니다 고백하는 야고보, 그들 중에 한 사람과 같이 변했어야 했을 것입니다.
사랑하는 어지니교회 성도 여러분,
저는 여러분이 이 한 주간 심각하게 복음서를 묵상하시기를 권합니다. 그리고 앞서의 그 질문들을 반복해서 던져 보시기를 바랍니다. 그러면서 기도하십시오. 그래서 여러분 모두가 부활의 주님을 만나게 되시기를 바랍니다. 살아 계신 주님을 만나는 경험 을 하시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여러분 모두의 삶이 베드로와 같이 도마와 같이 야고보와 같이 변 하게 되시기를 그리스도 예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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