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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약 --------------------/고린도전서

고전 15장 1-11절(그리스도의 부활) - 서명성

by Preacher 2023. 7.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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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전15장 1-11

그리스도의 부활

서명성 목사 2019.4.21.

팔로마한인교회 http://palomarkc.org/

 

인류의 소망이요 생명의 주인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신 영광의 아침입니다. 주님의 은혜가 부활주일 예배에 참석한 성도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주님의 부활은 십자가 사건을 전제로 합니다. 죽음이 있어야만 부활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왜 죽으셨습니까? 우리를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기기 위함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모든 죄를 대신 지시고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셨습니다. 그가 찔리고 상하고 징계를 받고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의 허물과 죄악이 사함을 얻고 하나님과 화평을 누리게 되고 나음을 입었습니다. 그런데 주님이 십자가에 달려 죽으신 것이 예수님의 제자들이나 그를 평소에 알고 지내던 사람들에게 커다란 충격이요 슬픔이었습니다. 예수님이 여러 차례에 걸쳐 자신의 부활을 예언하였음에도 불구하고 그분이 다시 살 것이라고는 꿈에도 생각지 못하였기에 주님이 다시 사셨다는 소식을 듣고도 기뻐하지 못하고 도리어 의심하였습니다.

 

고전 15장은 부활 장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왜 사도 바울이 부활을 주제로 다루고 있습니까?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셨다 전파되었거늘 너희 중에서 어떤 사람들은 어찌하여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이 없다 하느냐”(15:12) 고린도 교인들 중에 죽은 자의 부활을 부인하는 자들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유물론의 관점에서 보면 사람은 죽으면 끝입니다. 헬라의 이원론의 관점에서 보면 영혼은 불멸하나 몸은 썩어 없어진다고 하기에 죽은 자의 몸의 부활은 있을 수 없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우리가 성령을 받아 이미 그리스도의 통치에 참여하고 영적 구원을 가지게 되었으니 부활은 필요 없다고 주장하기도 합니다. 본문은 복음의 핵심을 담고 있습니다. 이 자리에서 예배드리는 모든 분들이 부활 진리 위에 굳게 서서 주님 앞에 가는 그날까지 주님을 기쁘시게 하는 의미 있는 삶을 사시기를 바랍니다.

 

구원에 이르는 믿음(15:1-2)

 

개역성경은 ‘형제들아 내가 너희에게 전한’으로 시작되지만 헬라어 원문은 “알게 하노니, 형제들아”로 시작합니다. 그들이 이미 아는 것인데 잊어버린 것 같기에 다시 한 번 생각나게 한다면서 일부 교인들의 영적인 교만을 탓하고 있습니다. 바울이 전한 복음을 고린도 교인들이 받았고, 그들이 지금도 그 안에 서 있다고 말합니다. 바울에게 믿음이란 사도들이 선포한 복음을 받고 그 안에서 사는 것입니다. 받음과 믿음은 동의어입니다.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요 1:12) 믿음은 선포된 복음을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복음은 무엇입니까? 그리스도의 구원 사건을 기술한 것입니다. 약을 먹으면 약효가 나타나는 것 같이 복음을 받아들이면 그리스도의 구원 사건이 우리에게 효력을 발생하게 됩니다. 그래서 믿음이 구원의 수단이 됩니다. 부활을 굳게 믿는 것이 제대로 된 믿음이며, 그 믿음만이 성도들을 구원합니다. 만약 일부 교인들의 주장대로 믿는 자의 부활이 없다면 그리스도의 부활도 없는 것이요 (13절), 우리의 믿음도 헛것이요(14), 사도들의 증언도 헛것이요(15절), 우리는 여전히 죄 가운데 있을 것이요(17절), 우리는 모든 사람 가운데 더욱 불쌍한 자들이 될 것이라(19절)고 합니다. 그렇지만 바울이 전하여준 복음을 그대로 믿고 굳게 지키면 다 구원에 이른다고 합니다. 바울의 교훈은 오늘날도 유효합니다. 복음을 잘못 이해할 때 헛된 믿음을 갖게 됩니다. 헛된 믿음을 가지고 구원에 이를 수 없습니다. 성도는 복음에 대한 바른 믿음을 가져야 합니다.

 

복음의 계시성과 전승성(15:3a)

 

바울은 자기가 전파한 복음의 내용을 진술하기 위하여 “내가 받은 것을 먼저 너희에게 전하였노니”라고 기술합니다. ‘받은 것’과 ‘전하는 것’이라는 표현은 랍비들이 사용하는 전문 용어입니다. 바울도 랍비 출신인지라 이런 용어들에 익숙했을 것입니다. 본문의 주장은 그리스도의 계시를 통해서만 복음을 받았다고 강조하는 갈 1:12에서의 주장과 상충되는 것처럼 보입니다. 바울은 성령의 조명을 통하여 열정적으로 박해하던 예수님이 바로 메시아이시며 자신이 이방인의 사도로 부름 받은 것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렇지만 예수님의 삶, 죽음, 부활과 연관된 스토리는 예수님과 함께 지내면서 직접 목격한 제자들로부터 받아야만 했습니다. 그러기에 바울은 베드로를 비롯한 예수님의 제자들로부터 예수님의 생애에 관한 증언을 전수받아 하나님의 구원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어떻게 이루어졌는가를 선포하였습니다. 이와 같이 복음에는 계시성과 전승성이라는 양면성이 있습니다.

 

복음의 내용(15:3b-5a)

 

바울이 부활을 부인하는 고린도인들에게 복음을 언급하는 이유가 무엇일까요? 첫째, 부활 사상이 그리스도의 구원 사건에서 가장 기본적인 요소이기 때문에, 부활을 부인하게 되면 기독교 신앙의 복음도 구원도 없음을 알게 하기 위함입니다. 둘째, 그리스도의 부활처럼 부활이 확실히 있다는 것을 강조하기 위함입니다. 바울은 그 당시 초대교회에서 전해지던 복음의 핵심을 적고 있습니다. 그 내용은 바울 자신이 생각해 내고 바울만이 전하는 독특한 가르침이 아니라 그 당시 초대교회에서 다른 사도들이 전하는 내용이요 바울 자신도 그들에게 전해 받은 내용임을 밝힙니다. 복음의 핵심은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복음을 “예수님이 누구신가”로 접근하는 것을 기독론이라 부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 우리의 구주, 왕이십니다. 그와 더불어 “예수님이 무엇을 하셨는가”로 접근하는 것을 구원론이라 부릅니다. 구원론의 견지에서 본 복음의 요약을 오늘 바울이 적고 있습니다.

 

복음의 내용이 네 절로 표현됩니다.

1) 성경대로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셨다

2) 장사지낸바 되었다

3) 성경대로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나셨다

4) 게바에게 보이셨다

 

4개절의 주어가 ‘그리스도’입니다. 그 칭호는 ‘기름부음을 받은 자’를 뜻하는 히브리어 ‘메시아’를 헬라어로 직역한 것입니다. 메시아는 원래 기름부음의 의식을 통해 하나님의 종으로 세움 받은 자라는 뜻을 가진 보통명사였습니다. 구약을 보면 기름부음의 의식을 통해 왕, 제사장, 그리고 선지자들이 세워졌습니다. 심지어 사 45:1에서는 바벨론에 포로로 잡혀가 있는 유대인들을 해방시켜 성지로 회복시키도록 하나님께서 세운 페르시아의 왕 고레스를 메시아라고 부르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면서 유대인들은 하나님께서 다윗의 왕조를 재건하고 이스라엘을 이방 민족으로부터 해방시킬 ‘다윗의 씨’를 종말에 일으켜 메시아로 세우리라고 기대하였습니다. 그러다 보니 메시아는 종말의 구원자를 지칭하는 고유명사가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사도들이 예수님을 ‘그리스도’라고 고백하고 선포할 때 단순히 그가 ‘기름부음 받은 자'라는 뜻이 아니라, ‘종말의 구원자’로 하나님에 의해 세움 받은 하나님의 종이라는 뜻을 가집니다.

 

죽음과 부활을 언급할 때만‘성경대로’라는 말이 붙어 있습니다. 그것은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이 하나님께서 선지자들을 통하여 성경에 약속한 구원을 이룬 핵심적인 사건이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당시 십자가에 달려 죽은 사람들처럼 반란을 꾀하거나 큰 죄를 범하여 죽은 것이 아니라 우리의 죄를 용서하여 주시기 위하여 대신 죽으셨습니다. 예수님을 구속자(redeemer)라고 부릅니다. 구속의 의미는 노예 주인에게 값을 지불하고 그 노예를 사서 자유롭게 하는 것을 말합니다. 예수님은 당신의 보혈로 ‘죄의 삯은 사망’이라는 하나님의 공의를 만족시키시고 죄인인 우리를 자유케 하셨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잠시 정신을 잃었다가 시간이 흘러 다시 깨어났거나 죽은 것처럼 보인 것이 아니라 분명히 죽으셨습니다. 그래서 아리마대 요셉의 묘실에 장사되었습니다. 셋째 절을 보면 개역성경에서 ‘다시 사셨다’로 번역되어 있지만 직역하면 ‘일으켜졌다’는 수동형으로, 이것은 이른바 신적 수동형이라고 합니다. 하나님의 행위를 나타내고자 하면서도 경외의 대상인 하나님의 이름을 주어로 사용하지 않을 할 때 썼던 유대인의 어법입니다. 하나님께서 그를 사흘 만에 죽은 자 가운데서 일으키셨습니다. 예수님의 부활은 영적인 의미에서의 부활만이 아니라 죽은 몸이 실제로 일어났음을 강조합니다. 시 16:10, “내 영혼을 음부에 버리지 아니하시며 주의 거룩한 자로 썩지 않게 하실 것임이니라”는 예언이 예수님을 통하여 이루어졌습니다. ‘죽으셨다’는 단순 과거시제를 사용하여 과거 일회적인 사건임을 의미합니다. 반면에, ‘다시 살아나셨다’는 완료 시제를 사용하여 부활의 현재성이 분명히 드러납니다. 그래서 그리스도는 다양한 현장에 나타나셔서 자신의 부활을 보여주셨습니다.

 

부활의 증인(15:5b-8)

 

5절 전반부에 ‘게바에게 보여졌다’까지만 절로 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그 후에’라는 단어를 써서 ‘열둘’에게, ‘오백여 형제들에게’, ‘야고보에게’그리고 ‘모든 사도에게’부활하신 그리스도가 나타나셨다는 사실을 열거하면서 그리스도의 부활이 확실히 있었음을 강조합니다. 베드로에게 나타나신 후에 그리스도께서 열두 사도에게 나타나셨습니다. 여기 ‘열둘’은 예수님께서 하나님나라의 복음을 선포하여 새롭게 창조하고 모은 하나님나라의 백성의 상징이요 대표로서 하나님의 옛 백성인 이스라엘의 열두 족장에 상응하는 제자들을 지칭하는 전문용어입니다. 가룟 유다가 죽었으므로 그 수가 열하나로 줄었을지라도 바울은 이 수의 상징적 의미를 그대로 유지하고자 합니다. 그 후 5백여 형제에게 나타나셨습니다. 그들 중 더러는 잠들었으나 다수는 지금까지 살아있다고 한 것은 그들이 필요하다면 언제라도 그리스도의 부활을 증언할 수 있다는 뜻입니다.

 

그 다음에 언급된 야고보는 주의 형제 야고보일 가능성이 높습니다. 야고보는 공생애 기간 중에 예수님의 그리스도이심을 믿지 않았지만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을 계기로 오순절에 다박방에서 기도하던 무리에 합류함으로 성령으로 충만하게 된 후 예루살렘 교회의 리더가 되었습니다. 그 후에 주님께서 ‘모든 사도’에게 보이셨습니다. 바울이 ‘모든 제자’라고 하지 않고 ‘모든 사도’라고 한 것은 예수님의 제자들이 복음 전파의 사명을 위해 부르심과 보내심을 받는 자들이라는 의미를 부각하기 위한 것으로 보입니다. 그리고 바울은 “맨 나중에 만삭되지 못하여 난 자 같은 내게도 보이셨느니라”라고 고백합니다. 바울은 다메섹 도상에서 부활하신 예수님이 영광중에 나타나심을 체험했습니다. 이 체험은 다른 사도들이 체험과 같은 종류의 것이라고 생각했기에 바울은 자신의 체험을 증언할 때도 예수님의 부활 출현에 관한 전문 용어인 ‘보이셨다’를 사용합니다. 특히‘마지막으로’란 단어를 사용하여 자신이 부활하신 주 예수 그리스도의 마지막 증인이라는 점을 나타내고 있습니다. ‘만삭되지 못하여 난 자 같은’이라는 말은 도저히 사도가 될 수 없는 자신이 사도로 부르심을 받았다는 뜻입니다.

 

은혜로 사도가 된 바울(15:9-11)

 

바울은 자기가 ‘사도 중에 가장 작은 자’라고 고백합니다. 자신이 예수님의 공생애 동안 그의 제자로서 따른 일도 없고, 더구나 그리스도를 믿는 자들인 ‘하나님의 교회’를 박해했기 때문에 사도로 불릴 자격이 없음을 인정합니다. 바울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인간에게 베푸신 하나님의 구원의 사랑을 ‘은혜’라는 개념으로 설명하게 된 것은 분명히 다메섹 체험을 근거로 하고 있습니다. ‘은혜’라는 개념은 자격이 없는 죄인에게 하나님께서 거저 베푸시는 사랑입니다. 교회의 박해자로서 하나님께 대항했던 죄인 바울은, 우리의 구원이 인간의 지혜나 선행으로 이루어질 수 없고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에 의해서만 가능함을 깨달았습니다. 다메섹 도상에서 바울에게 주신 하나님의 은혜가 사도직이라는 소명으로 나타났습니다. 그러기에 바울은 그의 사도직을 ‘내게 주신 은혜’라고 부릅니다. 그런데 자신의 죄악에 찬 과거를 의식하고 겸손히 스스로를 ‘만삭되지 못하여 난 자’라거나 ‘사도 중 가장 작은 자’라고 지칭하면서도, 다른 사도에 비해 조금도 부족하지 않다는 자신감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것은 자기도 다른 사도처럼 똑같이 예수님 부활 출현과 사도로서의 소명이라는 하나님의 은혜를 받았고, 나아가 다른 어떤 사도보다도 더 많이 수고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자신에게 주어진 하나님의 은혜가 헛되지 않았다고 합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이 구약을 통하여 계시되었고 또한 실제로 일어난 역사적인 사건이라 할지라도 이 복음이 우리에게 효력을 발생하기 위하여 예수님이 우리 죄를 위하여 죽으시고 다시 사셨다는 것을 알뿐 아니라 우리의 삶을 통하여 주님을 만나는 체험을 해야 합니다. 주님이 부활하시던 새벽 무덤을 찾아갔던 여인들은 부활하셨다는 소식을 자기들의 귀로 듣고 부활하신 주님을 자기들의 눈으로 보고 또 입으로 전하는 자들이 되었습니다. 그 당시 초대교회 성도들이야 주님을 직접 보고 그가 하는 이야기도 직접 듣고 또 부활하신 후에 직접 만나기도 하였지만 이제 성도들은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을 통하여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고 그 마음 가운데 주님을 영접하고 주님을 우리의 삶 속에서 만나는 경험을 합니다. “너는 나를 본 고로 믿느냐 보지 못하고 믿는 자들은 복되도다”(요 20:29) 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물론 예수님께서 도마에게 하신 말씀이지만 부활하신 주님을 육안으로 보지 못하고 믿게 되는 성도들을 염두에 두고 하신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들은 예수님의 제자들보다 더 복된 사람들이 될 수 있습니다.

 

복음은 그리스도의 부활이 그리스도를 믿는 모든 성도들의 부활의 근거가 됨을 말해줍니다. 부활은 우리의 믿음의 근거가 되고, 속죄의 근거가 되고, 영생의 소망을 가지는 근거가 됩니다. 첫째 아담은 불순종의 죄로 인하여 후손들에게 죽음을 가져다주었지만 둘째 아담으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는 죄와 사망의 권세를 깨뜨리고 부활하심으로 아담의 후손들에게 죄용서와 구원과 부활의 근거를 만들어 놓으셨습니다. 하나님은 이 같은 그리스도의 승리를 우리도 공유하도록 했습니다. 주님이 사단의 권세를 깨뜨리시고 승리하셨다는데 왜 우리의 삶은 여전히 고난이 있고 역경이 있습니까? 사단의 권세는 깨뜨렸으나 아직 잔뿌리들이 남아 있어 마지막 발버둥을 치기 때문입니다. 부활의 날을 기대하는 성도들은 이 땅에서 주님과 동행하며 부분적이나마 승리를 기쁨을 맛봅니다.

 

그렇다면 이러한 놀라운 복을 가진 우리들이 어떠한 삶을 살아야 합니까?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승리를 주시는 하나님께 감사하노니 그러므로 내 사랑하는 형제들아 견실하며 흔들리지 말고 항상 주의 일에 더욱 힘쓰는 자들이 되라 이는 너희 수고가 주 안에서 헛되지 않은 줄 앎이라”(고전 15:57-58) 바울은 고린도 교인들에게 견고한 믿음을 갖고 부활의 소망 가운데 더욱 주를 섬기며 살라고 권면합니다. ‘견실하다’의 어원인 “헤드라”는 자리를 뜻합니다. 오늘은 이 자리 내일은 저 자리 하면서 자꾸 바꾸지 말고 자기 자리를 지키라고 권면합니다. 그렇다고 있는 자리에서 버티고 앉아 자기를 과시하라는 것이 아닙니다. ‘흔들리지 말라’는 것은 복음의 소망을 확고히 가지면서 쉽게 움직이지 말라는 것입니다. ‘힘쓰다’는 말의 어원은 ‘풍부하다’는 뜻을 가집니다. 직역하면 주의 일이 많아지게 하라는 것입니다. 결국 자기가 있어야 할 자리를 지키고 흔들리지 않고 주의 일을 많이 감당하는 것이 부활의 증인으로서 부활의 능력을 가지고 사는 성도의 모습입니다. 여기서 주의 일은 좁은 의미로 복음을 위한 사역을, 넒은 의미로 교회를 포함한 세상에서 신자로서 행하는 모든 일을 가리킵니다. 주안에서 행하는 모든 수고는 헛되지 않습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죄로부터 참자유를 허락하신 하나님께 모든 영광을 돌려야 합니다. 우리가 구속의 은혜를 누리게 된 것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크신 사랑 때문입니다. 부활의 능력을 아는 자들은 그리스도를 향한 믿음에서 흔들리지 않습니다. 부활의 소망을 붙들고 복음을 위하여 수고합니다. 주를 위한 수고는 이 땅에서도 열매를 맺지만, 마지막 때에 부활의 주님 앞에서 더욱 빛날 것입니다. 예수님이 재림하시는 그날에 십자가의 승리로 인해 우리는 죄와 사망의 권세에서 완전히 벗어나 승리의 개가를 부르며 완성된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것입니다. 많은 성도가 분주하게 살아갑니다. 먹고살려면 주일을 지키기도 어렵다고 합니다. 말씀과 기도 생활에도 소홀해집니다. 할 수만 있으면 교회 일도 쉬고 싶어 합니다. 살만하고 생활에 여유가 생길수록 주님을 더 많이 섬겨야 하는데, 거꾸로 세상의 즐거움을 좇으면서 하나님과 멀어지기도 합니다. 이제부터 우리가 원하는 삶이 아닌 주님이 원하는 삶을 살면서 주님 앞에 설 준비를 해야 합니다. 그럴 때 우리는 점도 없고 흠도 없이 평강 가운데 주님 앞에 설 수 있습니다(벧후 3:14).

 

여인들이 새벽 일찍이 무덤에 가보니 예수의 시신은 간 곳 없고 빈 무덤밖에 없었습니다. 그때 천사는 여인들에게 “그가 살아나셨다”는 놀라운 메시지를 전했습니다. 죽었던 자가 다시 살아났다고 하니 얼마나 기뻐하였겠습니까? 고통과 좌절과 절망에서 기쁨을 회복합니다. 이것이 부활을 경험하는 삶입니다. 예수님의 다시 사심을 기념하는 이 부활절에 삶 속에서 얼마나 부활의 기쁨을 누리고 있습니까? 신앙생활을 하다보면 기쁨이 사라지기도 합니다. 육신이 약해지기도 합니다. 사업에 어려움을 겪기도 합니다. 주변 사람들과의 관계가 힘들어지기도 합니다. 그럴 때 염려하기보다 모든 문제를 해결할 능력은 오직 하나님께 있음을 인정하며 하나님께 나아가 엎드려 간구해야 합니다. 솔로몬은 하나님께 ‘듣는 마음’을 달라고 했습니다. ‘지혜롭고 분별하는 마음’을 구했더니 하나님은 그에게 지혜와 총명을 주시고 구하지 아니한 부귀와 영광도 주시고 말씀대로 순종하면 그의 날을 길게 해주시겠다는 약속까지 주셨습니다(삼상 3장). 주님의 은혜를 사모하세요. 부활의 주님은 오늘도 찾아오셔서 고통의 멍에를 함께 져주시고 형통한 길로 인도하십니다. 부활절을 맞이하여 믿음과 소망과 사랑을 회복하시고 부활의 증인으로 살아가면서, 주님만이 주시는 기쁨과 평강을 누리시고 가정과 사업과 계획하시는 모든 일 가운데 부활의 주님을 경험하시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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