골3장 15-17
그리스도인의 감사의 근거 [추수감사절]
이준원 목사 2013.11.24.
콜럼버스한인장로교회 https://www.kpccoh.org
[들어가는 말]
이 시대 사람들은 행복한 삶에 대해 많은 관심을 가지고 있습니다. 한국이든 미국이든, 서점에는 어떻게 해야 행복해질 수 있는지에 대한 책들이 넘쳐납니다. 사람들은 대부분 환경이 좋을 때 행복해진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사람들의 예상과는 반대로, 행복에 관한 연구 결과들에 의하면, 사람에게 주어진 환경이 행복에 미치는 영향은 겨우 10%에 불과하다고 합니다.
그렇게 바라던 직장을 얻었다거나, 복권에 당첨되었다거나, 오랜 소원이던 집을 샀다거나 해도, 그 기쁨은 한 순간에 지나지 않고 다시 자기가 가지고 있던 원래의 행복 수준으로 되돌아간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흥미로운 사실은, 행복 지수가 높은 사람일수록 환경과 상관없이 자기에게 주어진 모든 것에 감사하는 라이프스타일을 가지고 있다는 점입니다. 무슨 말입니까? 행복의 크기는 감사의 크기와 같으며, 행복은 감사에서 나온다는 뜻입니다.
행복해지는 길은 유전적인 성향을 바꾸거나 많은 재산, 뛰어난 외모, 높은 학벌을 추구하는 것처럼 환경을 바꾸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감사에 그 비결이 있습니다. 그런데 감사의 삶은 한 순간에 얻어지는 것이 아니라, 반복적인 훈련으로 가능합니다. 수백 수천 번 거듭되는 선택의 열매이고 행동 패턴이며 경건한 습관이 감사의 삶입니다. 이렇게 감사하는 삶이 중요한데,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어떤 근거로 감사할 수 있습니까?
1. 감사는 그리스도의 평강에서 시작된다
“그리스도의 평강이 너희 마음을 주장하게 하라 너희는 평강을 위하여 한 몸으로 부르심을 받았나니 너희는 또한 감사하는 자가 되라” (15절)
여기서 “너희는 또한 감사하는 자가 되라”고 말씀합니다. 왜 또는 어떻게 감사하는 자가 될 수 있습니까? 이 본문에서는 감사의 구체적인 이유나 어떤 특정한 상황이 나오지 않습니다. 다만 그리스도의 평강에 대해서 말하면서 감사하는 자가 되라고 말씀합니다.
“그리스도의 평강”은 그리스도로 말미암은 평안, 혹은 그리스도가 주신 평화를 의미합니다. 그리스도로 인한 평강은 악한 행실을 행하며 마음으로 하나님과 원수 되었던 자가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피를 통해 하나님과의 관계가 열리게 되었음을 말합니다(1:20-22). 이렇게 예수님의 피로 하나님과 평화를 누리며 살아가는 것은, 그분으로 인하여 죄 사함을 받아 하나님 나라의 백성이 되어 하늘에 있는 소망을 가진 자가 되었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15절에서는 “그리스도의 평강이 “너희 마음을 주장하게 하라”고 말씀합니다. ‘주장하다’라는 동사는 ‘다스리다, 통제하다’라는 뜻입니다. “너희”는 한 몸으로 부르심을 받은 교회인데, 그러므로 이 명령은 단지 한 개인으로서의 크리스천이 예수님의 십자가로 인한 하나님과의 평화와 영생의 소망을 가지고 사는 것뿐 아니라, 교회 전체가 이런 평강에 의해 다스려지고 충만해지는 것을 말합니다.
교회에서 이루어지는 예배와 말씀과 교제와 사역과 선교와 그 외 모든 것이 그리스도 예수의 십자가 복음으로 인한 평강에 근거하여 이루어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더 쉽게 말하면, 예수님의 십자가를 통해 구원을 받은 사람들로서, 그것을 이루어주신 예수 그리스도의 평강을 생각하며 감사하는 삶을 살아야 한다는 말입니다. 우리를 구원해주신 그 은혜를 생각하면 감사하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2. 감사는 그리스도의 말씀이 충만할 때 지속된다
“그리스도의 말씀이 너희 속에 풍성히 거하여 모든 지혜로 피차 가르치며 권면하고 시와 찬송과 신령한 노래를 부르며 감사하는 마음으로 하나님을 찬양하고” (16절)
성도의 감사는 그리스도의 말씀과 깊은 관계가 있습니다. 16절에서 그리스도의 말씀이 “너희” 곧 교회 안에 풍성히 임할 때 감사할 수 있다고 합니다. 모든 성도는 한 몸으로 부르심을 받은 자입니다. 그렇기에 그리스도의 평강을 누릴 수 있고 그 평강이 교회에 속한 모든 성도의 마음을 주장하도록 하라는 명령도 받을 수 있는 겁니다.
그리스도의 평강이 교회를 주장해야 할 뿐 아니라, 그리스도의 말씀이 교회 안에 풍성히 거해야 합니다. 그럴 때 피차 가르치고 권면하며, 시와 찬송과 신령한 노래를 부르며, 감사하는 마음으로 하나님을 찬양하는 아름다운 삶이 가능합니다.
그리스도의 말씀이 교회 안에 풍성히 거한다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복음의 말씀이 풍성하게 거한다는 뜻입니다. 그렇다면 교회 안에 그리스도의 말씀, 곧 예수님의 십자가 복음의 진리가 풍성히 거하려면 구체적으로 어떻게 되어야 합니까? 이 본문의 문맥이 공적 예배를 염두에 둔 말씀이라고 하면, 예배에서 다른 것을 말하지 않고 예수님의 십자가 복음이 분명하게 반복적으로 선포될 때 그리스도의 말씀이 풍성히 거하는 것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제가 목사로서 이렇게 설교를 하고 있지만, 교회에서 어느 누가 30분, 40분씩 이야기하는 것을 이렇게 가만히 앉아서 들어주겠습니까? 지금 속으로는 무슨 생각을 하시는지 모르지만(?), 최소한 30-40분 동안 집중해서 들어주십니다. 그렇다면 이렇게 귀한 기회를 받았는데, 그저 자기 얘기나 하고 무슨 철학이나 문학이나 세상 돌아가는 얘기나 그런 말만 하고 있다면 잘못입니다. 강단에서는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 선포되어야 합니다.
그런데 목사도 설교자로서 최선을 다해야 하지만, 성도님들도 할 일이 있으십니다. 주보 사이에 끼어드리는 설교 노트가 아주 간단하지만 “오늘 내게 주시는 하나님의 말씀은?”, 그리고 “오늘 주신 말씀에 대한 나의 결단은?”이라고 되어 있습니다. 설교에 여러 가지 내용이 나오지만 그 중 자신의 마음에 와 닿는 것을 하나 정하여 쓰는 겁니다. 그리고 일주일 동안 실제로 그렇게 살기 위해 애써보는 겁니다. 그리고 목장에 가서 그렇게 말씀대로 살아보았더니 잘됐다거나 아니면 잘 안 되었다거나 나누고, 그러면 다른 지체들이 또 격려하면서 서로 기도하고 그러는 겁니다.
제가 오래 전에 한국에서 알던 어떤 사람이 있었는데(물론 안 믿는 사람입니다), 어느 날 교회를 가서 설교를 들으며 “저 목사 설교 잘하네.” 하며 다닙니다. 그렇게 몇 달을 다니다가 싫증이 나면 설교를 잘한다는 다른 교회로 갑니다. 그러다 또 싫증이 나면 다시 다른 교회로 갑니다. 그런 식으로 설교에 따라 이리 갔다 저리 갔다 하는 걸 보았습니다.
물론 설교자는 사람이지만 단순히 이것이 목사가 하는 말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생각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오늘 예배 때 설교를 통해 하나님께서 분명히 내게 필요한 말씀을 주실 것이다.’ 하는 기대감을 가지고 기도하며 예배를 드리면서 하나님의 말씀에 귀 기울여야 합니다. 그럴 때 주시는 말씀을 받게 되고 그것을 실제 삶 속에서 행하며 살며 또 목장식구들과 함께 그것을 나누는 겁니다. 그렇게 될 때 그리스도의 말씀이 교회 안에 풍성히 거하는 역사가 일어납니다.
“그러므로 너희가 그리스도 예수를 주로 받았으니 그 안에서 행하되, 그 안에 뿌리를 박으며 세움을 받아 교훈을 받은 대로 믿음에 굳게 서서 감사함을 넘치게 하라” (골 2:6-7)
이 말씀대로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깊이 뿌리를 내리고 세움을 받아, 받은 교훈대로 믿음에 굳게 서서 살아가는 것을 보면, 말씀이 풍성히 거하는지 알 수 있습니다. 이러한 삶은, 바로 이 구절 뒤에 나오는 것처럼, 철학과 헛된 속임수에 사로잡히지 않는 삶이며, 사람의 전통과 세상의 초등 학문을 따르지 않는 삶입니다.
그런데 왜 복음의 진리가 풍성하게 교회 안에 거할 때 감사하는 마음으로 하나님을 찬양하게 됩니까? 그것은 예수님의 십자가 복음으로 인한 구원의 은혜에 대한 감격이 교회 안에 넘치게 되기 때문입니다. 아무 공로 없이 죄인이 은혜로 구원을 받고 의롭다 함을 얻어 영생의 소망을 가지게 되었으니, 어떻게 감사하지 않을 수가 있습니까?
그런데 문제는 이것을 자꾸 잊어버리거나 이 은혜에 대해 무감각해지는 데 있습니다. 정말 예수님을 주와 구세주로 믿고 영접했다면 구원을 받으며, 그 구원을 사탄은 빼앗아가지 못합니다. 하지만 구원의 감사와 감격을 빼앗아갈 수가 있습니다. 그래서 항상 복음, 곧 그리스도의 말씀이 각자의 삶과 교회 안에 풍성히 선포되고 충만히 거하게 해야 합니다. 그런 이유로 교회에 목사와 교사를 주셨습니다.
다른 곳에서 부목사로 섬기던 시절에 가끔 주일예배에서 설교를 하게 되었습니다. 설교를 했던 날 예배가 끝나고 문에 서서 나가는 성도님들과 악수를 하는데 한 분이 나가면서 오늘 설교에 은혜 많이 받았습니다.”라고 했습니다. 당시 목회 경험도 별로 없고 그래서 그랬는지, 저는 정말 궁금해서 “무엇에 은혜를 받으셨는데요?” 하고 여쭈어봤습니다. 그랬더니 그분이 급 당황하면서 “예? 아... 그게.... 저, 그러니까.... 하여간에 은혜 많이 받았습니다.” 하고 급히 가는 것이었습니다. 그때 저는 깨달았습니다, 그런 질문은 하면 안 된다는 것을...
그런 점에서 여기 16절에서 “피차 가르치며”라는 말을 주목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교회 안에 그리스도의 말씀이 충만하기 위해서는 목사의 역할이 중요하지만, 그에 못지않게 모든 성도들의 역할도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성도들은 서로를 가르치며 권면할 수 있어야 합니다.
이게 바로 그것입니다. 설교를 듣거나 삶 공부를 할 때 말씀 한 가지를 마음에 품고 일주일 동안 실제로 말씀을 실천하며 살아보고, 목장에 와서 그것을 나누며 격려하는 것, 그것이 서로 가르치며 권면하는 것을 말합니다. 듣기만 하고 마는 것이 아니라 말씀대로 살아보는 겁니다. 그렇게 온전하고도 풍성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복음이 선포되고, 교회 안에 그리스도의 말씀이 충만해지고, 성도들도 서로 복음을 나누며 가르치는 풍성한 모습을 생각해보십시오. 얼마나 아름답습니까.
작년에 임직자 교육을 할 때 읽은 책 중에 <평생감사 실천편>이 있는데, 그 책에 나온 흥미롭고도 귀한 이야기가 있어 나누고자 합니다. 김밥집을 운영하면서 감사하는 마음이 없으면 절대 돈을 벌 수 없다는 확신을 가지고 감사를 삶 속에서 하나하나 적용하며 사는 사장이 있습니다. 그 결과 처음엔 천 원짜리 김밥을 파는 가게로 시작했다가, 현재 김밥 및 커피 직영점 열다섯 군데를 운영하고 있고, 직원도 200명이 넘어 중소기업을 이룰 정도가 되었습니다.
이분은 해외여행이 어려웠던 시절, 골목길에서 여섯 평짜리 김밥집을 할 때부터 종업원들이 열심히 일해주어서 감사하다며, 부부동반으로 해외여행을 보내주었습니다. 손님들을 대할 때도 손님은 눈이 뒤에 붙어 있어서 가식으로 대하면 금방 다 안다면서, 가슴속에서 우러나오는 감사함으로 손님을 대했습니다. 그 결과, 아무리 수학적으로 따져 봐도 손바닥만 한 가게에서는 나올 수 없는 매출이 나오게 되었습니다. 그 사장은 이렇게 말합니다.
“뭐 특별한 공식이 있는 것은 아닙니다. 다들 아는 이야기일 뿐입니다. 다만 다른 점이 있다면 남들은 알고도 안 했고 저는 아는 것을 한 것뿐입니다. 돈 버는 비결은 머리도 아니고, 성실도 아닙니다. 그렇다고 노하우도 아닙니다. 바로 감사하는 마음입니다. 감사하는 마음이 우러나오지 않으면 절대 돈을 벌 수 없습니다. 저는 감사하는 마음을 현장에서 곧바로 실천했을 뿐입니다.”
계속해서 그는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IMF 시절에는 특히 많았고 지금도 여전합니다만, 천 원짜리 김밥 한 줄을 먹고 가는 손님들이 있습니다. 사실 천 원짜리 김밥 한 줄을 팔면 얼마 남고를 떠나서, 설거지 접시가 일곱 가지가 나옵니다. 사람은 다 비슷비슷합니다. 설거지 접시 일곱 개에 생각의 초점을 맞추게 되면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감사를 할 수 없게 됩니다. 이럴 때마다 저는 그 손님이 수많은 가게 중에 우리 가게에 왔다는 것을 대단한 사건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면 감사가 저절로 나오게 됩니다.
한 번은 이런 적이 있었습니다. 새벽에 김밥을 사러 오신 여자 손님이 슬리퍼를 질질 끌고 가게에 들어왔습니다. 세수를 안했는지 얼굴에 땟국물이 흘렀고, 머리는 헝클어져 있었으며 옷차림도 엉망진창이었습니다. 나도 인간인지라 아무리 감사를 하려고 해도 감사가 나오지 않았습니다. 물 흐르듯이 가식 없는 감사의 마음을 보여야 하는데 불가능했습니다. 감사거리를 찾기 위해 얼른 그 손님을 다시 쳐다보았습니다. 귀가 잘 생겨보였습니다. 마음속으로 ‘아, 귀가 잘 생긴 분이다.’라고 외쳤더니 감사하는 마음이 우러나오게 되었습니다. 이렇게 한 사람, 한 사람을 감사한 마음으로 대했더니 소문이 나게 되었고, 결과는 매출로 연결되었습니다. 손바닥만 한 가게에 일어난 매출이 200평짜리 레스토랑보다 많았습니다.”
얼마나 굉장한 이야기입니까. 특히 이 말이 남습니다. “다들 아는 이야기일 뿐입니다. 다만 다른 점이 있다면 남들은 알고도 안 했고 저는 아는 것을 한 것뿐입니다.” 하나님의 말씀도 똑같습니다. 교회를 다니면 말씀을 들어서 어느 정도 내용은 다 압니다. 다만 다른 점이 있다면, 알고도 행하지 않는 사람이 있고 행하여 귀한 유익을 얻는 사람이 있습니다. 말씀을 알고도 행하지 않는 사람과, 하나를 배워서 하나를 행하는 사람 사이에는 엄청난 차이가 나타나게 됩니다. 처음에는 거의 비슷해 보이지만, 계속해서 나아가다 보면 둘 사이에 엄청난 거리를 만들어냅니다.
3. 감사는 주 예수의 이름으로 더욱 커진다
“또 무엇을 하든지 말에나 일에나 다 주 예수의 이름으로 하고 그를 힘입어 하나님 아버지께 감사하라” (17절)
‘말이든 일이든 무엇을 하든지, 그 모든 것을 주 예수의 이름으로 하고, 그분을 통해 하나님 아버지께 감사하라’는 뜻입니다. 성도가 감사하는 또 하나의 근거는 주 예수의 이름으로 말이나 일 등 무엇이든 할 수 있다는 점입니다. 이것은 예수님을 통해 하나님 아버지께 감사하는 것입니다. 주 예수의 이름으로 무엇이든 한다는 것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조금 전에 읽었던 2:6-7을 참고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러므로 너희가 그리스도 예수를 주로 받았으니 그 안에서 행하되, 그 안에 뿌리를 박으며 세움을 받아 교훈을 받은 대로 믿음에 굳게 서서 감사함을 넘치게 하라.”
그리스도 예수를 주로 받은(믿고 고백하는) 사람은 주 안에서 행하며 주 안에 뿌리를 박은 사람입니다. 그렇기에 믿음에 굳게 서서 주 예수를 힘입어 살 수 있으며, 그 모든 삶의 결과로 넘치도록 감사하게 됩니다. 그러니까 그리스도 예수를 주와 구세주로 고백하고 그 앞에 엎드리는 자는 주 안에서 행할 수 있으며 행하는 자라는 겁니다. 그 다음 2:9-10에 이것에 대한 설명이 계속됩니다.
그러므로 주 예수의 이름으로 무엇이든지 행한다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를 주로 고백하는 성도가 그 안에서 완전히 새롭게 되어 살아가는 것을 의미합니다. 좀 더 구체적으로 말하면, 주 예수의 이름으로 행한다는 것은 완전히 새롭게 된 성도가 이전의 자기를 위한 삶을 버리고 주님을 위해 살아가며, 이전의 자신을 의지하던 삶을 버리고 주님만을 의지하여 살아간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만유의 주가 되셔서 하나님 우편에 앉아 온 우주만물을 다스리시는 주님께서 함께 하시고 능력 주시는 사람의 삶이 어떠하겠습니까. 그래서 개역개정성경에는 ‘그를 통하여’ 대신 “그를 힘입어”로 번역을 했습니다.
여기서 “주 예수의 이름으로”의 뜻을 하나 더 생각해볼 필요가 있습니다. 그것은 성도의 감사를 받으시는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는 표현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를 수 있는 자는 오직 그리스도 안에서 자녀가 된 사람뿐입니다. 그래서 성도는 하나님을 ‘아바(아빠) 아버지’라고 부르며 하나님의 자녀로서 기도할 수 있고, 그리스도와 함께 상속자로서 그 영광에 참여하는 존재인 것입니다.
주 예수의 이름으로 모든 것을 행한다는 말씀은, 만유의 주가 되신 주 예수 안에서 행하며 그 인도하심과 능력을 힘입어 행한다는 의미라고 했습니다. 또한 이것을 주 예수의 이름을 의지하여 하나님의 자녀가 된 성도의 삶을 가리킨다고 보면, 17절에서 말하는 성도의 삶의 풍성함이 보다 잘 드러나게 됩니다. 성도는 주 예수의 이름으로 하나님을 아바 아버지라 부르며, 그 앞에 나아가 그분의 모든 풍성함에 참여하며 누리는 사람입니다. 이처럼 감사할 만한 것이 또 어디 있겠습니까.
[나가는 말]
오늘은 1년에 한 번씩 돌아오는 추수감사주일입니다. 물론 평소에도 감사하고 살아야겠지만, 이번 주는 특히 1년 동안 주신 은혜를 돌아보며 주님께 감사하는 절기입니다. 그런데 삶이 힘들고 여러 사정 때문에 감사함이 없다고 하시겠습니까? 무슨 추수감사헌금을 또 하라고 하느냐고 불만이 생깁니까? 감사의 제목을 나누자고 하면 항상 똑같고 감사할 것이 없다고 하시겠습니까? 그러나 그것은 감사의 제목이 없는 것이 아니라 볼 줄을 모르는 겁니다. 우리 삶에 감사할 제목들이 얼마나 많은지, 조금만 생각해보면 너무 많아서 놀라게 됩니다.
인문계 대학졸업장을 받은 최초의 시각 및 청각 중복장애인인 헬렌 켈러(Helen Keller는, 평생을 시각과 청각의 중복장애를 가지고 살아야 했습니다. 앤 설리번 선생과 자기 자신의 노력으로 언어적 문제를 극복하기도 했습니다. 헬렌 켈러가 쓴 글 중에 “만약 내가 사흘 동안 눈을 뜨고 볼 수 있다면”이라는 에세이가 있는데, 거기에는 간절한 소망의 내용이 이렇게 적혀 있습니다.
“첫째 날, 눈을 뜨는 첫 순간, 나를 이만큼 가르쳐주신 설리번 선생님을 찾아가겠습니다. 그리고 지금까지 내 손끝으로 만져 알고 있던 그분의 인자한 얼굴과 아리따운 몸매 등을 몇 시간이고 물끄러미 바라보면서 그분의 모습을 나의 마음속 깊이 간직해 두겠습니다. 다음엔 친구들을 찾아가겠습니다. 그 다음엔 들과 산으로 산책을 나가겠습니다. 바람에 나풀거리는 아름다운 나뭇잎들, 들에 피어 있는 예쁜 꽃과 풀들, 그리고 저녁이 되면 석양에 빛나는 아름다운 노을을 보겠습니다.
둘째 날, 이른 새벽엔 먼동이 트는 웅장한 장면을 보겠습니다. 아침엔 메트로폴리탄에 있는 박물관을 보겠습니다. 오후엔 미술관을 보겠습니다. 저녁엔 보석 같은 밤하늘의 별들을 보겠습니다.
셋째 날, 새벽 일찍 큰길가에 나가 출근하는 사람들의 얼굴 표정을 보겠습니다. 아침엔 오페라하우스에 가겠습니다. 오후엔 영화관에 가겠습니다. 어느덧 저녁이 되면 건물이 숲을 이룬 다운타운으로 나가서 네온사인이 반짝거리는 거리, 쇼윈도에 진열된 아름다운 상품들을 보겠습니다. 집에 돌아와 눈을 감아야 할 마지막 순간에 나는 사흘만이라도 볼 수 있게 해주신 나의 하나님께 감사의 기도를 드리고 영원한 암흑의 세계로 돌아가겠습니다.”
그저 사흘만 보는 것이 간절한 소망이었던 헬렌 켈러가 아름다운 인생을 보낼 수 있었던 비결이 무엇이었는지가 너무나 잘 드러나 있는 글입니다. 그렇게 1분이라도 보고 듣기를 원했던 헬렌 켈러를 생각할 때, 우리가 보고 듣는 것은 어떻습니까? 정말 쓸 데 없는 것들을 보고 듣는 경우가 너무 많습니다. 우리가 낭비하는 1분이 헬렌 켈러가 그토록 보고 듣고 싶어 했던 1분이었습니다. 헬렌 켈러는 결론적으로 이렇게 고백했습니다.
“나는 나의 역경에 대해서 하나님께 감사한다. 왜냐하면 나는 역경 때문에 나 자신, 나의 일, 그리고 나의 하나님을 발견했기 때문이다.” 사실 우리는 헬렌 켈러보다 훨씬 좋은 조건 속에서 살아가는 사람들 아닙니까. 늘 하나님께 감사하며 살아감으로 풍성한 은혜를 경험하고 또 복을 나누어주는 아름다운 인생이 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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