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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약 --------------------/골로새서

골 4장 2~4절(기도하는 그리스도인 바울) - 이준원

by Preacher 2024. 2. 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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골4장 2~4

기도하는 그리스도인 바울

이준원 목사 2019.7.10.

콜럼버스한인장로교회 https://www.kpccoh.org

 

[들어가는 말]

 

오늘부터 수요예배의 새 말씀 시리즈를 시작합니다. 수요예배 때는 좋은 책을 한 권 정해서 그것을 중심으로 말씀을 나누고 있습니다. 요즘에도 좋은 책들이 많아서 이번에는 어느 책으로 할까 기도하며 생각하다가, 최근에 나온 이동원 목사님의 <내 기도를 바꾼 기도>라는 책을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훑어보니까 내용이 아주 좋았습니다. “바울을 따라 걷는 기도 성화의 길”이라는 부제가 달린 책입니다. 그런데 ‘내 기도를 바꾼 기도’가 무엇인가 하면, 바울의 기도를 통해 우리를 성숙한 기도생활로 이끌 수 있는 내용으로 되어 있습니다.

 

주일예배 때 계속해서 사도행전을 살펴보고 있는데, 설교를 준비하면서 저 자신부터가 정말 많은 것을 배우고 있습니다. 특히 사도행전의 내용과 바울의 편지들이 서로 연결되는 것을 살펴보며 정말 많이 배우고 있습니다. 그래서 이번에는 사도 바울의 기도를 살펴보는 책으로 정하게 되었습니다. 바울의 기도는 우리가 보통 하는 기도의 내용과 너무나 다르다는 것을 발견합니다. 보통 우리가 기도할 때 나를 위해 기도하는데, 내 건강, 내 가족의 건강, 내 삶의 성공을 위해 기도합니다. 그런 것이 잘못된 것은 아닙니다. 당연히 기도해야 합니다. 그런데 거기서 멈추는 것이 문제입니다. 바울의 기도에는 그런 내용이 없습니다. 대신 그가 중시했던 성경적 가치들이 담겨 있습니다.

 

바울의 기도는 결국 그가 추구한 성화의 길, 즉 예수 그리스도의 푯대를 향하여 앞을 보고 달려간다는 것과 연결되어 있습니다. 정말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의 신실한 제자가 되기를 원했습니다. 하나님의 신실한 종이 되기를 원했습니다. 바로 그러한 성화의 길과 그의 기도가 연결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많은 크리스천들이 아직도 기복주의 신앙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어서, 기도제목을 보면 나를 위해, 내 가족을 위해, 내 아이를 위해, 내 성공을 위해 하는 기도에 머물고 있습니다. 그러나 바울의 기도는 그런 기도가 아니라 성화를 위한 기도였습니다. 정말로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답게, 하나님의 자녀이자 종답게 사는 것을 위한 기도였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바울의 기도를 함께 살펴보는 가운데 성숙한 기도가 무엇인지를 배우며, 함께 성화의 길로 우리도 힘차게 걸어갈 수 있기를 원하는 마음으로 몇 주 동안 말씀을 나누겠습니다.

 

1. 바울, 그는 누구인가

 

이전 경찰국가 시대에는 감히 지도자를 비판하지 못했지만, 지금은 내놓고 비판합니다. 우리는 사는 이 시대에 지도자들에 대한 비판은 아주 넘치지만, 존경받는 지도자의 모습은 많지 않습니다. 엄청난 정치인이나 엄청난 재벌은 부러움의 대상이기는 합니다. 권력이 있고 돈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존경의 대상은 되지 못합니다. 우리가 따라가고 싶고 본받을 만한 지도자가 별로 없는 현실이 우리 시대의 비극입니다. 그런데 감히 ‘나를 본받으라’ 하고 말한 지도자가 있었습니다. 바로 사도 바울입니다.

 

“내가 그리스도를 본받는 자가 된 것같이 너희는 나를 본받는 자가 되라” (고전 11:1)

 

이것은 아주 대담한 선언이지만, 단순히 자기를 본받으라는 것이 아니라 자기가 그리스도를 본받는 것을 본받으라는 것입니다. 바울은 훗날 자신의 과거를 돌아보면서 자기가 “전에는 비방자요 박해자요 폭행자”(딤전 1:13)였다고 고백합니다. 실제로 그는 본래 나사렛 예수와 그를 따르는 사람들을 핍박하는 복음의 원수였습니다. 이전 성경 번역에는 자기가 “죄인 중의 괴수”였다고까지 합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복음의 원수였고 죄인 중의 괴수였던 바울을 만나주셔서, 그를 복음을 전하는 사도로 삼으시고 세상을 변화시키는 도구로 사용하셨습니다.

 

주님은 열두 사도도 사용하셨지만, 놀랍게도 복음의 원수를 변화시키셔서 가장 위대한 복음의 사도가 되게 하셨습니다. 이처럼 하나님의 역사는 참 놀랍습니다. 지금 안 좋은 모습이라고 해서 나중에도 계속 그런 것도 아니고, 지금 잘한다고 나중에도 계속 잘한다는 보장도 없습니다. 그런데 이처럼 복음의 원수도 바꾸어 사용하실 수 있는 것이 십자가의 능력입니다. 이 바울을 통해 복음이 세계로 퍼져 나가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서구사회가 바울과 다른 사도들의 복음 전파 때문에 복음이 전해지고 교회가 세워졌습니다. 바울의 생전에 그와 그 일행이 도착하는 도시들은 요동쳤고 충격을 받았습니다. 그래서 그와 동역자들을 가리켜 ‘천하를 어지럽게 하는 사람들’(행 17:6)이라고 했습니다. 다른 말로 ‘세상을 뒤집어놓는 사람들’이라는 별명을 얻었습니다.

 

그런데 외경 중에 <바울과 테크라 행전(Acts of Paul and Thecla)>이라는 책이 있습니다. 성경에는 바울의 외모가 안 나오는데, 거기에 바울의 외모가 이렇게 묘사됩니다. “키는 작고, 머리는 대머리이며, 휘어진 다리에, 눈썹은 서로 맞닿았고, 매부리코에 다부진 풍채를 가진 그는 범상하지 않은 사람, 천사와 같은 사람이었다.” 그의 외모는 실제로 그다지 볼품이 없었던 것으로 여겨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럴지 몰라도 바울은 실로 위대한 영적 거인이었습니다.

 

2. 아름다운 영적 모범

 

복음 전파에 있어 대표적인 사도라고 할 수 있는 바울은, 후일 골로새 교회에게 보낸 편지에서 세상을 변화시키는 도구로 쓰임 받았던 자신의 사람됨을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래서 오늘 우리가 골로새서를 살펴보면, 우리가 본받을 만한 인물은 그는 어떤 사람이었습니까?

 

1) 선교의 사람

 

바울은 전 세계에 다니며 복음을 전했지만, 그의 최종 목적지는 로마였습니다. 사실은 로마를 지나 스페인까지 가겠다는 비전을 갖고 있었습니다. 그는 결국 나중에 예루살렘을 갔다가 체포되어서 ‘황제에게 상소한다’고 하여 죄수의 신분으로 로마에 호송되어 감옥에 갇혔습니다. 그 안에서 쓴 편지 중의 하나가 골로새서이며, 그래서 골로새서는 옥중서신입니다. 사실 바울은 억울하게 감옥에 갇혔습니다. 무슨 죄를 지어서 갇힌 것이 아닙니다. 그렇게 감옥에 갇히게 되면 대부분의 사람들은 무엇에 가장 중요한 관심을 두겠습니까? 빨리 풀려나서 자유의 몸이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바울은 우리의 기대를 깨뜨리는 놀라운 고백을 합니다.

 

“또한 우리를 위하여 기도하되 하나님이 전도할 문을 우리에게 열어 주사 그리스도의 비밀을 말하게 하시기를 구하라 내가 이 일 때문에 매임을 당하였노라” (3절)

 

바울은 지금 골로새 성도들에게 ‘내가 감옥에서 빨리 풀려나도록 기도해달라.’라고 한 것이 아니라, 전도의 문이 더 크게 열리도록 기도해줄 것을 요청합니다. 그는 주님이 자신을 부르셔서 주님이 주신 본래의 사명을 한순간도 잊지 않았던 것입니다. 복음 전파의 사명이었습니다. 또한 그는 자신이 “이 일”, 곧 전도하는 일 때문에 갇혀 있다고 말합니다. 그가 다메섹으로 가던 길에서 예수님을 만났을 때 받았던 사명이 무엇이었습니까?

 

“자, 일어나서, 발을 딛고 서라. 내가 네게 나타난 목적은, 너를 일꾼으로 삼아서, 네가 나를 본 것과 내가 장차 네게 보여 줄 일의 증인이 되게 하려는 것이다. 나는 이 백성과 이방 사람들 가운데서 너를 건져내어, 이방 사람들에게로 보낸다. 이것은 그들의 눈을 열어 주어서, 그들이 어둠에서 빛으로 돌아서고, 사탄의 세력에서 하나님께로 돌아오게 하며, 또 그들이 죄 사함을 받아서 나에 대한 믿음으로 거룩하게 된 사람들 가운데 들게 하려는 것이다.” (행 26:16-18, 새)

 

이것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께서 주신 전도와 선교의 사명이었습니다. 그날 이후 그는 즉시 나가 다메섹에서 복음을 전했습니다. 그러다 핍박을 받아 도망치게 되었습니다. 그 후 안디옥 교회의 파송을 받은 후부터 1차 전도여행 때 구브로와 소아시아(터키)의 갈라디아로 가서 복음을 전했고, 나중에 2차 때도 이미 갔던 곳 중심으로 가서 복음을 전하려 했는데 성령께서 그의 눈을 넓혀주셔서 그리스와 유럽에 복음을 전했습니다.

 

그렇게 바울이 복음을 들고 가는 곳마다 믿는 사람들이 나오고 교회가 세워졌습니다. 지금처럼 교통수단이 발달되지 못한 때였기에, 그는 걷기도 하고 때로는 배를 타기도 하며 무려 만 2천 마일이 넘는 엄청난 거리를 다니면서 복음을 전했습니다. 그 중 대부분이 걸어다닌 것인데, 얼마나 엄청난 거리입니까? 그는 세계의 역사를 바꾸었고 기독교의 지도를 바꾸어놓은 선교 전략가이자 선교 개척자였습니다.

 

그런데 바울은 혼자 전도하러 다닌 것이 아니라, 다른 동역자들과 전도여행에 함께했습니다. 그래서 처음에는 바나바와 마가와 갔고, 그 후에는 실라, 디모데, 누가 등과 같이 갔습니다. 또한 그는 자신이 개척한 교회에 필요한 지도자들을 잘 세울 줄 알았던 지혜로운 선교 동원가였습니다. 그뿐 아니라 자기가 개척한 교회의 성도들을 말씀으로 양육하고자 편지도 썼습니다. 그는 신약성경 27권 중 13권의 책을 쓴 선교신학자이기도 했습니다.

 

바울이 회심한 것은 주후 33년경으로 보입니다. 예수님이 BC 4년경에 태어나신 것으로 보는데, 그러니까 바울은 예수님보다 몇 살 아래인 사람입니다. 그가 예수님을 만났을 때의 나이가 30세 정도였을 것으로 추정됩니다. 그 후 세 차례 이상의 전도여행으로 세계 선교의 사명에 최선을 다한 그는, 주후 66년에서 67년경 그의 나이 60대 중후반의 어느 시점에, 네로 황제에 의해서 자신이 말한 것처럼 순교의 제단에 자신의 뜨거운 피를 전제로 부어드리고 순교한 선교의 사람이었습니다.

 

선교 사역은 해외에 파송된 선교사들만 감당하는 일이 결코 아닙니다. 사실 선교는 교회가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교회를 통해 하십니다. 그 중 몇 사람이 실제로 나가서 현지 사역을 하고 교회는 함께 협력하는 것입니다. 전도와 선교는 모든 그리스도인에게 주어진 과제입니다. 그러므로 바울처럼 우리도 모두 헌신된 선교의 사람이 되기를 바랍니다.

 

2) 복음의 사람

 

바울은 골로새 교회 성도들에게 편지를 써서 자신을 위해 기도해줄 것을 요청하면서, 구체적인 기도제목을 알려줍니다.

 

“그리하면 내가 마땅히 할 말로써 이 비밀을 나타내리라” (4절)

 

여기서 말하는 “이 비밀”은 무엇을 말합니까? 바울은 1장에서 이미 이것에 대해 언급한 적이 있습니다.

 

“하나님이 그들로 하여금 이 비밀의 영광이 이방인 가운데 얼마나 풍성한지를 알게 하려 하심이라 이 비밀은 너희 안에 계신 그리스도시니 곧 영광의 소망이니라” (골 1:27)

 

이 비밀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바울이 자신의 모든 것을 걸고 증언하고자 한 복음이 바로 그리스도였습니다. 복음은 우리 안에 계신 그리스도입니다. 예수님이 곧 우리의 구원, 우리의 생명, 우리의 영원한 소망이라는 것입니다. 바울은 골로새 교회에 주어진 이 복음에 감사했습니다.

 

“이 복음이 이미 너희에게 이르매 너희가 듣고 참으로 하나님의 은혜를 깨달은 날부터 너희 중에서와 같이 또한 온 천하에서도 열매를 맺어 자라는도다” (골 1:6)

 

복음이 올 때,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를 깨닫게 되고, 그 은혜를 전하는 사람이 됩니다. 즉, 열매를 맺는 것입니다. 그런데 바울은 거기서 멈추지 않습니다.

 

“만일 너희가 믿음에 거하고 터 위에 굳게 서서 너희 들은 바 복음의 소망에서 흔들리지 아니하면 그리하리라 이 복음은 천하 만민에게 전파된 바요 나 바울은 이 복음의 일꾼이 되었노라” (골 1:23)

 

바울은 골로새 성도들에게 흔들리지 않고 굳게 서라고 권면합니다. 그래야 복음의 일꾼이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복음에 대해 흔들리고 굳게 서지 못하니까 복음의 일꾼이 되지 못하는 것입니다. 다 그런 것은 아니지만, 선교를 빙자해서 자신의 이익을 추구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선교뿐 아니라 목회도 그렇고 기관사역도 그렇습니다. 자기의 왕국을 세우려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전도와 선교와 사역을 말하면서 그리스도가 아닌 자신의 철학이나 사상이나 신념을 퍼뜨리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러나 바울에게 있어서는 그 어떤 것도 아니고 처음부터 끝까지 오직 복음, 오직 그리스도 밖에 없었습니다. 복음을 위해서라면 어떤 불이익과 핍박도 각오하며 나아간 사람이 바울입니다. 그러한 바울은 1차 전도여행 때 복음을 전했던 갈라디아 교회들에게 그것에 대해 경고를 한 적이 있습니다.

 

“실제로 다른 복음이 있는 것은 아닙니다. 다만 몇몇 사람이 여러분을 교란시켜서 그리스도의 복음을 왜곡시키려고 하는 것뿐입니다. 그러나 우리들이나, 또는 하늘에서 온 천사일지라도, 우리가 여러분에게 전한 것과 다른 복음을 여러분에게 전한다면, 마땅히 저주를 받아야 합니다.” (갈 1:7-8, 새)

 

예수 그리스도 외에 다른 복음은 없습니다. 복음은 하나뿐입니다. 그는 로마 교회에게 쓴 위대한 편지인 로마서를 시작하면서도 이렇게 말합니다.

 

“그리스도 예수의 종인 나 바울은 부르심을 받아 사도가 되었습니다. 나는 하나님의 복음을 전하기 위하여 따로 세우심을 받았습니다. 이 복음은 하나님께서 예언자들을 통하여 성경에 미리 약속하신 것으로, 그의 아들을 두고 하신 말씀입니다.” (롬 1:1-3, 새)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가 곧 복음이라는 것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를 대신하여 대속의 제물이 되어 죽으심으로 우리의 죄 문제를 해결해주셨고, 그분의 부활하심으로 우리의 의의 문제를 해결해주셨기 때문입니다.

 

“예수는 우리의 범죄 때문에 죽임을 당하셨고, 우리를 의롭게 하시려고 살아나셨습니다.” (롬 4:25, 새)

 

예수님은 우리의 죄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죽으셨습니다. 우리의 죄를 짊어지고, 우리가 받아야 할 저주와 심판을 대신 받으셨으며, 보혈을 흘려 우리를 용서하셨습니다. 바로 이것이 복음입니다. 그러나 용서는 복음의 한 측면일 뿐입니다. 주님은 더 나아가 우리가 의롭다 하심을 받고 생명 가운데 살게 하시려고 부활하셨습니다. 다시 말해, 그분의 죽으심과 부활을 통해 우리가 새로운 삶을 살게 된 것, 이것이 복음의 핵심입니다. 바울은 자신이 그러한 복음을 전하는 중요한 이유를 다시 한 번 설명합니다.

 

“나도 전해 받은 중요한 것을 여러분에게 전해 드렸습니다. 그것은 곧, 그리스도께서 성경대로 우리 죄를 위하여 죽으셨다는 것과, 무덤에 묻히셨다는 것과, 성경대로 사흗날에 살아나셨다는 것과” (고전 15:3-4, 새)

 

‘전해 받은 중요한 것’이 바로 복음이고, 그 복음이 바로 사도 바울의 존재 이유였습니다. 그는 복음 때문에 살고 복음 때문에 죽는 사람이었습니다. 바울은 처음도 마지막도 다 복음의 사람이었습니다. 바울을 콕 찌르면 복음이 나왔을 것입니다. 우리가 바울에게서 받는 도전은, 우리도 복음의 사람이 되어야겠다는 것입니다. 바울의 인생에 복음이 전부였다면, 우리에게도 복음이 전부여야 합니다. 복음을 붙들고 복음 때문에 살며 “나를 본받으라”라고 말했던 바울의 삶이 바로 우리 자신의 삶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3) 기도의 사람

 

바울은 전도와 선교와 복음을 말하면서 그 모든 것을 가능하게 했던 가장 중요한 핵심이 기도였다고 고백합니다. 그는 기도의 사람이었습니다. 바울의 복음 전파와 선교 사역도 기도를 떠나서는 생각할 수 없었습니다.

 

“기도를 계속하고 기도에 감사함으로 깨어 있으라” (2절)

 

기도는 우리의 영혼을 깨웁니다. 기도가 잠들면 우리의 영혼이 잠들게 되어서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사람이 되고 맙니다. 오늘 수요예배에는 하루 종일 일을 하고 와서 얼마나 피곤합니까? 일하고 피곤하여 잠시 깜빡하는 것은 충분히 이해가 됩니다. 그런데 주일예배는 오전 11:15이니까 수면시간은 충분합니다. 그런데 밤을 새워 일했거나 늦게까지 일해서 정말 피곤한 분들 외에, 상습적으로 조는 분들이 있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기도가 죽은 겁니다.

 

기도를 안 하는 분들이 좁니다. 기도가 잠이 들면 실제로 예배 때도 잠들게 되어 있습니다. 영혼이 잠자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되면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사람이 되고 맙니다. 겉으로는 멋지게 보이고 뭔가를 하는 척할 수는 있지만, 결국은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사람이 됩니다. 예수님도 그것을 말씀하셨습니다.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이다. 사람이 내 안에 머물러 있고, 내가 그 안에 머물러 있으면, 그는 많은 열매를 맺는다. 너희는 나를 떠나서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 (요 15:5, 새)

 

주님을 떠나서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존재가 바로 우리들입니다. 우리가 이 말씀을 정말 믿습니까? 그런데 사실 우리가 주님 없이 하는 일이 얼마나 많습니까? 주님을 떠나서는 아무것도 할 수 없는데 주님을 떠나서 하는 일이 정말 많습니다. 주님의 뜻이 아니라 내 뜻대로 하는 겁니다. 그러나 그런 일은 주님이 인정하시는 일이 아닙니다. 우리가 주님을 떠나면, 아무리 일을 많이 하고 또 남들이 보기에 엄청난 일을 성취했더라도, 그것은 단지 내 뜻대로, 내 맘대로 내가 한 일 밖에는 안 됩니다. 주님이 인정하시는 일, 주님이 기뻐하시는 일은 될 수가 없습니다.

 

그게 왜 그렇습니까? 주님을 떠난다는 것은 관계가 끊어졌다는 것입니다. 주님과의 관계를 보통 말씀과 기도로 합니다. 그런데 기도가 끊어지니까 관계가 끊어지고, 그러니까 주님을 떠나서 자기 마음대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아무것도 할 수 없습니다. 즉, 주님이 원하시는 일은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자기가 원하는 일은 할 수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주님이 기뻐하시는 일은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사람이 되고 맙니다. 참 비참한 인생이 되고 맙니다.

 

이렇게 기도를 잃어버리면 주님과의 관계가 끊어집니다. 그래서 기도는 우리와 주님을 연결하는 생명줄입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인이 된 후 제일 먼저 배우는 것이 기도입니다. 대표기도처럼 형식을 갖춰서 기도할 뿐 아니라, 하나님은 우리의 ‘아빠 아버지’이시므로 편하게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기도로 일하는 것을 배웁니다. 기도로 사랑하는 것을 배웁니다.

 

또한 기도로 전도하는 것과 선교하는 것을 배웁니다. 기도로 복음 전하는 것을 배웁니다. 전도와 선교는 돈으로 하는 것도 아니고 말재주로 하는 것도 아닙니다. 전도와 선교는 기도로 하는 것입니다. 기도 없이는 어떤 전도의 열매도 기대할 수가 없습니다. 우리가 VIP 분들을 주님께 인도하려고 애를 쓰는데, 그래서 무엇보다 지속적으로 기도하며 전도해야 합니다. 바울이 회심하고 나서 제일 먼저 배운 것이 뭔가를 보십시오. 주님은 회심한 바울을 위해 아나니아라는 제자를 바울에게 보내며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주께서 이르시되 일어나 직가라 하는 거리로 가서 유다의 집에서 다소 사람 사울이라 하는 사람을 찾으라 그가 기도하는 중이니라” (행 9:11)

 

바울이 예수님을 만나서 눈이 안 보일 때 무엇을 하고 있었습니까? 기도하고 있었습니다. 그가 그리스도인이 된 후 가장 먼저 배운 것이 기도였습니다. 단순히 기도문을 줄줄 읽거나 외우는 것을 말하는 게 아닙니다. 바울은 엄청난 충격에 빠진 채, 자기를 만나주신 예수님과의 관계를 세워나가는 기도를 했던 것이고, 또 그 동안 자기가 믿어왔던 이스라엘의 하나님을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 하나님으로 새롭게 배우며 관계를 세워나가는 기도를 했던 것입니다.

 

기도는 크리스천으로서 배워야 하는 여러 가지 일들 중 하나가 아니라, 배워야 할 모든 것입니다. 기도로 깨어 일어나고, 기도로 숨 쉬고, 기도로 식사하고, 기도로 감사하고, 기도로 일하고, 기도로 사랑하고, 기도로 우리 인생에 주어진 사명을 감당해야 합니다. 그리고 기도로 전도해야 합니다. 기도하면 전도의 문이 열립니다. 기도하면 전도의 메시지가 주어집니다.

 

“또한 우리를 위하여 기도하되 하나님이 전도할 문을 우리에게 열어 주사 그리스도의 비밀을 말하게 하시기를 구하라 내가 이 일 때문에 매임을 당하였노라” (3절)

 

때로는 내 기도만으로 부족할 때가 있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여기서 “우리를 위하여 기도하되”라고 했습니다. 자기와 함께 하는 동역자들, 자기 일행을 위해 기도해달라고 합니다. 평소에 자기들끼리도 기도했고, 또 자기들을 위해서도 기도해달라고 합니다. 자기 혼자 기도하지 않았습니다.

 

이처럼 교회는 기도하는 공동체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렇게 함께 모일 때 기도하고 혼자서도 기도하고 중보기도실에서도 기도합니다. 우리는 함께 기도하며 함께 사역을 감당해야 합니다. 특히 직분자라면 반드시 중보기도 사역에 동참해야 합니다. 어떤 사정이 있어서 지금 중보기도 헌신자로 사역하지 못하는 분들은, 다음 번 8기에 반드시 참여하셔서 성도들을 위해, 교회를 위해 중보기도 사역을 감당해주시기 바랍니다. 우리 안에 중보기도의 불이 꺼지지 않게 해야 합니다. 특히 직분자들이 중보기도의 불이 꺼지지 않도록 함께 동참해야 합니다.

 

바울이 루스드라에서 복음을 전할 때 나면서부터 다리를 못 쓰던 사람이 일어나는 기적이 일어나자 루스드라 사람들은 신이 내려온 것이 아닌가 생각했습니다. 그때 바울은 “우리도 여러분과 같은 성정을 가진 사람”(행 14:15)이라고 외쳤습니다. 그러니까 바울도 우리와 똑같이 지칠 수 있고, 힘들어할 수 있고, 병에 걸릴 수도 있는 연약한 몸을 가진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도 그는 엄청난 일들을 했습니다. 많은 위대한 일들과 초자연적인 역사들이 바울을 통해 많이 일어났습니다. 그 모든 것은 그가 특별한 사람이어서가 아니라, 능력의 근원이신 주님께 기도로 아뢰며 나아갔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기도로 사역했고, 기도로 세상을 바꾸었습니다. 그의 모든 편지는 기도로 시작하고 기도로 끝납니다.

 

19세기 중반 스코틀랜드의 목회자였던 로버트 머리 맥체인(Robert Murray M’Cheyne)은 기도에 관하여 아주 의미심장한 말을 남겼습니다. “하나님 앞에 홀로 무릎 꿇고 있을 때가 그 사람의 참 모습이며 그 이상은 없다.” 다른 사람이 볼 때 거룩한 척 기도할 수는 있습니다. 그런데 아무도 보고 있지 않을 때 하나님 앞에서 홀로 무릎 꿇고 기도하는 것이 진짜 그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그 이상은 없습니다. 참 맞는 말이라고 생각됩니다. 그러므로 우리에게 기도의 시간이 없다면 우리는 엄격한 의미로 크리스천, 즉 그리스도의 사람이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지금 한국 교회와 교인들이 많이 흔들리고 있는데, 그 가장 큰 원인 중 하나는 기도의 열정을 잃어버렸기 때문입니다. 사실 요즘은 이전만큼 기도하지 않습니다. 신앙생활을 오래 하신 분들은 옛날 기억이 생생하실 텐데, 오래 전 한국교회에서 부흥회를 하면 몇 시간씩 하고 기도도 엄청나게 했습니다. 그런데 요즘은 자기 집안에 큰일이 탁 생겨도 별로 기도하지 않습니다. 기도의 불이 꺼졌습니다.

 

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진정한 부흥이 일어나기 위해서는 누가 뭘 해야 하고 더 잘해야 하는 것이 아니라 기도해야 합니다. 기도할 때 부흥이 일어날 수 있습니다. 기도하면 우리 가정도 살아날 것입니다. 가정의 문제는 크리스천 가정에 대한 책을 읽지 않거나 <부모의 삶> 공부를 하지 않아서가 아니라 기도하지 않아서 그런 겁니다. 기도하면 가정이 살아날 것입니다. 기도하면 우리 교회가 살아날 것입니다. 우리 주변이 살아날 것입니다. 이 나라가 살아날 것입니다.

 

대통령이나 국회의원들을 볼 때 내 마음에 안 드는 사람이 얼마나 많습니까? 그래서 막 비판하고 욕을 합니다. 그런데 그 비판과 욕하는 시간을 반만 줄여서 기도하면 놀라운 일이 일어날 것입니다. 사실 기도를 정말 안 합니다. 내가 싫어해도 중요한 위치를 맡은 저 사람을 위해서 내가 얼마나 기도했나 생각해보면 부끄럽습니다. 욕은 하는데 기도는 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눈물로 복음의 씨앗을 심을 뿐 아니라, 눈물로 기도의 씨앗을 심어야겠습니다. 그러면 황폐한 이 땅에 다시 꽃들이 피어나며 생수의 강이 흐르게 될 것입니다. 남의 탓을 할 것이 없습니다. 우리 자신이 기도하면 됩니다. 그래서 우리 가운데 바울처럼 복음의 비밀을 붙들고 기도함으로써, 놀라운 부흥이 우리 가운데 일어나기를 간절히 소망합니다.

 

➤ 결단의 기도

 

1) 바울처럼 나도 평생 선교의 사람으로 살아가도록

2) 뭔가를 하기 전에 먼저 나를 구원한 복음을 깊이 깨닫고 복음의 사람으로 살아가도록

3) 무엇보다 바울처럼 나도 평생 기도의 사람으로 살아가도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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