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1장 1-8
하나님의 진노
최태선 목사 2015.5.24.
어지니교회 http://cafe.daum.net/eojini/
땅콩 회항 사건이 마침내 결말에 도달했습니다. 조국 교수가 예상했던 것이 한 치의 오차도 없이 그대로 현실이 되었습니다. 참으로 불의한 사회입니다. 돈과 권력을 가진 자들은 어떻게 하든 살아남습니다. 돈과 권력이 없는 사람은 아무리 발버둥을 쳐도 극한 상황 내지는 죽음으로 내몰립니다. 오래 전에 "백경"이라는 소설의 저자 허먼 멜빌은 "우리는 문명화된 몸을 가지고 있지만 야만의 영혼을 가지고 있다."고 말했습니다. 참으로 우리 시대에 실감이 나는 이야기라는 생각이 듭니다.
합리적이지도 도덕적이지도 않고 거의 불가사의하기까지 한 이 시대의 바탕에는 모든 것을 경제적인 이익 추구 아래에 두는 자본주의 문명의 병적인 경향이 도사리고 있습니다. 공산주의와 전쟁을 치른 경험이 있는 우리나라 사람들은 거의 본능에 가깝게 자본주의를 진리처럼 신봉하고 있기 때문에 자본주의의 병폐가 심각한 지경을 넘어 공멸의 위기를 향해 치닫고 있음에도 그것에 대해 문제의식을 가지는 사람들이 거의 없습니다. 특별히 기복주의 신앙에 물든 한국의 그리스도인들에게 자본주의란 하나님의 나라와 동일시될 만큼 절대적인 신뢰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것을 흔드는 것은 민주주의의 근간을 흔드는 것이며 그것을 흔드는 것은 하나님의 뜻을 거스르는 것과 동일시될 정도로 자본주의에 대한 한국 그리스도인들의 충성심은 확고부동합니다.
그래서 돈과 권력을 가진 자들의 횡포에 몸서리를 치면서도 막상 그것을 가능하게 해주는 자본주의 자체에 대해서는 절대적인 신뢰를 보내는 것이 오늘날 대부분의 사람들의 사고입니다. 산업혁명 이후 거대 기술 문명은 물질적 풍요와 늘 붙어 다니는 엄청난 위험에 대해 우리를 무감각하게 만들었습니다. 오히려 그 반대로 경제의 발전이 그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이라는 엄청난 오해에 붙들려 있습니다. 경제를 화두로 대통령에 당선되었던 기독교 장로 대통령의 시대가 아무런 효과도 없이 이미 마감되었는데도 사람들은 여전히 경제에 대한 막연한 기대를 내려놓지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리처드 하인버그는 『제로 성장 시대가 온다』라는 자신의 책에서 자본주의의 발전이 한계에 도달했고, 따라서 더는 경제 성장이 가능하지 않은 새로운 시대가 온다고 주장합니다. 경제 성장은 끝났고, 경제적 착취의 확대와 전 지구적 자본의 확장도 끝났다는 것입니다. 그는 최근의 경제적 위기는 단순한 불황이 아니라 인류 역사상 새로운 시대가 도래하는 징표라고 경고합니다. 동시에 끝없는 경제 성장을 이루려는 모든 근시안적이고 무익한 시도는 환상에 근거한 것이라고 지적합니다.
그런데도 우리나라 사람들은 '일자리 창출'이니 '창조적 경제'라는 환상적인 말들을 들으며 현실의 어려움을 감내하고 있습니다. 확실한 것은 그렇게 시간을 끌면 끌수록 경제적 불균형은 심화되고 거기에서 비롯되는 모든 사회적 문제들은 해결하기 어려운 깊은 수렁 속으로 빠진다는 것을 생각조차 하지 않고 있는 것입니다. 암울한 시대가 우리의 후손들에게 이미 열리고 있는데도 그 근본적인 문제의 핵심을 파악조차 하지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정치인들은 자신들의 자리 지키기에 몰입하고 각 세대들은 자신들의 입장에서만 현실을 평가하는 사이에 세상은 각박하다는 표현을 넘어 도무지 함께 어울려 살 수 없는 적자생존의 끔찍한 정글이 되었습니다.
언제 파국이 일어날 것인지는 이제 시간문제가 되었습니다. 경제를 재구조화하기 위한 특단의 조치를 취하지 않는 한 파국은 언제든 도래할 수밖에 없다고 학자들은 경고하고 있습니다. 만일 국가가 위기에 합리적으로 대응할 수 있다면, 지금이라도 끝없는 탐욕과 착취의 경제에서 벗어나기 위한 노력을 기울여야 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현재의 권력 구조를 완전히 뒤엎는 것을 전제로 하기 때문에 실제로 가능할지는 의문입니다. 오히려 그것이 파국을 가속화하면서 헌 체제를 유지하려는 엘리트들에 의해 거대 은행과 군사 체계를 강화하기 위한 더 큰 착취와 희생이 거의 약탈의 형식으로 이루어질 것이라는 것이 일부 학자들의 예상입니다.
바로 이 지점이 그동안 경제를 신으로 섬기던 사람들이 다시 하나님에게로 시선을 돌려야 할 때입니다. 인간 스스로의 노력으로는 자신의 탐욕을 제어할 수가 없습니다. 만일 우리가 믿는 하나님이 살아계신 하나님이시라면 그분의 진노가 이 세상에 선포되어야 할 때입니다. 그것은 멸망과 파멸의 선언이 아니라 새로운 시작과 인류가 꿈꿀 수 있는 모든 희망의 실현의 순간이 될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살펴볼 나훔서는 하나님의 진노가 우리의 희망임을 보여줍니다.
나훔
나훔에 대해서는 그의 이름과 고향이 엘고스라는 것만 알려져 있습니다.그러나 엘고스라는 지명이 어딘지는 확실치 않습니다. 나훔이란 말은 "여호와께서 위로하셨다."라는 의미입니다. 유다가 고통스러운 시기를 보낼 때, 어려움을 극복해나갈 수 있도록 유다 백성을 위로해준 선지자입니다. 그의 활동 시기는 나훔서에 기록된 두 사건으로 미루어 주전 663년부터 612년 사이에 활동한 것으로 추정할 수 있습니다. 학자들은 보통 나훔의 활동시기를 주전 650년경으로 봅니다.
나훔은 아시리아 제국의 수도 니느웨의 멸망을 예고한 선지자입니다. 그가 이 예언을 할 당시 앗시리아는 전성기를 누리고 있었습니다. 앗시리아는 고대 근동 세계에서 가장 잔인하고 포악했던 세력이었으며, 그 지역을 1세기 이상 지배하였습니다. 앗시리아는 고대 근동 국가들의 공통적인 증오의 대상이었습니다. 따라서 앗시리아에 대한 멸망 예언은 유다에게도 매우 기쁜 소식이었습니다.
나훔서는 가장 강력한 세상 권세라 할지라도 때가 되면 하나님께서 반드시 종결시킬 수 있는 분이시라는 메시지를 담고 있습니다. 역사의 주인이신 하나님은 이 세상에서 결코 불의가 최종적으로 승리하지 않도록 통제하시고, 나아가 당신의 정의가 실현되도록 이끄시는 분이십니다. 나훔서의 핵심 메시지는 1:2에서 말하고 있는 것처럼 도덕성이 뒷받침 되지 않는 세상의 권세는 때가 되면 반드시 하나님이 흩으실 것이라는 것입니다.
배경과 구조
니느웨는 크고 오래된 도시였습니다. 주전 5천 년경 오늘날의 모술 반대편에 있는 티그리스 강 동쪽에 생긴 것으로 보입니다. 주전 8세기 말 앗시리아의 왕 산헤립(주전 704-681)이 니느웨를 수도로 만들기 전까지 니느웨는 많은 변천의 역사를 겪었습니다. 산헤립은 25년에 걸쳐 옛도시를 복구하고 확장하여 아름다운 도시를 만들었습니다. 그는 신전과 성벽, 궁전과 수로, 정원을 만들었습니다.
그의 뒤를 이어 또 다른 두 명의 강력한 왕이자 건축가인 에살핫돈과 앗술바니팔이 왕위에 올랐는데 끄때가 앗시리아의 황금기였습니다. 앗시리아 제국은 강력한 군사력으로 애굽에서부터 페르시아만까지 소위 비옥한 땅이라고 불리는 지역 전체를 차지했습니다. 세계 역사상 최초의 대제국을 이룬 나라였던 앗시리아의 궁전에는 속국에서 가져온 재물들이 넘쳐났다. 앗시리아의 성벽은 이중으로 되어 있어 어떤 침공에도 끄떡없는 난공불락의 요새였다. 그런 앗시리아를 대적할 수 있는 나라는 당시에 없었습니다.
그 니느웨가 주전 612년에 바벨론과 메데의 연합군에 의해 멸망하고 맙니다. 전성기를 맞이한 지 불과 25년 만에 멸망한 것입니다. 역사가 댈글리쉬는 갑자기 창궐한 질병과, 왕이 바벨론 학문에 몰두한 것과, 제국 안의 내란이 그 원인이라고 주장합니다. 그러나 나훔의 분석은 다릅니다. 니느웨의 멸망에 대한 나훔의 예언은 전적으로 정의 실현을 위해 시기하시고, 원수들에게 격노하시며, 세상의 통치권을 주장하시는 하나님의 성품에 근거합니다. 선지자의 눈은 역사 너머를 바라봅니다. 이제 본문으로 들어가 보겠습니다.
표제 (1)
나훔서는 두 개의 표제를 지니고 있습니다. 첫 번째는 니느웨에 대한 경고이고 두 번째는 나훔에 대한 설명입니다. 여기서 경고로 번역된 '마사'는 이곳에서는 '신탁'의 뜻으로 사용되었습니다. 이 단어는 구약에서 흔히 선자지의 신탁을 의미하는 전문 용어입니다. 실제로 나훔서의 메시지는 표제에 명시된 것처럼 니느웨에 대한 경고의 말씀들로만 이루어져 있습니다.
나훔의 말씀이 유다 백성에게 큰 위로와 소망이 되는 이유는 그 말씀이 자신들에게 온갖 악행을 저질렀던 앗시리아의 수도 니느웨의 멸망을 선포하기 때문입니다. 특히 히브리어에서 위로라는 말은 단순히 말로만 하는 것이 아니라 괴로움으로 가득 찬 상황을 변화시키는 것까지 포함합니다.
여호와의 특성 (2-3a)
2절과 3절 전반부는 여호와의 특성을 나열합니다. 먼저 질투하시는 하나님이란 표현은 하나님과 그의 백성 간에 맺어진 배타적인 관계에 기초합니다. 출애굽 이후 하나님과 그분의 백성 사이에는 "나는 너희의 하나님이 되고, 너희는 나의 백성이 되었다."라는 배타적인 언약관계가 성립되었습니다. 따라서 둘 사이에 누군가가 개입하여 한쪽의 마음을 훔쳐 가면 당연히 질투가 발동됩니다. 그 말에 담긴 의미는 하나님의 사랑과 보호하심 그리고 그분의 열심입니다. 즉 하나님의 질투는 당신의 백성을 구원하시기 위하여 오시고 행하시는 하나님의 열심입니다.
두 번째는 보복하시는 하나님입니다. 하나님의 보복은 중요한 개념입니다. 이것은 2절 안에서만 무려 3번이나 반복되고 있습니다. 물론 일반적으로 보복한다는 것은 부정적인 의미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보복은 구원사적인 관점에서 하나님의 거룩하심과 정의를 나타내는 의미로 이해됩니다. 하나님은 당신의 뜻을 거스르는 자에게 보복하십니다. 이 말은 하나님으로부터 벗어난 것에 대해 그것을 원점으로 되돌리는 하나님의 구원 행위를 의미합니다. 거룩하고 정의로우시기 때문에 죄악과 부정에 대해 심판하실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것은 동시에 그분의 절대 주권을 드러냅니다. 성경은 반복해서 보복은 결코 인간에 것이 아니라고 분명히 말합니다. 이 땅에서의 참된 정의의 실현은 인간의 열정으로는 도모될 수 없습니다. 오직 하나님만이 하실 수 있습니다.
우리는 그 사실을 다윗을 통해 강력하게 확인합니다. 그는 죽일 기회가 여러 번 있었지만 사울 왕을 죽이지 않습니다. 또한 자신을 반역한 아들 압살롬과 그를 따랐던 대신들에게도 강력하게 보복하지 않습니다. 그는 보복이 하나님의 절대 주권의 영역에 속했다는 사실을 잘 이해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사실 그와 같이 그분의 절대 주권을 존중하는 일이야말로 진정한 신앙의 척도가 된다는 것을 우리는 늘 기억해야 합니다. 신약에서 송사하지 말라는 이야기는 단순히 하나님 나라의 일을 세상에 맡기지 말라는 의미를 넘어 근본적으로 보복이라는 것이 하나님의 영역에 속하기 때문입니다.
세 번째로 하나님은 진노하시는 분이십니다. 질투로 인해 진노하고, 그 결과로 보복이 이루어지기 때문에 그 셋은 하나로 연결됩니다. 특히 하나님의 진노는 하나님을 대적하는 자들에게 주어집니다. 여기서 하나님을 대적하는 자들이란 자기가 스스로 신이 되려는 사람이나 하나님 없이 자신의 방식으로 세상을 사는 사람들을 말합니다. 이 사실은 우리에게도 상징하는 바가 큽니다. 아무리 교회에 열심히 참석하고 헌금을 많이 하고 큰 희생을 드려 봉사할지라도 자신의 방식을 고집하고 세상의 방식에 따라 사는 사람은 그분을 진노하게 한다는 사실을 우리는 기억해야 합니다. 잘 한다는 것이 그분을 진노하게 할 수 있다는 이 엄연한 사실을 말입니다.
네 번째로 하나님은 노하기를 더디 하시는 분이십니다. 이 표현은 일반적으로 구약성경에서 하나님의 자비를 뜻하는 헤세드와 짝을 이루어 나타납니다. 그런데 나훔서에서는 강한 능력, 즉 권능을 가지셨다는 말이 그 짝을 이루고 있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능력이 없어서 세상의 불의를 참고 계신 것이 아님을 보여줍니다. 하나님의 능력이 없어 앗시리아를 그대로 두신 것이 아닙니다. 안내하시며 참고 계실 뿐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결코 언제까지나 참고 기다리기만 하시는 분이 아니십니다. 그분은 나훔을 통해 당신이 반드시 벌 받을 자를 결코 그대로 내버려두지 않는다는 것을 말씀하십니다.
창조의 하나님 (3b-5)
3b-5절에서 마침내 심판을 결행하시는 하나님의 능력을 표현하고 있습니다. 이 능력은 하나님의 창조 사건에서 분명히 드러납니다. 창조 사건을 말하는 것은 그분이 모든 피조물을 주관하시는 주권자이심을 나타내기 위함입니다. 3절 후반부와 5절은 모두 하나님이 등장하시는 장면을 묘사한 것입니다. 구약성경에서 하나님은 자주 회오리바람이나 폭풍우를 동반하여 등장하십니다. 이런 표현들은 창조주 하나님이 이 세상 어누 누구와도 비교할 수 없는 절대주권자임심을 표현하는 고대의 방식입니다.
여기서 꾸짖으시는 하나님의 시제가 현재진행을 나타내는 능동 분사임에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창조주 하나님의 절대 주권이 지금도 계속되고 있음을 뜻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통치는 완료형이 아닙니다. 그분은 지금도 온 세상을 통치하십니다. 이런 시제를 통해서도 나훔은 하나님의 백성들의 대적이요, 나아가 역사의 혼돈 세력으로 하나님의 대적인 앗시리아의 멸망은 우연히 일어난 사건이 아니라 세상을 다스리시는 하나님의 심판 행위에서 비롯되는 것임을 말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선하심 (6-8)
심판하시는 하나님 앞에서는 아무리 단단한 반석이라도 결코 안전지대가 되지 못한다고 말합니다. 분노하신 하나님 앞에 누가 설 수 있겠습니까? 7절을 원문의 순서로 보면 '선하신 분은 하나님이시다.'입니다. 선하심을 맨 먼저 언급함으로써 그것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을 나타내는 God은 good의 축약형으로 모든 선한 것이 하나님으로부터 나온다는 것을 나타냅니다. 예수님께서도 "하나님 한 분 외에는 선한 이가 없느니라." (눅 18:19)고 단언하셨습니다.
하나님 한 분 외에는 선한 이가 없다는 이 말의 의미를 우리는 신중하게 들어야 합니다. 물론 인간도 선을 알고 행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인간의 선은 절대로 절대적으로 선할 수가 없습니다. 언제나 차선책으로서의 선함입니다. 인간이 이 사실을 망각하는 순간 반역자가 된다는 사실을 명심해야 합니다. 인간은 절대적으로 선할 수 없습니다. 따라서 하나님 앞에서의 겸손함을 상실하는 순간 그 선함은 모든 악들을 합친 것보다 더 큰 악인 하나님에 대한 반역이라는 것을 늘 염두에 두어야 합니다.
나훔은 7절에서 하나님의 선하심에 대한 두 가지 예를 제시합니다. "여호와는 선하시며 환난 날에 산성이시라." 그리고 "그는 자기에게 의뢰하는 자들을 아시느니라." 간단해 보이는 이 두 가지는 사실 우리 신앙의 모든 것입니다. 하나님은 어떤 인생의 환난 가운데서도 우리에게 도피처를 제공해주십니다. 그분은 선하신 분이십니다. 그리고 이것에 세상 사람들과 믿는 사람들이 정말 다른 이유입니다. 세상 사람들은 돈과 권력을 구합니다. 심지어 하나님께도 똑같이 그것을 구합니다. 자신의 방법을 관철하려는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가 바라보아야 할 것은 그분이 우리의 피난처이시며 산성이시라는 사실입니다. 그것은 현실도피가 아니라 진정으로 안전한 곳입니다. 그리고 그것을 믿는 것이 우리 신앙의 핵심이라는 말입니다.
그리고 그분은 당신께 의뢰하는 자들을 아신다고 했습니다. 이 말이야말로 믿는 자들에게 가장 위로가 되는 말입니다. 세상에는 믿는다고 말하는 이들이 정말 많습니다. 하지만 그들 가운데 하나님께 의뢰하는 이들은 거의 없습니다. 그래서 세상에서 부자가 되는 것이 하나님의 축복이라는 기복신앙이 뿌리를 내린 것입니다. 그것은 인간들이 하나님을 풍요의 신으로 만든 것입니다. 하나님은 바알이 아니십니다. 진정으로 하나님께 의뢰할 때 하나님은 그것을 아십니다. 그래서 진정한 하나님의 백성은 기꺼이 순교할 수 있었습니다. 생명이 주께 있음을 믿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 사실이야말로 영생과 구원을 믿는 참된 그리스도인의 모습입니다.
우리말 성경에는 없지만 8절은 원문에서 '그러나'로 시작합니다. 하나님은 노하기를 더디 하시고 선하신 분이지만 또한 죄인을 결코 그대로 내버려두지 않으시는 분이십니다. 죄인을 심판하시는 것 역시 하나님의 선하심의 한 부분입니다. 하나님은 세상에서 악이 승리하는 것을 결코 허락하지 않으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그 악을 어둠 속으로 몰아내실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진노는 우리의 궁극적인 희망입니다.
궁극적인 희망
나훔서에는 회개와 용서, 희망의 메시지가 없습니다. 대부분이 심판의 메시지만을 일방적으로 선언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어떤 학자들은 나훔서를 "증오의 찬송"이라고 부르기도 합니다. 이스라엘만을 지지하는 편파적인 신학 책이라고 말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온 우주와 만물을 다스리시는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인간의 우매함의 표현입니다. 그분은 선하신 분입니다. 독일의 히틀러와 우간다의 이디 아민과 같은 독재자들이 징벌을 당하는 것은 선의 승리입니다.
하나님은 노하기를 매우 더디 하시는 분이십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우유부단함을 드러내는 것이 아닙니다. 그 반대로 하나님의 광대하심을 보여줍니다. 하나님은 항상 당신의 피조물들이 당신께 돌아올 수 있는 시간을 충분히 주시는 것입니다. 그분의 권능이 크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대제국 앗시리아의 군대나 그들의 신들보다 약하기 때문에 앗시리아의 악행을 묵과해온 것이 아닙니다. 다만 하나님은 오래 참으십니다. 그리고 그 모든 과정을 통해 온전한 선을 이 땅에 구현하십니다.
하나님은 노하기를 더디 하십니다. 그리고 누구도 멸망당하는 것을 원치 않으십니다. 하지만 때가 되면 반드시 죗값을 물으시고 심판하시는 분입니다. 하지만 그분에게 전적으로 의뢰하는 자에게 하나님의 분노는 자비로 바뀝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떠나 우리 자신이 신이 된다면 우리는 반드시 하나님의 진노의 대상이 되어 멸망의 대열에 서게 될 것입니다.
인간은 신이 아니라 인간이며, 결코 전체에서 분리된 독립된 존재들이 아니라 하나님의 피조세계의 한 부분입니다. 결코 전체에서 분리된 독립된 존재인 것처럼 오만을 부려서는 안 됩니다. 인간은 전체의 일부로서 특정 시간과 장소에 뿌리내리고 주어진 삶의 필연을 찾아야 합니다. 유한한 인간 조건 안에서 서로 사랑하고 희망하는 방법을 찾아가야 하는 것입니다.
이제 인류는 국경을 넘어 온 세계를 장악한 자본이라는 거대한 맘몬과 대치하고 있습니다. 이제까지 인류가 보지 못했던 빈부격차와 불평등이 심화되었습니다. 인간의 탐욕이 도를 넘어 온 피조세계를 공멸의 위기로 몰아넣었습니다. 이 위기는 경제를 발전시킴으로 해결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진정한 그리스도인이 하나님께로 돌아갈 때 해결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분의 의와 나라가 이 땅에 이루어질 때 그 해결이 이루어지기 시작할 것입니다. 그리고 이 땅의 그리스도인이 그렇게 살아갈 때 다시 말해 모든 상황을 넘어 하나님을 바라보고 그분께 의뢰할 때 희망이 빛으로 다가올 것입니다. 그리고 온 인류는 하나님이, 하나님의 진노가 온 인류와 만물의 궁극적인 희망임을 깨닫게 될 것입니다.
오늘도 시 한 편으로 우리의 묵상을 깊이 하겠습니다.
편도나무에게 / 니코스 카잔차키스
나는 편도나무에게 말했노라.
편도나무야, 나에게 신에 대해 이야기해다오.
편도나무야, 나에게 신에 대해 이야기해다오.
그러나 편도나무가 꽃을 활짝 피웠다.
저는 그리스도인은 삶으로 시를 쓰는 사람이라고 말하기를 좋아합니다. 시인은 보통 사람들이 보지 못하는 것을 보고 그것을 다른 사람들도 볼 수 있도록 일깨우는 역할을 하기 때문입니다. 시인들이 자기 시를 완성하는 것은 그들이 본 것을 자신의 인생으로 완성할 때라고 생각합니다. 우리들이 복음을 살아 각자의 머무는 곳에서 복음의 꽃을 피워낸다면 우리는 하나님의 선하심 속에서 온 피조세계의 희망이 될 것입니다.
사랑하는 어지니교회 성도 여러분!
오늘 마지막으로 열두 번째 소선지서를 살펴보았습니다. 나훔서를 마지막 설교로 삼은 것은 그것이 우리에게 전하는 메시지가 궁극적인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진노가 없다면, 우리는 복음을 따라 살 필요가 없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분이 진노하시는 분이시고 그분이 당신을 의뢰하는 자들을 아시기 때문에 우리는 어리석어 보이는 십자가의 길을 걸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십자가의 길은 단순히 우리 자신의 희생만을 강요하는 삶이 아니라 우리 자신의 꽃을 피우는 것이고, 우리를 볼 수 있는 사람들에게 하나님을 보여주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그분만이 궁극적인 희망임을 증거 하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의 진노는 그런 우리에게 자비가 될 것이며 그 심판의 날, 하나님의 정의가 땅에서도 온전히 이루어질 것입니다. 우리에게 주어진 삶의 기회를 통해 꽃을 활짝 피우는 우리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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