딛1장 1~9, 2장 11~15
진실과 선함의 승리를 믿는 삶
이준원 목사 2019.2.20.
콜럼버스한인장로교회 https://www.kpccoh.org
1. 디도에 대하여
한국에서 아들을 둔 부모가 아들을 키우며 살아가는 동안 애태우는 순간들 중 하나는 아들이 군대에 갈 때가 아닌가 합니다. 저는 이민을 오느라고 군대에 가지는 못했지만, 어릴 때 제 아버지께서 논산훈련소(연무대) 참모장이었기 때문에 거기서 몇 년 살았습니다. 부모는 군대에 간 아들이 써 보내는 편지를 기다리고 또 아들에게 편지를 쓰기도 합니다.
몇 년 전 어느 아버지가 군대에 간 자기 아들에게 쓴 편지가 사람들의 큰 인기를 끌었습니다. 그 내용은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사랑하는 아들에게,
아빠 엄청 힘들다. 구미호 같은 니 엄마가 편지 안 쓴다고 난리, 난리 쳐서 할 수 없이 몇 자 적는다. 너 엄마 성격 알지? 너 들어가고 나서 연병장이 떠나가도록 대성통곡했다. 아빠 창피해 죽는 줄 알았다. 너 빨리 찾아내라고 아우성을 치는데, 너 알다시피 다들 머리 빡빡 깎고 어느 놈이 아들인지 알 수가 있냐. 그래도 니 엄마 등쌀에 가만히 있을 수만은 없어 그 비 맞으며 너 찾느라 눈알 삐지는 줄 알았다. 결국 찾지도 못하고 못난 아빠에 못난 남편끼지 되었구나.
아빠 엄청 힘들다. 집에 돌아오는 길에 니 엄마 달래려고 아빠가 몰래 모아놓은 피 같은 돈으로 니 엄마 옷까지 사주고서야 겨우 집에 들어갈 수 있었다. 너 군대에서 월급 받아서 다 갚아야 한다. 농담 아니다. 아빠 엄청 불쌍한 사람이다. 엄마가 너 낳고서 아빠는 완전 찬밥 신세 된 거 알 거다. 다른 사람은 안 그런다고 하는데 니 엄마는 안하무인이다. 너만 옆에 있으면 아빠는 안 보이나 보다. 그래서 하는 말인데, 웬만하면 휴가도 나오지 말고 군대 말뚝 박아라. 요즘 군대 좋아져서 밥은 굶지 않는다고 하니 생각 잘 해봐라.
아빠 걱정이다. 너 들어간 지 하루도 안 지나서 벌써 이러니, 니 엄마도 같이 군대에 보낼 걸 잘못한 것 같다. 부대장님한데 여쭤보고 힘 좋은 아줌마 필요하면 아빠한테 얘기하라고 니가 말해라. 이 아빠가 한 것 비하면 요즘 군대 생활 누워서 떡먹기다. 요령 피지 말고 멋진 남자가 되어서 나와라. 난 너가 부럽다. 그럼 고생해라. 끝
물론 이것은 유머를 섞어 아버지가 아들에게 보낸 편지이지만, 사실 아버지가 아들에게 보내는 편지가 그리 흔한 것 같지는 않습니다. 여기 아들인 분들 중 아버지에게 편지를 받은 적이 많이 있으십니까? 물론 생일카드나 군대에 갔을 때 받는 편지는 있는 것 같지만, 평소에 아버지에게 편지를 받는 경우는 별로 없습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디모데전서와 디모데후서에 이어 디도서가 마치 아버지가 아들에게 보낸 편지와 같습니다. 아버지가 아들에게 간절한 사랑의 마음으로 보낸 편지입니다. 사도 바울이 자기 아들 같이 생각하며 아들이라고 말한 사람이 디모데와 디도입니다. 그래서 아들이라고 하는 디도를 지중해의 험한 섬 그레데(Crete)에 사역자로 남겨두고 떠난 뒤에 그에게 쓴 편지가 디도서입니다.
디모데전서와 디모데후서는 에베소에서 목회하는 디모데에게 쓴 편지이고, 디도서는 그레데에서 목회하는 디도에게 쓴 편지이기 때문에, 이 세 책을 가리켜 ‘목회서신’이라고 부릅니다. 바울은 이 편지를 어떻게 시작합니까?
“같은 믿음을 따라 나의 참 아들 된 디도에게 편지하노니 하나님 아버지와 그리스도 예수 우리 구주로부터 은혜와 평강이 네게 있을지어다” (1:4)
디모데는 아버지가 헬라사람이지만 어머니는 유대 여자였고, 어머니 유니게는 나중에 복음을 받아들여 크리스천이 된 유대인 크리스천입니다. 디모데는 반은 유대인인데, 디도는 헬라사람이었습니다. 누가와 친척관계가 아닌가 보기도 합니다. 디도가 바울의 편지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는 사람으로 많이 등장합니다. 그런데 디도가 사역하고 있던 그레데 섬의 사람들은 그 삶의 모습이 어땠는지 12절이 잘 보여줍니다. “크레타 사람 가운데서 예언자라 하는 어떤 사람이 말하기를 ‘크레타 사람은 예나 지금이나 거짓말쟁이요, 악한 짐승이요, 먹는 것밖에 모르는 게으름뱅이다’ 하였습니다.” (1:12, 새)
크레타(그레데)는 지중해 연안 그리스의 동남쪽 에게해 남쪽에 위치한 섬입니다. 길이가 160마일, 폭이 35마일에 달하는 비교적 큰 섬 중 하나입니다. 과거 미노아 문명의 발생지여서 좋은 삶의 조건을 가지고 있었으나, 여러 곳에서 들어온 사람들이 섞여 살며 서로를 속고 속임으로써 평판이 나쁜 섬이 되고 말았습니다. 그것을 크레타 출신의 어느 사람이 이렇게 ‘거짓말쟁이, 악한 짐승, 먹는 것밖에 모르는 게으름뱅이’라고 표현할 정도로 악한 삶을 사는 사람들로 가득했습니다.
AD 62년경 비울이 로마의 감옥에서 1차 석방이 되었을 때 이곳에 헬라사람인 제자 디도와 함께 사역을 한 다음, 자기는 떠나면서 디도를 이곳의 사역지에 남겨 두었습니다. 그러면서 이런 악명 높은 섬에서 자신의 믿음의 아들인 디도가 복음을 붙들고 또 복음을 전하며 살도록 권면하는 편지를 썼습니다. 그러면 바울이 영적 아들이며 제자인 디도에게 부탁한 복음의 본질이 무엇입니까?
2. 디도에게 전해진 복음
1) 우리는 택함 받은 자로 영생의 소망을 누리게 되었다
우리는 인생을 살아가면서 끊임없는 선택과 거절을 경험합니다. 내가 선택을 받거나 거절을 당하는 것을 계속 경험한다는 것입니다. 특히 20세기 이후에 이 세상은 지금까지 인류가 살아온 어떤 시대보다 더욱 민감한 경쟁의 시대가 되었습니다. 20세기부터 ‘무한경쟁의 시대’라고 하지 않습니까? 그 결과 어린 시절 유치원에서부터 당첨에 떨어지는 거절을 경험해야 합니다. 한국도 그렇고 이 미국도 그렇습니다. 여기도 아주 적지만 public preschool이 있는데 들어가기가 아주 어렵습니다. 어릴 때부터 거절을 경험하는 겁니다. 이런 거절과 선택의 경험은 학년이 높아질수록 더 심각해집니다.
한국이나 미국이나 고등학교 때 가고 싶은 대학교에 지원했는데 거절의 편지가 오고, 대학교 때는 가고 싶은 대학원에 지원했는데 거절의 편지가 옵니다. 물론 선택(합격)의 편지도 옵니다. 직장도 마찬가지입니다. 어느 회사는 합격하고 어느 회사는 불합격합니다. 그런데 가고 싶은 곳은 불합격하고 별로라고 생각한 데서는 오라고 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남녀간에 사랑할 때도 내가 좋아하는 사람은 다른 사람을 좋아하고, 내가 별로 안 좋아하는 사람은 나를 좋아합니다. 서로 엇갈리면서, 선택을 받을 때도 있지만 거절당하기도 합니다.
아마도 우리 중 대부분은 선택되기보다는 거절을 더 많이 경험했을 것입니다. 선택을 받은 것보다 거절을 당한 경우가 더 많을 것입니다. 어릴 때 놀 때도 그렇습니다. 가장 잘하는 두 친구가 나와서 팀을 선택하는데, ‘너 우리편’ 하는 식으로 하나씩 자기편으로 데려갑니다. 가장 잘하는 친구부터 뽑고 마지막까지 갑니다. 처음에 선택을 받으면 기분이 좋은데, 끝까지 선택을 받지 못하면 아주 기분이 안 좋습니다. 선택을 받으면 기분도 좋고 자긍심이 생기지만, 거절을 당하면, 특히 숫자가 안 맞아서 자기는 끝까지 선택받지 못하고 선택된 아이들끼리 논다고 하면 열등감과 상처가 생깁니다.
아이들 노는 수준이 아니라 학교나 회사 차원에서 그러면 굉장한 상처가 되고 ‘내가 것 밖에 안 되나? 나는 왜 이럴까?’ 하는 자괴감까지 안겨줍니다. 우리의 인생에 이렇게 선택과 거절의 수많은 경험들이 교차하는데, 중요한 것은 어떤 경험이 더 강한 동기로 우리를 지배하느냐 하는 것입니다.
잘 아는 애플(Apple) 사의 공동창업자이자 회장이었다가 지난 2011년 세상을 떠난 스티브 잡스(Steve Jobs)가 있습니다. 그 사람 때문에 세상이 많이 바뀌었습니다. 저를 비롯해서 많은 분들이 아이폰(iPhone)이나 아이패드(iPad)를 쓰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런데 그는 어릴 때부터 자신이 입양아라는 것을 알고 자랐습니다. 부모가 알려주었기 때문입니다.
그는 원래 어머니가 위스콘신 출신의 백인이었고, 아버지는 시리아에서 유학을 온 시리아 사람이었습니다. 결혼 전에 임신이 되어서 어머니의 부모가 결혼을 결사반대하는 바람에 입양이 되었습니다. 어릴 때 종종 그는 ‘버림당한 아이’라는 거절감과 싸워야 했다고 합니다. 그런데 어릴 때 하루는 자기 집 앞에서 같이 놀던 이웃집 여자 아이가 뭔가 기분이 나빴는지 한마디 툭 내뱉었습니다. “너는 네 부모가 버린 아이야.” 그것이 굉장한 상처가 되고 충격을 받았습니다. 스티브 잡스는 울면서 자기 집으로 들어갔습니다. 그때 그의 양부모는 사정을 파악한 다음 진지하게 잡스의 눈을 쳐다보며 천천히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스티브, 이것을 잊지 말아라. 너는 우리가 많은 아이들 중 아주 소중하게 선택한 귀한 아이란다!” 그 한마디 말, ‘소중하게 선택한 아이’라는 울림이 그의 가슴에 새겨진 다음부터 그는 다시 열등감과 싸울 필요가 없어졌다고 합니다. 참 놀랍습니다.
보통 사람들도 이런 경험을 하는 반면, 예수님을 믿고 영생을 얻어 하나님의 자녀가 된 그리스도인 중에도 여전히 인생의 거절감을 극복하지 못한 채 사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예수님을 믿으면서도 극복이 안 되는 것입니다. 그러한 사람들은 반드시 확인해야 할 중요한 영적 사실이 있습니다. 그것이 무엇입니까? 우리는 하나님께서 영원 전부터 선택하신 아주 소중한 존재라는 사실입니다. 사도 바울은 그레데 섬에서 하나님의 일을 감당해야 하는 영적 아들 디도에게 바로 그 사실을 상기시켜주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종이요 예수 그리스도의 사도인 나 바울이 사도 된 것은 하나님이 택하신 자들의 믿음과 경건함에 속한 진리의 지식과, 영생의 소망을 위함이라 이 영생은 거짓이 없으신 하나님이 영원 전부터 약속하신 것인데, 자기 때에 자기의 말씀을 전도로 나타내셨으니 이 전도는 우리 구주 하나님이 명하신 대로 내게 맡기신 것이라” (1:1~3)
바울은 영원 전부터 하나님께서 우리를 택하여주셨다는 것을 말합니다. 이것은 참 신비의 영역입니다. 우리는 시간과 공간의 지배를 받는 존재이기 때문에 ‘영원 전’이라는 것은 이해가 안 갑니다. 한마디로 온 우주만물이 만들어지기 전부터 우리를 생각하셨다는 놀라운 메시지입니다. 바울은 에베소 교회에게도 동일한 메시지를 선포했습니다.
“하나님은 세상 창조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시고 사랑해 주셔서, 하나님 앞에서 거룩하고 흠이 없는 사람이 되게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기뻐하시는 뜻을 따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우리를 하나님의 자녀로 삼으시기로 예정하신 것입니다.” (엡 1:4-5, 새)
우리를 창조 전부터 택하셨다니, 이 얼마나 놀라운 말씀입니까. 하나님의 그러한 선택의 결과로 우리는 영생의 소망을 누리게 되었고, 그래서 우리는 이 소망의 말씀을 전해야 한다고 말씀합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의 영적 정체성입니다. 사도 바울이 믿음의 아들 디도에게 전하는 복음은, 바로 우리가 이렇게 전능하신 하나님에 의해 영원 전부터, 창세전부터 선택된 자로서 영생의 소망을 갖고 살게 되었다는 사실에서 시작합니다.
2) 우리는 경건한 인생으로 양육되어 성숙해 갈 수 있다
복음의 핵심은 구원을 경험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하나님의 은혜를 경험하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믿음을 통하여 은혜로 구원을 얻었습니다. 이것은 여러분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아무도 자랑할 수 없습니다.” (엡 2:8-9, 새)
은혜는 받을 자격이 없는 자들에게 베풀어지는 하나님의 무조건적인 사랑을 뜻합니다. 우리는 이런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을 받은 사람들입니다. 바울은 이 사건을 가리켜 어떻게 표현합니까?
“모든 사람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가 나타나” (2:11)
그럼 이 은혜를 받은 이후에 우리가 기대할 수 있는 사건이 무엇이겠습니까?
“우리를 양육하시되 경건하지 않은 것과 이 세상 정욕을 다 버리고 신중함과 의로움과 경건함으로 이 세상에 살고” (2:12)
여기 보면 ‘경건’이라는 단어가 두 번 반복됩니다. 첫 번째는 경건하지 않은 것을 강조하면서 그것을 버려야 한다고 말씀합니다. 두 번째는 경건함으로 이 세상에서 살기를 선택해야 한다고 말씀합니다. 경건이 무엇입니까? 경건을 영어로는 ‘godliness’라고 합니다. 다른 말로 하면 ‘하나님 같은 성품’ 또는 ‘하나님을 닮은 인격’을 말합니다. 그러므로 복음을 듣고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와 주인으로 받아들여 구원받은 사람들은 하나님을 닮은 존재로 양육되어 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문제는, 과연 그것이 가능한가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닮아간다는 것이 가능합니까? 놀랍게도 성경은 가능하다고 말씀합니다. 그렇다면 그 자체가 복음이 아닙니까? 우리 같이 유한한 존재가 하나님을 닮을 수 있다는 그 자체가 복음입니다.
2장 11절의 주어는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구원을 가져왔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2장 12절의 주어도 역시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우리로 하여금 경건하지 않은 것과 이 세상 정욕을 다 버리고 경건하게 살도록 도와주신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우리의 양육이나 성숙도 다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실제로 우리가 아기로 태어나서 자랄 때 상당 부분 우리를 기르고 양육하시는 부모님의 사랑을 의지해야 하는 것처럼, 영적으로도 우리를 키워주시고 양육하시는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를 의지할 수밖에 없습니다. 구원을 받을 때 우리가 한 일은 구원을 선물로 주신 것을 감사히 받아들인 것밖에 없었습니다. 마찬가지로, 우리의 양육을 위해서도 우리가 할 일은 우리의 성장과 성숙을 도우시는 하나님의 사랑의 손길을 받아들이기만 하면 되는 것입니다.
우리의 영적 성장과 성숙은 우리가 애써 결단하고 결심하며 ‘내가 성장해야지, 성숙해져야지’라고 해서 가능한 게 아니라, 우리가 성장하고 성숙해지기를 우리 자신보다 더 원하셔서 우리를 열심히 도와주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감사함으로 받아들일 때 가능합니다. 성령님이 우리를 도와주고자 하실 때 ‘Yes’ 하면 됩니다. 그리고 성령님이 기뻐하지 않으시는 일에는 ‘No’ 하면 됩니다.
그러니까 영적인 성장과 성숙을 이루는 길은 아주 간단합니다. 하나님이 하라고 하시는 일에는 Yes, 기뻐하지 않으실 일에는 No 하면 됩니다. 실제로 2장 12절이 영어성경 NIV에 이렇게 번역되어 있습니다. “... say ‘no’ to ungodliness...” (경건하지 않음에 대해 ‘노’라고 말하라)
간단하지 않습니까?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일에는 Yes, 하나님이 싫어하시는 일에는 No 하면 됩니다. 양육의 길, 성장의 길, 성화의 길, 예수님을 닮는 길, 받는 구원의 과정, 혼의 구원의 과정을 너무 어렵고 복잡하게 생각할 필요가 없습니다. Yes와 No만 잘하면 됩니다.
그런데 이것이 거꾸로 되니까 문제인 것입니다. 왜 우리 신앙이 잘 자라지 않습니까?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일에는 No 하거나 나중에 하겠다고 하고, 하나님이 싫어하시는 일에는 Yes 하니까 신앙이 이상한 모습으로 되는 겁니다. 제대로만 하면 됩니다.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일에는 Yes, 하나님이 싫어하시는 일에는 No 하면 됩니다. 복음은 우리가 하나님의 은혜로 경건한 인생으로 양육되어 갈 수 있다고 알려줍니다. 이것은 충분히 가능합니다. 그래서 복음입니다.
3) 다시 오실 예수님의 영광을 기다리며 살 수 있다
흔히 예수님의 재림이라고 하면 곧바로 광신적인 시한부 종말론을 떠올립니다. 요즘은 별로 그렇지 않지만, 1992년 10월 한국에서 시한부 종말론자들 때문에 아주 난리가 났었습니다. 그러나 성경이 가르쳐주는 종말론은 결코 이상하거나 비극적인 사건이 아닙니다. 바울은 디도에게 그리스도께서 다시 오시는 사건을 뭐라고 알려줍니까?
“복스러운 소망과 우리의 크신 하나님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이 나타나심을 기다리게 하셨으니” (2:13)
이것은 사실입니다. 예수님의 재림은 그리스도인들에게 ‘복스러운 소망’이며, 영광스러운 사건이고 가슴 설레면서 기다려야 할 사건입니다. 예수님이 다시 오신다고 하면 ‘아유 무서워, 큰일 났네.’라고 벌벌 떠는 무서운 게 아니라, ‘와, 다시 오시는구나. 너무 좋다. 너무 기쁘다.’라고 하며 가슴 설레면서 연인을 기다리듯 하는 사건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그날은 우리의 인격이 완성되는 날이기 때문입니다.
지금 살면서 얼마나 부조리하고 불합리한 게 많습니까? 요즘 신기한 것은, 어떤 사건이 벌어질 때 누가 봐도 잘못이라고 생각되는 것조차 비싼 변호사를 쓰면 괜찮은 것으로 바뀝니다. 별것도 아닌 것이 대역죄가 되는 경우도 있습니다. 뭐가 진짜고 진실이고 진리인지가 완전히 헷갈리는 시대가 되었습니다. 인터넷이 발전하고 모든 것이 드러나는 시대인데도 이상한 것들이 더 많습니다. 그렇게 부조리하고 불합리한 속에서 우리가 억울하고 괴로울 때가 얼마나 많습니까? 거창한 법적 다툼 같은 것 말고도, 우리 인간관계에서 억울함과 괴로움과 갈등을 느낄 때가 많지 않습니까?
그런데 인류 역사의 그 모든 불법한 것, 불의한 것, 부정한 것, 부조리한 것, 불합리한 것, 더러운 것들이 다 사라지는 날이 바로 그날, 예수님이 오시는 날입니다. 그날은 완벽하게 선한 하나님의 나라가 온전히 이루어지는 순간이기 때문에 우리는 기뻐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주님의 다시 오심을 어떻게 기다리고 있어야 합니까? 모든 세상일을 접고 가정과 생업을 등진 채 기도원에 들어가야 할까요? 아니면 시한부 종말론자들처럼 다 같이 교회당에 모여 매일 기도만 하고 있어야 할까요?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그가 우리를 대신하여 자신을 주심은 모든 불법에서 우리를 속량하시고 우리를 깨끗하게 하사 선한 일을 열심히 하는 자기 백성이 되게 하려 하심이라” (2:14)
예수님이 다시 오실 때까지 선한 일을 열심히 하는 하나님의 백성이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모여서 기도만 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 있는 그 자리에서 선한 일을 열심히 하며 주신 사명을 끝까지 잘 감당하라는 것입니다. 바울은 디도에게 ‘바로 그것이 하나님 나라를 이 땅에 완성하는 길이다.’라고 가르쳐줍니다. 불법한 세상에서 하나님의 법을 따라 살고, 악한 세상에서 선한 일에 몰두하면 됩니다. ‘남들도 다 하는데 나도 좀 하지.’가 아니라, 남들은 다 하지만 나는 안 하는 겁니다. 하나님의 자녀이며 하나님의 백성이니까 그렇습니다. 남들은 다 불법을 저지르지만 나는 하나님의 법대로 사는 겁니다. 하나님의 백성이니까. 그러한 삶은 어떤 거창한 일이나 엄청나게 커다란 업적을 이루는 것이 아니라, 날마다 일상 속에서 진실하게 말씀대로 살아가는 것을 의미합니다. 바울은 재림에 대한 오해가 있었던 데살로니가 교회에게 이것을 분명히 말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진노하심에 이르도록 정하여 놓으신 것이 아니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도록 정하여 놓으셨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신 것은, 우리가 깨어 있든지 자고 있든지, 그리스도와 함께 살게 하시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은 지금도 그렇게 하는 것과 같이, 서로 격려하고, 서로 덕을 세우십시오. (살전 5:9-11, 새)
바로 이것입니다. 서로 격려하고 서로 덕을 세우며 사랑을 실천하는 것입니다. 정말로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것을 실천하며 사는 것이 하나님의 백성다운 재림 준비 방법입니다.
이미 1장에서 경고한 것처럼, 당시 그레데 사람들의 라이프 스타일은 거짓과 악으로 물들어 있었습니다. 아주 육신적인 삶이었습니다. 하지만 그런 현실 속에서도 성도의 삶은 달라야 한다는 것입니다. ‘남들이 다 저렇게 사니까 나도 저래도 되겠지’가 아니라, ‘남들은 다 그렇게 살지만, 나는 하나님의 자녀이기 때문에 하나님의 말씀대로 산다’는 태도를 가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바로 그럴 때 세상을 변화시키고, 바로 그것이 주님의 재림을 준비하는 성도의 삶의 모습입니다. 또 그것이야말로 바울이 디도에게서 기대한 복음적인 삶의 모습이었습니다. 그 결과 그레데 섬의 복음화가 이루어졌습니다. 덕분에 지금 그 섬에 가면 바울이나 디도를 기념하는 교회들이 생겨났습니다.
[나가는 말]
가나안농군학교의 김용기 장로님(1909~1988)이라는 분을 아십니까? 오래 전 고등학교 1학년 때 학교에서 토요일에 어딘가로 가서 방문교육을 실시한다고 했습니다. 그러면서 잠실에 모여 2시간 이상 시외버스를 타고 갔습니다. 나중에 알고 보니까 거기가 경기도 양평에 있는 가나안농군학교였습니다. 일제 식민지 시절 신사참배를 강요당할 때, 가나안농군학교를 세운 김용기 장로님은 신사참배를 거절함으로 많은 어려움을 당했습니다. 한번은 일본인 고등계 주임에게 끌려가 고문을 당한 다음 그 주임이 그에게 물었습니다. “다른 한국인들은 신사참배를 다 하는데 너만 안 하는 이유가 무엇이냐?” 그는 공손히 물었습니다. “제가 솔직하게 대답해도 될까요?” “그래, 말해보라.”
“다른 사람들은 다 한다고 하셨지만, 사실 그것은 억지로 하는 것에 불과합니다. 살기 위해서 할 수 없이 하는 것이지요. 그러나 억지로 거짓 되게 참배하는 것이라면 차라리 안 하는 것이 낫지 않겠습니까? 많은 사람들이 겉으로는 절하고 묵념하면서도 속으로는 천황폐하를 욕하고 있습니다. 나는 그렇게는 못합니다. 그런 거짓은 천황폐하뿐 아니라, 내가 믿는 하나님을 욕되게 하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그러자 일본인 주임이 크게 감동을 받고 “네 말이 옳다. 그런 국민의례는 안 하는 것만 못하겠지.”라고 말하고는, 그 후 다시는 김용기 장로님과 그의 공동체에는 신사참배에 대한 강요를 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물론 항상 그렇게 되지는 않겠지만, 이 작은 에피소드가 전해주는 것은 ‘진실은 승리한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복음의 승리였습니다. 바울이 디도에게 전한 복음은 주님이 주시는 진실과 선함의 승리를 믿는 바로 그런 삶의 열매입니다. ‘남들이 다 하니까 뭐 나도 해도 괜찮겠지’ 하는 삶이 아니라, ‘남들은 다 잘못된 길을 가지만, 나는 하나님이 그것을 기뻐하시지 않기 때문에 손해를 보더라도, 어려움이 오더라도, 고난을 당하더라도 하나님의 길로 가겠다. 남들은 다 넓은 길로 가지만, 나는 하나님이 원하시기 때문에 좁은 길로 가겠다.’라고 하는 삶의 열매를 바울이 디도에게 가르쳐준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는 하나님의 선택 받은 사람들로 영생의 소망을 누리게 되었습니다. 그러한 우리는 이 세상에서 사는 동안 경건한 인생으로 양육을 받으며 자라가면서 예수님을 닮은 모습으로 성장하고 성숙해갈 수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다시 오실 예수님의 영광을 기다리며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
혹시 하나님의 말씀대로 순종하며 살다가, 남들이 다 가는 불법의 길로 가지 않고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아서 고난을 받거나 손해를 볼 수 있습니다. 그렇게 된다 할지라도 진실과 선함을 결코 포기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하나님의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 주님께서는 그 모든 것을 다 보고 계십니다. 그리고 마침내 예수님은 다시 오셔서 이 세상을 심판하시며 결국 우리를 그 영광의 보좌로 인도해주실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끝까지 주님 앞에서 신실함을 지키며 진실하게 살아야 되겠습니다. 끝까지 그래야 하겠습니다. 지금 잠시 하다가 또 잘못된 길을 가는 게 아니라, 끝까지 주님이 원하시는 바른 길, 진실한 길, 신실한 길, 믿음의 길로 가야겠습니다. 주님 앞에 설 그날을 바라보며 매일 최선을 다해 주님의 뜻대로 살며 승리하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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