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신약 --------------------/디도서

딛 2장 11-15절(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 - 이삼규

by Preacher 2023. 5. 28.
728x90
반응형

딛2장 11-15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

이삼규 목사 20150322

낙양교회 http://nakyang.onmam.com

 

딛 2:11 모든 사람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가 나타나

딛 2:12 우리를 양육하시되 경건하지 않은 것과 이 세상 정욕을 다 버리고 신중함과 의로움과 경건함으로 이 세상에 살고

딛 2:13 복스러운 소망과 우리의 크신 하나님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이 나타나심을 기다리게 하셨으니

딛 2:14 그가 우리를 대신하여 자신을 주심은 모든 불법에서 우리를 속량하시고 우리를 깨끗하게 하사 선한 일을 열심히 하는 자기 백성이 되게 하려 하심이라

딛 2:15 너는 이것을 말하고 권면하며 모든 권위로 책망하여 누구에게서든지 업신여김을 받지 말라

 

예수님은 영원한 죗값을 치러야 하는 우리를 구원하려고 오셨습니다. 그 형벌은 본래 사탄과 그 패거리들을 위한 것이었습니다. 우리를 위하여 내주신 그분의 목숨은 하나님의 놀라운 사랑을 그대로 보여줍니다. 생각해보십시오. 태초에 하나님은 온갖 짐승, 새, 곤충, 바다 생물, 대기권을 비롯한 이 땅의 나머지 모든 것들과 더불어 인류를 완전하게 지으셨습니다. 창 1:31 하나님이 지으신 그 모든 것을 보시니 보시기에 심히 좋았더라 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니 이는 여섯째 날이니라 이러한 세상을 누구에게 맡겨주셨습니까? 시 115:16 하늘은 여호와의 하늘이라도 땅은 사람에게 주셨도다 자기 자신 뿐 아니라 모든 피조세계를 하나님의 대적인 루시퍼에게서 보호하는 것이 아담의 책임이었습니다.

 

하나님은 동산 안에 그분을 사랑하고 순종할 선택의 자유가 없는 로봇을 두실 생각은 없으셨습니다. 그래서 그분은 수많은 나무들 중에서 한 나무를 동산 중앙에 두시며 이렇게 명령하셨습니다.

 

창 2:16 여호와 하나님이 그 사람에게 명하여 이르시되 동산 각종 나무의 열매는 네가 임의로 먹되

창 2:17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는 먹지 말라 네가 먹는 날에는 반드시 죽으리라 하시니라

 

그분이 말씀하신 죽음은 당장 육체적인 죽음이 임할 것을 말씀하시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래서 아담은 오랜 세월이 지나도록 육체적인 죽음(그것도 불순종의 결과였다)을 경험하지 않았습니다. 대신 하나님은 인간이 하나님의 생명에서 끊어져서 루시퍼 즉 마귀의 본성인 죽음을 입게 될 것을 보여 주신 것입니다. 얼마간 시간이 흐른 뒤에 마귀가 하와의 눈앞에 하나님의 성품을 왜곡시켜 그녀를 유혹하였습니다. 그는 먹어도 되는 모든 나무들에서 단 하나의 금기된 나무로 그녀의 초점을 돌려놓았습니다.

 

여자가 그 나무를 보았습니다. 본즉 어떤 일이 일어났습니까? 본즉 먹음직도 하고, 보암직도 하고, 지혜롭게 할 만큼 탐스럽기도 하였습니다. 하와는 망설임 없이 그 열매를 따서 먹었습니다. 이제 하나님이 ‘주시는 분’에서 ‘빼앗는 분’으로 보였습니다. 하지만 이때까지도 인류는 아직 타락하지 않았었습니다. 그녀의 남편인 아담이 그것을 받아먹고 나서야 하나님의 피조세계는 죽음의 본성을 입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그의 죄는 더 컸습니다. 여자는 꾀임을 당하기라도 했지만 아담은 그것조차 없었던 것입니다.

 

딤전 2:14 아담이 속은 것이 아니고 여자가 속아 죄에 빠졌음이라

 

그 결과로 아담뿐만 아니라 그의 밑에 두신 모든 피조 세계가 즉시 죽음의 본성을 입게 된 것입니다.

 

롬 8:20 피조물이 허무한 데 굴복하는 것은 자기 뜻이 아니요 오직 굴복하게 하시는 이로 말미암음이라

롬 8:21 그 바라는 것은 피조물도 썩어짐의 종노릇 한 데서 해방되어 하나님의 자녀들의 영광의 자유에 이르는 것이니라

 

이와 같이 자연이 죽음의 저주를 받은 것은 스스로 택해서가 아니라 인간이 하나님께 반항한 결과였습니다. 인간은 자기의 수하에 맡겨진 것을 보호하지 못했습니다. 아담은 자기 자신, 자기의 아내, 미래의 후손까지 하나님과 분리하게 만들었는데, 그것은 본래 루시퍼가 받을 저주였습니다. 이것이 바로 사망입니다.

 

하나님께서 범죄한 인류를 싹 쓸어버리시고 새로운 우주를 만드실 수도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를 죄와 사망에서 건져주실 구속자를 보내주시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그래서 갈보리가 있는 것입니다.

 

“사랑의 하나님이 어떻게 복음을 들어보지도 못한 사람들을 지옥에 보낼 수 있느냐?”는 불신자들과 신자들의 질문에 쩔쩔매는 그리스도인들을 보면 참으로 놀랍습니다. 나의 대답은 단순이 이것입니다. “그분의 잘못이 아니라 우리의 잘못이다.” 예수님은 인류를 자유케 하시려고 처참한 값을 치르셨고, 그러고 나서 이 기쁜 소식을 이미 깨달은 우리들에게 온 세계에 가서 복음을 전하라고 명령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성품을 입는다는 것

 

우리 죄에 대한 심판을 예수님이 치르셨을 뿐 아니라 이제 우리는 하나님을 닮은 새로운 성품을 입습니다. 더 이상 죄의 노예가 아닌 것입니다. 자신의 삶을 예수님께 온전히 드리면 그 사람은 전혀 새로운 피조물이 됩니다.

 

고후 5:17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주님으로 영접할 때 우리는 말 그대로 죽습니다. 우리의 옛 성품은 죽임을 당한 것입니다. 하나님이 보시기에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것입니다. 하나님의 성품을 지닌 전혀 새로운 사람이 태어납니다. 그래서 우리는 거듭난 것입니다.

 

롬 6:4 그러므로 우리가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를 받음으로 그와 함께 장사되었나니 이는 아버지의 영광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심과 같이 우리로 또한 새 생명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함이라

롬 6:6 우리가 알거니와 우리의 옛 사람이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것은 죄의 몸이 죽어 다시는 우리가 죄에게 종노릇 하지 아니하려 함이니

롬 6:7 이는 죽은 자가 죄에서 벗어나 의롭다 하심을 얻었음이라

 

그분이 정말로 그의 구주와 주님이시라면 그 사람의 삶 속에 경건한 성품이 나타나게 마련입니다.

 

마 7:17 이와 같이 좋은 나무마다 아름다운 열매를 맺고 못된 나무가 나쁜 열매를 맺나니

마 7:18 좋은 나무가 나쁜 열매를 맺을 수 없고 못된 나무가 아름다운 열매를 맺을 수 없느니라

마 7:19 아름다운 열매를 맺지 아니하는 나무마다 찍혀 불에 던져지느니라

마 7:20 이러므로 그들의 열매로 그들을 알리라

 

여기서 그분이 하시는 말씀은 복잡하지 않으며, 영구불변의 법칙입니다. 원인은 열매가 아니라 나무의 본성이지만, 그 본성은 열매로 나타나게 됩니다.

 

사랑하시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은 하나님의 성품을 입으셨습니까? 다시 말씀드려서 거듭나셨습니까? 그것을 무엇으로 알 수 있습니까? 열매를 보아 알 수 있습니다. 좋은 나무는 좋은 열매를 맺는 것입니다.

 

그분이 전부이시다

 

우리가 전해 온 복음은 영접 기도로 예수님을 영접하는 데에 강조점을 둔, 한쪽으로 기울어진 복음입니다. 우리는 그분을 ‘주님’으로 고백하며, 일단 그렇게 했으면 영원히 구원을 받은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이것은 예수님께서 가르치신 바가 아닙니다. 그분은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천국에 다 들어갈 것이 아니요.”(마7:21)라고 하셨습니다. 물론 영접 기도 자체가 잘못되었다는 말은 아닙니다. 예수님을 진정 구주로 모시려면 영접기도가 필요합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주님으로 영접했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그분이 우리 삶의 주인이시며 왕이라는 의미입니다. 우리 마음속의 그분의 자리를 두고 겨룰 사람이나 물건이나 활동이란 있을 수 없습니다. 그분은 주님이셔야 합니다. 큐리오스이십니다. 궁극의 주인이요 소유주라는 뜻입니다. 우리의 삶이 더 이상 우리의 소유가 아니라는 뜻입니다.

 

생각해보십시오. 여러분이라면 그런 사람과 결혼하겠습니까? ‘당신과 다른 애인들에게 모두 충실하되 그 중에서 당신이 첫째가 되리라.’고 말하는 사람과 말입니다. 그렇다면 우주의 왕이야 더 말해 무엇 하겠습니까?

 

“하나님은 저의 다른 애인들 중에서 첫째이십니다.”라고 말하는 신부를 그분이 용납하실까요? 언약의 관계도 없고 둘이 하나가 되는 연합도 없습니다. 얼마나 기막힌 기만입니까! 이들 ‘새 회심자들’은 자신의 이기적인 삶을 십자가에 죽이지 않았고, 내면에 예수님의 새로운 성품이 빚어질 자리도 내주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다만 더 나은 삶과 천국의 약속을 수용했을 뿐입니다. 흥미롭게도 그리스도인들이 박해받고 있는 세상의 많은 나라들에서는 사람들이 목숨을 잃는 것을 알고서도 예수님께로 옵니다. 정작 신앙의 자유를 누리는 우리들은 단지 더 나은 삶과 천국을 얻으려고만 예수님께로 옵니다. 그러나 우리도 목숨을 잃어야 합니다.

 

우리가 이런 식의 복음을 전해온 결과로, 오늘날 우리 사회의 많은 전형적인 복음주의자들은 기만 속에 살고 있습니다. 새로운 회심자들은 새로 찾은 ‘믿음’으로 힘을 얻고, 기독교 활동들에 참여하고, 교회에 나가고, 봉사 활동도 할 수 있습니다. 모두가 참신하고 재미있는 일이라서 말입니다. 이것은 마치 새로운 클럽에 들어가거나 새로운 스포츠를 배우거나 새로운 학교에 다니거나 새로운 직장에서 일하는 것과 같습니다. 참신한 느낌은 있지만 그들은 예수님께서 모든 참된 제자들에게 하라고 명하신 일은 한 적인 없습니다. 그것은 바로 그분을 따르는 대가를 계산하고, 그러고 나서 그 대가를 치르기로, 즉 목숨을 바쳐 그분을 섬기기로 영원히 결단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맞바꾸기입니다. 우리는 자신의 삶을 전부 드려야 합니다. 그러면 그 대신에 그분의 삶(성품)을 얻습니다. 예수님은 이것을 거듭 말씀하십니다.

 

막 8:34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자기와 자기의 유익을 잊고, 무시하고, 버리고, 잃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단단히 내게 붙어서, 계속) 나를(내 제자로서 나와 함께, 내 편에 서서) 따를 것이니라

 

그렇습니다. 우리는 그분께 단단히 붙어 있어야 합니다. 그저 기도 한 번 하고 나서, 이제 ‘거듭난’ 클럽에 들어가 천국으로 향하고 있다는 것만 빼고는 평소대로 사는, 그런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의 말씀은 이렇게 이어집니다.

 

막 8:35 누구든지 자기 목숨을 구원하고자 하면 잃을 것이요 누구든지 나와 복음을 위하여 자기 목숨을 잃으면 구원하리라

 

어떤 성경에는 “누구든지 나와 복음을 위하여(고작 이 땅에서만 사는) 자기 삶을 버리면(영원한 하나님 나라에서 더 높은 영적인 삶을) 얻으리라”(amp)고 되어 있습니다.

 

이것은 확실히 맞바꾸기입니다. 우리는 그분의 뜻에 따르기 위하여 내 삶의 주인으로서의 권리를 버립니다. 그러면 그 대신에 그분의 영원한 삶을 받습니다. 이것은 예수님을 따르는 삶의 지극히 중대한 부분이건만 오늘날 우리가 전하는 복음에는 그 점이 강조되고 있지 않습니다. 우리는 그저 혜택들만 듣고 있습니다. 요컨대 우리는 십자가의 영향과 결단은 전하지 않고 부활의 약속만 전하고 있는 것입니다.

 

어떤 목사님의 이야기를 들으니까 어떤 사람이 해병대 입대하기 위하여 12수를 하여 해병대에 입대하였다고 합니다. 서울대 들어가기보다 더 힘든 해병대라고 합니다. 왜 그렇게 해병대에 목을 맸을까요? 해병대 군인들을 보면 일단 멋있지 않아요. 박력도 있고 군기가 잡혀있고 그래서 그런 면만 보고 해병대를 지원합니다. 그러나 무적 해병이 그냥 되는 것입니까? 훈련 받는 과정부터 일반 병사들과는 다릅니다. 피땀 흘리는 훈련과정을 통과하고 자대에 배치되는데 자대에서도 역시 일반 부대와는 사뭇 다릅니다. 군기가 세고 훈련 강도도 높습니다. 그냥 입대만 한다고 해서 저절로 해병이 되지 않습니다.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영접 기도만 했다고 주님이 기뻐하시는 제자가 되지 않습니다. 그 대가를 치러야 합니다. 삶으로 주님을 인정하라

 

바울 시대에 신자의 삶은 시시각각 위험에 처해 있었습니다. 의심할 나위가 없었습니다. 예수님께 충성을 바치는 것은 목숨을 거는 일이었습니다. 바울은 이렇게 말을 잇습니다.

 

딤후 3:10 나의 교훈과 행실과 의향과 믿음과 오래 참음과 사랑과 인내와

딤후 3:11 박해를 받음과 고난과 또한 안디옥과 이고니온과 루스드라에서 당한 일과 어떠한 박해를 받은 것을 네가 과연 보고 알았거니와 주께서 이 모든 것 가운데서 나를 건지셨느니라

딤후 3:12 무릇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경건하게 살고자 하는 자는 박해를 받으리라

딤후 3:13 악한 사람들과 속이는 자들은 더욱 악하여져서 속이기도 하고 속기도 하나니

 

바울은 분명히 말했습니다. 디모데가 바울을 신뢰할 수 있는 근거는 바울의 교훈만이 아니라 삶의 모습 그리고 인생의 목표였습니다. 그것은 바울의 응답받은 기도들, 기적을 행하는 초자연적인 은사들,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치는 탁월한 능력이 아니었습니다. 바울이 지적한 것은 그런 특성들이 아니라 그의 생활방식이었습니다. 그것이 결정적인 요인이었고 지금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는 계속해서 “악한 자들과 속이는 자들”이 성행할 것이라고 했습니다. 악한 자들을 멀리해야 한다는 것쯤은 우리도 다 압니다. 하지만 가장 위험한 것은 속이는 자들, 즉 외관상의 정체와 진짜 성품이 일치하지 않는 사람들입니다. 요즘 CBS에서 신천지에 대한 방송을 하는데 너무나 심각하다는 것을 느꼈습니다.

 

이것은 바울뿐만 아니라 신약의 다른 많은 기자들도 우리에게 경고한 싸움입니다.

 

유 1:3 사랑하는 자들아 우리가 일반으로 받은 구원에 관하여 내가 너희에게 편지하려는 생각이 간절하던 차에 성도에게 단번에 주신 믿음의 도를 위하여 힘써 싸우라는 편지로 너희를 권하여야 할 필요를 느꼈노니

유 1:4 이는 가만히 들어온 사람 몇이 있음이라 그들은 옛적부터 이 판결을 받기로 미리 기록된 자니 경건하지 아니하여 우리 하나님의 은혜를 도리어 방탕한 것으로 바꾸고 홀로 하나이신 주재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부인하는 자니라

 

은혜는 순종할 힘을 준다

 

유다는 이런 사람들이 하나님 은혜의 메시지를 왜곡시킨다고 말합니다. 이 말세에 그런 현상이 아주 만연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은혜란 하나님이 불순종의 생활 방식까지도 몽땅 다 보호해주시는 것이라고 가르쳐왔습니다. 부정과 비리를 저지르면서도 하나님의 은혜를 말합니다. 이것은 심각한 기만입니다. 성경은 은혜를 커다란 반창고라고 가르치지 않습니다. 성경이 말하는 은혜는 진리의 요구를 행할 수 있도록 능력을 주시는 하나님의 내적 임재입니다.

 

우리는 은혜를 공로 없이 받는 하나님의 호의라고만 가르쳐왔습니다. 물론 그것은 그분의 호의이며 우리가 사거나 얻어낼 수 없는 것은 맞습니다. 그러나 은혜는 또한 우리에게 순종할 수 있는 능력을 주며, 은혜를 참으로 받았다는 증거는 우리의 경건한 생활 방식에서 나타납니다. 우리의 삶 속에 은혜가 실존한다면 그것은 그분의 말씀에 순종하는 것으로 확증됩니다.

 

약 2:17 이와 같이 행함이 없는(순종의 행위와 행동으로 뒷받침되지 않는) 믿음은 그 자체가 죽은(무효한) 것이라

약 2:18 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너는 믿음이 있고 나는 (선한) 행함이 있으니 (선한) 행함이 없는 네 (말뿐인) 믿음을 내게 보이라 나는 (순종의 선한) 행함으로 내 믿음을 네게 보이리라 하리라

약 2:19 네가 하나님은 한 분이신 줄을 믿느냐 잘하는도다 귀신들도 믿고 떠느니라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로 진정 구원받았다는 증거는 그 구원을 입증해주는 우리의 생활방식입니다. 은혜는 우리에게 하나님을 그분이 받으실 만하게 섬길 수 있는 능력을 줍니다. 물론 구원은 선물입니다. 살 수도 없고 얻어낼 수도 없는 것입니다. 다 맞는 말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잊고 사람들에게 말하지 않는 것이 있습니다. 구원을 얻는 유일한 길은, 다 버리고 자신의 삶을 내려놓고 그분의 주권을 고백하는 것이며, 그렇게 할 때 그분의 성품대로 살아갈 능력을 얻는다는 사실입니다.

 

오늘 본문을 보십시오.

 

딛 2:11 모든 사람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가 나타나

딛 2:12 우리를 양육하시되 경건하지 않은 것과 이 세상 정욕을 다 버리고 신중함과 의로움과 경건함으로 이 세상에 살고

딛 2:13 복스러운 소망과 우리의 크신 하나님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이 나타나심을 기다리게 하셨으니

딛 2:14 그가 우리를 대신하여 자신을 주심은 모든 불법에서 우리를 속량하시고 우리를 깨끗하게 하사 선한 일을 열심히 하는 자기 백성이 되게 하려 하심이라

딛 2:15 너는 이것을 말하고 권면하며 모든 권위로 책망하여 누구에게서든지 업신여김을 받지 말라

 

하나님의 은혜는 우리에게 모든 경건치 못한 것과 세상적인 정욕을 부인하고, 바르고 경건하며 절제하는 삶을 살도록 가르칩니다. 일반적으로 교사들은 우리를 가르쳐서 실력을 길러주거니와, 하나님의 은혜가 우리의 삶 속에서 하는 일이 바로 그것입니다. 우리가 이것을 말하고 권면해야 한다는 점에 주목하시기 바랍니다.

 

딛 3:8 이 말이 미쁘도다 원하건대 너는 이 여러 것에 대하여 (항상) 굳세게 말하라 이는 하나님을 믿는 자들로 하여금 조심하여 선한 일을 힘쓰게 하려 함이라 이것은 아름다우며 사람들에게 유익하니라

 

우리는 삶 속에 있는 하나님의 은혜의 능력으로 늘 선한 일에 힘써야 합니다. 구원받기 전에는 우리에게 은혜가 없었습니다. 은혜는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구약시대에는 다른 사람의 물리적인 목숨을 끊으면 살인자로 취급되어 지옥의 위험에 처하게 되었다고 우리에게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나 은혜 아래서는 형제를 바보라고 부르거나 편견을 갖거나 용서하기를 거부하거나 어떤 다른 형태의 증오를 품기만 해도 지옥 불의 위험에 처하게 된다고 가르치십니다(마5:21-22참조). 왜 그럴까요? 이제는 우리에게 은혜의 힘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성품대로 살아갈 능력이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사랑하시는 성도 여러분!

 

오늘 우리에게 이러한 은혜가 주어졌다는 사실이 얼마나 감사합니까? 우리 힘만으로 어떻게 순종할 수 있겠습니까? 그러나 은혜를 충만하게 받은 사람은 순종할 능력이 주어집니다. 오늘 성례주일을 맞이하여 그런 은혜가 우리 성도들에게 충만하게 임하시기를 축원합니다.

 

728x90
반응형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