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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약 --------------------/디모데전서

딤전 6장 12절(탐심, 그 부르짖는 사자) - 최태선

by Preacher 2023. 5. 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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딤전6장 12

탐심, 그 부르짖는 사자

최태선 목사 2003.10.13.

어지니교회 http://cafe.daum.net/eojini/

 

인간의 마음에는 하나님 외에는 그 무엇으로도 채울 수 없는 깊고 자연스러운 갈망이 있습니다. 이 세상에서의 우리 존재는 하나의 시험으로서, 곧 가장 깊은 영적 사귐을 준비하는 기간입니다. 그러나 우리들 대부분은 자신의 가장 깊은 갈망을 억누르고 하나님을 경멸하면서 이 세상 것에서 만족을 찾으려 합니다. 이런 길은 절망에 이를 뿐입니다.

 

평안을 찾고 자신의 모든 욕망을 채우는 것이 삶의 목표인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는 세상을 돌아다니다 보면,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꼼꼼히 준비한 후 여행을 떠났습니다. 그리고 몇 달 동안 이곳 저곳을 돌아다녔지만 자신이 찾고 있는 것을 발견할 수 없었습니다. 어느 날 그는 새로 생긴 무덤가에 앉아 있는 노인을 보았습니다. 그는 노인에게 다가가 누구의 무덤이냐고 물었습니다. 노인은 이 나그네에게 기막힌 이야기를 들려주었습니다.

 

우리 동네에 살던 나무꾼 두 사람이 가까운 숲으로 나무를 하러 갔다네. 그 때 나도 우연히 그곳을 지나가다 멀리서 두 사람을 보고 인사를 건넸지. 두 사람은 숲 근처에 앉아 대화를 나누느라 나를 보지 못했다네. 그래서 그들에게 다가갔더니 한 사람이 나를 보고는 재빨리 무엇인가를 옷 속에 감추더군. 그게 뭐냐고 물었지. 처음에는 둘 다 내 말을 들은 체도 하지 않더군. 그래서 다시 물었지. 그랬더니 마침내 자초지종을 말해 주면서 나더러 판단을 좀 내려달라고 하더군. 나는 두 사람에게 내 생각을 말해 줬다네.

 

한 사람이 말하기를, 그들이 숲 속을 걷고 있는데 뭔가 반짝이는 게 눈에 띄었다고 했네. 가까이 가보니, 금괴 두 개가 있었다네. 그러니까 내가 갔을 때, 두 사람은 그 금을 어떻게 할지를 놓고 옥신각신하던 중이었지. 나는 그것들은 금으로 가장한 죽음의 덫이니 다시 숲 속에 버리고 잊어버리라고 했네. 나는 자기 집에서 강도에게 살해당한 근처 도시의 한 은행가 이야기를 해주었지. 도둑들이 어딘가에 있다가 나무꾼들에게 금덩이가 있다는 걸 알면 주저 없이 그들을 죽일거라고 생각했네. 더욱이, 나무꾼들이 금을 가지고 있다가 그 사실이 드러나면, 사람들이 그들을 절도범은 물론 은행가를 살해한 범인으로 고발하지 않겠는가? 두 사람은 고개를 끄덕이더니 내가 제의한 대로 하겠다고 했다네. 그리고 나는 가던 길을 갔지.

 

그러나 두 사람은 내 충고를 무시한 채, 금을 놓고 계속해서 다퉜다네. 첫째 나무꾼은 금을 발견한 것은 자신이기 때문에 자신이 2/3를 가져야 한다고 했지. 둘째 나무꾼은 똑같이 나누어야 한다고 했다네. 결국은 첫째 나무꾼이 여기에 동의했네. 그러고는 자축하기 위해, 한 사람이 마을로 먹을 것을 사러 갔다네.

 

그러나 각기 혼자 있게 되자 두 사람의 마음에는 탐욕이 불타 올랐고 두 사람은 서로를 죽일 계획을 세웠다네. 마을로 내려간 나무꾼이 돌아왔을 때, 남아서 금을 지키던 나무꾼이 그를 죽였다네. 그러나 그는 금을 차지하지 못했어. 자기 친구가 음식에 독을 넣은 것을 모르고 먹었기 때문이지. 그래서 지금 두 사람이 이 무덤에 누워 있는 거라네.

 

여러분은 이 두 나무꾼의 죽음을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참으로 어리석은 사람들이라는 생각이 드십니까? 여러분이라면 그 노인의 말대로 그 금덩이를 숲 속에 버리고 잊어버릴 수 있겠습니까? 제 생각으로는 이 자리에 있는 어느 누구도 그 금덩이를 버려둔 채 산을 내려오지는 못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더구나 그 일을 없었던 것처럼 잊어버리기란 더더욱 불가능한 일이라 생각합니다.

 

그렇다면 그들로 하여금 움켜잡은 그 금덩이를 놓지 못하게 하는 것, 그것은 무엇이었을까요? 이야기에서 밝히고 있는 것처럼 불타오르는 탐욕, 바로 탐심인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인생을 절망에 이르게 하는 파멸의 길이었습니다. 오늘은 우리 모두가 탐심에 대해 생각해 보기를 원합니다. 탐심이란 무엇이며, 그 탐심에 대한 성경의 경고는 무엇이며, 또 우리가 그 탐심을 어떻게 극복할 수 있을 것인가? 에 대해 생각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먼저 탐심이란 무엇인가에 대해 살펴보겠습니다. 성경을 보면 모든 죄의 목록 가운데 탐심이 상위를 차지하고 있습니다. 십계명에서도 “네 이웃의 집을 탐내지 말지니라 네 이웃의 아내나 그의 남종이나 그의 여종이나 그의 소나 그의 나귀나 무릇 네 이웃의 소유를 탐내지 말찌니라”(출20:17)라고 탐심에 대해 경고하고 있습니다.

 

오늘의 본문 디모데 전서 6장 6절을 보면 “그러나 지족하는 마음이 있으면 경건이 큰 이익이 되느니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탐심이라는 말을 사용하지는 않았지만 우리는 이 구절을 통해 탐심이 무엇인가에 대한 정의의 단서를 발견할 수가 있습니다.

 

탐심은 우리가 무언가를 지나치게 갈망해서 하나님 안에서 누리는 만족함을 잃어버리는 것입니다. 탐심의 반대는 하나님 안에서의 만족함입니다. 하나님 안에서 누리는 만족함이 감소될 때, 탐심은 세상의 이익을 얻기 위해 증가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바울은 골로새서 3장 5절에서 탐심을 우상숭배라고 분류했습니다. “그러므로 땅에 있는 지체를 죽이라 곧 음란과 부정과 사욕과 악한 정욕과 탐심이니 탐심은 우상숭배니라” 탐심이 우상숭배인 이유는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만족감을 누려야 할 마음이 다른 무언가로부터 만족을 얻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탐심은 무언가를 지나치게 갈망해서 하나님 안에서의 만족함을 잃어버리는 것입니다. 또는 하나님 안에서의 만족함을 잃어버려서 다른 무언가를 구하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이런 의미로 본다면 십계명은 실질적으로 동일한 계명으로 시작하고 끝을 맺는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제일 계명이 무엇입니까? “너는 나 외에는 다른 신들을 네게 있게 말지니라”(출20:3) 이 말씀이 의미하는 바가 무엇입니까? 하나님 안에서 만족하라는 것입니다. 하나님만으로 만족하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제 10계명, 무릇 네 이웃의 소유를 탐내지 말라는 말씀이 무엇입니까? 동일하게 하나님 안에서 만족하라는 말씀입니다.

 

다시 한 번 정리해보면 탐심은 하나님 안에서 만족하지 못하도록 하나님보다 다른 것들을 더 바라고 추구하는 것입니다. 탐심은 하나님과 다른 모든 것들 사이에서 마음이 나뉘어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탐심을 우상숭배라고 한 것입니다. 여러분 탐심의 정의를 아시겠습니까? 탐심은 우리가 무언가를 지나치게 갈망해서 하나님 안에서의 만족함을 잃어버리는 것입니다. 하나님 안에서 만족함이 무엇입니까? 그것이 바로 믿음입니다. 따라서 탐심은 곧 믿음을 잃어버리는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6절부터 10절에서 탐심에 빠지지 말아야 하는 이유를 설명하고 있는 것입니다.

 

탐심에 대항하는 싸움은 곧 믿음을 지키기 위한 싸움입니다. 앞에서 살핀 십계명에 순종하는 길은 오로지 믿음으로만 가능합니다. 탐심은 가장 큰 불신앙의 한 형태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탐심이 무엇으로부터 말미암으며, 탐심이 얼마나 위험한 것인가에 대한 경고에 귀를 기울여야 합니다. 이제 성경이 우리에게 주는 탐심에 대한 경고를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첫 번째로 탐심은 결코 만족함을 주지 못합니다. 전도서 5장 10절은 “은을 사랑하는 자는 은으로 만족함이 없고 풍부를 사랑하는 자는 소득으로 만족함이 없나니 이것도 헛되도다”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은을 사랑하는 자도 풍부를 사랑하는 자도 그것 안에서 만족함을 얻지 못하게 된다는 것을 우리에게 가르쳐줍니다. 예수님께서도 누가복음 12장 15절에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삼가 모든 탐심을 물리치라 사람의 생명이 그 소유의 넉넉한 데 있지 아니하리라”

 

하지만 우리는 주님의 말씀보다도 세상의 진리에 귀를 기울입니다. 세상은 한결같이 주장합니다. 소유가 넉넉해야 행복하다. 성공해라. 돈을 벌어라. 그래도 돈은 있어야지요. 만일 우리가 주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지 않는다면,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닮기 원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지금 여기에서 예배를 드릴 이유가 없습니다. 우리가 세상의 원리들에 더 무게를 두면서 다만 마음의 평화를 꿈꾸기 위해 이 자리에 앉아있다면 그것은 참으로 어리석은 시간의 낭비일 뿐입니다.

 

세상에는 부유함에도 불구하고 불행한 사람이 많다는 것을 우리는 보고 알 수 있습니다. 가난함에도 불구하고 그 소유가 넉넉하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행복한 사람들이 있다는 것을 우리는 볼 수 있습니다. 주님의 말씀이 정확하다는 증거입니다. 미국에는 자살로 유명한 두 다리가 있습니다. 하나는 샌디에고에 있는 코로나도 다리이고 또 하나는 뉴욕의 부루클린 다리입니다. 코로나도 다리는 부자들이 뛰어내려 자살하는 곳으로 유명합니다. 부루클린 다리는 가난한 자들이 뛰어내리는 곳으로 유명합니다. 사람의 생명이 그 소유의 넉넉함에 있지 않은 것입니다.

 

두 번째로 탐심은 영적인 삶을 질식시킵니다. 예수님께서 씨뿌리는 비유를 말씀하실 때 어떤 씨가 “가시 떨기에 떨어지매 가시가 자라 기운을 막으므로 결실치 못하였고”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나중에 그 비유를 제자들에게 해석해 주시면서 씨는 하나님의 말씀이며, 가시가 무엇인지도 설명해 주셨습니다. “세상의 염려와 재리의 유혹과 기타 욕심이 들어와 말씀을 막아 결실치 못하게 되는 자요”(막 4:19) 세상의 염려, 재리의 유혹 기타 욕심은 탐심을 불러일으키는 재료들입니다. 또 탐욕이 하나님의 말씀에 대적하는 ‘세상 것들을 향한 열망’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떨어질 때부터 싸움은 시작되는 것입니다. ‘세상의 다른 것들을 향한 열망’은 너무 강해서 영적인 삶의 시작부터 철저히 봉쇄할 수 있습니다. 이렇게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믿음으로 받아드리지 못할 때, 탐심은 우리의 영적인 삶을 질식시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씨뿌리는 비유를 말씀하신 후에 이렇게 결론을 내리셨습니다. “그러므로 너희가 어떻게 듣는가 스스로 삼가라”(눅 8:18) 하나님의 말씀을 어떻게 들을 것인가 스스로 결정하라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어떻게 결정하시겠습니까? 탐심은 영적인 삶을 질식시키는 장본인입니다.

 

세 번째, 탐심은 무수히 많은 다른 죄를 낳습니다. 본문 10절에서 바울은 말합니다. “돈을 사랑함이 일만 악의 뿌리가 되나니” 하나님이 아닌 재물에서 만족함을 구하는 마음이 곧 다른 모든 종류의 죄악들을 만들어내는 마음이라는 의미가 내포되어 있습니다. 세상에는 수많은 죄의 종류가 있습니다. 시기, 질투, 다툼, 거짓말, 사기, 절도, 간음, 살인..... 수도 없이 많은 이 죄들의 뿌리가 돈을 사랑함이라는 것입니다.

 

야고보서 4장 1절에서 야고보 사도는 “너희 중에 싸움이 어디로, 다툼이 어디로 좇아나느뇨 너희 지체 중에서 싸우는 정욕으로 좇아 난 것이 아니냐”라고 말합니다. 너희 지체 중에서 싸우는 정욕이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말씀과 탐심이 몸 안에서 싸우는 것입니다. 그리고 탐심이 이겨 그 탐심 때문에 싸움과 다툼이 일어난다는 것입니다. 탐심은 모든 죄들을 양산해 내는 사육장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온 힘을 다해 탐심으로부터 벗어나 우리의 모든 힘을 다해 하나님 안에서 만족하게 되는 그 길을 가기 위해 최선을 다해야 하는 것입니다.

 

네 번째로 탐심은 우리가 가장 도움을 필요로 하는 순간에 우리를 넘어뜨립니다. 탐심은 우리의 죽음의 시간에서조차 우리를 넘어뜨립니다. 바울은 7절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가 세상에 아무 것도 가지고 온 것이 없으매 또한 아무 것도 가지고 가지 못하리라” 우리의 삶에 존재하는 가장 위험한 위기의 순간에, 다른 어느 때보다 만족함과 소망과 안전이 필요할 때, 우리가 갖고 있는 돈과 재물들은 날개를 달고 멀리 날아가 버릴 것입니다. 그 결과 돈과 재물은 우리를 넘어뜨립니다. 그것들은 우리가 정작 어려울 때는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 것입니다.

 

영국의 여왕 엘리자베스는 그녀의 죽음이 다가오는 마지막 순간 이렇게 절규하였습니다. “내가 가진 이 모든 것으로 일분 일초 단 한 순간이라도 더 살 수 있다면...” 그러나 그녀의 가진 모든 것으로도 그녀의 삶은 연장되지 않았습니다. 다만 우리는 오로지 하나님 안에서 가졌던 만족함만을 가지고 영원의 시간 속으로 들어가게 될 것입니다.

 

여러분 만일 우리가 바로 이 순간 죽음을 맞이한다면, 하나님 안에서 우리가 누렸던 만족함을 가지고 주님 앞에 나아가겠습니까? 아니면 탐심이 차지하고 있던 텅 빈 마음을 가지고 그분 앞에 가시겠습니까? 탐심은 우리가 가장 도움을 필요로 하는 순간에 우리를 넘어뜨리는 사단의 도구입니다.

 

다섯 번째, 결국 탐심은 우리의 영혼을 파괴시킵니다. 본문 9절에서 바울은 다시금 말합니다. “부하려 하는 자들은 시험과 올무와 여러 가지 어리석고 해로운 정욕에 떨어지나니 곧 사람으로 침륜과 멸망에 빠지게 하는 것이라” 결국 탐심은 영혼을 지옥 속에서 파멸시킬 것입니다. 바울이 여기에서 말하는 침륜과 멸망이란 이 땅에서 당하는 일시적인 실패나 낭패가 아니라 지옥에서 당하는 최종적인 파멸입니다. 그는 12절에서 믿음의 선한 싸움을 싸우고 영생을 취하라고 말합니다. 믿음의 선한 싸움이란 탐심과 대적하는 것을 말합니다. 그리고 나서 그는 덧붙입니다. “영생을 취하라 이를 위하여 네가 부르심을 입었고 많은 증인 앞에서 선한 증거를 증거하였도다 ”탐심을 피하고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에 대한 믿음을 위한 싸움을 싸울 때 가장 문제가 되는 것은 영원한 생명입니다.

 

다시 말하지만 바울이 9절에서 말하는 침륜과 멸망은 단순히 우리의 가정생활이나 사업을 망쳐버린다는 그런 일시적인 의미가 아닙니다. 그는 탐심이 우리들의 영원한 생명을 파멸시킬 수 있음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성경 말씀을 통해 탐심이 결코 이길 승산이 없는 우상숭배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우리에게 인자하게 경고해주십니다. 탐심은 길이 막힌 골목길과 같습니다. 탐심은 속임수이며 함정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11절을 통해 말하는 것입니다. ‘이것들을 피하라’ 그렇습니다. 우리는 탐심이 다가오는 것을 보면 피해야 합니다. 그러나 그것이 그렇게 간단한 문제가 아닙니다. 그것들이 우리에게 달려올 때 호락호락 다가오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탐심은 겨울에 내리는 눈과 같이 소리 없이 다가오는 경우도 있습니다. 무의식적으로 다가오기 때문에 그것도 무섭습니다. 하지만 대부분의 경우 마치 굶주린 사자와 같이 무섭고 맹렬한 기세로 달려옵니다. 눈을 부릅뜨고 입을 벌리고 맹렬하게 울부짖으며 다가오는 사자, 여러분은 어떻게 피하시겠습니까?

 

먼저 제가 아프리카 남부에 살고 있는 마사이족의 관습을 하나 소개하겠습니다. 마사이는 용맹하기로 소문난 크고 강한 족속입니다. 그러한 부족이지만 그 명성에 걸맞게 마사이의 용사가 되는 것은 매우 어려운 관문을 통과해야 합니다. 마사이의 용사가 되기 위해서는 혼자의 힘으로 사자를 잡아야 합니다. 마사이의 용사 지망생은 약 20센티 정도 되는 단단한 막대기와 단검만을 가지고 사자를 잡으러 갑니다. 사자가 입을 벌리고 달려들 때 오른 손에 단단히 쥐고 있던 막대기를 정확하게 사자의 입으로 집어넣습니다. 목 가까이 깊게 집어넣으면 사자는 입을 다물거나 물 수 없게 됩니다. 그때 재빨리 사자의 목을 왼손으로 감아쥐고 단검을 뽑아 사자의 목줄기에 꽂는 것입니다. 그렇게 해서 사자를 혼자의 힘으로 잡았을 때 비로소 마사이의 용사라는 칭호가 주어지는 것입니다.

 

여러분 한 번 상상을 해보십시오. 사자가 그 큰 입을 벌리고 달려드는 순간 손을 뻗어 사자의 입으로 집어넣어야 합니다. 단 한치의 오차라도 생긴다면, 막대기가 부러지거나 삐끗하기만 해도 그대로 사자의 날카로운 이빨에 손이 잘리는 것입니다. 그리고 사자의 무기가 어디 이빨 하나뿐입니까? 그 센 앞발에 맞거나 날카로운 발톱에 긁히기만 해도 치명상을 입게 된다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일 아니겠습니까? 정말 필사의 용기가 없다면 불가능한 일입니다.

 

사랑하는 어지니교회 성도 여러분 우리의 믿음도 마찬가지입니다. 믿음은 용기입니다. 무시무시한 사자가 포효하며 입을 벌리고 달려들 때, 정신을 잃고 자빠지면 그대로 사자의 밥이 되는 것처럼 탐심이 이런 무시무시한 사자와 같이 달려들 때 우리가 혼비백산한다면 우리는 그대로 탐심의 밥이 되는 것입니다. 사단의 먹이가 되고 마는 것입니다.

 

연약한 인간이 어떻게 이런 용기를 가질 수 있겠습니까? 그것은 기도하는 것입니다. 시편 119편 3절에서 시편 기자는 이렇게 기도합니다. “내 마음을 주의 증거로 향하게 하시고 탐욕으로 향치 말게 하소서” 이 구절을 다르게 표현하면 이렇습니다. “내 마음에 강한 능력과 용기를 가져다 줄 은혜를 내게 허락하소서. 당신의 진리에 대한 열망을 내게 주셔서 세상의 것들에 대한 욕망의 힘을 꺽어버리게 하소서”

 

하나님께서 베푸시는 은혜가 없다면 우리의 마음은 단지 돈과 재물만을 추구하게 될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의 마음에 그분의 말씀을 사모하는 심령을 허락해 주시기를 간구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에는 탐심에 대한 승리가 약속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기도를 통해 탐심이라는 굶주린 사자를 대항할 용기를 갖게 되면 우리는 이제 단단한 막대기와 사자의 목을 한 번에 뚫을 날카로운 단검을 준비해야 합니다. 그것들은 특별히 탐심을 제거하기 위해 성령님께서 친히 만드신 것입니다. 우리는 마음의 문 앞에 서서 굳건하게 그 문을 지켜야 합니다. 탐심이라는 사자가 입을 벌리고 달려들 때 우리는 먼저 디모데전서 6장 6절이라는 막대기를 탐심의 목 깊이 집어넣어야 합니다. “그러나 지족하는 마음이 있으면 경건이 큰 이익이 되느니라.” 우리에게 지족하는 마음이 있으면 탐심은 아무리 입을 다물어 우리를 물어뜯으려 하여도 입을 닫을 수가 없게 되는 것입니다. “지족하는 마음이 있으면 경건이 큰 이익이 된다! 탐심의 사자야 덤벼라! 입을 다물어 보아라” “나는 하나님 안에서 만족할 때에 큰 이익을 얻었다. 바로 지금 하나님께서 나의 보화이시며, 앞으로도 영원토록 그러하실 것이다. 이것이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나의 믿음이다. 내 앞에서 무릎을 꿇어라!”

 

그리고 순간적으로 당황해 하는 사자의 목을 조이며 단검을 뽑아야 합니다. “돈을 사랑치 말고 있는 바를 족한 줄로 알라 그가 친히 말씀하시기를 내가 과연 너희를 버리지 아니하고 과연 너희를 떠나지 아니하리라 하셨느니라 그러므로 우리가 담대히 가로되 주는 나를 돕는 자시니 내가 무서워 아니 하겠노라 사람이 내게 어찌하리요 하노라”(히 13:5-6) 하나님의 은혜가 담겨있는 이러한 충만한 약속을 의지하고 이 말씀의 단검으로 탐심이라는 사자의 목줄기를 깊게 찌르는 것입니다.

 

자 이제 길게 늘어진 탐심의 사자 옆에서 기념촬영을 할 준비가 되셨습니까? 그렇다면 여러분은 믿음의 용사가 된 소감을 준비하셔야 합니다.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 그리고 믿음의 용사가 되기 위해 믿음의 길에 들어서는 후배들에게 자신 있게 말하시기 바랍니다. “나의 하나님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영광 가운데 그 풍성한 대로 너희 모든 쓸 것을 채우시리라”

 

우리의 믿음에 있어 중요한 것은 외적인 형식에 익숙해 지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내면이 변화되는 것입니다. 믿음은 주로 마음의 문제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성을 빼앗는 자보다 마음을 다스리는 자가 더 용기있는 자라고 기록합니다. 만물보다 심히 타락한 것이 사람의 마음이라 기록되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도 사람의 속에서 나오는 것이 더 더럽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서두에 말씀 드린 것처럼 사람에게는 하나님 이외에는 그 무엇으로도 채울 수 없는 깊고 자연스런 갈망이 있습니다. 신앙이란, 믿음이란 우리의 마음을 하나님으로 채워가는 과정입니다. 우리가 염려를 버리고 조급함을 뛰어넘고, 탐심을 물리친다면 우리는 우리 마음의 더 많은 부분을 하나님의 말씀과 은혜로 채우고 겸손한 자세로 순종의 길을 평안하게 달려갈 수 있을 것입니다.

 

이 시간 이 자리에 있는 우리 모두가 탐심의 사자를 물리침으로, 그 유명한 마사이 용사보다 더 용기 있는 영광스런 믿음의 용사들이 다 되시기를 그리스도 예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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