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신약 --------------------/디모데전서

딤전 6장 7-10절(하나님이냐, 돈이냐?) - 최태선

by Preacher 2023. 5. 28.
728x90
반응형

딤전6장 7-10

하나님이냐, 돈이냐?

최태선 목사 2004.10.23.

어지니교회 http://cafe.daum.net/eojini/

 

이 세상에서 사람들이 접하는 문제 가운데 가장 많은 것이 돈의 문제입니다. 아마도 이 세상을 사는 동안 돈으로부터 자유로운 사람은 그리 많지 않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도 다른 어떤 주제보다 돈에 대해 자주 말씀하셨습니다. 사실 돈은 보이는 세계에서 가장 많은 사람들이 가장 열심히 추구하는 가치입니다. 그래서 기독교의 비판자들은 교회가 이 세상에서 성공하지 못한 가난한 자들을 억압하고 보이지 않는 세계의 보상을 가장 바라게 만들었다고 오랫동안 비난해왔습니다.

 

예수님은 때때로 돈에 대해 경멸에 가까운 태도를 보이셨습니다. 그분은 부자에게 모든 재산을 남에게 주라고 조언하셨습니다. 그분은 구약성경 최고의 부자인 솔로몬도 평범한 들에 핀 백합보다 못하다고 낮게 평가하셨습니다. 그분은 값비싼 향유를 그분의 발에 쏟아, 돈을 허비했다고 생각하게 만든 여인을 칭찬하셨습니다. 하지만 돈에 대한 그분의 비유와 선언이 강조하는 바는 이제 더이상 세상 사람들이 받아들이지 않는 진부한 발언이 되었습니다.

 

‘죽을 때 돈을 가지고 갈 수 없다’는 그분의 말씀은 장례식장에서도 받아들이지 않는 말이 되었습니다. 미국 남부에 윌리 스톡스 2세라는 한 유명한 도박사가 살해당했습니다. 그 사건은 그의 가족들이 최고급 차인 캐딜락을 그의 관으로 사용하면서 세상 사람들의 관심을 끌게 되었습니다. 그의 캐딜락 관은 가장 호화롭게 장식되었습니다. 그리고 스톡스의 휘황찬란한 번호판이 달려 있었습니다. 신문에는 방부처리된 스톡스의 시신이 밀랍박물관의 전시물처럼 핑크빛 정장차림으로 캐딜락의 운전대 앞에 앉아 있는 사진이 실렸습니다. 그의 왼 손 엄지와 검지 사이에는 백달러 지폐가 다섯 장 들려 있었습니다.

 

우리 나라의 경우도 비슷한 모습들을 보게됩니다. 불교식 장례 예식을 보게 된 적이 있는데 시신의 가슴에 지폐다발을 쥐어주는 모습을 볼 수 있었습니다. 죽은 사람이 여비로 쓸 수 있도록 배려한다는 것입니다. 그야말로 장례식장에서조차 사람들은 돈을 버리지 못하는 것입니다.

 

정말 돈은 보이는 세계에서 너무나도 강력하고 매혹적인 위력을 발휘합니다. 돈만 있으면 혼잡한 고급 식당에서도 신기하게 멋진 식탁이 차려지고, 보잘것없는 추남이 아름다운 여인을 골라서 사귈 수 있습니다. 미국의 티브이 프로 가운데 <백만장자와 결혼하기>라는 프로그램이 있습니다. 백만장자라는 이유로 생면부지의 남자와 결혼하겠다고 경쟁하는 여자들이 수도 없이 참가합니다. 그 프로를 시청해보면, 너무나 멋진 여성들이 성격이나 인품도 알 수 없는 모르는 남자의 선택을 받기 위해 그야말로 사력을 다해 눈물겨운 노력을 하는 것을, 뭐랄까요? 신기하기도 하고 한편으로는 좀 어이없다는 느낌으로 보게됩니다. 그리고 백만 불의 상금을 타기 위해 쥐와 바퀴벌레까지 잡아먹는 <서바이벌>이라는 프로를 보면서 우리는 새삼 돈의 위력을 다시 한 번씩 느끼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그러한 돈을 경계해야 할 대상으로 보셨습니다. “네 보물이 있는 그곳에 네 마음도 있느니라.” 예수님의 이 말씀은 손에 잡히는 보물로 가득한 사회에서 사는 우리에겐 일종의 경고와도 같습니다. 그분은 돈을 사악한 영적 세력, 하늘나라에 대항하는 맘몬 신으로 묘사하셨습니다. 예수님은 “너희가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기지 못하느니라”고 단호하게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돈의 위력에서 자유로울 수 있는 방법이라면 무엇이건 하라고 하셨습니다. 심지어 모든 소유를 줘 버리라고 말씀하십니다. 절반이 아닙니다. 쓰고 남는 것을 주라는 것이 아닙니다. 말 그대로 있는 재산을 다 주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비단 예수님뿐만 아니라 예수님의 가르치심을 제대로 깨달은 모든 믿음의 사람들이 하는 말이기도 합니다.

 

때로 책 한 권은 사람의 인생을 완전히 바꾸어 놓기도 합니다. 저의 신앙 여정에도 그런 책이 몇 권 있습니다. 그 중에 쟈크 엘룰이라는 사람이 지은 <하나님이냐, 돈이냐?>라는 책이 있습니다. 저는 그 책을 읽고 성경을 또 다른 각도에서 보게 되었습니다. 돈에 대해 다른 생각을 가지게 된 것은 말할 것도 없습니다. 그리고 돈에 대한 생각이 근본적으로 바뀌지 않는 한 우리의 신앙은 가짜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 생각은 지금도 여전히 변함이 없습니다. 요한 웨슬레도 비슷한 말을 남겼습니다. “당신의 지갑이 회개하기 전까지는 당신은 진정으로 회개한 것이 아니다.” 여러분의 지갑은 회개하셨습니까?

 

엘룰은 그의 책에서 신앙이란 돈의 영향력을 없애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그래서 헌금을 함으로 해서 그 돈이 자신을 지배하지 못하게 하라고 권합니다. 그리고 기부라는 행위를 통해 돈이 가지는 영향력을 무력화시키라는 것입니다. 심지어는 극단적인 방법으로 지폐 다발을 낯선 사람에게 줘 버리라고까지 합니다. 그리고 공중에서 복잡한 도로를 향해 뿌려버리는 것도 한 가지 방법이라고 제안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렇게 할 수는 없습니다. 그렇게 하는 것은 너무나 성의 없는 태도라고 생각하게 됩니다. 더 나아가 그렇게 하는 것이 불경스럽다는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그것은 우리가 이미 맘몬의 영적인 권세에 굴복하고 있다는 단서입니다. 우리는 돈 낭비를 일종의 신성모독으로 여기고 있기 때문입니다.

 

2년 전 윤공부 목사님께서 연말에 남은 참나무 교회 헌금을 어려운 시골 교회들에 다 보냈다고 말씀하시면서 ‘그냥 다 뿌려버렸습니다.’라고 말씀하시는 것을 들은 적이 있습니다. 저는 그분의 의중과 그 말씀의 의도를 이해합니다. 우리는 하늘나라를 섬기는데 돈을 쓰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누군가에게 돈을 주면서도 그 요점을 놓칩니다. 가장 효율적이고 투자한 것에 비해 가장 좋은 결과를 얻는 대상을 선택합니다. 당연히 세금 공제 영수증과 감사의 카드를 받을 수 있는 곳을 선택합니다. 그러나 그러한 태도와 방법은 성경의 가르침과는 정반대되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힘에 겹도록 흔쾌히 바치라고 말합니다. 바치는 행위가 즐거울 수 있는 이유는 본질적으로 비이성적인 행동이기 때문입니다. 하늘나라는 돈으로 섬기는 것이 아닙니다. 가장 효율적인 것은 가장 이성적으로 돈의 영향을 받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면 돈의 위력을 깨뜨릴 수 없습니다. 돈의 영향력을 무력화할 수 없습니다. 우리는 본능적으로 돈을 철제 금고와 비밀 장소에 쌓아 둡니다. 그러나 무작정, 그야말로 무작정 내어줄 때 돈은 풀려나고, 경쟁과 손익계산서가 지배하는 세상에 은혜가 나타나는 것입니다.

 

우리는 엘룰의 말처럼 신의 지위에 오른 돈을 우습게 여기고 나를 누르는 돈의 지배력을 깨뜨릴 필요가 있습니다. 돈을 있는 그대로 하나님께서 하늘나라에 투자하라고 내게 맡기신 재화로 볼 수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하늘나라는 영원한 배당금을 주는 유일한 나라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가난한 자, 소외당한 자, 장애가 있는 자, 그러한 소자들에게 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렇게 하면 그 일을 예수님 자신에게 직접 한 일로 봐 주시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또 그 일을 할 때는 은밀하게 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네 오른 손이 하는 일을 왼 손이 모르게 하라.” 그리고 이렇게 덧붙이셨습니다. “은밀한 중에 보시는 너의 아버지가 갚으시리라.”

 

하지만 돈은 우리를 마술처럼 사로잡고 결코 이루어질 수 없는 환상으로 유혹합니다. 최근에 4000억원이 넘는 재산을 가지 골프 천재 타이거 우즈가 네덜란드 모델 출신의 백인 여성과 결혼하였습니다. 결혼식에만 수십억원의 돈이 들었다고 합니다. 초호화 요트를 타고 신혼여행을 다니고 있다는 뉴스가 전해집니다. 그야말로 돈이 보여주는 환상입니다. 그러나 그 환상이 얼마나 오래 가겠습니까? 그리고 그 환상이 세상사람들이 보는 것처럼 그렇게 행복하겠습니까? 남들의 모습 속에서 우리는 그것을 아는 것도 같습니다. 그러나 우리 자신의 삶 속에서는 평생동안 그 환상에서 벗어나기가 어렵습니다. 그래서 우리의 인생은 돈과의 결코 졸업할 수 없는 평생의 싸움터가 됩니다. 돈은 인격적인 힘입니다. 그래서 돈은 나를 지배하고 움직입니다. 사실 더 간단히 말하면 돈은 신입니다. 예수님은 돈을 그렇게 부르신 것입니다. 맘몬, 그것은 인격을 가진 신의 이름인 것입니다.

 

오늘의 본문을 통해 우리는 왜 예수님께서 돈을 그렇게 부르셨고, 왜 우리가 그 맘몬을 무력화시켜야만 하는 가에 대해 생각해보도록 하겠습니다.

 

바울은 10절에서 “돈을 사랑함이 일만 악의 뿌리가 되나니”라고 말했습니다. 그는 무슨 의미로 이 말을 했을까요? 죄를 지을 때에 언제나 돈이 마음속에 있다는 의미로 말한 것일까요? 그렇지는 않을 것입니다. 우리가 돈에 대해 생각하지 않을 때에도 무수한 죄가 자행됩니다. 우리는 바울의 말을 이렇게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는 세상 속에서 자행되는 모든 악이 어떤 마음의 상태, 즉 돈을 사랑하는 것과 같은 마음 상태에서 비롯된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그렇다면 돈을 사랑한다는 말은 무슨 의미일까요? 그 말은 액면 그대로 배추를 사랑한다는 말이 아닙니다. 배추가 무슨 말인지 아시죠? 고스톱 치는 자리에서는 만원짜리를 배추라고 부르더군요. 물론 오천원짜리 당근도 아닙니다. 그리고 금화나 은화를 간절히 원한다는 뜻이 아닙니다. 돈을 사랑한다는 말의 의미를 제대로 이해하려면 먼저 “돈이 무엇인가?”라는 질문을 던져야 할 것입니다. 돈이란 인간의 자원을 대표하는 단순한 상징일 뿐입니다. 돈은 우리가 하나님 아닌 다른 것으로부터 얻을 수 있는 것을 대표합니다. 하나님께서는 돈이 아니라 은혜라는 화폐를 유통시키십니다. 그래서 이사야 55장 1절을 통해 이렇게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너희 목마른 자들아 물로 나아오라 돈 없는 자도 오라 너희는 와서 사 먹되 돈 없이, 값없이 와서 포도주와 젖을 사라” 하나님은 은혜를 유통시키십니다. 돈은 인간적인 자원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돈을 사랑하는 마음은 인간적인 자원이 제공할 수 있는 것에 희망을 고정시키고, 그것의 즐거움을 추구하며, 그것을 굳게 신뢰하는 마음입니다. 돈에 대한 사랑은 실질적으로 돈에 대한 믿음과 동일합니다. 돈이 자신의 욕구를 충족시켜 주고, 자기를 행복하게 만들어 줄 것이라는 믿음입니다. 돈에 대한 사랑은 은혜에 대한 믿음의 자리를 차지합니다. 그것은 인간적인 자원에 대한 믿음입니다. 그러므로 돈에 대한 사랑 또는 돈에 대한 신뢰는 하나님의 약속에 대한 불신앙의 다른 이름인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마태복음 6장 24절에서 말씀하셨습니다. “한 사람이 두 주인을 섬기지 못할 것이니...그러므로 너희가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기지 못하느니라.” 그렇습니다. 우리는 하나님과 재물을 동시에 섬길 수 없습니다. 한 쪽에 대한 신앙은 다른 한 쪽에 대한 불신앙입니다. 돈을 사랑하는 마음은 만족함을 얻기 위해 하나님의 은혜에 의존하지 않는 것입니다.

 

바울이 돈을 사랑함이 일만 악의 뿌리가 된다고 말한 것은, 하나님의 약속에 대한 불신앙이 우리 마음에 있는 모든 죄악된 태도의 주된 뿌리라는 의미를 내포하고 있습니다. 바울은 로마서 14장 23절에서 이러한 사실을 좀 더 명확하게 말합니다. “믿음으로 좇아 하지 않는 모든 것이 죄니라.” 믿음의 부재는 죄악된 동기와 행동을 유발시킬 뿐입니다. 이런 말이 극단적으로 들릴지 모릅니다. 그러나 이것은 바울의 철저한 하나님 중심성을 선명하게 드러낸 표현입니다. 하나님 안에서 누리는 만족함에서 비롯되지 아니한 것, 바로 그것이 죄입니다. 사람들 사이에서 아무리 인정받고 존경받으며 호사를 누린다 해도, 가장 중요한 요소인 하나님의 영광에 대한 사랑이 없으면 불완전하고 결함을 가진 상태인 것입니다.

 

성경에는 하나님 아닌 다른 것에 의지하는 태도로 인해 죄가 유발된다는 많은 조언들이 담겨 있습니다. 예를 들어 욥은 자신에게 흠이 없음을 변명하는 말속에서 돈을 의지하는 것과 죄악으로의 유혹 사이에 밀접한 상관 관계가 있는 것 같은 말을 남겼습니다. “내가 언제 금으로 내 소망을 삼고 정금더러 너는 내 의뢰하는 바라 하였던가... 내 마음이 가만히 유혹되어 손에 입맞추었던가 이 역시 재판장에게 벌받을 죄악이니 내가 그리하였으면 위에 계신 하나님을 배반한 것이니라”(욥 31:24, 27-28) 금으로 소망을 삼고 정금을 의뢰하면 하나님을 배반하고 죄를 범하는 자리로 이끌린다는 것입니다. 이와 유사한 내용이 잠언에도 실려 있습니다. “자기의 재물을 의지하는 자는 패망하려니와 의인은 푸른 잎사귀 같아서 번성하리라”(잠 11:28) 재물을 의지하는 자가 죄악된 삶을 통해 파멸에 이르게 될 것이라는 의미를 담고 있는 것입니다.

 

이사야는 군대를 의지하는 자들에게 경고하면서 이러한 그릇된 신뢰가 그들을 죄악과 악행으로 인도하며, 궁극적으로는 파멸에 이르게 할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도움을 구하러 애굽으로 내려가는 자들은 화 있을진저 그들은 말을 의뢰하며 병거의 많음과 마병의 심히 강함을 의지하고 이스라엘의 거룩하신 자를 앙모치 아니하며 여호와를 구하지 아니하거니와”(사31:1) 그런 후에 그는 이처럼 인간적인 자원을 의지하고 은혜를 거부하는 자들에게 내리는 여호와의 진노를 묘사했습니다. 놀랍게도 그는 하나님의 진노가 악행과 행악 위에 내릴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이사야가 말하는 악행과 행악이 무엇입니까? 그것은 인간적인 자원에 대한 믿음을 말하는 것입니다. “일어나사 악행하는 자의 집을 치시며 행악을 돕는 자를 치시리니”(사31:2) 하나님께서 베푸실 은혜에 대한 불신앙이 “악행하는 자”와 “행악을 돕는 자”를 만들어 낸다는 사실이 중요한 것입니다.

 

“이것을 사모하는 자들이 미혹을 받아 믿음에서 떠나 많은 근심으로써 자기를 찔렀도다” 하나님께서 구태여 믿음에서 떠난 자들을 치시지 않더라도 그 결과는 마찬가지입니다. 그들이 생각하는 대로 문제가 해결되기는커녕 오히려 많은 근심을 가지게 될 뿐 아니라 그 근심이 자기를 찌를 것이라는 말입니다. 그렇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확실하게 결론을 내려야 할 것입니다. 하나님을 믿을 것인가 돈을 믿을 것인가? 하나님이냐 돈이냐?를 결정해야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따르던 초기 공동체들은 맘몬신에 대항하는 일종의 저항군을 형성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아무도 제 물건을 제것이라고 주장하지 않았습니다. 물건을 서로 통용했습니다. 집이나 땅이 있는 자들은 그것을 팔아 사도들의 발 앞에 내려놓았습니다. 그리고 그것을 아무런 원망이나 불평 없이 필요한 자들의 필요에 따라 누구나 사용할 수 있었습니다. 그야말로 돈이 무력화된 것입니다. 그들의 통화는 돈이 아니라 사랑이었습니다. 그리고 그것을 가능하게 한 것은 바로 하나님의 은혜였던 것입니다.

 

히브리서는 ‘재산을 빼앗기면서도.. 그 일을 기쁘게 당한’ 신자들의 이야기를 들려줍니다. 제정신이라면 재산을 빼앗기는 일을 기쁘게 당할 사람은 없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하나님을 의지했습니다. 그들의 그러한 믿음은 그들이 보이지 않는 세계에 있는 ‘더 좋고 영구한 유산’을 고대하고, 그들 자신을 위해서가 아니라 하나님을 위해 사는 것을 가능케 한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고린도 교인들에게 불신자들에게 본을 보이기 위해 소송을 취하하고 사기를 당하는 쪽을 택하라고 조언했습니다. 아빌라의 성녀 테레사는 굶주린 사자들 가운데를 거니는 것처럼 ‘부’를 위험하게 보게 해달라고 기도했습니다. 어느 날 부유한 후원자가 그녀에게 다이아몬드와 보석들을 보여주자 “나는 혼자서 웃고 말았고 그런 것들을 소중히 여기는 사람들이 측은했다. 주님이 나를 위해 예비해 두신 것들이 기억났기 때문이다.” 방식은 달랐지만 이들은 모두 보이는 세계의 보물, 인간의 자원인 돈을 우습게 여김으로 자유를 얻은 것입니다.

 

가난한 사람은 돈이 없어 불편합니다. 그리고 돈을 가진 사람들이 부럽습니다. 부자는 오히려 더 많은 것을 원하는 자신의 탐욕과 싸워야 합니다. 대부분의 경우 돈에 대해 더 많은 걱정을 가지고 있습니다. 돈은 가난하건 부유하건 모두에게 강력한 유혹이 됩니다. 돈은 하나님에 대한 믿음과 현실에 대한 절박한 상황 사이의 충돌이 벌어지는 치열한 전장입니다. 보이는 세계와 보이지 않는 세계가 충돌하는 싸움터입니다.

 

“내가 비천에 처할 줄도 알고 풍부에 처할 줄도 안다.”고 사도 바울은 말했습니다. “어떠한 형편에든지 내가 자족하기를 배웠노라.” 그는 돈을 많이 소유하지 않았고, 그 돈으로 하나님의 역사를 성취하는 데 썼으며 돈에 조금도 매이지 않았습니다. 여러 세기에 걸쳐 기독교 성인들은 돈에 대해 이와 유사한 거룩한 무심함을 보여주었습니다. 그 중에 한 사람 존 웨슬레는 자신의 집이 불타버렸다는 소식을 전해 듣고 이런 반응을 보였습니다. “주님의 집이 불탔다. 내가 책임질 일이 하나 줄어들었다.”

 

사랑하는 어지니교회 성도 여러분

 

그리스도인에게 있어 가장 정확한 믿음의 시금석은 바로 돈에 대한 태도입니다. 만일 돈이 있어야 하나님의 일을 할 수 있다고 누군가 말한다면 그는 하나님이냐 돈이냐의 질문에서 돈을 선택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왜 사랑하는 자녀들이 가난하게 사는 것을 좋아하시겠느냐고 반문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는 하나님이냐 돈이냐의 질문에서 돈을 선택한 것입니다. ‘아무리 그래도 돈은 있어야지요.’라고 말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는 하나님이냐 돈이냐의 질문에서 돈을 선택한 것입니다.

 

저는 오늘 이 시간 여러분에게 말씀드리는 이 문제가 현실적으로 얼마나 어려운 일이며 또 결정하기 힘든 문제인가를 잘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분명히 말씀드릴 수 있는 것은 하나님은 전능하시며 하나님의 말씀은 결코 틀리지 않는 진리라는 사실입니다. 세상은 우리에게 하나님과 돈 모두를 가져야 한다고 우리를 회유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우리가 몇 주전에 살펴보았던 이스라엘의 행음과 똑같은 죄입니다. 그들은 결코 그들의 여호와 하나님을 부인하지 않았습니다. 다만 좀더 풍성한 소출을 기대했던 것뿐입니다. 좀 더 풍성한 소출이 바로 오늘날의 돈입니다. 그들은 선택해야만 했습니다. 하나님이냐 돈이냐? 그들은 결정하지 못하고 둘 모두를 선택하였습니다. 그러나 결과는 그들이 하나님을 버린 것이었습니다. 그런 그들을 하나님은 행음하였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는 그들의 실패를 보았습니다. 그들의 멸망을 보았습니다. 그러나 그런 우리도 그 선택이 어렵기는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이냐 돈이냐? 오늘 이 시간 현명한 선택을 하시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728x90
반응형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