렘32장 6-15
소망을 사서 간직합시다.
안효관 목사 2020-09-13
전주남성교회 https://https://www.nsc.or.kr/
영국 빅토리아 시대 상징주의 화가인 조지 프레드릭 왓츠(George Frederick Watts, 1817-1904)가 1885년에 그린 ‘소망(Hope)’라는 제목의 그림이 있습니다.
<그림1>
둥근 모양의 지구 위에 한 여인이 외롭게 앉아 리라(lira)를 연주하고 있습니다. 그 여인의 눈에는 수건이 감겨져 있습니다. 앞을 보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리라의 줄은 모두 끊어지고 오직 하나 밖에 남지 않았습니다. 그녀가 입고 있는 옷은 살이 다 비칠 정도로 얇은 천입니다. 둥근 지구 위에 앉아 있는 여인은 조금만 지구가 흔들려도 어디론가 쓰러질 것만 같아 위태로워 보입니다. 그래서인지 왼발은 떨어지지 않기 위해 오른쪽 종아리를 감아올리고 있습니다. 발에는 신발조차 신지 않았습니다. 모든 것이 너무나도 가혹한 여건이기에 그녀를 둘러싸고 있는 것은 모두 절망뿐입니다. 어쩌면 ‘절망’이라는 단어가 더 어울릴 것 같은 이 그림을 왓츠는 ‘소망’이라고 불렀습니다. 그녀는 하나 밖에 남지 않는 현으로 음악을 연주하기 위해 안간힘을 쓰고 있고, 그 소리를 듣기 위해 온 신경을 곤두세워 귀를 기울이고 있습니다. 마치 그녀의 몸이 악기 속으로 들어갈 듯이 말입니다. 그리고 자세히 보아야 알 수 있는 것은 그녀의 등 뒤에 아주 희미한 별 하나가 그녀를 비추고 있습니다. 해나 달도 없는 하늘에 홀로 떠 있는 그 별은 빛마저 다 잃어가는 것 같지만 여전히 초라한 빛을 비추고 있습니다. 많은 것을 잃어버린 현실 속에서도 그녀는 아름다운 희망을 노래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 그림은 오랫동안 잊혀져 있다가 20세기 후반 등장한 세 명의 위인들에 의해 조명되면서 유명해졌습니다. 그 첫 번째 인물은 미국 흑인인권운동을 이끌었던 마틴 루터 킹(Martin Luther King, 1929-1968) 목사입니다. 1959년 자유의 행진에서 이 그림을 언급하면서 흑인들에게 희망을 역설했습니다. 두 번째 인물은 남아공의 넬슨 만델라(Nelson Rolihlahla Mandela, 1918-2013) 대통령입니다. 넬슨 만델라 대통령은 26년간 감옥생활을 하면서 이 그림을 감방 벽에 걸어놓고, 이 그림을 보면서 희망을 잃지 않았다고 합니다. 그리고 출소한 후에 남아공에서 최초로 흑인 대통령이 되었다고 해서 유명해졌습니다. 세 번째는 미국 최초의 흑인 대통령인 버락 오바마(Barack Hussein Obama, 1961-)입니다. 오바마 대통령은 정치 초년 시절 이 그림을 보고 미국 정치의 새로운 변화를 일으킬 영감을 얻었다고 합니다. 이 그림은 오바마 대통령의 영적 스승인 시카고 트리니티 유나이티드 교회(UCC) 담임목사인 제레미야 라이트가 1990년 버지니아 연설에서 미국사회의 ‘희망’을 역설하며 이 그림을 언급해 주목을 받았고, 오바마 대통령은 라이트 목사의 이 연설 내용을 메모해 두었다가 2004년 민주당 전당대회에서 이를 인용해 많은 사람들에게 회자되었습니다.
그렇습니다. 소망이라는 것은 우리의 삶에 남아 있는 것이 아무 것도 없어 보일 때 남아 있는 마지막 줄을 붙잡고 새로운 세상을 향해 꿈을 꾸며 나아가는 것입니다. 우리의 눈에는 아무 것도 없는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그 상황에서도 우리에게 남겨진 것들이 있습니다. 해와 달과 별들이 모두 사라진 캄캄한 밤처럼 보일지라도 희미한 불빛 하나는 우리를 향해 비추고 있습니다. 기쁨을 노래할 수 있는 줄이 다 끊어진 것처럼 보일지라도, 그래서 아무 노래도 연주할 수 없는 상황처럼 보이지만 마지막 남은 한 줄로도 희망을 노래할 수 있습니다. 내 삶에서 모든 것이 다 사라진 것처럼 보일지라도 마지막 내 몸을 휘감고 있는 얇은 천 조각은 남아 내 몸을 휘감아 주고 있습니다. 그런 상황을 비극으로만 바라보면 한없이 초라해지고 절망적일 수밖에 없지만, 마지막 남은 그 작은 것 하나를 붙잡을 때 우리는 여전히 소망 가운데 사랑을 노래할 수 있고, 기쁨을 기대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믿음으로 산다고 하는 것은 우리의 삶에 늘 풍성함이 가득해진다는 뜻이 아닙니다. 믿음으로 산다고 해서 늘 건강한 것도 아니고, 믿음으로 산다고 해서 내 삶에 아무런 부족함이 없이 산다는 것도 아닙니다. 믿음으로 산다는 것은 모든 것이 사라져도 우리의 아버지이신 하나님만은 늘 내 곁에 계심을 믿고 그 하나님을 의지하여 힘을 얻는다는 것입니다. 세상의 불빛이 다 사라져 내 주변이 온통 캄캄할지라도 나를 향해 잔잔한 빛을 비추시는 하나님이 계심을 믿는 것입니다. 내 주변의 것들이 모두 사라졌을지라도 ‘결코 너를 버리지 아니하리라.’고 약속하신 하나님께서 늘 내 곁에 계심을 믿는 것입니다. 그것이 믿음으로 사는 삶입니다. 그래서 우리에게 소망은 세상의 그 무엇이 아닙니다. 오직 우리의 아버지이신 하나님, 세상의 주인이신 하나님이 우리에게 있는 유일한 소망입니다.
오늘 본문의 말씀은 바로 그 소망을 갖게 하시는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오늘 본문 바로 앞인 예레미야 32:1절의 기록을 보면 오늘 본문의 말씀이 주어진 때를 알 수 있습니다. “유다의 시드기야 왕 열째 해 곧 느부갓네살 열여덟째 해에 여호와의 말씀이 예레미야에게 임하니라.” 그리고 2절은 그 때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어떤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를 말씀합니다. “그 때에 바벨론 군대는 예루살렘을 에워싸고.” 그리고 이어서 당시 예레미야가 어떤 상황에 있었는지도 알려줍니다. “선지자 예레미야는 유다의 왕의 궁중에 있는 시위대 뜰에 갇혔으니.” 그리고 이어 나오는 3-5절에서는 왜 예레미야가 감옥에 갇히게 되었는지를 설명하고 있습니다. 한 마디로 말하면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바벨론의 손에 넘기셨으니 아무리 바벨론과 맞서 싸우려 해도 소용없다. 그러니 바벨론에 항복하는 게 낫다.’ 예레미야가 그렇게 예언했기 때문입니다. 이미 하나님께서는 예레미야 선지자나 이사야 선지자를 통해서 이스라엘이 하나님께로 돌아와야 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을 버리고 애굽이나 바벨론 등 주변 나라의 힘을 빌어 살아남으려 하는 것은 어리석은 짓이라고 말입니다. 그런데도 남유다 백성들은 하나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지 않았습니다. 거짓된 우상에게 절하고, 하나님이 아닌 세상의 권력에 빌붙어 살아남으려 했습니다.
당시 국제 정세는 긴박하게 돌아가고 있었습니다. 전통적인 강호인 애굽은 자신의 세력을 넓히기 위해서 북쪽으로 영역을 확대하려 하고, 동쪽에서는 신흥 강대국인 바벨론이 그 세력을 넓히기 위해서 이스라엘 쪽으로 진격하고 있었습니다. 그런 긴박한 국제정세 속에서 남유다의 마지막 왕이었던 시드기야는 애굽이라는 강호에게 빌붙으면 거세게 몰아치는 바벨론으로부터 나라를 지킬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어떻게든 애굽에게 잘 보이려고 했고, 애굽과 손잡으려 했습니다.
그런 긴박한 상황에서 예레미야는 시드기야의 정책이 잘못되었다고 지적했습니다. 하나님께서 남유다 백성들이 하나님을 버린 결과 심판의 도구로 바벨론을 선택하셨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바벨론을 통해 남유다를 심판하신다면 아무리 애굽과 손잡는다고 해도 남유다의 멸망은 눈에 보듯 너무나도 자명한 일입니다. 그렇다면 남유다 백성들이 조금이나마 덜 고통받는 방법은 빨리 바벨론에게 항복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바벨론이 남유다를 긍휼히 여겨서 조금이나마 자비를 베풀 것입니다. 그것이 고통을 덜 받는 방법입니다.
그렇데 시드기야 왕은 바벨론에게 항복하라고 말하는 예레미야를 역적으로 몰아버렸습니다. 나라를 배신한 사람이라고 말입니다. 더군다나 하나님께서 예레미야를 통해 말씀하신 것처럼 바벨론이 남유다를 공격해 오자 시드기야 왕은 예레미야가 바벨론에게 투항할지 모른다는 생각에 예레미야를 잡아 감옥에 가둬버린 것입니다.
그렇게 해서 예레미야는 감옥에 갇히게 되었고, 바벨론 군대가 예루살렘을 포위하는 상황에까지 이르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그런 상황에서 예레미야에게 이해하기 힘든 주문을 하십니다. ‘친척 하나멜이 고향 아나돗에 있는 밭을 사라는 요청이 오면 그 밭을 사라’는 것입니다. 여러분, 한 번 생각해 보십시다. 지금은 전쟁 중입니다. 바벨론 군대가 예루살렘을 에워싸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전쟁에서 이스라엘이 이길 가능성은 전혀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대로 바벨론에 의해 남유다는 멸망당할 것입니다. 나라를 잃을 것입니다. 온 국토는 쑥대밭이 될 것입니다. 그런 판국에 땅을 산다는 것이 맞는 것입니까? 바벨론과의 전쟁에서 이긴다면 땅을 사는 것이 괜찮을 수 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분명 남유다가 바벨론에게 멸망할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나라를 잃으면 땅을 산들 그게 무슨 의미가 있겠습니까? 정신 나간 사람이 아니고서야 어찌 그런 상황에서 땅을 살 수 있겠습니까?
그런데 예레미야는 하나님께서 말씀하신대로 은 17세겔을 주고 그 밭을 삽니다. 은 한 세겔은 보통 노동자의 4일치 품삯입니다. 예레미야는 노동자 68일 치 임금에 해당되는 돈을 주고 그 밭을 산 것이 됩니다. 그렇다면 아마도 그 밭은 그리 큰 밭은 아니었을 것입니다.
그러면 왜 하나님께서는 예레미야에게 그 밭을 사라고 하셨을까요? 노동자 68일 치의 임금에 해당되는 돈을 주고 밭을 샀다고 하는 것은 어려울 때에 밭을 사서 나중에 땅 투기를 하기 위함이 분명 아닙니다. 당시 이스라엘은 땅이 모두 하나님의 소유라는 생각을 갖고 있었기 때문에 땅 투기한다는 것은 생각할 수 없는 일입니다. 그럼 하나님께서는 왜 예레미야에게 밭을 사라고 하신 것입니까? 그에 대한 대답은 하나입니다. 이제 곧 바벨론에 의해서 나라가 멸망당할 것입니다. 온 국토는 쑥대밭이 될 것입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전쟁통에 죽고, 살아남은 사람 가운데 많은 사람들이 포로로 끌려갈 것입니다. 그런 상황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절망에 빠질 것입니다. 나라를 잃었지요, 그들이 그토록 소중하게 여기던 성전도 파괴되지요, 수많은 사람이 죽고 살아남은 사람 대부분은 포로로 끌려가지요. 나라에 희망이 사라질 것입니다. 포로로 끌려간 사람들이나 겨우 목숨을 구해 이스라엘 땅에 살아남아 있는 사람이나 모두 깊은 절망에 빠지고 말 것입니다. 모든 것이 끝났다고 말입니다. 더 이상 희망이 없다고 말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그렇게 실망할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미리 소망을 주신 것입니다. 언젠가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때가 되면 이스라엘이 회복될 것이라고 말입니다. 포로로 끌려간 사람들은 예레미야가 예언한 것처럼 70년의 기한이 차면 고국으로 돌아올 것입니다. 그 때, 나라가 회복되고 포로가 돌아올 때 그들은 다시금 논밭을 일구며 살아야 합니다. 그 때에는 농사지을 땅이 필요합니다.
예레미야가 비록 큰 밭은 아닐지라도 밭을 샀다는 것은 오랜 후에 하나님께서 우리 민족을 회복시켜 주실 것이란 사실을 알려주기 위해서입니다. 그래서 매매계약서를 쓸 때 10-11절에서 말씀한 대로 두 개의 매매계약서를 써서 하나는 법과 규례대로 봉인해 보관하고, 다른 하나는 봉인하지 않았습니다. 봉인하지 않은 이유는 많은 사람들에게 밭을 매매한 사실을 알리기 위함입니다. 그런 전쟁통에 밭을 매매한 것을 통해서 먼 훗날 하나님께서 이 땅을 회복시켜 주실 것이란 사실을 사람들에게 분명하게 보여주기 위해서 말입니다.
어쩌면 사람들은 그런 예레미야를 향해서 어리석은 사람이라고 놀릴지 모릅니다. 정말 바보 같은 짓을 했다고 말할지 모릅니다. 지금이 어느 때인데 밭을 사느냐고 말입니다. 그런데 예레미야는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소망을 주고 싶었던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버리지 않으신다는 사실을 말입니다. 지금은 그들이 예레미야의 그런 행동을 이해할 수 없을 것입니다. 그런데 전쟁이 끝나고 포로로 잡혀간 사람들은 예레미야의 행동을 통해서 작은 소망을 갖게 될 것입니다. 그 땅에 남아 있는 사람들 역시 예레미야를 통해서 말씀하신 하나님의 말씀에 소망을 가질 것입니다.
예레미야는 유다 백성들에게 하나님께서 70년의 시간이 차면 우리 민족을 회복시켜주실 것이라고 선포했습니다. 그리고 그 선포는 단순히 말로 끝나지 않았습니다. 전쟁통에 밭을 사는 행동을 통해서 그 말씀이 확실하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러기에 예레미야가 밭을 샀다고 하는 것은 단순히 땅을 샀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예레미야는 이스라엘의 소망을 산 것입니다.
지금 우리는 너무 힘든 시대를 살고 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우울감에 사로잡혀 살기도 하고, 언제 끝날지 모르는 코로나로 인해서 불안해하며 살고 있습니다. 방역당국에서는 지금의 이 시국을 비상사태를 넘어 전시상태와 같다고 말하기도 합니다. 그만큼 큰 위기의 시대라는 것입니다.
위기의 시대인만큼 우리들의 기대도 한없이 추락합니다. 예를 들면 요즘 젊은이들에게 가장 큰 문제는 취업입니다. 그렇지 않아도 취업이 되지 않아 ‘취업한파’라는 말이 있었는데, 코로나로 인해서 취업의 문은 더 좁아지고 아르바이트 일자리조차 구하기 힘든 시대가 되었습니다. 그래서 요즘에는 ‘취업한파’라는 말 대신에 ‘취업빙하기’라는 말이 생겨났습니다. 직장에 취업하고 가정을 꾸린다 하더라고 내 집 마련은 더욱 요원해졌습니다. 지난 달 30일 KB부동산이 내놓은 보고서에 따르면 서울 중산층이 내 집을 마련하기 위해서 걸리는 기간이 14년이라고 합니다. 연간 약 5천만 원 정도 버는 중산층 가정에서 자신이 번 돈을 한 푼도 쓰지 않고 14년을 모아야 내 집을 마련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먹고 사는데 들어가는 돈, 자녀들을 양육하는데 들어가는 돈을 제하고 나면 평생 내 집 마련을 못하는 사람이 너무 많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요즘 부동산대책을 계속해서 발표하지만 서민들은 절망감에 사로잡혀 살아가고 있습니다. 코로나가 계속되면서 자영업자들의 폐업이 속출하고 있고, 잘 다니던 직장에서 언제 퇴출당할지 모른다는 불안감에 사로잡혀 살아야 하는 직장인들도 많습니다.
분명 우리가 사는 시대는 위기의 시대입니다. 불안의 시대이기도 합니다. 그러기에 사람들의 마음속에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절망감이 싹트기 시작합니다. 절망감에 사로잡혀 뭔가를 할 의욕이 생기지 않습니다. 의욕을 갖고 뭔가를 하려고 해도 해 볼 수 있는 일이 없다는 생각 때문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지금이 아무리 힘든 시기라 하더라도 우리 마음에 절망감이 자리 잡게 해서는 안 됩니다. 절망감이 우리 마음에 꽈리를 트는 순간 우리는 모든 것을 포기하고 맙니다. 진짜 절망은 우리 눈에 아무 것도 보이지 않는 것이 아니라, 우리 스스로 포기하고 아무 것도 하지 않는 것입니다. 처음 보았던 그림을 생각해 보십시다. 그 그림을 보고 사람들은 ‘절망’이라고 말했다고 합니다. 그 여인에게 남은 것은 거의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 그림을 그린 왓츠는 절망이 아니라 희망이라고 강변했습니다. 왜요? 그 여인은 아직 포기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마지막 남은 한 줄의 현으로 그녀는 노래를 불렀습니다. 자신의 온 몸을 기울여 그 노래를 들었습니다. 그래서 그녀에게는 그 상황이 절망이 아니라 희망입니다.
여러분, 희망은 그냥 찾아오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무언가를 간절하게 바랄 때 찾아옵니다. 그 간절하게 바라는 것이 바로 소망입니다. 그리고 그 소망은 내 안에서 자연스럽게 솟아나는 것이 아닙니다. 온 밤하늘이 캄캄할지라도 그 속에서 흐릿한 별빛 하나를 찾기 위해서 몸부림칠 때 우리 안에 소망이 생겨납니다. 인생의 모든 줄이 다 끊어졌을지라도 마지막 남은 한 줄만으로라도 노래하려 노력을 할 때 우리에게 소망은 현실로 다가옵니다.
그렇습니다. 그것이 바로 믿음입니다. 믿음은 불가능 가운데서 가능을 바라보며 전진하기 위해 몸부림치는 것입니다. 온통 내 주변이 공허함으로 가득 차 있을지라도, 거기에서 나에게 다가오시는 하나님을 기대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가지는 소망의 근거는 나 자신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있습니다. 우리를 한 순간도 잊지 않으시는 하나님이 우리의 소망이십니다.
『죽음의 수용소에서』라는 책을 쓴 빅터 플랭클(Viktor E. Frankl, 1905-1997)은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아우슈비츠 강제수용소에 3년간 수감되어 있었습니다. 그는 그 안에서 수감자들을 바라보면 이렇게 결론 내렸습니다. “마음으로 포기한 사람은 곧 쇠약해졌고 소망을 가진 사람들은 끝까지 살아남았습니다. 혼자만 소망을 가진 것이 아니라 절망 가운데 있는 사람을 도와주었습니다.”
그렇습니다. 소망을 잃어버린 사람은 삶의 의미를 잃어버렸기 때문에 금방 쇠약해집니다. 그러나 끝까지 소망을 가진 사람은 살아남았습니다. 세상의 소망도 이렇게 큰 힘을 가질진대, 우리는 믿음으로 사는 사람들입니다. 하나님을 나의 소망으로 삼고 사는 사람들입니다. 시편 146:5절에서 시인은 이렇게 노래합니다. “야곱의 하나님을 자기의 도움으로 삼으며 여호와 자기 하나님에게 자기의 소망을 두는 자는 복이 있도다.” 우리는 하나님의 백성입니다.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우리의 아버지이신 하나님께 우리의 소망을 두고 산다면 아무리 힘든 상황이라 하더라도 이겨내지 못할 일이 없습니다.
여러분, 소망은 거저 생겨나는 것이 아닙니다. 소망은 쟁취해야 합니다. 전쟁통에 돈을 주고 밭을 산 예레미야처럼, 우리는 소망을 사야 합니다. 소망을 사서 간직해야 합니다. 소망을 가진 자에게 내일이 있고 미래가 있습니다. 그리고 그 소망을 움켜쥐고 살 때 하나님이 주시는 행복을 나의 것으로 만들 수 있습니다. 힘들 때 힘든 상황만 바라보지 마십시다. 우리의 삶에 하나님께서 비춰주시는 조그마한 희망을 빛을 찾아보십시다. 아주 작은 빛일 수도 있습니다. 자세히 보지 않으면 보이지 않을 빛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하나님께서 살아 계신 한 그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늘 빛을 비춰주십니다. 그 빛을 바라보며 소망을 사서 마음에 간직하십시다. 그리고 조금만 더 힘을 내 살아보십시다. 언젠가 우리의 삶에 어둠은 걷히고 광명의 새날이 오게 될 것입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인입니다. 그리스도인은 소망을 가진 자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소망이 되시고, 예수 그리스도 우리의 희망이시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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