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신약 --------------------/로마서

롬 16장 12절(섬기려면 버시처럼) - 이준원

by Preacher 2023. 5. 1.
728x90
반응형

롬16장 12

섬기려면 버시처럼

이준원 목사 2013.11.20.

콜럼버스한인장로교회 https://www.kpccoh.org

 

[들어가는 말]

 

하나님께서 큰일을 이루실 때는 언제나 그 뒤에 하나님께서 쓰시는 사람이 있습니다. 성경은 하나님께서 당신의 사람들을 통해 행하신 위대한 일들의 기록입니다. 성경은 위대한 신앙의 인물들에 대해 기록한 것이 아니라, 불완전한 인간들을 사용하셔서 놀라운 일들을 이루신 위대하신 하나님을 보여줍니다.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 이스라엘을 애굽에서 구해낸 모세,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자 다윗, 능력의 사람 엘리야, 열두 사도들, 사도 바울 같은 사람들이 모두 그런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그 기록들을 보며 우리가 반드시 잊지 말아야 할 사실이 한 가지 있습니다. 그들이 그렇게 귀한 일에 쓰임 받게 되기까지, 하나님은 그들이 혼자 일하게 놓아두신 것이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언제나 굉장한 신앙의 인물들 뒤에는 이름 없이 빛도 없이 섬겼던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그들의 섬김을 통하여 큰일을 할 수 있었던 하나님의 사람들은, 자신들이 아무리 하나님으로부터 크게 쓰임을 받고 있다 하더라도 자기들 뒤에서 드러내지 않고 섬겼던 동역자들을 결코 잊지 않았습니다. 그들을 함께 하나님을 섬기는 사람으로 인정하며 귀하게 여겼습니다.

 

1.하나님이 사용하시는 교회와 개인의 특징

 

하나님께서 역사하시는 교회들을 보면 공통적인 특성들이 있습니다. 기도만 많이 한다고 해서 교회가 저절로 부흥되는 것도 아니고, 성경만 잘 가르친다고 교회가 성장하는 것도 아니고, 행정이 좋다고 해서 교회가 하나님의 영광을 잘 드러내는 것도 아닙니다. 교회에는 상, 중, 하, 세 개의 구조가 있는데, 그 구조들이 모두 건강하고 튼튼할 때 하나님의 손에 붙들려 힘차게 쓰임 받는 교회가 됩니다.

 

1)상부 구조: 영성(spirituality)

 

살아 있는 복음의 선포, 하나님과의 친밀한 교제, 성령의 은혜가 상부 구조에 속합니다. 이러한 성령의 역사로 인하여 죄인들이 회심하고 성도들은 은혜를 체험합니다.

 

2)중부 구조: 기능(function)

 

교회의 조직이 합리적이고 효율적이며, 여러 기능들에 질서가 잡혀 있으면서도 역동적일 때, 교회는 이 어그러지고 뒤틀린 세상을 향해 힘차게 나아갑니다. 사도행전 6장에 보면, 초대 교회 당시 사도들은 과부들을 구제하는 일을 직접 감당했습니다. 그 동기는 선했지만 좋은 결과를 내지는 못했습니다. 오히려 그 사건은 사도들의 영적 권위를 흔들었고, 히브리파 교우들과 헬라파 교우들이 서로를 원망하도록 만들었습니다.

 

그래서 안 되겠다는 반성이 일어났고, 그들은 자신들이 기도와 말씀을 제쳐놓고 구제하는 일에 나서는 것이 옳지 않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들은 다른 일꾼들을 세워서 하는 것이 좋겠다고 판단하여 일곱 명(집사)을 세웠습니다. 그 결과 초대 교회에는 다시 하나님의 말씀이 왕성해지는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3 형제들아 너희 가운데서 성령과 지혜가 충만하여 칭찬 받는 사람 일곱을 택하라 우리가 이 일을 그들에게 맡기고 4 우리는 오로지 기도하는 일과 말씀 사역에 힘쓰리라 하니 5 온 무리가 이 말을 기뻐하여 믿음과 성령이 충만한 사람 스데반과 또 빌립과 브로고로와 니가노르와 디몬과 바메나와 유대교에 입교했던 안디옥 사람 니골라를 택하여 6 사도들 앞에 세우니 사도들이 기도하고 그들에게 안수하니라 7 하나님의 말씀이 점점 왕성하여 예루살렘에 있는 제자의 수가 더 심히 많아지고 허다한 제사장의 무리도 이 도에 복종하니라” (행 6:5-7)

 

이걸 보십시오. 당시 예루살렘 교회가 얼마나 성숙한 교회였는지가 드러납니다. 헬라파가 불평을 하니까 히브리파가 이렇게 해줍니다. 보통 불평이 나오면 히브리파 자기들이 더 많으니까 일곱 명 중에 5대 2로 하자든지 4대 3으로 하자든지 아니면 봐줘서 3대 4로 하자고 하는 게 정상 아닙니까? 그런데 7명 모두를 헬라파로 해줍니다. 얼마나 굉장합니다. 그때 서로 싸우고 분열했으면 복음이 우리에게까지 못 옵니다. 그런데 이런 훌륭한 신앙의 선배들이 계셨기에 우리에게까지 복음이 전파되어 믿게 된 겁니다.

 

3)하부 구조: 물질(material)

 

참된 예배를 드리기 위해 사치스러운 예배당이 필요한 것은 아니지만, 방해받지 않고 말씀에 집중할 수 있는 환경을 갖출 때 성도들은 설교에 집중하고 성경공부에 집중하여 말씀을 잘 깨달을 수 있습니다. 잘 갖추어진 교육관 시설은 성인들뿐 아니라 자라나는 세대들을 보다 잘 교육시키는 데에 꼭 필요합니다.

 

교회가 잘 자라기 위해서는 이 세 가지 구조가 모두 필요합니다. 상부 구조가 모자라는 것을 중부 구조로 대신한다거나, 하부 구조가 없어도 상부 구조만 있으면 충분하다거나 하는 것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이 세 가지 구조가 모두 동시에 건강할 때, 교회는 힘차게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일들을 감당할 수 있습니다. 교회뿐 아니라, 각 그리스도인의 삶도 마찬가지입니다. 이 세 가지 모습을 모두 갖출 때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삶을 살 수 있게 됩니다. 이 점에 있어 아주 좋은 예가 요셉입니다. 요셉이 애굽의 총리가 된 것은 모두 하나님의 은혜였습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요셉은 아무런 준비가 안 되어 있는데 하나님이 어느 날 갑자기 강권적으로 그에게 은혜를 부으시고 높은 자리로 이끄신 것이 아닙니다.

 

교회의 세 가지 구조가 개인에게도 적용되는데, 요셉은 이 세 가지를 다 갖추었습니다.

 

첫째, 요셉은 영성이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바로의 꿈을 명쾌하게 해석해내는데, 늘 하나님과 동행하는 그였기에 가능했습니다. 둘째, 요셉은 기능과 실력에 있어서도 뛰어난 사람이었습니다. 그에게는 애굽과 같은 선진국을 이끌어 나갈 만한 경영 능력과 정치력이 있었습니다. 이것은 놀랍게도 요셉이 보디발의 집에 노예로 팔려가서 성실하게 일하여 가정 총무가 되었을 때 익히고 터득한 것이었습니다. 또 억울하게 감옥에 갇혔을 때에도 간수가 신뢰하는 사람이 되어 거기서도 많은 것들을 배우며 준비가 되었습니다. 셋째, 요셉은 육신적으로도 매력적이고 신뢰할 수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정직한 눈빛을 가진 건실한 청년이었던 것이 분명합니다.

 

애굽 왕 바로는 결코 바보가 아닙니다. 굉장한 안목을 가진 사람입니다. 당시 초강대국 애굽의 왕까지 된 것을 보면 그는 보통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그런데 그러한 그가 요셉의 영성과 기능과 매력을 인정하고 애굽 온 땅의 총리로 삼습니다. “요셉에게 이르되 하나님이 이 모든 것을 네게 보이셨으니 너와 같이 명철하고 지혜 있는 자가 없도다. 너는 내 집을 다스리라 내 백성이 다 네 명령에 복종하리니 내가 너보다 높은 것은 내 왕좌뿐이니라. 바로가 또 요셉에게 이르되 내가 너를 애굽 온 땅의 총리가 되게 하노라 하고” (창 41:39-41)

 

이처럼 모든 민족들이 기근으로 죽을 수밖에 없었던 때에 자신의 민족뿐 아니라 주변 민족들까지 다 건져낼 수 있는 인물이 될 수 있었던 것은, 물론 일차적으로는 하나님의 은혜이고, 또한 요셉이 쓰임 받을 준비를 갖추고 있었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자신에게 맡겨진 사명을 감당하는 데 있어서, 하나님의 은혜를 먼저 의지하고, 또한 스스로 하나님께서 쓰실 만한 사람이 되도록 준비하고 있어야 합니다.

 

그런데 이런 일은 준비를 잘 하고 자격을 갖추어 하나님으로부터 크게 쓰임을 받겠다는 야망을 품는 것으로는 결코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요셉을 보십시오. 그는 하나님 앞에서 매 순간 정직한 사람이 되고 싶어 했지, 자기가 무슨 민족의 구원자가 되려고 계획했던 것은 아닙니다. 그는 총리의 지위에 오를 꿈을 꾼 것이 아니라, 하루하루의 삶에 충실하게 살았을 뿐입니다. 그의 삶의 목표는 세상에서 어떤 자리에 오르고 뭐가 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었습니다.

 

하나님은 당신의 목적에 따라 우리를 유능하게도 하시고 높은 자리에 올리기도 하십니다. 그러므로 인생의 가치와 아름다움은 우리의 지위나 성공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의 인생의 참된 가치는 세상에 있다 없어질 그런 것들에 있는 것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께 있습니다.

 

세상의 성공이나 지위나 돈이 하나님 앞에서 얼마나 대단합니까?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때 세상의 성공이나 지위나 돈이 어떤 역할을 하겠습니까? 아무 역할도 하지 못합니다. 그런 것들은 하나님 앞에서 아무 가치도 없습니다. 인생의 가치는 세상이 우리를 어떻게 기억해주는가에 따라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우리를 어떻게 기억해 주시는가에 따라 결정된다는 사실을 기억해야겠습니다.

 

2.사람들에게 드러나지 않게 섬겼던 버시

 

1)주 안에서 많이 수고한 버시

 

그런 면에서 오늘 우리가 살펴보려고 하는 사람은 유명한 인물이 아닙니다. 많이 수고하며 사도 바울을 도왔지만 역사에 드러나지 않았던 인물인 버시입니다. 버시는 성경에서 로마서 16장에 단 한 번만 나오는 생소한 사람이고 어떤 일을 했는지도 알 수가 없는 미지의 인물입니다.

 

그런데 한 가지 확실한 것은 버시가 여자였다는 사실입니다. 영어 NIV 성경도 여자로 번역을 했습니다. 원래 ‘버시’라는 이름은 헬라어로 ‘페르시스(Persis)’인데, 이 말은 페르시아 사람을 의미하는 ‘페르시코스(Persikos)’의 여성형 명사입니다. 그렇다면 버시는 지금의 이란 출신 여성이었다는 말인데, 이렇게 민족을 가리키는 보통명사로 이름을 대신할 만큼 하찮은 신분이었던 것으로 생각됩니다. 이처럼 버시는 역사에 남을 특별한 존재가 아니었고, 지극히 낮은 여인이었습니다.

 

저는 지금까지 미국의 국립공원들을 여러 군데 가보았습니다. 특히 서부로 가면 높은 산들이 많은데, 아주 웅장하고 경관이 정말 멋집니다. 그럼 지금까지 가보았던 곳들 중 가장 좋은 곳은 어디일까요? 제가 깨달은 것이 있습니다. 어디가 가장 좋고 그 다음은 또 어디이고 하는 식의 순위 매김은 아무 의미가 없다는 사실입니다. 여기는 여기대로, 저기는 저기대로 다 아름답습니다. 또 전혀 유명하지 않은 동네 언덕이라도, 이곳에 사는 나에게는 멀리 있는 국립공원보다도 더 실제적인 선물이 됩니다.

 

우리 인생도 마찬가지입니다. 이 세상의 자원을 많이 소유한 인생이 있는가 하면 적게 소유한 인생도 있습니다. 세상에서 높게 드러난 인생이 있는가 하면,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 인생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러한 모든 것들은 하나님의 선하신 목적을 따라 각각 다르게 받은 것뿐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하나님의 기쁨을 위해 살아가는 인생은 그가 누리는 자원이나 명예나 성공에 상관없이 모두 귀하고 아름답습니다. 하나님이 알아주십니다. 사실 크고 작다거나, 중요하고 하찮다는 것은 인간의 구별일 뿐입니다. 우리에게는 작아 보이는 일이 하나님께는 큰일일 수 있고, 우리의 눈에는 하찮게 보이는 사람이 하나님께는 중요한 사람일 수 있습니다. 성경에는 버시의 이름이 단 한 번만 나오지만 버시는 하나님 앞에서 큰 사람이었습니다.

 

“주 안에서 수고한 드루배나와 드루보사에게 문안하라 주 안에서 많이 수고하고 사랑하는 버시에게 문안하라” (12절)

 

여기에 세 명의 여인들이 등장합니다. 드루배나, 드루보사, 버시. 로마서의 마지막을 장식한 바울의 동역자 명단에 이 여인들의 이름이 나오는 것을 보면, 그들은 바울에게 아주 소중한 동역자들이었을 것이 분명합니다. 그런데 바울이 드루배나와 드루보사를 부르는 말과 버시를 부르는 말이 약간 다릅니다. 드루배나와 드루보사에게는 “주 안에서 수고한”이라고만 되어 있습니다. 반면 버시에게는 “주 안에서 많이 수고하고 사랑하는”이라는 말이 붙어 있습니다. 즉, 앞의 두 여인에 비해서 “많이”라는 말과 “사랑하는”이라는 말이 추가되어 있습니다.

 

바울이 이렇게 표현한 것은 버시의 섬김 때문입니다. 버시는 주 안에서 많이 수고한 사람이었습니다. ‘주 안에서 수고했다’는 말은 예수 그리스도가 자신의 섬김의 동기가 되어, 다른 사람들이 뭐라고 하든지 상관없이, 다른 사람들은 어떻게 섬기든지 상관없이, 자신은 오직 예수님만 바라보며 섬기겠다고 뜻을 세워 섬겼다는 뜻입니다.

 

그러므로 ‘주 안에서 수고했다’는 것은 단순히 ‘수고했다’는 것과는 다릅니다. 그런데 버시는 거기에 더하여 주 안에서 ‘많이’ 수고한 일꾼이었습니다. 한 사람이 일하면 그것이 어떤 일이든지 그냥 일하는 것에 불과합니다. 그런데 주님을 사랑하는 사람이 일하면, 그것이 어떤 일이든지 하나님을 섬기는 것입니다.

 

종종 교회 안에 하나님의 일을 감당하다가 낙심하고 지치는 경우가 있습니다. 우리가 낙심하며 지치게 되는 가장 주된 이유는, 우리의 시선이 하나님이 아니라 사람을 향해, 즉 다른 사람 또는 자기 자신을 향해 있기 때문입니다. 특히 우리의 시선이 자기 자랑하기 좋아하는 다른 지체들에게 향해 있을 때, 아무리 섬겨도 도무지 변화되려 하지 않는 지체들을 향해 우리의 시선이 머물러 있을 때, 우리는 낙심하고 지치게 됩니다.

 

우리의 시선이 하나님을 떠나 다른 사람을 보게 될 때 마음에 이런 생각이 들게 됩니다. ‘나는 이렇게 열심히 봉사하면서 힘쓰는데, 누구는 취미생활 하듯이 교회생활을 하는구나.’ 그런 마음을 품으면, 힘들게 섬기는 가운데에도 누리던 영적 기쁨이 모두 사라집니다. 그렇게 섬기는 것은 주 안에서 하는 섬김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정말 다른 사람들을 향하던 시선을 주님께로 돌려야 합니다. QT와 기도를 하라는 이유가 바로 이겁니다. 귀찮은데 억지로 하는 것이 아니라, 섬김에 있어서는 시선을 주님께로 향하는 것이 필수적이기 때문입니다. 그럴 때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섬김을 할 수 있게 됩니다.

 

그러한 섬김이 예수님의 마음을 품은 섬김입니다. 우리가 교회 일을 한다고 해서 곧 하나님의 일을 하고 있는 것이 아닐 수 있습니다. 또 반대로, 회사나 사업체 일을 한다고 해서 하나님의 일을 하고 있지 않은 것도 아닙니다. 일 자체가 그 일의 의미를 결정하는 것이 아니라, 그 일을 하고 있는 사람의 마음과 믿음이 그 일의 의미를 결정합니다.

 

그러므로 중요한 것은, 우리가 어떤 일을 하고 있느냐가 아니라 어떤 마음으로 그 일을 하고 있느냐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마음을 품고 섬긴다면, 우리가 어떤 일을 하고 있든지 우리는 하나님을 위해 일하고 있는 사람이 됩니다. 하지만 예수님의 마음을 품지 않고 섬긴다면, 아무리 거룩한 일을 하고 있더라도 우리는 자신의 일을 도모하고 있는 사람이 되고 맙니다.

 

2)사랑하는 버시

 

사도 바울은 버시를 부를 때 또한 “사랑하는 버시”라고 묘사합니다. 이 구절의 원문을 보면, 이 말에 대한 정확한 번역은 ‘사랑을 받는 버시’입니다. 그렇다면 과연 누구로부터 사랑을 받는 것이겠습니까? 먼저는 하나님이시고, 또한 사도 바울과 로마 교회에 있는 성도들입니다.

 

하나님의 일을 열심히 감당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는 사람들 중에 독선적인 사람이 상당히 많습니다. 열심히 하는데 과격한 충성심으로 상처를 주기도 하고 입기도 합니다. 그런데 버시는 주님을 열심히 섬긴 사람이었지만 거칠어진 인격의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버시는 사랑받을 만한 성품의 사람이었습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버시를 친한 벗으로 여기고 좋은 동역자로 여겼습니다. 버시는 많은 일을 했지만, 그 일들 속에서 거칠어지지 않고 오히려 온유해졌습니다. 그래서 그녀는 하나님과 동료 사역자들과 성도들에게 특별한 사랑을 받았습니다.

 

세상을 살아가다 보면, 풍파 많은 세월을 보냈기 때문에 거칠고 강한 성품을 갖게 된 사람을 만나기도 하고, 똑같이 풍파 많은 세월을 보냈는데 깊이 다듬어진 인격을 갖게 된 사람을 만나기도 합니다. 신앙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많은 일을 하며 많은 역경을 겪었기에 완악해지고 고집스러워진 사람도 있고, 많은 일을 하며 많은 역경을 겪었기에 거룩해지고 부드러워진 사람도 있습니다. 그러면 과연 무엇이 이렇게 다른 결과를 만들어냅니까? 그것은 바로 하나님과 어떤 관계를 맺고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를 맺으면서 하나님을 섬기는 사람은, 섬기면 섬길수록 더욱 예수님의 성품을 닮아갑니다. 그래서 자신과 함께 섬기는 지체들을 세워줍니다. 그러나 하나님과의 올바른 관계가 없이 자신의 열심 또는 사람들의 평판 때문에 하나님을 섬기는 사람은, 섬기면 섬길수록 거칠어지고 완고해집니다. 그래서 이런 사람이 지나간 자리에는 항상 상처 입은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일은 성공적으로 해낼지 모르나, 그것은 하나님의 기쁨과는 거리가 먼 섬김이 됩니다.

 

3.버시처럼 섬기라

 

우리는 지금 너무나 많은 것들을 누리며 살고 있습니다. 완벽한 신앙의 자유 속에서, 신앙의 선배들이 자신의 삶 전체를 드려가며 깨달은 값진 교훈들을 너무나 쉽게 들으며 살아갑니다. 하나님은 왜 우리에게 이렇게 좋은 환경을 주셨을까요? 그저 운지 좋아서 마음대로 예배할 수 있고 전도할 수 있는 곳에 태어나 사는 게 아닙니다. 우리가 이 시대에 태어나 살고 있는 이유, 특히 이 미국까지 와서 살고 있는 이유는, 거기에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선한 계획이 있으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향한 깊은 뜻을 가지고 계시기 때문에 우리를 지금 여기 이 모습으로 두셨습니다. 믿으십니까? 그 뜻이 무엇입니까? 받은 은혜를 따라 이 어두운 세상에서 빛으로 살아가라는 것, 특히 힘이 다하도록 섬기며 살아가라는 것입니다.

 

이 세상 구석구석에는 우리가 섬기고 봉사할 곳들이 넘쳐납니다. 멀리 갈 것도 없이, 이곳만 보아도 너무 많습니다. 관심을 가지고 살펴보지 않아서 모르는 것이지, 우리가 예배드리고 있는 교회와 우리의 이웃들, 또 우리의 가정 안에도 우리의 섬김이 요구되는 곳이 있습니다. 그런데 지금 자신의 기도제목들을 돌아보십시오. 우리가 고통 받고 좌절하고 힘들어 하는 이유가 뭔지를 조금만 살펴보면, 하나님 앞에 내어놓기도 부끄러운 것들이 대부분입니다. 이기적인 제목들이 너무 많습니다. 이전 시대의 신앙의 선배들이 우리의 고민들을 듣는다면 혀를 차며 한탄할 것 같습니다. 풍요로운 신앙의 자유와 믿음의 유산을 누리며 사는 사람들이, 고작 그런 정도의 고민이 싸여서 하나님을 섬기기에도 부족한 시간을 낭비하고 있냐며 호통을 칠 것 같습니다.

 

여러분, 너무나 잘 갖추어지고 편안한 환경 속에서 살다 보니 우리가 부패해져 가는 것은 아닌지 돌아봐야겠습니다. 신앙생활의 햇수가 늘어가면서 더 열심히 섬기려는 사람들보다는, 그저 주일에 살짝 와서 예배드리고 흔적 없이 사라지고 싶어 하는 크리스천들이 많습니다. 이름 없이 빛도 없이 섬기려고 하는 사람은 점점 줄어들고 있습니다. 어느 시대이든지 세상과 교회가 가장 절실히 필요로 하는 사람은 섬김의 일꾼입니다. 특히 자기는 감추어지고 오직 주님만이 드러나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섬기는 일꾼입니다.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서는 바울처럼 이름이 널리 알려지고 능력이 많은 사역자도 필요하지만, 버시처럼 이름 없이 빛도 없이 섬기는 사람들이 많이 필요합니다.

 

이 세상에서 우리의 인생은 한 번뿐입니다. 이 한 번뿐인 인생에서 하나님은 우리에게 섬김의 사명을 주셨습니다. 이왕 섬김의 사명을 감당할 것이라면, 버시처럼 주 안에서 많이 수고하여 주님의 사랑받는 일꾼들이 될 수 있기를 축복합니다.

728x90
반응형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