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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 3장 7절(인간의 어리석은 질문⑤) - 안효관

by Preacher 2024. 7. 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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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3장 7

인간의 어리석은 질문⑤

안효관 목사 2021-03-07

전주남성교회 https://https://www.nsc.or.kr/

 

우리가 잘 아는 이솝 우화에 나오는 이야기입니다.

 

연못에 사는 개구리 한 마리가 있었습니다. 그에게 한 없이 부러운 것이 하나 있었습니다. 그것은 새들처럼 하늘을 훨훨 나는 것이었습니다. 자신은 늘 작은 연못에 답답하게 갇혀 사는데, 새들은 자유롭게 하늘을 나는 것이 너무나도 부러웠던 것입니다. 새들처럼 자유롭게 창공을 훨훨 날면서 마음껏 넓은 세상을 구경하는 것을 자신의 평생소원으로 여기며 살던 어느 날, 그에게 기발한 생각이 떠올랐습니다. 착하고 마음씨 좋은 새와 협상을 하여 나뭇가지 한 쪽 끝은 새가 물고 다른 한쪽 끝은 자신이 단단히 물고서 새가 날아오르면 개구리 자신도 새를 따라서 하늘로 솟구쳐 날아오를 수 있겠다는 생각이었습니다. 개구리는 자신의 생각대로 어느 마음씨 좋은 새를 만나 협상을 맺었고, 자신이 꿈꾸던 것처럼 새가 날아오르자 자신도 하늘을 훨훨 날면서 마음껏 세상구경을 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개구리가 하늘을 날자 연못 속에 있던 다른 개구리들이 그 모습을 너무너무 부러워하며 소리쳤습니다. “얘, 굉장하다! 하늘을 날다니. 누가 그렇게 멋있는 생각을 해냈니?” 그러자 ​하늘을 날던 개구리는 자신의 기가막힌 생각을 동료들에게 자랑하고 싶어서 견딜 수가 없었습니다. “그야 당연히 내가 했지, 내가...” 그렇게 말하는 순간, 개구리는 물고 있던 나뭇가지를 놓치게 되었고 여지없이 땅으로 추락하여 비참한 최후를 맞이하고 말았습니다.

 

물론 이 이야기는 우리가 살면서 결코 교만하거나 자기 자랑을 앞세워서는 안 된다는 것을 교훈해 주고 있습니다. 사람은 누구나 남들이 하지 못하는 뭔가를 할 때, 또 남들이 가지지 못한 뭔가를 가졌을 때 우쭐거리게 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그것을 자랑하고 싶어 안달을 합니다. 사실 개구리가 하늘을 날 수 있었던 것은 자신의 생각이긴 하지만 마음씨 착한 새가 도와주지 않았다면 결코 이룰 수 없는 꿈이었습니다. 개구리가 하늘을 날 수 있는 것은 전적으로 새의 은혜입니다. 마찬가지로 우리 인간도 내가 가지고 있고 누리고 있는 모든 것이 다 내 능력이 아닙니다. 누군가의 도움과 누군가의 은혜 때문에 가능합니다. 그래서 결코 ‘내가 했노라.’고 교만하거나 우쭐대서는 안 됩니다.

 

그런데 이 이야기에서 우리가 또 하나 생각해 볼 수 있는 것은 개구리가 하늘을 나는 멋진 꿈을 꾸었고 그 꿈을 이루었지만, 사실 개구리가 있어야 할 자리는 하늘이 아니라 연못이라는 사실입니다. 개구리가 가장 안전한 곳은 연못입니다. 연못에 있을 때 가장 큰 행복을 누릴 수 있습니다.

 

개구리만이 아닙니다. 모든 것이 자기 자리에 있을 때 가장 아름답고, 제 역할을 감당할 수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제 자리에 있을 때에야 생명을 부지할 수 있습니다. 물고기는 연못 속에서 헤엄을 칠 때 아름답습니다. 물을 떠난 물고기는 살지 못할 것이고, 죽고 썩어져 악취만 풍길 뿐입니다. 사자는 밀림에 있어야 생존할 수 있습니다. 그건 사람도 마찬가지입니다. 각자 자신에게 주어진 자리가 있습니다. 그 자리에 있을 때 아름답습니다. 아무리 멋진 여행도 다시금 자기자리로 돌아왔을 때 행복한 여행이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여행 중에 자기 자리로 되돌아오지 못한다면 그것은 객사한 것이 되고 맙니다. 성경에서는 자기 자리를 지키지 않았던 천사가 결국 악마가 되고 사탄이 되었고, 심판의 날에 영원한 형벌을 받게 될 것이라고 증언합니다.(유다서 1:6)

 

그렇습니다. 그 자리가 높은 자리든 낮은 자리든, 사람들로부터 관심을 받는 자리이든 무관심의 자리이든, 화려하고 빛나는 자리이든 빛이 나지 않는 자리이든, 자신이 있어야 할 자리에 있는 것이 가장 중요하고 아름답습니다. 그리고 그렇게 자기 자리를 지키고 있는 사람들 때문에 세상을 바르게 돌아갑니다. 그러기에 묵묵히 자신의 자리를 지키는 사람이야말로 세상을 지탱하는 버팀목과 같은 사람들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 각 사람에게 각자 자신이 서 있어야 할 자리를 주셨습니다. 어떤 사람에게는 그 자리가 더 화려해 보일 수도 있고, 어떤 사람은 덜 화려할 수도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그 자리가 더 부유한 것처럼 보일 수도 있고, 어떤 사람은 초라해 보일 수도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그 자리에서 사람들의 박수를 받을 수도 있고, 어떤 사람은 사람들의 관심으로부터 외면당할 수도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우리가 지금 내가 서 있어야 할 자리에 제대로 서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사람들의 관심이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사람들이 박수를 쳐주느냐 마느냐 하는 것이 중요하지 않습니다. 또한 내가 서고 싶은 자리가 어디인가도 그렇게 중요하지 않습니다. 내가 서야할 자리에 바르게 서 있느냐 하는 것이 훨씬 더 중요합니다.

 

논어에 ‘君君臣臣父父子子’라는 말이 나옵니다. 춘추전국시대 제나라 제26대 군주였던 제경공(齊景公)이 공자에게 정사에 대해서 묻자 이렇게 대답했다는 것입니다. ‘임금이 임금답게 임금 노릇을 하고, 신하가 신하답게 신하 노릇을 하며, 아비가 아비답게 아비 노릇을 하고, 자식이 자식답게 자식 노릇을 한다’면 어찌 나라가 태평하지 않겠느냐고 대답한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임금이 임금다우려면 임금의 자리에 바르게 서야 합니다. 신하가 신하다우려면 신하의 자리에 바르게 서야 합니다. 마찬가지로 아비가 아비다우려면 아비의 자리에 바로 서야 하고, 자식이 자식다우려면 자식의 자리에 서 있어야 합니다. 결국 내가 서야할 자리를 바로 알고 그 자리에 바르게 서 있을 때 나를 비롯한 내가 속한 공동체가 아름다워지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여러분, 신앙인이라고 하는 우리가 있어야 할 자리는 어디입니까? 우리가 어디에 서 있어야 바르게 서 있는 것이고, 우리가 어디에 서 있어야 나를 통해서 세상이 아름다워질까요? 고린도전서 16:13절에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깨어 믿음에 굳게 서서 남자답게 강건하라.” 우리 믿음의 사람들이 서야 할 자리는 믿음입니다. 믿음 위에 굳게 서야 믿음의 사람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너무나도 당연한 이야기입니다. 믿음의 사람이라고 하면서 믿음과 상관없이 산다면 그 사람은 이름만 믿음의 사람일 뿐 실제는 믿음의 사람이 아닙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백성이 서야 할 자리는 어디일까요? 그야 당연히 하나님의 품안입니다. 하나님의 백성은 하나님의 품 안에 머물러 있을 때 하나님의 보호를 받으며, 하나님의 은혜를 누리며 살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백성을 보호하시고, 당신의 백성에게 은혜를 베푸십니다. 그런 하나님의 호보와 은혜를 누리기 위해서는 반드시 하나님의 품 안에 머물러야 합니다. 거기가 하나님의 백성이 머물 자리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품 안에 머문다고 하는 것은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지켜 그 말씀을 따라 사는 것입니다. 요한복음 15:7절에서 말씀하십니다. “너희가 내 안에 거하고 내 말이 너희 안에 거하면 무엇이든지 원하는대로 구하라. 그리하면 이루리라.” 이어 10절에서도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내가 아버지 계명을 지켜 그의 사랑 안에 거하는 것 같이 너희도 내 계명을 지키면 내 사랑 안에 거하리라.” 그렇습니다. 우리가 하나님 안에 거한다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인 계명 안에 거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사랑 안에 거하시는 방법은 하나님 아버지의 계명을 지키는 것이라고 분명하게 말씀하십니다. 같은 이치로 우리가 예수님 품 안에 거한다는 것은 예수님의 말씀 안에 거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지켜 행할 때 우리는 예수님의 사랑의 품 안에 거하여 살고 있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는 하나님의 백성이라고 하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께 던진 여섯 번째 질문이 나옵니다. “우리가 어떻게 하여야 돌아가리이까?” 그 말씀 앞에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향한 하나님의 간절한 부르심이 있습니다. “그런즉 내게로 돌아오라. 그리하면 나도 너희에게로 돌아가리라.” 지금 하나님께서 보실 때 이스라엘은 하나님을 떠나 있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로 돌아오라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백성이 당신의 품을 떠나 있을 때 늘 간절한 마음으로 부르십니다. ‘돌아오라’고 말입니다. 이사야 55:1절과 3절에서 말씀하십니다. “오호라. 너희 모든 목마른 자들아 물로 나아오라. 돈 없는 자도 오라. 너희는 와서 사 먹되 돈 없이, 값없이 와서 포도주와 젖을 사라... 너희는 귀를 기울이고 내게로 나아와 들으라. 그리하면 너희 영혼이 살리라.” 예수님께서도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마태복음 11:28) 이사야서에서는 목마른 자들을 향해 ‘내게로 오라’고 부르십니다. 누가 목마른 자들입니까? 하나님을 떠난 사람들입니다. 하나님은 당신의 백성들에게 영원한 생수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백성이라고 하는 사람들이 영원한 생명수 샘물이 되시는 하나님을 떠나 목마름에 지쳐 살아가고 있습니다. 영혼이 목말라 죽어가고 있습니다. 그래서 그들을 향하여 ‘내게로 오라’고 말씀하십니다. 와서 돈 없어도, 값없이 베풀어주시는 생명수 샘물을 사서 마시라고 말입니다. 예수님께서도 무거운 짐을 지고 고달픈 인생을 살아가는 사람들을 부르십니다. 예수님의 부르시는 그 음성을 듣고 예수님께로 돌아오는 사람에게는 쉼을 주신다고 약속하십니다. 참된 안식, 세상에서 얻을 수 없는 참된 평안을 누리게 하시겠다고 말입니다.

 

이 말씀들을 거꾸로 읽으면 하나님을 떠난 사람은 영원한 목마름 속에 살아갈 수밖에 없음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로 돌아오지 않는 사람은 평생 인생의 무거운 짐을 지고 지치고 피곤한 인생을 살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백성들이 그런 고달픈 인생을 사는 것을 원치 않으십니다. 어떻게 하든지 하나님께로 돌아와 하나님과 함께 복된 삶을 살기를 원하십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당신의 백성들을 향하여 내게로 돌아오라고 간절하게 호소하고 계십니다. 하나님께 돌아가야 우리의 어깨에 지워진 무거운 짐을 벗을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 돌아가야 우리는 영원한 생명을 얻을 수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백성들에게 내게로 돌아오라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그것을 잘 알고 있던 호세아 선지자도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하나님께로 돌아가자고 외쳤던 것입니다. “오라. 우리가 여호와께로 돌아가자. 여호와께서 우리를 찢으셨으나 도로 낫게 하실 것이요 우리를 치셨으나 싸매어주실 것임이라.”(호세아 6:1) 하나님께로 돌아가야 우리의 상처가 치료받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로 돌아가면 하나님께서 우리를 감싸주시고, 아픔을 싸매어주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하나님께서도 돌아오라고 간절하게 호소하시고, 또 선지자들도 하나님께로 돌아가야 한다고 외침에도 불구하고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께 돌아가지 않았습니다. 아니 하나님께 돌아가야 한다는 것이 무슨 말인지도 알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이렇게 반문합니다. “우리가 어떻게 하여야 돌아가리이까?” 이 물음은 자신들의 문제가 무엇인지 모르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어리석은 질문입니다. 여러분, 이스라엘 백성들이 어떻게 해야 하나님께 돌아갈 수 있습니까? 하나님께 돌아가는 방법은 무엇입니까? 참으로 안타까운 것은 하나님께서 그렇게 돌아와야 한다고 외치고 계심에도 그들은 하나님께로 돌아가지 못한 이유가 마치 하나님께 돌아가는 방법을 알지 못하기 때문에 돌아가지 못하고 있는 것처럼 생각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어떻게 하여야 돌아가리이까?”라는 이 질문 속에는 두 가지 의미가 담겨 있습니다. 첫째는 ‘우리가 하나님께 돌아가고 싶어도 돌아갈 방법을 알지 못하는데 어떻게 하나님께 돌아갈 수 있겠습니까?’라는 뜻입니다. 하나님께로 돌아가고 싶은 데 돌아갈 방법을 알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답답한 마음에 ‘우리가 어떻게 해야 돌아갈 수 있습니까?’라고 묻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사실 오늘 본문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던진 질문의 의미는 그것과 조금 다릅니다. “우리가 어떻게 하여야 돌아가리이까?”라는 질문이 갖는 두 번째 의미는 ‘우리는 하나님을 떠난 적이 없는데, 왜 우리더러 돌아와야 한다고 말씀하시는 것입니까?’라는 뜻입니다. 어쩌면 이 두 번째 의미가 그들의 지금 상태와 더 적합할 것입니다. 앞선 다섯 번에 걸친 질문들도 다 그런 것이었습니다. ①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신다는 증거가 무엇입니까?’ ② ‘우리가 어떻게 주의 이름을 멸시했다고 그러십니까?’ ③ ‘우리가 뭘로 주님을 더럽게 했다는 것입니까?’ ④ ‘우리가 드린 예물을 받지 않으시겠다고 하시는데 도대체 뭣 때문입니까?’ ⑤ ‘우리가 어떻게 하나님을 괴롭게 했다는 것입니까?’ 이런 질문들은 모두 하나님께 도발적인 질문입니다. 뻔뻔하고 가증한 질문입니다. 그래서 그런 질문들이 모두 어리석은 질문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자신의 모습은 보지 못하고, 모든 것이 하나님 탓이라고 하나님께 책임을 돌리고 있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도 그런 맥락에서 이해한다면 분명 그들은 이렇게 반문한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떠난 적이 없고 신앙생활 잘 하고 있는데, 왜 돌아오라고 하시는 것입니까?’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돌아오라고 말씀하신 이유가 있습니다. 오늘 본문 맨 앞에 이렇게 말씀합니다.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너희 조상들의 날로부터 너희가 나의 규례를 떠나 지키지 아니하였도다. 그런즉 내게로 돌아오라.” ‘조상들의 날로부터’라는 말은 ‘아주 오랜 옛적부터’라는 뜻입니다. 아주 오랜 옛적부터 그들은 하나님을 반역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거역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런 거역하는 것이 일상화되어서 하나님을 떠나 있어도 떠나 있는 것인지조차도 알지 못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어기면서도 자신들이 무엇을 잘못했는지도 알지 못합니다.

 

지금 그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떠나 있었습니다. 그런데도 그들은 하나님을 떠나 있다는 것을 알지 못했습니다. 자신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잘 지키고 있고, 하나님을 사랑하고 있다는 착각 속에 살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아주 위험한 일입니다. 자신에게는 아무런 문제가 없다고 생각합니다. 나름대로 말씀을 잘 지키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보시기에 그들은 말씀을 떠나 있습니다. 말씀을 따라 살지 않고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하나님께로 돌아가는 방법은 하나님의 말씀으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내 생각과 내 뜻을 내려놓고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살아야 합니다. 하나님을 떠난 교회가 하나님께로 돌아가는 방법도 하나님의 말씀으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남 왕국 16대 왕인 요시야가 그랬습니다. 그는 왕이 된 지 8년 째 되던 해에 성전을 정결케 하던 중에 율법책을 발견했습니다. 그리고 그 율법책에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는 자신과 자신의 나라가 얼마나 잘못되었는지를 깨닫게 됩니다. 그래서 그 말씀을 온 백성들에게도 들려줍니다. 그리고 하나님과 다시금 언약을 맺으며 하나님의 백성으로 거듭납니다. 종교개혁자들도 그랬습니다. 로마 천주교의 타락이 극심할 때 종교개혁자들은 말씀으로 돌아가자고 외치며 개혁운동을 시작했습니다.

 

그렇습니다. 말씀으로 돌아가는 것이 바른 신앙을 회복하는 첫걸음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지켜 그 말씀을 따라 살 때 우리는 바른 믿음의 길을 걸어갈 수 있습니다. 앞서 말씀드린 것처럼,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는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게 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은 곧 하나님의 말씀 안에 거하는 것입니다. 거꾸로 이야기하면 하나님의 말씀을 떠나 사는 것은 곧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는 사람은 말씀을 따르려 하지 않습니다.

 

말씀을 따라 사는 사람은 말씀이 주는 능력을 맛보게 됩니다. 말씀 속에서 위로를 받고, 말씀 속에서 용기를 얻고, 말씀 속에서 새 힘을 얻습니다. 말씀을 통해서 자신을 바르게 보게 되고, 말씀을 통해서 내가 지금 가고 있는 길이 바른 길인지 점검하게 됩니다. 말씀을 통해서 하나님의 지극히 크신 사랑을 알게 되고, 말씀 속에서 그 사랑을 깊이 경험하게 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서 세상을 살아가는 지혜를 얻고, 말씀을 통해서 영원한 세계를 바라보게 됩니다.

 

여러분, 지금 우리의 신앙은 바른 자리에 서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우리가 바른 신앙 위에 서 있다는 것을 어떻게 알 수 있습니까? 우리가 지금 바른 신앙 위에 서 있는가 하는 것은 내 생각으로 점검하는 것이 아닙니다. 내가 지금 하나님의 말씀에 얼마나 순종하며 살고 있느냐 하는 것이 바른 신앙으로 살고 있는가 하는 것의 척도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살 때 우리의 신앙은 바른 신앙으로 회복되고,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살 때 우리는 죄의 길이 아닌 믿음의 길을 갈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말씀에 순종할 때 우리의 삶에 하나님께서 주시는 복으로 가득 채워집니다. 출애굽하던 이스라엘 백성들이 홍해 앞에서 두려워 떨 때 모세는 하나님으로부터 ‘지팡이를 들고 손을 바다 위로 내밀어 그것을 갈라지게 하라.’말씀을 듣고 그 말씀에 순종할 때 홍해가 갈라지는 기적을 경험했습니다.(출애굽기 14장) 광야에서 불뱀에 물려 죽어가던 사람들이 ‘장대 위에 높이 단 놋뱀을 바라보면 살리라.’는 말씀을 듣고, 그 말씀대로 놋뱀을 쳐다본 사람은 모두 고침을 받고 살아났습니다.(민수기 21장) 밤새도록 수고했음에도 고기를 한 마리도 잡지 못했던 베드로는 ‘깊은 데로 가서 그물을 내리라.’는 주님의 말씀에 순종할 때 배가 가라앉을 정도로 많은 물고기를 잡게 되었습니다.(누가복음 5장) 성경의 이야기들은 모두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한 사람들은 복을 받고, 하나님의 말씀을 거역한 사람들은 파멸에 이른다는 사실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여러분, 삶에 답답한 문제가 있습니까? 내가 지금 하나님의 말씀을 떠나 있지는 않는지 살펴보고, 오늘 나에게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음성을 귀 기울여 듣고 그 말씀에 순종해 보십시오. 그러면 내 문제가 풀려지는 기적이 일어날 것입니다. 내 힘으로 극복하기 힘든 문제 앞에서 두려워하고 있습니까? 하나님의 말씀을 붙잡고 그 말씀이 내 생각과 다르더라도 그 말씀에 순종하는 용기를 가지고 말씀을 따라 살아 보십시오. 분명 내 앞길을 가로막고 있는 장애물을 이겨낼 힘이 생겨날 것입니다. 실패하셨습니까? 고민이 많으십니까? 인생의 무거운 짐 때문에 지쳐 있습니까? 삶이 너무너무 고달프십니까? 무엇이 문제이십니까? 나를 힘들게 하는 세상이 아닙니다. 내가 신앙의 자리에 바로 서 있지 않기 때문에 내 삶이 고달픈 것입니다. 내가 바른 신앙의 자리에 서 있기만 하다면, 그래서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는 음성을 귀 기울여 듣고 그 말씀에 순종하기만 한다면 나를 두렵게 하고 힘들게 하는 모든 문제들을 이겨나갈 힘이 생겨납니다.

 

“우리가 어떻게 하여야 돌아가리이까?” 대답은 간단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붙잡는 것입니다. 말씀 안에 거하는 것입니다. 말씀에 순종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의 신앙은 회복될 것이고, 그 신앙으로 세상을 넉넉히 이기며 살게 될 것입니다. 우리가 서 있어야 할 가장 아름다운 자리는 믿음의 자리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붙잡고 사는 그 믿음의 자리 말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오늘도 우리에게 ‘내게로 돌아오라.’고 말씀하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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