몬1장 1-26
사소한 은혜
안영혁 목사 2010
예본교회 [서울, 신림2동] http://www.yebonchurch.com/
그 깃털은 아마도 우리의 사소한 일상이겠죠. 1부 '울고 싶을 때 그를 생각하면 힘이 난다'에서 친구 이야기. 2부 '마음에도 근육이 있다'에서는 개인의 일상. 3부 '사소한 이야기를 할 수 있는 자유를 허하라'에서는 가족 사이의 사소한 일상이 실려 있답니다. 그 정도면 우리 일상에 대한 사소한 이야기로 괜찮은 것 같습니다. 그런데 신학자 칼 라너의 일상이라는 소책자가 있습니다. 자고 일어나고 앉고 길을 행하는 것까지 일상에 하나님의 은혜가 스며드는 것을 말씀합니다. 공지영의 책은 복음이 아니기 때문에 무용지물이라고 말하지 않겠습니다. 그렇게 맛깔스런 이야기에 은혜가 스며들면 우리는 삶의 용기를 얻습니다. 그 정도의 이야기는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오늘 본문 빌레몬서는 그 모양 자체가 사소합니다, 단 한 장. 저도 빌레몬서 설교는 처음입니다. 그 내용도 대단한 인물이 아니라 도망 노예에 대한 변명입니다. 그러나 그 이야기에 복음이 결부됩니다. 아름다운 이야기입니다. 여러분의 사소한 일상도 하나님 앞에서 의미를 얻기 바랍니다.
1. 갇힌 중에서 낳은 아들 오네시모
여러분 오늘 본문의 압권은 10절입니다. “갇힌 중에서 낳은 아들 오네시모를 위하여 네게 간구하노라.” 빌레몬은 골로새에 사는 사람이고, 바울은 그곳에서 200km 떨어진 해안도시 에베소의 감옥에 수감되어 있었습니다. 지금의 터키 지역입니다. 하여간 바울은 감옥에 갇혀 있으면서 빌레몬에게서 달아난 노예 오네시모를 훈육했습니다. 16절 말씀입니다. “이 후로는 종과 같이 대하지 아니하고 종 이상을 곧 사랑받는 형제로 둘 자라, 네게 특별히 그러하거든 하물며 육신과 주 안에서 상관된 내게랴.” 바울은 이미 오네시모와 깊은 관계가 되어 있었습니다. 그리고 오네시모는 빌레몬에게 있을 때보다 훨씬 쓸모 있는 사람이 된 것 같습니다. 11절입니다, “그가 전에는 네게 무익하였으나, 이제는 나와 네게 유익하므로.” 그렇게 말했습니다. 바울은 그를 갇힌 중에서 낳은 아들 오네시모라 불렀습니다. 정이 넘치는 말입니다. “갇힌 중에 낳은 아들 오네시모” 거기에는 정이 넘치는데, 한 가지 주의해 둘 사실이 있습니다. 그렇게 정이 넘치는 것도 그들 사이에 복음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2. 사소한 것 존중하기
오늘은 바로 이 사소한 사람들의 이야기로 말씀을 하려고 합니다. 빌레몬서는 짧은 편지입니다. 세 사람의 등장 인물이 있습니다. 발신자 바울, 수신자 빌레몬이 있습니다. 바울은 빌레몬에게 도망 노예 오네시모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바울은 인류 역사에서 손에 꼽히는 신학자요 사상가요 선교자입니다. 거기 비하면 빌레몬은 부유한 사람이었다 하더라도 사소한 사람입니다. 오네시모는 그의 노예였으니까 더욱 별볼 일 없는 사람입니다. 그런데 이 편지를 볼 때, 바울은 오네시모를 자신의 동역자로 여기고 있습니다. 그리고 14절을 보면 빌레몬을 아주 존중합니다. 오네시모를 돌려 보내는데, 나는 그가 필요하지만, 당신의 승낙을 받겠다고 말합니다. 이미 읽은 10절에서도 “네게 간구한다”고 말합니다. 당연한 일이지만 그는 빌레몬을 존중했습니다. 그리고는 결국은 역사적 인물인 바울, 부유한 사람 빌레몬, 그의 노예 오네시모, 세 사람 사이에는 아주 의미 있는 인간적 드라마가 펼쳐질 것입니다. 결국 바울은 빌레몬에게서 승락을 받았고, 오네시모는 훌륭한 사역자가 되었습니다. 빌레몬과 오네시모는 주종간이 아니라 동등한 사이가 되었습니다. 사람은 무엇으로 살까요? 내가 어떤 사람이든 이렇게 서로를 존중하는 힘으로 삽니다. 제가 어릴 때 예화집에서 “목사 죽이는 법”이란 이야기를 읽은 적이 있습니다. 목사의 입에서 한 마디 말이 떨어질 때마다 ‘아멘’하고, 예배가 마치면 은혜 받았다고 최고의 예의를 차려서 말하고, 기도회를 하면 정성을 다해서 기도하고, 자기를 위해서 기도를 해줄 때에는 눈물로 감사를 표하고 제발 심방 한 번 오시라고 간절히 부탁하고, 그렇게 하면, 이런 성도들의 기대에 부응하기 위해서 목사가 애를 쓰다가 너무 지쳐서 죽어버린다는 것입니다. 목사가 정말 밉다면 그렇게 해서 목사를 죽여라. 교회의 상태를 역설적으로 표현한 말입니다. 성도들에게 존중을 받지 못한 목사의 해학적인 어투입니다. 우리 예본교회는 꼭 목사만 아니라, 서로가 서로를 존중해야 합니다.
3. 사소한 것 속의 복음
그리고 여기에 또 한 가지 더 중요한 사실이 있습니다. 바울은 이들 사이의 모든 개인적인 관계를 존중하지만,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다는 것을 인식하고 있습니다. 우리의 모든 사정이 어떻든 복음이 전파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바울은 모든 면에서 빌레몬에게 부탁을 하고 있지만, 입장은 분명합니다. 오네시모에게 자유를 주어서, 바울과 동역하고, 그래서 그가 복음에 봉사하도록 하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아주 사소한 사람들 그 누구라도 존중해야 합니다. 그러나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복음이 전파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알고 보면, 복음은 사소한 관계의 어려움들을 완전히 깨뜨릴 영원한 사업입니다. 저희 어머니께서 칠순에 세례를 받으셨지만, 믿음 얻으신 후에 저는 어머니와 더 진지하게 나눌 말씀이 생겼습니다. 빌레몬서는 그런 점에서 기독교인들의 삶에 아주 중요한 통찰을 줍니다. 요약하자면 이런 말이 됩니다. “삶의 모든 사소한 일들을 다 존중하라. 그러나 할 수만 있다면 그 모든 일들이 복음 전파와 관련되도록 하라.” 지난 주간 학교에 가 있다가 몇 사람의 식사 모임에 곁다리로 끼게 되었습니다. 나이가 든 학생들이 선생에게 식사 대접을 하는 자리였습니다. 현재 가진 직업이 남부럽지 않은 것이어서, 삶에 어려움도 없고 돈도 웬만큼 있습니다. 그런데 그 학생들이 모두 선교에 마음을 두고 있었습니다. 나이가 한 오십 넘었고, 세상살이는 웬만큼 이루었는데, 가만히 생각해 볼 때 할 일은 선교뿐이라는 것입니다. 늘 사는 것이 힘든 사람들이 볼 때는, 선교가 무슨 취미생활인가 그렇게 느껴질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들에게는 그것이 매우 진지한 일이었습니다. 그들은 사소한 사람들인데, 그 사소한 사람들에게 생의 마지막 자리 일로서, 선교는 단연 중요한 일이었습니다. 사소함 속에 복음이 스며드는 것, 그것이 이 땅에 그리스도인으로 사는 방법입니다. 단기 선교를 자신의 선교 방법으로 삼는 분의 이야기를 하나 하고 싶습니다. 그는 CCC 사역자인데, 해마다 한 달 정도씩 선교를 하기 위해서 중국이나 동남아 이곳 저곳으로 간다고 합니다. 바로 지난 여름에 중국에 가서 주로 조선족에게 전도를 했다고 합니다. 기차를 타고 이동을 하는데, 중국인 가운데 우리말 소리가 들려서, 그 말 하는 사람을 살펴보았더니 조선족 사람이었습니다. 이미 70이 넘은 할머니였는데, 이 목사님을 너무나 반가워 하면서, 경북 청송 송정리가 아버지의 고향이라 했습니다. 이 목사님은 전도도 하고, 이 분의 옛 고향 사람을 찾아주겠다고 해서, 한국에 되돌아와서 전화로 전화로 물어서 그 사람의 고향 피붙이를 찾아주고, 그래서 반가워 아주 법석이었다고 합니다. 선교라는 것이 이런 면도 있구나 싶었습니다. 사람들은 모두 그렇게 사소하게 살고 있는데, 선교가 그런 사소함 가운데 힘을 불어넣는 일이 되었습니다.
4. 인간 부조리 넘어서기
여러분, 사람에게는 궁극적인 해결이 없습니다. 그래서 그리스도께서 우리 죄를 위해 대속의 죽음을 죽었습니다.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누가 나를 이 사망의 몸에서 건져 내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아버지 하나님께 감사하리로다.” 기독교 철학자 키엘케골은 사람이 생명을 원하는데 절망이 다가오는 것이 부조리이고, 그 절망을 인간 자신이 해결하지 못하고, 하나님께 그리스도께 의지하는 것이 또 한 번의 부조리라고 했습니다. 그러니까 사람에게 죽음이 있는 것이 부조리라면, 그것을 이기고 생명을 얻게 하는 하나님의 은혜도 또한 부조리라는 것입니다. 그냥은 말이 안 된다는 것이죠. 그런데 우리는 바로 그 말이 안 되는 그 말 안에서 영원한 생명, 새로운 삶을 얻을 수 있습니다. 우리는 우리 삶이 아무리 사소할지라도, 우리의 삶 안에 그 영원함을 품고 있습니다. 우리의 삶 안에 그 영원함이 있기 때문에, 사소함이 그냥 사소함으로 끝나지 않고, 빛이 나는 것입니다. 그래서 여러분께 권고입니다. 여러분의 사소한 삶에 복음의 빛을 담으십시오.
4. 무익한 자 오네시모의 변화
사소하다는 의미에서 또 하나 들여다 볼 만한 일이 있습니다. 이 오네시모라는 사람입니다. 본문 11절을 보면 바울은 빌레몬에게 “그가 전에는 네게 무익하였으나, 이제는 나와 네게 유익하므로” 하는 말을 합니다. 그런데 이 사람 오네시모라는 이름의 뜻이 기가 막힙니다. 그 이름의 뜻이 “무익한 자”였습니다. 우리에게도 이런 이름은 많이 있었습니다. 끝순이, 끝년이, 종말이, 말순이, 개똥이, 말똥이, 어떻게 보면 집에 강아지 한 마리 이름처럼 그런 이름이 많습니다. 오네시모라는 이름은 그보다 더 천한 이름일지도 모릅니다. 무익한 사람, 도움이 안 되는 사람. 한참 노예가 있는 시대에는 그 관습을 당연히 여겼겠지만, 그래도 본인에게는 너무나 고통스러웠을 것입니다. 오죽했으면 오네시모가 빌레몬에게서 도망을 했겠습니까? 같은 기독교인이 되고 난 뒤에도 그랬다는 말이죠. 그는 이름조차 무익한 사람으로 아무에게도 주목 받지 못했습니다. 그 정도로 사소했던 오네시모가 달아나기를 참 잘 달아났습니다. 그는 그의 주인이 잘 아는 사람 바울에게로 달아났습니다. 그리고는 바울에게 꼭 필요한 사람이 되었습니다. 빌레몬은 단지 빌레몬서에 등장할 뿐이지만, 오네시모는 골로새서 4:9에 또 한 번 등장합니다. 골로새서에는 오네시모를 복음 사역을 하는 한 사람의 사역자로 묘사하고 있습니다. 천한 사람, 사소한 사람이 복음을 위해 일한 대표적인 경우입니다. 우리도 모두 그렇게 되기를 원합니다. 바울은 고린도후서에서 그리스도인이 무명한 자 같으나 유명한 사람이라고 했습니다. 오네시모가 꼭 그런 사람이었습니다. 사소한 은혜가 사소함으로 그치지 않고 그의 인생에 큰 빛으로 변하였습니다. 우리가 예수 믿고 변화된다고 하는데, 오네시모야말로 정말 그런 사람이었습니다. 그것은 복음의 능력입니다. 여러분 복음을 믿으십시오. 그리고 복음을 위해 일할 기회를 얻으십시오. 제가 번역한 책이 지난 월요일에 출판되었습니다. 제 이름으로 나온 다섯 번째 책인데, 이것도 사소한 것치고는 좀 의미가 있는 것 같습니다. 간혹 말씀드리지만, “작은교회가 더 교회답다”라는 책은 좀 의미가 있습니다. 제 그 책으로부터 한국교회에 작은교회라는 말이 사용되게 되었습니다. 그건 아마 제가 하나님께 상 받을 일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사소함이 의미 있게 되는 것이 바로 복음 때문입니다.
5. 서로에게 모델이 되기
제가 이 설교를 준비하고 있는데, 자꾸 후배 목사 한 사람의 얼굴이 저에게 떠올랐습니다. 왜 이렇게 자꾸 이 사람 얼굴이 떠 오르지, 그랬는데, 후배이기는 하지만 저는 그 목사님이 굉장히 본받을 사람이라고 은연 중에 생각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후배이지만 저에게 좋은 목사의 모델로서 자리를 잡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저는 후배의 얼굴이 떠 오르는 이 사실을 설교에서 놓치지 않기로 했습니다. 여러분, 우리는 모두 그리 유명하지 않은 사람들입니다. 그렇게 사소한 사람들이지만, 서로에게서 삶의 모델이 되고, 또 모델로 발견되기를 바랍니다. 부부가 서로에게 모델이 된다면 너무 재미가 없고 너무 거룩한 부부가 되는 것일까요? 그런 모든 것을 넘어서 남편이 아내를 닮고 싶고, 아내가 남편을 닮고 싶으면 좋겠습니다. 집사가 장로를 닮고 싶기도 하지만, 또 장로가 집사를 닮을 수도 있는 것입니다. 아주 훌륭한 위인만 닮는 것이 아니라, 내 곁에서 아주 사소한 일로 사소하게 충성하는 일에서 우리는 삶의 모델을 얻을 수 있습니다. 지난 주 목요일 수업을 하고 있는데, 학생 한 사람이 사랑의 교회 옥한흠 목사님이 소천 하셨다는 소식을 전했습니다. 저도 젊을 때 사랑의 교회에 잠깐 출석한 적이 있고, 제 아내는 사랑의 교회에서 그 목사님의 설교를 들으면서 신앙 생활을 했습니다. 그런데 옥한흠 목사님은 몇 가지 점에서 모델이 될 만한 분입니다. 그 분은 선교 단체들만 하던 제자훈련을 교회로 가지고 들어왔습니다. 이것은 한국 기독교 역사에 남을 만한 일입니다. ‘평신도를 깨운다’라는 책은 여러 나라에 번역이 되었습니다. 또 한 가지 모델이 될 만한 일은 그가 최선을 다해서 설교해서, 설교에 있어서 많은 목사들에게 모범이 된 것입니다. 우리 나이로 73세라고 하는데, 요즈음 의학이나 건강 추세로 볼 때는 좀 이른 연세입니다. 그런데 제가 그런 것을 돌아보면서 다시 한 가지 모델로 삼을 부분이 있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이 분이 무슨 일을 하든 자주 자신의 건강을 해칠 만큼 애를 쓴 흔적이 있습니다. 이번에는 마침내 소천을 하시게 되셨지만, 이전에도 복음 사역을 열심히 하다가, 몸을 지나치게 혹사해서 많이 쉬지 못하신 것 같습니다. 세상에 유명해진 그 어떤 일보다도 이 일을 본받아야 합니다. 그것은 복음을 위한 열심입니다. 여러분, 여러분도 서로에게 모델이 되십시오. 그런데 어떤 성품을 닮고, 기질을 닮고, 삶의 태도를 닮고, 그렇게 하는데, 그것이 결국은 복음으로 귀결된다면, 그 본받는 일이 서로에게 뜻 있는 일이 될 것입니다.
6. 시편 131편
제가 이 사소함에 대해서 마무리를 하려고 이런 저런 자료를 뒤졌습니다. 61년생 미국인 한 사람이 “행복에 목숨 걸지 마라”라는 책을 쓴 것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차례를 보았는데, 조금 더 행복해지려고 너무 집착하는 것이 오히려 불행을 만든다 그런 이야기들, 분노하지 마라, 등등. 저는 이런 책들이 별로 볼 것이 없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러면서 제 머리를 스쳐 지나가는 시편 말씀이 있었습니다. 시편 131편 말씀입니다. “여호와여 내 마음이 교만하지 아니하고 내 눈이 오만하지 아니하오며 내가 큰 일과 감당하지 못할 놀라운 일을 하려고 힘쓰지 아니하나이다.” 아무 다른 설명 없이 그냥 여러분들에게 이 말씀을 읽어드리고 싶습니다. 총체적으로 제가 여러분에게 하고 싶은 말은 우리의 복음은 대체로 사소한 삶의 움직임과 함께 간다는 것입니다. 사소한 것도 사랑하고, 사소한 것에서 행복도 얻고, 사소한 것 속에 복음을 많이 머금게 하시기 바랍니다. (아멘) 엄청난 프로젝트를 해야만 복음이 전파되는 세상은 참 이상한 세상이다 그런 것을 느꼈습니다. 우리가 사람다움을 잃어버리지 않는 것은 매우 사소한 것입니다. 복음은 어쩌면 그것을 지키는 일일지도 모릅니다. 말씀을 맺겠습니다. 여러분, 사소한 것들은 하나님께서 우리의 일상에 베푸신 은혜입니다. 사소한 일상에 감사하십시오. 그리고 그 사소함에 복음이 스며들게 하십시오. 그것이 기독교인의 삶의 의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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