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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약 --------------------/빌레몬서

몬 1장 8-21절(종이 아니라 형제로) - 조영식

by Preacher 2023. 11. 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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몬1장 8-21

종이 아니라 형제로

조영식 목사 2009.7.26.

김포한신교회 http://kimpohansin.onmam.co.kr/

 

8 이러므로 내가 그리스도 안에서 아주 담대하게 네게 마땅한 일로 명할 수도 있으나/

9 도리어 사랑으로써 간구하노라 나이가 많은 나 바울은 지금 또 예수 그리스도를 위하여 갇힌 자 되어/

10 갇힌 중에서 낳은 아들 오네시모를 위하여 네게 간구하노라/

11 그가 전에는 네게 무익하였으나 이제는 나와 네게 유익하므로/

12 네게 그를 돌려 보내노니 그는 내 심복이라/

13 그를 내게 머물러 있게 하여 내 복음을 위하여 갇힌 중에서 네 대신 나를 섬기게 하고자 하나/

14 다만 네 승낙이 없이는 내가 아무 것도 하기를 원하지 아니하노니 이는 너의 선한 일이 억지 같이 되지 아니하고 자의로 되게 하려 함이라/

15 아마 그가 잠시 떠나게 된 것은 너로 하여금 그를 영원히 두게 함이리니/

16 이 후로는 종과 같이 대하지 아니하고 종 이상으로 곧 사랑 받는 형제로 둘 자라 내게 특별히 그러하거든 하물며 육신과 주 안에서 상관된 네게랴/

17 그러므로 네가 나를 동역자로 알진대 그를 영접하기를 내게 하듯 하고/

18 그가 만일 네게 불의를 하였거나 네게 빚진 것이 있으면 그것을 내 앞으로 계산하라/

19 나 바울이 친필로 쓰노니 내가 갚으려니와 네가 이 외에 네 자신이 내게 빚진 것은 내가 말하지 아니하노라/

20 오 형제여 나로 주 안에서 너로 말미암아 기쁨을 얻게 하고 내 마음이 그리스도 안에서 평안하게 하라/

21 나는 네가 순종할 것을 확신하므로 네게 썼노니 네가 내가 말한 것보다 더 행할 줄을 아노라/

 

0. 들어가는 글

 

장마 이후에 무더운 여름이 이어지고 있습니다. 또한 본격적인 휴가철이 시작되었습니다. 이민가정 자녀로 미국에서 생활하다 한국으로 돌아와 중학생이 된 아이가 있었습니다. 그가 이른 아침부터 밤늦은 시간까지 학교 공부에 매달려야 하는 한국 생활이 버겁기만 하였습니다. 어느 날 볼멘소리로 말을 합니다. "아빠, 이거 뭐 생각할 시간을 줘야지요." 국민일보 겨자씨에서 읽은 내용입니다. 한국 교육의 현실이 생각할 여유조차도 주지 아니하고 뺑뺑이를 돌리고 있는 현실을 그대로 보여주는 것입니다. 한국 교육의 현실뿐만 아니라 우리 국민들이 생각할 여유조차 없이 바쁘게 살아가는 것이 아닌가 생각해봅니다. 여름에 삶을 잠시 멈추고 휴식을 통하여 생각의 여유를 가져볼 수 있는 하나님의 자녀들이 될 수 있기를 소망하며 말씀 시작합니다.

 

빌레몬서는 사도바울과 오네시모와 빌레몬의 삼각관계를 잘 파악할 때 은혜를 받을 수 있습니다. 빌레몬은 예수님을 믿는 거룩한 부자로서 바울의 선교를 후원하는 자였습니다. 오네시모는 빌레몬의 집의 종이었으나 막대한 경제적인 손실을 입히고 도망을 쳤습니다. 그 후로 바울을 만나서 예수님을 영접하고 양육을 받아서 없어서는 안 될 충성된 일꾼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사도바울이 나중에 알고 보니 오네시모와 빌레몬의 관계를 알게 되었습니다. 사도바울이 이 둘 사이에서 참으로 어려운 결정을 내려야 합니다. 바울이 충성된 일꾼 오네시모와 선교 후원자인 빌레몬 사이에서 갈등 풀어가는 모습을 통하여 우리도 어려운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지혜를 깨달을 수 있기를 소망합니다.

 

1. 바울은 자신의 욕심을 버림으로 어려운 문제를 해결하고 있습니다.

 

바울이 자신에게 닥친 문제를 풀어가는 첫 번째 영적인 원리는 자신의 욕심을 버림으로 문제를 해결하고 있습니다. 오네시모는 바울에게 너무나 유익한 존재가 되었습니다(11절). 그리고 바울의 심복이 되었습니다(12절). 오네시모는 갇혀있는 바울을 섬길 수 있는 너무나 필요한 사람이었습니다(13절). 그러나 사도 바울은 이토록 자신에게 필요한 오네시모를 빌레몬에게 다시 돌려보내고 있습니다. 자신의 욕심을 버리지 아니하고는 내리기가 참으로 어려운 결정이었을 것입니다. 바울은 자신의 유익보다는 오네시모와 빌레몬의 관계 회복을 더 우선시 하고 있습니다.

 

바울처럼 욕심을 비우면은 해결할 수 있는 길이 보일 수 있는데 욕심을 붙잡고 있기 때문에 해결할 수 있는 길이 보이지 않는 것입니다. 저에게 버려야 할 욕심이 무엇인지 돌아보았습니다. 하나는 잘해 보려고 하는 욕심입니다. 잘하려는 욕심이 지나치면 오버페이스를 하게 되어서 자신도 힘들게 되고 상대방도 힘들게 하는 경우가 생기게 됩니다. 목회도 잘해보려는 욕심이 넘치다보면 탈진을 경험하게 됩니다. 주님의 일이 우리의 힘과 능으로 되지 아니하고 하나님의 전적인 은혜로 이루어진다는 것을 알면서도 가끔 망각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또 하나는 이기려는 욕심이 강합니다. 운동을 해보면은 성격이 그대로 나온다고 합니다. 우리 성도님들이 제가 승부욕이 강하다는 것을 잘 알고 있을 것입니다. 참 버리기 힘든 성격입니다. 항처받지 마시고 귀엽게 봐주세요. 목회자로 산다는 것이 모든 일에 감시를 받는다는 느낌이 들 때가 있습니다. 때로는 자유롭게 숨 쉴 수 있는 공간이 필요합니다. 거룩하고 완전한 모습을 보여주려는 욕심보다는 있는 모습을 그대로 보여주는 것이 더 진실한 모습이라고 생각을 하게 됩니다.

 

마지막 하나는 옳고 그른 것을 지나치게 가리고자 하는 욕심이 있었습니다. 지나치게 의로워지려는 욕심이 강했습니다. 그러다보니 억울한 것을 참지 못했습니다. 옳고 그른 것을 가리고자 하는 욕심 때문에 다른 사람에게 상처를 주는 일이 생긴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내 자신이 의로움을 강하게 내세울수록 주변사람을 정죄하게 됨을 알아가게 됩니다.

 

이제는 잘하려는 욕심, 이기려는 욕심, 의로워지려는 욕심보다 더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를 성령님을 통하여 배워가고 있습니다. 그것이 바로 원망과 시비가 없이 하는 것입니다. 빌립보서 2장 14절에 “모든 일을 원망과 시비가 없이 하라”고 합니다. 바울도 욕심을 버리고 또한 빌레몬과 오네시모 사이의 옳고 그름을 가리는 것이 아니라 원망과 시비가 없이 일을 해결하고 있습니다. 바울처럼 욕심을 버릴 때 모든 일을 원망과 시비가 없이 해결할 수 있는 것입니다.

 

2. 빌레몬과 오네시모 사이에 용서를 통한 진정한 화해를 시도하고 있습니다.

 

두 번째로 바울이 문제를 해결함에 있어서 중요하게 생각한 원리가 용서입니다. 하나님과 우리 사이의 관계 회복 속에서도 가장 중요한 원리는 용서입니다. 용서 없이는 하나님과의 회복은 불가능합니다. 사람들 사이에서도 가장 중요한 원리는 서로에 대한 용서입니다. 오네시모와 빌레몬의 관계 회복에 있어서도 가장 중요한 것이 서로에 대한 용서입니다. 오네시모는 빌레몬의 집에서 종으로 지내다가 막대한 경제적인 손실을 입히고 도망을 쳤습니다. 그리고 바울을 만나서 예수님을 영접하고 충성된 일군으로 성장하였습니다. 이런 과정에서 오네시모가 지난 과거에 대하여 하나님 앞에서 회개를 충분히 하였을 것입니다. 그러나 사도 바울은 오네시모를 향하여 하나님 앞에 회개를 하였으니 모든 문제가 해결되었다고 하지 않습니다. 다시 만나고 싶지 않는 빌레몬에게 찾아가서 용서를 받으라는 것입니다. 만약 빌레몬이 용서를 하지 않는다면 오네시모는 심하게 처벌을 받든지 당시의 법으로 죽을 수도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에게 회개를 함으로 용서를 받는 것보다 사람에게 용서를 받는 것이 더 힘든 일일 수 있는 것입니다. 오네시모는 하나님에게도 용서를 받아야 하지만 자신이 손해를 입힌 빌레몬에게도 용서를 받아야 합니다.

 

바울은 빌레몬에게도 오네시모를 용서할 것을 권면하고 있습니다. 16절 말씀이 참으로 감동적입니다. “이 후로는 종과 같이 대하지 아니하고 종 이상으로 곧 사랑 받는 형제로 둘 자라 내게 특별히 그러하거든 하물며 육신과 주 안에서 상관된 네게랴” 사도바울에게 사랑받는 형제이기에 빌레몬에게도 종이 아니라 사랑받는 형제로 받아달라는 것입니다. 오네시모의 과거의 종의 모습이 아니라 새롭게 변화된 형제의 모습으로 바라보고 있습니다. 우리는 한 사람을 평가할 때 과거에 매여 있으면 안 됩니다. 새롭게 변화된 지금의 모습으로 볼 줄 알아야 합니다. 그럴 때 용서가 가능하고 화해가 가능한 것입니다. 서울에서 제가 청년사역을 할 때 세상적으로 살아가면서 교회 여자청년들에게 끼웃끼웃하는 형제가 있었습니다. 제가 서울에서 청년 사역을 그만두고 김포에서 개척을 시작한 이후 몇 년 지나서 서울에 갔는데 그 형제가 청년 모임의 중심 리더로 활동하고 있는 것이었습니다. 과거에 나쁜 기억들이 남아서 왜 그리 마음이 불편한지 돌아와서 그 형제 때문에 서울 청년들 걱정을 한동안 한 적이 있습니다. 이처럼 변화된 모습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과거의 모습에 매여 있으면 용서하기도 힘들고 화해하기도 힘든 것입니다. 그러므로 바울은 오네시모의 이전의 모습이 아니라 지금의 변화된 모습을 받아들이고 종이 아니라 형제로 생각을 하고 용서하라는 것입니다. 주님 안에서 변화된 모습을 바라보며 용서하고 화해할 수 있는 주님의 자녀들이 되시기를 기도합니다.

 

3. 신앙은 명령이 아니라 인격입니다.

 

세 번째로 사도 바울은 문제를 해결하는데 참으로 인격적으로 해결하고 있습니다. 사도바울은 빌레몬에게 명령할 수도 있다고 합니다(8절). 그러나 사랑으로 부탁을 하고 있습니다. 참으로 사도바울의 신앙 인격이 아름다운 향기가 나고 있습니다. 교회일수록 명령하는 것이 아니라 사랑으로 부탁을 해야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이름을 등에 업고 자신의 직분을 내세우면서 명령이나 강요를 하는 경우가 참으로 많이 있습니다. 그리고 순종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심판이 있을 것처럼 은근히 협박을 하기도 합니다. 사도 바울의 신앙의 아름다운 인격이 14절에서도 묻어나고 있습니다. “다만 네 승낙이 없이는 내가 아무 것도 하기를 원하지 아니하노니 이는 너의 선한 일이 억지 같이 되지 아니하고 자의로 되게 하려 함이라” 고 합니다. 여기에 담긴 신앙의 인격이 두 가지로 나타나고 있습니다. 하나는 자신의 일방적인 주장을 내세우지 않는 것입니다. 하나님 일일수록 독단주의가 되기 쉽습니다. 상호교통이 이루어지는 것이 인격적인 것입니다. 또 하나는 선한일이라고 하여 억지로 해서도 안 되는 것입니다. 선한 일을 억지로 하는 것은 율법적인 신앙입니다. 교회에서 선한일이라는 명목으로 분담을 시키거나 강요할 여지가 많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일은 자의로 해야 합니다. 자의로 할 때 하나님이 기쁘게 받으시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이 아름다운 신앙의 인격으로 기억될 까요? 재능이 뛰어난 사람은 머릿속에 기억된다고 합니다. 그러나 따듯한 사랑의 배려가 있는 사람은 가슴속에 기억된다고 합니다. 사도 바울은 오네시모나 빌레몬에게 어떤 재능을 통하여 머릿속에 기억되는 사람이 아니라 따듯한 배려 속에 가슴속에 기억되는 사람으로 남았을 것입니다. 오네시모를 위하여 빌레몬에 부탁하는 바울의 마음속에 너무나 따듯한 사랑의 배려가 담겨져 있습니다. 18절 말씀에서 “그가 만일 네게 불의를 하였거나 네게 빚진 것이 있으면 그것을 내 앞으로 계산하라” 고 합니다. 우리들의 모습이 어떤 능력을 통하여 머릿속에 기억되는 사람입니까? 아니면 따듯한 사랑의 배려를 통하여 가슴속에 기억되는 사람입니까? 저의 재능을 통하여 성도님들의 머리속에 기억되는 목사가 아니라 따뜻한 사랑의 배려를 통하여 성도님들이 가슴속에 기억되는 목사가 되고 싶네요. 이것마저도 욕심이 된다면 겸손히 내려놓고 주님께 맡기고 싶습니다. 사람의 재능을 가지고 머리에 기억되는 사람이 아니라 사도바울처럼 따뜻한 사랑의 배려를 통하여 가슴에 기억되는 성도님들이 되시기를 진심으로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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