몬1장 4-18
오네시모의 회심
스데반 황 목사 2019.03.10.
그리스도의 보혈교회 https://cafe.naver.com/thebloodofx/
빌레몬서 1:4-18
4 내가 항상 내 하나님께 감사하고 기도할 때에 너를 말함은
5 주 예수와 및 모든 성도에 대한 네 사랑과 믿음이 있음을 들음이니
6 이로써 네 믿음의 교제가 우리 가운데 있는 선을 알게 하고 그리스도께 이르도록 역사하느니라
7 형제여 성도들의 마음이 너로 말미암아 평안함을 얻었으니 내가 너의 사랑으로 많은 기쁨과 위로를 받았노라
8 이러므로 내가 그리스도 안에서 아주 담대하게 네게 마땅한 일로 명할 수도 있으나
9 도리어 사랑으로써 간구하노라 나이가 많은 나 바울은 지금 또 예수 그리스도를 위하여 갇힌 자 되어
10 갇힌 중에서 낳은 아들 오네시모를 위하여 네게 간구하노라
11 그가 전에는 네게 무익하였으나 이제는 나와 네게 유익하므로
12 네게 그를 돌려 보내노니 그는 내 심복이라
13 그를 내게 머물러 있게 하여 내 복음을 위하여 갇힌 중에서 네 대신 나를 섬기게 하고자 하나
14 다만 네 승낙이 없이는 내가 아무 것도 하기를 원하지 아니하노니 이는 너의 선한 일이 억지 같이 되지 아니하고 자의로 되게 하려 함이라
15 아마 그가 잠시 떠나게 된 것은 너로 하여금 그를 영원히 두게 함이리니
16 이후로는 종과 같이 대하지 아니하고 종 이상으로 곧 사랑 받는 형제로 둘 자라 내게 특별히 그러하거든 하물며 육신과 주 안에서 상관된 네게랴
17 그러므로 네가 나를 동역자로 알진대 그를 영접하기를 내게 하듯 하고
18 그가 만일 네게 불의를 하였거나 네게 빚진 것이 있으면 그것을 내 앞으로 계산하라
바울은 제 3차 전도 여행(주후 53-58)을 마친 후 예루살렘의 성도들에게 구제 헌금을 전달하기 위해 예루살렘으로 갑니다. 그곳에 가면 붙잡히게 될 줄을 알고 있었지만 바울은 그것이 하나님의 뜻인 것을 알고 예루살렘으로 갑니다. 그러나 결국 바울은 예루살렘 성전 앞에서 유대인들의 손에 잡혀 거의 맞아 죽을 뻔하게 됩니다. 하지만 로마 군대의 천부장이 나타나 바울은 목숨을 건지게 됩니다. 바울은 유대인들의 수많은 공갈과 고발 가운데 가이사에게 상소하여 로마에서 재판을 받기로 하고 로마로 가게 됩니다. 그리고 결국 수년 후에 로마 감옥에 갇히게 됩니다. 바로 그 로마 감옥에서 바울이 빌레몬에서 쓴 서신이 빌레몬서입니다.
그래서 빌레몬서 1장 1절을 보면, “그리스도 예수를 위하여 갇힌 자 된 바울과 및 형제 디모데는 우리의 사랑을 받은 자요 동역자인 빌레몬과 자매 압비아와 우리와 함께 병사된 아킵보와 네(빌레몬의) 집에 있는 교회에 편지하노니”라고 되어 있습니다. 즉, 바울이 로마 감옥에 갇혀 있는 이유는 그리스도 예수를 위함 때문입니다. 또한 바울과 디모데는 빌레몬을 사랑하고 있었으며 동역자로 인식하고 있었습니다. 바울이 에베소에서 선교할 때 빌레몬은 회심을 하고 온 힘을 다해 바울을 도왔습니다. 그래서 그는 바울의 사랑을 받았을 뿐만 아니라 디모데의 친구가 되었습니다. 바울이 에베소를 떠난 후에도 빌레몬은 계속 에베소 교회를 섬기다가 골로새 교회의 감독이 되었습니다. 4-7절을 보면 바울이 이러한 빌레몬을 대단히 많이 칭찬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 4 내가 항상 내 하나님께 감사하고 기도할 때에 너를 말함은 5 주 예수와 및 모든 성도에 대한 네 사랑과 믿음이 있음을 들음이니… 7 형제여 성도들의 마음이 너로 말미암아 평안함을 얻었으니 내가 너의 사랑으로 많은 기쁨과 위로를 받았노라 ](몬 1:4-5, 7)
오늘 본문은 어떤 연유로 오네시모가 노예가 되었는지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않지만, 분명한 것은 그는 빌레몬의 노예요, 그리고 빌레몬에게 아주 못된 짓을 하고 도망갔다는 사실입니다. 오네시모는 주인 빌레몬이 사는 골로새라는 도시에서 도망하여 로마까지 가게 되었습니다. 아시아 골로새에서 로마까지는 서쪽으로 약 천 오백 킬로미터 정도됩니다. 즉, 오네시모는 대단히 멀리 도망쳐 온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하나님의 택함 가운데 있었습니다. 따라서 로마에 도착한 오네시모는 하나님의 놀라운 방법으로 바울을 만나게 됩니다. 그때 바울은 로마 감옥에 있었는데, 어떻게 해서 둘이 만나게 되었는지 확실치 않지만, 아무튼 한 감옥에서 만나게 되었습니다.
아마 오네시모는 도둑질을 하다가 군병에게 잡혔을 수도 있습니다. 또는 심문 검색을 받게 되었는데 신분이 확실치 않아서 감옥에 올 수도 있습니다. 또는 다른 사람을 폭행하다가 군병에게 잡혀서 감옥에 올 수도 있습니다. 아무튼 바울을 만나기 전, 로마에서의 오네시모의 삶은 아주 거칠고 험난하며 죄로 가득 찬 인생이었습니다. 결국 오네시모는 지독한 흉악범만 들어오는 로마의 깊은 감옥까지 들어와서 예수 그리스도 때문에 옥에 갇힌 바울을 만나게 됩니다.
감옥에 잡혀 들어온 오네시모는 바울을 만난 순간, 그의 인생에 있어서 가장 엄청난 축복의 순간을 맞이하게 되었습니다. 그 이유는 바울을 만난 오네시모는 바울을 통하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회심하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인생의 가장 중요한 복은 언제나 만남에서 옵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만남의 주권은 오직 하나님의 손에 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부부로 살면서 마치 서로 계획하여 만난 것 같은 착각을 합니다. 하지만 실은 하나님의 섭리 가운데 만났을 뿐입니다. 친구와의 만남도 그러하고 교회에서의 목사와의 만남도 그러합니다.
오네시모의 인생은 하나님의 손에 있었는데 하나님은 그를 복 주시기로 정하셨습니다. 이때 하나님은 오네시모를 복 주시기 위해 로마 감옥에서 바울을 만나게 하십니다. 아마 오네시모의 인생 가운데 가장 불행한 때는 로마 감옥에 갇힌 때였을 것입니다. 하지만 놀랍게도 그의 삶의 가장 어두운 순간은 그곳에 있던 바울을 만나게 됨으로 최고의 복이 되었습니다.
요셉은 보디발의 아내의 유혹을 받았지만 그 여인을 취하지 않은 결과, 도리어 성추행자라는 누명을 쓰고 애굽의 감옥에 갇히게 됩니다. 하지만 그곳에서 애굽 바로의 두 관원장, 곧 술 맡은 관원장과 떡 굽는 관원장을 만나게 되고 그들이 꾼 꿈을 해석해 주게 됩니다. 그런데 그 만남이 계기가 되어 나중에 애굽 바로 황제의 꿈을 해석해 주게 됩니다. 그리고 결국 애굽 총리가 되어 온 세상을 가뭄의 굶주림으로부터 구하는 그러한 귀한 사람으로 쓰임 받게 됩니다.
이처럼 사람의 인생은 하나님의 주권 속에서 만남을 통해 복을 받게 됩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의 만남에 주의 복이 있기를 늘 기도하기 바랍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주 하나님께 복된 만남을 주심에 감사하시기 바랍니다. 부부는 이러한 귀한 아내, 귀한 남편을 만나게 하심을 감사하고 교회의 모든 성도들은 목사를 비롯하여 이렇게 복된 교회에서 서로 만나게 하여 주심을 감사하기 바랍니다. 아무튼 죄를 짓고 감옥에 갇힌 노예 오네시모는 바울을 만나지 못하였다면 더 많은 죄악과 분노 가운데 반항적인 삶을 살다가 사형을 당한 후 지옥에 떨어졌을 텐데 하나님의 무한한 자비 가운데 그는 바울을 만나 회심하게 됩니다. 할렐루야!
인생에서 복음을 전하는 사람을 만나 회심하는 것보다 더 큰 축복이 어디 있겠습니까? 지옥으로 향하던 사람을 천국으로 향하게 하는 복보다 더 큰 복이 어디 있겠습니까? 마귀를 방불케 하던 악한 사람이 천사보다 더 아름답고 고귀한 선한 사람으로 변화되는 것보다 더 큰 복이 어디 있겠습니까? 10절을 보니, 바울은 오네시모를 “갇힌 중에서 낳은 아들”이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12절을 보면, 바울은 오네시모를 “내 심복”이라고 부릅니다. 여기서 심복은 헬라어로 (스플랑크나)인데 내장 또는 심장을 의미합니다. 즉, “오네시모는 나의 내장이다, 나의 심장이다”라는 말입니다. 이 말은 오네시모는 나와 한 마음이 된 매우 가까운 사이라는 뜻입니다. 이 정도로 바울이 자신의 모든 것을 걸고 추천할 수 있는 대상이 오네시모였습니다.
그런데 공교롭게도 바울은 오네시모의 주인인 빌레몬과 매우 절친한 사이였습니다. 바울은 감옥에서 오네시모와 대화를 나누던 중, 오네시모가 그의 주인 빌레몬에게 악한 짓을 하고 도망쳤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나중에 오네시모가 감옥에서 풀려날 때 바울은 오네시모에게 그의 주인인 빌레몬에게 돌아갈 것을 당부합니다. 그리고 빌레몬에게 보내는 편지를 써서 두기고와 오네시모에게 그 편지를 빌레몬에게 가져가도록 합니다. 이에 그 두 사람은 긴 여행을 함께 떠나게 되었습니다. 사실 바울은 빌레몬서를 보낼 때 골로새 교회에도 서신을 함께 써서 보냈습니다.
아무튼 빌레몬에게 서신을 쓰는 바울은 연로한 상태에 있었습니다. 그는 친히 서신을 씁니다. 그 이유는 그 험한 감옥에서 멸망을 향한 달려가던 오네시모를 얻었는데 너무나 놀랍게 변하였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10절을 보니, 바울은 오네시모의 주인 빌레몬에게 “갇힌 중에서 낳은 아들 오네시모를 위하여 네게 당부하노라”고 말합니다.
특히 바울이 오네시모에 대해 언급한 내용 중 가장 중요한 부분은 11절입니다. “그가 전에는 네게 무익하였으나 이제는 나와 네게 유익하므로”. 오네시모는 전에는 무익한 존재였습니다. 그러나 이제 그는 바울과 빌레몬에게 유익한 존재가 되었습니다. 사실 그는 하나님과 그리스도께 유익한 존재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의 변화의 과정에는 복음으로 인한 오네시모의 회심이 있었습니다.
11절에서 뚜렷하게 대조되는 단어는 “무익”과 “유익”입니다. 그리고 궁극적으로 그 구절의 뜻은 오네시모는 과거에는 주 예수 그리스도께 무익한 존재였으나 이제는 주 예수 그리스도께 유익한 존재가 되었다는 뜻입니다. 우리 역시 전에는 무익한 존재였습니다. 그러나 복음을 듣고 회심함으로 유익한 존재가 되었습니다.
[ 5 그러므로 땅에 있는 지체를 죽이라 곧 음란과 부정과 사욕과 악한 정욕과 탐심이니 탐심은 우상 숭배니라 6 이것들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진노가 임하느니라 7 너희도 전에 그 가운데 살 때에는 그 가운데서 행하였으나 8 이제는 … 10 새 사람을 입었으니 이는 자기를 창조하신 이의 형상을 따라 지식에까지 새롭게 하심을 입은 자니라 ](골 3:5-8, 10)
“전에는 네가 버림을 당하며 미움을 당하였으므로 네게로 가는 자가 없었으나 이제는 내가 너를 영원한 아름다움과 대대의 기쁨이 되게 하였도다”(참조, 사 60:15)
“전에는 우리도 다 그 가운데서 우리 육체의 욕심을 따라 지내며 육체와 마음의 원하는 것을 하여 다른 이들과 같이 본질상 진노의 자녀이었고(참조, 엡 2:3)” “하나님께 순종하지 아니하더니 … 이제는 긍휼을 입었도다”(참조, 롬 11:30)
“너희가 전에는 어둠이더니 이제는 주 안에서 빛이라 빛의 자녀들처럼 행하라”(엡 5:8). “내가 전에는 비방자요 박해자요 폭행자였으나 (이제는) 도리어 긍휼을 입었도다”(참조, 딤전 1:13)
[ 3 우리도 전에는 어리석은 자요 순종하지 아니한 자요 속은 자요 여러 가지 정욕과 행락에 종 노릇 한 자요 악독과 투기를 일삼은 자요 가증스러운 자요 피차 미워한 자였으나 4 우리 구주 하나님의 자비와 사람 사랑하심이 나타날 때에 5 우리를 구원하시되 우리가 행한 바 의로운 행위로 말미암지 아니하고 오직 그의 긍휼하심을 따라 중생의 씻음과 성령의 새롭게 하심으로 하셨나니 6 우리 구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그 성령을 풍성히 부어 주사 7 우리로 그의 은혜를 힘입어 의롭다 하심을 얻어 영생의 소망을 따라 상속자가 되게 하려 하심이라 ](딛 3:3-7)
바울은 의도적으로 매우 대조적인 표현을 사용하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이 서신을 받는 빌레몬의 마음 속에 오네시모의 회심을 부각시키고 있습니다.
우리는 여기서 오네시모가 골로새에 도착하여 빌레몬을 만날 때의 장면을 상상해 볼 수 있습니다. 어느 날 저녁 빌레몬의 집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납니다. 빌레몬이 문으로 나아가 문을 열어 보니 오네시모와 두기고가 그곳에 서 있는 것이었습니다. 이때 빌레몬을 본 오네시모가 주인 앞에 무릎을 꿇고 절을 하며 용서를 빕니다. “주인님, 저 오네시모입니다. 저의 죄를 용서해 주십시오. 주인님.” 오네시모를 본 빌레몬은 깜짝 놀랐습니다. 자기에게 큰 피해와 배신감과 상처를 준 노예를 다시 보는 순간입니다. 그러나 그 곁에 두기고가 서 있고 그가 바울이 보낸 편지를 건네주는 것이었습니다. 아주 어색하고 난처한 순간이었습니다. 그러나 두기고가 건네준 편지는 그가 온 맘으로 사랑하고 존경하는 바울의 편지였습니다. 빌레몬은 양피지에 쓰인 바울의 편지를 받아 읽습니다.
이때 오네시모의 입장을 생각해 봅시다. 이전에 자기가 큰 피해와 상처를 준 주인이 자기 앞에 서 있습니다. 주인이 편지를 읽고 있는 동안 오네시모는 어떠했겠습니까? 그 짧은 순간은 아마 오네시모에게 있어서 여러 복합적인 감정을 느끼는 순간이었을 것입니다. 진땀을 나게 하는 긴장의 시간이었을 것입니다. 편지를 읽던 빌레몬에게 그 편지의 내용 중 가장 그의 마음을 끄는 내용이 있었습니다. 바로 11절의 내용입니다. 과거에 한가지로 무익하던 존재가 이제 그 위대한 바울이 보는 견해로서 유익한 자가 되었다는 부분입니다. 그렇다면 이제 자기 앞에 무릎을 꿇고 있는 오네시모는 참으로 유익한 자가 되어 돌아왔다고 보아도 무방합니다. 그 부분을 읽으면서 빌레몬의 마음은 녹았습니다. 용서의 마음이 생겼습니다. 다시 오네시모를 바라봅니다. 그리고 따뜻한 미소와 마음으로 그를 일으켜 세워 부둥켜 앉아줍니다. 그들은 그리스도 안에서 친구이며 동역자가 되었습니다. 이 놀라운 결과가 어디서 시작된 것입니까? 바울의 편지에 나타난 오네시모의 회심입니다. 바로 11절의 내용입니다.
11절 본문에서 바울이 쓴 원어를 보면 (아크레스토스)하던 오네시모가 (유크레스토스)한 사람이 되었다고 말합니다. 보통 아-크레스토스 라는 단어는 무익하다는 뜻입니다. ‘아’를 떼고 크레스토스 라고 하면 쓸만하다는 뜻입니다. ‘아’는 ‘아니다’라는 뜻이니 “아-크레스토스”는 무익하다는 뜻입니다. 그러나 ‘유’크레스토스 라고 할 때 ‘유’는 복된, 좋은, 귀한 이라는 뜻입니다. 그래서 복음은 ‘유’앙겔리온, 즉 복된 소식입니다. 귀한 소식입니다.
즉, 오네시모는 해를 끼치는 자리에서 해를 끼치지 않는 쓸만한 사람이 된 정도가 아니라 꼭 필요한 사람, 너무나 소중하고 고귀한 사람이 되었다는 뜻입니다. 바울은 진심으로 오네시모는 참으로 소중하고 귀하고 복된 사람이 되었고 나아가 주 예수 그리스도께 반드시 필요한 유익한 존재가 되었다고 보증해 준 것입니다.
놀라운 사실은, 지금 바울이 쓰는 (아-크레스토스) 그리고 (유-크레스토스)라는 헬라 용어는 특별한 용어로서 사회적인 관계에서 사용되는 단어입니다. 즉, 오네시모는 가정, 교회, 사회에서 해로운 자, 무익한 자였으나 복음으로 인하여 회심하더니, 가정, 교회, 사회에서 유익한 자, 반드시 필요한 자, 복된 자, 소중한 자가 되었다는 뜻입니다. 이는 하나님의 나라에 너무나 귀중한 사람이 되었다는 뜻입니다. 이 사실에 대한 강조는 빌레몬서 전반에 나타나고 있습니다.
13절을 보면, 오네시모가 얼마나 바울에게 소중하고 필요한 사람이었던지 “그가 나와 함께 있는 것은 너 빌레몬이 나와 함께 있는 것과 다를 바가 없다”라고 말할 정도입니다. 빌레몬은 지금 골로새 교회의 감독이 될 만큼 주의 나라와 복음을 위해 수년간 수고하고 생명을 다 바쳐 섬긴 사람입니다. 그는 바울에게는 참으로 사랑스럽고 소중한 사람입니다. 그런데 빌레몬의 노예인 오네시모가 그 정도로 소중한 사람이 되었다고 바울은 말하는 것입니다.
또한 15절을 보면, 오네시모가 비록 빌레몬에서 큰 죄를 짓고 도망침으로써 잠시 떠났지만 회심하고 돌아온 오네시모는 영원토록 빌레몬과 함께 해도 될 정도로 유익하고 귀한 사람이 되었다고 바울은 확증해 주고 있습니다.
16절에서도, 오네시모가 비록 노예라고 해도, 그가 얼마나 소중하고 귀한 사람이 되었는지 그를 종과 같이 대하지 말고 오직 사랑 받는 형제로 대하라고 권합니다.
심지어 17절을 보면, 오네시모의 주인 빌레몬에게 오네시모가 가면 나를 모시는 것처럼 그를 영접하라고 말합니다. 이는 빌레몬에게 오네시모를 사도 바울처럼 영접하라는 당부입니다. “그를 영접하기를 내게 하듯 하라.” 사실 더 나아가 바울은 오네시모의 빚이나 어떤 법적 문제 같은 것이 있으면 내가 다 책임지겠다고 말합니다.
“그가 만일 네게 불의를 하였거나 네게 빚진 것이 있으면 그것을 내 앞으로 계산하라.” 그리고 “오네시모가 그대에게 빚진 것은 내가 다 갚을 것이다”라고 했으니, 실은 바울이 오네시모를 추천하는 정도가 아니라 그의 모든 재산을 동원하여 오네시모의 재정 보증을 무엇이든 다 서준 것입니다. 그리고 가장 놀라운 사실은 오네시모 한 사람 때문에 로마의 깊은 감옥에 있는 피곤하고 지친, 그리고 고통 당하는 바울이 누군가를 시켜서 대리로 서신을 쓰게 할 수도 있었는데 그 힘든 상황 속에서 이 서신을 친히 썼다는 사실입니다. “나 바울이 친필로 쓰노니” 이는 오네시모가 바울에게는 자기 분신처럼 귀한 존재였다는 뜻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하나님의 나라는 공동체입니다. 오네시모가 귀중한 사람이 된 것은 하나님의 나라에서 귀중한 사람이 되어 복되고 유익한 사람이 된 것을 말합니다. 주께서 빌레몬서를 통하여 주의 백성들에게 알리고 싶은 내용이 바로 이것입니다. 즉, 구원 받은 자의 모습이 어떠해야 하는지를 알려주신 것입니다. 참으로 거듭난 사람, 곧 회심한 사람에게 나타나는 변화가 무엇인지 구체적으로 알려주신 것입니다. 즉, 회심한 자의 변화는 하나님과 사람 앞에서 무익하던 자가, 하나님과 사람에게 유익한 자가 되는 것임을 알려주신 것입니다. 오네시모라는 노예의 마음 속에 역사한 복음의 능력은 과거에는 하나님 나라와 주변 공동체에 해로운 자이며 무익한 자였던 자를 이제는 하나님과 사람에게 유익한 자로 변화시킨 것입니다. 구원을 내 중심적으로 보지 않기를 바랍니다. 그러한 구원은 스스로의 착각일 수 있습니다. 신천지 및 구원파 등 이단에 물든 사람들 역시 자기들이 구원을 받았다고 착각하고 믿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럴 수 없습니다. 또한 교회를 다니는 수 많은 사람들이 보험 드는 식으로 예수님을 영접한 후 구원을 받았다고 확신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자기의 주관적인 확신이지 객관성은 없습니다. 즉, 본인은 천국에 들어갈 것이라고 확신해도 사실은 천국과는 거리가 먼 사람일 수 있다는 말씀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구원의 객관성은 소위 구원파처럼 내 마음 속의 ‘내’ 믿음에 있지 않고 하나님 나라 공동체 속에서의 가치성에 있습니다. 사람이란 존재는 항상 두 가지 관계에 있습니다. 이웃과의 관계와 하나님과의 관계입니다. 이 두 가지 관계에 있어서 복음으로 인하여 회심한 자는 유익을 나타내며 복이 되며 꼭 필요한 자가 된다는 말씀입니다. 이 뜻이 바로 회심을 통해 하나님의 나라에서 “유크레스토스”가 되었다는 뜻입니다. 우리 기독교의 가장 중심 되는 가치는 무엇입니까? 하나님께서 그리스도를 통하여 이루어 놓으신 구원의 결과는 무엇입니까? 그 답은 사랑입니다. 복음은 그리스도의 사랑을 알아 우리도 사랑의 삶을 사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사랑이 무엇입니까? 아주 막연할 때가 많습니다. 공동체 내에서 사랑이라는 것은, 하나님과 사람에게 유익한 존재가 되는 것을 말합니다. 따라서 구원의 결과는 하나님과 사람에게 유익한 존재가 되는 것입니다. 회심한 자는 하나님을 사랑하기 때문에 다른 사람을 사랑하며 섬기게 됩니다. 이 시대는 성령의 역사에 대해 큰 오해를 하고 있습니다. 보이지 않는 어떤 영을 체험한 후에 사납고 교만하고 남을 정죄하기를 좋아하는 사람이 되는 것을 성령의 역사로 오해하고 있습니다. 자신을 절제하지 못하는 이상한 신체적 현상을 성령의 역사로 오해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런 엉터리 신자들은 거의 다 가정에서 무익하며 교회와 사회에서 문제를 일으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어떤 사람을 향한 성령의 역사는 그가 하나님과 사람에게 유익한 사람으로 변화시키는 것으로 나타납니다. 성경은 성령으로 거듭난 자들의 삶의 특징은 사람들과의 관계에서 유익한 존재가 되는 것임을 확증합니다. 즉, 성령으로 사는 자들은 가정과 교회와 사회에서 하나님 나라의 의와 평강과 희락을 전합니다. 그들은 주의 명령을 순종함으로 가정과 교회와 사회를 든든히 세웁니다.
“아내들이여 자기 남편에게 복종하기를 주께 하듯 하라”(엡 5:22)
“자녀들아 주 안에서 너희 부모에게 순종하라 이것이 옳으니라”(엡 6:1)
“또 아비들아 너희 자녀를 노엽게 하지 말고 오직 주의 교훈과 훈계로 양육하라”(엡 6:4) “종들아 두려워하고 떨며 성실한 마음으로 육체의 상전에게 순종하기를 그리스도께 하듯 하라”(엡 6:5)
“젊은 자들아 이와 같이 장로들에게 순종하고 다 서로 겸손으로 허리를 동이라 하나님은 교만한 자를 대적하시되 겸손한 자들에게는 은혜를 주시느니라”(벧전 5:5).
이러한 명령들은 성령으로 충만한 자들이 마땅히 준행하는 내용들입니다. 따라서 가정과 교회와 사회에 유익한 존재가 될 수 밖에 없는 것입니다. 반면에 무익한 자는 가정과 교회와 사회 공동체에서 쓴 뿌리, 곧 악한 자입니다.
[ 14 모든 사람과 더불어 화평함과 거룩함을 따르라 이것이 없이는 아무도 주를 보지 못하리라 15 너희는 하나님의 은혜에 이르지 못하는 자가 없도록 하고 또 쓴 뿌리가 나서 괴롭게 하여 많은 사람이 이로 말미암아 더럽게 되지 않게 하며 16 음행하는 자와 혹 한 그릇 음식을 위하여 장자의 명분을 판 에서와 같이 망령된 자가 없도록 살피라 ](히 12:14-16)
무익한 사람은 이기적인 사람이며 자기 중심적인 사람이고, 삶을 살아가는 방법도 언제나 거짓과 도적질과 간교함으로 가득합니다. 돈과 명예와 권력과 인기를 얻기 위해 남에게 피해를 끼치고 질서를 무너뜨리며 하나님의 영광을 가립니다. 그들의 특징은 교만과 질투와 자기 영광 및 우상으로서 어느새 가정과 교회와 사회에 하나님의 나라에 막대한 피해를 입힙니다.
하지만 주의 은혜로 거듭나서 성령으로 살아가는 사람은 그 동기가 사랑이며 그 삶의 방법은 진실과 관용과 정직과 거룩이기에 그들은 남에게 유익을 끼치는 고귀한 사람입니다. 이러한 유익한 사람은 마침내 한 영혼을 주께 인도함으로써 주께 영광을 돌리는 삶을 살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므로 주님께서 우리에게 역사하셨다는 말은, 무가치한 인생을 유익한 인생으로 바꾸어 주셨다는 뜻입니다. 하나님과 사람에게 해를 끼치던 쓸모 없는 낭비의 인생에서 하나님과 이웃에게 유익이 되는 그러한 부요한 삶을 사는 자로 변화되었다는 뜻입니다. 그것이 회심입니다. 그것이 거듭남의 변화입니다. 그것이 구원 받은 자의 특징입니다.
여러분 자신에게 묻기 바랍니다. “나는 가정과 교회, 하나님 나라에 유익을 끼치고 있는가? 아니면 해를 끼치고 있는가? 유익한 존재인가 아니면 무익한 존재인가?” 누가복음 12장을 보면 어리석은 부자가 등장합니다. 그는 매일 자신의 쾌락을 위해 먹고 마실 생각 밖에 하지 못합니다. 그는 어떻게 하면 명예와 부와 권력을 쌓을 수 있을까 하는 생각만 하며 살아갑니다.
[ 16 한 부자가 그 밭에 소출이 풍성하매 17 심중에 생각하여 이르되 내가 곡식 쌓아 둘 곳이 없으니 어찌할까 하고 18 또 이르되 내가 이렇게 하리라 내 곳간을 헐고 더 크게 짓고 내 모든 곡식과 물건을 거기 쌓아 두리라 19 또 내가 내 영혼에게 이르되 영혼아 여러 해 쓸 물건을 많이 쌓아 두었으니 평안히 쉬고 먹고 마시고 즐거워하자 하리라 하되 ](눅 12:16-19)
그러나 그 사람은 하나님께 무익한 존재이기에 순식간에 제거하십니다.
[ 20 하나님은 이르시되 어리석은 자여 오늘 밤에 네 영혼을 도로 찾으리니 그러면 네 준비한 것이 누구의 것이 되겠느냐 하셨으니 21 자기를 위하여 재물을 쌓아 두고 하나님께 대하여 부요하지 못한 자가 이와 같으니라 ](눅 12:20-21)
하나님께 무익한 자의 마지막은 이러합니다.
“이 무익한 종을 바깥 어두운 데로 내쫓으라 거기서 슬피 울며 이를 갈리라 ”(마 25:30).
성경은 거듭나지 못한 사람은 그가 세상에서 어떤 평을 받던 하나님께 무익한 자라고 말합니다.
“기록된 바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 깨닫는 자도 없고 하나님을 찾는 자도 없고 다 치우쳐 함께 무익하게 되고 선을 행하는 자는 없나니 하나도 없도다”(롬 3:10-12).
하나님 보시기에 무익한 것은 지독하게 악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관점에서 볼 때, 하나님께 무익한 자는 악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러한 쓰레기 같은 인생들은 모두 모아서 영원히 타는 지옥이라는 쓰레기 통에 버리실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기 전의 모든 사람들은 하나님 앞에서 무익한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자기 자신을 너무나 사랑한 나머지 하나님을 불신하고 감사치 아니하며 하나님을 무시하고 모멸하는 자리까지 나아간 자들입니다. 그 들의 삶의 중심은 자아 중심이며 따라서 궁극적으로 그는 자기 외에는 하나님과 남을 생각할 수가 없는 존재입니다.
그런 생활 자세에서 모든 거짓과 사회적인 악이 발생합니다. 게으름과 교만, 잔인함과 거짓과 비방과 중상 모략이 그 특징이며 권력이 있을 때는 남을 탄압하고 착취하는 모습으로 나타납니다. 심지어 더욱 악한 것은 하나님을 대적하는 더러운 악을 찬동하며 악에 동참하는 것입니다. 소돔과 고모라는 하늘의 불심판을 받아 멸망하였고 노아 시대는 홍수 심판으로 멸망 받았습니다. 그들은 모두 하나님을 대적하며 지독하게 무익한 존재가 되는 일에 앞장서서 찬동하며 스스로 악에 동참하였던 것입니다. 하나님의 복음을 대적하던 바벨탑은 하나님 앞에서 가장 악하고 무익한 공동체였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악하고 게으른 무익한 자들이 그리스도로 인하여 변화됩니다. 그것이 오네시모의 회심입니다. 그것이 우리들의 거듭남입니다. 오네시모는 주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로 인하여 성령으로 거듭난 자들의 삶의 특징이 무엇인지 전형적으로 보여주는 실례인 것입니다.
오네시모는 복음으로 인하여 변화된 이후에 바울에게 순종하기 시작했습니다. 이는 하나님께 순종하기 시작한 것입니다. 동시에 그는 같은 기독교인들과 아주 밀접한 관계를 갖게 되는데 그는 매우 유익을 주는 사람으로 변화되었습니다. 그를 보는 사람들은 기분이 좋아졌습니다. 그가 고귀하게 변한 것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결국 신실한 주의 백성에게 유익한 사람으로 인정을 받는 자리까지 변화되었습니다. 그래서 마침내 바울로부터 그는 “신실하고 사랑을 받는 형제” “너무나 유익한 존재”라는 인정을 받게 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 무익한 존재에서 하나님께 유익한 존재가 되려면 제일 먼저 거듭남의 역사가 임하여야 합니다. 거듭남은 가장 필수적인 사건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이러한 변화가 나타날 수 있습니까? 그 대답은 우리가 이미 잘 알듯이 그는 바울이 “갇힌 중에서 낳은 아들”입니다. 바울이 고린도 교회에 보낸 편지에 “그리스도 안에서 일만 스승이 있으되 아버지는 많지 아니하니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내가 복음으로써 너희를 낳았음이라”(고전 4:15)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오네시모가 변화하게 된 비밀은 복음으로써 그를 낳은 바울의 사역입니다. 물론 오네시모로 하여금 바울을 만나게 하신 분은 주 예수 그리스도십니다. 그리스도께서는 그분의 신비로운 몸, 곧 교회의 지체인 바울을 통해서 오네시모를 만나셨으며, 바울은 그러한 만남을 통해 복음으로써 오네시모를 다시 태어나게 하였던 것입니다. 즉, 오네시모는 복음에 의해 새롭게 태어난 것입니다. 그는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복음을 통해 회심하게 된 것입니다. 그리고 그의 회심의 증거는 하나님과 교회가 입장에서 볼 때 유익한 사람이 된 것입니다.
함께 에베소서 4장을 봅시다. 그곳은 거듭남을 입은 자들의 변화된 삶을 구체적으로 보여주고 있습니다. 먼저 23절을 보면 “오직 너희의 심령이 새롭게 되어”라고 말합니다. 이는 거듭남을 의미합니다. 그리고 회심한 자의 특징을 서술합니다. 24절 이하입니다.
[ 24 하나님을 따라 의와 진리의 거룩함으로 지으심을 받은 새 사람을 입으라 25 그런즉 거짓을 버리고 각각 그 이웃과 더불어 참된 것을 말하라 이는 우리가 서로 지체가 됨이라 26 분을 내어도 죄를 짓지 말며 해가 지도록 분을 품지 말고 27 마귀에게 틈을 주지 말라 28 도둑질하는 자는 다시 도둑질하지 말고 돌이켜 가난한 자에게 구제할 수 있도록 자기 손으로 수고하여 선한 일을 하라 29 무릇 더러운 말은 너희 입 밖에도 내지 말고 오직 덕을 세우는 데 소용되는 대로 선한 말을 하여 듣는 자들에게 은혜를 끼치게 하라 30 하나님의 성령을 근심하게 하지 말라 그 안에서 너희가 구원의 날까지 인치심을 받았느니라 31 너희는 모든 악독과 노함과 분냄과 떠드는 것과 비방하는 것을 모든 악의와 함께 버리고 32 서로 친절하게 하며 불쌍히 여기며 서로 용서하기를 하나님이 그리스도 안에서 너희를 용서하심과 같이 하라 ](엡 4:24-32).
이러한 모습이 성령으로 사는 자의 모습으로서 하나님께 유익한 자가 된 삶의 모습입니다. 이 사실을 여러분의 마음 깊은 곳에 새기기를 바랍니다.
종교 개혁자 루터가 말했습니다. “우리는 모두 주님의 오네시모이다. 우리는 모두 하나님 앞에 무익한 사람들이었으나 회심함으로 이제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과 사람에게 유익한 자가 되었도다.”
사랑하는 여러분!
복음으로 인해 회심하려면 가장 먼저 주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해야 합니다. 그분의 십자가의 죽음이 나를 위한 하나님의 사랑이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인 사실을 성령 안에서 확신하셔야 합니다. 내가 얼마나 하나님과 사람에게 무익한 자인지를 성령 안에서 깨달으면서 더욱 그리스도를 필요로 할 때 회개와 함께 변화가 시작될 것입니다. 그 후 날마다 계속 말씀과 기도 가운데 그리스도와 연합하면 유익한 사람이 될 것입니다. 성경은 이러한 사람을 신령한 열매가 풍성한 사람이라고 부릅니다.
[ 4 내 안에 거하라 나도 너희 안에 거하리라 가지가 포도나무에 붙어 있지 아니하면 스스로 열매를 맺을 수 없음 같이 너희도 내 안에 있지 아니하면 그러하리라 5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라 그가 내 안에, 내가 그 안에 거하면 사람이 열매를 많이 맺나니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 것도 할 수 없음이라 ](요 15;4-5)
“오직 성령의 열매는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온유와 절제니 이같은 것을 금지할 법이 없느니라”(갈 5:22-23)
사랑하는 여러분!
오늘 이 예배를 통해 나는 나를 구원하신 주님께 어떤 유익한 자가 될까를 생각해 보기 바랍니다. 우리를 구원하시사 하나님의 나라와 우리의 이웃들에게 유익한 존재로 만들어 주신 하나님의 뜻을 기억하며, 우리 공동체인 가정과 교회와 사회에서 어떻게 유익을 끼칠까, 어떤 유익한 자가 될까를 고민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그러한 내용을 붙들고 기도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바울은 오네시모라는 버려진 한 영혼을 위대한 사람으로 변화시켰습니다. 우리 역시 바울처럼 무가치한 한 영혼을 주께 쓰임 받는 유익한 인생으로 바꾸어 낼 수 있습니다. 이는 그러한 사역은 바울이 하는 것이 아니라 바울 안에 살아계신 주 예수 그리스도의 영이 하시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사실 바울 역시 가장 무가치한 존재였으나 복음으로 변화된 오네시모였습니다. 그러므로 오네시모의 변화는 우리들의 변화이며 그 변화는 주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으로 인한 변화입니다. 우리 모두의 인생이 오네시모가 되기를 바랍니다. 또한 오네시모를 변화 시킨 바울처럼 우리의 남은 삶은 하나님께 항상 유익한 인생 되기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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