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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약 --------------------/미가

미 6장 6-8절(여호와께서 내게 구하시는 것은) - 허창수

by Preacher 2024. 1. 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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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6장 6- 8

여호와께서 내게 구하시는 것은

허창수 목사 13.07.21

동성교회 [창원시] https://https://cafe.daum.net/huhcs48/

 

‘스토킹’이란 말이 있습니다. ‘남의 뒤를 따라다니다’, ‘추적하다’는 말인데 상대방을 좋아해서 그를 따라다니는 것입니다. 시도 때도 없이 ‘내가 너를 좋아한다’, ‘너를 사랑한다’고 하며 따라다니는 것입니다. 이것을 진정한 사랑이라 할 수 있겠습니까? 이것은 사랑이 아니라 협박이고 고통입니다. 사랑한다면 그 사람이 무엇을 원하는 가를 알고 원하는 바를 따라야 진정한 사랑이 될 수 있는 것입니다.

 

우가가 하나님을 스토킹하고 있지 않습니까?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은 알려고 하지 않고 내 주관대로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자기 생각에 옳은 대로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것은 우리가 하나님이 원하시는 사랑을 하는 것이 아니라 스토킹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을 알고 사랑해야 진정한 사랑이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과 우리와의 생각이 다른 것은 진정한 사랑이 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을 사랑하기 위해서 하나님이 구하시는 것이 무엇인가를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구하시는 것이 무엇인가를 본문에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너희들이 나를 사랑하려면 이렇게 해라’고 가르쳐 주셨습니다. 이제 우리는 하나님이 구하시는 것이 무엇인가를 알고 그에 맞는 사랑을 하므로 하나님과 우리와의 진정한 사랑이 성립되도록 해야 합니다.

 

하나님이 구하시는 것을 알기 전에 원하지 않은 것을 먼저 말씀하셨습니다. 이미 이스라엘 백성들은 자기들 나름대로는 하나님을 잘 섬기고 있었습니다. ‘내가 무엇을 가지고 여호와께 나아가며 높으신 하나님께 경배할까’(6) 라고 했습니다. “내가 번제물로 일 년 된 송아지를 가지고 그 앞에 나아갈까”(6), 일 년 된 송아지는 율법에서 가장 귀한 제물로 규정하고 있습니다(출29:10-14). 이렇게 당시 이스라엘 백성들은 율법이 가르치는 대로 가장 귀한 제물로 일 년 된 송아지를 아낌없이 받쳤습니다.

 

일 년 된 송아지 한 마리로 부족하다고 느껴 “여호와께 천천의 숫양이나 만만의 강물 같은 기름을 기뻐하실까”(7)라고 하며 수많은 양과 기름을 제물로 바쳤습니다. 많은 제물을 바침으로써 하나님을 잘 섬긴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그것도 모자라 이제 “내 허물을 위하여 내 맏아들을, 내 영혼의 죄로 말미암아 내 몸의 열매를 드릴까”(7)라고 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자신들의 맏아들을 번제물로 삼으려는 열심까지 보였습니다. ‘내 몸의 열매’ 역시 자녀를 제물로 드리고자 생각을 하였던 것입니다.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 드리기 위해 자기 생각에 최고의 제물을 드리고자 했던 것입니다.

 

실제로 당시 이교도들은 자녀를 불태워 재물로 바쳤습니다. 사람을 불태우는 행위는 몰랙 신 숭배 때 등장하는 제사 방법으로서(렘18:31) 하나님께서는 절대로 금지하셨습니다(렘18:21).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교도적인 제사를 생각한 것은 그들이 이방의 우상 숭배 행위에 빠져 있었다는 것을 보여 줍니다.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올바른 신앙 지식이 없는 무조건적인 신앙 열심은 이교도적인 잘못된 신앙행위에 빠져들게 된다는 것입니다.

 

오늘의 교회와 성도들이 이교도적인 신앙에 물들어 있다는 것을 부정할 수 없습니다. 무엇을 하던, 어떻게 살든 그것을 문제 삼지 않고 헌금을 덤북 바치면 믿음이 좋다고 합니다. 그래서 헌금 많이 하는 것으로 믿음의 정도를 평가하는 것입니다. 남들이 쉽게 할 수 없는 거액을 바치면 그가 무슨 짓을 하든 그것을 별로 문제를 삼지 않습니다.

 

그럼 이렇게 많은 제물을 바친 백성들이 무엇을 어떻게 하며 살았습니까? “악인의 집에는 아직도 불의한 재물이 있느냐 축소시킨 가증한 에바가 있느냐 내가 만일 부정한 저울을 썼거나 주머니에 거짓 저울추를 두었으면 깨끗하겠느냐 그 부자들은 강포가 가득하였고 그 주민들은 거짓을 말하니 그 혀가 입에서 거짓 되도라”(10-12)라고 하나님은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한 마디로 ‘악인’이라고 하였습니다. 불의한 재물을 모았습니다. 저울추를 속였습니다. 아직도 그들의 주머니에는 속이려고 추를 숨기고 있었습니다. 그들이 모은 재물은 강포로 주민을 거짓으로 속여 모은 것 이였습니다. 그러면서 하나님께는 많은 제물을 바쳤던 것입니다.

 

이처럼 악한 삶을 살면서 하나님께 많은 제물을 바쳤습니다. 남을 속이고 빼앗은 것으로 제물을 바쳤습니다. 부정하게 모은 것으로 제물로 삼았습니다. 구약 시대의 백성들은 하나님께 나아오는 것은 제사와 제물이였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그 많은 제물의 제사를 기뻐하지 않았습니다.

 

이사야도 “너희의 무수한 제물이 내게 무엇이 유익하뇨 나는 숫양의 번제와 살진 짐승의 기름에 배불렀고 나는 수송아지나 어린 양이나 숫염소의 피를 기뻐하지 아니하노라 너희가 내 앞에 보이러 오니 이것을 누가 너희에게 요구하였느냐 내 마당만 밟을 뿐이니라”(사1:11,12)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이러한 제물들을 ‘헛된 제물’이라고 하셨고 가증히 여기신다고 하셨습니다. 그래서 그런 “헛된 제물을 다시 가져오지 말라”고 하셨습니다(사1:13). 하나님은 제물에 눈이 어둔 분이 아니십니다. 하나님은 그러한 가증스러운 제물을 보시고 믿음이 좋다고 하지 않으십니다. 자신들의 죄악된 행위에 대한 참 회개는 하지 않고 단지 많은 제물을 하나님께 드리는 것만으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줄로 생각하는 것은 실로 어리석고 무지한 자들입니다.

 

오늘 우리 사회가 부정과 부패로 가득찬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가끔 뉴스를 보다가 높은 관직에 있던 사람이 잡혀 가는 것을 자주 보게 됩니다. 그런데 그렇게 부정하고 축적해서 잡혀 가는 그 사람이 어느 교회 무슨 직분자라는 소개가 나올 때가 있습니다. 참으로 부끄러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이제 하나님은 우리에게 구하시는 것을 말씀하셨습니다. “사람아 주께서 선한 것이 무엇임을 네게 보이셨나니”(8)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선한 것이 무엇인가’를 가르쳐 주셨습니다. ‘선한 것’은 ‘여호와께서 구하시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앞에 많은 제물들은 여호와께서 구하지 않은 ‘악한 것’ 입니다. 이제 우리는 여호와께서 구하시는 것이 무엇인가를 알아보고자 합니다.

 

“여호와께서 구하시는 것은 오직 정의를 행하며 인자를 사랑하며 겸손하게 네 하나님과 함께 동행하는 것”(8)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다면 원하지도 않는 가증스러운 제물을 바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구하시는 이 세 가지를 행하여야 합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구하시는 첫 번째는 ‘정의를 행하는 것’입니다.

 

‘정의’는 하나님의 정의로우신 성품을 본받아 하나님 앞에서 올바른 삶의 도를 행하는 것입니다. ‘정의’는 편견이 있어서는 안 됩니다. 법원에 들어서면 현관 맞은 편 벽에 여인이 한 손에 저울추를 들고 다른 한 손에는 칼을 들고 눈을 가리고 있는 벽화를 볼 수 있습니다. 누구를 억울하게 하는 것은 정의가 될 수 없습니다. 추가 공평하지 않으면 정의가 깨어지는 것입니다. 사리사욕에 눈이 멀면 정의가 사라지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스라엘 백성들은 저울추를 속이고 또 속이기 위해서 주머니에 저울추를 숨기고 있었습니다. 정의를 행하지 않으므로 약한 자를 더욱 불행하게 만들었습니다. 이러한 행동은 하나님께서 원하지 않으십니다. 부정한 방법으로 속이고 돈을 많이 벌어 헌금을 많이 바친 것만으로 하나님을 잘 섬긴다고 생각하는 것은 참으로 어리석은 생각이 아닐 수 없습니다. ‘내가 무슨 일을 하든 하나님은 관계하지 마시고 복만 많이 주세요. 그러면 헌금도 더 많이 바치겠습니다’ 라는 생각으로 예배드리고 헌금을 하는 것은 하나님이 원하지 않습니다.

 

예레미야 5:1에 당시 예루살렘 성안에 사는 많은 사람들 가운데 정의를 행하는 사람이 한 사람도 찾을 수 없었다고 하나님은 탄식하셨습니다. “너희는 예루살렘 거리로 빨리 다니며 그 넓은 거리에서 찾아보고 알라 너희가 만일 정의를 행하며 진리를 구하는 자를 한 사람이라도 찾으면 내가 이 성읍을 용서하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정의를 행하는 사람들이 가장 많이 살아야 할 예루살렘 성안에 정의를 행하는 사람이 한 사람도 찾을 수 없었기 때문에 예루살렘은 망하고 말았습니다. 오늘의 교회에 정의를 행하는 사람이 없다면 그 교회는 하나님이 함께 하지 않을 것입니다. 정의를 행하지 않는 자의 예배는 하나님께서 받으시지 않으십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구하시는 것은 ‘정의를 행하는 것’입니다. 속이거나 편견을 하지 말고 바르게 정직하게 살아야 합니다. 저 사람은 의심할 바 없다는 인정을 받아야 성도다운 성도가 되는 것입니다.

 

두 번째로 ‘인자를 사랑하는 것’입니다(8).

 

‘인자’란 히브리어로 ‘헤세드’라고 하는 데 윗사람으로서 아랫사람에게 베푸는 모든 친절하고 자비로운 행위를 가르치는 말입니다. 실로 아무런 자격도 없는 죄인들을 하나님의 백성으로 삼으시는 하나님의 무한한 인자를 체험한 우리들은 마땅히 다른 사람들에게 인자를 베풀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지금도 우리에게 인자를 사랑하기를 구하십니다. 그런데 친절을 베풀지 못하고 베푸는 자비를 찾아보기가 어렵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으로부터 인자하심으로 베푸는 사랑을 받았습니다. 받을 만한 자격이 있어서 받은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 앞에 아무른 가치도 자격도 없는 죄인들을 자기 백성 삼으시고 지금도 사랑하시는 하나님의 무한한 인자하심을 받았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도 다른 사람에게 인자를 베풀 수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구하시는 것이 바로 우리가 인자를 베푸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어떻습니까? 인자를 베풀기는 커녕 조금이라도 손해를 보지 않으려고 합니다. 말 한 마디도 지지 않습니다. ‘인자한 말을 가지고 사람을 감화 시키며 갈 길을 잃은 무리를 잘 인도하게 하소서’라고 찬송을 잘 부릅니다. 그러면서 내가 하는 말은 정말로 인자한 말이라고 할 수 있습니까? 다른 사람의 인격을 깎아 내리고 마음에 상처를 주는 말은 하지 않습니까? 하나님은 지금 우리에게 무엇을 구하십니까? 인자를 사랑하는 것을 구합니다. 자비를 베푸는 것을 구합니다. 인자한 말을 하므로 많은 사람들에게 용기와 희망을 주는 자가 되기를 구합니다. 인자가 있어야 용서가 있고 품어주는 사랑이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곧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세 번째로 하나님은 겸손히 하나님과 함께 행하는 것을 구하십니다.

 

‘하나님과 함께 행하는 것’은 하나님과 함께 길을 걷는 것입니다. 하나님과 함께 동행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과 함께 동행하려면 내가 겸손해야 합니다. 겸손하지 못하면 하나님은 함께 동행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나와 함께 동행한다는 사실을 알면 겸손해 질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전지전능하시고 나는 아무것도 아닌 죄인일 뿐이라는 것을 알게 될 때 감히 교만할 수 없습니다. 겸손은 하나님 앞에서 자기 자신의 정체를 바로 알고 그에 합당하게 사는 것입니다. 반대로 인간이 가지는 일체의 자랑은 하나님과 원수가 되게 하는 교만입니다. 설사 사람이 정의와 인자를 즐거이 행한다 할지라도 이 행함을 통해서 스스로 된 줄로 생각한다면 이 또한 하나님이 싫어하시는 바가 될 것입니다.

 

인간관계에서 ‘미안하다’, ‘내가 잘못했다’고 말을 잘 하지 않습니다. 나를 조금 낮추면 문제는 해결 될 수 있는데 그게 잘 안 됩니다. 스위스에 쯔잉글리는 산길 아주 좁을 길은 가다가 염소 한 마리가 내려 오고 또 다른 염소 한 마리는 위로 올라가는 것을 보았습니다. 길이 너무 좁아 비켜 갈 수가 없는 곳에서 어떻게 하는가를 보았습니다. 서로 맏붙어 싸울 줄 알았는데 조금 큰 염소가 납작 엎드리니까 다른 염소가 엎드린 염소를 밟고 넘어 가는 것을 보았습니다. 이것을 본 쯔잉글리는 ‘엎드리면 내가 살고 남도 사는 구나’를 깨달았다고 합니다. 겸손하고 낮아지는 것이 곧 살길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답니다. 내가 낮아 질 때 축복의 길이 열리는 것입니다. 겸손해야 하나님과 길을 함께 갈 수 있습니다. 내가 낮아지기만 하면 하나님이 나와 함께 동행하시고 은혜를 베풀어 주십니다. 내가 엎드리면 하나님으로부터 사랑을 받습니다.

 

하나님이 구하시는 것은 무수한 제물을 바치는 것이 아닙니다. 여호와께서 우리에게 구하시는 것은 예배드리기 전에 인간관계에서 내가 정의를 행하는 것입니다. 인자를 베풀고 사랑하는 것입니다. 낮아지고 겸손할 때 하나님이 함께 동행하십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이것을 구하십니다. 우리 모두 하나님이 구하시는 것을 하므로 하나님을 진정 사랑하는 성도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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