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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약 --------------------/미가

미 7장 1-13절(나를 구원하시는 하나님을 바라보리라) - 허창수

by Preacher 2023. 9.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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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7장 1- 13

나를 구원하시는 하나님을 바라보리라

허창수 목사 5.03.01 1

동성교회 [창원시] https://https://cafe.daum.net/huhcs48/

 

요즘 우리 사회는 끔찍한 사건 사고들이 많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엽총으로 형의 가족을 죽이고 자신도 자살하는 사건과 동거녀와 일가족을 총으로 죽이는 사건이 있었습니다. 살기가 힘들다며 차 안에서 아내와 자녀들을 죽이고 자신도 자살하는 사건도 있었습니다. 그런가 하면 이웃집에 불을 지르기도 하고, 묻지마 살인 사건까지도 자주 일어나고 있습니다. 멀쩡한 도로가 꺼져 두 사람이 땅 밑으로 떨어지는 사건을 비롯해서 자동차가 달리는 도로 밑에도 빈 공간이 많이 있다고 합니다. 한 마디로 ‘재앙이로다’라고 탄식해야 할 세상입니다.

 

지금부터 약 2700여 년 전에 미가 선지자가 살던 때도 심히 부패하고 타락하였습니다. 미가 선지자는 당시 이스라엘의 타락을 한 마디로 “재앙이로다”(1)라고 말했습니다. 그리고 당시 무엇이 얼마나 부패하였는지를 세 가지로 지적하였습니다.

 

첫째로 백성들 가운데 경건한 자와 정직한 자가 없었습니다(1,2). 2절에 “경건한 자가 세상에서 끊어졌고 정직한 자가 사람들 가운데 없도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경건한 자’는 하나님을 경외하면서 이웃을 사랑하는 자들입니다. 백성들을 신앙적으로 가르치고 사랑해야 할 경건한 자들이 타락하고 부패하여 형제를 잡으려고 하였습니다.

 

‘정직한 자’는 ‘목표를 향하여 똑바로 가는 자’란 뜻으로 율법을 지키며 좌로나 우로 치우치지 않고, 거룩한 도리를 똑 바로 준행하는 신실한 자입니다. 그런데 이스라엘 백성들 가운데는 ‘정직한 자’가 없었습니다. 하나님을 섬기고 인도해야 할 경건한 자와 바른길로 인도해야 할 정직한 자가 없으므로 “무리가 다 피를 흘리려고 매복하며 각기 그물로 형제를 잡으려고 하고”있었습니다. 안심하고 살 수가 없는 타락하고 부패한 세상이였습니다.

 

이렇게 부패하고 타락한 세상이 되므로 백성들의 삶은 어떠했습니까? 마치 추수를 다 해버리고 먹을 것을 얻지 못하여 탄식을 하였습니다. 오늘의 현실은 하나님을 경외하며 성도들에게 진리를 가르치고 인도하는 ‘경건한 자’와 ‘정직한 자’가 과연 얼마나 있느냐는 것입니다. 오히려 자기 욕심만을 채우려고 하는 현실을 부인할 수 없는 세상입니다. 한 마디로 ‘재앙이로다’라고 말할 수밖에 없는 현실입니다.

 

두 번째로 지도자들이 자신들의 직무를 바로 행하지 않았습니다(3,4). “두 손으로 악을 부지런히 행하는도다 그 지도자와 재판관은 뇌물을 구하며 권세자는 자기 마음의 욕심을 말하며 그들이 서로 결합하니”(3)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지도자’와 ‘재판관’, ‘권세자’는 법과 공의를 바로 잡고 시행해야 할 의무를 맡은 통치자들입니다. 그런데 그들이 뇌물에 따라 판단하는 사법권이 타락해 버렸습니다. ‘지도자’와 ‘재판관’, ‘권세자’들은 백성들에게 지대한 영향을 미치는 자들입니다. 그들이 타락하므로 사회 전체의 타락을 가져오게 된 것입니다.

 

얼마 전에 국회 청문회를 백성들이 보았습니다. 털어도 먼지도 안 날 것처럼 당당하던 사람이 지난날의 비리를 찾아냈을 때 자신의 잘못을 시인하고 사과를 한 두 번이 아니라 몇 번이나 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렇다면 청문회를 이끄는 의원들은 과연 어떨까요? 그들도 청문회 자리에 앉으면 조금도 다를 바 없다고 생각합니다.

 

4절에 “그들의 가장 선한 자라도 가시 같고 가장 정직한 자라도 찔레 울타리보다 더 하도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는 그 당시 도덕적 수준이 어느 정도였는가를 알 수 있습니다. 한 두 사람이나 일부 계층에 국한 된 것이 아니라 사회 전체에 만연되었다는 말씀입니다. 가장 선하고 정직해야 할 사람들이 오히려 가시와 찔레처럼 무자비하게 사람들을 찔렀습니다. 선한 자나 정직한 자를 한 사람이라도 찾을 수가 없었습니다.

 

세 번째로 친구, 부모, 자식 및 형제들의 관계가 파괴되었습니다(5,6). 이웃과 친구, 부모와 자식, 형제는 가장 기본적인 인관관계입니다. 가장 기본적인 혈연관계에 있는 사람들조차도 신뢰할 수 없다고 했습니다. “너희는 이웃을 믿지 말며 친구를 의지하지 말며 네 품에 누운 여인에게라도 입의 문을 지킬지어다”(5)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아들이 아버지를 멸시하며 딸이 어머니를 대적하며 며느리가 시어머니를 대적하리니 사람의 원수가 곧 자기의 집안 사람이리로다”(6)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가장 신뢰하고 안전해야 할 가정에서 조차 진실과 신뢰를 상실했습니다. 예수님께서도 세상 끝날이 가까워 올 때 이처럼 부모와 자식, 형제간에 원수가 될 것을 말씀하셨습니다(마10:35).

 

요즘 우리 사회에 ‘쓰죽회’라는 모임이 있답니다. 자신이 모은 재산을 ‘다 쓰고 죽는 모임’이라고 합니다. ‘재산을 자녀들에게 안주면 맞아 죽고, 다 줘버리면 굶어 죽고, 조금씩 주면 더 달라고 쪼여서 죽는다’고 합니다. 이래도 죽고 저래도 죽을 바에 맞아 죽는 게 제일 낫다고 해서 자기가 모은 재산을 다 쓰고 죽을 것이라고 하는 사람들의 모입이 ‘쓰죽회’라고 합니다. 오늘의 현실을 잘 말해준다고 할 수 있습니다. 참으로 한심한 세상이 아닐 수 없습니다.

 

여러분은 생명보험을 가입할 때 누구의 이름으로 가입하고 그 보험금 수령자가 누구의 이름으로 가입합니까? 돈에 눈이 어두우면 남편도 아내도 자식도 부모도 죽이는 세상입니다. 보험금 때문에 남편이 아내를, 아내가 남편을 죽이는 사건을 심심찮게 일어나고 있습니다. 하물며 자식이 부모를 죽이고, 부모가 자식을 죽이는 일도 있습니다. 부부는 어떻습니까? “네 품에 누운 여인에게라도 입의 문을 지킬지어다”(5)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누구 한 사람 믿고 바라볼 수 없는 세상임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어느 한 사람도 믿고 바라보아야 할 존재가 없다는 말씀입니다. 미가가 살았던 시대뿐 아니라 오늘날도 조금도 다를 바 없습니다. 누구를 믿고 바라보며 살 수 없는 세상입니다.

 

젊은 부인이 남편이 죽고 유복자 아들 하나를 바라보고 살았습니다. 재혼하지 않고 자신을 희생하며 키운 아들입니다. 오로지 아들만 바라보고 일생을 살았습니다. 그렇다면 그 아들이 성장해서 어머니가 바라는 만큼 어머니를 실망시키지 않고 잘 하느냐는 것입니다. 그렇게 키운 아들이 어머니에게 원수가 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이제 미가 선지자는 말합니다. ‘오직 나는 여호와를 우러러보며 나를 구원하시는 하나님을 바라보리라’(7)라고 외쳤습니다. ‘우러러본다’는 말은 ‘높여 존귀하게 본다’는 의미입니다. ‘바라본다’는 말은 ‘믿고 기다린다’는 뜻입니다. 기다리다 지쳐도 포기하지 않고 기다린다는 뜻이 내포된 말입니다. 하나님을 우러러 보며 바라본다는 것은 하나님을 최고의 높은 분으로 존귀하게 믿고 기다리겠다는 의지를 나타내는 말입니다.

 

부산 태종대 바다가에 바위 하나가 우뚝 서 있습니다. 고기잡으러 나간 남편이 돌아오기를 기다리는 신부가 기다리다 바위가 되었다는 이야기와 함께 ‘망부석’이라고 부릅니다. 남편은 이미 바다에 빠져 죽었지만 부인은 그래도 돌아오기를 바라보고 서 있다고 합니다.

 

진도 팽목항에는 세월호 침몰로 죽은 가족을 기다리는 사람들이 먼 바다를 바라보고 아직도 기다리고 있다고 합니다. 침몰된 세월호를 건져 올리면 혹 죽은 시체라도 찾을 수 있을 것이라고 바라보고 기다리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죽은 가족을 바라보고 기다립니다.

 

미가 선지자는 죽어 돌아올 수 없는 존재를 우러러보며 바라보는 것이 아닙니다. 구원하시는 하나님을 바라보는 것입니다. 미가 선지자가 우러러보며 바라보는 하나님은 어떤 분이십니까? 미가는 ‘나를 구원하시는 하나님을 바라보리라’고 말했습니다. ‘나를 구원하시는 하나님’은 단회적인 구원이 아니라 현재 진행형으로 계속하여 영원히 구원해 주시는 하나님이심을 뜻합니다. 하나님은 나를 계속 영원히 구원하시는 분이십니다. 죄에서 구원하시고 역경에서 구원하시고 환란에서 구원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나와 여러분을 구원하시는 하나님이시므로 우리도 하나님을 우러러보고 바라보아야 합니다.

 

우리가 우러러보며 바라보는 하나님은 어떤 분십니까? “나의 하나님이 나에게 귀를 기울이시로다”(7)라고 미가는 말씀하였습니다. 미가는 ‘나의 하나님’이라고 했습니다. 무엇보다도 하나님이 ‘나의 하나님’이 되셔야 합니다. 많은 사람들은 하나님을 ‘나의 하나님’이라고 부르지 못합니다. 그러나 성도는 하나님을 ‘나의 하나님’이라고 부릅니다. 나의 하나님이 나에게 귀를 기울이십니다. 나의 소원을 들어 주시려고 나에게 귀를 기울이십니다. 나에게 귀를 기울이시는 하나님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하나님은 지금도 나에게 귀를 기울이십니다. 나에게 귀를 기울이시는 하나님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하나님은 내가 엎드러질지라도 일으켜 주시기 때문에 바라보아야 합니다. “나의 대적이여 나로 말미암아 기뻐하지 말지어다 나는 엎드러질지라도 일어날 것이요”(8). ‘엎드러진다’는 말은 실패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내가 잘못해서 실패하여도 하나님은 나를 일으켜 세워주십니다. 그래서 대적이 내가 엎드러져 실패하였을 때 기뻐하지 말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은 나를 반드시 일으켜 세워 주십니다.

 

하나님은 나의 빛이 되시기 때문에 바라보아야 합니다(8,9). 혹 내가 어두운 데 앉을지라도 하나님은 나의 빛이 되시고, 광명으로 인도해 주십니다. “내가 여호와께 범죄하였으니 그의 진노를 당하려니와 마침내 주께서 나를 위하여 논쟁하시고 심판하시며 주께서 나를 인도하사 광명에 이르게 하시리니 내가 그의 공의를 보리로다”(9)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미가는 자신이 죄를 지을 수 있는 존재라는 것을 솔직히 고백하였습니다. ‘내가 어두운데 앉을지라도’라는 말은 ‘내가 죄 가운데 빠졌을지라도’라는 말입니다. 우리는 죄와 무관한 사람이 아닙니다. 죄를 범할 수밖에 없는 연약한 존재들입니다. 내가 죄를 범했을지라도 주께서 나를 위하여 논쟁하여 주십니다. ‘논쟁하신다’는 말은 ‘재판하여 좋은 결과가 나오기까지 주께서 나의 죄를 대신 지시고 십자가에 달려 죽으셨다는 것을 손에 못자국을 보여주며 증명해 주신다’는 말씀입니다. 그래서 내가 죄를 범했지만 용서함을 받은 자로서 광명으로 이르게 하십니다. 죄로 인한 형벌을 받지 않을 뿐 아니라 나를 죄에서 구원해 주시는 분이십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나를 조롱하고 대적하는 이를 부끄럽게 하시기 때문에 바라보아야 합니다. “나의 대적이 이것을 보고 부끄러워하리니 그는 전에 내게 말하기를 네 하나님 여호와가 어디 있느냐 하던 자라 그가 거리의 진흙 같이 밟히리니 그것을 내가 보리로다”(10)고 말씀하셨습니다. 나를 보고 ‘너의 하나님 여호와가 어디 있느냐’고 조롱하던 대적들을 하나님이 엎으시고 사람들의 발에 밟히도록 하십니다.

 

하나님은 나를 든든히 지켜주시고 지경을 넓혀 주시기 때문에 바라보아야 합니다. “네 성벽을 건축하는 날 곧 그 날에는 지경이 넓혀질 것이라”(11)고 말씀하셨습니다. ‘성벽을 건축하는 날’은 더 이상 악한 세력이 침범하지 못하도록 튼튼한 성벽을 건축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안전한 보호를 의미합니다. 어떤 악한 대적이라도 침범하지 못하도록 든든히 나를 지켜주시는 하나님이십니다. 그리고 지경을 넓혀주십니다. 지경을 넓혀주시는 것은 큰 축복을 의미합니다.

 

하나님은 나를 구원하시는 분이십니다. 우리의 소원을 들어 주시기 위해 귀를 기울이시는 분이십니다. 엎드러질지라도 일으켜 세워주시는 분이십니다. 범죄하여 어두운데 앉을지라도 논쟁하시어 광명으로 인도해 주시는 분이십니다. 나를 비웃던 대적을 발에 밟히도록 진흙에 엎으시는 분이십니다. 그리고 나를 안전하게 지켜주시며 지경을 넓혀 주시는 분이십니다.

 

이와 같이 나를 구원해 주시는 하나님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하나님을 바라본다는 것은 하나님에 대한 절대적인 믿음입니다. 하나님 외 그 어떤 존재도 믿고 바라 볼 수 없다는 믿음의 고백입니다. 그리고 바라본다는 것은 미래를 기다리는 신앙입니다. 지금 눈앞에 나타나지 않는다 할지라도 그 언젠가 반드시 나타나실 것을 믿고 기다리는 것입니다. 오늘 많은 사람들이 기다리지 못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기다리지 못하는 것은 믿음이 없기 때문입니다. 믿음이 없다는 것은 우러러 바라보아야 할 존재가 없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바라보는 것은 돌아올 수 없는 죽은 남편을 기다리는 망부석이 아닙니다. 하나님을 우러러 바라보는 자들은 절대로 실망하지 않습니다. 우리가 바라보고 기다리는 주님은 반드시 오셔서 ‘나의 사랑하는 자여 나아오라 나와 함께 영원히 살자’고 하시며 영원한 천국으로 인도하여 들이실 것입니다. 우리도 “오직 나는 여호와를 우러러보며 나를 구원하시는 하나님을 바라보나이다”라고 고백을 합시다. 그래서 하나님을 우러러 바라보는 나와 여러분에게 하나님의 구원하시는 축복을 받을 수 있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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