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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약 --------------------/미가

미 6장 6-8절(여호와께서 구하는 것) - 허창수

by Preacher 2024. 6. 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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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6장 6 - 8

여호와께서 구하는 것

허창수 목사 15.11.15

동성교회 [창원시] https://https://cafe.daum.net/huhcs48/

 

오늘 추수감사절을 지키면서 어떤 말씀을 해서 은혜를 받고 감사헌금을 많이 받칠 수 있도록 할까를 생각하며 설교를 준비하려고 했습니다. 그래서 지난주일에는 어떠한 감사로 보답하는 것이 하나님께 진실된 감사가 될 수 있을 가를 찾아보았습니다. 그런데 감사헌금을 많이 받쳐야 하나님께 보답하는 것이라는 말씀은 찾지 못했습니다.

 

바울은 데살로니가 교회가 말씀을 바로 받고 성숙한 교회로 성장한다는 것을 알고 하나님께 보답하는 감사로 데살로니가 교회의 부족한 믿음을 위해서 기도하는 것과 사랑이 충만한 교회가 되며, 주님 오실 때 흠 없이 설 수 있는 성도들이 되기를 바라고 기도를 했습니다.

 

오늘은 여호와께서 우리에게 구하시는 것이 무엇인가를 찾아보았습니다. 하나님께서 구하시는 것을 받치는 것이 진정한 감사가 될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미가 역시 여호와께서 우리에게 구하는 것은 많은 제물이나 많은 헌금이 아니라는 것을 가르치고 있습니다.

 

미가는 이사야와 같은 시대에 활약을 했습니다. 당시 이스라엘 자손들은 정치적으로나 경제적으로 많은 어려움을 당했습니다. 북쪽에는 강대국 바벨론이 위협하고 있었고 남쪽에는 애굽이 괴롭히고 수리아 역시 이스라엘을 괴롭혔습니다. 이렇게 되고 보니 이스라엘 자손들은 바벨론에 속한 사람, 애굽에 속한 사람, 또는 수리아에 속한 사람, 어디에 속한 사람 ... 이렇게 정치적인 배경을 업고 날뛰었습니다.

 

종교마져도 속속들이 병들었습니다. 거짓 선지자들이 설치는가 하면 제사장들은 형편없이 타락했습니다. 출애굽의 역사를 자랑하였습니다. 아브라함의 하나님, 모세의 하나님, 다윗의 하나님, 다윗 왕국을 세우신 하나님을 믿고 있으면서, 진실이 없는 의식만 남게 되었습니다. 회개 없는 제사만 성행하였습니다.

 

어쩌면 오늘 우리 한국의 정치 경제 문화 그리고 종교가 당시 이스라엘과 비슷하다고 봅니다. 특별히 기독교가 타락했습니다. 하나님 앞에 많은 제물을 드림으로 복을 받을 것이다. 많이 받치면 많이 주실 것이라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그래서 오늘도 교회마다 감사 헌금을 많이 받치도록 설교를 할 것입니다.

 

이사야는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되 너희의 무수한 제물이 내게 무엇이 유익하뇨 나는 숫양의 번제와 살진 짐승의 기름에 배불렀고 나는 수송아지나 어린 양이나 숫염소의 피를 기뻐하지 아니하노라”, 그리고 하나님은 ‘헛된 제물을 다시 가져오지 말라’(사1:11;13)고 하였습니다.

 

이 말씀을 보면 당시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께 제물을 많이 받쳤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제물을 많이 받치면 많은 복을 받을 것이라는 믿음에서 받친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서도 “내가 무엇을 가지고 여호와 앞에 나아가며 높으신 하나님께 경배할까 내가 번제물로 일 년 된 송아지를 가지고 나아갈까 여호와께 천천의 숫양이나 만만의 강물 같은 기름을 기뻐하실까 내 허물을 위하여 내 맏아들을, 내 영혼의 죄로 말미암아 내 몸의 열매를 드릴까”(6,7) 라고 했습니다.

 

하는 최고의 번제물입니다. ‘천천의 숫양이나 만만의 강물 같은 기름을 드리면 기뻐하실까’. 한 마리의 양 보다는 수천마리의 양이면 더 많고 더 좋아 하실 것이라고 믿었습니다. 양 보다도 ‘내 맏아들을 제물로 드릴까’라고 했습니다. 이교도들은 ‘맏아들’이 제물 중에 최고의 제물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자신의 잘못한 허물을 맏아들을 제물로 드리므로 용서 받기를 원했던 것입니다.

 

우리가 어릴 때 초등학교 교과서에서 ‘에밀레종’에 대한 이야기가 있었던 것으로 생각합니다. 종소리가 ‘에밀레’ 하고 맑고 청아한 소리가 울리기 때문에 ‘에밀레종’이라고 하였답니다. 신라 제35대 경덕왕 때 아버지 성덕왕의 은혜와 공덕을 영원토록 기리기 위한 좋은 방법을 고민하던 중 경덕왕은 신라에서 가장 크고 아름다운 종을 만들어 종소리를 통해 부왕의 공덕을 널리 널리 알리기로 결심했습니다.

 

12만 근의 쇠덩어리를 전국에서 모아 종을 만들기 시작할 때 봉덕사의 주지 스님이 꿈속에서 맑고 아름다운 종소리를 내기 위해서는 세상의 때가 묻지 않은 어린 아이가 필요하다는 신비한 이야기를 듣고 어린 아이를 펄펄 끓는 쇳물 속에 넣어서 종을 만들었더니 그 종소리가 ‘에밀레’ 하는 소리가 나게 되었다는 전설이 있습니다. 이교도들은 아들을 제물로 바치는 것을 최고라고 믿었습니다.

 

미가 당시에도 이스라엘 백성들도 일 년 된 어린 양, 천천의 숫양이나 만만의 강물 같은 기름을 가지고 여호와 앞에 나아갈까? 아니면 내 맏아들을 제물로 드릴까? 라고 했습니다. 오늘의 한국 교회가 무엇을 가르치고 있습니까? 남들이 할 수 없는 많은 헌금을 하면 하나님께서 기뻐 받으시고 많은 복을 주신다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집을 팔아서라도 헌금하면 큰 복을 받을 것이라고 합니다.

 

하나님을 잘 믿는 사람이 어떤 사람입니까? 열심히 기도하는 것 좋은 일입니다. 찬송을 열심히 부르는 것도 좋습니다. 손벽치면서 하나님 앞에 소리높이 찬양하는 것도 좋습니다. 봉사하는 것, 헌금을 많이 하는 것 좋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이러한 것들로 믿음이 좋은 사람이라고는 하지 않습니다.

 

그럼 믿음이 좋은 사람은 어떤 사람입니까? 잘 믿는 사람은 그 사람을 가까이 하는 사람들로부터 신뢰를 받고 존경을 받을 만한 신앙적 인격이 되어 있을 때에 그 사람이 예수 잘 믿는 사람입니다. ‘저 사람을 보니 나도 예수 믿어야 되겠다’ 이런 마음을 우러나게 해 준다면 그 사람이 믿음 좋은 사람입니다. 예배의 행위에서보다는 교회 밖에서 그 사람의 일상생활 속에서 믿음의 평가가 나오는 것입니다. 예배드릴 때는 찬송을 잘 부르고 기도도 잘 하는 사람이 교회 밖에서 사회생활이 모범이 되지 않으면 믿음이 좋은 사람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6절 말씀을 보면 “내가 무엇을 가지고 여호와 앞에 나아가며 높으신 하나님께 경배할까” 그 답은 일 년 된 송아지도 아니였습니다. 천천의 숫양이나 만만의 기름도 아니였습니다,

 

30여 년 전에 한국 교회에 ‘일천 번제’라는 것을 교묘하게 이용하여 교인들로부터 헌금을 짜내는 일이 있었습니다. 솔로몬과 같은 복을 받으려면 일천번제를 드려야 한다고 가르쳤습니다. 교인들은 일천번제를 드리기로 작정을 했습니다. 그러나 많은 성도들이 시험에 들었습니다. 성경말씀을 교묘하게 이용하여 성도들을 유혹하는 변질된 신앙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맏아들은 최고의 제물이라고 생각을 했습니다. 그러나 맏아들을 번제물로 받침도 하나님이 구하시는 것이 아니였습니다. 내 몸의 열매를 드림도 아니였습니다. 무수한 제물을 받침을 여호와께서 구하시는 것이 아니라고 하셨습니다.

 

그럼 여호와께서 구하시는 것이 무엇입니까? “오직 정의를 행하며 인자를 사랑하며 겸손하게 네 하나님과 함께 행하는 것” 입니다. 예배와 헌금을 무시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교회 밖에서 성도로서 어떤 모습으로 살고 있느냐를 묻고 있습니다.

 

물건을 사고 파는 시장에서 사람들의 본성이 잘 드러납니다. 하나님께서 성도들에게 구하시는 것은 교회 안에서 찾지 않았습니다. 교회 밖에서 특별히 물건을 사고 파는 시장에서 성도들이 정의를 행하는 가를 보십니다. “악인의 집에 아직도 불의한 재물이 있느냐 축소시킨 가증한 에바가 있느냐 내가 만일 부정한 저울을 썼거나 주머니에 거짓 저울추를 두었으면 깨끗하겠느냐 그 부자들은 강포가 가득하였고 그 주민들은 거짓을 말하니 그 혀가 입에서 거짓되도다”(10-12)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여기서 우리가 생각해야 할 것은 저울을 속이고 번 돈으로 하나님께 제물로 드리는 것을 하나님은 기뻐하지 않으신다는 것을 알 수가 있습니다. 속이고 번 것이 제물이 될 수 없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저울을 속이고 번 돈은 합당한 제물이 될 수 없다는 말씀입니다. 저울은 정의를 상징합니다. 저울은 추가 정확해야 합니다. 공정한 추가 있는데도 다른 것을 몰래 주머니에 넣고 있다가 몰래 바꿔치기 하여 불의한 재물로 축제한 것을 제물로 많이 바치는 것은 하나님이 구하는 것이 아니라는 말씀입니다.

 

요즘 방송에서 ‘착한 식당’을 찾는 프로를 보면서 많은 식당들이 손님을 속이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수입쌀을 국내산으로 속이는 것이나, 부정식품으로 손님을 속이는 것을 많이 봅니다. 살아있는 생선을 사서 횟집에서 회를 쳐 달라고 하면 몇 마리는 숨기는 것은 예사라는 것입니다. 이러한 것들이 정의를 행하지 않는 것입니다. 오늘의 사회에서 정의를 찾아보기가 어렵습니다. 어떻게 하면 속지 않을까를 생각하지만 속고 사는 것뿐입니다.

 

하나님이 성도들에게 구하는 것은 정의를 행하는 것입니다. 정직한 삶입니다. 속이지 않고 정의롭게 사는 것입니다. 성도로서 정의를 행하는 것입니다. 정의를 행하지 않고 찬송을 잘 부르고 기도를 열심히 하는 것은 위선입니다.

 

부산에 어느 교회 집사님이 시장에서 과일 장사를 하는데 몇 여자분들이 와서 과일을 고르면서 ‘사모님, 권사님, 집사님’이라고 부르는 것을 보아 교인이라는 것을 알고 지켜보았더니, 값을 엄청 깎더랍니다. 팔아도 이익보다는 손해가 될 정도라서 안된다고 했더니 그만 가버리더랍니다. 싫컨 물건을 뒤지다가 돌아가는 그들을 보고 쫓아가서 따귀를 치고 쉽더라고 하는 말을 들었습니다. 교인이라는 것을 표를 내면서 자기 욕심만 챙기려는 것은 하나님이 과연 기뻐하실까요?

 

정의를 행하는 것은 정직하게 사고 파는 것입니다. 우리나라는 ‘되’ 문화입니다. 저울은 냉정하게 느끼지만 되는 정이 있습니다. 쌀을 이웃집에서 살 때 되를 싹 깎아서 주는 집이 있는가 하면 어떤 집은 고봉으로 줍니다. 그래서 우리나라는 고봉문화라고 합니다. 고봉은 두 번 세 번 더 올려도 더 오르지 않지만 그래도 더 주고 싶은 마음이 있습니다. 이런 것에서 정을 느끼게 됩니다.

 

다음으로 하나님이 구하시는 것은 ‘인자를 사랑하는 것’입니다. ‘인자를 사랑하는 것’은 보통 사랑과는 좀 다릅니다. ‘인자’란 원문으로 ‘헤세드’라고 하는데 ‘윗사람으로서 아랫사람에게 베푸는 모든 친절하고 자비로운 행위를 가리킵니다. 아무런 자격이 없는 죄인들을 당신의 백성으로 삼으시는 하나님의 무한한 사랑이 인자의 사랑입니다. 성도는 하나님으로부터 인자의 사랑을 받았으니 마땅히 다른 사람들에게 동일한 인자의 사랑을 베풀어야 합니다.

 

인자를 사랑하는 것은 일반적인 사랑이 아닙니다. 절대적인 사랑이요 불변의 사랑이요, 큰 사랑입니다. 어른스러운 사랑입니다. 아버지가 아들을 사랑하는 사랑입니다. 탕자의 아버지가 탕자를 그리워하고 기다리는 사랑입니다. 탕자가 돌아왔을 때 탓하지 않고 반가이 맞아주며 품에 안아주는 사랑입니다. 어머니가 어린 아이를 돌아보고 위해 주는 사랑과 같은 사랑입니다. 오래 오래 기다려 주는 사랑, 너그럽게 용서하고 품어 주는 사랑이 인자를 사랑하는 것입니다.

 

사랑으로 때리는 매는 누가 마다하겠습니까? 사랑으로 꾸짖는 것이라면 누가 듣지 않겠습니까? 호세아 6:1절에 “여호와께서 우리를 찢으셨으나 도로 낫게 하실 것이요, 우리를 치셨으나 싸매어 주실 것임이라”고 하셨습니다. 이것이 사랑입니다. 오늘날에 문제가 무엇입니까? 사랑이 문제입니다. 사랑한다는 말은 많지만 이기적인 사랑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구하시는 것은 인자의 사랑입니다.

 

다음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구하시는 것은 ‘겸손하게 하나님과 함께 행하는 것’입니다. 겸손은 하나님과 함께 행하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교만은 하나님이 물리치십니다. 그러나 겸손은 하나님과 함께 행하는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아무런 가치가 없는 자임을 인정하고, 자기 안에 선한 것이 있다면 그것이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것임을 인정하고 감사드리는 것이 겸손입니다. 겸손하게 하나님 앞에서 자기 자신의 정체를 바로 알고 그에 합당하게 사는 것입니다.

 

8절에 “오직 정의를 행하며 인자를 사랑하며 겸손하게 네 하나님과 함께 행하는 것이 아니냐”라고 하였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눈여겨보아야 할 말씀은 ‘오직’이라는 말씀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구하시는 것은 이것들 말고는 없다는 말씀입니다. 지금도 하나님은 우리에게 정의를 행하기를 구하시고 인자를 사랑하며 겸손하게 하나님과 함께 행하는 것을 구하십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구하시는 것을 바칠 수 있어야 합니다. 정의를 바치고 인자의 사랑을 바치고 겸손을 바치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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