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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약 --------------------/민수기

민 20장 1-13절(내 거룩함을 나타내지 아니한 고로) - 허창수

by Preacher 2025. 3. 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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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20장 1 - 13

내 거룩함을 나타내지 아니한 고로

허창수 목사 15.06.07

동성교회 [창원시] https://https://cafe.daum.net/huhcs48/

 

제가 동성교회 성도 여러분과 인연을 가진지가 약 40년이 되었습니다. 40년의 지나간 날을 돌이켜보니 그때 그분들 대부분이 돌아가시고 남은 분은 몇 분 되지 않습니다. 한 세대는 지나가고 새로운 세대가 교회를 지키고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의 광야 40년, 많은 사람이 죽고 태어났지만 여전히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따라 가나안을 향하여 여행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애굽에서 나온 사람 대부분이 광야에서 죽고 여호수아와 갈렙 두 사람만 가나안에 들어갔습니다. 그리고 광야에서 태어난 제 2세들이 가나안에 들어갔습니다.

 

출애굽과 광야 40년 동안 잊어서는 안 되는 사람을 말하라고 하면 모세와 형 아론과 누이 미리암, 삼남매입니다. 그런데 이들 삼남매가 이스라엘 백성을 인도하는 일을 최선을 다했지만 가나안에 들어가지 못하고 죽었습니다. 미리암은 가데스에서 죽고(1), 아론은 가데스를 떠나 호르산에서 죽었습니다(26). 생명을 주관하시는 분은 하나님의 절대적인 권한이시지만 인간적으로 생각하면 아쉬운 마음이 듭니다. 누구보다도 이들 삼남매는 가나안에 들어갈 수 있도록 해 주셨으면 얼마나 좋았을까 하는 마음입니다. 아니면 모세만이라도 가나안에 들어갈 수 있도록 해 주셔야 하지 않겠습니까?

 

모세가 늙어 기력이 없어서 죽은 것이 아닙니다. 모세가 가나안에 들어가지 못하고 죽어야 했던 것은 ‘너희가 나를 믿지 아니하고 내 거룩함을 나타내지 아니한 고로’라고 하나님께서 이 이유를 분명히 말씀하셨습니다(12). 여기서 우리가 오해가 없어야 할 것은 이들 삼남매가가나안에 들어가지 못하고 광야에서 죽었다고 해서 천국에도 들어가지 못했다는 것은 아닙니다. 모세가 천국에 들어갔다는 것을 확신할 수 있는 것은 변화산에서 모세와 엘리야가 영광중에 나타나셔서 예수님과 대화하신 것을 보아서 믿어 의심치 않습니다(눅9:30). 그러나 인간적으로 생각할 때 모세가 가나안에 들어가지 못하였다는 것은 너무하다는 생각을 합니다. 시작도 중요하지만 끝이 더욱 중요합니다. 끝은 목적이기 때문입니다.

 

평생 존경을 받으며 살던 분이 죽을 때 실망을 주는 사람이 있습니다. 반면에 평생을 베풀 줄 모르고 욕심을 부리던 사람이 죽을 때 감동을 주는 사람도 있습니다. 자신의 모든 것을 다 베풀고 죽을 때 그에 대한 오해는 다 사라지고 존경하게 됩니다. 성경에 있는 기록된 사건들 중에 다 이해 할 수는 없지만 그중에 더욱 이해가 안 되는 사건이 두어 가지 있습니다. 아나니아와 삽비라 부부의 죽음입니다. 예루살렘 교회가 성령 충만하여 사람들은 밭과 집을 팔아 바치고 사도들은 필요에 따라 나누어 주었습니다(행4:25). 이것을 보고 아나니아와 삽비라 부부도 소유를 팔아 사도들에게 받쳤습니다. 그런데 아나니아와 삽비라는 베드로의 무서운 책망을 듣고 혼이 떠나 죽었습니다. 아무것도 바치지 않는 사람들도 많은데 그래도 절반을 바쳤습니다. 그럼에도 죽어야 했다는 것은 이해가 잘 되지 않습니다.

 

또 한 가지 이해가 안 되는 것은 모세의 죽음입니다. 모세는 세상에 태어난 것도 하나님의 특별한 섭리로 태어났습니다. 하나님은 모세를 불러 이스라엘 백성을 애굽에서 이끌어 내는 영도자로 삼으셨습니다. 하나님은 모세를 통해 바로 왕궁과 애굽에 열 가지 재앙을 내리도록 하셨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을 바로의 손에서 빼앗아 홍해를 건너게 했습니다. 광야 40년 동안 온갖 고생을 다하며 이스라엘 백성을 인도하였습니다. 그런데 모세는 가나안에 들어가지 못하고 죽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 모두가 다 못 들어가도 모세만은 들어가야 하지 않겠습니까? 모세가 병이 들어 죽었다면 모르겠는데, 유감스럽게도 모세가 가나안에 들어 갈 수 없게 된 것은 그의 죄로 인한 형벌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모세에게 “너희가 나를 믿지 아니하고 이스라엘 자손의 목전에서 내 거룩함을 나타내지 아니한 고로 너희는 이 회중에 내가 그들에게 준 땅으로 인도하여 들이지 못하리라”(12)라고 말씀하셨습니다. 24절에 ‘내 말을 거역한 까닭이라’고 하였습니다. 누가 뭐라고 해도 모세는 순종의 사람이었습니다.

 

모세는 하나님의 말씀을 잘 따르고 순종하였습니다. 하나님 말씀을 순종하므로 불가능한 것도 가능케 하였습니다. 전적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믿고 순종하였습니다. 넘실거리는 홍해를 바라보고 하나님의 말씀대로 순종하여 홍해를 갈라지게 하여 백성들을 건너게 했습니다. 따라오는 애굽 군대를 하나님의 말씀대로 순종하여 물에 빠져 죽도록 하였습니다.

 

마라에서 물이 쓰서 마실 수가 없을 때 하나님의 말씀대로 나무 가지를 물에 던져 쓴 물을 달게 하여 백성들을 마시게 했습니다(출15:25). 먹을 것이 없어 원망하는 백성들에게 하나님의 말씀대로 순종하여 만나와 메추라기를 40년 동안 배부르게 먹을 수 있도록 했습니다. 마실 물이 없을 때 반석을 처서 백성들에게 물을 마시도록 했습니다. 모세는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하는 하나님의 종이였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모세가 거역하였다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모세와 아론에게 “너희가 므리바 물에서 내 말을 거역한 까닭이니라”(24)고 말씀하셨습니다. 므리바에서 어떤 일이 있었습니까? 이스라엘 백성들은 출애굽하여 가나안에 들어가는 부푼 꿈을 안고 광야를 여행하였습니다. 낮에는 구름 기둥으로, 밤에는 불기둥으로 하나님께서 인도하셨습니다. 구름 기둥과 불기둥이 움직이는 대로 따라 가는 것입니다. 처음에는 백성들은 감격하여 찬송하였습니다.

 

감격도 몇 날이 못되어 원망으로 바뀌어졌습니다. 백성들은 빨리 가나안에 들어가고 싶었지만 하나님께서 인도하시는 것은 그들의 기대만큼이나 빠르지 않았습니다. 보름 늦어도 한 달이면 들어갈 수 있는 가나안을 무려 40년을 광야 생활을 하므로 원망도 할 만 합니다. 만나는 꿀을 섞은 과자처럼 맛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아무리 맛있는 만나도 40년을 먹었을 때 감사보다는 원망을 할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처음부터 40년이 걸릴 것이라고 했더라면 덜 할 수도 있을 수 있겠지만 언제 들어갈 수 있는지 기약이 없기 때문에 더욱 하루 하루가 지겨워 불평과 원망을 하게 된 것입니다.

 

신광야 가데스바네아에 왔을 때 마실 물이 없었습니다. 더 이상 백성들은 참을 수가 없어 모세와 아론을 원망하였습니다. “우리 형제들이 여호와 앞에서 죽을 때에 우리도 죽었더라면 좋을 뻔 하였도다 너희가 어찌하여 여호와의 회중을 이 광야에서 인도하여 우리와 우리 짐승이 다 여기서 죽게 하느냐”(3,4)라고 하며 모세와 아론을 향하여 원망을 하였습니다. 그리고 “너희가 어찌하여 우리를 애굽에서 나오게 하여 이 나쁜 곳으로 인도하였느냐 이 곳에는 파종할 곳이 없고 무화과도 없고 포도도 없고 석류도 없고 마실 물로 없도다”(5) 라고 원망하였습니다. 심지어 애굽으로 돌아가자는 말도 있었습니다. 백성들이 모세와 다투어 말했습니다(3).

 

이러한 백성들의 원망을 들은 모세와 아론은 여호와 앞에 엎드렸습니다. 그때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네 형 아론과 함께 회중을 모으고 그들의 목전에서 너희는 반석에게 명령하여 물을 내라 하라 네가 그 반석이 물을 내게 하여 회중과 그들의 짐승에게 마시게 할지니라”(8)고 말씀하셨습니다. 모세는 말씀대로 백성들을 모으고 그들에게 “반역한 너희여 들으라 우리가 너희를 위하여 이 반석에서 물을 내랴”고 외치고 지팡이로 반석을 두 번 치니 물이 솟아나 백성들이 물을 마셨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모세에게 ‘너희가 나를 믿지 아니하고 이스라엘 자손의 목전에서 내 거룩함을 나타내지 아니하였느니라’(12)고 무섭게 책망하셨습니다.

 

모세와 아론은 40년을 원망하는 백성들로 인하여 피곤하고 지쳤습니다. 신물이 날 정도였습니다. 이제껏 참고 참아 왔습니다. 그런데 자신도 모르게 원망하는 백성을 향하여 ‘반역한 너희여’라고 말을 했습니다. 모세가 이러한 말을 했다는 것을 얼마든지 이해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그냥 넘어가지 않았습니다. ‘반역한 너희’란 말은 ‘망할 자’, ‘소망이 없는 악한 자’란 뜻입니다.

 

시편 106:33 “모세가 그의 입술로 망령되이 말하였다”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모세는 말로서 죄를 지었습니다. 말은 마음속의 진실을 엿볼 수 있습니다. 말은 마음의 창문입니다. 백성들의 원망의 소리를 듣고 무심코 한 말이지만 모세의 마음속에는 백성들을 미워하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모세에게 ‘너희가 나를 믿지 아니하였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모세는 지금까지 하나님을 믿고 여기까지 왔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너희가 나를 믿지 아니하였다’라고 했습니다. 그럼 모세가 하나님을 믿지 아니한 것이 무엇입니까? 모세는 마치 자기가 반석에서 물을 내는 것처럼 “우리가 너희를 위하여 이 반석에서 물을 내랴”고 말했습니다. 마치 모세 자신이 물을 내는 것처럼 말을 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반석에서 물을 내는 것을 마치 자기가 낸 것처럼 해서 하나님의 영광을 자신에게로 돌렸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존재와 하나님의 능력을 나타내 보여 줄 수 있는 기회를 박탈해 버리고 자신이 한 것처럼 말했다는 것입니다.

 

오늘 날에도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은사를 마치 자신의 것 인양 착각하며 교만에 빠지는 사람이 있습니다. 하나님께 돌릴 영광을 가로채서 자기에게로 돌리는 것은 하나님을 불신하고 하나님의 거룩함을 나타내지 아니하는 무서운 죄가 된다는 것을 가르쳐 줍니다. 하나님의 능력으로 되어 진 것을 마치 자기가 한 것처럼 말하는 것은 하나님 앞에 무서운 죄가 된다는 것입니다.

 

심리학자 후로이드(Freud)는 급한 일을 당해서 무의식중에 하는 말을 들으면 그 사람의 진실을 알 수 있다고 말했습니다. 의식이 있어서 앞뒤를 다 생각하면서 하는 말은 거짓되기 쉽지만, 정신을 차릴 수 없을 만큼 급한 일을 당했을 때 무의식으로 갑작스럽게 내 뱉는 말이 그 사람의 마음을 보여 주는 것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취중에 한 말이 그 사람의 진실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모세는 백성들이 하나님의 은혜를 알지 못하고 감사하기 보다는 원망하는 백성들을 보고 분노하여 자신도 모르게 이성을 잃고 불신앙적인 말을 한 것입니다. 모세가 백성들이 원망하고 불평하는 것을 조금이라도 이해를 했더라면 이와 같은 실수를 범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우리가 어떤 원망의 말을 들었을 때 원망하는 그 사람을 잠간이라도 이해를 하면 실수를 하지 않게 됩니다. 왜 저 사람이 원망을 하는가를 잠간 이해할 수 있는 마음의 여유를 가지면 더 이상 죄를 범하지 않게 됩니다.

 

모세가 실수하고 책망을 듣게 된 또 다른 원인은 자기 위치를 잊어버린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을 모세에게 인도하라고 맡겨 주셨습니다. 모세는 이스라엘 백성을 인도하는 하나님의 종입니다. 하나님의 종으로서 하나님의 백성을 인도하였습니다. 백성들의 잘못은 하나님께서 알아서 하실 것입니다. 모세는 하나님의 종으로서 백성들을 인도할 뿐입니다. 하나님의 종으로서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대로 반석이 물을 내게 하여 백성들에게 마시도록 하는 종이였습니다.

 

그런데 모세는 마치 자기가 물을 내어 백성들에게 마시게 하는 것처럼 ‘우리가 너희를 위하여 이 반석에서 물을 내랴’고 하며 반석을 두 번을 쳤습니다. 이렇게 한 모세는 인간적인 감정과 분노에 찬 불신앙적인 행동으로 하나님의 일을 하였습니다.

 

다윗이 아들 압살롬에게 쫓겨서 피난 할 때 사울 왕족인 시므이가 다윗을 향하여 돌을 던지며 저주하는 것입니다. 이를 본 다윗의 신하 아비새가 ‘내가 건너가서 그의 머리를 베게 하소서’라고 말했습니다. 그때 다윗은 ‘저가 저주하는 것은 여호와께서 그에게 다윗을 저주하라 하심이라’(삼하16:10)고 말했습니다. 만약 다윗이 ‘그래 저를 가서 죽이라’고 했더라면 더 이상 다윗은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다윗이 될 수 없었을 것입니다. 모세가 원망하는 백성을 다윗처럼 이해를 하였더라면 모세는 죄를 범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가나안에 들어갈 수가 있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모세는 위대한 믿음의 사람입니다. 그러나 마지막은 믿음 없는 사람으로, 하나님의 거룩함을 나타내지 못하는 사람으로 끝을 맺었습니다. 참으로 유감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믿음으로 시작하였다가 불신앙으로 마치는 안타까움을 볼 수 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마지막은 매주 중요합니다. 여러분의 마지막이 믿음 없는 사람이 되지 않아야 합니다. 지금까지 지켜 온 믿음을 끝까지 잘 지킬 수 있어야 합니다. 화가 나더라도, 원망을 들었더라도 참고 하나님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끝까지 변함없는 믿음을 지키므로 하나님의 거룩함을 나타내시는 우리 모두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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