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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약 --------------------/빌립보서

빌 4장 10-19절(염려 없는 삶, 얼마든지 가능하다) - 이준원

by Preacher 2023. 5. 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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빌4장 10-19

염려 없는 삶, 얼마든지 가능하다

이준원 목사 2012.8.5.

콜럼버스한인장로교회 https://www.kpccoh.org

 

[들어가는 말]

 

‘아줌마’를 아시지요? 남성도 여성도 아닌 제 3의 성이라 불리며, “한국 아줌마들은 위대하다”는 말도 있습니다. 요즘 올림픽을 하는데, 제가 축구를 좋아해서 한국 팀의 경기를 보고 싶었습니다. 그런데 미국방송인 NBC에서는 안 해주고, 한국방송을 인터넷으로 보려 해도 저작권 문제로 중계를 안 했습니다. 그래서 간신히 외국 인터넷 사이트에서 해주는 것을 보려고 했는데, 한국 아줌마들을 위한 웹사이트에 어디어디로 가면 생중계를 볼 수 있다는 정보가 나와 있었습니다. 역시 아줌마들은 대단합니다. 덕분에 축구를 잘 보았습니다.

 

어제 한국 팀이 주최국이자 축구 종주국인 영국 팀에게 승부차기 끝에 이겨서 4강에 올라갔습니다. 이것은 마치 10년 전 2002 한일 월드컵 당시 한국 팀이 8강에서 스페인에게 승부차기로 이겨서 4강에 올라가던 것과 비슷했습니다. 그때 월드컵에 대한 다큐멘터리를 본 적이 있는데, 정작 승부차기를 하는 당사자인 선수들은 긴장된 모습이었지만 대체로 담담한 모습이었습니다. 그런데 오히려 관중석에서 응원하던 관중들은 마음을 졸이며 너무 불안해하는 모습이 보였습니다.

 

여러분, 지금까지 살면서 가장 걱정이 되던 때가 언제였습니까? 그때 괴로워하던 그 표정을 비디오로 찍는다면, 아마 그 승부차기 때 관중들이 불안해하던 그 모습과 비슷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런데 그때 왜 걱정을 했고 또 어떻게 그것을 해결하였습니까?

 

오늘까지 열세 번에 걸쳐 불확실한 이 세상에서 염려 없이 사는 것을 다루고 있습니다. 자, 어떠십니까? 이제는 염려가 없이 살 자신이 있으십니까? 지금까지 우리는 염려를 이길 수 있는 여러 방법들을 살펴보았습니다. 오늘은 염려를 이길 수 있는 또 하나의 강력한 무기를 살펴보고자 합니다. 어쩌면 이것을 가리켜 염려를 대적하는 가장 강력한 무기라고 할 수도 있습니다.

 

이것만 가지고 살아간다면 우리는 얼마든지 염려를 이기고 승리하며 살 수 있습니다. 그것이 뭔지 궁금하십니까? 힌트를 드리자면, 오늘 본문에 나와 있는 단어입니다. 그것은 다름 아닌 ‘자족’입니다. 즉, 지금 상태에 대해 감사하고 만족할 줄 아는 마음입니다.

 

빌립보서를 쓰고 있을 당시 바울은 로마 감옥에 갇힌 상황이었다는 것을 기억할 필요가 있습니다. 우리는 빌립보서를 읽을 때마다 이 사실을 기억하고 읽어야 합니다. 그는 하루 24시간 동안 쇠사슬에 묶여서 로마 군인들의 감시를 받고 있었습니다. 벌써 이것부터가 우리가 처한 어떤 환경보다도 더 나쁜 상황임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바울은 감사하고 만족했습니다. 그는 “평강의 하나님”(9)께서 “하나님의 평강”(7)을 내려주시는 것을 믿었고 또 실제로 그것을 경험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도 역시 감사하고 만족하는 법을 배울 때 같은 것을 경험할 수 있다는 사실을 확신하게 됩니다.

 

1. 하나님의 섭리

 

“내가 궁핍하므로 말하는 것이 아니라 어떠한 형편에든지 내가 자족하기를 배웠노니, 내가 비천에 처할 줄도 알고 풍부에 처할 줄도 알아 모든 일에 배부르며 배고픔과 풍부와 궁핍에도 일체의 비결을 배웠노라” (11-12절)

 

여기서 “자족”이라고 번역된 헬라어 단어는 ‘자부심 있는 것’, ‘만족하는 것’, ‘넉넉하게 가지고 있는 것’이라는 뜻입니다. 이 말은 다른 사람의 도움 없이 독자적으로, 독립적으로 사는 것을 가리키기도 합니다. 그러니까 바울은 여기서 그리스도가 자기 안에 사시기 때문에 그러한 자기 자신에게 만족하는 법을 배웠다고 하는 것입니다.

 

“나는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습니다. 이제 살고 있는 것은 내가 아닙니다. 그리스도께서 내 안에서 살고 계십니다. 내가 지금 육신 안에서 살고 있는 삶은, 나를 사랑하셔서 나를 위하여 자기 몸을 내어주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갈 2:20) 여기서 발견하는 진리가 무엇입니까? 그리스도와 만족은 같이 간다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계신데 만족이 없는 삶은 있을 수 없습니다. ‘주님 한 분만으로 나는 만족해’라는 찬양곡 가사처럼, 주님만 계시면 만족할 수 있습니다. 지금 만족하지 못하고 불안해하며 걱정한다면, 주님이 안 계신 겁니다. 아니, 사실은 함께 해주시지만 그것을 깨닫지 못하고 있는 겁니다. 또한 주님이 아닌 것으로 만족하고 있다면, 그 만족은 오래 가지 못합니다. 그런 만족은 반드시 사라지게 되고 염려가 그 자리를 채우게 됩니다.

 

‘그리스도가 없는 만족’에 대해 이야기한 대표적인 사람들이 스토아 철학자들입니다. 스토아 학파는 BC 200년경 시작된 헬라 철학입니다. 그들이 말하는 만족이란, 완전한 무관심에 이르러서야 성취되는 만족이었습니다. 예를 들어, 집안의 유리컵이 깨졌을 경우 “상관없어”라고 말하는 겁니다. 사랑하던 애완견이 죽었을 때도 “상관없어”라고 말합니다. 자기 자신이 다쳤을 때도 “상관없어”라고 말합니다. 이런 연습을 충분히 하면서 살다 보면 가장 사랑하는 사람이 고통을 당하거나 죽는 것을 보게 될 때도 “상관없어”라고 말하는 경지에 이른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이 어떻게 상관이 없습니까? 그건 만족이 아니라 무관심입니다. 바울이 말하는 자족은 이런 무관심이 아닙니다. 주님이 함께 하시니까 누릴 수 있는 감사와 만족을 말하는 것입니다. “내가 주 안에서 크게 기뻐함은 너희가 나를 생각하던 것이 이제 다시 싹이 남이니 너희가 또한 이를 위하여 생각은 하였으나 기회가 없었느니라” (10절)

 

이 편지를 쓸 당시는 바울이 빌립보에 교회를 개척하고 떠난 지 10년 정도 된 시점입니다. 사도행전 16장을 보면 바울이 빌립보를 방문하여 어떤 일들이 일어났는지가 나와 있습니다. 빌립보 교회는 그 후로부터 바울의 선교 사역을 위해 선교헌금을 보냈습니다.

 

그런데 빌립보서를 죽 읽어 보면 그들이 그 일을 한 동안 중단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형편이 어려웠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바울은 그들에게 서운해 하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의 관심이 부족한 게 아니라 ‘생각은 하였으나 기회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10절에서 “너희가 나를 생각하던 것이 이제 다시 싹이 남이니”라고 말하면서 바울은 ‘다시 꽃이 핀다’는 의미를 가진 원예 용어(gardening term)를 사용합니다. 그러니까 빌립보 성도들의 사랑이 항상 거기에 있었지만 단지 피어날 기회를 가지지 못한 것이며, 꽃은 때가 되면 피는 법인데 지금까지는 그때가 아니었을 뿐이라는 말입니다.

 

바울은 결코 어떤 일이 벌어질 때마다 좋으면 기뻐하고 힘들면 괴로워하는 식으로 일희일비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주권적인 섭리를 확신하며 인내 가운데 기다렸습니다. 그는 아무것도 없이 지내기도 했고 심지어 감옥에 갇혀 있기까지 하지만, 주님의 때를 기다리는 것에 만족했습니다. 허둥지둥 대며 다른 수를 쓰려 들지도 않았고 사람들을 조종하려 들지도 않았습니다. 하나님께서 때가 되면 상황을 정리하시고 자신의 필요를 채워주실 것을 믿었기 때문입니다. 그는 그것을 정말로 믿었습니다. 그래서 최악의 상황에서도 자족할 수 있었습니다.

 

여기에서 우리는 왜 불안해하고 염려하는지 그 이유를 잘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당신의 백성의 유익을 위해 모든 상황을 정리하고 계시다는 사실을 온전히 배우기 전까지, 우리는 불안과 염려를 떨쳐버릴 수 없다는 사실입니다. 자신의 상황을 자기가 해결하려고 발버둥치는 한, 우리는 염려에서 벗어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이 역사하시는 두 가지 방법이 있습니다. 기적과 섭리입니다. 자연적인 방법으로 설명이 불가능한 것이 기적입니다. 하나님께서 정상적인 삶의 흐름을 끊고 기적을 끼워 넣으십니다. 그런 다음 그 흐름을 다시 되돌려 놓으십니다. 예를 들어, 출애굽기를 읽어보면, 모세의 인도로 애굽을 나온 이스라엘 백성들이 앞은 홍해가 막혀 있고 뒤에는 바로의 군대가 자기들을 죽이려 쫓아옵니다. 그때 그 바다를 가르시고 그들이 다 건너갈 때까지 기다리셨다가 건너간 다음 다시 물을 닫으셨습니다. 그것이 기적입니다. 물이 멈춘 채 계속 1,500년씩, 2천 년씩 있는 것이 아니라 멈추었다가 다시 흐르도록 돌아갑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섭리’(providence)는 무엇입니까? 우리를 위해 어떤 일을 이루어주시려고, 지금 눈에 보이지는 않아도 뒤에서 천억 가지 일을 조정해주시는 것, 그것이 섭리입니다. 이전에 살펴본 요셉의 삶을 창세기에서 읽어보십시오. 만남과 만남이 이어지면서 요셉에게 놀라운 일들이 일어납니다. 형들이 요셉을 죽이려다가 죽이지 않고 상인들에게 팔아넘깁니다. 그런데 그때 죽이지 말자고 제안한 사람이 그들 중 가장 형편없었던 르우벤입니다. 그리고 하필 그 상인들이 다른 데도 많은데 애굽으로 가는 상인들이었습니다. 거기 도착해 보니까 하필 애굽 왕 바로의 시위대장 보디발의 집에 팔려갑니다. 또 억울하게 감옥에 갇혔는데 거기서 바로의 유력한 두 장관들을 만나 꿈을 해석해줍니다. 이걸 전부 다 말하려면 끝이 없습니다. 모세나 다윗이나 그 외의 사람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성경에 수많은 사람들이 등장하는데, 잘하는 것도 있고 죄를 짓는 모습도 있습니다. 왜 그런 이야기들이 다 나오느냐 하면, 그들의 삶 속에서 보이지 않게 역사하시며 그 몇 천억 가지를 조정해주시는 하나님의 섭리를 보라는 것입니다.

 

그렇게 모든 상황 속에서 보이지 않게 역사하시며 몇 천억 가지 일들을 조정해주시는 것이 바로 하나님의 섭리입니다. 하나님은 바로 지금 우리를 위해 그와 동일한 일을 행하고 계십니다. 이 사실을 바울은 배우고 믿었기 때문에 최악의 상황에서도 기뻐하며 감사할 수 있었습니다. 삶의 감사와 만족은 하나님께서 나의 삶에 초자연적으로 개입하실 뿐 아니라, 자연적인 정리를 통해 섭리하고 계시다는 사실을 배우고 믿는 데서 옵니다.

 

지금 하나님이 내 삶 속에서 나를 위해 그렇게 분주히 움직이고 계시는 모습이 보입니까? 그 소리가 들립니까? 보이지 않고 들리지 않습니다. 사실 지구가 엄청난 속도로 매일 뺑뺑 돌고 있지만 우리는 그 소리를 못 듣습니다. 내 눈에 보이지 않고 내 귀에 들리지 않는다고 지구가 돌지 않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유익을 위해 엄청나게 빠른 속도로 움직이고 계십니다. 내가 그 소리를 못 듣는다고, 내 눈에 보이지 않는다고, 움직이지 않으시는 것이 아닙니다. 바울은 그러한 하나님의 섭리를 확신했기 때문에 자족할 수 있었습니다.

 

인간인 우리에게 필요한 것들은 단순합니다. 돈, 음식, 옷, 집 등 의식주입니다. 그런데 성경은 우리에게 얼마 되지 않는 생필품에도 만족하라고 명령합니다. 그러한 태도는 우리의 문화가 가르치는 것과는 정반대입니다. 이 시대의 사람들은 적은 것에든 많은 것에든 만족할 줄 모릅니다. 부자라고 만족하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더 많이 가질수록 더 불만이 많습니다.

 

일반적으로 가장 불행해하거나 걱정이 많은 사람들을 보면 큰 부자들이 많습니다. 찢어지게 가난한 사람이 최고급 경보시스템을 설치하는 것 보셨습니까? 가난해서도 설치를 못하겠지만 할 필요도 없습니다. 그러나 부자들은 가장 좋은 알람 시스템을 집에 설치합니다. 가진 게 많아서 불안하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은 바울과 달리 자신의 ‘욕구’가 곧 ‘필요’라고 생각하는 것 같습니다. 자신에게 무엇이 필요한지를 판단하는 기준이 자신의 욕구입니다. 정말 필요해서 필요한 게 아니라, 자기가 원하니까 그게 필요하다고 착각합니다. 어린아이들일수록 그런 착각을 잘합니다. 제 아들도 그럴 때가 많지만, 원하는 것(want)과 필요한 것(need)을 구분하게 해주어야 합니다.

 

여러분, TV 광고 같은 데에서 음식을 먹거나 물을 마시거나 잠을 자라고 광고하는 것을 본 적이 있으십니까? 광고들을 잘 보면 “당신에게는 이것이 필요합니다.” 하며 우리를 설득하려 합니다. 아무 생각 없이 그런 광고를 보다 보면 진짜 원하는 것도 아니고 살 마음도 없었는데 “아, 저거 내가 필요해.”라고 그들의 꼬임에 넘어가게 됩니다. 광고들의 목표는 현재의 삶에 불만을 가지게 하고 없으면 안 되겠다고 불안한 마음이 들게 해서 물건을 파는 데 있습니다.

 

일상생활 가운데 “나, 이거 필요해”라고 할 때마다 주의를 기울여보십시오. 얼마 정도의 생활필수품의 수준을 넘어 사용하고 있는 것이 있다면 그것이 무엇이든 바로 잡아야 합니다. 정말 필요한 게 아니라 원할 뿐입니다. 자동차 살 때 그 종류를 고르는 것도 그렇고, 특히 차를 고른 후 세일즈맨이 이것저것 보여주면서 수많은 옵션들로 우리가 현혹되게 만듭니다. 원래 차 가격은 좀 싸게 해주고는 옵션으로 값을 점점 더 올립니다. 그래서 꼭 필요한 것이 아니라 원하는 것을 사게 만듭니다. 텔레비전 등의 전자제품도 그렇고 휴대전화도 마찬가지입니다.

 

자신에게 꼭 필요한 것을 사용하고 남는 것이 있다면 무엇이든 하나님이 주시는 복으로 알고 감사하게 여기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세상이 우리에게 ‘당신은 이게 필요해’라고 외치는 사치품들을 받아들이기를 거부할 때 우리는 적은 것에도 감사와 만족을 누리게 될 것입니다.

 

2. 하나님의 능력으로 승리하라

 

그런데 무엇보다 우리의 만족을 앗아가는 것은 어려운 환경입니다. 그러나 환경에 끌려가는 삶을 살게 되면 만족과 평강을 잃어버립니다. 바울도 극도로 어렵고 위험한 환경 때문에 고통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그는 환경에 상관없이 만족하는 법을 배웠습니다. “어떠한 형편에든지 내가 자족하기를 배웠노니”(11).

 

고린도후서 11장에 바울이 얼마나 혹독한 경험들을 많이 했는지가 잘 나와 있습니다. 몇 십 대씩의 매를 여러 번 맞았고, 죽을 위기도 여러 번 넘겼고, 배를 타고 가다 파선도 당했습니다. 그런데 그는 그런 상황 속에서도 만족하는 법을 배웠습니다.

 

솔직히 우리가 아무리 자다 깨도 바울 같이 어려운 상황 근처에도 갈 수가 없습니다. 우리가 아무리 힘들다, 힘들다 해도 바울만큼 힘든 상황이 있겠습니까? 그런데 바울은 어떤 환경도 잠시의 것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깨닫고 주님을 의지함으로 견디어냈으며 확신을 가지고 세상일들에 맞설 수 있었습니다.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 (13절)

 

바울이 그리스도 안에서 자기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다고 말할 때, 이것은 기적적인 인도하심이 아니라 ‘인내’에 대해 언급하는 것입니다. 그는 지금 자기가 영원히 먹지 않고 마시지 않고도 끄떡없다고 말하는 게 아닙니다. 매를 5천 대나 맞고도 아무렇지도 않은 능력의 사람이 될 수 있다고 하는 게 아닙니다. 어떤 인간이든 물리적인 시련에 대해서는 한계가 있게 마련입니다. 그런데 바울은 이렇게 말하는 것입니다. “내가 가진 것이 모두 바닥났을 때, 비로소 나는 일을 해결해주시기 전까지 나를 지탱해주시는 그리스도의 능력을 경험했다.”

 

“오직 주님을 소망으로 삼는 사람은 새 힘을 얻으리니, 독수리가 날개를 치며 솟아오르듯 올라갈 것이요, 뛰어도 지치지 않으며, 걸어도 피곤하지 않을 것이다.” (사 40:31)

 

사도 바울은 이 약속의 말씀을 정말로 믿었습니다. 그래서 인내할 수 있었습니다. ‘자족’이란 저절로 되지 않습니다. 오히려 완전히 탈진한 순간 우리를 붙들어 세워주시는 그리스도의 능력을 경험할 때 찾아옵니다. 지금 자신의 삶에서 어려움을 경험하고 있다면, 앞으로 자신 안에 펼쳐질 그리스도의 능력을 기대하시기 바랍니다. 그러면서 이렇게 말하는 겁니다. “주님, 제 스스로는 해결할 수 없는 상황입니다. 인간의 어떤 것으로도 감당할 수 없는 일입니다. 그러니 저를 끝까지 도와주시는 하나님을 의지하겠습니다.”

 

그런데 그런 역사를 체험하지 못한다면 그 이유가 무엇인지 아십니까? 먼저, 자기 스스로 해결할 수 없을 정도로 상황이 어렵지가 않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힘들다고 말하는 상황들은 대부분 죽음의 위협을 당할 정도로 어렵지는 않습니다. 둘째로, 혹시 그렇게 어렵더라도 그것을 자기가 해결하려고 해서 그렇습니다.

 

사실 자기가 할 수 있는 것에는 최선을 다해서 노력하고 할 수 없는 것은 전적으로 주님께 맡겨야 하는데, 많은 사람들이 그것을 거꾸로 합니다. 할 수 있는 데도 자기는 못한다고 하며 뒤로 물러가 넘어져 있고, 할 수 없는 일은 오히려 자기가 해보려고 애씁니다.

 

심장 박동 조절장치(pacemaker)를 하신 분이 계십니까? 제 어머니가 몇 년 전에 하셨습니다. 그 장치를 붙인 심장이 제 기능을 하지 않을 때 그 기계가 움직이기 시작합니다. 그것은 심장이 기능을 할 수 있도록 힘을 줍니다. 크리스천으로서 우리는 한계에 다다랐을 때 우리를 움직일 수 있게 해주는 영적 동력장치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분이 하나님이십니다. 우리는 그 파워의 근원이신 하나님께 얼마든지 나아갈 수 있는 길이 열려 있습니다.

 

지금 죽음의 그늘이 드리워진 골짜기를 지나가고 있습니까? 낭떠러지 끝에 서 있는 것 같은 상황에 처해 있습니까? 해결할 수 없는 문제가 있거나 충돌을 피할 수 없는 상황입니까? 결혼생활을 유지하기 힘들 정도로 골이 깊어진 상태입니까? 자녀에게 닥친 문제에 대해 속수무책인 상태입니까? 육신을 파고드는 질병과 더 이상 싸울 힘이 없습니까? 경제적으로 너무 궁핍하여 앞이 안 보이는 상황입니까? 오히려 그러한 상황에서 우리는 자족을 배우게 될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한 가지 기억할 중요한 사실이 있습니다. 만일 나의 삶에 해결하지 않은 죄가 있다면, 죄악 된 삶을 살고 있다면, 주님께서 나의 삶에 개입하셔서 그것을 먼저 정리하십니다. 그것을 정리하지 않으면 하나님께서 능력을 보이시며 만족케 해주실 것을 기대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럴 때는 오히려 상황이 자연적으로 만들어낸 고통에 더하여 징계를 하실 수도 있습니다. 미워하셔서가 아니라 사랑하셔서 고쳐주시려는 것입니다. ‘죄를 지어도 별 일이 없던데.’라고 하지 마십시오. 지금 기다려주고 계신 겁니다. 하나님의 능력은 하나님께 순종할 때 주어집니다. 기다려주고 계시는 주님 앞에서 빨리 죄의 문제를 먼저 해결해야 합니다.

 

3. 다른 사람들의 유익을 구하라

 

우리가 자신을 위해 산다면 자족을 경험하지 못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심지어 크리스천들도 만족을 경험하지 못하는 이유는, 자기가 원하는 방식대로 세상에 돌아가기를 요구하기 때문입니다. 배우자가 나의 기대와 생각을 채워주기를 원합니다. 내가 미리 1, 2, 3 하고 정해놓은 계획에 자녀가 그대로 따라오기를 원합니다.

 

또 교회에서, 직장에서, 사업체에서, 다른 사람들이 내가 원하는 대로, 내가 원하는 방식대로 따라오기를 원합니다. 무엇이든 내가 정해놓은 대로 정확히 움직이기를 기대합니다. 대통령도 내가 원하는 대로 정책을 펼치기 원하는데 그렇게 안 하기 때문에 화가 납니다. 거기서 더 나가면, 하나님도 내 생각대로 안 움직이니까 못 믿겠다는 겁니다.

 

그러나 바울은 빌립보 성도들이 다른 관점을 가지기를 기도했습니다. 그는 서로를 향한 그들의 사랑이 풍성하기를 원하면서 편지를 쓰기 시작했고(1:9), 실질적인 조언도 했습니다. “아무 일에든지 다툼이나 허영으로 하지 말고 오직 겸손한 마음으로 각각 자기보다 남을 낫게 여기고” (2:3)

 

바울은 성도들이 다른 사람의 유익을 먼저 생각하기에 열심을 내기를 원했습니다. “그러나 너희가 내 괴로움에 함께 참예하였으니 잘하였도다. 빌립보 사람들아 너희도 알거니와 복음의 시초에 내가 마게도냐를 떠날 때에 주고받는 내 일에 참예한 교회가 너희 외에 아무도 없었느니라. 데살로니가에 있을 때에도 너희가 한 번 두 번 나의 쓸 것을 보내었도다” (14-16절) 빌립보 교회는 로마에 있는 바울에게 에바브로디도 편에 음식과 옷과 헌금을 보냈습니다. 그들의 따뜻한 마음에 바울은 깊은 감동을 받았습니다. 그런데 그들의 선물에 대해 바울이 가장 기뻐했던 점이 무엇입니까?

 

“내가 선물을 구함이 아니요 오직 너희에게 유익하도록 과실이 번성하기를 구함이라.” (17절) 그는 그들의 물질적인 소득보다 영적인 유익에 더 관심이 있었습니다. 편안하게 잘 먹고 잘 사는 것은 인생에서 바울이 가지고 있던 주요 관심사가 아니었습니다. 그보다 그는 그가 사랑하는 사람들의 삶에 돌아가는 영원한 상급에 관심이 있었습니다. 바울은 그들의 선물이 하나님께 드린 것이라고 합니다. “내게는 모든 것이 있고 또 풍부한지라 에바브로디도 편에 너희의 준 것을 받으므로 내가 풍족하니 이는 받으실만한 향기로운 제물이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한 것이라” (18절)

 

바울이 기뻐했던 것은 그가 돈을 받았기 때문이 아닙니다. 오히려 빌립보 성도들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고 그들에게 영적인 유익으로 돌아갈 상급을 얻었기 때문입니다. 그에게는 그 선물이 있어도 좋고 없어도 괜찮은 것이었습니다. 바울은 편지를 마무리하면서 빌립보 성도들이 행한 것에 대해 축복의 말을 합니다.

 

“나의 하나님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영광 가운데 그 풍성한대로 너희 모든 쓸 것을 채우시리라” (19절) 여기서 바울은 이렇게 말하는 것입니다. “너희는 궁핍한 가운데서도 내게 사랑을 베풀어주었다. 하나님께서 이 사랑의 빚을 갚으실 것을 너희가 확신하기를 원한다. 그분은 너희의 필요한 모든 것을 채우실 것이다.”

 

[나가는 말]

 

여러분, 우리를 사랑하시는 하나님은 우리에게 영적인 복만 주시는 것이 아니라 이 땅에서 사는 동안 결코 배고파 죽는 일이 없도록 해주실 것입니다.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 있다면 영광 가운데 계신 하나님의 풍성함은 곧 우리의 것입니다. 마태복음 6장에서 예수님이 말씀하신 것처럼, 우리가 무엇을 먹을까 마실까 입을까 염려하지 말아야 할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우리가 할 일은 하나님의 나라와 의를 먼저 구하는 것이며, 염려하지 않는 것입니다.

 

지금 주어진 것들에 감사하며 만족하는 삶을 산다면 우리 마음에서 염려가 차지할 공간은 없습니다. 염려에 빠져 정신을 못 차리는 대신 이 약속의 말씀을 의지해야 합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들, 곧 하나님의 뜻대로 부르심을 받은 사람들에게는, 모든 일이 서로 협력해서 선을 이룬다는 것을 우리는 압니다.” (롬 8:28)

 

이 구절은 우리의 남은 생애 동안 영적인 생명줄이 됩니다. 적은 것에 만족하고, 물질적인 원함보다 다른 사람들의 유익에 더 관심을 가짐으로써, 물질 위주이고 이기적인 세상의 흐름을 단호히 거부해야 합니다.

 

어느 나라에 남편감을 파는 백화점이 문을 열었습니다. 이 백화점에 가면 마음대로 남편감을 골라 살 수 있었습니다. 그 대신 규정이 하나 있는데, 이미 거쳐 왔던 층으로 되돌아갈 수 없는 것이었습니다. 미혼의 두 여성이 꿈에 그리던 남편을 사려고 그 백화점을 찾았습니다.

 

1층에는 직업이 있고, 아이들을 좋아하는 남자들이 진열되어 있었습니다. “괜찮군. 1층이 이 정도면 한층 더 올라가 볼 필요가 있겠어.” 2층에는 돈을 잘 벌고, 아이들도 사랑하며, 아주 잘 생긴 남자들이 진열되어 있었습니다. “흠, 아주 좋아. 더 올라가자.” 3층에는 돈 잘 벌고, 아이를 시링하고, 아주 잘 생겼고, 집안일도 잘 도와주는 남자들이 있었습니다. “우와, 여기서 멈출 수 없어.” 4층에는 돈 잘 벌고, 아이 좋아하고, 잘 생겼고, 집안일 도와주고, 아주 로맨틱한 남자들이 진열되어 있었습니다. “맙소사! 4층이 이 정도면 5층은 상상을 초월하겠지.” 그러나 5층으로 올라가자, 5층의 안내문은 이렇게 적혀 있었습니다. “5층은 비어 있음. 만족을 모르는 당신, 출구는 왼편에 있으니 계단을 따라 빛의 속도로 내려가기 바람.” 솔직히 우리가 가진 것이 얼마나 많습니까. 모든 욕심을 버리고, 지금 주신 것들에 감사하고 만족하며 살아가십시오.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며 우리의 모든 필요를 채워주시는 그분의 능력을 굳게 믿으십시오. 그러한 우리 삶을 통해 하나님께서 어떤 놀라운 역사를 이루어주실지, 정말 기대가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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