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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약 --------------------/빌립보서

빌 4장 4-7절(주 안에서 그리하면) - 지성래

by Preacher 2023. 7. 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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빌4장 4-7

주 안에서 그리하면

지성래 목사 20171112

예수사랑교회 http://jsmc.kr/

 

어떻게 살아가는 것이 항상 기뻐하며 사는 것일까. 어떻게 살아가는 것이 모든 사람들에게 너그럽게 대하며 살아가는 것일까. 어떻게 살아가는 것이 마음과 생각에 평강이 가득한 삶을 살아가는 길일까. 고난 극복의 복음 전파자였던 사도 바울은 ‘주 안에서’ 그런 삶을 모범적으로 살았던 신앙의 선조답게 기쁨과 관용과 기도의 가치에 대하여 교훈하고 있다. 그러면 도대체 성도가 주 안에서 어떤 삶의 태도를 갖고 살아가는 것이 올바른 믿음의 사람다운 모습인걸까.

 

기쁨.

 

“마음의 즐거움은 양약이라도 심령의 근심은 뼈를 마르게 하느니라”(잠17:22)고 했다. 사람이 어떻게 항상 기뻐하며 즐겁게 살아갈 수 있을까. 예수의 잉태와 탄생을 알리는 천사 가브리엘은 한 밤 중에 베들레헴의 목자들에게 나타나서 말하였다. “보라 내가 온 백성에게 미칠 큰 기쁨의 좋은 소식을 너희에게 전하노라.”(눅2:10) 누가복음 마지막 장면은 예수님의 승천 장면이다. 예수는 제자들을 데리고 베다니 앞까지 가셨다. 손을 들어 제자들을 축복하였다. 그리고 그들이 보는 앞에서 하늘로 올라가셨다. 그 감격스러운 현장을 목격한 제자들은 승천하시는 예수께 경배하고 큰 기쁨으로 예루살렘으로 돌아가서 늘 성전에서 하나님을 찬송하였다. 그리고 마가의 다락방에 모여 기도하던 중에 성령을 받게 된 것이다. 그러므로 주 안에서 살아가는 믿음의 상급은 기쁨이다. 기쁨이 충만한 삶을 살아가게 되는 것이다. 요한복음 16장 20절에 보면, “너희는 근심하겠으나 너희 근심이 도리어 기쁨이 되리라.”고 하셨다.

 

도대체 사도 바울은 어떤 믿음, 어떤 인생관, 어떤 삶의 태도를 가진 하나님의 사람이었기에 “항상 기뻐하라”고 권면한 것일까. 우리가 아는 사도 바울은 고난의 사도가 아니었나. 그는 가는 곳마다 얼마나 많은 고난을 극복하며 복음을 전파해야 했나. 더군다나 그는 이 편지를 쓰는 그 시간 복음을 전하던 중에 붙잡혀서 로마 감옥 안에 갇혀 지내고 있었다. 그런데 그는 “항상 기뻐하라”는 권면의 편지를 빌립보 교회의 성도들에게 쓰고 있다. 그러면 사도 바울이 강조하는 “항상 기뻐하라.”는 기쁨의 원천은 무엇인가. 그 앞에 강조한 “주 안에서”라는 강조가 항상 기뻐하는 삶의 원동력이다. 주 안에서 살아가는 것은 믿음 생활의 신비가 있다. 이것은 설명으로는 불가능한 일이다. 바울과 실라는 빌립보 성에서 복음을 전파하고 귀신 들려 점하는 여종을 고쳐 내 이유로 붙잡혀 몹시 심하게 매를 맞고 감옥에 갇혔다. 그런데 그 밤에도 기도와 찬송으로 밤을 지새웠다. 그런데 지진이 일어나고 기적이 일어났다.

 

“주 안에 있는 나에게 딴 근심 있으랴 십자가 밑에 나아가 내 짐을 풀었네 그 두려움이 변하여 내 기도 되었고 전 날의 한 숨 변하여 내 노래 되었네”

 

이런 찬송을 누구나 다 온 마음을 담아 부를 수 있는 것은 아니지 않나. 물론 다 함께 부를 때에 따라 부를 수는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런 찬양을 부르는 그 마음 속에 이런 평화스러운 감사의 기도와 이런 기쁨의 찬송으로 가득 채워지지 않는다면 어찌 근심과 두려움과 한 숨을 거두고 기도와 찬송으로 살아갈 수 있을까.

 

우리 교회를 청소 맡아 하는 분은 "예수 사랑교회 안에서 만나는 성도들의 표정이 밝아서 청소하러 교회에 올 때마다 기분이 좋아진다.”고 말했다. 어찌 우리 교회 안과 주변에서 만나는 성도들의 표정이 누구나 다 밝을 수 있을까. 예수사랑교회의 성도들은 참으로 근심 걱정 염려 불안 질병 두려움 초조 우울 낙심 절망 한숨 탄식과는 전혀 상관이 없는 나날을 살아가는 이들끼리만 모여서 신앙 생활하는 걸까. 아니지 않나. 주 안에서 살아도 걱정거리 있고 주 안에서 살아도 근심거리가 찾아 온다. 주 안에서 살아도 몸이 아플 때 있고 주 안에서 살아도 병들 때 있다. 주 안에서 살아도 사고 당할 때 있고 주 안에서 살아도 인간관계나 가족 간의 갈등으로 심각한 고민에 빠질 수 있다. 부자라도 걱정과 두려움이 있고 성공한 사람이라도 불안은 찾아오는 법이다.

 

솔로몬 임금과 같은 부귀영화를 누려도 인생의 공허가 엄습해 오면 삶이 허무하기는 누구라도 다 마찬가지다. 아무리 끼니마다 산해진미를 먹고 별의 별 진기한 음식을 끼니마다 상다리가 부러지도록 차려 먹는다고 해도 그 마음에 공허와 허무가 깃들며 인생이 곤고하고 허무하기는 그 누구라도 다 마찬가지인 것이다. 오죽했으면 솔로몬은 다섯 번이나 반복해서 인생을 헛되다고 했을까. “전도자가 이르되 헛되고 헛되며 헛되고 헛되니 모든 것이 헛되도다.”(전1:2) 역사에 솔로몬보다 더 지혜롭고 그보다 더 지식을 얻은 자가 있는가. 그런데 그런 대단한 지혜의 왕이요 온갖 지식이 뛰어 났던 그인데도 그는 전도서에서 이렇게 말하였다. “지혜가 많으면 번뇌도 많으니 지식을 더하는 자는 근심을 더하느니라.”(전1:18) 번뇌와 근심의 우여곡절을 경험한 솔로몬은 전도서의 마지막 부분에서 다시 정신을 차리고 권면한다. “일의 결국을 다 들었으니 하나님을 경외하고 그의 명령들을 지킬지어다 이것이 모든 사람의 본분이니라 하나님은 모든 행위와 모든 은밀한 일을 선악 간에 심판하시리라.”(전12:13-14) 무슨 말씀인가. 사람이 하나님을 경외하며 살고 하나님의 명령을 잘 지키며 살아 갈 때에 참 기쁨을 누리게 되는 것이다.

 

바울은 어떤 형편 가운데서라도 복음이 전파되는 것으로 인하여 기뻐하였다. 빌립보서 1장 18절에 보면, “그러면 무엇이냐 겉치레로 하나 참으로 하나 무슨 방도로 하든지 전파되는 것은 그리스도니 이로써 나는 기뻐하고 또한 기뻐하리라.”고 말했다. 이것이 무슨 뜻인가. 어떤 방도로 하든지 예수 그리스도가 전파될 수만 있다면 자신은 언제라도 기뻐하고 기뻐하겠다는 뜻이다. 옷이 찢겨도 기쁘고 끌려가도 기쁘고 복음을 전파하는 이유 때문에 종교 재판을 받아도 기쁘고 매 맞아도 기쁘고 감옥에 갇혀도 기쁘고 심지어는 그리스도를 위하여 순교하는 순간이 온다고 할지라도 기뻐하겠다는 신앙의 고백이다.

 

또한 바울은 기쁨으로 드리는 간구 생활을 언급했다. 빌립보서 1장 4절에 보면, “간구할 때마다 너희 무리를 위하여 기쁨으로 항상 간구함은.”이라고 했다. 바울이 빌립보교회의 성도들을 생각하고 기도할 때마다 기쁜 이유가 무엇이었을까.

 

바울은 동족인 유대인들을 위하여 기도하거나 갈라디아교회나 고린도 교회를 위하여 기도할 때에는 근심 가운데 기도하고는 하였다. 갈라디아서 1장 6절에 보면 갈라디아 교회의 구성원들 중에서 ‘다른 복음’에 빠진 이들이 있었다. 사실 ‘다른 복음’이란 없다. 그런데 이단과 사이비에 빠지는 이들은 그것을 복음이라고 확신한다. 그런 갈라디아 교인들의 모습을 소식으로 들은 바울은 “다른 복음은 없다.”고 편지하면서 “우리가 너희에게 전한 복음 외에 다른 복음을 전하면 저주를 받을지어다.”(갈1:9)는 강경한 어조로 편지하였다. 이처럼 기쁨이란 기뻐할 만한 상황과 여건과 형편을 서로 만들어 갈 때에 항상 기뻐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가족이 이단에 빠지고 사랑하는 사람이 사이비에 빠져 들어 가출하거나 맹목적이고 어리석은 신앙에 몰두해서 삶이 피폐해져 가고 정상적인 가정생활이나 사회생활을 포기하게 된다면 어찌 그 가족이나 주변 사람들에게 기쁨이 될 수 있겠는가.

 

고린도후서 2장 4절에 보면 사도 바울은 고린도교회의 교인들로 인하여 큰 눌림과 걱정이 있었다. “내가 마음에 큰 눌림과 걱정이 있어 많은 눈물로 너희에게 썼노니 이는 너희로 근심하게 한 것이 아니요”라고 편지했다. 그렇지 않나. 사람이 걱정거리 있으면 걱정하게 되고, 근심거리 있으면 근심하게 되는 것이 정상적이지 않나.

 

사랑하는 가족이 갑자기 세상을 떠났다든지, 사랑하는 가족이 갑자기 중병에 걸렸다든지, 내 몸이 심각한 병에 걸렸다든지, 장래가 촉망되던 아들딸이 큰 사고를 당하여 평생 불행한 형편이 되었다든지, 혹은 잘 되던 사업이 부도를 맞아서 모든 살림살이를 다 정리하고 빈털터리가 된 채로 월세 방을 전전긍긍하게 되었다면 어찌 기뻐할 수 있겠는가.

 

팔레스틴에는 “햇볕만 항상 쪼이면 사막이 된다.”는 속담이 있다. 항상 좋은 것이 항상 좋은 것이 아니다. 살다 보면 이럴 때도 있고 저럴 때도 있다. 바람이 불기 때문에 돛단배가 항해 할 수 있는 것이다. 항상 바람 한 점 없이 고요하면 돛 단 배는 제 자리에서 뱅뱅 맴만 돌고 말 것이다. 인생은 별의 별 우여곡절을 다 겪으며 살기에 “주 안에서 항상 기뻐하라.”는 사도 바울의 권면이 도전이 되는 것이다.

 

그러면 과연 누가 주 안에서 항상 기뻐하며 살 수 있는 자일까. 부르심과 사명을 깨달은 사람은 그 기쁨의 차원이 다르다. 역사의 현장에서 구경꾼으로 살거나 남의 뒤만 따라 가는 사람은 부르심과 사명을 따라 살아간 믿음의 선진들의 그 기쁨과 그 희열을 전혀 맛보지 못할 것이다. 요즘 수요일 밤 예배 시간에 출애굽기의 모세에 대하여 묵상하고 있다. 나이 80이 된 모세는 미디안 광야를 중심으로 호렙 산 자락을 오르고 내리며 장인 이드로의 양떼를 치는 목축 생활에 너무나 익숙해 있었다. 생각해 보라. 그런 생활이 40년이니 말이다. 그런데 어느 날 호렙 산의 떨기나무에 불이 붙는 환상을 보게 되었다. 그리고 그 앞에서 하나님의 부르심을 체험하게 되었다. "모세야 모세야 네가 선 곳은 거룩한 땅이니 네 발에서 신을 벗으라.”(출3:4-5) 이와 같은 하나님의 임재와 부르심 후에 모세는 사명의 사람으로 거듭나게 되었다. 80년 전에 나일 강에 떠내려 보낸 갈대 상자에 담긴 아기 모세를 건져 내신 하나님은 80년 세월이 지난 후에 모세를 다시 부르셨다. 부르심 가운데 살아가는 사람에게는 남들이 전혀 경험하지 못하는 남다른 기쁨이 있다. 이것은 사명자의 기쁨이다.

 

소설가들이 왜 밤을 새워 가면 소설을 쓰나. 미술가 들이 왜 밤을 새워 가면 작품을 완성해 가나. 음악하는 이들과 악기를 연주하는 이들이 왜 하루에 10시간 씩 피아노 앞을 떠나지 않고 바이올린이나 첼로를 손에서 내려놓지 않는 이유가 무엇인가. 그 안에 부르심을 따라 살아가는 작가의 기쁨과 예술가의 기쁨이 있기 때문이다. 스포츠도 마찬가지가 아닌가. 시켜서 한다면 평창 동계 올림픽에 국가를 대표하는 선수로 출전할 수 있겠나.

 

신앙생활도 마찬가지다. 사명으로 살아가는 이들은 남들이 전혀 생각해 보지도 못하고 경험해 볼 수도 없고 맛 볼 수 없는 세계의 기쁨이 주어지게 마련이다. 모세가 불순종했다면 내어 민 지팡이 앞에서 홍해가 육지처럼 둘로 갈라지는 기적을 경험할 수 있었을까.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한 모세가 지팡이를 잡은 손을 홍해를 향해 내밀자 여호와께서 큰 동풍을 밤새도록 불게 하셔서 홍해의 물이 물러가게 하셨다. 홍해가 갈라지고 마른 땅이 드러났다. 밤새도록 갈라섰던 홍해의 물길 사이로 이스라엘 백성들이 모두 다 건넜다. 그 뒤로 추격해 오는 애굽의 바로의 군대와 마병이 가득하였다. 하나님은 저들 군대를 어지럽게 하셨다. 새벽이 되자 하나님은 다시 모세에게 손을 들어 홍해를 향하여 내어 밀게 하셨다. 그 순간 하나님은 애굽의 군대와 마병들을 모조리 홍해 물 가운데 빠져 들게 하셨다. 홍해를 건넌 이스라엘 백성들 앞에서 모세는 기쁨으로 여호와 하나님을 경배하는 찬양을 지어 불렀다. 출애굽기 15장에 나오는 내용이다. “내가 여호와를 찬송하리니 그는 높고 영화로우심이요 말과 그 탄 자를 바다에 던지셨음이로다 여호와는 나의 힘이요 노래시며 나의 구원이시로다 그는 나의 하나님이시니 내가 그를 찬송할 것이요 내 아버지의 하나님이시니 내가 그를 높이리로다 여호와는 용사시니 여호와는 그의 이름이시로다.”(출15:1-3)

 

주 안에서 누리는 기쁨이란 하나님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순종하며 살아가는 사명의 사람들에게 주어지는 열매이며 상급이다. 이런 기쁨은 준비하는 사람들에게 주어지는 보상이다. 심을 때 심지 않고 가꿀 때 가꾸지 않으면 추수하는 날의 기쁨에 참여하지 못한다.

 

마태복음 25장에는 예수님의 열 처녀 비유가 나온다. 열 명의 처녀가 다 같이 신랑 오기를 기다렸다. 신랑이 더디 오므로 다 같이 졸며 잠이 들었다. 그런데 깊은 밤중에 큰 소리가 났다. "보라 신랑이로다 맞으러 나오라.” 졸며 잠이 들었던 열 명의 신부들이 일제히 깨어 일어났다. 그런데 문제는 다섯 처녀의 등불은 깜빡 깜빡 꺼져 가고 있었다. 기름을 충분히 준비했던 다른 다섯 처녀들에게 기름을 좀 나눠 달라고 했다. 자기들도 부족할 것 같으니 가서 쓸 기름을 사 오라고 했다. 다섯 처녀들이 기름을 사러 간 사이에 신랑이 도착하였다. 충분한 기름을 준비하여 불을 밝히고 신랑을 기다리던 다섯 처녀들만이 신랑과 함께 혼인 잔치에 들어갔고 문은 닫혔다. 예수님은 혼인 잔치에 들어간 처녀들은 슬기로운 자들이라고 했고 등불은 준비했으나 충분한 기름을 준비하지 못해서 기름을 사러 갔다가 결국은 혼인 잔치에 못 들어간 다섯 처녀들을 미련한 자들이라고 했다. 무슨 말씀인가. 미련한 자들은 슬기로운 자들이 누리는 기쁨을 누리지 못하게 되고 만다. 거듭남이 그러하고 죄 사함이 그러하고 구원이 그러하고 영생이 그런 것이다.

 

주 안에서 항상 기뻐하며 살만한 기쁨을 누리는 자들은 매사가 다르다. 주 안에서 항상 기쁨을 누리며 살 줄 아는 성도라면 누군가 해야 할 일이면 내가 한다. 언젠가 해야 할 일이라면 지금 한다. 그래야 기쁨이 있고 그래야 그 기쁨이 계속될 만한 기쁨이 되는 것이다.

 

우리가 많던 적던 매주 토요일마다 전도를 한다. 몇 사람이 모이든 찬송하고 기도하고 말씀 잠시 묵상하고 길거리로 나서서 전도를 한다. 지난 몇 년 동안 묵묵하게 매주 전도 물품을 마련해서 공급한 가정이 있다. 이 곳에 새 예배당 입당 한 후에만도 천 만 원도 훨씬 넘게 전도 물품 비용을 계속해서 충당해 왔다. 이런 일은 있다고 하는 것도 아니고 많다고 하는 것도 아니다. 그런 섬김과 헌신에 따르는 기쁨이 다르기 때문이다. 이제는 전도 물품을 교회적으로 충당하는 쪽으로 가려고 한다. 여러분의 가정이 서로 서로 힘을 합칠 수 있기를 바란다. 내가 드리는 전도 물품 준비 헌금 1만원이 모이고 쌓여서 큰일을 하게 될 것이다.

 

지난주에 올 일 년 동안 모았던 꽃꽂이를 대신하는 사랑의 쌀 헌금 드린 것으로 맛있는 햅쌀 65포대를 마련해서 57곳에 보내 드렸다. 어제는 원로 목사님들과 여러 목사님들로부터 감사 문자와 전화가 폭주했다. 이 모든 소식을 온 성도들에게 전해 드리길 원한다. 주는 자의 기쁨이 받는 자의 기쁨 보다 큰 기쁨인 것을 함께 나누길 원한다. 섬김을 받는 것보다 섬기는 자의 기쁨이 훨씬 큰 기쁨이요 보람인 것을 날마다 경험하며 살아가는 우리 모두의 범사가 되기를 소원한다.

 

지금 준비해야 내일의 또 다른 기쁨이 주어진다. 이건 세상 실력도 마찬가지이고 주 안에 받아 누리는 능력과 권세도 마찬가지이다. 남 다른 희생과 헌신과 봉사를 하며 살아가는 이들은 그 기쁨을 말로 설명할 수 없다. 주 안에서 항상 기뻐하는 기쁨이란 그런 것이다. 사도 바울은 경험해서 알고 있었다. 그러므로 그는 배가 고파고 기쁘고 잠을 못 자도 기쁘고 매를 맞아도 기쁘고 배가 파선되어 죽음의 위기를 겪어도 기쁘고 일주일씩 해가 보이지 않고 밤과 낮을 구별 할 수 없는 두려움 가운데서도 구원의 여망을 안고 기뻐할 수 있었다. 바울은 로마의 감옥에서 순교의 순간이 다가 오고 있는 것을 알면서도 기쁨을 잃지 않을 수 있었다. 바울은 주 안에서 항상 기뻐하며 살 줄 알던 믿음의 거인이었다. 바울은 말한다. “주 안에서 항상 기뻐하라 내가 다시 말하노니 기뻐하라.”

 

관용.

 

‘관용’(寬容) 즉 너그러운 모습을 모든 사람에게 알게 하라고 했다. 겉으로만 너그러운 척 하고 속으로는 칼을 품는 그런 이중적인 모습을 말씀하는 것 아니다. 것으로는 미소를 띠면서 속으로는 독을 품는 그런 대인 관계를 말씀하는 것 아니다. 겉과 속이 같은 것, 표정과 진심이 같은 것을 말씀한다. 주변 사람들에게 너그럽게 대하며 살아가란 말씀이다. 여기서 말씀하는 관용이란 박해 앞에서 온유를 잃지 않는 것을 말한다. 자신에게 손해를 끼치는 자들에 대하여 넉넉히 용서하는 마음을 말한다. 감정을 격동시키는 이들에 대하여 자신의 분노와 화를 다스릴 줄 아는 절제와 인내심을 말한다. 왜 그래야 하나 “주께서 가까우시니라.”고 했다. 그렇지 않나. 이 것이 마지막 순간이라고 여긴다면 너그러워지지 않겠나. 이 사람 이제는 다시 못 만난다고 여기면 너그러워지지 않겠나. 물론 오히려 참 잘됐다. 속이 시원하다. 어서 이런 순간이 오기를 기다렸다. 그럴 수도 있긴 할 것이다. 그러나 주 안에서 살아가는 정상적인 신자라면 관용의 가치를 깨닫지 않겠는가.

 

예수님의 마지막 기도 중의 하나가 그랬고 돌에 맞아 죽어가던 스데반 집사의 기도도 그랬지 않나. 스데반 집사는 돌에 맞아 죽어가면서도 무릎을 꿇고 크게 “주 예수여 내 영혼을 받으시옵소서.”하고 부르며 기도를 이어갔다. “주여 이 죄를 그들에게 돌리지 마옵소서.”(행7:60) 그 말을 끝으로 스데반은 돌에 맞아 운명하였다. 사도행전은 그의 죽음의 순간을 “이 말을 하고 자니라.”고 표현했다. 그렇다. 관용의 집사 스데반은 그를 돌로 치는 유대주의자들 앞에서 너그러운 용서와 관용의 기도를 끝으로 주님의 품 안에서 잠이 들었다.

 

로마의 통치기에 순교한 안디옥 감독 익나티우스와 동시대 인물이었던 폴리캅은 사도 요한의 제자였다. 그는 서머나 교회의 감독이었다. 순교를 당하기 3일 전, 기도하다가 꿈을 꾸었다. 그 꿈속에서 그는 자신의 머리 곁에 있는 기둥을 보았는데 불에 타서 사라져 버렸다. 잠에서 깨어난 폴리캅은 생각하기를 자신이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화형을 당할 것으로 여겼다. 붙잡힌 폴리캅은 암피트리테(amphitrite) 사형장에 들어서자 하늘에서 음성이 들렸다. “오, 폴리캅! 남자답게 강하고 담대하라! 고통에서 담대하라!” 많은 기독교인들은 그에게 들려진 음성을 동시에 들었다. 곁에 서있는 총독은 그에게 물었다. “나이를 고려하여 봐줄 테니. 그리스도를 부인하고 황제에게 희생제를 드리는 것이 어때.” 이 말을 듣자 폴리캅은 “나는 86년 간 나의 주 예수 그리스도를 섬겼다. 하지만 그분은 나를 한 번이라도 부인하시지 않으셨다. 내가 어떻게 모든 사악한 것에서 나를 보존하시고 나를 구원하실 나의 왕이신 주님을 부인할 수 있겠는가”

 

이 말을 듣고 화가 난 총독은 야생동물의 먹이가 되게 하겠다고 위협했다. 폴리캅은 담대하게 말했다. “환난을 받는다고 해서 선이 악으로 변할 수 없지 않겠나” 그러자 총독은 화가 치밀어서 그를 화형에 처하겠다고 협박했다. 그러자 폴리캅은 “당신은 나에게 불로 위협하지만 그 불은 잠시 잠깐일 뿐이다. 하지만 하나님 심판의 불은 영원토록 불경건한 자들을 불태울 것임을 기억하여라. 지체하지 말고 원하는 대로 나를 맹수의 먹이가 되게 하던지 불에 던져 태우라. 무엇을 명하든지 나는 결코 나의 주님이신 구세주 예수 그리스도를 부인하지 않을 것이오.”

 

황제는 폴리캅 감독을 화형 시키려고 불을 피우게 하였다. 폴리캅은 참착하게 옷을 벗고 신발을 벗었다. 장작더미에 세워둔 기둥에 그의 손에 못을 박으려 하자 저항하지 않고 태연하게 받아들였다. 그의 자세에 사형관들도 감동을 받고 못을 박는 대신에 밧줄로만 그의 손을 뒤로 묶었다. 그리고 불을 지피자 화염이 치솟았다. 폴리캅은 불길 속에서 외쳤다. “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영광의 아들의 아버지시여! 당신의 거룩한 이름을 알게 하시니 감사합니다... 모든 사람들보다 뛰어나신 당신께 감사와 영광을 돌립니다. 영원하신 제사장, 사랑하신 성자 예수님과 그리고 성령님께 영광이 세세토록 있기를 원합니다. 아멘.”

 

커다란 소리의 이 기도가 끝나자 화염은 더욱 거세게 타 올랐고 그를 삽시간에 불태웠다. 이때가 주후 168년이었다. 올, 2017년 9월에는 우리나라의 극장에서 ‘폴리캅’이란 영화도 상영되었다. 어느 주일 오후에 다 함께 이 영화를 볼 수 있기를 소망한다.

 

기도와 간구.

 

성도의 특권은 기도와 간구 생활이다. 염려 대신에 감사함으로 기도하고 간구하면 때가 되면 주께서 그리스도의 평강의 가득한 응답을 누리게 될 것이다. 염려는 하나님의 인도하심에 대한 불신과 신앙심의 결핍에서 오는 증상이다. 반대로 하나님의 평강은 세상 그 어디에서도 누릴 수 없는 하나님의 상급이다. 염려 대신에 기도하고 간구하는 자들에게 그런 은혜가 임한다. 기도란 하나님을 향한 일상적인 대화이고 간구란 요구를 갖고 하나님께 매어달려 간청하며 기도하는 것을 말한다.

 

“지금까지는 너희가 내 이름으로 아무 것도 구하지 아니하였으나 구하라 그리하면 받으리니 너희 기쁨이 충만하리라.”(요16:24) 기쁨과 기도는 하나다. 늘 쉬지 않고 기도하고 항상 기뻐하며 살아가는 성도는 슬픔이 변하여 기쁨이 되게 하신다. 재가 변하여 화관이 되게 하신다. 예수 안에서 사는 이들은 살아도 주 안에서 살고 죽어도 주 안에서 죽는 삶을 사는 것이다. 그러므로 항상 기쁜 삶을 살다가 하나님 앞으로 가는 것이다. “지금은 너희가 근심하나 내가 다시 너희를 보리니 너희 마음이 기쁠 것이요 너희 기쁨을 빼앗을 자가 없으리라.”(요16:22) 이것이 무슨 말씀인가. 예수께서 고난당하시고 십자가에 죽으시는 죽음은 슬픔일이지만 예수는 죄와 죽음을 이기고 부활 승천하셨기에 기쁜 것이다. 때가 되면 다시 오실 것이기 때문에 기쁜 것이다.

 

바스커 빌의 (Basker Bill)의 신앙 간증이 있다. 그는 일주일의 생활을 이렇게 표현했다. 행복한 월요일, 복된 화요일, 즐거운 수요일, 유쾌한 목요일, 좋은 금요일, 영광스런 토요일, 하늘의 기쁨이 넘치는 주일! 이런 기쁨과 감사와 평강이 넘치는 나날을 사모하며 살아가자. 성도의 마음과 생각을 마귀에게 빼앗기지 말고 세상의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에 빼앗기지 않고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이 주시는 평강을 누리는 성도가 되자.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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