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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약 --------------------/데살로니가전서

살전 1장 1-10절(능력과 성령과 큰 확신!) - 권율

by Preacher 2023. 11. 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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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전1장 1-10

“능력과 성령과 큰 확신!”

권율 목사 2019. 11. 22

부곡중앙교회 청년부 https://blog.naver.com/ryulkwon0616

 

1 바울과 실루아노와 디모데는 하나님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데살로니가인의 교회에 편지하노니 은혜와 평강이 너희에게 있을지어다

2 우리가 너희 모두로 말미암아 항상 하나님께 감사하며 기도할 때에 너희를 기억함은

3 너희의 믿음의 역사와 사랑의 수고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소망의 인내를 우리 하나님 아버지 앞에서 끊임없이 기억함이니

4 하나님의 사랑하심을 받은 형제들아 너희를 택하심을 아노라

5 이는 우리 복음이 너희에게 말로만 이른 것이 아니라 또한 능력과 성령과 큰 확신으로 된 것임이라 우리가 너희 가운데서 너희를 위하여 어떤 사람이 된 것은 너희가 아는 바와 같으니라

6 또 너희는 많은 환난 가운데서 성령의 기쁨으로 말씀을 받아 우리와 주를 본받은 자가 되었으니

7 그러므로 너희가 마게도냐와 아가야에 있는 모든 믿는 자의 본이 되었느니라

8 주의 말씀이 너희에게로부터 마게도냐와 아가야에만 들릴 뿐 아니라 하나님을 향하는 너희 믿음의 소문이 각처에 퍼졌으므로 우리는 아무 말도 할 것이 없노라

9 그들이 우리에 대하여 스스로 말하기를 우리가 어떻게 너희 가운데에 들어갔는지와 너희가 어떻게 우상을 버리고 하나님께로 돌아와서 살아 계시고 참되신 하나님을 섬기는지와

10 또 죽은 자들 가운데서 다시 살리신 그의 아들이 하늘로부터 강림하실 것을 너희가 어떻게 기다리는지를 말하니 이는 장래의 노하심에서 우리를 건지시는 예수시니라 ​

 

오늘부터 데살로니가전서를 살펴보겠습니다. 1절에 보면 이 서신은 “바울과 실루아노(실라)와 디모데”가 “데살로니가인의 교회에” 보낸 것입니다. 편지를 쓴 사람이 3명인 것처럼 나오지만, 사실상 사도 바울이 주도적인 역할을 했습니다. 주후 51년경 고린도에서 데살로니가전서가 기록되었는데, 이때는 바울과 그의 일행이 2차 선교여행을 거의 끝마칠 무렵입니다. ​

 

데살로니가는 거대한 마게도냐 지역의 중심지였습니다. 사도행전 17장을 보면 데살로니가에 유대인들이 많이 살고 있었고, 또 유대인 회당도 세워져 있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바울과 그의 일행이 어느 날 데살로니가에 있는 유대인 회당에 들어갔습니다. 특히 사도 바울은 세 번의 안식일에 걸쳐 성경을 가지고 강론하기 시작했습니다(행17:1-2). 그는 구약성경의 뜻을 풀어서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부활을 증거하며, 자신이 전하는 예수가 바로 그리스도(메시야)라고 선포했습니다. ​

 

이때 하나님의 은혜로 헬라인의 큰 무리와 수많은 귀부인들이 복음을 받아들였습니다. 하지만 회당 지도자들을 중심으로 유대인들의 극심한 반대가 곧 시작되었습니다. 심지어 불량배들을 동원해서 성을 소동하게 만들었습니다. 폭도들이 바울과 실라를 찾지 못하자 이들에게 숙식을 제공했던 야손을 “읍장들”에게로 끌고 갔습니다. 억울하게도(?) 야손이 주의 종들을 대신하여 보석금을 지불했고, 이제 더 이상 바울과 그 일행이 데살로니가에 거주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

 

이러한 박해 가운데 생겨난 교회가 바로 “데살로니가인의 교회”입니다(1절). 6절에서 보듯이 그들은 “많은 환난 가운데서 성령의 기쁨으로 말씀을” 받았고, 사도 바울과 그 일행과 특히 주님을 본받는 자가 되었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실라와 디모데와 함께 이 편지를 통해 데살로니가의 성도들을 위로하고 격려하는 것입니다. ​

 

데살로니가 교회가 세워지고 부흥하는 과정이 참으로 신비롭습니다. 아까 말씀드린 것처럼, 사도 바울이 세 번의 안식일에 걸쳐 성경을 가지고 강론했을 뿐입니다. 물론 전체 체류 기간은 좀 더 길었던 것 같습니다. 그럼에도 바울이 다른 지역에 머물러 복음 사역을 했던 것에 비하면 턱없이 짧은 기간입니다. 

 

하지만 데살로니가에 임한 복음의 능력은 사그라들지 않았습니다. 8절에 보면 하나님을 향하는 그들의 믿음의 소문이 각처에 퍼지고 있었습니다. 극심한 박해 중에 턱없이 짧은 복음 사역이었음에도 그들의 믿음은 놀랍게 성장하게 되었습니다. ​

 

어떻게 해서 그 일이 가능했겠습니까? 5절을 다 같이 읽어 보겠습니다. “이는 우리 복음이 너희에게 말로만 이른 것이 아니라, 또한 능력과 성령과 큰 확신으로 된 것임이라. 우리가 너희 가운데서 너희를 위하여 어떤 사람이 된 것은 너희가 아는 바와 같으니라.” ​

 

보다시피 바울과 그의 일행이 전한 복음이 그들에게 말로만 이르지 않았습니다. 십자가의 복음이 단지 말로 전달되는 것이 아니라는 뜻입니다. 그렇다면 무엇으로 가능하다고 말하고 있습니까? “능력과 성령과 큰 확신으로” 되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

 

이 3가지는 바울의 복음 사역에 담긴 핵심 원리입니다. 바울은 사람들이 보기에 말이 시원하지가 않았습니다. 고린도후서 10장 10절에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저처럼 말이 어눌한 사람은 바울의 약함을 보며 큰 위로를 얻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자신의 말솜씨로는 복음을 믿도록 설득하는 것이 불가능함을 잘 알았습니다. 바울은 다른 서신에서도 복음을 전할 때 자신의 말로 사람들을 설득하는 것이 아니라고 역설합니다(고전2:1-5).

 

따라서 그는 자신의 말에 능력이 더해져야 함을 깨달았습니다. 이 능력은 위로부터 부어지는 성령의 능력입니다. 우리가 복음을 전할 때 사람들이 우리의 말 자체에 마음을 열고 설득되는 것이 아닙니다. 말을 유창하게 잘하면 사람들에게 감동을 줄지는 몰라도, 그 말 자체가 영혼의 회심을 불러일으킬 수는 없습니다. ​

 

우리의 말에 성령의 능력이 더해질 때 사람들은 마음을 열고 복음에 귀 기울이기 시작합니다. 사도 바울이 데살로니가의 회당에서 세 안식일 동안 성경을 강론할 때, 그의 말에 성령의 능력이 덧입혀져서 그곳의 사람들이 복음을 받아들인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그의 말을 사용하시어 복음의 능력이 나타나 그곳에 전도의 열매를 맺게 하신 것입니다. ​

 

그리고 또 하나가 있습니다. “능력과 성령과 큰 확신으로 된 것임이라”는 표현에서 “큰 확신”이라는 요소입니다. 이 확신은 복음을 전하는 자에게 있는 확신을 가리킵니다(Charles A. Wanamaker, The Epistles to the Thessalonians, 79). 다시 말해, “큰 확신”은 복음에 대한 바울의 절대적인 확신을 뜻합니다. ​

 

사도 바울은 전도할 때 복음에 대한 절대적인 확신이 있었습니다. 어떠한 박해가 와도 복음을 부인할 수 없는 “큰 확신”이 있었습니다. 제가 보기에는 데살로니가 사람들이 복음을 들었을 때 바울에게 있는 그 확신을 똑같이 느꼈습니다. ​

 

한번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그들이 유대인들의 극심한 박해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신앙을 지킬 수 있었던 힘이 어디에 있었겠습니까? 물론 성령께서 그들의 믿음을 붙들고 계셨지만, 복음에 대한 바울의 절대적인 확신이 그들에게도 똑같이 심겨진 것입니다. 성령께서 바울에게 있는 “큰 확신”을 데살로니가 성도들에게도 똑같이 심어 주셔서, 그들도 바울과 그 일행처럼 어떠한 박해가 와도 신앙을 지킬 수 있도록 역사하신 것입니다! ​

 

오늘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 교회도 매주 전도모임이 있지만, 어떠한 마음으로 우리가 복음을 전하고 있습니까? 오늘 우리는 본문 5절 말씀을 굳게 붙들어야 합니다. 우리가 전하는 복음이 말로만 지역 주민들에게 이르는 것이 아니라, “또한 능력과 성령과 큰 확신으로” 되는 것임을 분명히 깨달아야 합니다! ​

 

여러분과 저에게는 과연 복음에 대한 절대적인 확신이 있습니까? 이 복음이야말로 이 지역을 새롭게 할 수 있는 하나님의 능력이라고 정말로 확신하고 있습니까? 사람들이 우상을 버리고 참되신 하나님을 섬기게 하는 능력이 바로 십자가의 복음이라고 확신합니까? ​

 

정말로 저는 우리의 말에 성령의 능력이 더해져서 바울과 그 일행처럼 전도의 열매가 맺혀지기를 소망합니다! 여러분과 저에게 있는 복음에 대한 “큰 확신”이 지역 주민들에게도 똑같이 흘러넘쳐서, 그들도 우리와 함께 하나님 나라를 소망하며 매주 하나님을 예배할 수 있기를 소원합니다! ​

 

이 자리에 계신 여러분은 데살로니가의 성도들처럼 “하나님의 사랑하심을 받은 형제들”입니다(4절). 하나님께서 이 지역 가운데 특별히 택하시어 구원으로 인도하신 존귀한 자녀들입니다. 여러분에게 있는 “믿음의 역사와 사랑의 수고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소망의 인내”(3절)가 결코 헛되지 않음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

 

어떠한 환난이 와도 그들처럼 “성령의 기쁨으로 말씀을 받아”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본받는 자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오늘 하루도 하나님을 향하는 우리의 믿음을 굳게 지키는 복된 성도들이 되시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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