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9장
에스라 주석
양인국 목사 2013.12.05.
주님의 학교 [서신교회] http://blog.naver.com/yiksky/
에스라9장 1-15.
“1 이 일 후에 방백들이 내게 나아와 이르되 이스라엘 백성과 제사장들과 레위 사람들이 이 땅 백성들에게서 떠나지 아니하고 가나안 사람들과 헷 사람들과 브리스 사람들과 여부스 사람들과 암몬 사람들과 모압 사람들과 애굽 사람들과 아모리 사람들의 가증한 일을 행하여
2 그들의 딸을 맞이하여 아내와 며느리로 삼아 거룩한 자손이 그 지방 사람들과 서로 섞이게 하는데 방백들과 고관들이 이 죄에 더욱 으뜸이 되었다 하는지라
3 내가 이 일을 듣고 속옷과 겉옷을 찢고 머리털과 수염을 뜯으며 기가 막혀 앉으니
4 이에 이스라엘의 하나님의 말씀으로 말미암아 떠는 자가 사로잡혔던 이 사람들의 죄 때문에 다 내게로 모여오더라 내가 저녁 제사 드릴 때까지 기가 막혀 앉았더니
5 저녁 제사를 드릴 때에 내가 근심 중에 일어나서 속옷과 겉옷을 찢은 채 무릎을 꿇고 나의 하나님 여호와를 향하여 손을 들고
6 말하기를 나의 하나님이여 내가 부끄럽고 낯이 뜨거워서 감히 나의 하나님을 향하여 얼굴을 들지 못하오니 이는 우리 죄악이 많아 정수리에 넘치고 우리 허물이 커서 하늘에 미침이니이다
7 우리 조상들의 때로부터 오늘까지 우리의 죄가 심하매 우리의 죄악으로 말미암아 우리와 우리 왕들과 우리 제사장들을 여러 나라 왕들의 손에 넘기사 칼에 죽으며 사로잡히며 노략을 당하며 얼굴을 부끄럽게 하심이 오늘날과 같으니이다
8 이제 우리 하나님 여호와께서 우리에게 잠시 동안 은혜를 베푸사 얼마를 남겨 두어 피하게 하신 우리를 그 거룩한 처소에 박힌 못과 같게 하시고 우리 하나님이 우리 눈을 밝히사 우리가 종노릇 하는 중에서 조금 소생하게 하셨나이다
9 우리가 비록 노예가 되었사오나 우리 하나님이 우리를 그 종살이하는 중에 버려 두지 아니하시고 바사 왕들 앞에서 우리가 불쌍히 여김을 입고 소생하여 우리 하나님의 성전을 세우게 하시며 그 무너진 것을 수리하게 하시며 유다와 예루살렘에서 우리에게 울타리를 주셨나이다
10 우리 하나님이여 이렇게 하신 후에도 우리가 주의 계명을 저버렸사오니 이제 무슨 말씀을 하오리이까”
에스라서에서 “이 일 후에”라는 표현은 새로운 사건이나 새로운 주제를 말하고자 할 때 관용적으로 사용하고 있는 말이다. 그러므로 여기 이 말은 에스라를 지도자로 한 제2차 귀환이 이루어진 이후에 있었던 일을 말하기 위하여 사용한 관용어라고 할 수 있다. 에스라는 예루살렘 귀환한 후 사람들로부터 이스라엘이 또 다시 부패함 가운데 빠져 있다는 슬픈 소식을 들었다. “이스라엘 백성과 제사장들과 레위 사람들이 이 땅 백성들에게서 떠나지 아니하고”라는 말은 두 가지 의미가 있다. 하나는 이스라엘이 이방인을 본받아 가증한 일을 행하였다는 것과 다른 하나는 이방인들과 통혼했다는 의미다. 여기 이스라엘이 이방인들의 가증한 일을 행했다는 것은 우상숭배와 관련된 것을 말할 것이다. 당시 가나안 사람들은 우상에게 제사한 후 풍요(다산(多産)를 바라는 의식으로서 여사제와 성적인 관계를 가졌다. 그러므로 우상숭배는 그 자체로서도 가증한 일이지만 이것은 또한 이방인과 통혼의 길을 열어주었던 것이다. 이처럼 이스라엘은 이방인의 가증한 일을 행함으로 결국은 그들과 통혼까지 하게 된 것이다. 이스라엘 가운데 이런 일이 행해지고 있다는 것 자체가 이스라엘에게 심각한 문제가 되었지만, 이런 일이 소수의 특별한 사람들에게만 있었던 것이 아니고 이스라엘 가운데 보편적(백성, 제사장들, 레위인들)으로 행해지고 있었다는 것에서 더욱 심각했다. 실제로 백성들의 지도자들이 이와 같은 부패함에 더욱 깊이 빠져 있었다. “방백들과 고관들이 이 죄에 더욱 으뜸이 되었다 하는지라(9:2)”
“내가 이 일을 듣고 속옷과 겉옷을 찢고 머리털과 수염을 뜯으며 기가 막혀 앉으니 4 이에 이스라엘의 하나님의 말씀으로 말미암아 떠는 자가 사로잡혔던 이 사람들의 죄 때문에 다 내게로 모여오더라 내가 저녁 제사 드릴 때까지 기가 막혀 앉았더니(9:3,4)” 에스라는 이스라엘의 부패함에 대한 소식을 듣고 슬픔을 이기지 못했다. “속옷과 겉옷을 찢고 머리털과 수염을 듣으며 기가 막혀 앉으니”라는 말 가운데 표현 된 행동들은 한 사람이 극도의 슬픔을 당했을 때 나타내는 표현들이다. 그는 슬픔이 너무 커서 부패한 이스라엘을 위하여 무엇을 어떻게 행할 것인지 생각조차 할 수 없었기 때문에 다만 슬퍼할 뿐 그 외에 어떤 것도 할 수 없었다. 에스라의 이와 같은 모습을 본 백성들 가운데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들이 모두 에스라에게 모였다. 여기 “하나님의 말씀으로 말미암아 떠는 자”란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를 의미한다. 이들에게 세상에서 가장 두려운 일은 하나님께 죄를 범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들은 자신들이 죄를 범하지는 않았을지라도 자기 동족이 죄를 범한 것만으로도 충분히 두려워했던 것이다.
본문에서 우리가 주목해야 할 한 가지는 에스라가 이스라엘이 지은 죄로 인하여 공개적으로 슬퍼하고 있었을 때, 백성들 가운데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들이 그에게 모였다는 것이다. 여기 “그에게 모였다”는 것은 에스라를 중심으로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들이 하나 되었다는 의미이고 또한 이들이 하나 되었다는 것은 죄를 대항할 수 있는 힘을 지니게 되었다는 의미다. 이와 같은 사실들은 우리의 믿음이 표현 될 때 역사하는 힘이 된다는 것을 교훈해 준다. 에스라가 이스라엘의 부패함에 대하여 공개적으로 슬퍼한 것은 믿음의 표현이었다. 그리고 그의 믿음은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들로 하여금 하나로 모일 수 있게 했고, 또한 그들로 하여금 이스라엘을 부패함 가운데 빠지게 하는 죄와 싸울 수 있는 힘을 지니게 했다. 그러므로 믿음을 표현하는 사람은 앉아 있어도(9:3,4) 다른 어떤 사람도 할 수 없는 위대한 일을 하게 되는 것이다.
“저녁 제사를 드릴 때에 내가 근심 중에 일어나서 속옷과 겉옷을 찢은 채 무릎을 꿇고 나의 하나님 여호와를 향하여 손을 들고 말하기를 나의 하나님이여 내가 부끄럽고 낯이 뜨거워서 감히 나의 하나님을 향하여 얼굴을 들지 못하오니 이는 우리 죄악이 많아 정수리에 넘치고 우리 허물이 커서 하늘에 미침이니이다(9:5,6)” 에스라가 이스라엘의 부패함에 대한 소식을 듣고 그토록 기가 막혀 앉아 있을 수밖에 없었던 것은 그들의 부패한 행위에 대한 반응이기 보다는 오히려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하나님 앞에 범죄한 것에 대한 죄스러움과 부끄러움 때문이었다. 이처럼 영적으로 깨어 있는 사람은 죄를 범한 사람에 대한 감정보다는 오히려 죄를 범함으로 하나님의 영광을 가린 것에 대한 죄스러움이 앞서는 것이다. 그래서 이런 사람은 죄를 범한 사람이 자신이든지 아니면 다른 사람일지라도 하나님 앞에 죄를 범했다는 것을 자각하는 순간 회개하지 않고는 견디지 못한다. 마찬가지로 에스라도 이스라엘의 부패함에 대한 소식을 듣고 하나님 앞에 나가 회개하지 않을 수 없었다. “나의 하나님이여 내가 부끄러고 낯이 뜨거워서 감히 나의 하나님을 향하여 얼굴을 들지 못하오니 이는 우리 죄악이 많아 정수리에 넘치고 우리 허물이 커서 하늘에 미침이니이다(9:5,6)”
“우리 조상들의 때로부터 오늘까지 우리의 죄가 심하매…(9:7)” 에스라는 잠시 얼굴을 이스라엘의 역사로 돌렸다. 그가 이스라엘의 역사를 보았을 그 역사는 범죄의 역사였고 또한 죄에 대한 심판의 역사였다. 그래서 에스라는 “우리 조상들의 때로부터 오늘까지 우리 죄가 심하매”라고 고백한 후 “우리와 우리 왕들과 우리 제사장들을 여러 나라 왕들의 손에 넘기사 칼에 죽으며 사로잡히며…”라고 고백하였던 것이다.
이처럼 그는 역사를 돌아본 후 또 다시 지금의 자신들의 모습을 돌아보았다. 그는 지금 자신들의 모습을 통하여 포도됨으로부터 자유를 얻어 예루살렘으로 돌아와서 성전을 건축하고 다시 하나님을 섬길 수 있는 것은 하나님께서 베풀어 주신 은혜였다는 것을 볼 수 있었다(9:8,9). 이처럼 에스라는 과거와 현재를 보며 죄를 범하여 넘어질 수밖에 없는 자신들을 하나님께서 긍휼히 여기시고 은혜를 베풀어 주심으로 지금과 같은 은혜를 누리게 해 주셨다는 것을 보았을 때, 지금 이스라엘이 또 다시 부패함에 빠지게 된 것은 하나님 앞에서 견딜 수 없는 고통으로 그에게 다가왔다. 이와 같은 그의 고통스런 마음은 다음의 고백에서 잘 나타나고 있다. “우리 하나님이여 이렇게 하신 후에도 우리가 주의 계명을 저버렸사오니 이제 무슨 말씀을 하오리이까(9:10)” 이처럼 죄와 은혜를 깊이 의식할수록 우리는 하나님 앞에 겸손해 질 수 밖에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하나님 앞에 겸손치 못하다면 그것은 하나님 앞에서 우리의 죄인 됨을 보지 못했기 때문이요 또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베풀어 주시는 은혜에 대하여 무지하기 때문이다.
9:11-15.
“11 전에 주께서 주의 종 선지자들에게 명령하여 이르시되 너희가 가서 얻으려 하는 땅은 더러운 땅이니 이는 이방 백성들이 더럽고 가증한 일을 행하여 이 끝에서 저 끝까지 그 더러움으로 채웠음이라
12 그런즉 너희 여자들을 그들의 아들들에게 주지 말고 그들의 딸들을 너희 아들들을 위하여 데려오지 말며 그들을 위하여 평화와 행복을 영원히 구하지 말라 그리하면 너희가 왕성하여 그 땅의 아름다운 것을 먹으며 그 땅을 자손에게 물려 주어 영원한 유산으로 물려 주게 되리라 하셨나이다
13 우리의 악한 행실과 큰 죄로 말미암아 이 모든 일을 당하였사오나 우리 하나님이 우리 죄악보다 형벌을 가볍게 하시고 이만큼 백성을 남겨 주셨사오니
14 우리가 어찌 다시 주의 계명을 거역하고 이 가증한 백성들과 통혼하오리이까 그리하면 주께서 어찌 우리를 멸하시고 남아 피할 자가 없도록 진노하시지 아니하시리이까
15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여 주는 의로우시니 우리가 남아 피한 것이 오늘날과 같사옵거늘 도리어 주께 범죄하였사오니 이로 말미암아 주 앞에 한 사람도 감히 서지 못하겠나이다 하니라”
에스라는 하나님의 말씀을 기억하며 이스라엘이 지은 죄가 구체적으로 무엇인지 말하고 있다. 하나님은 출애굽한 이스라엘에게 그 땅(가나안) 백성들을 용납하지 말 것과 또한 그 땅의 백성들과 통혼하지 말 것을 명하셨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스라엘은 지금 가나안 사람들을 자기 땅에 용납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그들과 통혼하고 있다. 이런 이스라엘의 행위는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명백한 불순종이고 범죄였다. 에스라는 이와 같은 죄를 기억하고 또 다시 하나님께 죄를 통회 하였다. “우리의 악한 행실과 큰 죄로 말미암아 이 모든 일을 당하였사오나 우리 하나님이 우리 죄악보다 형벌을 가볍게 하시고 이만큼 백성을 남겨 주셨사오니 우리가 어찌 다시 주의 계명을 거역하고 이 가증한 백성들과 통혼하오리이까 그리하면 주께서 어찌 우리를 멸하시고 남아 피할 자가 없도록 진노하시지 아니하시리이까(9:13,14)” 이처럼 에스라는 이스라엘이 범한 죄를 기억하며 지금 이스라엘이 죄로 인하여 당하고 있는 고난이 오히려 경한 것이라고 고백하고 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지금 은혜를 배반한 이스라엘에게 어떤 심판을 하실지라도 자신들은 어떤 변명도 할 수 없다는 것을 말했다.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여 주는 의로우시니 우리가 남아 피한 것이 오늘날과 같사옵거늘 도리어 주께 범죄하였사오니 이로 말미암아 주 앞에 한 사람도 감히 서지 못하겠나이다 하니라(9:15)” 한 사람 에스라의 통회가 부패한 이스라엘이 공동체에 어떤 영향을 미쳤을까? 경건한 에스라의 통회는 마치 캄캄한 밤에 한 줄기 빛과도 같았다. 그 빛은 사람들의 어두운 심령을 비춰주어 그들로 하여금 죄를 자각하여 통회하도록 이끌어 주었다. 이로서 이스라엘 가운데 회개 운동이 일어날 수 있었던 것이다(10:1). 이와 같은 사실은 부패한 공동체가 영적으로 각성되기 위하여 요청되는 것은 이미 영적으로 각성된 사람들의 통회하는 눈물이라는 것을 말해 준다. 이들의 눈물이 있는 한 비록 부패한 공동체일지라도 여전히 회복의 소망이 남아있는 것이다.
우리는 에스라의 모습을 통하여 부패한 시대를 회복시킬 수 있는 영적으로 각성 된 사람의 모습을 볼 수 있다. 영적으로 각성된 사람은 하나님의 은혜를 잊지 않고 있는 사람이다. 부패한 이스라엘과 에스라 사이에 존재하는 차이는 받은 은혜를 잊고 살고 있는지 아니면 기억하고 감사하며 살고 있는지로부터 오는 차이였다. 에스라는 이스라엘이 바벨론에 포로로 잡혀간 이유가 죄 때문이었다는 것을 알고 있었고, 또한 바벨론으로부터 예루살렘으로 다시 돌아올 수 있었던 것은 하나님의 은혜였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이와 같은 은혜를 알고 있는 자가 다시 부패할 수 있겠는가? 이스라엘이 다시 부패한 것은 이 은혜를 잊었기 때문이다. 그들은 너무 현실에 집착하고 영적인 것에 무관심했기 때문에 잊어서는 안 될 것을 잊어버린 것이다. 그러나 에스라는 포로됨으로부터 자유함을 얻어 예루살렘으로 다시 돌아와서 성전을 건축하고 무너진 이스라엘을 재건할 수 있게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였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러므로 이와 같은 은혜를 받은 이스라엘이 또 다시 범죄 하여 하나님의 은혜를 배반하는 것을 보았을 때 그는 견딜 수 없는 고통을 느꼈던 것이다. 이처럼 하나님의 은혜를 아는 자는 영적으로 각성되어 있을 수밖에 없고 또한 공동체가 범죄 가운데 있을 때 그들을 일깨워 회개에 이르도록 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또한 영적으로 각성된 자는 하나님 앞에서 자신이 죄인이라는 것을 알고 있는 사람이다. 에스라는 이스라엘의 부패함을 보며 갖게 된 부끄러움에 대하여 “나의 하나님이여 내가 부끄럽고 낯이 뜨거워서 감히 나의 하나님을 향하여 얼굴을 들지 못하오니 이는 우리 죄악이 많아 정수리에 넘치고 우리 허물이 커서 하늘에 미침이니이다(9:6)”라고 말했다. 만일 이스라엘이 에스라처럼 하나님 앞에서 자신들이 지은 죄를 의식하고 있었다면 또 다시 범죄 할 수 있었겠는가? 이처럼 영적으로 각성된 자와 그렇지 않은 자 사이에 존재하는 또 하나의 의 차이는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죄를 의식하고 있느냐 그렇지 못 하느냐로 부터 오는 차이인 것이다. 누구든지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죄인 됨을 의식하는 사람은 에스라처럼 범죄에 대하여 부끄러움을 느끼게 되어 회개에 이르게 될 것이다.
마지막으로 영적으로 각성 된 사람은 죄인들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을 두려워하는 자들이다. 에스라는 이스라엘의 부패를 보면서 그들이 하나님의 심판으로 인하여 또 다시 열국에 사로잡혀가지 않을까하는 두려움을 가졌다. “우리가 어찌 다시 주의 계명을 거역하고 이 가증한 백성들과 통혼하오리이까 그리하면 주께서 어찌 우리를 멸하시고 남아 피할 자가 없도록 진노하시지 아니하시리이까(9:14)” 이처럼 범죄 한 자들에 대하여 하나님의 진노가 임한다는 사실을 아는 자는 범죄하지 않는다. 비록 연약함으로 인하여 죄를 지을지라도 회개하지 않을 수 없다. 따라서 죄인들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을 두려워하는 자들은 언제나 영적으로 각성 된 삶을 사는 것이다.
2013. 12. 5. 서신교회 목사 양인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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