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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약 --------------------/예레미야애가

애 3장 19-39절(절망이 오히려 소망이 되었으니) - 이삼규

by Preacher 2024. 5. 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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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3장 19-39

절망이 오히려 소망이 되었으니

이삼규 목사 20170129

낙양교회 http://nakyang.onmam.com

 

애 3:19 내 고초와 재난 곧 쑥과 담즙을 기억하소서

애 3:20 내 마음이 그것을 기억하고 내가 낙심이 되오나

애 3:21 이것을 내가 내 마음에 담아 두었더니 그것이 오히려 나의 소망이 되었사옴은

애 3:22 여호와의 인자와 긍휼이 무궁하시므로 우리가 진멸되지 아니함이니이다

애 3:23 이것들이 아침마다 새로우니 주의 성실하심이 크시도소이다

애 3:24 내 심령에 이르기를 여호와는 나의 기업이시니 그러므로 내가 그를 바라리라 하도다

애 3:25 기다리는 자들에게나 구하는 영혼들에게 여호와는 선하시도다

애 3:26 사람이 여호와의 구원을 바라고 잠잠히 기다림이 좋도다

애 3:27 사람은 젊었을 때에 멍에를 메는 것이 좋으니

애 3:28 혼자 앉아서 잠잠할 것은 주께서 그것을 그에게 메우셨음이라

애 3:29 그대의 입을 땅의 티끌에 댈지어다 혹시 소망이 있을지로다

애 3:30 자기를 치는 자에게 뺨을 돌려대어 치욕으로 배불릴지어다

애 3:31 이는 주께서 영원하도록 버리지 아니하실 것임이며

애 3:32 그가 비록 근심하게 하시나 그의 풍부한 인자하심에 따라 긍휼히 여기실 것임이라

애 3:33 주께서 인생으로 고생하게 하시며 근심하게 하심은 본심이 아니시로다

애 3:34 세상에 있는 모든 갇힌 자들을 발로 밟는 것과

애 3:35 지존자의 얼굴 앞에서 사람의 재판을 굽게 하는 것과

애 3:36 사람의 송사를 억울하게 하는 것은 다 주께서 기쁘게 보시는 것이 아니로다

애 3:37 주의 명령이 아니면 누가 이것을 능히 말하여 이루게 할 수 있으랴

애 3:38 화와 복이 지존자의 입으로부터 나오지 아니하느냐

애 3:39 살아 있는 사람은 자기 죄들 때문에 벌을 받나니 어찌 원망하랴

 

영국의 유명한 설교가 스펄전 목사님께 한 신학생이 찾아와 이렇게 질문했습니다. “목사님도 낙망하실 때가 있습니까?” 그러자 스펄전 목사님은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적어도 지난 20년 동안은 낙망해 본 적이 없습니다. 그동안 저는 한 가지 중요한 원리를 제 삶에 적용하고 있었는데 그 원리란 계속해서 주님을 바라보는 것입니다. 저는 단 한 순간도 주님을 잊지 않으려 노력하고 있습니다. 그때부터 저는 낙망을 모릅니다.” 언제나 하나님을 바라보며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하신다는 사실을 믿는다면 사람들이 비판하거나 비웃어도 우리는 아무것도 염려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예수님도 늘 하나님을 바라보였습니다. 그분만큼 많은 반대와 조롱과 핍박을 당한 분이 또 있겠습니까?

 

“믿음의 주요 또 온전하게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 그는 그 앞에 있는 기쁨을 위하여 십자가를 참으사 부끄러움을 개의치 아니하시더니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으셨느니라.”(히 12:2)

 

예수님은 자신에게 닥친 문제를 붙들고 하늘을 우러러 보시며 하나님 아버지께 기도하셨습니다. 그리고 그분이 가셔야 했던 십자가의 길을 담담히 걸어가셨습니다. 모든 두려움과 낙심을 하나님께 맡기고 마지막에 숨을 거두시며 “다 이루었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오늘 본문을 보면 예루살렘이 완전히 파괴된 절망적인 상황에서 모든 것을 잃어버린 유다 백성을 향해 예레미야 선지자는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새로운 소망을 이야기하며 고난을 끝까지 견딜 것일 촉구합니다. 여러분에게는 어떤 문제가 있습니까? 절망적인 상황에 놓여 있습니까?

 

고난 중에도 하나님을 바라보는 이유

 

애 3:19 내 고초와 재난 곧 쑥과 담즙을 기억하소서

애 3:20 내 마음이 그것을 기억하고 내가 낙심이 되오나

 

예레미야 선지자는 자신과 민족에게 닥친 어려움을 네 가지로 설명합니다. “고초, 재난, 쑥, 담즙” 단어는 각각 다르게 쓰여 있지만 의미는 같은 것입니다. 여기에서 말하는 쑥이나 담즙은 쓴 것의 대명사라고 할 수 있습니다. 고초와 재난은 이와 같이 마시기에 힘든 쑥이나 담즙과 같은 것이라는 말입니다. 예레미야 선지자는 먼저 여호와께 자신이 당한 고초와 재난을 기억해 달라고 간구합니다. 그리고 자신도 고초와 재난을 기억하겠다고 결심합니다. 문법적으로 19절은 이해하기 어렵습니다. 그래서 ‘기억하라’는 명령형보다는 ‘나는 기억하겠다.’라고 번역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19절과 20절은 전환점으로 보는 것이 좋습니다. 여호와께 자신이 겪은 고난과 고초를 기억해달라고 요청한 19절은 고난으로부터 희망으로의 전환을 간청하는 간접적인 기도입니다. 선지자가 실제로 간구하고 싶었던 것은 그동안 많은 고난을 당했으니 이제 자비를 베푸셔서 새로운 출발을 하게 해달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에 놀라운 전환이 나타납니다.

 

애 3:21 이것을 내가 내 마음에 담아 두었더니 그것이 오히려 나의 소망이 되었사옴은

 

그가 경험한 고난을 철저히 기억하고 마음에 담아 두어 그 교훈이 무엇인지를 생각하였더니 그것이 그에게 오히려 소망이 되었다고 고백한 것입니다. 예레미야 선지자는 인내와 소망이 사라지고 낙심한 마음을 고백합니다. 그러나 역설적으로 그 사실을 생각해 내었더니 소망이 된 것입니다. 자신의 약함을 아는 것이 중요하고, 자신이 죽을병에 걸렸음을 아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로부터 무엇을 해야 할지 정확히 판단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사람은 진실에 직면하기를 두려워해서 과장하고 회피합니다. 하지만 회복의 시작은 현실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할 수 없다고 말해야 누군가 도와줄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은 완전함이 아니라 진실함입니다. 과장된 헌신보다 상하고 통회하는 심령을 기뻐하십니다. 여러분 낙심했습니까? 그렇다고 말해야 합니다. 버틸 힘이 없다면 없다고 말해야 합니다. 그때 긍휼히 여기시는 하나님의 은혜가 바로 그 순간에 여러분에게 임할 것입니다.

 

고난 중에 있었던 선지자가 다시 소망을 가질 수 있게 된 것은 어떠한 이유에서 입니까?

 

애 3:22 여호와의 인자와 긍휼이 무궁하시므로 우리가 진멸되지 아니함이니이다

애 3:23 이것들이 아침마다 새로우니 주의 성실하심이 크시도소이다

 

선지자는 현재의 절망 속에서 소망을 기대할 수 있는 근거로 여호와의 인자와 긍휼을 강조합니다. 하나님은 인자와 긍휼이 무궁하시기에 우리는 고난 중에도 다시 새롭게 하실 하나님을 기대할 수 있습니다.

 

미국의 32대 대통령 루즈벨트도 큰 고통과 아픔과 불행을 극복한 존귀한 사람입니다. 루즈벨트는 40세에 민주당 부통령 후보까지 지명되었던 장래가 촉망한 잘나가던 청년이었는데 갑작스럽게 척추성 소아마비로 하반신 불구의 장애자가 되어 휠체어를 타고 다녀야 했습니다. 세상 사람들은 모두가 루즈벨트의 정치생명은 끝났다고 말을 했습니다. 루즈벨트는 큰 고통, 아픔, 불행의 사람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루즈벨트는 살아계신 하나님을 믿는 탁월한 믿음을 가졌습니다. 고통과 아픔과 불행을 극복했습니다. 휠체어를 타고 미국에서 4선 대통령이 되어 미국의 경제공황과 위기를 극복한 미국역사에 유일하게 4선 대통령으로 존귀한 자가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도 현재의 고난과 고통에 대한 생각에서 벗어나 하나님의 무한한 사랑과 긍휼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과거에 고난 중에 있을 때에도 하나님은 늘 새로운 방식으로 다시 회복시켜주셨습니다. 우리는 성실하신 하나님을 신뢰하고 소망하며 나아갈 때 회복의 은혜를 다시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롬 5:8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

 

어떠한 고난도 하나님이 시작하신 사랑을 폐기하지는 못합니다.

 

롬 8:35 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으리요 환난이나 곤고나 박해나 기근이나 적신이나 위험이나 칼이랴

롬 8:38 내가 확신하노니 사망이나 생명이나 천사들이나 권세자들이나 현재 일이나 장래 일이나 능력이나

롬 8:39 높음이나 깊음이나 다른 어떤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으리라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가 고난당할 때 먼저 낙심하지 말고, 과거에 고난을 어떻게 극복했는지 기억을 더듬어 보아야 할 것입니다. 생각해 보면, 하나님의 자비와 긍휼로 고난을 극복하고 하나님의 더 큰 은혜를 경험한 적이 수없이 많았습니다. 그렇다면 지금의 고난도 하나님의 사랑과 긍휼을 막을 수 없습니다. 우리가 과거에 역사하신 하나님에 대해 확신한다면 지금의 절망적인 상황에서도 희망을 가질 수 있습니다. 지금 우리는 민족적으로 커다란 위기에 봉착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전혀 새로운 방식으로 이 어려움을 해결하실 것을 기대합니다. 고난을 통해 베푸실 하나님의 역사를 기대하며 낙심하지 말아야 합니다. 그러면 이번에도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를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겸손히 하나님을 기다려야 하는 이유

 

예레미야 선지자는 고난 자체를 묘사하는 것에서 더 나아가 고난 가운데 취해야 할 합당한 행동에 대해서 말합니다.

 

애 3:24 내 심령에 이르기를 여호와는 나의 기업이시니 그러므로 내가 그를 바라리라 하도다

‘여호와는 나의 기업이시니’라는 말은 본래 레위인들이 사용하는 말입니다. 그들에게는 세속적인 기업이 주어지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여호와를 기업으로 삼는다.’는 고백은 점차 진정한 신앙의 표현이 되었습니다. 선지자는 오직 여호와만을 바라는 절대적인 신앙의 단계에 돌입하게 된 것입니다.

 

예레미야가 겪은 고초와 재난, 그리고 그로 인한 쑥과 담즙의 경험은 하나님과 그분의 심판이 엄위함을 다시금 깨닫게 합니다. 고통스러운 경험은 모든 교만의 뿌리를 뽑고 하나님 앞에서 겸손하게 만듭니다. 예레미야가 다시 소망을 가질 수 있었던 이유는 하나님이 어떤 분인지 올바로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결코 의미 없이 그분의 자녀들에게 고초와 재난을 허락하시는 분은 아니십니다. 그러므로 고난 중에도 인내하며 겸손히 하나님의 구원을 바라며 기다려야 합니다.

 

애 3:25 기다리는 자들에게나 구하는 영혼들에게 여호와는 선하시도다

애 3:26 사람이 여호와의 구원을 바라고 잠잠히 기다림이 좋도다

 

선지자는 고통 중에도 선하신 하나님에 대해 고백하고, 고난을 당하고 있는 백성이 해야 할 일은 선하신 하나님이 베푸실 구원을 기다리는 것뿐이라고 말합니다.

 

고난의 멍에를 메는 것이 좋은 이유는 무엇입니까?

 

애 3:27 사람은 젊었을 때에 멍에를 메는 것이 좋으니

애 3:28 혼자 앉아서 잠잠할 것은 주께서 그것을 그에게 메우셨음이라

 

하나님은 고난을 참고 견디는 자, 겸손히 그분을 기다리는 자를 외면하지 않으십니다. 근심과 고생을 허락하시는 것이 그분의 본심은 아니십니다.

 

애 3:32 그가 비록 근심하게 하시나 그의 풍부한 인자하심에 따라 긍휼히 여기실 것임이라

애 3:33 주께서 인생으로 고생하게 하시며 근심하게 하심은 본심이 아니시로다

 

하나님은 풍부한 인자하심에 따라 긍휼을 베풀기 원하십니다. 참고 기다리는 자는 마침내 하나님의 구원을 볼 것입니다. 하나님의 선하심은 고난을 겪은 후에야 깨닫게 됩니다. 고난 뒤에 하나님의 사랑과 긍휼이 드러날 것입니다. 우리가 고생하는 것이 하나님의 본래 뜻은 아니지만, 고생은 하나님의 풍부한 인자(헤세드)를 경험하는 통로입니다. 그러므로 고난 후에 찾아올 하나님의 사랑을 기대해야 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고난에 대한 가장 합당한 자세는 인내입니다. 안타깝게도 고난이 없이는 하나님의 선하심과 인자하심과 긍휼하심을 충분히 알기가 어렵습니다. 어쩌면 고난은 하나님의 사랑과 긍휼을 아는 유일한 통로일지도 모릅니다. 하나님의 더 깊고 넓은 사랑을 알기를 원하십니까? 고난을 통과한 사람들을 보십시오. 그들이 오랫동안 기다리고 참고 겸손히 하나님을 구할 때 만난 하나님을 바라보시기 바랍니다. 자신이 당하고 있는 고난과 치욕이 나쁜 것만은 아닙니다. 지금 고난을 겪는 중이라면 원망과 불평을 죽이고 잠잠히 겸손하게 하나님을 기다려야 합니다. 이전에 알지 못했던 하나님을 만나게 될 것입니다.(동영상시청-장종택전도사 이야기)

 

억울한 일에도 공의를 기대하는 이유

 

하나님은 갇힌 자들을 압제하는 것이나 불의를 행하는 것이나 억울한 일을 당하는 것에 대해 가만히 보고만 계시지 않습니다. 전능하시고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은 세상을 보존하시고 공의로 다스리십니다. 말씀으로 세상을 창조하신 하나님이 말씀으로 세상을 주관하시고 그분의 공의에 합당하게 화와 복을 베푸십니다. 그러므로 의로우신 하나님을 믿는 자들은 억울한 일을 당하는 중에도 하나님을 기대할 수 있습니다.

 

예레미야 선지자는 하나님을 깊이 묵상하면서 세상의 모든 일들이 하나님의 섭리 아래 움직인다는 사실을 다시 한 번 깨닫습니다.

 

애 3:37 주의 명령이 아니면 누가 이것을 능히 말하여 이루게 할 수 있으랴

애 3:38 화와 복이 지존자의 입으로부터 나오지 아니하느냐

애 3:39 살아 있는 사람은 자기 죄들 때문에 벌을 받나니 어찌 원망하랴

 

우리는 선을 허락하시는 하나님은 쉽게 이해하지만, 악을 허락하시는 하나님에 대해서는 거부감을 가질 때가 있습니다. 내가 직접 죄를 지은 것도 아닌데 심판을 당하는 것처럼 여겨질 때면 그 거부감은 더욱 커집니다. 하지만 죄로 인해 타락한 인간의 모든 행동이 직접 또는 간접적으로 모든 사람에게 영향을 미친다고 본다면 우리 모두는 죄의 사슬에서 벗어나 있다고 볼 수 없습니다. 다른 사람의 죄악에 우리도 연루되어 있을 수 있습니다.

 

예레미야 시대에 유다 백성이 그들의 죄악 때문에 끔찍한 파괴와 상실을 겪은 사건은 하나님이 얼마나 인간의 악을 미워하시는지를 보여 주는 증거가 됩니다. 그 당시 유다에서는 법 집행이 공정하게 이루어지지 않았고, 약한 자가 고통과 굴욕을 당하고, 타락한 지도자가 사회를 지배하였습니다. 유다 백성은 여호와 하나님에 대한 경외심을 버리고 이방신을 섬겼습니다. 이것은 그들이 하나님과 율법의 권위를 인정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본심이 무엇입니까? 인생으로 고생하게 하며 근심하게 하심은 본심이 아닙니다.

 

민 6:24 여호와는 네게 복을 주시고 너를 지키시기를 원하며

민 6:25 여호와는 그의 얼굴을 네게 비추사 은혜 베푸시기를 원하며

민 6:26 여호와는 그 얼굴을 네게로 향하여 드사 평강 주시기를 원하노라 할지니라 하라

 

이 일을 위해 하나님은 오늘도 주권적으로 우리의 삶에 간섭하시고 우리를 위해 일하십니다. 세상에서 압제 당하고 불의하고 억울한 일을 겪는 자들이 하나님을 바라보아야 하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하나님은 이 세상을 공의로 심판하시기 때문입니다. 세상에서 압제 당하고 고통받는 자들을 그냥 보고만 계시지는 않으십니다. 죄에 대해서는 반드시 벌하시고 억울한 자의 처지를 돌보십니다. 하나님은 불의한 세상에서 고통당하는 자들을 대신해서 싸우시며 공의를 바로 세우십니다. 하나님은 말씀 그대로 행하시며 화와 복을 주관하시는 지존자이십니다. 화와 복이 하나님께 달려 있음을 믿어야 합니다. 새해를 맞이해서 여러분 복 받기를 원하시지요? 복의 근원은 하나님이십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세상에는 부당한 고통과 고난이 존재합니다. 억울한 일을 당해도 하소연할 곳이 마땅치 않습니다. 하나님은 이런 부당한 상황과 고통스러운 형편을 기뻐하시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압제와 불의를 행하는 자를 반드시 심판하시고 억울한 자의 형편을 돌보아 주시고 공의를 바로 세우실 것입니다. 그러므로 자신의 죄를 숨기지 말고 속히 회개하고 돌이켜야 합니다. 또한 자신의 억울함에 대해서는 하나님께 탄원해야 합니다. 사람의 눈에는 더디게 보일지라도 만물을 주관하시는 하나님이 반드시 공의로 세상을 심판하시고 모든 불의를 바로 잡아 주실 것입니다.

 

슬픈 중에도 희망의 노래를 부를 수 있는 이유는 살아 계신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기 때문입니다. 다시금 희망을 노래하며 힘차게 새해를 출발하시는 우리 성도님들이 다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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