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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약 --------------------/야고보서

약 5장 13-18절(공동체와 기도) - 최태선

by Preacher 2023. 11. 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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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5장 13-18

공동체와 기도

최태선 목사 2014.6.29.

어지니교회 http://cafe.daum.net/eojini/

 

지난 해 1월 공동체 운동과 유기농업의 산 증인 원경선 평화원 원장님이 타계했습니다. '풀무원 농장' 설립자이기도 한 원 원장님 노환으로 향년 100세에 별세했습니다. 풀무원을 알고 있는 여러분들이지만 원경선 원장님에 대해서는 잘 모르실 것입니다. 먼저 그분에 관한 기사를 읽어드리겠습니다.

 

'한국 유기농업의 아버지'라 불리는 원 원장은 한평생 공동체 운동을 펼치며 나누는 삶을 실천했다. 평신도가 수평적으로 직제를 담당하는 '형제단(brethren)' 소속 교회에서 신앙생활을 했고, '씨알 농장'을 일군 함석헌 선생과 교류하며 농사와 신앙에 대해 이야기했다. 하나님의 말씀을 좇아 나눔과 자급자족을 강조하며, 평생 생명 농사를 지으면서 이웃 사랑과 생명 존중의 정신을 남겼다.

 

고인은 1914년 평안남도 중화군에서 가난한 농부의 아들로 태어나 열여섯 살 되던 해 아버지를 잃고 농군의 길로 들어섰다. 1955년 한국전쟁 후 마흔을 넘긴 나이에 경기도 부천 땅 1만 평을 개간해 풀무원 농장을 지어, 오갈 데 없는 이들을 위해 공동체를 운영하기 시작했다. '풀무원'이라는 이름은, 대장장이가 대장간에서 쇠를 달구듯이 농장 식구들을 하나님의 말씀과 농사일로 풀무질해 쓸모 있는 사람이 되게 하겠다는 뜻으로 지었다.

 

공동체는 초기에 가난 구제를 목적으로 삼았다. 차차 공동생활을 하며 바른 삶을 배우는 교육장으로 바뀌었다. 오전에는 성경 공부와 교양 교육을 하고, 오후에는 양계법과 영농 실습을 했다. 공동체에서 바른 삶의 방식을 배우고 농사 현장으로 간 사람만 100명이 넘었다.

 

원 원장은 일본 기독 농민이 모이는 '애농회'가 발간하는 잡지에서 유기농에 대한 글을 읽고 일본 유기농의 선구자인 고다니 준이치를 만나면서 다시 한 번 인생의 전환점을 맞았다. 화학비료와 농약으로 생명을 파괴하는 농사를 짓지 않겠다고 결심한 원 원장은, 1976년 경기도 양주로 풀무원 농장을 옮겨 유기농 농사를 시작했다. 국내 최초의 유기농 단체인 '정농회'를 만든 것도 이때다.

 

'인간 상록수'로 불리는 원 원장은 자신이 옳다고 믿는 것은 꼭 실천하며 살았다. 1961년부터 2006년까지 열린 교육으로 유명한 경남 거창고등학교 이사장을 지냈다. 거창고는 군사정권 시절 교육 당국과 마찰을 빚으며 세 번이나 폐교 위기에 몰렸으나, 그때마다 원 원장은 "타협하느니 차라리 학교 문을 닫는 것이 인격적으로 바른 교육을 하는 것"이라며 버텼다.

 

공동체 운동에서 출발해 생명 운동을 해 온 그의 삶은 국제 구호 활동과 환경 운동으로 뻗어 나갔다. 1990년 한국국제기아대책기구 창립에 참여해 가난한 이들을 돕는 운동에 동참했다. 1992년 78살의 나이에도 브라질 리우데자네이루에서 열린 유엔 세계 환경 회의에 한국 대표로 참가해 유기농 실천 운동에 대해 강연했다. 또 경제정의실천시민연합 산하 기구로 시작한 환경개발센터의 초대 이사장으로 활동했다.

 

2004년에는 충북 괴산으로 풀무원 농장 거처를 옮기고, 농장 근처에 '평화원'이라는 공동체를 세웠다. 거기서 생명 존중과 이웃 사랑을 실천하는 데 남은 생을 바쳤다. 원 원장은 유기농업을 통해 환경 보존에 이바지한 공로로 1992년 녹색인상, 1995년 유엔 글로벌 500상, 1997년 국민훈장 동백장, 1998년 인촌상을 수상했다.

 

원 원장의 장남 원혜영 의원(민주통합당)은 1981년 아버지의 정신을 따라 풀무원을 창업, 30여 년이 지난 현재 연간 매출 1조 5000억 원이 넘는 식품 기업으로 성장시켰다. 풀무원은 충북 괴산의 연수원 로하스 아카데미에 기념관을 설립해 고인의 뜻을 이어 가기로 했다.

 

사실 저는 원 원장님에 대해 전혀 몰랐습니다. 풀무원에 대해서도 잘 알지 못했습니다. 우연히 기사를 통해 원장님에 대해 듣게 되었고 이런 분이 한국에 계셨다는 사실에서 큰 기쁨을 느꼈습니다. 이분은 공동체에 대해 열망을 가진 분이셨습니다. 그래서 어디서 누가 공동체를 일군다는 소식을 들으면 달려가서 보시고 또 조언을 아끼지 않으셨습니다. 90을 넘긴 나이에도 북한산 수유동에 있는 '아름다운 마을'을 찾아오실 정도로 열정이 넘쳤습니다. 그곳에 오셔서 "아이 업고 마실 다닐 수 있는 가까운 거리에 모여 산다는 얘기에 솔깃했습니다. 어떻게 사는지 배울까 해서 왔습니다. 잘 부탁합니다."라고 말씀하셨다고 합니다. 그때 그분의 연세가 93세였습니다.

 

평생을 공동체를 일구며 공동체 속에서 살아오신 분이 93세에 "어떻게 사는지 배울까 해서 왔습니다."라고 말할 정도로 공동체란 어려운 것입니다. 하지만 복음은 기본적으로 공동체에게 주어진 것입니다. 만일 공동체가 없다면 우리의 신앙은 결코 복음과 일치하는 삶을 살아낼 수 없다는 것이 제가 지금까지의 주님의 인도하심 속에 배운 진리 가운데 하나입니다. 원 원장님은 입으로만 예수를 따르는 교회를 안타까워하셨습니다. 그분에 관한 글 가운데 이런 내용이 있었습니다.

 

원 원장님은 일평생 공동체 운동을 바른 먹을거리를 생산하는 것으로 이어지고, 먹고 남은 것은 이웃과 나눠야 한다는 신념까지 가졌습니다. 그리고 먹을거리를 가난한 이들과 나눌 때 진정한 평화가 온다고 생각하십니다.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달라는 주기도문의 한 구절이 바로 진정한 평화를 뜻한다고 원 원장님은 확신합니다. 그런데 "그 누구보다 주기도문을 잘 알고, 자주 외우고 한국교회가 한 번도 이 일을 실천해보자고 말하지 않는다."고 한탄하셨습니다. 예수는 너만, 네 가족만 먹지 말고 나눠 먹으라고, 그게 하나님나라라고 주기도문으로 가르쳐주셨는데, 교회는 입으로 외우기만 할 뿐 실천하지 않는다는 겁니다.

 

그분 역시 복음이 진리임을 보셨습니다. 제가 오늘 원 원장님의 이야기를 소개한 것은 오늘의 본문 역시 공동체라는 틀 안에서만 이해가 가능한 내용이기 때문입니다. 제 눈에는 그것이 보이는데 그것을 제대로 여러분에게 전달하기는 참으로 어렵다는 것을 느낍니다. 기존의 복음 이해와 그동안 교회 안에서 보아왔던 틀에서 벗어나 야고보 사도가 우리에게 전하고자 하는 진의를 전해 듣는 이 시간이 되기를 바랍니다.

 

인내하고 기도하라

 

고난을 당하고 있는 사람에게 참으라고 말하기는 어렵습니다. 기도하라고 말하기는 더 어렵습니다. 그런데 야고보 사도는 그렇게 하고 있습니다. 단순히 참는 것이 아니라 인내를 이루라고 말합니다. 인내를 이루기 위해서는 기도가 필요하다고 말합니다. 야고보 사도는 오늘 본문에서만 그렇게 권하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1장에서도 인내할 것을 가르친 후에(2-4절) 지혜가 부족하거든 하나님께 구하라고 하였습니다.(5-6절) 야고보 사도에게 있어 시험과 인내의 문제는 반드시 기도로 귀결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시험을 견디어 내야 하는 인내의 열쇠는 기도에 있습니다. '후히 주시고 꾸짖지 아니 하시는' 하나님께 '위로부터' 주시는 '온전한 은사들'과(1:14), '위로부터 오는 지혜'(3:17)를 받아야 하고 '또 하늘이 비를 주어야'(5:18) 열매를 맺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야고보 사도는 우리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너희 중에 고난당하는 자가 있느냐 저는 기도할 것이요. 즐거워하는 자가 있느냐 저는 찬송할지니라."(13)

 

듣기는 참 멋있습니다. 하지만 실제로 실천하기는 어려운 일입니다. 고난을 당할 때는 하나님을 원망하거나 다른 이들에게 도움을 청하느라 바쁩니다. 즐거울 때에는 자기 자랑을 하느라 바빠 찬송할 입이 없어집니다. 하지만 야고보 사도의 말 대로 우리는 기도하고 찬송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농부가 하늘로부터 내리는 이른 비와 늦은 비를 기다려 땅에서 나는 귀한 열매를 거두듯이, 기도를 통하여 때때로 위로부터 내려주시는 지혜나 은혜를 받지 않고는 누구도 인내를 완성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야고보 사도가 엘리야를 언급할 때에도 동일하게 비와 열매를 언급하고 있습니다.

 

인내와 기도는 하늘에서부터, 곧 위로부터 오는 은혜입니다. 이를 통해 온전한 선물이 주어지고, 이는 결국 모두 함께 역사하여 비로소 땅의 열매를 맺게 합니다. 사람의 온전함, 곧 구원을 이루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인내한다는 것은 곧 기도한다는 뜻입니다. 인내는 내가 하지만, 기도로 말미암아 참으로 견디어 낼 지혜와 능력을 얻어 열매를 맺기에 이르는 것입니다. 원리는 간단해 보이지만 막상 고난을 당하고 있는 당사자에게 이 일은 결코 당연한 일도 아니고 쉬운 일은 더더욱 아닙니다. 여러 가지 시험이 아니라 한 가지 시험을 당해도 우리는 속이 상하고 경황이 없어집니다. 마음이 분노로 들끓기도 하고 번민으로 밤을 설치기도 하지만 막상 무릎을 꿇고 기도하기란 어렵습니다. 자신이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다 해본 후에, 주변의 다른 이들의 도움을 다 청해 본 후에 더 이상 문제의 해결이 불가능해 보일 때가 되어야 기도란 것을 떠올리는 것이 인간입니다. 그래서 기도가 세 번째 순서만 되어도 훌륭한 신앙인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모든 문제를 궁극적으로 해결하실 수 있는 분은 하나님 한 분 뿐이라는 것을 잘 아는 것 같으면서도 막상 시험에 직면하면 그분을 까맣게 잊고 그분 앞에 모든 것을 쏟아놓게 되기까지는 오랜 시간이 걸립니다.

 

그것은 근본적으로 우리가 원하는 것들이 '위로부터', 곧 '하늘에서부터' 아낌없이 온전한 선물을 주실 수 있는 분에게서 온다는 확신이 흔들렸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본성적으로 우리 자신이 그 문제를 해결하려 합니다. 그 해답도 자기 자신이나 다른 사람으로부터 찾으려는 본능에 휘둘립니다. 하나님이 아니라 세상에서 그 문제를 해결하려는 것입니다. 그러나 인내를 그 귀한 열매로 인도하는 비결은 기도입니다. 하나님께 간구하는 것입니다. 단순하지만 그것이 결정적인 해결책입니다. 인내해야 하는 자는 그러므로 기도해야 합니다. 하나님께 간구해야 합니다. 거기에 그가 찾는 모든 것, 그에게 필요한 가장 중요한 것이 있기 때문입니다.

 

교회의 장로들을 청하라

 

"너희 중에 병든 자가 있느냐 저는 교회의 장로들을 청할 것이요. 그들은 주의 이름으로 기름을 바르며 위하여 기도할지라."(14)

 

이 구절은 공동체라는 선이해가 없으면 정말 오해하기 쉬운 구절입니다. 오늘날 사람들은 불치의 병이 걸리면 마지막으로 기도를 전문으로 하는 사람을 찾습니다. 우선 가장 먼저 떠올리는 사람이 자기 교회의 목사입니다. 하지만 특별히 치유의 은사가 없다고 판단되는 경우에는 다른 곳에서 기도 전문가를 찾습니다. 하지만 그러한 행위는 주술 행위와 다름이 없습니다. 여기에서 교회의 장로를 청하라는 것은 결코 그런 비슷한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우선 병이 들었다는 것은 여러 가지 시험 중에 가장 대표적인 예입니다. 주로 육체노동을 통해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더욱이 가장이 병이 들기라도 하면 그것은 당사자뿐만 아니라 가족 모두에게 시험이 되었습니다. 결국 시험을 당했을 때 교회의 장로들을 청하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교회의 장로들을 청한다는 것은 그가 기도의 전문가이거나 특별한 영적인 권위를 가지고 있기 때문이 아닙니다. 흩어진 열두 지파에 해당하는 교회들은 새로운 하나님 백성 공동체로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었습니다. 그들은 교회였고 그 가운데 한 사람은 그리스도의 몸의 지체로서, 한 사람의 시험은 공동체 모두의 시험이었습니다. 당연히 그들은 교회의 지도자인 장로들에게 알려야 하고 장로는 교회의 지체들을 소집하여 함께 기도하였을 것입니다. 그들은 하나님 나라의 백성으로서 주의 이름으로 기도하였습니다.

 

또한 기름을 바른다는 것은 성령의 임재를 상징했습니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 계실 때 그분은 성령의 권능으로 사람들을 치유하셨습니다. 부활하신 후에는 성령을 보내셨습니다. 세례를 받는다는 것은 교회의 일원이 됨은 물론 각자가 성령을 받아 성령의 전이 되는 의식이었습니다. 병이라는 시험에 처한 사람을 위해 기름을 바른다는 것은 그들 가운데 계신 성령께서 그들의 병을 고쳐주실 것이라는 믿음의 표현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성령의 권능으로 그분의 치유 사역을 그분의 몸인 교회를 위해서 계속하신다는 상징인 것입니다.

 

"믿음의 기도는 병든 자를 구원하리니 주께서 저를 일으키시리라. 혹시 죄를 범하였을지라도 사하심을 얻으리라."(15)

 

그래서 그들의 기도는 공동체 전체의 기도임과 동시에 믿음의 기도일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러므로 시험을 당해 드리는 그 기도 역시 믿음의 회복으로 이어지고 혹시 그 병이 죄로 인한 것이라도 사하심을 얻을 수 있었습니다. 특히 이어지는 말씀은 그들의 기도가 공동체적인 기도임을 더욱 분명히 드러냅니다.

 

"이러므로 너희 죄를 서로 고하며 병 낫기를 위하여 서로 기도하라. 의인의 간구는 역사하는 힘이 많으니라."(16)

 

이미 승리하신 부활의 주님이시며 이제 다시 임하셔서 공의와 긍휼의 심판주가 되실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을 가진 사람들은 그들의 고난 가운데 말의 사용에 있어 다를 수밖에 없습니다. 그들은 이제 옛 이스라엘처럼 서로 원망하고 불평하는 말들이 아니라, 죄를 사하시고 병을 낫게 하실 수 있는 그리스도의 이름 안에서 도리어 서로의 죄를 고백함으로써 치유 받고 회복될 길이 열려 있는 것입니다.

 

서로 자신의 죄를 고백하고 용서를 구하는 것은 그들이 새로운 하나님 백성 공동체가 되었음을 상징하는 행위입니다. 진정한 교회는 서로의 죄를 고백할 수 있는 곳이어야 합니다. 그곳에서 용서가 선포되고 그들이 진정으로 서로 사랑하게 될 때 세상 사람들이 예수님께서 과연 세상을 구원하실 메시아이심을 알게 되기 때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때의 회복은 단지 개인의 병이 낫는 것뿐 아니라 공동체의 회복을 의미하는 것이기에 더더욱 중요하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특히 죄의 고백은 그들이 성령의 전이 되었다는 가장 확실한 증거 가운데 하나였습니다. 그들이 서로 죄를 고백할 때 성령께서 그들을 위해 역사하시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고, 성령의 권능으로 치유가 일어날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초대교회 안에서는 언제나 병의 치유와 죄의 고백은 상호 긴밀하게 연관되어 있었습니다.

 

죄의 고백과 치유의 연관은 성령께서 공동체를 위하여 역사하실 수 있는 근거입니다. 그러므로 치유의 행위는 단순히 개인의 능력이나 은사에 의존하는 것이 아니라 공동체와 보다 더 직접적인 연관이 있는 것입니다. 병든 자가 나을 뿐만 아니라. 찢기고 나뉜 마음으로 서로 상처받고 상처를 주었던 관계들이 회복되어, 하나님을 향하여 전심으로 하나된 공동체가 되는 것입니다. 그 안에서 서로 죄를 고백하며 함께 기도함으로써 성령의 능력을 경험하며 그들은 점점 더 복음 안으로 깊이 들어가 하나님의 뜻이 땅에서도 이루어지는 하나님 나라 건설에 기여하고 하나님 나라 안에 있는 '샬롬'을 경험하게 되는 것입니다.

 

엘리야의 기도

 

"엘리야는 우리와 성정이 같은 사람이로되 저가 비 오지 않기를 간절히 기도한즉 삼 년 육 개월 동안 땅에 비가 아니 오고 다시 기도한즉 하늘이 비를 주고 땅이 열매를 내었느니라."(18)

 

야고보 사도는 "의인의 간구는 역사하는 힘이 많으니라."는 언급에 뒤이어 엘리야의 기도를 그 예로 들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야고보 사도가 말하는 '의'라는 것을 더 정확하게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어떤 맥락에서 그것을 사용했는지 돌아보겠습니다. 야고보 사도는 먼저 1장 20절에서 '하나님의 의'를 언급했습니다. 사람의 의가 아니라 하나님의 의입니다. 또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의롭게 여기셨다고 말했습니다.(2:23) 물론 아브라함은 그 믿음의 행함을 통해 온전히 의롭다 하심을 얻었습니다.(2:24) 그래서 야고보 사도가 말하는 '의'는 하나님께서 주시는 것, 곧 하나님과의 바른 관계에 들어가는 것을 말하기도 하면서 동시에 그 바른 관계 안에서 그 관계에 합당한 행함으로 온전케 되는 모습을 묘사하기도 합니다. 또한 '의'는 하나님께로부터, 위로부터 내려오는 지혜를 온유함으로 행하여 이루어지는 열매로서의 '의'로 표현되었습니다.(3:18)

 

이렇게 보면 야고보 사도에게 있어서 '의'는 우선 하나님의 것이며, 하나님께서 주시는 선물이며, 위로부터 주신 하늘의 지혜가 아니라면 이 땅에서 열매로 맺을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사람이 그 선물로서의 의를 받아 자기 안에 맺어야 하는 열매인 것도 사실입니다. 그래서 '의로운 자'의 기도는 말하자면, 하나님과의 바른 관계에 들어가는 은혜를 입고 그 관계 안에 충실히 머무는 사람의 간구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런 점에서 엘리야를 언급한 것은 그가 우리와 다른 어떤 특별한 의인이기 때문에 그의 기도가 효력이 컸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와 성정이 같은', 즉 야고보 사도의 편지를 읽는 독자들과 같이 고난을 경험하는 존재로서 그 고난 중에도 간절히 기도하여 하나님께로부터 응답을 받은 좋은 예인 것입니다.

 

특히 그의 많은 기도의 응답의 예들 가운데 삼 년 육 개월 동안 비가 오지 않다가 다시 비가 온 사례는 야고보 사도가 강조하고 싶은 내용과 잘 맞아떨어집니다. 즉 엘리야의 경우 그의 기도의 응답으로 단지 하늘에서 비가 왔다고 말하는 데서 그치지 않고, 마치 5장 앞부분에서 인내를 강조하며 '이른 비와 늦은 비'를 기다려 열매를 맺는 경우처럼 그 비의 결과로 굳이 땅이 열매를 산출했다고 표현하고 있는 것입니다. 즉 엘리야가 고난 가운데서 기도하여 응답을 받고 그래서 위로부터 비가 왔고 땅이 열매를 맺은 것처럼 '너희들'도 고난 가운데서 기도하여 위로부터 지혜와 긍휼을 얻어 끝내 열매를 맺을 수 있다고 격려하는 것입니다.

 

평범한 사람들의 비범한 공동체

 

야고보 사도의 엘리야의 기도에 대한 언급은 예수님의 말씀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나를 믿는 자는 나의 하는 일을 저도 할 것이요. 또한 이보다 큰 것도 하리니 이는 내가 아버지께로 감이니라."(요14:12)을 생각하게 합니다. 주님은 제자들에게 그들이 당신보다 더 큰 일도 할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지금 야고보 사도 역시 죽음을 맛보지 않고 하늘로 올라간 두 사람 가운데 한 사람, 변화산에서 예수님께 나타났던 두 사람 가운데 한 사람으로서 가장 믿음이 좋은 사람으로 널리 알려진 엘리야의 기도와 같은 기도를 우리들도 할 수 있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엘리야는 믿음의 거장이며, 기도의 거장입니다. 그렇다면 그는 믿음이 남달랐고, 그의 기도에는 보통 사람들에게는 없는 그 어떤 영적인 능력과 권위가 있었던 것일까요?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그렇게 생각하는 것은 지금 야고보 사도가 말하는 중심을 놓치는 것이며 복음이 말하고 있는 핵심을 깨닫지 못하는 것입니다. 만일 엘리야에게 위대한 점이 있다면 그는 하나님 앞에서 자신을 낮추는 일에 온전한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인간 예수님에게 위대한 점이 있다면 그분은 언제나 아버지의 일을 생각하고 아버지 안에서 아버지의 하시는 일을 하셨다는 것입니다. 그 일은 누구라도 하나님을 진정으로 사랑하는 사람이라면 마땅히 해야 할 일이고 할 수 있는 일입니다.

 

그러나 인간은 본성적으로 자기 자신에게 몰두하고 심취하는 존재입니다. 자신이 한 일에 대해 무한히 감탄하며 자랑하고 떠벌림으로써 다른 이들의 인정을 받고 싶어 하는 존재입니다. 그리고 그러한 인간의 성향이 하나님 앞에서 자신을 낮추지 못하게 합니다. 거의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 일에서 실패합니다. 그래서 엘리야보다 더 위대한 기도를 드리지 못하고 예수님보다 더 큰 일을 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의 교회들 안에는 얼마나 많은 믿음의 영웅들이 넘쳐납니까? 누구는 성령의 전파자이며, 누구는 치유의 달인이며, 누구는 설교의 달인이며, 누구는 전도 왕이며, 누구는 뛰어난 탤런트이며, 누구는 위대한 운동선수이며, 누구는 총리 후보로 거론되며, 누구는 공부를 잘 하며, 누구는 돈을 많이 벌었으며, 누구는 봉사의 천사이며, 누구는 희생의 대가입니다. 하지만 그들은 결코 엘리야보다 위대한 기도를 드릴 수 없고, 예수님이 하신 일보다 더 큰 일을 할 수 없습니다. 그들은 자신이 한 일을 세상이 알게 함으로써 하나님 앞에서 자신을 낮추는 일에 실패한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 나라는 평범한 사람들의 비범한 나라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자신을 낮추는 일은 하나님의 창조물인 인간으로서 가장 기본적인 의무이자 당연한 태도입니다. 하지만 그 일이 어렵습니다. 그것이 모든 범죄의 근원이기도 합니다. 세상에서 모든 일에 실패하더라도 그 한 가지 일에 성공한다면 (물론 성공했다는 자의식마저 없어야겠지만) 그는 엘리야의 기도와 예수님이 하신 일을 할 수 있으며 그보다 더 한 일들도 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런 사람들을 모아 당신의 나라를 이 땅에 세우시고 당신의 뜻을 이루십니다.

 

사랑하는 어지니교회 성도 여러분!

 

오늘의 말씀을 통해 여러분들의 의식이 변화되기를 바랍니다. 하나님 나라는 결코 위대한 인간들의 나라가 아닙니다. 그 반대로 어린아이와 같이 별 볼일 없는 존재가 되지 않으면 들어갈 수 없는 나라입니다. 자기를 부인하지 못하는 사람은 들어갈 수 없는 나라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자기를 낮출 줄 아는 것, 그것이야말로 하나님 나라의 근간이며 모든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 시대에도 그런 사람들을 찾고 계시며, 빚어 만들고 계시며 그들을 통해 일하십니다. 그들이 하는 기도는 엘리야의 기도와 같을 것이며 그들이 하는 일은 주님이 하시는 일이거나 그보다 큰 일일 것입니다. 우리 어지니교회가 그런 공동체가 되어 엘리야의 기도와 주님이 하신 일을 하는 하나님의 나라가 되기를 소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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