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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약 --------------------/야고보서

약 5장 19-20절(두 마음을 버리라!) - 최태선

by Preacher 2024. 3. 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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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5장 19-20

두 마음을 버리라!

최태선 목사 2014.7.6.

어지니교회 http://cafe.daum.net/eojini/

 

지난 해 9월 마지막 주에 시작한 야고보서에 관한 말씀이 결론에 도달했습니다. 그동안 우리가 가장 많이 사용한 단어는 '두 마음'입니다. 야고보 사도는 우리에게 믿으라고 강요하지 않습니다. 믿고 구원 받으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그는 구원이 단순히 믿기만 하면 자동적으로 주어진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구원 받기 위해서 우리는 진리 안에 머물러야 합니다. 그리고 진리 안에 머물기 위한 가장 기본적이면서도 근본적인 요구사항이 바로 '두 마음'을 한 마음으로 일원화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야고보 사도에게서 신물이 나도록 '두 마음'이라는 말을 들으면서도 우리 자신이 바로 그 '두 마음'을 가진 자임을 통감하지 않았습니다. 강 건너 불구경 하듯 하였습니다. 그 이유는 우리 주변의 거의 모든 교회들과 그 교회들을 다니고 있는 거의 모든 사람들이 우리와 다르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비장한 마음으로 결단해야 함에도 우리는 유야무야로 흘러 넘겼습니다.

 

교회에 다니는 사람들은 많습니다. 하지만 야고보 사도가 말하는 '두 마음'을 버리고 주님을 향한 오롯한 한 마음이 된 성도는 보기 어려운 시대입니다. 드물지만 그런 사람들은 추앙을 받기보다는 손가락질을 받고 있습니다. 며칠 전에도 문민정부에서 안기부장을 지냈던 장로가 문익환 목사님을 종북의 대표로 폄하하는 내용의 시국강연을 하고 대한민국은 처음부터 하나님께 드려진 나라라고 말하고 그 말을 듣는 성도들이 우레와 같은 목소리로 '아멘'이라고 외치는 모습이 보도되었습니다.

 

그보다 더 기가 막힌 기사를 하나 보았는데 그대로 인용을 하기 위해 다시 그 기사를 찾았더니 그 기사가 사라지고 없었습니다. 그 기사의 내용은 그야말로 충격적이었습니다. 한 목사가 교회를 짓기 위해 고민을 하고 기도 중에 있는데 한 사람이 찾아왔습니다. 지하에서 예배를 드리고 있는 그 교회가 건축을 생각하고 있다는 소식을 듣고 찾아왔다는 것입니다. 그는 사채업자였습니다. 은행 금리보다 조금 높지만 원하면 돈을 빌려줄 수 있다고 하였습니다. 그리고 그 돈이 한 대형교회 목사의 것임을 밝혔습니다. 목사는 그 제의를 거절하였지만 나중에 자신을 찾아왔던 사람을 한 대형교회의 여름수련회 가족 소개 장면에서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그 사람은 다름 아닌 얼마 전 자살한 한 대형교회 수석 장로였습니다. 참으로 기가 막힌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하지만 그 내용과 함께 더욱 기가 막히는 것은 그 기사가 하루 만에 사라졌다는 사실입니다. 우리가 티브이 드라마에서 보는 재벌들의 보도 통제를 기독교 안에서 똑같이 확인하는 순간이었습니다.

 

우리가 이런 일들을 통해 보아야 하는 것 역시 '두 마음'입니다. 애초부터 이런 일이 일어날 수 있는 것은 그 목사의 마음이 '두 마음'이기 때문입니다. 그의 하나님을 향한 믿음과 열정은 추호도 틀림없이 사실입니다. 하지만 그의 마음은 나뉘어 있습니다. 그래서 그는 그런 일을 저질렀던 것입니다. 그렇게 '두 마음'으로 마음이 나뉜 목사가 목회를 하는 교회에 다니는 사람들이 하나님을 향하여 오롯이 한 마음을 가질 수 있겠습니까? 그런 사람들이 과연 자신들이 믿고 있는 대로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의 공로'로 구원이 확정되었을까요? 그 교회 목사의 믿음과 전반적인 한국교회의 믿음에 따르면 그것은 절대로 번복될 수 없는 진리입니다. 하지만 우리가 이제까지 살펴온 야고보서에 따르면 그것은 사실이 아닙니다.

 

인간은 연약한 존재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영접한 후에도 그 마음이 두 마음으로 나뉘는 것은 얼마든지 가능한 일입니다. 안타깝게도 두 마음을 가진 사람은 결코 구원을 받을 수 없습니다. 그는 미혹을 당했습니다. 그는 진리의 길에서 벗어났습니다. 영접했다는 고백과 교회 안에 있다는 사실이 구원의 징표는 아니었습니다. 우리는 여기서 두 가지 중요한 사실에 이르게 됩니다. 먼저 우리는 우리의 나뉜 마음을 하나로 모아야 합니다. 그리고 나아가 두 마음을 가지고도 구원을 확신하고 있는 사람들을 돌어서게 해야 합니다. 그것이 진정한 구원을 이루는 유일하고도 온전한 길이기 때문입니다.

 

야고보 사도가 하고 싶었던 이야기

 

이제 야고보 사도는 그의 서신을 마무리합니다. 모든 글들이 그렇듯이 서문에서는 자신이 하고 싶은 말들의 실마리들을 미리 풀어놓습니다. 그리고 본문을 통해 그가 하고 싶은 말들을 요모조모로 설명한 후에 마무리를 짓습니다. 마무리를 지을 때는 당연히 그가 그동안 했던 이야기들 가운데 가장 핵심적인 내용을 반복하는 것이 상례입니다. 우리는 지금 야고보서의 마무리에 도달했습니다. 그것은 야고보 사도가 진정으로 하고 싶은 이야기입니다. 야고보 사도의 마음속에 하나님께서 주신 강력한 메시지였습니다. 지금 야고보 사도는 그것을 꺼내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는 '흩어진 열두 지파' 곧 흩어져 있는 하나님의 새로운 이스라엘, 하나님의 새로운 나라인 교회가 진리에서 떠나 방황하지 않기를 애타게 바라고 있습니다. 그들을 돌아서게 하는 것, 그것이야말로 야고보 사도의 마음속에서 불타오르고 있는 하나님의 메시지입니다. 동시에 그가 야고보서를 기록한 이유이기도 합니다. 만일 '흩어진 열두 지파'요 새로운 이스라엘인 교회 속의 형제들이 진리를 떠나지 않고 진리 안에 잘 머물고 있었다면 그는 이 서신을 쓸 필요가 없었습니다. 하지만 세상 속에 있으나 세상에 속하지 말아야 할 그리스도의 양 무리인 그들은 세상 한복판에서 온갖 유혹에 미혹되어 죄에 붙잡히고 그것을 잉태하고 거기서 사망으로 내닫는 길을 가고 있었습니다. 그들의 심령은 둘로 나뉘어져 있습니다. 한쪽은 하나님께 발을 딛고, 다른 한쪽은 세상을 향해 발을 딛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간격은 점점 더 벌어지고 있습니다.

 

그것이 바로 교회의 위기입니다. 이 절체절명의 위기 속에서 그는 외치고 있는 것입니다. 그들을 돌이켜야 하기 때문입니다. 여러분들 가운데 누구든지 진리를 떠나는 자를 보거든 그를 붙들어 돌이키게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야고보 사도의 중심에 불타오르고 있는 간절한 메시지입니다.

 

진리

 

두 마음을 가진 자들은 진리에서 떠난 자들입니다. 원래 진리는 유대적 전통에서 어떤 추상적이고 명제적인 사실보다는 언제나 삶의 방식을 의미했습니다. 오늘 본문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진리에서 떠났다는 것은 그의 삶이 진리로부터 멀어졌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진리로부터 멀어지지 않았다면 그의 삶 역시 진리로부터 멀어지지 않을 것입니다. 그래서 야고보 사도에게 진리란 단어는 무척이나 익숙한 단어입니다. 이제까지 그가 행위를 강조한 것처럼 보였던 이유도 다시 한 번 분명해집니다.

 

오늘날 기독교 진리는 교리로 환원되었습니다. 그래서 단지 머리로만 믿는 것이 용납되었습니다. 행위를 부정하는 것이야말로 진리를 수호하는 길인 것처럼 그렇게 인식이 되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래서 잘못되었다는 것입니다. 진리는 삶의 방식입니다. 삶의 방식이 진리 안에 있지 않은데 구원을 받았다고 믿는 것은 어리석은 일입니다.

 

야고보 사도는 1장18절 말씀을 통해 하나님께서 "진리의 말씀으로 우리를 낳았다.'고 말했습니다. 그리고 그의 편지를 마무리하면서 다시금 그 대목을 강조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은 하나님께서 진리의 말씀으로 낳으신 새로운 영적 백성임을 염두에 두고 '진리를 떠난 자들'이라는 표현을 하고 있다는 것을 우리 역시 염두에 두어야 할 것입니다.

 

이제 세상 속에 흩어져 있는 하나님의 새로운 이스라엘, 새로운 하나님 백성인 '열 두 지파'는 혈통이나 전통으로 만들어진 백성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친히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 곧 '진리의 말씀으로 낳은' 백성들입니다. 그래서 그들이 진리를 떠난다는 것은 단지 도덕적으로나 영적으로 잘못된 길을 걷고 있다는 정도가 아니라. 그들의 새로운 정체성 자체를 스스로 부인하는 셈이 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그들이 계속해서 진리를 떠나 세상을 따라 다른 길로 나간다면 그들은 결국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주신 정체성과 그 정체성에 포함된 영원한 길, 곧 진리의 말씀과 더불어 살고 또한 영영히 서는 길에서 벗어나고 마침내는 자신들이 누구인지조차 모르게 되는 혼동 가운데 빠지게 되는 것입니다. 그것은 구원으로부터 벗어나 파멸에 이르는 길인 것입니다.

 

우리는 여기서 개신교 구원이 가지는 교리에 한계에 부딪히게 됩니다. 칼빈의 5대 강령 가운데 하나인 견인의 교리에 따라 개신교 그리스도인들은 한 번 구원은 영원한 구원이라고 말해 왔고 그것을 믿어왔습니다. 그러나 야고보 사도가 지적하고 있는 것처럼 진리에서 떠난 자들이 있습니다. 그들은 분명 애초부터 복음을 받지 않은 자들이 아니라 흩어진 열두 지파 가운데 존재하던 사람들이었습니다. 야고보 사도에게 단호하고도 유일한 진리가 있다면 그것은 이미 우리 안에 심겨진 하나님의 말씀이 있다는 사실과 그 말씀에 따라 살 때 우리의 구원이 확실하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미혹되어 진리에서 떠난 자들을 돌아서게 하라는 것입니다. 그들이 미혹되어 진리를 떠났을 때 그들은 다시 죄인이 되었고 그 죄인을 미혹한 길에서 돌아서게 할 때 그들은 사망으로부터 구원을 받으며 허다한 죄 역시 사함을 얻게 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진리의 말씀으로 낳은 자들은 곧 그들의 영혼을 능히 구원할 마음에 심긴 말씀을 가진 자들입니다.(1:21) 결국 그들을 구원할 능력이 있는 것은 그들 안에 심긴 말씀, 곧 그들이 받아들였고 그로 인해 하나님께서 그들을 새롭게 낳으신 진리의 말씀입니다.

 

진정한 구원의 길, 마음에 심긴 말씀

 

야고보서의 결론 부분에서 야고보 사도는 자신의 마음에 가장 깊게 자리하고 있는 구원의 길, 곧 '능히 너희를 구원할 마음에 심긴 말씀'이라는 복음을 제시합니다. 그들은 하나님께서 그들을 다름 아닌 진리의 말씀으로 낳았다는 사실을 잊고 있습니다. 그것을 안다면 그들은 진리의 말씀을 향해 돌이켜야 합니다. 복음을 받은 성도는 누구나 그 심령에 '능히 그를 구원할 하나님의 말씀'이 심긴 사람입니다. 이 사실이 중요합니다. 이것이 구원의 확실한 길이기 때문입니다. 거기에는 세상을 이길 힘도 함께 주어져 있습니다. 세상을 이길 힘은 오직 진리로 돌아오는 길 뿐이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성도란 단지 교회에 등록한 교인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단지 예수 믿고 복 받은 사람을 말하는 것도 아닙니다. 집사, 장로, 권사와 같은 직분을 가진 자를 말하는 것도 아닙니다. 단지 기독교인이 아닙니다. 오직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은 신자 그 이상입니다. 성령의 은사를 받아 방언하고, 병이 낫고, 능력을 행하는 체험을 가진 신자 그 이상입니다. 그는 복음의 말씀 안에 사는 자입니다. 말씀대로 살고, 말씀대로 살기 위해 혼신의 힘을 기울이는 사람입니다.

 

야고보 사도는 성령을 강조하지 않고 처음부터 있었던 하나님의 말씀을 강조합니다. 그는 하나님의 말씀, 곧 새 언약의 말씀으로 다시 태어난 사람입니다. 성령을 받았다는 사실이 의미하는 바는 그의 안에 하나님의 율례와 법도인 율법의 완성판인 복음이 기록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심겨져 있습니다. 그가 바로 그 긍휼의 복음으로 태어났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그는 말씀의 사람입니다. 말씀의 사람으로서 말씀대로 사는 것은 당연하고도 자연스러운 일입니다. 그는 새 언약의 말씀대로 살아서 주께서 이미 성취하신 율법을 또한 성취하게 되는 것입니다.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셨던 것처럼 우리도 말씀이 되어 세상 한복판에 거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새 언약 아래서는 복음과 윤리가 결코 충돌하는 법이 없습니다. 믿음과 행위가 분리되는 경우도 없습니다.

 

그래서 야고보 사도는 성도란 세상 한복판에서 살면서도 그 풀의 꽃과 같은 세상과 함께 스러져갈 운명을 지닌 사람이 아니라, 살았고 영영히 서는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세상 한복판에서 그 말씀 속에 있는 생명과 지혜의 열매, 화평 안에서 평화의 열매를 맺는 사람입니다. 세상에 미혹되고 휩쓸려 '두 마음'으로 망해갈 사람이 아닙니다. 그들을 전심으로 사랑하시는 하나님을 전심으로 사랑하여 결국 그의 심령에 심겨진 살았고 영원한 말씀과 함께 명운을 같이 할 사람입니다. 그리고 그렇게 구원을 열매로 얻는 사람, 곧 '생명의 면류관'을 받을 사람입니다.

 

문제는 세상입니다. 그 세상은 교회 밖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교회 안에도 있고, 성도들의 심령 안에도 있습니다. 야고보 사도가 요구하는 것은 그 세상을 몰아내고, 그 세상과 짝한 마음을 몰아내는 것입니다. 그것이 진리를 떠난 자들이 진리로 돌아서는 길입니다. 그 길은 그렇게 호락호락한 길이 아닙니다. 세상은 강력한 힘을 가지고 겁을 주고 미혹하여 두려움과 의심에 빠지게 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야고보 사도는 무엇보다 인내할 것을 독려했습니다. 그리고 그 인내의 끝을 보여주었습니다. 이 모든 시련들이 실은 하나님께서 붙잡고 섭리하셔서 그들로 하여금 '온전함'에 이르게 하는 길임을 깨닫게 하려는 것입니다. 그래서 지혜를 구해야 합니다. 전체를 보고, 또 보이지 않는 영원을 보아야 하기 때문입니다. 당장 만질 수 없고 보이지 않지만 이 모든 현실 뒤에 실재하는 영적인 사실들을 깨달아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성도는 진리 안에 머물러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이며 지혜인 복음을 잊고 멀어진 자는 돌아와야 합니다. 자기 안에 이 세상과 본질상 같지 않은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 세포 안의 DNA처럼 새겨져 있다는 사실을 다시 깨달아야 합니다. 성도는 그리스도 안에서 그리스도를 따라 복음을 성취하는 사람입니다. 그는 순종하여 의에 이를 수 있습니다. 위로부터 주어지는 지혜는 우리가 간구할 때마다 풍성하고 아낌없이 주어집니다. 그래서 성도는 말씀으로 세상을 이길 수 있습니다. 자신의 죄와 그 죄로 왜곡되는 정욕의 길에서 돌이킬 수 있습니다.

 

야고보 사도의 사역

 

그래서 야고보 사도가 온 힘을 다해 하고 있던 사역이 바로 그것이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마치 바닷물에 젖은 모래가 손가락 사이로 빠져나가는 것처럼 흘러내리고 있는 흩어진 열두 지파의 세상과 작한 성도들을 붙잡아 돌이키고자 혼신의 힘을 다해 메시지를 전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의 말을 듣고 돌이키는 자는 다시 구원의 길에 들어설 것이며 그가 지었던 모든 죄들은 사해질 것이라는 것입니다. 그것이 아무리 허다할지라도 하나님의 긍휼하심은 그것을 용납하실 것이라는 말입니다.

 

하나님께서는 헛된 정욕을 따라 세상을 좇아 헤매느라 가뭄의 논바닥처럼 갈라지고 터진 심령 위로 이른 비와 늦은 비의 은혜를 쏟아 부으십니다. 처음부터 그들을 향해 전심으로 부어졌던 사랑이 이제는 그분을 바라보며 열려 있는 심령, 갈라진 논바닥처럼 낮아지고 패인 심령, 그렇게 비어진 심령 속으로 깊이 그리고 넘치도록 풍성하게 채워집니다. 그 긍휼하심과 은혜는 그들의 허다한 죄를 덮고도 남습니다. 하나님은 처음부터 그들을 향해 전심이셨습니다. 그들이 세상을 향해 두 마음을 가졌을 때도 그들을 포기하신 적이 없으셨습니다. 그분은 전심으로 당신의 창조물인 인간을 사랑하십니다. 그래서 야고보 사도는 외치고 있는 것입니다.

 

'교회여, 성도여 두 마음을 버리라! 그리고 여러분들 안에 심긴, 능히 여러분들을 구원할 하나님의 말씀을 온유함으로 받으라!'

 

우리가 이 말씀에 '예'로 응답할 때 우리는 세상을 이기는 교회가 될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가 동시에 명심해야 할 것은 우리가 그런 교회가 될 때 우리는 두 마음을 용납하고 세상과 짝하여 세상 자랑으로 넘치는 교회들로부터 집중포화를 맞게 될 것이라는 사실입니다.

 

하지만 그보다 더 무서운 적은 우리 안에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우리의 마음입니다. 우리를 붕괴시킬 수 있는 것은 우리 스스로 우리에 대하여 내리는 판단입니다. 다른 사람들이 우리를 어떻게 생각하느냐는 별로 중요하지 않습니다.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생각입니다. 사람들의 주목을 받고 보란 듯이 거창한 일을 이루고픈 마음이 늘 우리를 사로잡습니다. 우리 마음은 늘 자긍심과 경쟁심으로 발버둥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우리의 마음이 하나님을 향하여 온전히 하나가 될 때 우리의 자긍심과 경쟁심은 점점 더 줄어들 것입니다. 다른 사람들에게 우리를 증명하기 위해 노심초사하지 않게 될 것입니다. 우리의 초점은 오직 하나, 어떻게 하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있을까에 집중하게 될 것입니다.

 

성공의 기준 또한 달라질 것입니다. 세상은 명성과 성공을 아주 정확하게 측정해보라고 채근합니다. 세상은 최신 영화가 동원한 관람객 수와 벌어들인 금액을 제시합니다. 스포츠 스타가 맺은 수백, 수천만 달러짜리 계약의 세부 내용, 주식 시장과 뮤추얼 펀드의 등락을 알립니다. 여기에 요동하는 교회는 교인수와 헌금액 그리고 교회 건물의 크기를 자랑합니다. 목사의 능력과 설교와 학력을 자랑합니다. 교인들의 수준과 교양을 자랑합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우리에게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일보다 중요한 것은 없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목마른 자에게 물을 주고, 병자를 보살피고, 감옥에 갇힌 자들을 돌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것이 당신을 섬기는 일이며 우리를 구원에 이르게 하는 일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사랑하는 어지니교회 성도 여러분!

 

야고보 사도는 애끓는 마음으로 세상에 미혹되어 세상과 짝한 어리석은 성도들을 향해 외쳤습니다. 그것은 우리를 향한 말씀이기도 합니다. 만약 우리가 그 소리를 듣는다면 우리 역시 이 시대의 야고보 사도가 될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두 마음을 가지고 세상과 짝한 오늘날의 성도들을 향해 야고보 사도와 똑같이 외치는 자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그 일은 정말 어렵고 힘든 일이 될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당신의 제자들을 향해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세상에서는 너희가 환난을 당하나 볼지어다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요16:33b) 야고보 사도의 사역이 우리의 사역이 되기를 소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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