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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약 --------------------/열왕기상

왕상 21장 1-10절(그 포도원이 그렇게 탐나더냐) - 안효관

by Preacher 2023. 4. 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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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상21장 1-10

그 포도원이 그렇게 탐나더냐!

안효관 목사 2019-06-02

전주남성교회 https://https://www.nsc.or.kr/

 

세상의 모든 것을 다 가진 왕이 있었습니다. 자신이 원하는 것을 다 가진 왕이었지만 그 왕은 행복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왕은 주방 근처에서 한 요리사가 행복한 얼굴로 휘파람을 불며 채소를 다듬는 것을 보게 되었습니다. 왕이 요리사를 불러 뭐가 그리 행복한지 묻자 요리사는 이렇게 답했습니다. “폐하, 저는 말단 요리사에 불과하지만, 제 아내와 아이를 먹여 살릴 수 있어서 기쁘고, 또 늘 즐겁게 해줄 수 있어서 행복합니다. 그래서 필요한 게 많지 않습니다. 비바람을 피할 수 있는 방 한 칸과 배를 불릴 수 있는 따뜻한 음식만 있어도 충분하지요. 게다가 가족은 제게 세상을 살아갈 힘을 준답니다. 아무리 보잘 것 없는 물건을 가져가도 제 가족은 매우 만족하고 기뻐합니다. 그래서 저 역시 기쁘고 행복할 수밖에요.”

 

그 말을 들은 왕은 요리사를 물러가게 하고는 현명하다고 알려진 한 재상을 불러 요리사에 관해 이야기해 주었습니다. 그러자 재상이 빙그레 웃으며 이렇게 말합니다. “폐하, 저는 그 요리사가 아직 ‘99의 노예’가 되지 않았다고 봅니다.” 왕은 의아해하며 되물었습니다. “‘99의 노예?’ 그게 무엇인가?” 그러자 재상은 왕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폐하, 99의 노예가 무엇인지 알고 싶으시다면, 가죽 주머니에 금화 99개를 넣어서 요리사의 집 앞에 가져다 두시면 됩니다.”

 

그날 저녁 왕은 재상의 말대로 금화 99개가 든 주머니를 요리사의 집 앞에 몰래 가져다 두게 했습니다. 하루 일과를 마치고 집으로 돌아온 요리사는 그 금화 주머니를 발견하고는 얼른 집안으로 가지고 들어가서 금화를 세어 보기 시작했습니다. 당연히 금화는 99개입니다. 금화 99개를 확인한 요리사는 얼굴을 찌푸리고선 ‘혹시나 한 닢을 어딘가에 떨어뜨리지 않았나?’ 싶어 온 집안을 기어 다니며 금화를 찾았습니다. 나머지 금화 한 닢이 보일 리 없습니다. 원래 99개를 가져다놓았으니까 말입니다. 금화가 99개 밖에 없다는 것을 안 요리사는 ‘열심히 일해서 금화 100개를 채워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다음 날 아침, 요리사는 전날 금화 한 닢을 찾기 위해서 온 집안을 헤집고 다니느라 피곤했던 탓에 늦잠을 자고 말았습니다. 늦잠을 잤다는 사실을 깨달은 순간 요리사는 아내와 아이들에게 소리를 지르며 화를 냈습니다. 자신을 깨우지 않아서 금화 한 닢을 벌어야 할 귀중한 시간을 낭비하게 만들었다는 게 그 이유였습니다. 그는 아침식사도 제대로 하지 않고 출근해서 미친 듯이 일에 몰두했습니다.

 

예전처럼 콧노래를 부르거나 휘파람을 불지도 않았습니다. 얼마나 일에 몰입했던지, 왕이 자신을 몰래 지켜보고 있다는 것도 알아채지 못했습니다. 어제의 즐겁고 행복한 모습이 완전히 사라진 요리사를 보면서 왕은 크게 놀랐습니다. 금화 99개가 거저로 생겼는데, 더 행복해지기는커녕 오히려 불행해 지다니! 왕이 재상에게 그 이유를 물었습니다. “폐하, 그 요리사는 이제 99의 노예가 되었습니다. ‘99의 노예’란 가진 것이 아무리 많아도 만족하지 못하고, 부족한 1을 채워 100을 만들기 위해 죽을 힘을 다해 일에 매달리는 사람을 말합니다.”

 

여러분, 99의 노예가 된 요리사의 모습을 보면서 떠오르는 사람이 있지 않습니까? 북이스라엘의 아합왕입니다. 물론 그 내용은 많이 다르지만, 허황된 욕심의 노예가 되어버렸다는 것에서는 99의 노예가 된 요리사나 아합이나 결코 다를 바가 없습니다.

 

북 이스라엘의 아합왕은 남부러울 것이 없을 정도로 많은 것을 누리고 있는 사람입니다. 오늘 본문에는 아합의 궁전이 이스르엘에 있었다는 사실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북 이스라엘의 수도는 사마리아입니다. 당연히 아합 왕의 왕궁도 사마리아에 있었습니다. 그런데 사마리아로부터 약 40km나 떨어진 이스르엘에 또 하나의 왕궁이 있었다는 것은 그것이 우리가 흔히 쓰는 표현으로 한다면 ‘별장’과 같은 것이었다는 뜻입니다. 그리고 열왕기상 22:39절에서는 그것을 ‘상아궁’이라고 불렀습니다. ‘상아궁’이라는 말은 건물 건체가 상아로 만들었다는 뜻이 아니라 그 별장 곳곳에 상아로 된 장식품들이 많이 있었다는 뜻입니다. 상아는 이스라엘에서는 나지 않는 특산물입니다. 그래서 상아는 당시 왕이나 가질 수 있는 사치품 중에 하나였습니다. 그리고 오늘 본문에서 그 아합왕의 별장을 단순한 ‘집’(베이트)이라고 표현하지 않고 왕궁이라고 표현한 것은 그 별장의 크기가 대단했기 때문입니다. 어마어마하게 큰 집에다가 집안 곳곳에는 상아로 된 장식품이 진열되어 있을 정도로 이스르엘에 있는 아합 왕의 왕궁은 호화스러운 별장이었습니다.

 

그렇게 크고 호화스러운 별장을 가지고 있던 아합 왕에게 아쉬운 점이 하나 있었습니다. 99개의 금화를 가진 요리사에게 1개의 금화가 아쉬운 것처럼 말입니다. 그것은 바로 아합 왕의 별장 가까이에 있는 나봇이 소유한 포도원이었습니다. 상아궁을 가진 아합 왕과 달리 나봇은 조상 대대로 물려받은 포도원을 경작하며 사는 평범한 시민이었습니다. 성경에서는 종종 이스라엘을 포도원에 비유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포도원의 주인인 나봇의 이름은 ‘열매들’이라는 뜻입니다. 포도원에서 농사하는 사람에게 딱 어울리는 이름입니다. 어쩌면 나봇의 아버지가 그에게 ‘나봇’이라고 이름을 지어준 것은 조상적부터 농사를 짓던 그 포도원을 아들에게 물려주면서 그 포도원을 잘 관리하고 농사를 잘 지으라는 마음 때문이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나봇은 아합 왕이 포도원을 자신에게 팔라고 말할 때에 ‘조상으로부터 물려받은 유산을 왕에게 팔 수 없노라’고, ‘그것은 하나님께서 금하신 것’이라고 단호하게 이야기합니다. 그만큼 비록 포도원에서 농사를 짓는 아주 평범한 소시민이지만, 조상들의 유언과 하나님의 말씀을 잘 지키려고 했던 사람이 바로 나봇이었던 것입니다.

 

아합 왕은 포도원을 팔지 않겠다고 하는 나봇에게 이렇게 제안합니다. ‘지금 네가 가지고 있는 포도원보다 훨씬 더 아름다운 포도원과 바꿔 주겠다. 만일 다른 포도원 대신 돈으로 원한다면 네가 원하는 만큼 내가 값을 쳐서 돈으로 주마’(2절) 그럼에도 나봇은 왕의 제안을 거절합니다. 더 부자가 될 수 있고, 더 좋은 포도원을 얻을 수 있는 기회인데도 그는 그런 것에 전혀 욕심이 없었습니다. 그저 조상들에게 물려받은 포도원이기에, 그리고 자기 가문에게 하나님께서 주신 것이기에 하나님께서 금하신다는 이유로 그는 더 큰 부자가 되는 것을 포기했던 것입니다.

 

그런 나봇과는 달리 아합 왕은 욕심으로 가득 찬 사람이었습니다. 여러분, 상아궁을 갖고 호화스러운 생활을 하는 아합 왕이 나봇의 포도원을 그렇게도 탐냈던 이유가 무엇인지 아십니까? 오늘 본문 2절에서 그 이유를 이렇게 설명합니다. “네 포도원이 내 왕궁 곁에 가까이 있으니 내게 주어 채소밭을 삼게 하라.” 여기서 ‘채소밭’이라는 말은 푸른 정원을 의미합니다. ‘밭’이라는 말은 창세기 2장에서 하나님께서 만드신 에덴동산을 이야기할 때 ‘동산’이라는 말로 번역된 그 단어와 같은 단어입니다. 그러니까 아합은 자신의 왕궁 가까이에 있는 나봇의 포도원을 자기 것 삼아서 에덴동산과 같은 푸른 정원을 만들어 더 호화스러운 생활을 하고 싶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아합이 나봇의 포도원으로 자기의 정원을 만들어 호화스러운 생활을 하겠다고 생각한 것은 단순히 나봇의 포도원을 빼앗으려는 것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닙니다. 앞서 말씀드린 것처럼 성경은 종종 이스라엘을 하나님의 포도원으로 비유하곤 합니다. 포도원이 하나님의 백성인 이스라엘을 가리키는 것이라면, 지금 성경은 아합의 더 큰 죄악을 비유적으로 적나라하게 폭로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백성인 이스라엘을 빼앗아 자기의 욕망이나 호화스러운 생활을 하는 도구로 사용하려 한다는 것입니다.

 

실제로 아합이 그랬습니다.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백성입니다. 하나님의 백성이기에 하나님을 섬겨야 합니다. 그런데 지금 아합과 그의 아내인 왕비 이세벨은 이스라엘 전역에 바알과 아세라 우상의 제단을 만들어 놓고 하나님의 백성인 이스라엘로 하여금 바알과 아세라를 섬기게 만들었습니다. 더 나아가 왕비 이세벨은 바알과 아세라 선지자들을 보호하고 육성하는데 엄청난 후원을 아끼지 않았습니다.

 

열왕기상 18:19절에서 이렇게 말씀합니다. ‘이세벨의 상에서 먹는 바알의 선지자 사백오십 명과 아세라 선지자 사백 명이었다’고 말입니다. ‘이세벨의 상에서 먹는다.’는 것은 왕비 이세벨의 우상화정책에 의해서 양육되고 호보 받고 있다는 뜻입니다. 왕비의 비호 아래 있는 바알과 아세를 섬기는 우상의 선지자들이 그렇게 많았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아합 왕과 왕비 이세벨은 하나님의 백성인 이스라엘을 통째로 우상에게 넘겨주고 있는 상황입니다. 하나님의 사람들을 빼앗아 거짓된 우상에게 팔아먹는 짓을 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성경에서 나봇의 포도원을 빼앗으려고 한다는 아합과 이세셀의 악한 행위는 단순히 탐욕에서 나온 것만이 아니라 지극히 불신앙적인 모습임을 고발하고 있는 것입니다. 나봇의 포도원을 자기 것으로 만들려고 하는 자신의 계획이 잘 되어가지 않자 아합은 어찌할 줄 몰라 분노로 가득 차게 됩니다. 나봇이 포도원을 팔지 않겠다고 하자 ‘아합은 근심하고 답답하여 왕궁으로 돌아와 침상에 누워 얼굴을 돌리고 식사를 하지 않았다.’고 4절에서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 말씀을 그 의미대로 번역하면 이렇습니다. ‘포도원을 취하려는 자신의 탐욕이 이루어지지 않자 마음이 상하고 화가 나서 즉시 사마리아에 있는 자기의 궁궐로 돌아갔고, 식사도 하지 못할 정도로 낙심된 마음이 되었다.’

 

여러분, 우리의 마음에 뭔가 탐욕으로 가득 차게 되면 그것을 얻었을 때에 쾌감을 느낄 수 있습니다. 그러나 반대로 그것을 얻지 못하면 그 상심이 커서 자기 스스로 감정을 주체할 수 없는 상태에 빠지기도 합니다. 우리가 무언가 이루지 못했을 때 마음이 아픈 것은 그것에 그만큼 마음을 많이 썼기 때문이고, 큰 기대를 갖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아합이 이스르엘 별장에서 왕궁으로 돌아와서 나봇의 포도원을 취하지 못했다는 것 때문에 낙심되어 침상에 누웠고, 얼굴을 돌이켜 식사조차 하지 않았다는 것은 그 포도원을 갖고 싶은 욕망이 얼마나 컸는지를 보여주는 이야기입니다. 그렇게도 갖고 싶었지만 정상적인 방법으로는 그 포도원을 가질 수가 없었습니다. 나봇이 거절한 이유가 하나도 틀린 것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거기에서 끝나지 않았다는 데 있습니다. 아합이 그렇게 낙심되고 상심된 마음으로 음식조차 먹지 않는 모습을 본 이세벨이 자기의 방법으로 포도원을 빼앗습니다. 나봇이 사는 성읍의 지도자들인 장로들과 귀족들에게 아합 왕의 이름으로 편지를 써 보냅니다. ‘나봇이 하나님과 왕을 저주했다’는 가짜 뉴스를 만들어 퍼트리고, 거짓 증인을 내세워 나봇을 죽이라는 것입니다. 그리고는 왕과 왕비의 권력을 두려워한 성읍의 지도자들의 그런 계략에 결국 나봇은 돌에 맞아 죽임을 당하고 맙니다. 그리고선 나봇이 죽자 그 포도원을 결국 빼앗고 맙니다.

 

여러분, 보십시오. 이베셀이 음모를 꾸며 나봇을 죽이는 과정이 얼마나 비열한 짓인가 말입니다. 이세벨은 하나님을 조금도 두려워하지 않는 사람입니다. 오히려 바알과 아세라 우상을 지극정성으로 섬기는 사람입니다. 그런데 나봇을 죽일 때에는 ‘하나님을 저주했다’는 죄목을 씌웁니다. 하나님의 ‘하’자도 두려워하지 않는 사람이 음모를 꾸며 죄 없는 사람을 죽일 때에는 하나님의 이름을 이용합니다. 그렇게 해서 나봇의 포도원을 빼앗아 아합에게 줍니다.

 

아합 또한 나봇의 그 포도원이 자신의 손에 들어온 방법이 결코 바르지 않다는 것을 너무나도 잘 압니다. 그래서 나중에 엘리야 선지자의 책망을 들을 때에 자신이 잘못했음을 하나님 앞에 인정하고 자신의 옷을 찢고 굵은 베로 몸을 동이고 금식까지 했습니다.(21:27) 그런데 지금은 그 포도원을 갖고 싶다는 탐욕이 너무 커서 아내 이세벨이 나봇을 죽이고 부정한 방법으로 포도원을 빼앗았다는 것에 조금도 죄책감이 없었습니다. 드디어 포도원이 자기의 것이 되었다는 것이 너무 기뻐서 나봇이 죽었다는 말을 듣는 순간 곧바로 이스르엘로 가서 그 포도원을 차지하고 맙니다.(16절)

 

여러분, 우리 인간은 누구나 욕심을 갖고 삽니다. 마음에 욕심 없이 사는 사람은 없습니다. ‘나는 욕심 없는 사람이야!’라고 말하는 사람이 종종 있습니다. 그러나 그 ‘욕심이 없다’는 말이 모든 욕심을 다 지칭하는 것은 아닙니다. 어떤 사람은 돈에 욕심이 많지 않는 사람도 있습니다. 권력에 욕심이 없다고 말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공부에 욕심이 없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래서 공부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자신이 공부를 못해도 조금도 조급한 마음이 없습니다. 어떤 사람은 먹는 것에 욕심이 없다고 말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 외에도 욕심이 종류는 굉장히 많습니다. 그 모든 욕심에서 자유로운 사람은 하나도 없습니다. 그래서 인간에게 욕심은 타고난 것이라고 말하기도 합니다.

 

물론 욕심이 모두 나쁜 것만은 아닙니다. 뭔가를 향한 욕심이나 욕망이 있어야 사람이 성장할 수 있습니다. 공부에 대한 욕심이 있는 사람이 다른 사람보다 더 열심히 공부합니다. 뭔가에 대한 욕심이 그로 하여금 그것을 얻기 위해 노력하게 합니다. 그래서 중요한 것은 우리가 무엇에 욕심을 내느냐 하는 것입니다. 우리 인간의 내면에 생득적으로 갖고 있는 욕심을 그대로 따라갈 수는 없습니다. 왜냐하면 어떤 것은 우리를 파멸로 이끄는 욕심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를 성숙하게 만들고 아름다운 세상을 만드는 동력이 되는 욕심이라면 그것은 장려해야 하고, 끝까지 가지고 가면서 그것을 이루기 위해서 노력해야 합니다. 그러나 자기 스스로를 또는 다른 사람이나 사회를 파멸로 이끄는 욕심은 거부해야 하고 버려야 합니다. 파멸로 이끄는 욕심을 우리는 ‘탐욕’, ‘탐심’이라고 부릅니다. 탐욕이나 탐심은 반드시 버려야 합니다. 그래야만 우리가 살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그리스도 예수의 사람들은 육체와 함께 그 정욕과 탐심을 십자가에 못 박았느니라.”(갈라디아서 5:24)

 

믿음의 사람들은 우리를 파멸로 이끄는 탐심을 십자가에 못 박은 사람들입니다. 여전히 마땅히 버려야 할 탐심, 십자가에 못 박아야 할 탐심을 가득 안고 산다면 그는 지금 멸망의 길을 가고 있는 것입니다. 성경은 우리에게 끊임없이 탐심에 노예가 된 사람이 어떤 비극적인 종말을 맞게 되었는지를 가르쳐주고 있습니다. 요단강을 건너온 이스라엘 백성들이 여리고 성읍 점령할 때 탐심을 버리지 못했던 아간은 시날산의 명품 외투와 금덩이 은덩이를 빼돌린 결과 이스라엘 군대가 아이성을 점령할 때 패배하게 했을 뿐만 아니라 그와 그의 가족들이 아골골짜기에서 죽임을 당하는 비극을 맞아야 했습니다. 왕이라는 체면을 지키기 위한 탐욕에 빠졌던 이스라엘의 초대 왕 사울은 결국 하나님께 버림받게 되고, 길보아산에서 블레셋 군대와 싸우다가 자기 아들들과 함께 죽고 맙니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하나님께로부터 내 마음에 맞는 사람이라는 칭찬을 들은 다윗 왕도 정욕이라는 탐심에 끌려 간음죄를 지은 결과 그의 그 이후 인생은 고통과 아픔으로 점철된 삶을 살아야 했습니다. 은혜를 받고 다른 사람처럼 자신도 자신의 재산을 전부 어려운 사람을 위해 내놓겠다고 다짐했던 아나니아와 삽비라는 마지막 순간 탐욕에 노예가 되어 거짓말을 한 결과 부부가 한 날에 장례를 치러야 하는 비극을 겪게 되었습니다.

 

분명 우리가 욕심을 내야 할 것들은 있습니다. 우리가 신앙에 성숙한 사람이 되기 위해서는 말씀을 따라 살려고 하는 선한 마음에 대한 욕심이 있어야 합니다. 주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서 우리의 노력과 힘을 쏟으려는 욕심이 있어야 합니다. 우리에게 모범이 되고 좋은 본보기가 되는 사람을 보면서 ‘나도 저 분처럼 살고 싶다’라는 거룩한 욕심이 있어야 합니다. 그것이 우리를 성숙한 신앙인으로 만들어 줍니다.

 

그런데 우리 마음에는 그런 선한 욕심보다는 탐심에 가까운 욕심들이 훨씬 더 많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그런 탐심에 이끌려 사는 경우도 참 많습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그 탐심의 길을 가다가 멸망으로 가기도 하고, 탐심을 버리지 못해서 오히려 더 큰 손해를 보는 경우도 있습니다. 아합이 포도원을 갖고 싶다는 마음은 분명 탐심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탐심이 잘못된 것임을 깨달을 수 있는 기회가 있었습니다. 나봇으로부터 자신의 포도원은 조상적부터 물려받은 것이고, 이것을 파는 것은 하나님께서 금하신 것이라는 말을 들었을 때가 바로 그 때입니다. 나봇으로부터 그 말을 들었을 때 아합은 자신의 모습을 되돌아보아야 했습니다. 그랬다면 99의 노예가 되지 않고, 자신의 집안이 멸망할 것임을 예언하는 비극의 말씀(20-26절)을 듣지 않아도 되었을 것입니다.

 

여러분, 지금 우리 마음을 가장 강력하게 끄는 것이 무엇입니까? 그것이 선한 것입니까? 내 마음을 강력하게 끄는 것 가운데 어떤 것은 무가치한 것일 수도 있고, 아니면 나를 파멸로 이끄는 비극의 단초가 되는 것일 수도 있습니다. 아합의 포도원처럼 말입니다. 어떤 것은 우리를 성숙하게 만드는 거룩한 욕망일 수도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우리의 마음을 끄는 그것이 탐심이 되지 않게 해야 합니다. 아니 탐심에 우리의 마음을 빼앗겨서는 안 됩니다.

 

예수님은 “삼가 모든 탐심을 물리치라.”(누가복음 12:15)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주님은 친히 세상의 권력에도, 세상적 이익에도 탐심을 갖지 않으시고 오직 십자가의 길을 가셨습니다. 그 주님께서 하나님의 뜻을 이루시고 우리 모든 인류에게 구원을 선물로 가져다 주셨습니다. 우리는 그 주님의 제자들입니다. 주님의 말씀에 귀 기울여 듣고, 그 말씀에 순종하여 탐심을 십자가에 못 박고 선한 역사를 이루어가는 주님의 제자들로 사십시다. 지나치게 탐나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어쩌면 탐심에서 나온 것입니다. 99의 노예가 되지 말고, 주님의 제자가 되어 제자답게 사십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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