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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약 --------------------/열왕기상

왕상 18장 20-24절(어느 때까지 둘 사이에서 머뭇거리겠느냐) - 허창수

by Preacher 2023. 5. 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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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상18장 20 -24

어느 때까지 둘 사이에서 머뭇거리겠느냐

허창수 목사 16.09.25

동성교회 [창원시] https://https://cafe.daum.net/huhcs48/

 

본문 12절에 “너희가 어느 때까지 둘 사이에서 머뭇머뭇 하려느냐”(21)라고 엘리야가 이스라엘 백성들을 향하여 외쳤던 말씀이 있습니다. 당시 이스라엘 백성들은 바알의 우상 숭배를 적극적으로 반대하지 않고 동조하면서 나름대로 여호와 신앙도 가지고자 한 것으로 여겨집니다. 이것은 이스라엘의 종교가 여호와 신앙과 바알 신앙이 혼합된 형태의 혼합주의로 가고 있음을 보여 줍니다.

 

엘리야는 이러한 혼합주의적인 신앙에서 벗어나 오직 순수한 여호와 신앙만을 갖도록 백성들에게 외쳤습니다. 엘리야의 외침은 당시 뿐 아니라 오늘 우리에게도 외치는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오늘의 교회가 가장 주의해야 할 것은 종교혼합주의입니다. 여호와와 바알을 겸하여 섬기는 이스라엘 백성들과 다를 바 없는 오늘의 교회와 교인들이 많이 있습니다. 종교혼합주의가 교회 안에 깊이 자리 잡고 있습니다. 기독교 외 다른 종교에도 구원이 있다는 종교다원주의가 교회 안에 깊숙이 자리 잡고 있습니다.

 

그런데 많은 교인들이 이와 같은 다원주의가 교회 안에 있다는 것을 알지 못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교회의 무서운 적이요 성도들에게 있어서 무서운 암 덩어리입니다. 하나님과 우상을 겸하여 섬길 수 없습니다. 하나님 아니면 세상과 함께 멸망의 길을 선택해야 하는 것입니다.

 

세계기독교협의회(WCC)에 가입한 교회가 많습니다. 2013년에 부산 벡스코에서 총회가 열렸을 때 이를 지지하는 교회가 있는가 하면 이를 반대하는 교회가 있었습니다. 지금도 한국교회의 많은 성도들이 존경하는 김삼환 목사님이 대회장으로 앞장섰던 것을 모두가 보았을 것입니다. 그때 그분의 신앙의 색깔이 분명히 드러났습니다. 그리고 그분이 속한 통합측을 비롯한 여러 교회들의 이중적인 색깔이 드러났습니다. 온갖 이방 종교의 지도자들과 함께 ‘우리는 하나다’, ‘우리는 형제다’라고 하며 손잡고 만세를 불렀습니다. 불교의 중들과 온갖 이상한 종교 지도자들은 그들의 도복을 입고 예배당에 들어가서 그들의 신앙적인 행위를 한바가 있습니다. 그리고 목사님들이 그들과 함께 이슬람 사원과 범어사 법당에 들어가서 부처 앞에 두 손 모아 합장을 했습니다.

 

그리고 불교와 다른 종교들도 나름대로 구원이 있다고 그들은 말합니다. 분명히 한국교회가 존경하는 교계의 지도자들이 이방 종교의 지도자들과 함께 손잡았다는 것은 둘 사이에서 머뭇머뭇 하는 이스라엘 백성들과 조금도 다를 바가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너희가 어느 때가지 둘 사이에서 머뭇머뭇 하려느냐’라고 지금도 외치십니다.

 

그리고 2014년 8월에 교황이 한국을 방문했을 때 역시 온갖 종교 지도자들과 함께 통합측 총회장(김동엽 목사)이 단상에 올라가 교황과 손을 잡고 하나 되는 것을 보았을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그러한 것들이 얼마나 하나님을 섬기는 신앙에 있어서 무서운 암인가를 알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교회라고 다 진실한 교회가 아닙니다. 보이지 않는 무서운 불신이 자리 잡고 있는 교회는 참교회가 될 수 없습니다.

 

당시 아합 왕은 분명히 이스라엘의 왕으로서 여호와 하나님을 섬기어야 하지만 시돈 왕 옛바알의 딸 이세벨을 왕후로 취하였습니다. 이세벨이 그들의 바알신을 가져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섬기도록 하였습니다(왕상16:31). 이세벨은 바알을 예배하고 사마리아에 바알 신전을 건축하고 바알을 위한 제단을 쌓았습니다. 그리고 아세라 목상을 만들어 백성들로 하여금 섬기게 하였습니다.

 

이로 인하여 아합은 이스라엘의 모든 사람보다 여호와 보시기에 악을 더욱 행하여 온 백성을 바알을 섬기게 하였습니다. 그리고 여호와 하나님을 섬기는 선지자들을 비롯하여 백성들까지 다 잡아 죽였습니다. 이때 엘리야 선지자는 아합에게 “내가 섬기는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살아 계심을 두고 맹세하노니 내 말이 없으면 수 년 동안 비도 이슬도 있지 아니하리라”(왕상17:1)고 말했습니다.

 

그날 이후로 삼년 육 개월 동안 비도 이슬 한 방울도 내리지 않았습니다. 아합과 이세벨은 더욱 악하여 선지자들을 많이 죽였고 엘리야도 죽이려고 했습니다. 하나님으로부터 선택받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이방신 바알을 섬기므로 하나님께서 진노하셨습니다. 그래서 삼년 육 개월 동안 가뭄으로 온 백성들은 물이 얻지 못해 죽을 수밖에 없는 절박한 경지까지 이르렀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신을 차리지 못하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엘리야는 외쳤습니다. “어느 때까지 둘 사이에서 머뭇머뭇 하려느냐 여호와가 만일 하나님이면 그를 따르고 만일 바알이 하나님이면 그럴 따를지니라”(21)고 하며 여호와와 바알 중 어느 것을 선택하여 섬길 것을 빨리 결정하라고 재촉하였습니다. 어느 때까지 여호와와 바알 두 사이에서 머뭇거리겠느냐는 외침입니다.

 

그리고 엘리야는 여호와가 참신이시며 바알이 거짓 신이라는 것을 보여 주었습니다. 바알과 아세라 목상을 섬기는 선지자들 팔백 오십 명과 엘리야는 대결을 하였습니다. 제단을 쌓고 송아지를 잡아 제단에 올려놓고 어느 신이 불을 내려 제물을 태우는가를 보자고 했습니다. 바알과 아세라 목상의 선지자들은 하루 종일 그들의 신을 불렀지만 응답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엘리야가 기도했을 때 하늘에서 불이 내려와 송아지를 태웠습니다. 바알과 아세라 목상은 거짓 신이고 여호와가 참 신이심을 분명히 보여주었습니다.

 

여호와가 하나님이심을 확실하게 보여주었음에도 백성들은 돌아오지 않았습니다. 문제는 바로 이것입니다. 종교다원주의가 오늘의 교회 안에 엄연히 자리잡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교회일치운동’을 하고 있습니다. 일반 교인들이 볼 때는 다 같은 기독교가 하나가 되는 것은 나쁘지 않다고 합니다. 불신자들이 보기에도 교회가 나누어 서로 싸우는 것보다 하나가 되는 것은 좋다고 합니다. 교회일치가 얼마나 무서운 가를 모릅니다. 이방종교도 구원이 있다는 이중적인 믿음을 가진 교회와 일치한다는 것은 온전한 믿음을 병들게 하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여호와를 섬기는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바알을 섬기는 것도 아닌 어정쩡한 모습이였던 것으로 보아집니다. 여호와와 바알을 합리화하여 적당하게 눈치껏 신앙생활을 한 것 같습니다. 여호와를 섬기자니 아합 왕이 두렵고, 바알을 섬기자니 일찍 율법을 배운 하나님으로부터 택함 받은 백성으로서 양심의 가책을 느꼈던 것입니다.

 

이와 같은 합리주의적인 신앙은 둘 다 얻겠다는 욕심 때문입니다. 양쪽에서 다 잘 보여서 덕을 보겠다는 속샘 입니다. 세상 재미도 보고 천국에도 가겠다는 것입니다. 향략도 즐기고 출세도 하겠다는 생각입니다. 그래서 이것도 아니고 저것도 아닌 중간에서 머뭇거리고 있습니다.

 

현대 지성인의 결정적인 약점을 든다면 용기와 결단이 부족하다는 점입니다. 지식은 많으나 용기가 없고, 경제적으로 여유는 있으나 행복이 없습니다. 무엇 때문에 산다는 뚜렷한 목적 없이 살아가고 있습니다. 원하는 그 무엇을 위해서라면 죽어도 좋다고 할 만큼 확실한 목적이 분명해야 합니다. 확실한 목적이 있어야 결단을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신앙생활도 목적이 분명해야 합니다.

 

이것도 아니고 저것도 아닌 중립이나 중용은 대단히 위험합니다. 소극적이고 기회주의적인 생각은 대단히 미련합니다. 예수를 믿으려면 화끈하게 믿어야 합니다. 미쳤다고 할 만큼 믿어야 합니다. 믿는 것도 아니고 안믿는 것도 아닌 어정쩡한 믿음은 자신도 피곤 할 뿐 아니라 그를 보는 교회도 피곤합니다. 엘리야가 이스라엘 백성들의 어정쩡한 신앙자세를 보고 애가 탓습니다. 그래서 백성들을 향하여 ‘너희가 어느 때까지 둘 사이에서 머뭇머뭇 하려느냐’고 외쳤습니다.

 

오늘도 엘리야는 우리를 향하여 ‘너희가 어느 때까지 둘 사이에서 머뭇머뭇 하려느냐’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을 믿는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안 믿는 것도 아닌 것은 불행입니다. 이와 같이 이중적인 신앙생활을 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엘리야는 여호와와 바알 둘 사이에 머뭇머뭇하는 백성들을 보고 어느 것을 택하든지 빨리 택하라고 외쳤습니다.

 

오늘의 교회 안에도 이와 같은 교인들이 많습니다. 오늘의 바알은 세상 물질만능주의요 향락입니다. 바알은 풍요의 신으로 남성신이고 아세라 목상은 생산의 신으로 어머니 신입니다. 바알은 하늘에서 비를 내리는 신으로 농경적인 환경에서 매우 중요한 신으로 섬겼습니다. 그렇다면 오늘의 바알을 무엇입니까? 물질이 오늘의 바알과 같습니다. 물질 때문에 하나님을 마음껏 섬기지 못하는 것은 하나님과 물질 사이에 머뭇머뭇 하는 것입니다.

 

주일은 거룩한 날입니다. 그런데 주일을 거룩하게 지키지 못하는 것이 오늘의 바알입니다. 직장이나 사업 때문에 주일을 범하는 것은 이중적인 신앙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믿기는 하지만 세상 물질도 중요하게 여기는 것입니다. 지금도 둘 사이에서 머뭇머뭇 하고 있다는 것은 매우 어리석고 위험합니다.

 

50여 년 전에 김해여고 학생 여섯 명이 국기에 대한 경례를 하지 않으므로 해서 퇴학을 당했습니다. 국기에 대한 경례는 국기에 대한 경의를 표하고 절하는 것이므로 신앙양심으로 할 수 없다고 해서 국기에 대한 경례를 하지 않았습니다. 교장이 그들을 불러다가 달래기도 했지만 듣지 않고 끝까지 거절을 했습니다. 당시 국가적으로 국기에 대한 경례를 강조하던 때였기에 결국은 교장은 학생 여섯 명을 퇴학시켰습니다. 그들은 어떤 불이익을 당해도 신앙만을 지키고자 했던 것입니다.

 

우리나라가 한창 산업화가 되어 젊은이들은 직장에 취직을 했습니다. 그때 주일도 쉬지 않고 출근을 했습니다. 월급을 많이 주는 안정된 직장에서 오라고 해도 주일을 지키기 위해 거절했던 교인들이 한 둘이 아니였습니다. 직장에 다니면 월급을 받아 생활도 어렵지 않고 돈도 많이 벌수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주일을 지키려고 직장을 버리면 생활이 어려움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신앙을 지키려고 했던 성도들이 많았습니다.

 

그런데 어떤 교인은 주일도 직장에 나갔습니다. 그래서 돈을 많이 벌어 집도 사고 논밭도 살 수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의 가족들의 신앙은 믿는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안 믿는 것도 아닌 상태였습니다. 결국에는 자신도 그의 자녀들도 교회를 떠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믿음을 지켰던 그 자녀들은 하나님께서 축복하셨습니다. 하나님은 분명히 살아계십니다. 지금 눈앞에 보이는 것을 욕심을 내고 신앙을 버리는 것이 얼마나 어리석은 것인가를 가르쳐 줍니다.

 

요한계시록 3:16에 보면 “네가 이같이 미지근하여 더웁지도 아니하고 차지도 아니하니 내 입에서 너를 토하여 내치리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세상도 사랑하고 하나님을 사랑하는 분명하지 않은 신앙은 합당하지 않습니다. 차든지 덥든지 분명히 하라는 말씀입니다. 하나를 취한다는 것은 다른 것을 버린다는 뜻도 됩니다.

 

예수님은 ‘자기 십자가를 버리고 따르라’고 하셨습니다. 눈이 범죄하거든 빼버려라. 손이 범죄하거든 찍어버려라’고 대단한 용기를 우리에게 요구하고 계십니다. 선택하고 결정하는 용기와 포기하는 용기는 동시에 이루어집니다. 버리는 용기에서 추진력을 얻어야만 선택과 미래로 향한 진취가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버리고 끊는 위대한 용기로 새로운 것을 선택할 수 있도록 결단하라는 말씀입니다.

 

그런데 백성들은 엘리야의 외치는 소리를 듣고도 한 말도 대답지 아니하였습니다. 백성들의 묵묵부답은 왕의 권력을 무서워했기 때문이라고 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여전히 신앙의 결단을 내리지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신앙의 회색 지대란 존재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이 아니면 세상인 것입니다. 오늘날에도 신앙의 결단을 내리지를 못하고 있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산부인과에 아기를 분만할 때 가끔 있는 일입니다. 아기를 분만하다가 절박한 순간을 맞이할 때가 있습니다. 아기를 살리려면 산모가 죽고, 산모를 살리려면 아기가 죽게 되는 경우가 있습니다. 의사는 보호자로 하여금 빨리 결단하도록 재촉을 합니다. 아기를 죽일 수도 없고 산모를 죽일 수도 없다고 둘 다 살리려고 하면 둘 다 잃게 됩니다. 이 상황은 어느 편을 죽이자는 이야기가 아니라 한 사람을 살리자는 이야기입니다. 그러니까 어느 쪽을 죽인다고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를 살린다는 데에 우리의 생각을 두어야 합니다. 둘 다 얻겠다고 머뭇거리다가는 마침내 둘 다 잃어버리는 어리석음을 저지르게 됩니다. 부득이 하나를 얻기 위해서 나머지 하나를 버리는 결단의 용기가 있어야 합니다.

 

머뭇거리는 시간이 언제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순간적인 결단이 필요한 것입니다. 이 짧은 순간에 하나님의 크고 놀라운 역사가 이루어져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엘리야는 ‘너희가 어느 때까지 둘 사이에서 머뭇머뭇 하려느냐’라고 재촉하고 있습니다. 지금 여러분은 어느 쪽을 택하든지 해야 합니다. 바라고 원하옵는 것은 하나님을 섬기기를 택하시는 것입니다. 세상 것을 버리고 오직 하나님만을 섬기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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