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신약 --------------------/요한일서

요일 5장 11~12절(구원의 확신에 관하여) - 피영민

by Preacher 2023. 5. 9.
728x90
반응형

요일5장 11~12

구원의 확신에 관하여

피영민 목사 2014.10.05.

http://revpee.kjbc.or.kr/

 

<서론>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은 엄청난 특권을 받는 것입니다. 요일5:12이 그 특권입니다. “아들이 있는 자에게는 생명이 있고” 즉 영생이 있다는 것입니다. 결코 정죄함이 없을 뿐 아니라, 결코 지옥에 떨어지는 일도 없고, 영원히 하나님과 함께 사는 영생을 얻은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영생이 있다는 것을 믿는 것과 영생이 있음을 확신하는 것은 조금 다른 문제입니다. 많은 참된 성도들도 구원의 확신이 없는 경우도 있기 때문입니다. 구원받은 느낌을 갖는 날도 있고, 구원받지 못한 느낌을 갖는 날도 있는 것입니다. 침례교의 신앙고백서는 성도는 “구원의 확신”을 갖는 것이 가능한 일임을 확실하게 선언하고 있습니다. 참된 성도가 구원의 확신을 갖지 못하게 되면 구원의 기쁨을 누릴 수 없게 된다고 했습니다.

 

요일5:13은 불신자들을 위해서 기록한 말씀이 아니라 신자들이 구원의 확신을 갖도록 하기 위해서 기록된 말씀입니다. “내가 하나님의 아들의 이름을 믿는 너희에게 이것을 쓴 것은 너희로 하여금 너희에게 영생이 있음을 알게 하려 함이라”라고 했습니다.

 

Ⅰ. 성도가 구원의 확신을 가질 수 있는 근거는 무엇일까요?

 

성도가 구원의 확신을 가질 수 있는 근거는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성경은 확신을 가진 성도들의 고백으로 가득합니다.

 

1. 욥19:25~26에 “내가 알기에는 나의 구속자가 살아 계시니 후일에 그가 땅 위에 서실 것이라 (19:26) 나의 이 가죽, 이것이 썩은 후에 내가 육체 밖에서 하나님을 보리라”라고 했습니다. 욥19:27에도 “내가 친히 그를 보리니 내 눈으로 그를 보기를 외인처럼 하지 않을 것이라..”라고 했습니다. 욥은 일반적으로 구속자가 살아계시다고 말하지 않고 “나의 구속자(my redeemer)”가 살아계시다고 했습니다. 현재의 육체가 썩으면 새로운 육체를 입고 구속자를 보리라고 했습니다. 욥은 부활에 대한 확신을 가지고 있었습니다.“육체 밖에서”라고 번역된 말은 히브리어에는 “내 육체로부터(from my flesh 혹은 in my flesh)” 라고 되어있습니다. 욥19:26~27에서 욥은“하나님을 보리라”,“내가 친히 그를 보리라”,“내 눈으로 그를 보리라”라며 세 번씩이나 구속자를 보리라고 확신하고 있습니다. 욥이 건방진 말을 하는 것일까요? 아닙니다. 욥은 강한 확신을 보이고 있는 것입니다.

 

2. 시23:6에 “나의 평생에 선하심과 인자하심이 정녕 나를 따르리니 내가 여호와의 집에 영원히 거하리로다”라고 했습니다. 여호와를 “나의 목자(my shepherd)”로 모시고 사는 사람은 여호와의 집에 영원히 거한다는 확신을 고백하고 있는 것입니다. ”여호와의 집에 영원히 거할지 거하지 못할지 가봐야 알지 어떻게 아느냐?”라고 말하고 있지 않습니다.

 

3. 아가서 2:16에도 “나의 사랑하는 자는 내게 속하였고 나는 그에게 속하였구나 그가 백합화 가운데서 양 떼를 먹이는구나”라고 했습니다. 아가서는 신랑이신 예수그리스도와 신부인 성도들 간의 아름다운 관계를 노래한 서신이라는 것이 전통적인 해석입니다. 서로 속하여 있는 관계는 깨어지거나 끊어질 수 없다는 확신을 노래한 것입니다.구약성서에서도 이처럼 구원의 확신을 가질 수 있는 부분이 많이 있지만, 신약 성서에서는 의심의 여지 없이 확신을 주는 구절들이 더욱 많습니다.

 

4. 롬8:35에는 “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으리요 환난이나 곤고나 핍박이나 기근이나 적신이나 위협이나 칼이랴”고로 롬8:38~39에 “(8:38) 내가 확신하노니 사망이나 생명이나 천사들이나 권세자들이나 현재 일이나 장래 일이나 능력이나 (8:39) 높음이나 깊음이나 다른 아무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으리라” 라고 했습니다.

 

5. 고후5:1에도 “만일 땅에 있는 우리의 장막집이 무너지면 하나님께서 지으신 집 곧 손으로 지은 것이 아니요 하늘에 있는 영원한 집이 우리에게 있는 줄 아나니”라고 했습니다. 하늘에서 우리 영혼이 거할 새로운 집이 있을지 없을지 누가 아느냐? 이런 말이 아니라 “있는 줄 안다”는 확신의 말씀입니다.

 

6. 딤후1:12에도 “이를 인하여 내가 또 이 고난을 받되 부끄러워하지 아니함은 나의 의뢰한 자를 내가 알고 또한 나의 의탁한 것을 그 날까지 저가 능히 지키실 줄을 확신함이라”라고 했습니다.만일 성도들이 구원의 확신을 가질 수 없다면 “의심”이 미덕이 될 것입니다. 그러나 “의심”은 마귀가 주는 것이요 “확신”은 성령이 주시는 것입니다. George Whitetield 목사님은 “자신의 죄가 사함받았음을 확신하는 것은 성도의 축복이다”라고 말했습니다. 그러므로 사도 베드로는 이 확신을 굳게 하라고 권면하는 것입니다. 벧후1:10에 “그러므로 형제들아 더욱 힘써 너희 부르심과 택하심을 굳게 하라 너희가 이것을 행한즉 언제든지 실족지 아니하리라”라고 했습니다.

 

Ⅱ. 구원의 확신을 가질 때 누릴 수 있는 것은 무엇일까요?

 

1. 롬15:13에 “소망의 하나님이 모든 기쁨과 평강을 믿음 안에서 너희에게 충만케 하사 성령의 능력으로 소망이 넘치게 하시기를 원하노라”라고 했습니다. 사도바울도 그 영혼 안에 확신에서 오는 “기쁨과 평강(joy and peace)”을 경험하였기에 모든 성도도 같은 “기쁨과 평강(joy and peace)”을 누리게 되기를 기원하는 것입니다.

 

2. 벧전1:8~9에 “(1:8) 예수를 너희가 보지 못하였으나 사랑하는도다 이제도 보지 못하나 믿고 말할 수 없는 영광스러운 즐거움으로 기뻐하니 (1:9) 믿음의 결국 곧 영혼의 구원을 받음이라”라고 했습니다. 영혼의 구원을 받은 확신을 가진 사람은 그 영혼 안에 “말할 수 없는 기쁨(joy unspeakable)”을 누리게 된다는 말씀입니다.

 

3. 구원의 확신을 가질 때 오는 기쁨은 신자들 영혼 안에서 역사하시는 성령의 내적 활동에서 오는 것입니다.

 

4. 롬8:15~16 “(8:15) 너희는 다시 무서워하는 종의 영을 받지 아니하였고 양자의 영을 받았으므로 아바 아버지라 부르짖느니라 (8:16) 성령이 친히 우리 영으로 더불어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인 것을 증거하시나니”라고 했습니다.

 

5. 유월절을 생각해보면 확신이 있는 사람과 없는 사람의 차이를 그림처럼 볼 수 있습니다. 출12:13에 “내가 애굽 땅을 칠 때에 그 피가 너희의 거하는 집에 있어서 너희를 위하여 표적이 될지라 내가 피를 볼 때에 너희를 넘어가리니 재앙이 너희에게 내려 멸하지 아니하리라”라고 했습니다. 문설주에 어린양의 피를 바르면 장자를 죽이는 천사가 넘어간다는 약속입니다. 어린양의 피를 바르고 죽지 않으리라고 확신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고, 피를 바르고 나서도 죽을까봐 두려워하는 사람도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피를 바르고 확신하고, 안심하고, 기뻐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입니다.

 

Ⅲ. 구원의 확신을 저해하는 것은 어떤 요인이 있을까요?

 

1. 구원의 확신을 갖지 못하는 가장 큰 이유는 “잘못된 교리” 때문입니다. 잘못된 교리를 가르치는 사람들은 구원의 확신은 이생에서도 가질 수 없는 것이며, 구원의 확신이 있다고 말하는 사람을 교만하다고 생각합니다. 로마 가톨릭은 인간은 “구원의 확신”을 가져서는 안 된다는 확신을 가지고 있습니다. 인간은 연옥에서 오랜 세월 지내다가 죄에 대한 대가를 치르고 난 후 천국 갈 수 있다고 가르치기 때문에, “나는 구원의 확신이 있다”든가 “나는 죽으면 천국 간다”고 말하는 사람은 신성모독이요, 저주받은 사람이라고 선언하고 있습니다. 물론 로마가톨릭도 특별한 성자들은 구원의 확신을 가질 수 있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일반 성도들이 구원의 확신을 갖는 것은 “공허하고 불경견한 확신”이라고 <트렌트종교회의 6항 9장>에 선언하고 있습니다. 로마가톨릭과 비슷한 신학을 가진 개신교 아르미니우스주의(Arminianism)도 역시 구원의 확신은 성도의 삶을 방종케 할 우려가 있다고 하여, 구원의 확신이 있다고 말할 수 있는 권리가 성도에게는 없다고 말합니다.고등칼빈주의(hyper Calvinism)는 외식하는 자들과 중생하지 못한 자들이 구원의 확신을 가지고 있다고 말하는 것을 의심합니다. 그러나 거짓된 확신을 가진 위선자들이 있다고 해서 참된 성도들이 참된 구원의 확신을 가질 수 없다고 말해서는 안 됩니다.

 

2. 마귀는 성도들이 구원의 확신에서 오는 기쁨을 갖지 못하도록 방해하는 존재입니다. John Bunyan은 “마귀는 성도를 의심의 성안에 가둬두려 한다”고 말했습니다.마4:1~11에 마귀가 예수님을 세 번이나 시험할 때 두 번 반복해서 사용한 표현이 있습니다.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이라는 말입니다. 하나님의 아들을 가리켜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이라고 말하는 것은 의심을 불러일으키려는 마귀의 전략인 것입니다.

 

3. 성도의 삶에 있는 죄는 구원의 확신과 기쁨을 잃게 할 수도 있습니다. 시51:12에서 다윗은 “(51:12) 주의 구원의 즐거움을 내게 회복시키시고 자원하는 심령을 주사 나를 붙드소서”라고 했습니다. 이는 밧세바와의 간음으로 인해 마음의 기쁨을 잃고 쓴 반성문입니다. 성도는 죄를 자백함으로써 다시 확신과 기쁨을 찾을 수 있는 것입니다.

 

Ⅳ. 구원의 확신을 얻는 방법

 

1. “구원의 확신”은 가변성이 있기 때문에 때로는 흔들리고 약해질 수도 있습니다. “구원의 확신”이 없다고 해서 구원받지 못했다거나, 구원을 잃게 된다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구원의 확신”은 성도의 기쁨을 누리기 위해서 중요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신앙고백서 18장 3항은 “확신은 믿음의 본질에 속한 것은 아니라”라고 했습니다.

 

2. 성도는 정상적인 은혜의 수단인 말씀 공부와 기도를 통해서 구원의 확신을 얻게 되는 것입니다. 신비한 체험에 구원의 확신을 두는 것은 매우 위험한 일입니다.고후13:5에 “너희가 믿음에 있는가 너희 자신을 시험하고 너희 자신을 확증하라”라고 했습니다.

 

(결론)

 

요한일서는 특별히 영지주의자들이 가졌다고 말하는 거짓된 지식에 대항해서 성도들의 참된 지식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그래서“우리가 안다”는 말씀이 계속해서 반복되고 있습니다. 요일5:19~20 “(5:19) 또 아는 것은 우리는 하나님께 속하고 온 세상은 악한 자 안에 처한 것이며 (5:20) 또 아는 것은 하나님의 아들이 이르러 우리에게 지각을 주사 우리로 참된 자를 알게 하신 것과 또한 우리가 참된 자 곧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것이니 그는 참 하나님이시요 영생이시라”

 

내가 구원받은 사람임을 확신하고, 이 구원을 결코 잃을 수 없다는 확신을 더하여 기쁨과 평강으로 하나님을 섬기는 성도가 되기를 축원합니다. 

 

728x90
반응형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