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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약 --------------------/전도서

전 11장 1-6절(신앙은 전쟁 중) - 안효관

by Preacher 2024. 11. 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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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11장 1-6

신앙은 전쟁 중

안효관 목사 2014-11-23

전주남성교회 https://https://www.nsc.or.kr/

 

인류의 역사는 전쟁의 역사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역사를 크게 둘로 나누면서 ‘전쟁기간’과 ‘전쟁 준비기간’이라고 말하기도 합니다. 에덴동산에서 쫓겨난 인간은 곧 전쟁을 시작합니다. 그래서 가인은 동생 아벨을 돌로 쳐 죽이고 맙니다. 그 후로 인간은 끊임없이 전쟁을 해 왔습니다. 전쟁이 아닌 기간이 없을 정도로 많은 전쟁을 치러왔습니다. 내가 살아남기 위해서 불가피하게 치러야 하는 전쟁도 있는가 하면, 자신의 욕망을 이루기 위해서 전쟁을 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전쟁에서 승리하는 사람은 자신의 영역을 넓혀갑니다. 그리고 패자를 다스립니다. 전쟁을 통해서 주어지는 유익이 있기 때문에 사람들은 목숨을 건 전쟁을 불사합니다.

 

성경에서도 신앙을 전쟁에 비유하곤 합니다. 에베소서 6:12절에서 이렇게 말씀합니다. “우리의 씨름은 혈과 육을 상대하는 것이 아니요 통치자들과 권세들과 어둠의 세상 주관자들과 하늘에 있는 악한 영들을 상대함이라.” 여기서 말하는 ‘씨름’은 곧 전쟁을 의미합니다. 우리는 악한 영, 어두움의 세상 주관들과 끊임없는 전쟁을 치러야 합니다. 그것을 우리는 ‘영적 전쟁’이라고 부르곤 합니다. 마귀는 끊임없이 우리를 유혹합니다. 하나님을 멀리 떠나게 만들기 위해서 유혹하고, 우리가 정직하고 선하고 의롭게 살지 못하도록 하기 위해서 유혹합니다. 믿음을 따라 바르게 살지 못하도록 유혹합니다. 그런 유혹을 이기기 위해서 우리는 마귀와 전쟁을 해야 합니다. 마귀의 유혹과 전쟁을 해야 합니다.

 

마귀와의 전쟁 말고 우리 신앙인들이 싸워야 하는 또 하나의 전쟁이 있습니다. 그것은 자신과의 싸움입니다. 그 싸움을 사도 바울은 이렇게 고백합니다. “그러므로 내가 한 법을 깨달았노니 곧 선을 행하기 원하는 나에게 악이 함께 있는 것이로다. 내 속사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즐거워하되 내 지체 속에서 한 다른 법이 내 마음의 법과 싸워 내 지체 속에 있는 죄의 법 아래로 나를 사로잡는 것을 보는도다.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로마서 7:21-24) 사도 바울은 자신 안에 두 개의 자아가 있다고 고백합니다. 하나님의 법을 즐거워하며 선을 행하여 하나님의 뜻을 이루고자 하는 거룩한 믿음의 자아와 자신을 죄 아래로 끌고 가서 죄 아래 거하여 죄를 짓고 살게 하려는 죄의 자아입니다. 그 두 자아 사이에서 사도 바울은 끊임없는 영적인 전쟁을 치러야 했습니다. 그 전쟁이 얼마나 치열했는지, 그는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거내랴!”라고 탄식합니다. 그마만큰 우리가 하나님의 편에 서서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삶을 산다는 것이 쉽지 않다는 것입니다. 치열한 영적인 전쟁을 치루어야만 하나님의 뜻에 합당한 삶을 살 수 있습니다.

 

그런 자아와의 치열한 영적인 전쟁 가운데 하나가 오늘 본문에 나오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너는 네 식물을 물 위에 던지라. 여러 날 후에 도로 찾으리라.” 이 말씀은 전도서의 저자라고 알려진 솔로몬 왕이 만들어낸 말이 아닙니다. 유대인에게는 이런 전설이 전해져 내려오고 있었다고 합니다.

 

어느 날 한 왕이 왕자를 데리고 숲으로 사냥을 하러 나갔습니다. 그런데 왕이 한 눈을 판 사이에 왕자가 강물을 따라 혼자 걷다가 강물에 빠지고 말았습니다. 왕자는 겨우겨우 붙잡은 나무토막에 기대에 둥둥 떠내려 가다가 아무도 없는 모래섬에 고립되고 말았습니다. 먹을 것도 막막한 상황이었습니다. 그런데 다음 날 아침 눈을 떠보니, 저 상류에서 자루 하나가 떠내려 오는 것입니다. 왕자가 그 자루를 건져서 열어보니 딱 하루 먹을 음식이 담겨져 있었습니다. 다음날도, 그 다음날도 딱 하루치 식량이 담긴 자루가 강물을 타고 내려왔습니다. 왕자는 그러게 매일 강물을 따라 떠내려온 자루를 건져서 그 자루 속에 든 음식을 먹고 1년을 버텼습니다.

 

그 1년 동안 온 나라가 왕자를 찾아 나섰지만, 찾지 못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왕의 꿈에 왕자가 나타났습니다. 꿈에 나타난 왕자에게 왕이 물었습니다. “왕자야! 어떻게 살았느냐? 그 동안 무슨 일이 있었느냐?” 그러자 왕자는 강물에 떠내려오는 음식을 먹고 살았노라고 이야기를 해 줍니다. 그러면서 매일 떠내려오는 자루를 보여주는데, 왕이 자세히 보니 그 자루에 ‘모하메드 하산’이라는 이름이 적혀 있었습니다.

 

꿈에서 깨어난 왕은 그 이름을 가진 사람을 수소문하여 찾았습니다. 하산이라는 사람은 아주 평범한 농부였습니다. 정말로 하산은 날마다 음식을 자루에 넣고 강물에 띄워 보냈다고 합니다. 그리고 이렇게 말합니다. “제 아버지는 제가 어렸을 적부터 말씀하시기를 ‘네 떡을 물 위에 던지라. 그러면 여러 날 후에 도로 찾으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저는 자라면서 정말 이 말씀이 사실일까 궁금했습니다. 그래서 농부가 된 후로 거둔 양식 가운데 일부를 자루에 넣어 강물에 띄워 보냈던 것입니다.” 말씀대로 살았던 그 농부 덕분에 왕은 왕자를 찾아서 왕궁으로 데려올 수 있었습니다.

 

아마 솔로몬도 이런 이야기를 어려서부터 들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인생의 노년이 되어 전도서를 쓸 때 그 말씀이 사실이요 진리라는 것을 깨닫게 되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그것을 오늘 말씀에 기록해 놓은 것입니다.

 

오늘 본문은 우리에게 ‘내가 소유하고 있는 떡을 물 위에 던질 것이냐? 아니면 내 것이라고 생각하고 내가 계속 움켜쥐고 살 것이냐?’하는 것을 결정하도록 촉구하고 있습니다. 그것 또한 우리의 영적인 전쟁입니다.

 

연변 과학기술대학 부총장을 지내셨던 정진호 교수는 『떡의 전쟁』이라는 제목의 책을 썼습니다. 정진호 교수는 성경의 이야기는 한 마디로 떡에 대한 이야기라고 요약합니다. 떡을 둘러싸고 벌어지는 치열한 전쟁 이야기가 성경 안에 가득하다는 것입니다. 떡의 전쟁이라는 것은 단순히 떡을 얼마만큼 많이 소유하느냐 하는 것을 위해서 벌이는 전쟁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 신앙인이 싸워야 하는 떡의 전쟁은 내가 가지고 있는 떡을 나누기 위한 자신의 욕심과의 싸움을 말합니다.

 

오늘 우리가 사는 세상은 ‘매일 일용할 양식을 먹을 수 있느냐? 아니냐?’하는 것을 위해서 싸우며 사는 시대는 아닙니다. 아직도 지구촌 구석구석에서는 그렇게 매일 먹을 떡을 구하기 위해 전쟁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러나 감사하게도 우리나라에는 떡을 구하기 위한 전쟁은 별로 의미가 없습니다. 이제는 우리가 가지고 있는 그 떡을 나누기 위해서 자기 자신과 전쟁을 해야 합니다.

 

성경에는 떡의 나눔을 잘 했던 사람들이 복을 받았던 이야기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 가운데 하나가 창세기 18장과 19장에 나오는 아브라함과 그의 조카 롯입니다. 아브라함과 롯은 비슷한 환경에서 자랐습니다. 물질적인 풍요를 누리던 하란에서 함께 생활하다가 함께 가나안 땅에 오게 되었습니다. 가나안 땅에서 부자가 된 두 사람은 결국 헤어져 살게 됩니다. 창세기 18장에 보면 하나님과 천사 둘이 아브라함을 찾아갑니다. 사람의 모습을 하고 말입니다. 낯선 세 사람이 아브라함을 찾아가자 아브라함은 장막 문에서 달려 나가 그들을 반갑게 영접합니다. 그리고는 아내 사라에게 고운 가루 세 스아를 가져다가 반죽을 하여 떡을 만들게 합니다. 그리고 자신은 가축 떼가 있는 곳으로 달려가서는 좋은 송아지를 잡아 하인들에게 요리를 하도록 시킵니다. 그렇게 해서 진수성찬으로 상을 차려 찾아온 낯선 이들에게 극진하게 대접을 합니다.

 

그리고 그 다음 장인 창세기 19장에서는 조카 롯이 천사들을 대접하는 이야기가 소개되고 있습니다. 아브라함과 헤어진 후에 조카 롯은 여호와의 동산 같고 애굽과도 같은 소돔으로 장막을 옮겨 거기에 머물러 살게 됩니다. 소돔에 머물러 살면서 롯의 가족은 더 큰 부자가 됩니다. 그 롯에게 두 천사가 찾아갑니다. 롯은 그 낯선 천사를 자기 집으로 영접해 들입니다. 그리고 천사들을 위해서 식탁을 베풀고 무교병을 구워 천사들에게 대접합니다.

 

여러분, 아브라함과 그의 조카 롯이 천사들을 대접하는 이 이야기에서 다른 점이 무엇인지 아시겠습니까? 롯이 천사들에게 대접한 떡은 무교병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무교병을 롯이 직접 자기 손으로 구웠습니다. 무교병은 누룩을 넣지 않고 만든 떡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출애굽을 할 때 무교병을 만들어 먹었습니다. 누룩을 넣고 그 누룩이 발효될 때까지 기다릴 수가 없었습니다. 빨리 짐을 싸서 애굽에서 탈출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누룩을 넣지 않고 급하게 만든 무교병을 만들어 먹었습니다. 그런데 롯이 천사들에게 그 무교병을 대접했습니다. 무교병은 고난의 떡이라고 알려져 있습니다. 누룩을 넣지 않기 때문에 떡이 아주 딱딱합니다. 먹기가 곤란합니다. 롯은 천사들에게 왜 그런 무교병을 대접했겠습니까? 우리는 그 상황을 상상해 볼 수 있습니다. 롯의 아내는 천사들을 대접하는 데 아무런 역할도 하지 않습니다. 아니 천사들에게 관심조차 없었는지도 모릅니다. 어쩌면 ‘왜 낯선 사람을 데리고 왔느냐’고 롯에게 바가지를 긁었는지도 모릅니다. 아무튼 롯의 아내는 롯이 데리고 온 그 낯선 사람들이 불편했을 것입니다. 그래서 식사를 대접하든지 말든지 관심 갖지 않았습니다. 시집을 갈 나이가 된 두 딸도 지 어미를 닮아서 그런지 몰라도 아빠 롯이 천사들을 대접하기 위해서 분주하게 떡을 만드는데도, 본체만체 합니다. 하는 수 없이 롯은 자신이 급하게 떡을 만들어 대접해야 했습니다. 롯은 먹기 좋은 떡을 어떻게 만드는지도 잘 모릅니다. 그래서 그냥 밀가루을 반죽해서누룩도 넣지 않고 화덕에 굽기만 하면 되는 무교병을 만들어 천사들에게 대접한 것입니다.

 

그런데 아브라함의 집은 달랐습니다. 아브라함은 고운 가루 세 스아를 아내 사라에게 가져다주면서 떡을 만들게 합니다. 세 스아는 오늘로 말하면 약 20kg짜리 한 포대 정도 됩니다. 그것도 아주 고운 가루입니다. 최고급 밀가루로 떡을 만들게 합니다. 그리고는 하인들에게 가장 좋은 송아지를 잡아서 요리를 하게 합니다. 아브라함의 집에서는 손님을 접대하기 위해서 최고급의 떡을 만들었고, 온 가족이 준비한 음식으로 잔치를 벌인 것처럼 하나님과 천사들을 대접했습니다.

 

여러분, 아브라함이 마련한 식탁과 롯이 준비한 식탁의 차이점이 무엇인지 아시겠지요? 그들이 베풀었던 식탁은 그 후로 그들의 삶에 엄청난 변화를 만들어냈습니다. 아브라함은 최고의 떡을 만들어 나누었습니다. 그 떡을 잡수신 후에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아들을 주시겠다는 약속을 해 주십니다. 그리고 그 약속대로 아브라함의 가정에는 이듬해에 이삭을 낳게 됩니다. 반면 롯은 초라한 떡으로 천사들을 대접했습니다. 그 식탁 후에 천사들은 소돔의 멸망을 예언합니다. 그런데 롯이 떡을 만들 때 귀찮아하고 관심조차 가지지 않았던 롯의 아내는 그 다음 날 소돔이 멸망당할 때 소금기둥이 되어 죽고 맙니다. 떡을 만드는 아버지를 돕지 않았던 롯의 두 딸은 목숨을 건지긴 했지만, 동굴로 몸을 피신한 후에 아버지에게 술을 먹이고서는 아버지와 관계를 맺고 아들을 낳습니다. 큰 딸이 낳은 아들은 모압 족속의 조상이 되고, 작은 딸이 낳은 아들은 암몬 족속의 조상이 됩니다. 결국 롯이 마련한 떡은 축복의 떡이 아니라 멸망과 비극을 예언하는 고통의 떡이 되고 맙니다.

 

오늘 본문에서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일곱이나 여덟에게 나눠 줄지어다. 무슨 재앙이 땅에 임할는지 네가 알지 못함이라.” 내가 가지고 있는 떡을 누군가를 위해서 나눈다는 것은 결코 쉽지 않는 일입니다. 오늘날과 같이 풍요의 시대에 사는 사람에게는 그래도 좀 낫습니다. 그런데 몇 백 년 몇 천 년 전에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하루 벌어 하루 먹고 살았습니다. 그런 사람들에게 자신이 가지고 있는 떡을 나누라고 하는 것은 굉장히 고통스러운 요구입니다. 우선 당장 나도 먹고 살기 힘든데, 누군가를 위해서 내 것을 나누라는 것은 너무너무 힘든 요구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떡과의 전쟁을 해야 합니다. ‘내가 가지고 있는 떡을 내 욕심과 내 필요를 따라 내 손에 남겨둘 것이냐, 아니면 내가 조금 덜 소유하고 덜 먹더라도 다른 사람을 위해서 나눌 것이냐’ 그것을 결정짓기 위해서 우리는 우리 자신과 싸워야 합니다.

 

그런데 성경은 그 떡의 전쟁에서 이기는 방법을 우리에게 분명하게 가르쳐줍니다. ‘물 위에 던지라. 그러면 여러 날 후에 도로 찾으리라’고 말씀하십니다. 나누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가 어려워졌을 때 우리가 도움을 받게 됩니다. 지금은 내가 남들보다 조금 더 가졌기에 조금 더 배불리 먹을 수 있겠지만, 어느 순간엔가 우리에게도 어려운 때가 올 수 있습니다. 본문 2절에서 말씀하신 것처럼, 우리에게도 재앙이 임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그런 재앙을 만났을 때, 내가 물 위로 던진 그 떡이 내게 생명을 살리는 떡이 되어 돌아오게 됩니다.

 

세상의 전쟁은 떡을 더 많이 움켜쥐기 위해서 하는 전쟁입니다. 그러나 우리 신앙인들은 움켜쥐기 위한 전쟁이 아니라, 내게 있는 것을 나누기 위해서 나 자신과 싸우는 전쟁을 해야 합니다. 그리고 세상의 전쟁은 내 손에 더 많이 쥐어졌을 때 전쟁에서 승리했다고 말하지만, 우리 신앙인들이 싸우는 떡의 전쟁은 내게 있는 것을 그것을 필요로 하는 사람에게 잘 나누어질 때 승리했다고 말합니다.

 

본문 3-4절에서는 상황을 먼저 고려한다면 결코 떡의 전쟁에서 승리할 수 없음을 가르쳐줍니다. “구름에 비가 가득하면 땅에 쏟아지며 나무가 남으로나 북으로 쓰러지면 그 쓰러진 곳에 그냥 있느니라.” 이 말씀은 우리의 삶에 대한 우리의 생각을 비유적으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구름에 비가 가득하면 곧 비가 땅에 쏟아질 것을 압니다. 그리고 큰 폭우에 나무가 쓰러지면 그 나무를 다시 일으켜 세우기가 결코 쉽지 않습니다. 이 말씀은 우리가 우리의 떡을 나눔으로 해서 우리의 삶이 궁핍해지면 다시 일어설 수 없다고 생각하는 우리의 생각을 지적한 말씀입니다. 우리는 종종 그렇게 생각합니다. 내 주머니에 있는 돈을 다 써버리면 내 주머니가 채워지지 않는다고 생각합니다. 더구나 사업을 위해서 투자를 할 때에는 몰라도, 남에게 거져 나눠주는 일을 하다 보면 빈털터리가 되기 십상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4절에서는 ‘풍세를 살펴보는 자는 파종하지 못할 것이요, 구름만 바라보는 자는 거두지 못한다.’고 말씀합니다. 상황을 살펴본 후에 적절할 때를 찾으려 하다가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뜻입니다. 농부가 농사를 지으면서 ‘올해는 태풍이 자주 온다고 하니까 씨를 뿌려본들 다 태풍에 쓸려가고 말 거야!’ 그렇게 생각한다면 씨를 뿌리지 못합니다. 그러면 가을이 되어도 추수할 것이 하나도 없습니다. 비록 태풍이 자주 온다 하더라도, 때론 오랜 가뭄이 지속될 것 같아 보일지라도 농부는 씨를 뿌려야 합니다. 농사를 시작해야 합니다. 그래야 추수할 것을 얻습니다.

 

떡을 나눔에 있어서도 그렇다는 것입니다. ‘이걸 주면 내 주머니가 너무 많이 비는데... 이것은 내가 사업을 위해서 계획을 세워놓은 것이기 때문에 이것을 나누면 내 계획에 큰 차질이 생기는데...’ 그러면서 내 상황과 형편을 생각하면 내게 있는 것 가운데 그 어느 것 하나도 나눌 수가 없습니다.

 

그러기에 어쩌면 떡의 전쟁은 내 상황과의 전쟁이기도 합니다. 내 상황을 내 생각으로만 판단한다면 우리는 그 전쟁에서 패하고 말 것입니다. 그런데 그것을 하나님의 전쟁이라고 생각하고 하나님의 말씀대로 순종하고 나아갈 때에 우리는 떡의 전쟁에서 승리할 수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모든 전쟁에서 하나님을 전적으로 신뢰하고 나갈 때 이스라엘의 상황이 최악의 상황이라 하더라도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게 승리를 주셨습니다. 마찬가지로 떡의 전쟁에서도 하나님을 전적으로 신뢰하고 말씀대로 순종할 때 승리하게 됩니다.

 

또 하나 우리가 기억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떡의 전쟁에서 우리가 우리의 마음을 결단하고 내 손에 있는 것을 나눈다 하더라도, 그것으로 우리의 전쟁이 끝나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가 우리 내면의 욕심과의 전쟁에서 승리하고 선을 행하기로 마음을 먹었다 하더라도, 그것으로 우리가 할 일을 다 한 것은 아닙니다. 오늘 본문 6절에서 말씀하십니다. “너는 아침에 씨를 뿌리고 저녁에도 손을 놓지 말라. 이것이 잘 되는지, 저것이 잘 될는지, 혹 둘이 다 잘 될는지 알지 못함이니라.” 우리가 우리의 떡을 얻기 위해서 지속적으로 힘써 수고해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우리가 우리 내면과의 떡의 전쟁에서 승리하기 위해서는 신앙인으로서 우리가 살아야 할 삶에서 성실하게 최선을 다하며 살아야 합니다. ‘아침에 씨를 뿌리고 저녁에도 손을 놓지 말라.’고 말씀하십니다. 아침부터 저녁까지 추수를 위해서 수고해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그렇습니다. 성경은 우리에게 ‘네 할 일을 힘써 하라’고 가르칩니다. 하나님께서 도우신다 하더라도 우리가 우리의 삶에 주어진 일들을 힘써 해야 합니다.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을 핑계 삼아 게으르게 살아서는 안 됩니다. 우리가 떡의 전쟁에서 진정한 승리자가 되기 위해서는 나누는 것만으로 끝나서는 안 됩니다. 떡을 나눈 이후에는 떡을 나눈 이전보다 더 성싱하게 살아야 합니다. 내게 주어진 삶을 더 충실하게 최선을 다해 살아야 합니다. 그래야만 곧 닥칠 또 한 번의 떡의 전쟁에서 승리할 수 있습니다.

 

내게 있는 것을 나눈 후에 또 다시 내 호주머니가 채워진다는 것을 안다면, 나누는 것에 주저하지 않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내 호주머니에 더욱 풍성하게 채워주심을 안다면, 나누는 것에 결코 주저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하나님께서 우리의 호주머니, 우리의 손에 더욱 풍성하게 채워주시는 것은 우리가 힘써 땀 흘려 일할 때입니다. 내가 수고하여 일함으로 얻어지는 것이야말로 가장 큰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그래서 시편 128:1-2절에서 이렇게 노래합니다. “여호와를 경외하며 그의 길을 걷는 자마다 복이 있도다. 네가 네 손이 수고한 대로 먹을 것이라. 네가 복되고 형통하리로다.” 일하지 않았는데도 일확천금이 주어지는 것이 복이라고 말씀하지 않습니다. 공부하지 않았는데도 시험성적이 잘 나오는 것은 결코 복이 아닙니다. 노력도 하지 않았는데 사업이 잘되고, 음식을 잘 만들려고 정성을 들이지 않았는데도 장사가 잘 된다면 그것은 복이 아니라 저주입니다. 공부하지 않았음에도 성적이 잘 나오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그것은 복이 아니라 그의 인생을 망치게 만드는 저주입니다. 가장 큰 복은 내가 공부한 것만큼 성적이 나오는 것입니다. 내가 수고한 것만큼 소득을 얻는 것입니다. ‘네 손이 수고한 대로 먹을 것이라. 에가 복되고 형통하리로다.’ 수고한 대로 얻어지는 것이 형통한 길입니다.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영국의 대부호이자 건축가인 해밀턴 집안에는 대대로 내려오는 불가사의한 보물이 있었다고 합니다. 그것을 본 사람은 아무도 없지만, 사람들은 그것을 황금이 생기게 하는 ‘마술의 돌’이라고 불렀습니다. 그 마술의 돌 때문에 그 집안이 부자가 되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그 돌의 정체가 궁금했고, 보고 싶어 했습니다. 그러나 그 마술은 돌은 주인 외에는 아무도 볼 수가 없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영국 왕 제임스 6세가 해밀턴의 집을 방문해 보물을 보여 달라고 간청했습니다. 어느 누구에게도 보여준 적이 없지만, 왕이 보여 달라고 간청을 하자 해밀턴은 작은 상자를 가져왔습니다. 왕이 호기심이 가득 찬 얼굴로 상자의 뚜껑을 열었습니다. 그런데 그 안에는 마술의 돌이 아닌 다음과 같이 적힌 종이가 들어 있었습니다. “내일이 있다고 생각하지 말아라. 타인의 힘을 의지하지 말아라.”

 

해밀턴 집안을 부자로 만든 것은 황금을 만들어내는 마술의 돌이 아니었습니다. 하루하루 성실하게 최선을 다해 살아야 한다는 그 집안의 가훈이었습니다. 그 가훈대로 그 집안 사람들은 내일 있다고 오늘 할 일을 미루지 않았고, 내가 아니면 누군가가 하겠지 하는 생각으로 내가 할 일을 다른 사람에게 미루지도 않았습니다. 그것이 곧 그 집안을 부자로 만든 것입니다.

 

여러분, 오늘도 우리는 전쟁하며 살아야 합니다. 우리의 삶은 전쟁입니다. 에베소서 6장에서 말씀하신 것처럼 혈과 육에 대한 전쟁이 아닙니다. 칼과 총으로 하는 전쟁이 아닙니다. 내 욕심을 채우기 위한 전쟁도 아닙니다. 우리는 마귀와 싸우는 영적인 전쟁을 하며 살아야 합니다. 마귀의 유혹에 넘어가지 않기 위해서 우리는 믿음의 선한 싸움을 싸우며 살아야 합니다.

 

뿐만 아니라, 우리는 우리 자신과도 싸워야 합니다. 내면의 전쟁입니다. 그 내면의 전쟁 가운데 하나가 떡의 전쟁입니다. 내 손에 쥐고 있는 것을 나누기 위해서 우리는 우리의 욕심과 싸워야 합니다. 더 많이 움켜쥐고 싶어 하는 우리의 마음과 싸워야 합니다. 그 떡의 전쟁에서 승리하는 자가 진정으로 믿음의 승리자입니다.

 

오늘날 우리 사회는 더 많이 가지는 것이 성공이라고 말합니다. 남을 짓밟고서라고 다른 사람보다 더 높이 올라가야 한다고 속삭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그렇게 말씀하지 않으십니다. ‘네 떡을 물 위에 던지라’고 말씀하십니다. 세상에서 더 많이 움켜쥐기 위해서 아등바등하며 사는 것이 아니라, 더 많이 움켜쥐라고 속삭이는 내면과의 전쟁에서 이기고 내 손을 펴 나누며 살라고 말씀하십니다. 그것이 진정으로 하나님을 닮아 믿음의 승리자가 되는 삶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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