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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약 --------------------/창세기

창 37장 25-28절(그들의 선택) - 안효관

by Preacher 2023. 7.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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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37장 25-28

그들의 선택

안효관 목사 2016-01-31

전주남성교회 https://https://www.nsc.or.kr/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한 때 젊은 아더왕이 이웃 나라 왕에게 포로로 잡혀가게 되었습니다. 이웃 나라의 왕은 아더왕을 죽이려 하였으나, 그의 패기와 능력에 감복하여 그를 살려 주기로 하고 제안을 하나 했습니다. 그것은 ‘어려운 문제를 낼텐데 1년 안에 답을 찾아오면 살려주고, 답을 찾아내지 못하면 그 때에는 죽이겠다.’는 것입니다. 그가 아더왕에게 낸 문제는 이것이었습니다. ‘여자들이 정말로 원하는 것은 무엇인가?’

 

이 문제를 갖고 자신의 왕국으로 돌아온 아더왕은 나라 안에서 가장 현명하다는 사람들을 찾아다니며 그 해답을 찾으려 했습니다. 현자들, 승려들, 공주들, 심지어 광대나 창녀들에게까지 물어 답을 찾으려 했으나 답을 들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러다가 ‘북쪽에 늙은 마녀가 하나 있는데, 아마도 그 마녀는 답을 알고 있을 것’이라는 소리를 듣고 늙은 마녀를 찾아갔습니다. 그런데 그 마녀는 자신이 답을 안다고 하면서 자신의 요구조건을 들어주면 그 답을 알려주겠다고 합니다. 그 마녀의 요구사항은 다름이 아닌 아더왕이 거느린 신하 중에서 가장 용맹하고 용모가 수려한 거웨인과 결혼하게 해 달라는 것입니다. 아더왕은 충격에 빠졌습니다. 늙은 마녀는 곱추였고, 그녀 가까이 가기만 해도 섬뜩한 기운이 감돌았습니다. 그것만이 아닙니다. 이빨은 하나밖에 없었고, 하수구 찌꺼기 같은 남새를 풍기면서 항상 이상한 소리를 내고 다녔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추한 마녀가 아더왕이 그렇게도 신임하는 거웨인과 결혼하게 해 달라니 충격을 받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오랫동안 고민을 하다가 1년의 기한이 다 되어갈 무렵 아더왕은 거웨인에게 사정을 이야기하자, 충신이었던 거웨인은 자신이 섬기는 아더왕을 위해서라면 목숨을 바치겠다고 마음 먹은 이상 아더왕을 위해서 기꺼이 그 마녀와 결혼하겠다고 승낙을 합니다. 그래서 아더왕은 마녀로부터 답을 얻어냅니다. 마녀가 제시한 답은 ‘여자들이 정말 원하는 것은 바로 자신의 삶을 자신이 주도하는 것, 즉 자신의 일에 대한 결정을 남의 간섭 없이 자신이 내리는 것’이라고 알려줍니다. 그 말을 들은 모든 사람들이 박수를 치며 그 말에 공감했습니다. 아더왕은 그 답을 이웃나라 왕에게 말해 주었고, 이웃나라 왕은 그것이야말로 진실이자 정답이라고 기뻐하면서 아더왕의 목숨을 살려주었습니다.

 

그런데 아더왕에게는 아직 근심이 하나 남아 있었습니다. 그것은 자신이 총애하는 충신 거웨인을 그 늙은 마녀와 결혼시켜주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거웨인은 기꺼이 마녀와 결혼을 하였고, 결혼식을 올리면서부터 거웨인은 마녀를 최고의 매너와 태도로 자신의 아내로 대해 주었습니다. 첫날밤이 되었습니다. 거웨인은 자신의 일생에 최악의 경험이 될지도 모르는 첫날밤을 앞두고 숙연히 침실로 들어갔습니다. 그런데 침실에는 늙고 못생긴 마녀가 있는 것이 아니라, 지금까지 단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세계 최고의 미녀가 침대에서 그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거웨인은 ‘어찌된 일이냐?’고 물었습니다. 그러자 마녀는 ‘추한 마념임에도 자신을 항상 진실하게 대해주고 아내로 인정해 주었기 때문에, 그에 대한 보답으로 이제부터는 자신의 삶 절반은 추한 마녀로, 그리고 나머지 반은 아름다운 미녀로 있겠노라.’고 대답했습니다. 그러면서 거웨인에게 선택하라고 말합니다. ‘낮에 추한 마녀로 있고 밤에 꽃과 같은 미녀로 있을 것인가? 아니면 낮에 미녀로 있고 밤에 마녀로 있을 것인가?’ 선택하라는 것입니다. 거웨인은 딜렘마에 빠졌습니다. 만일 낮에 미녀로 있기를 바란다면 주위 사람들에게 부러움을 사겠지만, 밤에 둘만의 시간에는 추한 마녀와 함께 있어야 합니다. 반대로 낮에 추한 마녀로 있으면 주위 사람들에게 비웃음과 놀림거리가 되겠지만, 밤에 둘만의 시간에는 아름다운 미녀와 함께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고민에 빠진 것입니다.

 

여러분, 여러분 같으면 어떤 선택을 하시겠습니까? 한참을 고민하던 거웨인은 이렇게 결정을 지었습니다. ‘당신이 직접 선택하세요.’ 그 말은 들은 마녀는 얼굴에 환한 미소가 가득하더니, 반은 마녀 반은 미녀로 살기로 한 제안을 철회하고 항상 미녀로 있겠노라고 대답했습니다. 왜냐하면 거웨인이 마녀에게 선택할 수 있는 권리를 주었기 때문입니다. 예전에 ‘여자들이 정말로 원하는 것은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마녀가 가르쳐준 답이 바로 그것이었습니다. ‘다른 사람의 간섭 없이 자신의 일에 대해서는 자신이 결정하도록 하는 것이 진정으로 여자가 원하는 것’이라고 말입니다. 거웨인이 그 정답에 맞게 마녀에게 선택할 권리를 주었기 때문에, 그리고 마녀를 존중해 주었기 때문에 마녀는 그 보답으로 기꺼이 자신의 평생을 미녀로 살겠노라고 말한 것입니다.

 

우리는 살아가면서 늘 무언가를 선택해야 합니다. 그래서 ‘인생은 B에서 D사이의 C이다.’는 말이 있습니다. Birth(탄생)에서 Death(죽음) 사이에 사는 인생은 늘 Choice(선택)하며 살 수밖에 없다는 뜻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네 인생은 태어날 때부터 죽을 때까지 선택의 연속입니다. 제한된 환경 속에서 제한된 지식을 갖고 사는 우리는 크고 작은 갈림길을 만나게 됩니다. 그래서 보다 좋은 길을 가기 위해서는 갈림길에서 선택을 해야 합니다. ‘어느 쪽으로 갈 것인가’ 하고 말입니다. 때로는 그 선택이 자신의 인생에 엄청난 결과를 만들어내기도 하고, 때로는 그 선택이 사람의 생명을 좌지우지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에 나오는 요셉의 형들의 선택이 그랬습니다. 우리가 잘 아는 것처럼 요셉은 아버지의 특별한 총애를 받으며 자랐습니다. 아버지 야곱에게는 네 명의 아내가 있었는데, 그 중에서 야곱이 가장 사랑하는 아내는 라헬이었습니다. 그 라헬은 아이를 갖지 못하다가 느지막이 아들을 낳았는데, 그 아이가 바로 요셉입니다. 사랑하는 아내가 아이를 갖고 싶어 애를 태우다가 느지막이 태어난 아들이기 때문에 아버지 야곱은 이 요셉을 무척이나 사랑했습니다. 오늘 본문 바로 앞인 창세기 37:3절에서 성경은 이렇게 증언해 주고 있습니다. “요셉은 노년에 얻은 아들이므로 이스라엘이 여러 아들들보다 그를 더 사랑하므로 그를 위하여 채색옷을 지었더니.” 채색옷을 지어 입혔다는 말은 요셉에게는 일을 시키지 말라는 뜻입니다. 요셉은 열일곱 살 때부 형들과 함께 양을 치는 목동 생활을 시작했습니다. 특별히 야곱의 첩인 빌하와 실바가 낳은 형들과 함께 목동생활을 하면서 요셉은 형들의 행동거지에서 잘못된 것들이 보이면 어김없이 아버지에게 가서 형들에 대해 고자질을 했습니다. 그러자 아버지 야곱이 요셉에게 채색옷을 지어 입힌 것입니다. 채색옷이라는 것은 오늘 우리로 말하면 소매가 긴 예쁜 한복과 같습니다. 일을 하기 위해서는 소매가 짧은 일복을 입어야 합니다. 그런데 예쁜 옷에다가 소매까지 길면 일을 할 수 없습니다. 그런 복장으로 일을 한다면 분명 옷이 더러워지고 소매가 금방 망가지고 말 것입니다. 그래서 채색옷은 일을 하지 않는 양반집 도령님들이나 입는 것이었습니다. 야곱이 요셉에게 그런 채색옷을 지어 입힌 것은 물론 요셉을 남다르게 사랑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요셉이 형들의 잘못과 허물을 고자질했기 때문입니다. 자신의 사랑하는 아들이 첩의 자식들과 함께 일하면서 나쁜 언행을 배우지 않을까 하는 염려 때문입니다. 다른 형들은 하루 종일 양을 치며 열심히 일하는데, 막내나 다름없는 요셉은 일할 나이가 되었으면서도 아버지의 사랑을 받으면서 예쁜 옷을 입고 일하지 않으니까 형들의 눈에는 요셉이 밉게 보일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런데 그것만이 아니었습니다. 요셉이 어느 날 꿈을 꾸었다고 그러면서 꿈 이야기를 해 주는데, 그 꿈이라는 것이 형들이 자신 앞에 절을 한다는 것이고, 더 나가서 아버지와 어머니까지도 자신 앞에 엎드려 절을 한다는 것입니다. 그런 이야기를 들은 아버지도 요셉을 크게 꾸짖었습니다만, 그 이야기를 들은 형들이 요셉을 괘씸하게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이었습니다. 평소 일하지 않던 요셉에게 아버지 야곱이 양떼를 먹이기 위해서 멀리 떠나 있는 그 형들의 안부를 알아보라고 요셉을 형들에게 보냅니다. 당시 야곱의 가족들은 헤브론에 머물러 있었습니다. 그리고 요셉의 형들은 세겜에서 양떼를 먹이고 있었습니다. 헤브론에서 세겜까지의 거리는 약 100km나 됩니다. 그렇게 멀리까지 양떼를 이끌고 간 것은 그 때가 건기이기 때문입니다. 비가 오지 않는 건기가 되면 남쪽부터 점차 메말라가면서 풀을 구하기 어렵게 됩니다. 그래서 양떼에게 먹일 풀을 찾기 위해서 점차 북쪽으로 이동을 합니다. 그 건기에는 목자들이 양떼를 먹이기 위해서 한 달씩 양떼를 이끌고 다니기도 합니다. 헤브론에서 세겜까지의 거리가 약 100km라고 하면, 그 거리는 사람들이 보통 걸음으로 걸어가도 3-4일은 걸립니다. 그런데 양떼를 이끌고 그 길을 가려면 최소한 일주일 이상의 시간이 필요합니다. 양떼에게 풀을 먹이며 이동했다면 그것보다 훨씬 더 오래 걸렸을 것입니다. 그러기에 요셉의 형들이 양떼를 몰고 세겜까지 갔다는 것은 집을 떠난 지 꽤나 오래 되었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래서 아버지 야곱이 평소에 일도 시키지 않는 요셉을 보내서 형들과 양떼가 잘 있는지 알아보려 했던 것입니다.

 

아버지의 말씀에 따라서 형들을 찾아 세겜에 가보았지만, 요셉은 거기에서 형들을 만날 수가 없었습니다. 수소문한 끝에 형들이 양떼를 이끌고 도단으로 갔다는 사실을 알게 되고, 형들을 찾아 도단으로 올라갑니다. 도단은 세겜에서도 북쪽으로 약 30km나 더 올라가야 합니다. 형들은 양떼를 먹일 풀을 찾기 위해서 계속해서 북쪽으로 이동해 간 것입니다. 요셉이 사람들에게 물어물어 도단에 가자 멀리서 요셉이 오는 것을 본 형들이 요셉을 제거할 절호의 기회가 왔다고 생각했습니다. 아버지가 없는 틈을 타서 요셉을 죽이자고 서로 꾀한 것입니다. 그래서 요셉을 죽여 구덩이에 던져 넣자고 작당을 했습니다. 그 구덩이라는 것은 우기에 빗물을 받아 저장하기 위해서 파놓은 것입니다. 그런데 그 때가 비가 오지 않는 건기가 한참을 지난 때인지라, 그 구덩이에 저장되어 있는 물이 없었습니다. 큰 형인 르우벤의 간곡한 만류로 요셉을 죽이진 않았지만, 대신에 그를 산 채로 그 구덩이에 던져 넣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오늘 본문이 시작됩니다. 요셉을 구덩이에 던져놓고 형들은 그 구덩이 옆에서 음식을 먹고 있었습니다. 어쩌면 그것은 아버지가 양떼를 돌보느라 수고한 아들들을 생각해 준비해서 요셉의 손에 들려 보낸 음식일 것입니다. 요셉이 직접 그 먼길을 걸어오면서 가져온 그 음식을 구덩이 옆에서 먹고 있었습니다. 오늘 본문에는 그 때의 상황을 더 언급하고 있지 않지만, 창세기 42:21절에 의하면 그 때 요셉은 형들에게 살라달라고 애걸하고 있었습니다. 그렇지 않겠습니까? 물을 저장하기 위해서 파놓은 커다란 구덩이에 요셉이 던져졌습니다. 자신의 힘으로는 도저히 빠져나올 수 없는 큰 구덩이입니다. 형들이 자신을 그곳에 던져 넣었습니다. 그저 장난삼아 그랬으면 좋으련만, 형들이 하는 행동이나 표정, 또는 말들을 들어볼 때 형들이 장난으로 자신을 구덩이에 던진 것이 아니었습니다. 죽이겠다는 생각으로 그렇게 한 것입니다. 요셉이 그것을 모를 리 없습니다. 그러니 구덩이 던져진 요셉이 구덩이 밖에서 음식을 먹고 있는 형들에게 얼마나 애걸했겠습니까? 아마도 목이 터져라 하고 애걸했을 것입니다. ‘제발 살려 달라.’고 말입니다. ‘지난날 자신이 형들의 허물을 아버지에게 고자질했던 것 용서해 달라.’고 말입니다. 얼마나 애절하게 호소했던지 20년이 지난 후에도 형들은 그 때의 일을 결코 잊지 못할 정도였습니다. 그런데도 형들은 꿈쩍하지 않습니다. 요셉이 아무리 간곡하게 애걸해도 못들은 척 할 뿐입니다.

 

그런데 때마침 형들의 눈에 이스마엘 상인들이 오는 것이 보였습니다. 그들은 길르앗에서 향품과 유향과 몰약을 싣고 애굽으로 가서 파는 상인들이었습니다. 길르앗은 요르단 서북부 지역으로 향품과 유향 등이 아주 유명한 곳입니다. 형들이 본 그들은 그곳의 특산품인 그 향품과 유향을 사서 낙타에 싣고 애굽으로 가서 팔아 돈을 버는 사람들입니다. 그 상인들이 오는 것을 보고 형제들 중 유다가 한 가지 제안을 합니다. 요셉을 구덩이에 놔두어 굶어죽게 하지 말고 이 사람들의 손에 넘기자는 것입니다. 굳이 자신들의 손으로 요셉을 죽일 필요가 없지 않는냐는 것입니다. 이들의 손에 팔면 멀리 애굽에 팔려가게 될 것이고, 그렇게 되면 자신들은 동생을 죽였다는 죄책감에서 어느 정도 벗어날 수 있고, 사람을 죽인 핏값을 면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제 그들은 선택해야 합니다. ‘요셉을 이스마엘 상인들에게 팔아넘길 것인가? 아니면 구덩이에 그냥 죽게 놔둘 것인가?’ 하고 말입니다. 요셉을 제거한다는 데에는 의견이 없습니다. 단지 그 방법론에서 어떻게 할 것인가를 선택해야 합니다. 전에도 그들은 그런 선택을 했었습니다. 말씀드린 것처럼, 요셉이 오는 것을 보고 그를 죽이자는데 한 마음이었습니다. 그런데 큰 형인 르우벤이 굳이 죽이지 말고 구덩이에 던져 넣는 것이 더 낫지 않느냐고 제안하자 그렇게 한 것입니다. 그 때도 그들은 ‘자기들의 손으로 요셉을 죽일 것인가? 아니면 구덩이에 던져 넣어 굶어 죽게 할 것인가?’ 하는 것을 선택해야 했습니다. 그 때 그들은 큰 형 르우벤의 의견을 따르기로 결정하고, 요셉을 직접 죽이지 않고 구덩이에 던져 넣은 것입니다. 그런데 이번에도 중요한 결정을 해야 합니다. ‘구덩이에 놔두고 굶어죽게 할 것인가? 아니면 이스마엘 상인들에게 팔아 애굽으로 보내버릴 것인가?’ 하고 말입니다. 유다가 ‘굳이 요셉을 구덩이에 놔둘 필요가 뭐 있느냐? 이스라엘 상인들에게 팔아버리자!’라고 제안했을 때 그들은 그 제안에 솔깃했습니다. 오늘 본문 27절 마지막에 보면, 유다가 그렇게 말하자 ‘그의 형제들이 청종했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청종했다’는 말은 그런 제안이 솔깃했다는 말입니다. 왜냐하면 이스마엘 상인들에게 요셉을 팔면 얼마의 돈을 벌 수 있기 때문입니다. 미운 요셉을 제거하면서 동시에 수중에 돈이 생기는 일입니다. 그러기에 그들은 유다의 제안이 솔깃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결국 요셉의 형들은 요셉을 이스마엘 상인들의 손에 파는 것으로 결정을 내리게 됩니다. 그렇게 해서 요셉이 애굽에 노예로 팔려가게 되었습니다.

 

우리가 무언가를 선택하게 될 때 그 선택에는 반드시 기준이 있습니다. 자신에게 좋은 쪽으로 선택하려는 마음이 있기 때문입니다. 때로는 자신에게 뭔가 유익이 주어지기 때문에 그렇게 선택할 수도 있고, 때로는 그것이 자신의 명예를 지키는 것이기에 그렇게 선택할 수도 있습니다. 때로는 그게 그냥 좋아서 그것을 선택할 수도 있고, 어떤 경우에는 그렇게 선택함으로써 다른 누군가에게 복수하여 마음속에 복수의 쾌감을 느낄 수 있기 때문에 그렇게 선택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여러분, 우리가 무언가를 선택할 때 가장 먼저 고려해야 할 것은 우리의 이익이 아닙니다. 우리 신앙인들이 가장 먼저 고려해야 할 선택의 기준은 ‘그것이 하나님께 영광이 되느냐’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영광이 되느냐 하는 것을 좀 더 구체적으로 이야기한다면 ‘그것이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것이냐? 그것의 결론이 선한 열매를 맺는 것이냐? 그것이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것이냐? 그것이 생명을 살리는 것이냐?’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는 것, 그래서 하나님의 뜻을 이루고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며, 그것을 통해서 선한 열매가 맺혀지는 가장 기본적인 것이 바로 생명을 사랑하고 생명을 살리는 것이냐 하는 것입니다. 생명을 사랑하고 생명을 살리는 것이야말로 하나님께서 가장 기뻐하시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마가복음 3장에 이런 이야기가 기록되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안식일에 회당에 들어가셨을 때 거기에 한쪽 손 마른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 때 사람들은 모두 예수님께서 그 사람을 고쳐주실까 하는 것에 관심을 갖고 주목하고 있었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이시라면 능히 그 사람을 고쳐주실 것인데, 그 날이 다름 아닌 안식일이기 때문입니다. 당시 유대인들의 전통에 의하면 안식일에 병을 고치는 것은 엄격하게 금지되어 있었습니다. 만일 예수님께서 그 사람을 고쳐주신다면 그것은 명백하게 안식일법을 범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안식일법을 범하면서까지 예수님께서 그 사람을 고쳐주실 것인가 하고 주목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연히 그 사람을 고쳐주셨습니다. 안식일법을 범하면서까지 말입니다. 예수님께서 그렇게 하신 이유는 그 어떤 법보다도 생명을 사랑하고 생명을 살리는 것이 우선이라고 생각하셨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예수님의 마음이었고, 그것이 우리 기독교 신앙의 근간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언제나 생명 살리는 일을 가장 우선시 하셨습니다. 심지어 자신의 생명을 내놓으면서까지 생명 살리시는 일을 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도 중대한 결정을 하셔야 할 때가 있었습니다. 십자가를 앞에 놓고 말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겟세마네 동산에서 땀이 핏방울이 되도록 기도하시며 무엇을 선택해야 하는지를 놓고 기도하셨습니다. 그리고 그 마지막 결론은 십자가를 지시기로 하신 것입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뜻이고, 그것이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것임을 아셨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 결과는 세상에 수많은 사람들의 생명을 살리는 것이었습니다.

 

오늘 본문에 나오는 요셉의 형들도 중요한 결정을 해야 했습니다. 선택의 순간에 그들은 고민할 수밖에 없었겠지만, 어떻게든 요셉의 생명을 살리려고 하는 유다의 말에 귀를 기울이고 그것을 선택하게 됩니다. 그리고 그 결과 약 20년 후 가나안 땅에 큰 흉년이 들었을 때 야곱의 가족들은 애굽으로 식량을 구하러 갑니다. 거기에서 요셉의 형들은 애굽의 국무총리가 되어 있는 요셉으로 인해서 어려움 없이 양식을 구하게 되고, 야곱의 온 가족들은 애굽으로 이민을 가게 됩니다. 만일 도단에서 요셉의 형들이 ‘요셉을 구덩이에서 죽게 놔두느냐? 아니면 이스마엘 상인들에게 파느냐?’ 하는 것을 결정해야 할 때, 유다의 말을 듣지 않고 요셉을 죽게 내버려두었다면 야곱의 가족들은 큰 흉년에 엄청난 고통을 겪어야 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 때의 선택 - 요셉의 생명을 살리자는 선택을 한 결과 요셉의 가족들은 흉년에도 먹을 것 걱정 없이 살았거니와 강대국 애굽에서 국빈대우를 받으며 애굽에 정착할 수 있었습니다.

 

그 때 그 한 번의 선택이 이후로 요셉의 형들에게는 굉장한 축복이 되어 돌아오게 된 것입니다. 선택 - 정말 중요합니다. 때로는 무엇을 선택해야 할지, 어떤 결정을 내려야 할지 잘 알 수 없을 때 우리는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 먼저 물어야 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선하신 뜻은 생명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생명을 살리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생명을 살리고 생명을 사랑하는 쪽을 선택해야 합니다. 그것이 축복이 됩니다. 반드시 축복이 되어 나에게 돌아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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