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38장 24-30
네가 나보다 옳다
문기태 2020.09.19
창원침례교회 http://whttp://www.changwon.or.kr/
석 달쯤 지난 다음에, 유다는 자기의 며느리 다말이 창녀 짓을 하여 임신까지 했다는 소문을 들었다. 유다가 명하였다. "그를 끌어내서 화형에 처하여라!" 그는 끌려 나오면서, 시아버지에게 전갈을 보냈다. "저는 이 물건 임자의 아이를 배었습니다" 하고 말하였다. 다말은 또 말을 계속하였다. "잘 살펴보십시오. 이 도장과 이 허리끈과 이 지팡이가 누구의 것입니까!" 유다는 그 물건들을 알아보았다. "그 아이가 나보다 옳다! 나의 아들 셀라를 그 아이와 결혼시켰어야 했는데" 하고 말하였다. 유다는 그 뒤로 다시는 그를 가까이하지 않았다. 다말이 몸을 풀 때가 되었는데, 태 안에는 쌍둥이가 들어 있었다.
아기를 막 낳으려고 하는데, 한 아기가 손을 내밀었다. 산파가 진홍색 실을 가져다가, 그 아이의 손목에 감고서 말하였다. "이 아이가 먼저 나온 녀석이다." 그러나 그 아이는 손을 안으로 다시 끌어들였다. 그런 다음에 그의 아우가 먼저 나왔다. 산파가 "어찌하여 네가 터뜨리고 나오느냐!" 하고 말하였다. 그래서 이 아이 이름을 베레스라고 하고, 그의 형, 곧 진홍색 실로 손목이 묶인 아이가 뒤에 나오니, 아이 이름을 세라라고 하였다.(창38장 24-30절)
우리가 창세기를 읽을 때마다 이해가 안되는 것이 있는데 요셉에 대한 이야기가 37장부터 시작되어 끝장까지 이어지는데 갑자기 38장에 유다의 이야기가 삽입되어 있습니다. 더군다나 창세기 38장에 나타나는 사건은 유다의 수치요 나아가서 그리스도의 족보에 오점을 남기는 것임에도 불구하고 상세하게 기록하였습니다.
요셉이 노예로 팔려가고 난 후에 야곱의 넷째 아들 유다가 가나안 사람 수아의 딸을 아내로 취하였습니다. 유다는 조부 이삭이 아버지 야곱에게 가나안 족속 중에서 아내를 취하지 말 것을 간곡히 부탁하였다는 사실을 분명히 알았을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가나안 여인을 취하였습니다. 결혼 후 에르와 오난, 셀라라는 세 아들을 낳았습니다.
유다는 장자 에르를 위하여 다말이라는 여자를 며느리로 삼습니다. 그런데 에르가 주님께서 보시기에 악하므로 주님께서 그를 죽게 하십니다. 유다는 차남 오난에게 형수 다말과 결혼하여 후손을 얻게 하는 계대 결혼을 요청하였습니다. 계대 결혼이란 "형이 자식 없이 죽는 경우에 그의 동생이 그 미망인을 아내로 취하여 자식을 낳아서 그 형의 대가 끊어지지 않게 하는 제도인데 모세 이후로 성문화되었습니다."
오난은 자기가 낳을 자식이 자기의 소유가 될 수 없다는 이유 때문에 땅에 사정함으로써 형에 대한 의무를 이행하지 않습니다. 그것이 주님이 보시기에 악해서 하나님은 오난도 죽게 하십니다. 장남과 차남을 모두 잃게 된 유다는 막내 아들도 다말에게 결혼시켰다가 그렇게 죽지 않을까 두려워졌습니다. 그래서 며느리 다말에게 친정 집에 가서 셀라가 다 클 때까지 과부로 살며 기다리라고 하였습니다.
세월이 많이 흘러 셀라가 장성하였지만 유다는 다말을 부르지 않았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유다의 아내가 죽었습니다. 그는 아내의 죽음에 대한 슬픔을 그치고 친구 아둘람 사람 히라와 함께 딤나에 있는 자기 양들의 털을 깎기 위하여 올라갔습니다. 그 당시에 양털을 깎는 것은 목자들에게는 큰 축제였습니다. 다말은 시아버지가 자신을 셀라가 장성하였어도 그와 짝지어 자식을 낳게 해주지 않으려고 한다는 것을 확신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던 중 다말은 시아버지가 양털 깎는 축제에 참석하려고 딤나로 올라온다는 소식을 듣고 유다를 통해 자식을 얻을 계획을 세우고 실천에 옮깁니다.
유다는 딤나로 올라가는 길 어귀에 너울을 쓰고 얼굴을 가린 여인이 앉아 있는 것을 보고 창녀인줄 알고 말을 붙입니다. "너에게 감시 들렀다 가마." 그렇게 다말은 임신하게 되었습니다. 다말이 임신하였다는 소문을 듣고 유다는 노발대발하였습니다. 당장 다말을 끌어내어 화형에 처하라고 명령하였습니다. 다말은 끌려 나오면서 유다가 동침을 하며 주었던 약조물을 제시합니다. 그 약조물을 보는 순간에 유다는 자기의 잘못을 깨닫고 외칩니다. "그 아이가 나보다 옳다! 나의 아들 셀라를 그 아이와 결혼시켰어야 했는데"(창38:26)
다말이 때가 되어 몸을 풀게 되었는데 베레스와 세라라는 쌍둥이를 낳았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족보에 유다의 계보는 셀라로 이어지지 않고 베레스와 세라가 등장하고 그 중에 베레스를 통해서 계속 이어집니다. (마1:3) 유다는 다말에게서 베레스와 세라를 낳고, 베레스는 헤스론을 낳고, 헤스론은 람을 낳고,
믿음의 족장의 가정에서 일어난 이 부끄러운 사건이 도대체 무슨 의미가 있기에 성경에 기록되었을까요? 차라리 38장이 없었더라면 성경이 고상하게 보이지 않았을까요? 구속의 역사에 이런 오점이 필요합니까? 허물과 잘못이 많은 유다 보다 차라리 믿음도 좋고 윤리적을 깨끗하며 탁월한 삶을 살았던 요셉이 그리스도의 족보에 올라가야 맞지 않을까요? 굳이 유다의 가문을 하나님은 왕의 가문으로 삼고 다윗과 같은 위대한 왕이 태어나게 하셨을까요?
성경은 믿음의 족장들의 실수와 허물을 감추려고 애쓰지 않습니다. 저들의 믿음과 삶의 모습을 적나라하게 보여줌으로 부족한 우리로 하여금 용기를 주려고 한 것입니다. 그러면서 하나님의 은혜를 부각시키고 있습니다. 우리 역시 이 세상에 살면서 대부분 허물과 죄가 많습니다. 하나님의 선택 받은 자녀로 살지만 때로는 쓰러지고 넘어지기도 합니다. 유다처럼 육신의 정욕을 이기지 못하여 실수를 할 때도 있습니다. 다말처럼 인간적인 방법으로 억울함을 풀어보려고 위험을 무릎쓰기도 합니다. 그러나 구속의 역사에 동참한 성도들을 그런 실수가 있다고 잘못을 저지른다고 하나님께서 외면하고 버리지 않으십니다.
그럼에도 사랑을 거두지 않으시고 불쌍히 여기시고 은혜를 베푸십니다. 깨닫게 하시고 고쳐서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 귀하게 사용하십니다. 유다의 후손으로 그리스도가 이 땅에 오도록 하신 것처럼 연약하고 허물이 많은 우리에게 그리스도가 오셔서 크고 좋은 은혜를 풍성하게 베풀도록 하십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하나님께서 이처럼 놀라운 은혜를 베푸신 것은 유다 한 사람에게만 한정되지 않습니다. 마태복음 1장에 나오는 예수님의 족보를 보면 그 가운데 여인들이 여러 명 등장합니다. 다말이나 라합이나 룻 그리고 불의한 방법으로 다윗의 아내가 되었던 우리야의 아내 같은 사람들을 통해서 그리스도가 이 땅에 오셨습니다. 이것은 신약시대에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자녀들이 될 우리의 모습을 예표해 주고 있습니다. 얼룩졌던 유다를 통해서도 그리고 창녀로 변장하여 시아버지를 유혹한 다말과 기생이었던 라합과 룻과 같은 이방인들을 통해서도 하나님은 구속의 역사를 전개하십니다. 좋으신 우리 하나님을 찬양합시다.
그런데 우리는 여기서 유다가 외친 말에 주목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그 아이가 나보다 옳다!" 객관적으로 볼 때 유다와 다말 중에 누가 더 잘못한 것 같습니까? 유다의 잘못은 막내 아들 셀라가 다 컸는데도 며느리 다말과 계대결혼을 시키지 않은 것입니다. 그리고 다말이 얼굴을 가리고 창녀로 변장을 하여 며느리인줄을 모르고 그녀와 잠자리를 한 것입니다.
반면 다말은 의도적으로 유다의 아이를 임신을 하려고 얼굴을 가리고 창녀로 변장을 하여 적극적으로 시아버지를 유혹한 것입니다. 유다가 더 나쁩니까? 다말이 더 나쁩니까? 저는 유다도 잘못이 있지만 충분히 이해할 수도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두 아들이 모두 다말과 결혼해 젊은 나이에 죽었습니다. 유다 입장에서 '내 두 아들을 잡아 먹은 여자'라는 생각이 들지 않을까요? 아들들의 죄라는 생각보다 며느리에게 더 문제가 있다고 여겨지지 않을까요? 마지막 남은 아들 셀라를 다말과 결혼시켜 같이 살게 하였다가 또 죽는다면 대가 끊기는 것인데 주저하지 않을 사람이 있을까요?
그리고 아내가 죽고 없는 상황에 슬픔에 적어 있다가 유혹하는 창녀를 만나 그녀에게 들어간 것이 분명 옳은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당시 고대사회에서 혼자된 남자들에게 흔히 있는 일로 보여집니다. 이에 반해 다말은 의도적으로 창녀차림을 하고 남자를 유혹했습니다. 그것도 시아버지를 고의로, 어떻게 그런 엄청난 일을 생각했을까? 그런 일을 감히 시도할 수 있을까? 다말은 이해할 수도 없고 잘못이 더 크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유다는 다말이 보낸 물건들을 보며 "그가 나보다 옳다." 라고 말합니다. 우린 흔히 말합니다. "네가 잘못이 크잖아." "나도 잘못했지만 네가 더 많이 잘못했잖아." 상대방의 잘못만 크게 보입니다. 다른 사람의 잘못을 보느라고 나의 잘못은 보지 못합니다. 나의 잘못도 상대방이 원인제공을 했기 때문이라고 합리화시킵니다. 그런데 유다는 다말이 행한 엄청난 일을 보면서 "그가 나보다 옳다." 라고 말합니다. 다말이 왜 옳다는 것입니까?
이제까지 자신의 입장과 형편만 생각하고 행동하던 유다가 멈추어서 다말의 입장을 눈 여겨 생각해 본 것입니다. '다말이 왜 그렇게까지 할 수 밖에 없었을까?' '다말이 목숨을 걸고 그런 엄청난 일을 벌이도록 내가 사지로 몰지 않았을까?' 자신을 돌아보기 시작한 것입니다.
고대사회에서 여인은 아버지의 보호를 받아야 살 수 있습니다. 성장해서는 남편의 보호아래 행복하게 살 수 있습니다. 노년에는 자식의 보호가 절대적입니다. 아버지를 일찍 여의게 되면 불행할 수 밖에 없습니다. 남편이 일찍 죽으면 당연히 불행해집니다. 자식이 없이 늙으면 아무도 보호해주지 않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고아와 과부를 돌아보라고 하신 것입니다. 모든 희망이 사라진 채 보호받지 못하고 공급해주는 이도 없는 가운데 가난하고 외롭고 온갖 서러움을 당하며 위험에 노출된 불행하기 짝이 없는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렇게 불행하게 끝나고 마는 사람이 없게 하려고 불행한 여인들의 입장을 배려하여 하나님은 계대결혼의 제도를 정하신 것입니다.
그런데 다말의 처지가 그와 같습니다. 자식도 낳지 못한 채 남편은 죽고 친정으로 쫓겨나 아무 희망도 없이 살아가는 여인입니다. 실낱 같은 희망인 셀라가 장성했지만 시아버지가 자기 입장만 생각하고 친정으로 쫓아버린 후 다시 불러들이지 않습니다. 다말이 가만히 있으면 그대로 불행하게 끝나고 말 운명입니다.
이 땅에 한 번 왔다가 가는 인생인데 남편 잘못 만나 남편이 하나님 앞에 악하여 결혼하자마자 죽고 맙니다. 시동생과 결혼해 희망을 품어보는데 그도 역시 하나님 보시기에 악한 행동을 하다가 며칠 만에 죽습니다. 그렇지 않아도 괴로운데 시아버지는 자신의 잘못으로 오해하고 친정으로 쫓아버립니다. 이렇게 살다 죽으면 자식도 못 낳고 의미 없는 인생이 되고 불행하게 끝날 수 밖에 없으니 목숨을 걸고 엄청난 모험을 한 것입니다.
유다가 다말의 입장에서 문제를 바라보고 이해하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엄청난 행동을 용서합니다. 자신의 잘못으로 돌리고 스스로 책임집니다. 그래서 다말은 그토록 간절히 소원하고 낳기를 원하던 자녀를 한꺼번에 둘이나 출산하게 됩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허물이 많은 유다에게서 믿음을 보십니다. 하나님의 눈이 불쌍한 고아와 과부들에게 향하고 있음을 깨닫고 불행한 며느리를 불쌍히 여기고 그녀의 입장을 이해하고 수용하는 유다의 변화된 태도를 보시며 그의 믿음을 인정하십니다. 유다를 기뻐하시고 그의 후손을 통해서 어마어마한 복을 주십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다말의 믿음을 보십니다. 남자를 잘못 만나 불행하게 끝나고 말 운명에 처했으나, 그리고 오해 받고 미움 받으며 부당한 처사를 당해 억울하게 불임여성으로 끝날 상황에서 포기하지 않고 가문의 대를 이어가려는 집념으로 자신을 표현한 다말의 행위를 믿음으로 인정하십니다. 그녀를 당당하게 예수님의 족보에 이름을 올려 주십니다. 그녀가 낳은 아들이 위대한 왕의 조상이 되게 하십니다. 구원의 역사에 없어서는 안 되는 인물로 삼으심으로 영화롭게 하십니다.
오늘 우리도 믿음을 표현하는 중요한 방식으로 유다와 같이 말할 수 있어야 합니다. 따라 합시다. '그가 나보다 옳다.' '네가 나보다 옳다.' 완벽한 삶을 살아서 인정받지 못해도 괜찮습니다. 잘못을 종종 저지르는 연약함을 보여도 괜찮습니다. 그런 자신을 인정하고 다른 사람의 큰 잘못을 보면서도 "그래도 네가 나보다 옳다." 하며 이해하고 용서하며 수용하며 산다면 주님은 우리를 의롭게 보시며 믿음을 인정해 주십니다. 우릴 용서하시고 귀하게 쓰실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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